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치와 하나 됨의 의미”_2025.5.11.다해_부활4주일_설교문
2025.5. 11. 다해_부활4주일
사도 9:36-43 / 시편 23 / 묵시 7:9-17 / 요한 10:22-30
“일치와 하나 됨의 의미”
채야고보 신부 / 대한성공회 제주우정교회, Artist
지난 한 주간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모당에서는 단일화 논쟁이 뜨거웠습니다. 당 내부 경선을 통해 선출된 후보와 당 밖에서 초빙된 후보가 하나로 단일화하는 과정에서 첨예한 이해충돌과 권모술수가 발생해서 국민을 당혹하게 했습니다. 당 입장에서는 당권과 후보의 지지율 등 종합적인 판단에 의해 단일화를 주장한 것 같은데, 누가 봐도 형평성이 없어 보이는 모양새였습니다. 결국 후보 변경을 위한 당원 투표가 부결되면서 다시 후보자 교체가 원점으로 돌아오기는 했지만, 단일화 과정에서 한쪽은 깊은 상처를 입을 수밖에 없는 형국으로 보입니다. 이렇게 정치판에서나 우리의 일상에서나 둘이 하나가 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님을 이번 일을 통해 다시 생각하게 됩니다. 멀리 내다볼 필요 없이 우리의 가족 관계, 부부간의 관계, 공동체의 관계에서도 일치와 하나 됨이란 말이 자주 강조하지만, 온전한 일치가 이루어지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님을 우리는 경험합니다. 단일화 또는 일치, 하나 됨의 과정은 결코 일치의 대상 간에 공평하고 대등하게 하나 됨은 늘 불가능한 것 같습니다. 하나 됨을 원하는 편에서는 늘 자기를 중심으로 일치를 관철하고 싶어 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하나 됨은 결국 한쪽으로 쏠림현상이 발생하여 하나 됨이 아니라 불평등한 합병이 되기 쉽습니다.
그래서 양편이 하나가 되는 데는 많이 가진 편이, 힘이 센 편이 그렇지 않은 편을 흡수하여 병합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제국주의는 연약한 나라들을 힘으로 합병했습니다. 이럴 경우 힘이 센 편은 갑이 되고 그렇지 않은 편은 을이 됩니다. 이것이 제국과 식민지의 관계이지요. 이런 경우 일치와 하나 됨이라는 이름으로 차별과 폭력이 발생하게 됩니다. 강제로 병합당한 편에서는 끊임없이 평등과 해방을 갈구하기 때문이지요. 물론 불평등한 일치에 순응하는 편을 선택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부부 관계에서도 더 힘이 있는 편으로 쏠림 현상이 나타나 균형을 잃게 마련입니다. 물질적이든, 성격적이든 강한 편으로 쏠림 현상이 있으면 불균형 속에서 하나 됨이 이뤄지게 마련입니다. 보통 부부들은 한쪽이 참아주는 차원에서 갈등을 마무리하곤 합니다. 가족의 평화를 위해서…
하나 됨과 공동체성을 주장하는 단체나 공동체는 항상 다양성을 억압할 기재들을 만듭니다. 저의 어린 시절에 우리에게는 국가가 일치의 중심이었습니다. 저녁 무렵 국기 하강식 때마다 우리는 애국가 소리가 들리면 움직이지 않고 소리 나는 방향으로 멈춰서 경례해야 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참 유치해 보이는데, 그때는 애국심의 표현으로 제법 진지하게 했던 기억이 납니다. 이것도 다양한 사람들을 애국이란 이름으로 하나로 세뇌하는 방법이었습니다. 이러한 현상을 우리는 요즘 “가스라이팅”이라 부릅니다. 반복된 말이나 반복된 자극을 통해 상대의 생각과 행동을 타자가 지배하는 수단입니다. 이렇게 사람들은 하나 됨을 위해 한편으로 귀속되는 것을 강요받곤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남이가?”라는 말이나 “우리가 단결하자”라는 말은 때론 매우 폭력적으로 들릴 수 있다는 점을 인정하게 됩니다. 그러나 진정한 하나 됨과 단일화는 강하거나 많이 가진 편이 그렇지 않은 편에 자신의 것을 내어놓을 때만 가능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평등과 균형 있는 단일화와 일치는 이 세상에서는 묘연해 보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복음서 말씀은 이런 차원에서 매우 흥미로운 내용을 전해줍니다. 유대인들은 예수의 신원이 무척 궁금했던 것 같습니다. “당신은 언제까지 우리 마음을 조이게 합니까?”라고 그들은 예수께 불평합니다. 예수께서 자신의 신원을 명확하게 말씀하시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구약이 예언한바 “그리스도” 즉 “메시아”가 예수인지를 알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역사의 예수께서는 “그렇다”라고 전혀 말씀하신 적이 없습니다. 그러면서 이상한 말씀을 하십니다.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행하는 일들이” 자신의 신원을 증명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즉 그동안 예수 운동을 통해 주님께서 하신 일들, 가난한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불가촉천민과 어울려 먹고 마셨으며, 죄인들의 친구가 되시고, 병자와 마귀 들린 자들을 치료하신 일들입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그러한 예수의 행적과 행위들을 전혀 믿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도 “그러나 당신들은 믿지 않았다”라고 하십니다. 그 이유는 유대인들이 주님의 양들이 아니기 때문이라고 요한복음은 기록합니다. 주님의 양이 아니라는 말은 주님의 양무리에 들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즉 ‘남’이라는 뜻입니다. 남이기 때문에 예수의 말과 행동을 도저히 믿지 못했고, 그 신원조차 깨닫지 못한 것이지요.
