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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기독교미술의 정체성_김병호

James Chae 2012. 12. 15. 21:53

*이 글은 진흥아트홀 주최로 열린 세미나 "기독교와 현대미술"(2007.4.13)에서 발표된 것입니다.





현대 기독교미술의 정체성





김병호(백석대학교 기독교전문대학원 기독교미술학과 교수/조형예술학박사)






서론

1. 신앙과 형상(Image)  

(1) 성경과 형상(Image)의 관계 이해

(2) 존 칼빈(John Calvin, 1509-1564)과 형상(Image)의 관계 이해

2. 현대 기독교 미술의 정체성 

(1) 현대 기독교 미술의 범주와 의미 : 수용성(Expropriation)과 지향성(Intention)

(2) 현대 기독교미술의 유형 : 관계항으로서의 기독교 미술

결론





서 론


오늘날 전반적인 우리 사회 문화는 하루가 다르게 급변하고 있다. 이러한 급변하는 문화의 흐름 속에서  '포스트모던 예술'은 '다양성'과 모호한 '혼성성'(混成性)을 드러내며 더욱 혼돈스러워지는 '잡종 예술 형식'(Form of Heterotopic Art)을 양산해 내고 있다. ‘잡종 예술’은 이질적 요소가 공존하고(이질성-異質性), 교접하며(난교성-亂交性), 새로운 성질의 형식이 출현(혼성성-混成性)하고, 새로이 출현한 형식의 위상이 또 다시 변화(전이성-轉移性)한다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오늘날 기독교인들은 별다른 선택의 여지없이 이러한 ‘포스트모던 예술문화’에 서서히 익숙해지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그렇다면 현 시점에서 현대 기독교 미술의 위치는 어디이고, 역할은 무엇인가? 하나님의 창조적 신비와 아름다움 그리고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은총을 경험하고, 이를 예술적으로 선포하는 문화 사역자로서의 역할을 담당하는 특별한 위치인가? 아니면 시대정신(Zeitgeist)에 뒤떨어진 '낙오예술가'(落伍藝術家) 정도의 위치인가?

 

현실적으로 현대 기독교 미술가들은 불편한 몇 가지의 시선을 받고 있다. 첫째는 '독창성'과 '순수성'의 문제이다. 종교적 표현과 특정한 주제에 집중 될 수밖에 없는 기독교 미술가들은 예술이 가지는 고유성인 ‘독창성’과 ‘순수성’의 결핍이라는 부정적 시선을 받고 있는 것이다. 좀 더 솔직한 표현을 빌리자면, 현대 미술의 영역속에서 기독교 미술은 그 존재감을 찾기가 어려우며, 일종의 아마추어리즘(Amateurism)적 종교 부산물 정도로 취급당하고 있다. 둘째는 ‘진부함’ 이라는 부정적 인식의 문제이다. 미술사에서 기독교 미술은 오래된 역사와 이미 진부한(새로운 이슈가 되지 못하는) 이미지로 각인되어져 있으며, 그 예술성은 항상 구시대적이고 편협적이라는 부정적 평가를 받고 있다. 셋째는 기독교 공동체 내에서의 시각예술(미술)에 대한 ‘부정적 인식’의 문제이다. 즉 기독교 공동체내에서 조차도 여전히 형상에 대한 성경 해석의 문제와 시대정신과 예술의 관계에 대한 이해 부족으로 인하여 시각 예술을 비 신앙적 행위로 간주하거나, 또는 관심조차도 보이고 있지 않은 것이 오늘날 대다수 교회 공동체가 보이는 태도이다. 이처럼 현대 기독교 미술은 내ㆍ외부적으로 어려운 환경속에서 고민하고 있는 모습이다. 


본 연구에서는 이러한 현실적인 상황을 인식하고, 이를 극복하고 새로운 방안을 모색하여 ‘현대 기독교 미술의 정체성’을 찾아보고자 한다. 이를 위하여 구체적으로는 ‘신앙과 형상’의 관계 이해 및 ‘현대 기독교 미술의 의미’와 ‘범주’ 그리고 ‘유형’들을 고찰 할 것이다.



1. 신앙과 형상(Image)  


(1) 성경과 형상(Image)의 관계 이해 

성경 말씀에 기록된 형상(image) 관련된 부분 들을 보면 부정적인 입장과 긍정적인 입장이 모두 기록되어있다.


본 연구에서는 형상과 관련된 많은 성경 말씀 가운데  현대 기독교 미술의 정체성을 이해하는데 필요한 대표적인 내용들만을 언급한다. 특히 본 논제의 성격상 부정적 입장 보다는 긍정적 입장을 중심으로 전개할 것임을 밝힌다.


먼저, 형상에 대한 부정적 입장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말씀은 출애굽기 20장 3절에서 5절까지에 나와 있는 십계명의 내용이다.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있게 말지니라.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속에 있는 것의 아무 형상이든지 만들지 말며,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나 여호와 너의 하나님은 질투하는 하나님인즉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비로부터 아들에게로 삼사 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 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 성경은 무오(無誤)한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믿음이 기독교적 신앙 고백이다. 그러나 이 성경 말씀의 진의 또는 맥락(context)에 대하여 우리의 보다 진지한 접근이 요청된다. 


일반적으로 대다수의 주석 학자들은 십계명의 1.2 계명이 서로 연계되어 있는 하나의 계명이라는 인식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이해를 통해서 본다면, 첫째 계명은 예배의 대상이 오직 여호와 하나님 뿐 이라는 사실을 명시하는 것이고, 둘째 계명은 예배의 대상을 다루는 것 이라기보다는 예배의 맥락(context)을 다루는 것으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다시 말해  십계명의 첫째 계명과 둘째 계명에서 연속적으로 하시는 말씀 속에서 주목해야하는 주된 요점은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는 것이다. 즉 포괄적(inclusive) 의미의 ‘형상 제작’을 금 했다기보다는 '예배의 대상'으로 만들어지는 한정적 의미의 형상 제작을 금하고 있다는 것이다.  의미론적으로는 형상 자체의 문제보다는 눈에 보이는 형상 앞에 절하는 인간들의 죄악 된 속성 즉 ‘영적 간음’을 엄중 금지하시는 내용이라는 것이다. 


