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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린 그림 또는 만든 그림?!_김혜주

James Chae 2011. 9. 2. 10:32

 

 

“그린 그림 또는 만든 그림?!”_김혜주
존재와 생명의 흥이 살아있는 김혜주의 작품세계

 

 

채창완

 

 

 


<냉이꽃과나비>, 12호, oil on canvas, 2005

 

   그림은 ‘그리는’(혹은 그려지는) 것일까 아니면 ‘만드는’(혹은 만들어지는) 것일까? 우스운 질문 같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면 쉽게 답이 나질 않는다. 아마도 유치원 아이들 같으면 “그리는 거예요”라고 자신 있게 답할 법하다. 그러나 현대미술의 많은 작품들을 대하다 보면 나 또한 많은 혼란에 빠지게 된다. 흔히 ‘그린다’는 표현은 현대미술에서는 찾아보기 힘들어 그런 작품들은 소위 ‘촌스럽게(?)’고 ‘진부해’ 보이기 까지 한다. 전시장이 많이 모여있는 인사동의 전시장을 돌아다니다 보면 ‘그린’ 작품들 보다 ‘제작’된 작품들이 더 많다는 것을 쉽게 깨달을 것이다. 특히 젊은 작가들에게서 이러한 성향이 더욱 뚜렷하다. ‘레디메이드(ready-made)’ 또는 ‘오브제(objet)’ , ‘아상블라쥬(assemblage)’, ‘비디오 아트(video art)’ 등의 기법이 적용되면서 미술은 언제부터인가 ‘그리는 것’에 게을러진(?) 듯 하다. ‘그린다’는 개념보다 오히려 ‘제작한다’, ‘만들다’는 표현이 더 어울릴 작품들이 ‘생산’된다. 대상의 무한한 복제가 가능해져 마치 공장에서 제품을 찍어내듯 작품들은 ‘제작’ 공정을 거치며 산업사회의 특징인 ‘규격화’, ‘정형화’를 그대로 보여준다. 물론 여기에 자본의 절대적인 후원이 더해져야 한다. 작가는 마치 ‘그리는 자’가 아니라 제품을 생산해내는 ‘제작자’에 더 가까워 보인다. 이런 기계화된 작업들을 대하다 보면 어느새 나 또한 ‘물화’되어 간다는 느낌을 받을 때가 많다. 여기서 나는 현대미술의 이러한 경향을 비판하고자 하는 것이 아님을 미리 밝힌다. 표현의 관점에서 보면 이러한 현대미술의 경향은 미술의 표현의 영역을 무한정 넓힌 것이 사실이기 때문이다. 내가 여기서 문제시 하는 것은 ‘그림’에 대한 존재론적 질문이다. 아니 더 상세히 말하자면 그림의 ‘존재의 형식’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이다.

 

 

 
<겨울잠 깨운 봄 풀>, 100F, 2005

 

 

    마이스터 엑카르트는 존재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존재를 갈망하지 못할 만큼 하찮은 미물은 없습니다. 나무에서 떨어진 송충이 조차도 자신의 존재를 유지하기 위하여 다시 나무줄기를 타고 높은 곳으로 기어오릅니다. 이토록 존재는 고귀합니다.” 하느님 이외에 누구도 존재를 줄 수 없을 정도로 존재는 귀하고 하느님과 연결되어 있다고 엑카르트는 설명한다. 이 세상의 모든 존재들은 나름대로의 귀중한 가치가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존재마다 자시에게 맞는 각각 고유한 ‘존재의 형식’을 가지게 마련이다. 아무것도 없는 바탕에 ‘점’, ‘선’ 등이 그어지고, 찍어지면서 그림은 이 세상에 ‘존재’하게 되며, ‘그려진 그 상태’를 ‘존재의 형식’으로 갖는다. 아마도 태초의 그림은 그렇게 시작되었을 것이다. 태초의 인간이 무엇인가를 들고(나뭇가지나, 자신의 손가락, 또는 타고 남은 나무의 숯 등) 땅 바닥이나 바위 또는 동굴 벽에 최초의 ‘선’을 긋는 순간 인간은 새롭게 탄생한 그림이란 ‘존재’에 경이감을 느꼈을 것이다. 그 그은 선들과 점 등을 제대로 통제할 수 있게 되면서 태초의 인간들은 어떤 ‘형상’들을 그렸을 것이 분명하다. 그들은 자신들이 그린 그림과 그 그려진 대상 간에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으로 믿었다. 미술사가 곰브리치는 고대 동굴벽화를 설명하면서 이러한 관계를 주술적으로 설명한바 있다. 그림의 존재는 그들에게 사냥을 위한 주술이었으며 그들의 삶과 나뉠 수 없는 그 무엇이었다. 아무튼 이 세상에서 그림이 존재하게 된 것은 분명 ‘그리는’ 행위에 의한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그림은 ‘그린다’는 존재의 형식을 분명히 갖고 있다 하겠다.

 


 
<텀블링하는 아이들>, 52.6x45cm,

 

 

   “그림은 그리는 것이다”라는 말을 하고 싶어 이렇게 장황한 설명을 했다. (이는 그림의 존재론적인 관점에서 말하는 것이고 내 개인적 취향이 가미된 것이다. 그림이 반드시 ‘그려져야’ 만 하는 것이 아님을 독자들은 숙지하기 바란다. 그림은 ‘만들어질’ 수도 ‘그려질’ 수도 있다. 그것은 현대미술이 갖는 형식과 기법의 문제이다. 부디 혼동 없으시길……) ‘그린다는 행위’에는 붓이나 펜 등이 사용되는데 여기에는 늘 그리는 자의 손의 움직임과 그 기운이 사용한 도구에 따라 다르게 흔적으로 화면 위에 남게 마련이다. 그래서 우리네 한국화에서도 붓 놀림에 의해 표현되는 ‘기운생동氣韻生動’을 회화에서 매우 중요시했다. 그 붓 놀림에는 작가의 심상이 그대로 반영되게 마련이다.