양들은 많은 사람 중에서 유독 자기 목자의 음성을 알아듣습니다. 자기 목자의 목소리, 발소리, 신호를 분별할 수 있습니다. 어디에서 읽은 기억이 나는데, 논에 심은 벼들도 자기 농부의 발소리를 알아듣는다고 하더군요. 식물도 그럴 수 있다면 귀를 가진 동물은 어떻겠습니까? 목자에게 속한 양무리는 자신들의 목자를 알아봅니다. 양이 목자의 소리를 알아듣지 못하는 것은 그 목자의 양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 말은 유대인들이 예수님과 일치할 수 없는 무리란 뜻입니다. 사실 “예수가 그리스도이시다”라는 주장은 신성모독까지는 아닙니다. 예수 이전에도 많은 사람들이 메시아 또는 그리스도를 사칭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유대인들은 기원전 2세기에 헬레니즘 제국으로부터 독립운동했던 유다 마카베오를 “메시아”라 여기기도 했습니다. 메시아는 어디까지나 신이 아니라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요한은 이 메시아 논쟁 사화에 유대인들이 용납 못 할 그리스도론을 추가합니다. 즉, “아버지와 예수가 하나”라고 선포합니다.
“아버지와 나는 하나이다.” 요한 10:30
이 말을 듣고 유대인들은 돌을 들어 예수를 치려고 했습니다. “아버지와 나는 하나”라는 말은 예수가 곧 하느님이란 뜻입니다. 이는 신성모독이고 마땅히 죽을 짓이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의 관점에서 유한한 인간은 결코 하느님일 수 없는 법입니다. 요즘도 다양한 사람들이 자신을 신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냥 웃어넘기지만, 유대인들은 절대로 그럴 수 없습니다. 이 피조된 세계의 어떠한 이미지로도 하느님을 표현할 수 없는 유대인들에게 눈에 보이는 가난한 갈릴래아 청년이 하느님이라는 주장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신성모독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아버지와 나는 하나이다.”라는 말에는 유대인들이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여러 의미가 내포된 말입니다. 예수께서 그동안 행하신 모든 일들이 아버지와 함께 행한 것이란 뜻입니다. 아버지께서 일하시니 예수도 일하신 것입니다. 예수의 행위, 말, 표정 모두에 하느님의 현존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께서 아버지의 일을 행하고 순종하는 한 항상 아버지와 함께 있고 일치한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아버지의 일을 행함으로써 예수는 하느님의 뜻과 지시에 언제나 순종한다는 뜻입니다. 예수께서는 아버지를 벗어나서 절대 행동하지 않으셨다고 요한은 기록합니다. 왜냐하면 예수와 하느님은 불가분의 관계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요한복음의 그리스도론입니다.