긍정적인 입장을 살펴보면, 성경에는 창세기 1장 1절의 천지 창조에 대한 말씀을 비롯하여 수많은 예술적 창조에 대한 기술들이 있다. 그리고 하나님이 직접적으로 개입하여 제작했던 형상들도 적지 않다. 


첫째는 인류 역사가 예술행위(창조행위)로부터 -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 하시니라" - 시작된다. 그리고 이 창조(예술) 행위에 대한 하나님의 고백(감상)은 기쁨으로 - "하나님이 그 지으신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참 좋았더라." - 표현되어지고 있다. 


창조주 하나님께서 자신이 지으신 세계를 바라보시며 참 좋아 하셨다는 것은 자신의 창조 의도와 목적이 그 피조물(천지)과 정확히 일치함에 대한 표현임을 알 수 있다. 즉 창조의 결과물인 피조물 안에는 창조주 ‘하나님의 의도와 속성’이 투영되어 있다는 것이고, 더 나아가서 피조물들은 하나님의 완전하심과 선하심에 대한 증거물이 된다는 추론이 가능해 지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사도 바울도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시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神性)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 라는 로마서의 말씀을 통하여 피조물 속에 하나님의 영광이 내제되어 있음을 말씀하고 있다. 특히 인간 창조와 관련하여 "하나님이 자기의 형상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라는 말씀 속에는 인간이 창조주 하나님의 예술적 창조 본능 유전자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암시하는 것이다. 프란시스 쉐퍼(F. Schaeffer) 역시 인간의 예술적 창조 본능이 “태초의 창조하신 하나님의 신적 영역에서부터 기원되고 있다.”고 보았다. 결국 창조주 하나님을 닮은 인간은 예술적 창조 능력을 본성적으로 가지고 태어났으며, 인간의 예술 활동은 하나님을 찬양하며, 인류 사회 회복을 돕는 사역적인 역할을 부여받은 아름다운 도구라는 것이다. 


또한 아브라함 카이퍼(A. Kuyper)는 ‘예술’ 이라는 것이 인간이 지은 죄의 결과로서 상실한 ‘진정한 미’를 회복 위하여 “하나님이 주신 성령의 선물이며, 우리의 현재의 생활을 위한 위로로서 우리로 하여금 이 죄의 인생에서 보다 풍성하고 더욱 영광스러운 세계를 발견하게 해주는 것” 이며 예술가가 추구하는 아름다움의 원천이 하나님이라고 밝히고 있다.


둘째는 성막과 성전 속에 반영된 형상에 대한 부분이다. 성막은 중요한 조형 예술 형식을 갖추고 있다. 하나님은 성막 제작을 명하시며 직접 세부적인 식양(式樣-조형 형식)을 모세에게 가르쳐주셨다. "무릇 내가 네게 보이는 대로 장막의 식양과 그 기구의 식양을 따라 지을 찌니라". 이 식양은 이전에는 볼 수 없었던 전혀 새로운 형식이었다. 성막에는 하나님의 지혜가 투영된 아름다운 건축(성막의 형태)과, 조각(그룹-Cherubim),의복(제사장), 회화(제사장의 옷 장식), 살구꽃문양, 추상적 형태 등 상징적인 양식들이 총망라되어있다.

 

그리고 민수기에서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과 모세를 향하여 원망하매 여호와께서 불뱀을 백성 중에 보내어 불순종한 백성들을 죽이시는 장면과 다시 모세의 기도를 들으시고 ‘놋뱀’을 장대위에 달아 뱀에 물린 자 마다 놋뱀을 쳐다보면 살려주시는 장면이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심지어 요한복음에서는 의미론적으로 이 놋뱀과 예수그리스도를 동일시하기도 한다. 이처럼 전통적으로 기독교 내에서 매우 부정적인 이미지로 각인되어 있는 뱀의 형상조차도 생명을 살리는 도구로 사용하였음을 알 수 있다.  


또한 다윗 성전과 관련한 형상 문제를 는 성전 건축을 위하여 아들 솔로몬에게 당부하는 다윗의 고백 속에서 잘 나타나고 있다. 여기에서도 우리는 하나님의 예술적 창조에 대한 적극적 개입 사실을 발견 할 수 있다. 다윗은 성전 건축을 위하여 "성신의 가르치신 모든 식양(式樣)"대로 준비하였고, 이 식양은 여호와의 손이 자신에게 임하여 그려 알게 하셨다고 고백하고 있다. 흥미로운 사실은 그 식양 안에는 천사나 백합화의 형상 같은 신앙적인 이미지의 형상도 있었지만, 성전에서 쓰던 제사용 기물인 물두멍의 놋 받침에는 사자, 소, 화환과 같은 세속적인 형상들도 있었다는 것이다. 결국 중요한 것은 형상(image) 자체 보다는 그 형상을 지각하는 인간들의 태도라는 것이 성경을 통하여 알 수 있는 분명한 사실이다. 



(2) 존 칼빈(John Calvin, 1509-1564)과 형상(Image)의 관계 

현대 기독교의 가장 영향력 있는 신학자는 다름 아닌 존 칼빈(J. Calvin)이다. 현대 기독교 미술에 대한 정체성 문제를 다루기 위해서는 칼빈이 가지고 있는 형상과 관련한 인식에 대한 선이해가 요구된다.