 

 

 
<새와 코뿔소>, 52.6x45cm

 

 

   내가 오늘 소개하는 김혜주의 작품은 이러한 ‘붓놀림’의 재미로 가득하다. 그의 그림은 ‘그렸다’는 느낌을 강렬하게 전해준다. 여러 붓 놀림이 겹치고 겹쳐져서 화면에 가득한 밀도를 만들어낸다. 그 한 획, 한 획 그어진 ‘붓자국’은 작가의 작업의 전 과정을 상상하게 만들 정도로 ‘시간의 흔적’을 남긴다. 그렇다고 그의 작품이 시간에 매인 것은 아니다. 엑카르트가 말한 대로 “시간에 매인 것은 무엇이든지 죽게 마련”이기 때문이다. 그의 작품은 시간을 흔적으로 남길 뿐 그 과거에 얽매이는 것이 아니다. 그냥 흘려 보낸 것이다. 그리고 현재로 그 시간들은 또다시 흘러 들어온다. 그래서 그의 작품은 정체되어 있지 않고 계속해서 ‘흐른다’. 과거로 그리고 미래로……물론 현재를 관통하면서 말이다.

 

 

 
<숲을 닮은 고양이>,oil on canvas, 20F, 2004

 

 

   그의 ‘붓놀림’과 ‘붓자국’에서 느껴지는 것은 ‘시간’뿐만 아니라 ‘생명’도 있다. 엑카르트의 말을 상기해보자. “한낱 돌일지라도 존재를 가지고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죽은 것을 살리고, 죽음을 생명으로 변화시키는 대단히 강력한 형식의 생명입니다.” 에카르트가 존재와 생명을 연결시키는 접점에서 김혜주의 작품은 분명히 서있다. 그의 그림의 존재가 ‘붓자국’에 의해 결국 ‘생명’이라는 ‘존재의 형식’을 드러낸다. 한낱 돌일지라도 존재를 가지면 죽은 것을 살린다고 했는데 하물며 작가의 공들인 그림은 어떠하겠는가? 그것에는 ‘에너지’가 분명 넘쳐난다. 작품의 제작 과정에서 작가가 느꼈을 ‘흥(興)’이 ‘붓놀림’을 통해 화면 위에 고스란히 새겨졌다. 그 ‘흥’은 생명의 즐거움이다. 창조영성에서 말하는 ‘놀이’ 또는 ‘축제’가 이 생명의 ‘흥’과 관련한다. 나는 김혜주 작가가 자신의 작업을 즐겼다고 말할 수 있다. 그의 작업의 ‘붓의 흔적’들은 이를 고스란히 말해준다. 작품에서 보여지는 ‘기린’, ‘곰’, ‘코뿔소’ 등의 이미지는 작가가 아프리카의 케냐를 여행하며 느꼈고 그의 기억에 각인되었던 것들이다. 그 기억들은 이미 시간적 간격을 넘어 현재에 존재한다. ‘나무’와 ‘나뭇잎’, ‘나뭇가지’ 등이 동물들의 이미지와 얽혀 어떤 것이 나무이고 어떤 것이 동물인지 구별이 모호하다. 모든 피조물의 존재의 근원이 하나라면 이는 당연한 결과이다. “존재 안에서 대립은 영원하지 않습니다” 라고 엑카르트는 말한다. 그 존재의 근원에서 모든 만물은 하나가 되기 때문이다.

 

 

 
<쉬어가세요>

 

 

   김혜주의 작품은 “그림은 그리는 거야” 라는 메시지를 강하게 담고 있다. 그 천진한 ‘손놀림과 붓자국’은 마치 아이들의 것을 연상케 한다. ‘흥’과 ‘생명력’이 넘쳐 보는 이로 하여금 잠시 동심에 빠지게도 한다. 많은 미술작품의 ‘제작물’ 홍수 속에서 손으로 작업하는 사람을 만난다는 것은 정말 색다른 기쁨이다. 전시장을 방문할 기회가 있다면 ‘손으로 그린’ 작품들을 유심히 보기 바란다. 처음에는 멀리서 그림을 보고, 또 가까이 다가가서 그림을 봐보라. 멀리서는 보이지 않던 ‘붓자국’들이 가까이 다가가며 눈에 들어오면서 또 다른 감흥을 받을 수 있을 거다. 더 예민한 사람들은 그 순간 작가의 숨결(?)까지도 그 속에서 느낄지 모른다. 그러한 좋은 작품을 감상하기 위해서는 결국 발품을 팔아야 한다. 인터넷으로 안방에서 보는 작품은 감상에 한계가 있다. 사진 만으로 이러한 느낌을 받는다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작품의 감상에는 반드시 ‘아우라(Aura)’가 있어야 한다. 전시 공간과 조명, 그리고 그에 어울리는 적절한 작품 디스플에이에 의한 종합적인 분위기가 요구된다. 작품이 이러한 외적인 요소들과 어우러지면서 작품은 묘한 ‘아우라’를 풍긴다. 그때 느끼는 감흥이 전시 관람의 묘미이다. 이 글을 읽는 많은 분들이 전시장을 찾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기를 ……

 

 

 
<자유한 비행>, 72.7x59c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