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를 위하여 종이 울리나”_2025.1.29. 다해_설명절 별세기념성찬례
2025.1.29. 다해_설명절 별세기념성찬례
민수 6:22-27 / 시편 89:1-2, 11-16 / 야고 4:13-17 / 마태 6:19-21, 25-34
“누구를 위하여 종이 울리나”
채야고보 신부 / 대한성공회 제주우정교회, Artist
종소리는 자신을 위해 울린다고 생각하는 그 사람을 위해 울린다. 종소리는 다시 멈추어도, 그러한 계기가 그의 마음을 움직인 순간부터 그는 하느님과 일치되는 것이다. 해가 떠오를 때 해를 향해 눈을 들지 않을 자가 있겠는가? 혜성이 작열하는데 누가 그것으로부터 눈길을 돌리겠는가? 무슨 일 때문이든, 종소리가 울리는데 누가 그 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겠는가? 자신의 일부를 세상에서 떠나보내는 저 종소리에 누가 귀를 막겠는가? 사람은 누구도 혼자만의 섬이 아니다. 사람은 저마다 대륙의 한 조각이요, 본토의 일부다. 만일 흙덩이 하나가 바닷물에 씻겨 간다면 유럽은 그만큼 작아지는 것이다. 이는 곶이 쓸려 간다 해도 마찬가지이며, 당신의 친구나 당신이 소유한 영지가 쓸려 간다 해도 마찬가지다. 나는 인류 가운데 하나이니, 어느 누구의 죽음도 나를 감소시키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을 보내어 누구를 위해 종이 울리나 알려고 하지 마라. 종은 바로 그대를 위해 울리는 것이다. 존 던 [누구를 위하여 종이 울리나] 중에서
헤밍웨이가 2차 세계대전의 전조였던 스페인 내전에 종군기자로 참가하면서 자신의 경험을 살려 쓴 소설 [누구를 위하여 종이 울리나]는 게리 쿠퍼와 잉그리드 버그먼이 출연한 영화로 우리에게 더 잘 알려졌습니다. 이 소설의 제목은 헤밍웨이가 영국성공회 신부이고 시인인 존 던의 시 제목을 빌린 것입니다. 과거 교회는 누군가가 아프거나 임종 시에 종을 치는 전통이 있었습니다. 요즘은 교회의 종소리를 듣기 어렵지만 제가 어렸을 때도 새벽 종소리를 들었던 기억이 납니다. 특히 저녁 종소리는 아픈 사람과 임종한 사람을 알리고 그를 위해 기도하는 마음이 담긴 종소리였습니다. 그래서 마을 어디에서나 들을 수 있는 종소리로 인해 모두가 숙연하게 그 종소리를 들으며 함께 기도하고 애도할 수 있었지요. 존 던은 자신이 거의 죽을 지경이 됐을 때를 회상하며 이 시를 썼습니다. 자신은 사경을 헤매고 있어 자신의 종소리를 듣지 못했지만, 많은 사람들이 그 종소리를 들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 종소리가 단지 아픈 사람, 임종한 사람만을 위해 울리는 것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온 누리에 울려 퍼지는 종소리는 그것을 듣는 모든 사람, 즉, 각 개인에게 울리는 종소리라 말합니다. 그 종소리를 듣고 마음이 동하는 사람, 그 종소리를 듣고 애도하는 사람, 그 종소리를 듣고 “언젠가 자신도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것을 자각하는 사람… 결국 종소리는 “너도 반드시 죽는다”라는 울림으로 우리 각 개인에게 들리는 것입니다.
젊었을 때는 천년만년 살 것처럼 죽음이 참 멀게만 느껴졌는데, 나이가 한 살 두 살 더 먹어가면 갈수록 죽음이 참 우리 곁에 가족처럼 가까이 있음을 느낍니다. 특히 저는 사제로서 장례와 아픈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다 보면 더욱 그러한 것을 느낍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죽음이 삶의 한 부분이라고 말하는 것 같습니다. 죽음이 자신과 전혀 상관없는 것처럼 생각하고 사는 사람들을 만나면 저의 젊었을 때의 모습을 보는 것 같습니다. 그렇다고 죽음을 너무 의식하는 것도 문제지만, 너무 죽음을 무시하고 사는 것도 문제입니다. 어떤 일이나 어떤 현상에는 반드시 끝이 있는 법이고, 이를 아는 사람은 현재를 결코 무의미하게 보내지 않을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버킷리스트”를 작성하고, 또 자신의 자서전이나 유언을 미리 준비하기도 합니다. 전혀 준비하지 않다가 갑자기 그러한 끝을 만나는 것은 마치 즐거운 놀이를 갑자기 멈춘 것 같은 아이의 반응처럼 매우 당황스러운 것입니다. 그것은 산 자나 죽은 자나 똑같은 당황일 것입니다.