   

칼빈은 기독교 강요(Christianae Religionis Institutio) 제1권 제11장에서 형상과 관련한 자신의 입장을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 “하나님께 눈에 보이는 형상을 부여하는 것은 불경스러운 행위이며, 우상을 세우는 것은 참되신 하나님을 배반하는 행위”이다. 또한 이사야의 말씀과 사도행전 말씀 즉 “형체가 없는 분을 형체를 지닌 물질과 비슷한 것으로 만들고, 눈에 보이지 않는 분을 눈에 보이는 모양으로 만들며, 영이신분을 생명이 없는 물체로 만들고, 측량할 수 없는 분을 나무나 돌이나 금 등 하찮은 것으로 만드는 행위는 곧 터무니없이 어리석은 허구(虛構)로 하나님의 위엄을 더럽히는 것”이며 “ 하나님을 금이나 은이나 돌에다 사람의 기술과 고안으로 새긴 것들과 같이 여길 것이 아니니라.”는 언급하면서 형상과 하나님의 결부는 하나님의 위엄을 욕되게 하는 것 이라고 가르치고 있다. 더 나아가서 칼빈은 “하나님의 임재의 표징들도 형상의 구실이 되지 못한다.”고 말하고 있다. 말하자면, 하나님께서는 때때로 구체적인 표징 즉 구름과 연기와 화염, 무지개와 비둘기, 그룹들을 통해서 그의 신적 위엄이 임재하심을 보여주시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것들은 마치 굴레로 씌워놓듯이 사람들의 마음을 가로막아서 하나님에 대해서 더 깊이 파고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 역할을 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임재의 표징도 형상의 대상이 될 수 없다고 칼빈은 주장하고 있다. 


또한 그는 형상을 지지했던 교황주의자들의 부당함과, 형상을 지지했던 니케아 공의회(Councils of Nicaea-787년)의 결정의 어리석음을 수치스럽게 여겼다.  결국 우상의 기원은 형체를 지닌 신을 찾는 인간의 부패한 욕심에 있으며, 형상이 형성되면, 곧바로 숭배가 뒤따르게 된다. 고 보았다. 그러므로 형상을 떠나는 것이 순전한 기독교인이 되는 것임을 강조하고 있다. 이것은 칼빈이 가지고 있는 형상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라고 할 수 있다.


다른 한편으로 칼빈은 ‘형상의 허용’을 소극적이고, 한계적으로 짧게 언급하고 있기도 하다. “조각이나 그림은 하나님이 주신 재능이므로, 이것들은 각기 순전하고 정당하게 사용되어야 할 것이다. 주께서 그의 영광과 우리의 유익을 위하여 베풀어주신 이 재능들을 잘못 사용하여 우리를 멸망에 빠뜨리도록 해서는 안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인류의 공통된 유익을 위하여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자들에게 베풀어주시는 성령의 지극히 탁월한 은사들을 잊어서는 안 된다. 성막을 짓는 데에 필요했던 브살렐과 오홀리압의 총명과 지식은 하나님의 성령께서 그들에게 부어주신 것이다.” “은사들은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므로 그 자체로서는 더러워질 수 가 없으나, 부패한 사람에게서는 이 은사들이 더 이상 순결하지 못하게 되었고, 그리하여 그 은사들을 통하여 전혀 찬양을 받을 수 없게 되었다.”고 한 것이다.


우리가 어떠한 문화적 현상을 올바르게 해석하기 위해서 요구되는 방법론중의 하나가 공시적(公示的, Synchronic),통시적(通時的, Diachronic) 해석 방법이다. 예컨대  2c부터 기독교와 철학 사이에 나타났던 혼합절충주의(Syncretism)나 중세 시대(8,9c) 성상논쟁(Iconoclasm)문제들이나 고딕 시대의 성모 숭배 사상 등의 현상들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시대의 상황과 시대정신에 대한 충분한 인지가 절대적으로 요구되듯이 16세기 극심한 종교적 논쟁과 탄압 속에서 종교 개혁을 부르짖던 개혁주의자 칼빈의 입장을 견지하면, 그가 보였던 형상과 관련한 부정적 인식은 충분히 이해 할 수 있는 부분이다. 그리고 우리가 교회사나 미술사를 통해서도 어렵지 않게 확인 할 수 있듯이 중세와 르네상스를 거치면서 예술(시각예술)은 실제로 교회에 충성하면서 비성경적, 비기독교적인 요소로 작용했었다. 그리고 종교개혁 당시의 상황에서도 ‘예술(바로크 시대)은 로마 카톨릭 교회(교황주의)에 의해서 명백하게 반종교개혁의 도구’로 사용되어 졌었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들이 개혁주의 신학자 칼빈의 형상에 대한 입장을 더욱 확고하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고 볼 수 있다. 칼빈의 입장에 대한 이해에도 불구하고 결과적으로 그의 이러한 형상에 대한 부정적이고 각박한 견해는 교회(개신교)와 기독교 미술의 사이가 멀어지게 했을 뿐만 아니라, 그의 사상을 신뢰하는 기독교인들과 기독교 미술의 관계를 소원하게 하는 결과를 낳았다.

 

몇몇 개혁주의 예술론자들은 칼빈이 교회로부터 예술을 해방시켰으며, 그로인하여 예술은 교회의 속박에서 벗어나 순수한 예술로서 자유롭게 하나님이 창조하신 아름다운 세계를 표현하는 도구가 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그러나 결과는 예술이 인간 이성 중심의 시대라는 18세기의 계몽주의를 지나면서 순수예술(fine art)이라는 보호벽속에서 “예술가들은 천재로 간주되었고, 사람들에게 거의 종교적 중요성을 지닌 어떤 것, 곧 예술작품을 제공 할 수 있는 매우 특수한 천부적 재능의 소유자로 인식되었으며, 어느 면에서는 예술이 종교의 역할을 대신하는” 지경에 까지 이르게 되었었다. 또한 19세기에서 20세기 초반에 이르는 동안 미술은 실제성보다는 대상의 본질에 더 관심을 가지면서 과거의 전통적 규범이나 가치관들은 사라졌고, 점차 비기독교적 예술 표현들이 주류를 이루게 되었다. 그리고 포스트모던 미술은 기독교의 무관심속에 더욱더 비기독교적, 더 나아가서 반 기독교적 위용을 확산시키면서 강력하게 기독교를 공격하고 있다. 


