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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와 현대미술_이정구

James Chae 2012. 12. 15. 21:12

*이 글은 진흥아트홀 주최로 열린 세미나 "기독교와 현대미술"(2007.4.13)에서 발표된 것입니다.




기독교와 현대미술

교회와 교회사 측면에서

         


이 정구 (성공회대학교)





1. 기독교에서의이미지 담론 

2. 기독교미술과 교회미술 

3. 문자(말씀)와 시각이미지 

4. 기독교와 현대미술 

5. 키 치 

6. 맺는 말 


  


    

1. 기독교에서의 이미지 담론


 기독교(그리스도교)에서의 미술(시각이미지)에 관한 담론은 구약 십계명 율법으로 인해 금기시 되어오다가, 본격적인 담론은 726년 레오 3세에 의해 주도된 성화상에 관한 논쟁부터라고 할 수 있다. 이미지 중에서도 신(하나님,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이미지 제작은 금지되었지만 성인이나 성서내용을 주제로 한 이미지들은 주로 수도원을 통해 제작되고 교회와 일부 부유층에 보급되었다. 특히 성인들의 이미지에 기적사화까지 부가하여 보급한 이미지들은 숭배받기까지 이르렀고 이러한 이미지들의 경제적인 부가가치 때문에 이를 제작한 수도원들이 부요해지자, 수도원을 장악하기 위한 수도원(원장)과 교회(교황), 수도원과 왕(황제, 군주), 교회와 왕 사이의 권력싸움은 끝이지 않았다. 성 화상에 관한 신학적 논쟁은 크게 두 주장이 대립하였다. 결국 이미지라는 물질과 물성 자체에까지 숭배할 수밖에 없다는 우상타파적인 주장과, 이것은 물질에 숭배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지를 통해 성인들의 발자취를 환유함으로써 이를 바라보는 신자들의 신앙과 교육에 도움이 된다는 주장이었다. 결국 성 화상 논쟁은 그리스도론 논쟁으로 이어졌는데 예수 그리스도야 말로 하나님의 살아있는 성화상이라는 성 화상 지지자들의 주장이었다. 결국 이 논쟁은 11세기까지 이어지면서 동방교회에서는 이미지 자체에 숭배하는 것이 아니라 성인들의 영성과 예수의 말씀 같은 성서내용을 신앙적으로 환유하는 매체로 수용하였다. 이것을 통해 신앙을 고양시키며 성인들은 존경받아 마땅하다는 이유로 교회내부에 성인들의 도상과 성서내용을 주제로 한 성화를 설치 할 수 있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여전히 교회 안에 입체적인 조형물 설치는 금지하고 있다. 서방 가톨릭교회는 동방교회와 같은 이미지 논쟁을 거치지 않으면서도 교회의 필요에 따라 종교화나 조형물을 신앙을 고양시키는 교육과 장식용으로 사용하고 있다. 종교화는 물론  예수 십자가상을 비롯하여 피에타를 위시한 성모 입체조형물 설치도 허용하고 있다. 개신교회는 16세기 종교개혁을 통해 말씀 중심의 교리를 이유로 이미지를 우상숭배이며 말씀을 흩뜨리는 반기독교적인 매체로 규정짓고 교회 안에서의 사용을 전면적으로 금지하였다. 그러나 정작 루터는 자신의 종교개혁을 효과적으로 수행하기 위해 크라나흐를 통해 자신의 초상화를 유포시켰으며 시각예술에 대해 어느 정도 우호적이었으나 칼뱅은 교회 안에서 이미지 사용을 금지하였고 급진주의자였던 칼 쉬타트는 교회 안에 있던 모든 이미지를 파괴하기까지 하였다. 이 전통은 현대 개신교회에 까지 이르렀는데 소수 진보적인 현대 개신교회는 말씀 중심의 교리와 성화교리를 크게 방해하지 않는 한 신앙과 교육에 도움이 될 수 있는 종교화에 대하여 우호적인 신학적 입장을 취하고 있으며 교회 안에 설치하기도 한다. 대중적으로 사용하고 있는 이미지로서는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는 예수 이미지와 예쁜 동산에서 어린이들에게 말씀을 전해주는 인자한 예수 이미지를 들 수 있다. 