별세기도의 순기능은 먼저 가신 분에 대해 기억하고 추모하는 데 있습니다. 그런데 누군가를 기억한다고 하지만 이미 그분의 실체가 없는 상황에서 과연 우리는 무엇을 기억할 수 있을까요? 사진 속에서 또는 이미 가신 분에 대한 추억에서, 또는 그 사람이 있던 장소나 쓰던 물건에서 우리는 먼저 가신 분의 실체의 그림자를 찾으려 노력하지만, 그것도 결국은 과거의 기억일 뿐입니다. 이미 떠나가신 분은 과거의 사람이고, 이제 우리가 기억하는 분은 “지금 여기에” 전혀 새로운 실체로 우리에게 다가오게 됩니다. 비록 보이지는 않지만, 별세기도 가운데 보이지 않는 분으로 우리 안에 새롭게 각인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별세기도에서의 기억은 매번 새롭게 거듭납니다. 그것은 우리가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향하여 기도하는 것처럼, 먼저 가신 분을 우리 안에서 새롭게 기억으로 되살려내는 것입니다. 물론 그것은 기억에 존재하는 실체입니다. 그 기억은 과거에 있었던 일과 추억에 기반하기도 하지만, 현재에 완전히 새롭게 기억이 거듭나기도 합니다. 그래서 별세기도를 통해 우리는 먼저 가신 분과 화해하기도 하고, 그분과 새로운 관계성을 만들기도 합니다. 이것이 산 자와 죽은 자가 상통하는 방식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러한 상통 속에서 마지막 날 다시 만날 것을 희망하게 됩니다.
그래서 별세기도는 단순히 기억하는 것 이상의 메시지를 우리에게 전해 줍니다. 그것은 “우리도 반드시 죽는다”라는 사실입니다. 먼저 가신 분이 과거에 누군가의 별세기도에 참석하셨을 때 이러한 생각을 했을까요? 아마도 그랬을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우리가 별세기도를 통해 후손 된 도리로 그분들을 위해 기도하고, 그들을 추억하는 것 이상으로 우리는 “종소리처럼” 별세기도를 통해 우리의 남은 삶을 돌아봐야 하는 것입니다. 그분들이 살았던 삶 속에서 지금 나의 모습을 유추해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마치 지도를 펼쳐놓고 앞으로 가야 할 방향을 가늠해 보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는 반드시 죽습니다. 이것만큼 자명한 사실이 이 세상에 있을까요? 아무리 건강을 챙기고 열심히 몸을 돌보며 살아도 반드시 죽음은 각자에게 임합니다. 마치 도둑이 아무 때에 침범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인간이 이러한 필멸성을 인식한다는 것이 인간과 동물의 차이점입니다. 끝을 알면 현재를 그리고 내일을 준비할 수 있습니다. 꼭 병이 나서 드러누워야만 끝을 생각하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않기 위해서도 우리는 별세기도 때마다 이러한 메시지를 기억해야 합니다. 이러한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면 이 별세기도는 단순히 과거의 조상을 기념하는 차원에만 머물 뿐입니다. 그러한 것은 모든 종교가 그렇게 하고 있는 일입니다. 그러나 필멸성을 가장 중심 교리로 가지고 있는 우리 그리스도교는 이러한 죽음에 대해 염려하지 않습니다. 그 죽음 이후에 부활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실체의 죽음은 반드시 있습니다. 그리고 그다음에 우리가 입게 될 부활의 실체를 우리는 아직 어림짐작만 할 뿐입니다. 주님께서 죽으시고 부활하셨으니, 우리도 그러할 거라고 하면서 말입니다. 그러나 죽음이 실제이듯이, 부활도 실제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현재도 실제입니다. 실제를 사는 사람은 반드시 분명한 자기 선택을 해야 합니다. 그 선택은 죽음 앞에 과연 어떻게 살 것인가를 진지하게 묻는 데서 시작해야 합니다.
죽음은 죽음입니다. 행복한 죽음은 없습니다. 실체가 없어지는 데 슬퍼하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죽음은 슬픔입니다. 죽은 자가 슬플까? 라는 것은 우리로서는 알 수 없는 일입니다. 우리가 슬프다면 죽은 자도 슬프지 않겠느냐고 상상만 할 뿐입니다. 이별은 슬프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다시 만날 희망은 그 이별을 더욱 값지게 합니다. 그리고 다시 만난다는 기약은 우리의 현재에 희망을 부여합니다. 그러므로 현재는 우리만의 것이 아니라 산 자와 죽은 자가 함께 만들어 가는 현재입니다. 그러할 때 남은 자들은 현재를 책임감 있게 마지막까지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힘을 주시어 우리 삶의 현재를 의미 있게 살도록 도와주시기를 기원합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전례독서_음력 1.1. 설날
본기도
만물을 창조하신 하느님, 주님의 은혜로 우리가 대대로 번영을 누리게 해주심을 감사하나이다. 비오니, 설날을 맞이하여 우리 선조들의 영혼을 기억하오니, 그들에게 자비를 베푸시어 영원한 안식을 주시고, 주님의 자녀된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화목한 가정을 이루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한 분 하느님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나이다. 아멘.