오늘날도 여전히 ‘형상’에 대한 칼빈의 인식이 기독교 공동체 내에서 지대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그러나 중요한 사실은 이제 ‘형상’에 대한 ‘인식의 변화’를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분명히 16세기 종교개혁 이전에는 ‘형상’이 ‘성상’으로 인식되었었고, 앞서 밝혔듯이 ‘형상’이 ‘예배의 대상’이 되었던 시대가 있었던 것은 명백한 역사적 사실이다. 그러나 오늘날은 기독교 공동체의 지적 성숙과 올바른 신앙에 대한 다양한 교육들로 인하여 더 이상 ‘형상’을 ‘성상’으로 인식하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오히려 ‘형상’을 ‘성상’으로 인식시킨다는 것이 불가능 해진 것이 이 시대 인식의 현실이다. 그러므로 더 이상 ‘형상’은 곧 ‘성상’ 또는 ‘예배의 대상’으로 연결시키는 것은 무의미하다. 그러므로 이제는 ‘형상’은 ‘예배의 대상’이 아닌 ‘하나님의 영광을 찬양하는 도구’이며 ‘방법’이라는 인식의 전환이 절실히 요구된다.




2. 현대 기독교 미술의 정체성 


기독교 미술이란 무엇인가?  단순해 보이는 이 질문에 대한 답을 명확하게 정의한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선행적으로 먼저 기독교가 무엇이냐? 미술이 무엇이냐? 미가 무엇이냐? 하는 근원적이고 포괄적인 물음까지 확대될 수밖에 없는 질문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근원적인 문제를 다루는 것이 본 연구의 목적이 아니므로 여기에서는 이미 일반적으로 인식되어져 있는 기독교미술에 대한 카테고리 안에서 ‘현대 기독교미술의 정체성’ 문제를 다룰 것이다.  


(1) 현대 기독교 미술의 범주와 의미:수용성(Expropriation)과 지향성(Intention)

기독교 미술에 대한 일반화된 정의는 첫째, 협의적 의미의 기독교 미술은 일명 ‘성화’로 불리는 성경속의 이야기들이나 기독교의 역사 속에서 나타난 사건들을 주제나 소재로 삼는 그림을 들 수 있을 것이다. 둘째, 작가가 기독교인인 경우 그가 제작하는 작품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셋째, 기독교 신앙의 체험에서 비롯된 작품을 들 수 있다. 그리고 넷째, 기독교 세계관을 반영하고 있는 작품을 들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네 종류의 정의가 동일한 의미론적 가치를 가지고 있느냐 하는 문제가 남는다. 본 연구에서는 기독교 미술의 범위를 크게 두 가지로 구분하여 그 목적과 의미의 차이점을 찾아보려고 한다. 첫째는 ‘수용성(收用性)’이고 둘째는 ‘지향성(志向性)’이다. ‘수용성’의 입장에서 현대 기독교 미술의 유형은 ‘창조적 다양성과 기독교 세계관의 반영’이라는 것이다. 이 입장은 ‘포괄적 의미’의 기독교적 미술들을 수용하여 그 범주를 확장시키는데 목적이 있는 것이다. 반면에 ‘지향성’의 입장에서는 ‘사역적 은사’로서의 역할과 ‘예배로서의 미술’, ‘예술적 공교함’과 ‘시대정신의 반영’ 을 통하여 예수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복음을 전하는 ‘사역적 의미’의 현대 기독교 미술 유형을 말하는 것이다.  


기독교 미술의 근원적인 문제는 ‘믿음’에서 출발한다. 믿음은 기독교 미술을 논함에 앞서서 선행되어야 하는 ‘절대적 가치’를 가진다. ‘믿음’이라는 신앙적 토대 없이 표현되어지는 어떠한 예술적 행위도 기독교적일 수는 없는 것이다. 기독 신앙은 인간의 논리적 사변으로 ‘이것이 하나님이다.’ 라고 명명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하나님을 이해 할 수 있는 유일한 통로는 ‘믿음’이라는 것이고, 이러한 믿음의 토대 없이 하나님을 향한 그 어떠한 예술적 표현도 의미가 없는 것이다. 즉 기독교 미술은 소재주의적 발상과 표현보다는 내적 성찰이 선행된 ‘믿음의 표현’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믿음은 하나님을, 하나님의 의도를, 하나님의 본질을 발견할 수 있는 시원이 되고, 그러한 시원에서 인간은 하나님을 표현하는 본질을 재현하게 되기 때문이다.


또한 기독교의 주체는 삼위일체 하나님이요, 기독교는 하나님이 부르신 부르심 과 인간의 응답이 인격적으로 결합한 종교이며, 기독교는 유일하신 하나님을 믿는 종교이며, 세상을 사랑하는 윤리적인 종교이며, 만민을 위한 만민의 종교이며, 부활과 영혼 구원을 믿는 영생의 종교로서 종교와 윤리, 신앙과 행위, 말씀과 사랑의 실현, 부활과 영생을 합한 종교이다. 기독교의 진리가 진정으로 옳다면, 단순히 '교리적'(Doctrina)으로 만 옳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삶의 모든 영역과 인간의 전 영역에서 옳으며, 진리라는 확고한 선언적 입장을 취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것이 말씀으로 이 우주를 창조하신 하나님을 믿는 자들이 취해야 할 절대적인 자세이며,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진정한 반응인 것이다. 현대 기독교 미술 또한 이러한 확고한 입장을 전제로 하여 반응하고 표현하여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전제를 바탕으로 현대 기독교 미술의 정체성을 확인하기 위한 조건은 과연 무엇인가? 라는 물음에 본 연구자는 대략 3가지의 표현 유형 찾아보며, 그 의미와 형식을 논하고자 한다.