현대 동방교회는 전통적인 아이콘화 이외에 특별한 다른 종교화를 교회 안에 설치하지 않으며 가톨릭교회는 주로 예수 십자상과 성모상, 그리고 색유리를 교회 안에 설치한다. 가톨릭교회는 성 미술에 관한 위원회를 상설하여 장려와 검열을 하는데, 성체 함, 성작, 색유리, 십사처, 예수 상, 성모 상, 제대를 비롯한 성 가구와 기타 종교화에 이르기까지 가톨릭 작가들이 다양한 작품을 제작하고 있으며 해마다 가톨릭 미술인협회에서 전시회를 하고 있다. 이에 비하여 개신교회 미술인 협회는 그 활동이 미미한 편이다. 해마다 전시회를 하고는 있지만 교회 안에서 사용할 수 있는 품목이 성 가구 외에는 제한되어있기 때문에 대체로 성서 내용을 주제로 한 종교화와 서예가 그 주종을 이루고 있다.  



2. 기독교미술과 교회미술 


 넓게 정의한다면 교회에서 사용하지 않더라도 기독교를 내용으로 담은 미술을 기독교 미술이라고 할 수 있으며, 교회에서 사용하는 미술 즉, 색유리, 제단화, 십사처, 십자가, 성모상 등과 같이 전례와 교육을 위한 것을 교회미술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교회미술은 기독교 미술 안에 포함 될 수 있다. 기독교 신앙인이 아닌 작가가 기독교를 주제로 한 작품을 제작했을 때 이것을 기독교 미술이라고 할 수 있는지에 관한 논의도 있다. 비록 비 신앙인의 작품이라고 할지라도 관객이 그 작품을 통해 기독교적 감흥을 받는다면 그것은 기독교 미술이라고 할 수 있다. 작가가 신심이 깊은 기독교 신자이면서 기독교를 주제로 한 미술을 제작 했을지라도, 그 작품이 관객들에게 어떤 감흥도 주지 못한다면 작가가 제도 안에서 활동하면서 신념으로 전시한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토론할 여지도 없이 작품범주에 들지 않을 것이다. 


초기 기독교박해시대에는 기독교를 상징하는 여러 기호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는데 이 기호들에 의미 층이 두터워지면서 상징을 부여한 도상이 되기도 했다. 기독교를 상징하는 물고기 형태나 마리아를 상징하는 백합, 영혼불멸을 상징하는 공작새 등과 같은 다양한 이미지에 이와 같은 기독교적인 의미를 부여하고 제작하여 이것을 기호 혹은 상징화하여 예배와 교육을 위한 매체나 장식이나 표지로 사용하여왔다. 가톨릭이나 개신교에 관계없이 현대교회들은 전통적으로 내려오고 있는 이러한 상징적 도상들을 큰 교리적 검열 없이 다양한 용도로 사용하고 있다. 그러나 도상학자들에 의해 이미 밝혀진 이미지들 이외에 현대에 와서 새롭게 창작하여 사용하는 상징 도상은 없다. 이러한 도상들을 원형으로 한 다양한 형태로 디자인하여 사용하고 있을 뿐이다. 새로운 기독교 도상을 창조한다는 것에는 여러 가지 어려움이 뒤따른다. 우선 누군가에 의해 새롭게 창작된 도상에 의미를 부여하고 그것을 통해 상징적인 공감대를 창출하여 권위를 부여할 것인지는 쉽지 않다. 새롭게 창출된 도상을 많은 교회와 신자들의 일정기간 연속적인 사용의 결과로써 시간이 지남에 따라 기독교 안에서 자연스럽게 공감대가 형성되어야 그것은 가까스로 유사한 도상으로 자리하게 된다. 이것도 일정기간 사용이 단절되면 이러한 도상은 사멸되기 쉽다. 최근 해방신학과 민중신학에 힘입어 정치적으로 불안정한 국가에서 체 게바라 이미지와 유사한 혁명가 청년 예수 이미지들이 창작되어 교회운동권에서 사용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이 후대에서도 도상으로 자리매김 할 수 있을 것인지는 미지수이다. 유럽 중세기에 교회에서 사용하던 여러 가지 상징과 기호들은 그 당대 사람들에게는 일상 언어와 같았으나, 종교개혁 이후 그 의미전승이 단절되면서 현대인들은 중세의 기호와 도상을 그 당대 사람들처럼 이해하지 못한다. 도상은 그 사회의 상황에 따라 한시적인 도상으로 사용되다가 사멸한 것도 있고, 오늘 까지 전해 내려오는 도상도 있다. 전통적인 도상일지라도 시대에 적절하게 새롭게 디자인될 수 있다. 도상의 재창조는 지속되어야하며 이러한 작업은 그 시대의 작가와 신학자들의 몫일 수 있다. 