이러한 일치와 하나 됨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단일화 또는 일치와는 다른 것입니다. 하느님과 예수의 하나 됨은 하느님의 자기 비움(κένωσις, 케노시스)과 예수의 자기 비움이 있었기에 가능합니다. 자기 비움 없이 어떻게 둘이 하나의 공간을 공유할 수 있고, 서로의 존재를 공유할 수 있겠습니까? 아버지와 아들의 신성의 본질은 하나입니다. 그것은 삼위일체의 상호 비움의 친교 속에서만 가능한 것입니다. 성부 하느님은 사랑하는 성자 예수를 인간을 위해 보내시고 희생시킴으로 말미암아 자신을 비우신 것이고, 아들이신 예수께서는 그분의 뜻에 순종함으로써 자신을 비우신 것입니다. 이러한 자기 비움의 하나 됨은 온전히 상호 겸손과 상호 희생으로만 가능합니다. 여기에서 “친교로서의 하느님”의 모든 것이 드러납니다. 우리의 하느님은 철저한 사랑의 친교라는 관계성 속에서 자신을 드러내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타인에 대한 사랑, 타인에 대한 자기 비움이 없이는 일치도 하나 됨도 단일화도 불가능합니다. 성부 성자 성령의 삼위일체는 하느님의 자기표현이고, 이렇게 친교 안에서 상호 비움으로 사랑의 일치를 이룹니다. 이것이 삼위일체의 가장 핵심 개념입니다.
그러므로 하느님과 예수가 하나라는 말은 너와 내가 상호 겸손과 희생으로 자기 비움을 실천하여 사랑의 친교를 만들라는 하느님의 뜻입니다. 이것이 하느님과 예수께서 상호 거주하시는 신비이고, 사랑의 친교 속에서 우리가 성령의 도움으로 그분 안에 거주하는 방식입니다. 사랑의 친교 없이는 우리는 아무도 예수 그리스도의 양무리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그 양무리에 들지 않은 자는 다른 양입니다. 예수의 행위와 행적을 믿지 않았던 유대인들처럼, 사랑의 친교를 해 보지 못한 사람이 어떻게 목자이신 예수의 음성을 들을 수 있겠습니까? 예수의 음성을 분별할 수 없는데 어떻게 남을 사랑할 수 있겠습니까? 이웃과 사랑의 친교를 나눌 수 없는데 어떻게 하느님을 알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우리는 성찬 기도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우리는 서로 다르나 한 빵을 나누며 한 몸을 이룹니다.” 라고. 이러한 일치와 하나 됨은 우리를 위해 자신을 비운 예수 그리스도의 자기 비움으로 가능한 것이고, 우리는 성체와 성혈을 받을 때마다 이를 상기하여 우리 자신을 하느님께, 또 이웃에게 비울 것을 각오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매 주일 예배를 통해 우리가 하느님의 양무리에 일치함을 경험합니다. 그래서 성찬례도 중요하고 우리의 애찬도 중요합니다. 친교와 일치를 위한 우리의 모든 노력이 예배 안에 전례적으로 녹아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매 주일 하나 됨을 향해 나아갑니다. 우리의 예배가 이러한 하나 됨의 친교 속에서 삼위일체 하느님을 경험하는 그러한 예배가 되길 기도합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이러한 친교의 신비로 이끌어 주시기를…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전례독서_부활4주 (다해)
본기도
은혜로우신 하느님, 잃은 양들을 찾아 바른길로 이끌어주시나이다. 비오니, 우리가 그리스도의 음성을 듣고 순종함으로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한 분 하느님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나이다. 아멘.
1독서_사도 9:36-43
36 한편 요빠에는 다비타라는 여신도가 살고 있었다. 그 이름은 그리스 말로 도르가, 곧 사슴이라는 뜻이다. 그 여자는 착한 일과 구제 사업을 많이 한 사람이었는데 37 그 무렵에 병이 들어 죽었다. 그래서 사람들이 그 시체를 깨끗이 씻어서 이층 방에 눕혀놓았다. 38 리따는 요빠에서 가까운 곳이어서 베드로가 리따에 있다는 말을 들은 신도들이 그에게 사람 둘을 보내어 지체하지 말고 와 달라고 청하였다. 39 그래서 베드로는 곧 그들을 따라 나섰다. 베드로가 요빠에 이르자 사람들이 그를 이층 방으로 안내하였다. 과부들이 모두 베드로에게 몰려 와서 울며 도르가가 살아 있을 때에 만들어두었던 속옷과 겉옷을 보여주었다. 40 베드로는 사람들을 방에서 모두 내보낸 뒤 무릎을 꿇고 기도를 드리고 나서 시체쪽으로 돌아서며 “다비타, 일어나시오.” 하고 말하였다. 그러자 그 여자는 눈을 뜨고 베드로를 바라보며 일어나 앉았다. 41 베드로는 그 여자의 손을 잡아 일으켜 세웠다. 그리고 성도들과 과부들을 불러들여 다시 살아난 도르가를 보여 주었다. 42 이 소문이 온 요빠에 알려지자 많은 사람이 주를 믿게 되었다. 43 그 뒤 베드로는 한동안 요빠에서 피장이 시몬의 집에 머물러 있었다.