(2) 현대 기독교미술의 유형 : 관계항으로서의 기독교 미술

 

1) 창조적 다양성과 기독교 세계관의 반영

일반적으로 미술은 아름다움을 창조하는 기능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기독교 미술은 일반 미술과는 분명히 구별되는 면을 가지고 있는데, 그것은 일반 미술이 대상을 자연으로부터의 조화에서 내적 표현으로 유추해가는 반면, 기독교 미술은 계시 즉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자기표현을 추구해 간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일반적 미술은 주관적 현실을 객관화하고, 자연계의 외부적 경험을 주관화 한다는 것이며, 기독교 미술은 하나님의 계시로부터 출발하여 그 계시에 대한 객관적 또는 주관적인 응답의 형태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신앙적 관점에서 보면 이러한 계시로부터의 자기표현 형식은 이미 하나님이 우리 모두에게 보편적으로 주신 ‘일반 은총’라고 볼 수 있다.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지으시고 우주를 창조 하실 때에 그 창조 행위는 예술적 창조였다. 이것은 다른 의미로 ‘예술 행위’로 ‘예술적 가치’를 지니고 있는 ‘예술적 형상’들을 창조하셨다는 것이다. 고로 인간의 예술행위는 하나님의 표현 행위(창조)로 귀결되어 진다는 것이다. "창조성은 우리의 ‘인간 됨’(Mannishness)의 본질에 속한다." 라는 프란시스 쉐퍼(F. Schaeffer)의 표현처럼 창조성은 인간의 본질인 동시에 기독교 미술이 갖추어야 하는 필요조건인 것이다.

 

기독교적 창조행위의 가장 기본적 정의는하나님의 뜻을 표현하려는 형상화 작업이다.’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형상화 작업을 진행하기 위한 방법을 크게 가지 -객관적 의지와 주관적 확신- 방법으로 구분 있다. 말하자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하여교의적(Dogmatical)’ 의미로 반응 하느냐? 아니면레마’(rhema) 적으로 반응하느냐?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뜻을 객관적 의지의 방법으로만 이해하려 하는 자세는 물론 신앙적인 방법은 아니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뜻이 내포하고 있는 창조성과 다양성을 제어하는 결과를 초래 수도 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이 다분히 함의적(含意的) 언어 구조와 은유적, 암시적, 상징적, 유비적 표현 형식등과 같이 다양한 형식으로 쓰여 졌기 때문에 말씀이 다양하게 받아들여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또한 말씀은 말씀을 받는 대상, 환경, 상황 등에 따라 말씀이 매우 유기적으로 해석되어질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러한 다양성을 표현하기 위하여 주관적 의지의 표현이 요구되고, 이러한 주관적 의지 속에서 새로운 창조적인 표현이, 새로운 상상력이, 새로운 의미역이 생겨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이해의 바탕 위에서 기독교 미술을 살펴보면 기독교 미술이야 말로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을 창조적이고, 다양한 방법으로 재발견 있는 매우 중요한 매체가 된다는 것이다. 문법적 해석만으로는 하나님의 깊고 심원(心源) 진리의 말씀을 깨닫지도 표현하지도 한다는 것이다. 물론 하나님의 말씀은 일점일획도 틀림이 없지만(無誤性) 해석과 받아들임에 있어서는 창조적 다양성이 요구된다는 것이고, 이를 통하여 말씀의 행간에 감추어져 있는 다른 진리의 소리를 발견 있는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는 주관적 해석이 가져 있는 보편성, 객관성의 부족 문제 또는 신앙적인 요소에 대한 견제 차원에서의 객관적 해석 또한 중요성을 가진다. 정리하면 현대 기독교 미술은 하나님의 뜻을 표현함에 있어서 성경에 근거한 객관적인 해석의 견제를 바탕으로 보다 적극적으로주관적 고백 표현을 추구해 나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결국 이러한 방법이 21세기 새로운 기독교 미술의 () 있는 길이 것이다.

 

다양성의 또 다른 측면은 서구 문화권이 아닌 타 문화권 공동체 속에의 기독교 미술이 어떻게 정착하느냐 하는 문제이다. 복음은 오대양 육대주에 두루 전해져 있다. 그리고 그 지역마다 지역적 특색 환경과 접목되어 정착되는 과정을 거쳐 오늘까지 이어져 온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기독교 미술 또한 각 지역 공동체 마다 고유한 표현 형식을 통해 나타나야 하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에게 이미 익숙해 있는 서구적 기독교 미술은 서구의 환경 속에서 형성된 서구적 예술인 것을 인식하여야 한다. 한국은 한국적 표현으로, 아시아는 아시아적 표현으로, 아프리카는 아프리카적 표현을 통하여 기독교 미술이 표현되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무엇을, 왜 표현 하느냐? 하는 기독교적 본질에 대한 물음이지 어떠한 형식으로 표현 했느냐?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비서구적 또는 비기독교적 문화권 공동체의 문화는 무조건 악한 것이라며 배타하고 오직 고정된 기독교적 문화 형식만을 무모할 정도로 집착하는, 독선적, 배타적 사고가 오히려 기독교를 위축시켰던 지난날의 역사를 되풀이 하지 말고 이제 우리 인류의 모든 문화권 속에서 하나님의 주권을 점점 조화롭게 드러내고 재발견하는 노력이 절실히 요구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우리는 우리 고유의 전통적인 조형성을 가지고 기독교의 본질을 표현하는데 심혈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는기독교 세계관 대한 반영으로서의 기독교 미술이다. 기독교 세계관에 따른 조형 표현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이 아름답게 창조하신 세상에서창조사역에 동참하는재창조 기능을 가진다. 작가의 신앙 고백이 없이 기독교적인 의미를 부여하기 위해서 작품에다 기독교적 의미가 담긴 화제(畵題) 붙이거나  기독교적 소재를 사용하고 있다고 해서 그것이 진정한 의미의 기독교 미술이 되는 충분조건이 분명히 아니다. 그것은 단지 진부한종교적 소재주의종교적 장식주의 불과하다. 힐러리 브랜드 아드리엔느 채플린은기독교적 이미지나 주제는 신자든 비신자든 모두가 채용 있기에, 자체로기독교적인작품이 되는 것은 아니다. 또한 기독교인이 만들어 내는 작품이면 어떤 것이든 자동적으로거듭난예술이 된다는 것도 아니다. 철저히 기독교적인 세계관에서 비롯된 예술, 다시 말해 기독교 세계관에 속한 것들을 위해 만들어지고 세계관을 해석하고 있는 예술, 그것이야 말로 우리가 일컫는 기독교 예술이다.”라고 주장하고 있다. 예술과 기독교 세계관과의 관계에 대하여 F. 쉐퍼는예술 작품 속에 깊이 투영된 세계관은 궁극적으로 성경에 따라 조명되어야 한다.” 말하고 있다. 따라서 기독교 미술의 가치는 성경에 따라 조명되어진 기독교 세계관에 입각하여 작가 자신의 신앙고백과 예술관을 표현하고 해석하는 것에 있다고 있다.