종교화만 창작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도상도 그 시대의 산물인 만큼 오늘날에도 창조될 수 있으며 이러한 창출을 통해 기독교의 선교 진흥은 물론, 기독교에 대한 다양한 시각적 표현을 통해 신앙과 영성, 교육을 보다 심도 있게 할 수 있으며 기독교인들의 미적 안목도 고양시킬 수 있는 것이다. 천문학적인 금액의 거대한 교회건물을 축조할지라도 값싼 미술품(키치)들이 그 공간에 자리하게 된다면 그 예배는 싸구려 예배가 되기 십상이다. 



3. 문자(말씀)와 시각이미지 


 이미지도 소통하는 언어들 중의 하나이며, 시각 이미지는 문자언어의 한계를 극복하거나 상상력과 감성을 문자보다 한층 더 환기시킬 수 있는 매체일 수 있다. 말씀 중심이란 문자 언어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시각 이미지가 우상이라고 한다면, 문자도 우상일 수 있다. 무한한 하나님을 한정적인 언어에 가두거나 무한함을 문자매체만으로 표현할 수는 없는 것이다. 찬양과 경배를 위해 문자와 음악을 활용하면서도 시각 이미지에 인색한 기독교는 처음부터 문맹이 많았던 시대에 읽고 듣는 것보다 본다는 것에 더 민감했다고 할 수 있다.


현상학자 메를로 퐁티는 사유(지각)는 보는 것에서 부터 출발한다고 주장한 바 있다. 또 시각이 청각보다 더 자극적이며 즉각적이라는 설도 타당하지 않다. 상황에 따라 청각이 한층 더 섬세하며 자극적일 수 있는 것이다. 종교개혁자들은 중세의 시각문화(성당 정문 위에 최후의 심판이 부조된 팀파눔, 종교화)가 상상력을 고양시켜 천국에 대한 환상과 지옥에 대한 공포가 귀를 통한 말씀보다 더욱 심하게 각인시키는 것을 우려하여 모든 시각이미지를 우상으로 치부하고 교조적이며 직설적인 말씀중심으로 강하게 전향했을 가능성도 있다. 실제로 중세교회는 이러한 이미지들을 이용하여 다수가 문맹이었던 신자들을 신앙적으로 양육하는 반면에, 상황에 따라 이미지를 통해 공포심도 유발시켜 구속하고 감시했다. 시각 이미지는 상상력이 부족한 사람들에게는 상상력을 고양시키는 힘이 있지만, 눈으로 본 것 이상의 상상력을 유발시키는 힘은 부족하다. 그러나 문자를 통한 상상력의 범주는 사람의 능력에 따라 무한할 수 있다. 특히 소설이나 시, 음악은 그림이나 영화와 같은 시각이미지 보다 더 큰 상상력을 유발하기도 한다. 플라톤은 예술가 중에서도 특히 시인들이 아테네의 젊은 청년들에게 상상력을 불어넣어 이들을 나약하게 만든다고 비난하였다. 종교개혁자들의 말씀은 소설이나 시와는 성질이 다르게 가능한 상상력을 배제시킨 규범적이며 직설적인 절제된 웅변 같은 설교를 통해 자신들의 주장을 강하게 관철하고자 했다.