성시_시편 23
1 주님은 나의 목자시니 ◯
. 아쉬울 것 없어라.
2 푸른 풀밭에 놀게 하시고 ◯
. 물가로 이끌어 쉬게 하시니
3 지쳤던 이 몸에 생기가 넘친다.
. 그 이름 목자이시니 ◯
. 인도하시는 길, 언제나 곧은 길이요,
4 나 비록 음산한 죽음의 골짜기를 지날지라도◯
. 내 곁에 주님 계시오니 무서울 것 없어라
. 당신의 막대기와 지팡이로 ◯
. 인도하시니 걱정할 것 없어라.
5 원수들 보는 앞에서 상을 차려주시고, ◯
. 기름 부어 내 머리에 발라주시니,
. 내 잔이 넘치옵니다.
6 한평생 은총과 복에 겨워 사는 이 몸, ◯
. 영원히 주님 집에 거하리이다.
⦿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
. 처음과 같이 지금도 그리고 영원히, 아멘.
2독서_묵시 7:9-17
9 그 뒤에 나는 아무도 그 수효를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사람이 모인 군중을 보았습니다. 그들은 모든 나라와 민족과 백성과 언어에서 나온 자들로서 흰 두루마기를 입고 손에 종려나무 가지를 들고서 옥좌와 어린 양 앞에 서 있었습니다. 10 그리고 그들은 큰소리로 “구원을 주시는 분은 옥좌에 앉아 계신 우리 하느님과 어린 양이십니다.” 하고 외쳤습니다. 11 그러자 천사들은 모두 옥좌와 원로들과 네 생물을 둘러서 있다가 옥좌 앞에 엎드려 하느님께 경배하며 12 “아멘, 우리 하느님께서 영원 무궁토록 찬양과 영광과 지혜와 감사와 영예와 권능과 세력을 누리시기를 빕니다. 아멘.” 하고 외쳤습니다.
13 그 때 그 원로들 가운데 하나가 “흰 두루마기를 입은 이 사람들은 도대체 누구이며 또 어디에서 왔습니까?” 하고 나에게 물었습니다. 14 “어른께서 잘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하고 내가 대답했더니 그는 나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저 사람들은 큰 환난을 겪어낸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어린 양이 흘리신 피에 자기들의 두루마기를 빨아 희게 만들었습니다.
15 그러므로 그들은 하느님의 옥좌 앞에 있으며
. 하느님의 성전에서 밤낮으로 그분을 섬기는 것입니다.
. 그리고 옥좌에 앉으신 분이 그들을 가려주실 것입니다.
16 그들이 다시는 주리지도 목마르지도 않을 것이며
. 태양이나 어떤 뜨거운 열도 그들을 괴롭히지 못할 것이요,
. 이사 49:10
17 옥좌 한가운데 계신 어린 양이 그들의 목자가 되셔서
. 그들을 생명의 샘터로 인도하실 것이며 시편 23:2
. 하느님께서는 그들의 눈에서 눈물을 말끔히 씻어주실 것입니다.”
. 이사 25:8
복음서_요한 10:22-30
22 때는 겨울이었다. 예루살렘에서는 봉헌절 축제가 벌어지고 있었다. 23 예수께서는 성전 구내에 있는 솔로몬 행각을 거닐고 계셨는데 24 유다인들이 예수를 둘러싸고 “당신은 얼마나 더 오래 우리의 마음을 조이게 할 작정입니까? 당신이 정말 그리스도라면 그렇다고 분명히 말해 주시오.” 하고 말하였다. 25 그러자 예수께서는 “내가 이미 말했는데도 너희는 내 말을 믿지 않는구나. 내가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행하는 일들이 바로 나를 증명해 준다. 26 그러나 너희는 내 양이 아니기 때문에 나를 믿지 않는다. 27 내 양들은 내 목소리를 알아듣는다. 나는 내 양들을 알고 그들은 나를 따라온다. 28 나는 그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준다. 그래서 그들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고 아무도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아가지 못할 것이다. 29 아버지께서 내게 맡겨주신 것은 무엇보다도 소중하다. 아무도 그것을 아버지의 손에서 빼앗아갈 수 없다. 30 아버지와 나는 하나이다.” 하고 대답하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