 


2) 사역적 소명의식과 예배로서의 미술


“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에는 후회하심이 없느니라.”

 

앞에서 우리는 기독교 미술의 조건인 ‘창조적 다양성’과 ‘기독교 세계관의 반영’을 논하면서 기독교 미술이라는 것이 종교적 주제만을 다루는 한정적 종교 예술이 아닌 포괄적 의미를 가지는 확장된 개념의 예술임을 언급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기독교 미술의 ‘수용 범주’에는 몇 가지 극복해야 할 문제들을 가지고 있다. ‘수용적 범주’의 기독교 미술 안에서는 기독교의 핵심인 ‘신앙고백’이 없이도 작업이 가능하다. 비기독교인들 작품 속에서도 이미 성경적 주제들과 기독교 세계관을 반영한 작품들을 어렵지 않게 찾아 볼 수 있으며, 심지어 반 기독교적 의미로도 기독교적 주제들이 사용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또한 기독교인이 그린 작품 가운데서도 ‘비기독교적인 미술’이 분명 존재 할 수 있다. 말하자면 외형적으로 보이는 것은 기독교적일지 몰라도 의미론적으로 본다면 기독교적이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본 연구에서는 이러한 문제 해결의 실마리를 ‘지향성’에서 찾고 있다.

 

‘지향성’의 입장은 ‘사역적 소명의식과 예배로서의 미술’, ‘예술적 공교함과 시대정신의 반영’ 을 통하여 구원의 복음을 전하는 적극적 의미의 현대 기독교 미술 유형을 말하는 것이다.  먼저 ‘사역적 소명의식’에 대한 의미를 논하자면, ‘사역적 소명의식’은 기독교 미술의 궁극적(窮極的) 지향임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사역’은 ‘은사’의 행위적 개념을 가진다. ‘은사’는 전적으로 피조물이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능력이다. 그러므로 그 쓰임 또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쓰여 질 때 온전해 질 수 있는 ‘사역적 의무’를 동반한다는 것이다.

 

‘사역적 의미’에서 본다면, 기독교적 성향의 작가는 자신의 예술적 세계관과 하나님의 세계가 일치하느냐? 일치하지 않느냐? 하는 물음과 복음적이냐? 복음적이지 않느냐? 하는 신앙적 ‘진정성’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신앙적 ‘진정성’은 ‘그리스도와의 지속적인 연합’을 통해 생성되어진다. 이러한 ‘진정성’ 확보 문제는 앞에서 말한 ‘창조적 다양성’이 범 할 수 있는 오류를 최소화하고 더욱 깊이 있는 창조적 표현을 이끌어 내기 위한 매우 중요한 요소인 것이다. 말하자면 작가의 ‘진실한 신앙 고백’이 작품 속에 반영되어 있을 때 비로소 진정한 의미의 기독교 미술이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현대 심리학이 제공하는 현대 예술의 개념은 “예술 작품은 영혼에 의하여, 영혼을 위하여 창조되어야하며, 영혼을 표현하고 영혼에 자양을 주고 영혼을 풍부하게 해주는 것이 되지 않으면 안 된다.” “미술은 영혼의 언어, 느끼고 생각하며 어렴풋하지만 총체적인 우리의 본성을 표현하는 언어이다.” 라는 것이다. 이처럼 현대 예술은 물질적인 것 보다는 영적인 세계에 대한 표현에 집중하고 있다는 것이다. 추론(推論)해본다면, 만약 비윤리적이고, 비기독교적인 어떤 것이 위대한 예술작품으로 표현되어진다면 평범한 주장이나 평범한 메시지와는 비교 할 수 없을 정도로 인간의 사고와 영혼에 파격적인 영향을 미칠 것이다. 역으로 하나님의 사랑과 복음이 위대한 예술 작품으로 표현되어 진다면 평범한 주장과 마찬가지로 평범한 메시지와는 비교 할 수 없을 정도로 인간의 사고와 영혼에 파격적인 영향을 미칠 것이다. 그러기에 오늘날에는 예술이라는 도구가 더욱 더 중요성을 가지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로크마커는 “새로운 비기독교적 사고방식을 유포시키는데 각별히 선도적 역할을 한 주범은 바로 예술이다. 어떤 의미에서 예술은 진정한 ‘선구자’(avant-garde)였다 . 비기독교적인 영성(spirituality)을 탐색하는데 단연 타 분야를 앞질렀던 것이다.”라며 예술이 가지고 있는 비기독교적 역할에 대하여 우려하였다. 그리고 그 이유가 그리스도인들이 오랫동안 예술 토론이나 활동에서 발을 뺏기 때문으로 진단하였다. 이러한 진단을 근거로 현대 기독교 미술의 상황을 바라본다면, 현대 기독교 미술은 ‘영적 전쟁’의 치열한 전장 속에서 고전분투하고 있는 모습일 것이다. 그러므로 현대 기독교 미술이 이러한 영적 전쟁에서 이기고, 세상 속에서 그 영향력을 행사하는 사역의 도구가 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작가의 ‘성령 충만’이 절실히 요구된다.