루터는 예배에서 제단화 같은 시각예술을 허용하고 교육적으로 활용하고 시각예술도 하나님을 찬양하고 감사드리는 표현이며 동시에 말씀의 연장으로 간주하였다. 같은 종교개혁자라고 할지라도 특히 칼쉬타트는 1521-22 사이에 비텐베르크를 중심으로 성 화상을 파괴하였는데 교회 안에 성상을 비치하는 것은 십계명의 제 1계명을 위배하는 것이며 제단에 새겨진 우상들도 유해하고 사악한 것이기 때문에 이러한 것들을 파괴하는 것은 선하며 합당하고 찬양받을 일이라고 하였다. 루터의 육화교리는 영성이란 물질과 분리할 수 없으며 은총의 수단으로써 시각예술은 복음을 실어 나르는 도구였다. 즉, 그림과 말씀을 상호 보완함으로써 더 효과적으로 복음을 선포하고자 하였다. 결국 종교개혁자들이 성 화상의 효용성에 관해 주창한 것은 중세 말기 성 화상에 매달리며 기적과 은총, 기적을 바라던 개인적인 기복신앙을 타파하고 말씀 중심으로 온전히 서기 위함 이었다고 할 수 있다. 종교개혁시기에는 이미지에 대한 담론은 신학적이기 보다는 중세말엽에 극심했던 성인숭배와 유골숭배, 성 화상숭배를 비롯한 성지순례까지 미신적이며 기복적으로 왜곡시킨 가톨릭교회에 대한 비판과 믿음을 바로 세우고자했던 저항으로서 성 화상이 수난을 당했다고 할 수 있다. 이미지에 관한 종교개혁자들의 말씀중심의 신학은 오늘날까지 개신교회가 시각 이미지들에 관해 신학적으로 불편한 전통을 갖고 있는 것이다.  



4. 기독교와 현대미술


 감각적인 것을 그다지 바람직하게 여기지 않았던 기독교의 사상적 전통에서 볼 때 시각 이미지(예술)는 종교를 세속화하고 본질을 왜곡시키는 것이며, 우상숭배와 기복주의로 흐르게 한 주범으로 간주되었다. 무한한 하나님에게 어떻게 명사를 붙일 수 있는지에 대한 보편논쟁은 아름다움(예술)과 성스러움(종교)을 분리시켰다. 예술이란 매체로는 하나님의 인성 밖에는 표현할 수 없다는 것이다. 현대에 와서 하나님은 자유나 존재로 대체되기 시작했다. 서유럽에서는 아이콘을 제외한 그 밖의 제단화와 성당을 장식하는 종교화와 같은 기독교 내용을 담은 회화와 조각상들은 르네상스와 종교개혁시기를 지나면서 점차 시들해졌다. 현대에 이르러 종교화 제작만을 고집하는 특별한 작가들을 제외하면, 고갱과 고호, 루오, 피카소같은 작가들의 종교적인 주제의 작품에서도 볼 수 있듯이, 세속적인 화가와 종교적인 화가의 구분은 사라졌다. 말레비치 같은 러시아 아이콘 전통을 기반으로 작품 활동을 하는 작가도 있지만 현대미술에 와서는 기독교 도상적인 영향은 약화되었지만 기독교를 내용으로 한 종교화는 꾸준히 제작되고 있다.


 현대예술은 세기 초의 다다이즘, 추상미술, 개념미술, 팝아트, 비디오 아트에 이르기까지 그동안 인간이 예술에 관해 경험하고 구현해온 모든 것의 요약 판이라고 할 수 있다. 현대미술은 세기 말과 초, 전쟁의 혼란 속에서 다다이즘을 태동시켰고, 고갱이나 피카소와 같은 작가들은 서구문명의 영향을 가장 적게 받아 원시적이라고 일컫는 원시미술에서 자신들의 작품을 착안하기도 했으며, 민중미술작가들은 한 국가나 사회의 정치경제적 상황을 그림으로 고발했으며, 백남준은 현대의 기술문명을 최대한 활용하는 작품을 제작하였다. 단순한 정물화나 풍경화라고 할지라도 단순히 고전적인 것만을 답습하는 작가는 퍽 드물다. 현대기술문명을 이용한 기법이든 고전적인 표현기법이든 그 안에는 작가만의 독특한 아우라가 있기 마련이다. 일반적인 예술가(화가)들은 자신의 독창적인 창작 작업을 위해 전통적인 기법에 자신만의 표현기법도 개발하고, 그 안에 시대를 아우르는 자신의 철학을 구현하고자 전력을 한다. 