1독서_민수 6:22-27
22 야훼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다. 23 “너는 아론과 그의 아들들에게 이르기를, 이스라엘 백성에게 이런 말로 복을 빌어주라고 하여라. 24 ‘야훼께서 너희에게 복을 내리시며 너희를 지켜주시고, 25 야훼께서 웃으시며 너희를 귀엽게 보아주시고, 26 야훼께서 너희를 고이 보시어 평화를 주시기를 빈다.’ 27 그들이 이렇게 이스라엘 백성에게 내 이름으로 복을 빌어주면 내가 이 백성에게 복을 내리리라.”
성시_시편 89:1-2, 11-16
1 주여,
. 내가 당신의 사랑을 영원히 노래하리이다. ◯
. 당신의 미쁘심을 대대로 전하리이다.
2 당신께서 다짐하신 사랑, ◯
. 그 미쁘심은 하늘처럼 영원히 흔들리지 않습니다.
11 하늘이 당신 것이오니, 땅도 당신의 것 ◯
. 땅과 그 안에 담긴 것 모두 당신께서 만드신 것이며,
12 북녘과, 남녘을 만드신 이도 당신이오니 ◯
. 다볼산도 헤르몬산도
. 당신의 이름을 찬양하옵니다.
13 그 모든 전공이 당신의 것이니 ◯
. 억세신 당신 손이여, 탁월하신 오른손이여.
14 정의와 공정이 당신의 옥좌를 받들고, ◯
. 사랑과 진실이 당신의 거동을 인도하옵니다.
15 복되어라, 주님께 만세 부르는 백성 ◯
. 그들이 걷는 길을
. 당신의 환한 얼굴이 비춰 주시니
16 날마다 그 이름 높이 기리고 ◯
. 당신의 정의로 사기도 드높습니다.
⦿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
. 처음과 같이 지금도 그리고 영원히, 아멘.
2독서_야고 4:13-17
13 “오늘이나 내일쯤 아무 아무 도시로 가서 일 년 동안 거기에서 지내며 장사를 하여 돈을 벌어보겠다.” 하는 사람들에게 한마디 합니다. 14 당신들은 내일 당신들의 생명이 어떻게 될는지 알지 못합니다. 당신들은 잠깐 나타났다가 사라져버리는 안개에 지나지 않습니다. 15 그러므로 당신들은 “만일 주님께서 허락해 주신다면 우리는 살아가며 이런 일 저런 일을 해보겠다.” 하고 말해야 할 것 입니다. 16 그런데도 당신들은 지금 허영에 들떠서 장담을 하고 있습니다. 이런 장담은 모두 악한 것입니다. 17 사람이 제가 마땅히 해야 할 착한 일을 알면서도 하지 않으면 그것이 곧 죄가 됩니다.
복음서_마태 6:19-21, 25-34
19 “재물을 땅에 쌓아두지 마라. 땅에서는 좀먹거나 녹이 슬어 못쓰게 되며 도둑이 뚫고 들어와 훔쳐간다. 20 그러므로 재물을 하늘에 쌓아두어라. 거기서는 좀먹거나 녹슬어 못쓰게 되는 일도 없고 도둑이 뚫고 들어와 훔쳐가지도 못한다. 21 너희의 재물이 있는 곳에 너희의 마음도 있다.” …
25 “그러므로 나는 분명히 말한다. 너희는 무엇을 먹고 마시며 살아갈까, 또 몸에는 무엇을 걸칠까 하고 걱정하지 마라. 목숨이 음식보다 소중하지 않느냐? 또 몸이 옷보다 소중하지 않느냐? 26 공중의 새들을 보아라. 그것들은 씨를 뿌리거나 거두거나 곳간에 모아들이지 않아도 하늘에 계신 너희의 아버지께서 먹여주신다. 너희는 새보다 훨씬 귀하지 않느냐? 27 너희 가운데 누가 걱정한다고 목숨을 한 시간인들 더 늘일 수 있겠느냐? 28 또 너희는 어찌하여 옷 걱정을 하느냐? 들꽃이 어떻게 자라는가 살펴보아라. 그것들은 수고도 하지 않고 길쌈도 하지 않는다. 29 그러나 온갖 영화를 누린 솔로몬도 이 꽃 한 송이만큼 화려하게 차려 입지 못하였다. 30 너희는 어찌하여 그렇게도 믿음이 약하냐? 오늘 피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질 들꽃도 하느님께서 이처럼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야 얼마나 더 잘 입히시겠느냐? 31 그러므로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또 무엇을 입을까 하고 걱정하지 마라. 32 이런 것들은 모두 이방인들이 찾는 것이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는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잘 알고 계신다. 33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하느님께서 의롭게 여기시는 것을 구하여라. 그러면 이 모든 것도 곁들여 받게 될 것이다. 34 그러므로 내일 일은 걱정하지 마라. 내일 걱정은 내일에 맡겨라. 하루의 괴로움은 그 날에 겪는 것만으로 족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