 

이러한 ‘성령 충만’을 바탕으로 기독교 미술은 하나님의 복음을 선포하는 케리그마(Kerygma)적 사명과 하나님의 구원과 사랑을 전하는 메신저의 역할을 수행하여야 한다. 일반적으로 예술가가 가지고 있는 세계관(藝術觀)은 그의 작품을 통해서 투영되어 진다. 복음적 세계관을 가진 기독교 예술가의 진실 된 작품은 결국 기독교적 세계관을 드러내게 되는 것이며, 이러한 기독교적 세계관을 통해 표현된 작품은 관람자들로 하여금 다시 기독교적 세계관을 경험하게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결국 예술 행위는 사역적 의미를 가진다는 것이다. 기독교 미술을 맡은 자들은 하나님이 주신 달란트인 미술을 통하여 하나님의 사랑과 그리스도의 복음을 증거 하려는 청지기적 소명의식을 가져야 하며, 이를 위하여 예술가들은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 속에서 자신의 신앙을 더욱 성숙시켜야 한다.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유익한 것이 아니요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덕을 세우는 것이 아니니.”라는 말씀처럼 ‘수용적 의미’의 미술도 기독교 미술의 범주에 속할 수 있겠지만, 우리가 하나님이 주신 귀한 은사를 어떻게 사용하느냐? 하는 문제의 기준은 다름 아닌 어떻게 사용 하는 것이 ‘유익한 것’이며, 어떻게 사용하는 것이 ‘덕을 세우는 것’인지에 대한 숙고가 요구된다. 그런 의미에서 자신이 그림을 그리는 이유가 “그림을 보는 이가 감동을 받아 기독교로 회심하도록 하는 것이다.”라고 선언하는 조루주 루오(Georges Rouault)의 고백 속에서 그가 얼마나 예술을 통해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을 충실하게 실천하려 했던가 하는 것을 확인 할 수 있다. 이 루오의 고백은 오늘날 현대 기독교미술인들에게 커다란 도전과 비전을 제시하고 있다. 

 

현대 기독교 미술에서 ‘사역적 소명 의식’과 더불어서 요구되는 중요한 요소는 ‘예배로서의 미술’이다. ‘예배로서의 미술’은 ‘예술 행위 자체가 하나의 예배의 과정인 참예(參詣)’가 된다는 의미를 가진다. 이런 의미에서 기독교 미술은 반드시 ‘예배로서의 미술’이 되어야 하며, 성령의 인도하심 안에서 자유와 거룩함이 있어야한다.

 

미술의 역사가 우리에게 증명하는 것은 “예술은 주술에서 시작되었으며”, “예술은 종교와도 같은 영향을 서로 주고받는다.”것이며 “모든 예술작품은 영적 차원을 갖는다.” 는 것이다. 기독교 미술이라 할 때에는 더더욱 그러하다. 그것은 예술 작업 자체가 다른 창작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문화 명령에 충실한 것이기 때문에 하나의 ‘영적예배’라고 할 수 있다.

 

기독교적 입장에서 본다면 기독교 미술은 하나님의 말씀이나 작가의 기독교적 세계관속에서 생성된 예술적 욕구와 "깊은 묵상" 이라는 사유(思惟)적 예배 과정을 통하여 얻어지는 이미지를 시각적으로 표현하는 것이다. 결국 이러한 제작 과정에서의 중요한 우선순위가 창작 행위가 아닌 ‘예배의 과정’ 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과정을 충족시킬 때 비로소 미술 작품은 하나님께 드리는 ‘경배와 찬양’의 시각화 과정이 되는 것이고, 이 과정이 작가가 하나님과 소통하는 ‘영적 통로’이며, ‘영적 예배’가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영적 예배 과정을 통해 표현되어진 ‘묵상 미술’은  “말씀이 육신이 되신 것” 같이 ‘말씀의 시각화’를 사실적인 형상 만에 국한되지 않으면서 보다 다양한 표현 형식을 통하여 구원의 메시지를 세상에 선포하는 초월적 능력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에는 영적인 치유와 삶의 회복되는 능력이 있다. 그러므로 예배로서의 미술 역시 같은 능력을 갖추어야할 것이다. 예배를 통하여 우리의 영혼이 날마다 새 생명을 얻듯이 작가는 예술작품의 제작 과정을 통하여서도 영성을 회복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기독교 미술은 믿음으로 드리는 ‘예배로서의 미술’이 되어야 하며, 삶으로 드리는 ‘예배로서의 미술’이 되어야 한다. 이러한 과정을 통할 때 에 비로소 성령과의 동행이 이루어 질 것이며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 함이 있는”것처럼 기독교 미술은 작가 자신을 드러내는 인본주의적 교만의 도구가 아닌, 주의 영이 주는 자유 함으로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아름다운 도구가 될 수 있는 것이다.

 

한편 ‘예배로서의 미술’은 예배의 과정뿐만 아니라 작가의 전인적 (全人, whole man) 삶 자체의 표현이 되기도 한다. 결국 예배로서의 미술은 하나님과의 교통의 통로이며, 전인적 삶의 표현이며, 종교적 상황에의 실존적 참여인 것이다. 모든 예술은 삶에 대해 느끼는 어떤 정감을 표현하며, 그 정감은 필연적으로 그 자체를 전달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기독교 미술의 작가들은 철저하게 그리스도와의 연합된 삶을 통하여서 만이 진정한 예배로서의 미술에 참예(參詣) 할 수 있는 것이다.

 

또한 ‘예배로서의 미술’은 작가의 신앙적 감정을 서술하는(describing)것이 아닌 감정을 표현(expressing)하는 것이다. ‘서술의 개념’이 이미 일반화된 상징(symbol)의 개념을 벗어나지 못하는 반면 ‘표현의 개념’은 다분히 개별화된 알레고리(allegory)적 요소를 가지는 특성이 있다. 그러므로 알레고리적 요소를 가지는 ‘예배로서의 미술’은 표현의 다양성과 풍요로움을 가질 수 있는 것이다.