 기독교 신학에서는 신의 죽음과 세속화 신학, 해방신학, 민중신학, 최근에는 포스트모던 신학, 탈식민주의 신학까지 경험하고 있다. 이 많은 경험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기독교 신학은 이미지에 관한 신학적인 정리를 하지 못하고 있으며 십계명이 사멸하지 않고 문자주의에 매어있는 교단일수록 시각이미지에 관해 아주 쉽게 정리를 하고 부동한 입장을 취하고 있는 듯하다. 그러나 교회 안에 십자가를 비롯한 기타 도상과 상징물을 설치하지 않을 뿐, 정작 이런 교단 일수록 교회 안에 스크린을 설치하고, 자신들의 전도와 선교를 위한 목적으로 시각이미지를 취사선택하여 활용하고 있다. 기독교에서의 시각이미지에 관한 담론은 반복적인 진행만 있을 뿐 영원히 정리할 수 없는 주제가 되고 말았다. 

최근 독일 신학자 테오 순더마이어는 ‘미술과 신학’ 이라는 제목으로 한국의 민중미술과 제3세계미술을 포함한 서적을 출판하였다. 서양에서는 기독교(종교)와 미술에 관한 연구는 여전히 활발하지만 국내에서는 이에 관한 전문적인 연구를 하는 학자는 전무한 상태이다. 이것은 국내에 기독교 작가의 활동이 미약하거나, 아니면 이들의 작품이 신학에 큰 영향을 주지 못하고 있다는 의미도 있다. 역으로 국내 개신교 신학자들이 미술에 관심이 적고 작가들에게 신학적으로 미치는 영향도 없다는 의미도 된다. 미술이 예배와 선교를 위해 소명 받은 도구로써 이것을 통해 하나님을 더욱 찬양하며 진리를 드러내는 것이라는 진부한 해명이 더 이상 필요한 시대가 아니다.


국내 기독교작가들은 평소 일반 작품 활동을 하다가 기독교 미술인협회에서 작품을 모집할 때 작품을 급히 제작하여 출품하는 경우가 다반사이다. 일반 작품 활동을 해도 작가의 경제적인 대책이 마련되지 못하는 상황에서 수요가 적은 종교화를 전문으로 해서는 경제가 더욱 궁색해 질 수도 있다. 수입이 안정된 미술대학 교수 신분으로써 종교화를 제작하는 경우도 있으며, 전례를 중시하는 가톨릭교회같이 성 미술이 지속적으로 필요한 곳으로 부터 작품의뢰를 받아 수입의 많은 부분을 교회에 의지하며 어느 일반 작가들보다도 윤택한 생활을 하는 작가들도 있다. 모든 시장논리가 그렇듯이 여기에도 작가들과 수요자들 사이에 정치적인 행위가 따를 수밖에 없다. 


지금은 시각 이미지에 관한 이천년 역사의 신학적 해명이나 이론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좋은 종교화가 창출될 수 있도록 좋은 작가를 양성하느냐에 관심을 기우려야 한다. ‘좋은’이라는 추상적인 단어 안에는 다양한 의미가 들어있다. 쟈크 마리땡은 좋은 종교화를 창출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먼저 작가가 좋은 기독자가 되어야 한다고 했다. 기독교인이 아닌 작가가 기독교를 주제로 한 작품을 창작할 수 있지만, 그 안에는 하나님을 체험한 아우라가 없기 때문에 작품의 형태와 기술만 있을 수밖에 없다. 비록 표현역량이 미흡하다 할지라도 작가가 자신의 깊은 영성과 신심으로 표현한 작품이라면 감동을 주기 마련이다. 작가와 작품의 자질도 문제려니와 성 미술을 수요로 하는 교회와 신자들의 종교예술품에 관한 수준이 더 큰 문제이다. 



5. 키 치


 감각적인 내용이 지배적인 형태와 색을 갖는 미술로 종교적 영성을 표현하기란 쉽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교회는 사실화 보다는 덜 형태적인 추상화는 거의 요구하지 않는다. 색유리조차도 형태가 분명하기를 원한다. 가장 흔하게 공급되어 많은 교회와 신자들의 집에 한 점씩 있는 ‘겟세마네에서 기도하시는 예수님’ 그림이 그 대표적이다. 이것을 주제로 한 그림은 헤아릴 수 없이 많지만, 대부분 사실주의적 표현이며 그 배경과 예수 이미지, 작품의 색감이나 질감이 키치를 벗어나지 않는다. 종교화를 통해 영적인 감흥을 받기 보다는 그 안에 그려진 내용을 더 중시한다. 특히 한국 개신교회와 신자들이 이러한 종류의 그림들을 선호하는 것인지 추정하기란 어렵지 않다. 우선 현대인으로서 습득하게 되는 교양으로서의 미술에 관한 이해와 지식수준이 현저히 낮다는 것이다. 지식수준이 높다는 사람도 이런 부류의 그림에 쉽게 감동받기 일 수다. 또 소수의 신자들만 미술관이나 갤러리를 찾는 실정이다. 이러한 현상은 경제수준과 비례할 수도 있겠지만, 경제가 나아졌다고 해도 미술관을 가기보다는 영화관을 가거나 여행하기를 더 선호한다. 미술에 관한 지식이 부족하기 때문에 미술은 난해한 것이라는 편견이 강하고 또 어려우니 이해하려는 노력을 하지 않으며, 미술관은 이와 관련된 작가와 평론가, 수집가와 투기하는 사람들이 다니는 특별한 장소로 오해한다. 여기에는 국내의 입시위주의 초중고 교과와 교육방법에 문제가 있다. 교육수준이 높아졌을지라도 이 영향이 종교미술을 감상하는 것 까지 미치려면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작가들도 신자들이 선호하는 성질의 그림을 잘 알고 있으며, 이에 걸 맞는 수준의 작품제작을 의뢰받게 되면 수입문제 때문에 거절하지 못하는 작가들도 있다. 그 대표적인 것이 교회달력그림이다. 해마다 발행되는 다양한 달력그림들의 질이 향상되고는 있지만 여전히 키치수준이다. 종교자체가 키치는 아닐지라도 전례를 포함하여 기복적이며 미신적인 종교행위는 상황적 키치일 수 있다. 여기에 키치적인 종교미술은 이러한 종교행위를 더 키치화 할 뿐이다. 교회는 이러한 키치 이미지를 의도적이든 아니든 간에 끝없이 이용하여왔다. 우리 정서에 맞지 않는 스페인, 이탈리아에서 직수입해 온 키치 성물들이 오늘 한국 교회와 신자들의 집안을 장식하고 있다. 성물의 미적 가치여부를 넘어서서 교회 제단이나 구내에 안치된 성물과, 사제로 부터 축성 받은 성물은 거의 미신에 가까우리만큼 신자들에게 우상으로 작용을 한다. 이러한 성물을 통해 신자들은 양육되고 있다. 오랜 기간 눈으로 체험한 것이 아닌 다른 작품이 그 자리를 대신할 때 그 물건은 작품이 아니라 이교도가 교회에 침투한 것처럼 여긴다. 교회에 한층 고양된 좋은 성물과 종교화를 안치하기 위해서는 많은 설득과 교회법에 가까운 복잡한 관습적인 과정이 필요하다. 교회미술을 포함한 기독교 미술의 향상을 위해서 교회가 먼저 질적인 향상을 해야 한다. 이를 위해 교회에 가장 영향력이 있는 성직자와 교회임직(위원, 장로 집사)들의 종교 이미지에 대한 바른 이해와 미적 안목을 고취시킬 수 있는 방안이 필요하다. 최근 현대미술관회를 비롯하여 다수의 사설 갤러리에서 일반인을 대상으로 하는 미술에 관한 교육과정이 설치되어있다. 이러한 기관을 활용하는 것도 한 방법일 것이며, 교회가 자기증식을 위한 부흥회보다는 이러한 교양프로그램을 운영하는 것도 한 방안이다. 기업이 작가를 후원하는 메세나 운동같이 교회 기관이 작가를 후원할 수도 있으며, 소장가나 작가들이 교회에 작품을 기증할 때는 이 작품이 교회에 적절한지에 대한 검열은 물론, 기증받은 작품이 교회에서 더 이상 불필요할 경우 교회에서 철거할 수 있다는 조건이 있어야한다. 한편 민중미술이 판화와 같은 매체를 활용하여 작품을 대중화하 하고 누구나 작품을 제작할 수 있는 운동을 펼쳤듯이 교회도 종교화를 대중화하고 신자들이 체험하고 느낀 것을 쉽게 표현할 수 있는 운동을 펼쳐나가면 좋을 것이다.  



6. 맺는 말


 간단하지만 이미지에 관한 교회사적인 담론을 살펴보았지만 여전히 교회 안에서의 이미지에 관한 논의는 오리무중이다. 정교회의 아이콘과 가톨릭의 성 화상과 색유리를 포함한 성물을 논의대상에서 제외하고, 기독교를 주제로 한 개신교의 종교작품들의 미적인 입지는 일반작품들에 비해 여전히 키치적인 수준을 크게 넘지 못하고 있다. 같은 작가의 머리와 손에서 창작되는 것이 표현 기법에서도 크게 다를 수 없겠지만 훌륭한 일반작가가 종교작품을 제작하면 왜 키치적으로 하는 것인지에 관한 논의는 또 다른 논쟁을 일으킬 수 있다. 작품을 보는 관점에 따라 그 평가는 다를 수 있다. 이것은 작가들이 기독교 작품이란 주로 성서내용을 표현해야 한다는 좁은 이해와, 작가들이 대개 성서내용을 체험하지 못하고 표현했을 때 작가의 정신성이 작품에 드러나기 때문일 것이다. 또 대부분의 신자들이 겟세마네에서 기도하는 예수 이미지와 같은 사실화를 그 어느 장르보다도 더 선호한다는 것도 그 이유일 것이다. 


1970년대 풍미했던 민중신학과 견줄 수 있는 민중미술, 그리고 남미의 해방신학과 멕시코 벽화운동이 그 선례가 되듯이 교회와 신학은 시대정신을 담보해야한다. 더구나 이미지가 인간의식 발전과정에 있어서 사상보다 앞선다는 스미스의 주장을 수용한다면, 종교작품은 오히려 교회와 신학보다 그 시대정신을 더 먼저 반영해야 할 책무가 있다. 아이콘 역시 시대에 적절한 상징적인 도상으로 끝없이 계발되어 신자들에게 종교에 대한 더 풍부한 상상력을 환기시킬 수 있어야 한다. 말과 글, 소리로만 담을 수 없는 것을 시각적인 매체를 통해 하나님을 찬양하고 은혜를 드러내며, 종교작품을 통해 예언자적인 주장을 할 수 있어야 한다. 


서양 문학계에서는 ‘심미적 이성’이라는 모순된 용어를 사용한 적 있다. 중세 스콜라신학은 신앙과 이성의 간극을 좁히고자 했다. 교회에서의 이미지에 관한 이론적인 담론은 오직 말씀으로만이 아니라 시각과도 상호보완 할 수 있는 길을 모색해야 한다. 교회는 작가를 통해 좋은 종교작품이 창출될 수 있도록 함과 동시에 신자들이 좋은 작품을 소장하고 감상하며 제작할 수 있는 대중운동도 함께 펼쳐가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