 


3) 예술적 공교함과 시대정신

기독교 미술은 ‘시대정신’이라는 문제에 관심을 가져야한다. 각 시대 마다 예술의 양식(style)은 항상 변화했고, 앞으로도 변화 할 것이다. 예술이 살아 움직이는 한 그 형식은 변하기 마련이다. 이것은 인간의 미의식이 변화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인간의 미의식은 매우 중요한 감성적, 지적 의식이다. 이러한 변화의 흐름을 정확하게 읽고 이러한 흐름을 이끌어가야 하는 것이 기독교 미술을 생산해 나가는 이들의 책무 일 것이다. 

 

21세기를 살아가는 기독교 예술가의 작품은 21세기의 시대정신이 투영된 예술이어야 한다. 이 단언이 매우 쉽게 들리겠지만 사실 너무나 많은 현대 기독교 미술가들이 시대를 앞서가지 못하고 – 이것은 유행에 뒤떨어진다는 의미가 아니고 시대정신을 읽지 못하고, 자기 개발에 대한 연구가 부족했다는 의미이다. - 과거의 예술에 의존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다시 말해 초대적, 중세적 조형 사고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제 과거의 기독교적 소재만을 모방하는 저급한 생 쉬플리스(St. Suplice)적 미술에서 벗어나 과거를 자양분으로 한 새로운 21세기의 가치를 지닌 기독교 미술을 위하여 창조적 다양성과 기능적 성숙과 순수하고 진실 된 조형 사고를 가지고 새로운 시대를 여는 선구자적 노력이 절실히 요구되는 시점에 와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 21세기 기독교인의 예술 참여에 대한 도전은 각각의 예술 매체가 지닌 위엄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진리주장 둘 다를 온전히 존중하는 가운데 각 세대마다 새롭게 선포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

 

기독교 미술은‘신앙적 성숙’과 더불어서 ‘기능적 성숙’을 가져야 한다.  ‘기능적 성숙’은 사실적인 표현의 성숙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화면을 이끌어 가는 조형 능력의 성숙을 포함한 종합적 완성도를 포함하는 말이다.

 

예술의 주요 요소 중에 하나가 기능적 완성도(technique)라는 사실은 상식적인 것이다. Art(예술)라는 말은 라틴어 아르스(ars)에서 유래된 개념인데, 이 ‘ars’를 그리스어로 직역한 것이 ‘테크네’(techne)인 것이다. 즉 예술은 테크닉과 동일한 의미를 가진다는 것이 고전적 해석이었다. 그래서 중세나 르네상스 시대의 미술과 조각은 무엇보다도 기능적 완성도가 중시 되었던 것이다. 신앙적 측면에서 보면 기독교 예술가-하나님으로부터 창조적 달란트를 부여 받은 사람-에게 있어서 기능적 성숙을 위한 노력은 하나님이 주신 은사에 대한 감사의 표현인 동시에 신앙적 사명인 것이다.

 

한편 예술적 측면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이러한 하나님이 지시하신 식양대로 성막과 성전을 건축하고 주변 기물들(聖物)을 제작했던 장색(匠色)들의 숭고한 예술적 고민에 대한 부분이다. 성물 들을 제작함에 있어서 기술적인 부분까지 하나님이 직접 하신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식양을 지시한 분은 하나님이시지만 이 지시를 표현하기 위한 예술적 상상력은 장색들의 몫이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여기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당시의 장색들은 하나님의 지시를 수행 할 수 있을 정도의 기능적 성숙을 충분히 갖추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다소 과장된 유추이긴 하지만, 기독교 예술가들의 미숙함은 결국 하나님이 주신 은사를 사장시키는 것이고 하나님의 이미지를 격하시키는 결과를 초래 한다는 것이다. 세속적 현대 미술(포스트모더니즘)의 개념에서 Art 와 Technique의 상관관계를 이미 효력을 상실한 낡은 개념으로 여기고 있으며, 현대 미술이 추구하는 방향은 분명 기능적 성숙과 거리가 멀다. 오히려 기능적 성숙 보다는 새로운 이미지, 새로운 형식, 새로운 아이디어, 새로운 매체 등과 같은 것을 발견하기를 갈망한다. 이러한 현대 미술 환경 속에서 현대 기독교 미술은 어떠한 입장을 취해야 하는가? 기독교 미술이 이러한 유행에 동승한다고 해서 현대적 기독교 미술이 되는 것인가? 그것은 동의하기 어렵다. 오히려 21세기 기독교 미술의 미래는 끊임없이 자신의 신앙적 세계관을 성숙시키고 이것을 표현하기에 부족함이 없는 기능적 성숙을 위한 부단한 노력들을 통하여 열릴 것이다. 하나님께서 ‘브사렐’과 ‘오홀리압’에게 성령을 충만히 부어주셔서, "지혜와 총명과 지식과 온갖 기술을 갖추게 하시며," 또한 " 공교한 일을 연구하여 금과 은과 놋으로 만들게 하며, 온갖 보석을 깎아내는 일과 나무로 조각하는 일"을 하게 하셔서 성막을 만들게 하신 것처럼, 이시대의 기독교 미술가들도 브사렐과 오홀리압 처럼 하나님으로부터 성령 충만을 받고 공교한일을 부단히 연구하여 하나님이 주신 지극히 아름다운 재능을 성숙시켜야 하는 의무가 있는 것이다. 

 

   현대 기독교 미술가들은 “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에는 후회하심이 없다”는 말씀에 힘입어 긍정적 자존감을 가지고 “하나님이 주신 은사를 불일 듯” 하게 해야 할 것이다. 


일반 미술 형식은 인류 역사와 시대정신을 반영하며 지금까지 발전해왔다. 기독교 미술이라고 해서 특별한 조형 형식을 갖는 것은 아니다 앞에서도 밝히고 있듯이 기독교 미술은 형식의 구별에 있는 것이 아니고 내용의 구별에 있는 것이다. 따라서 예술적 성숙(미의식)을 위한 보다 적극적인 일반미술의 조형 훈련이 요구된다. 우리가 기독교 미술의 역사를 통해 확인 할 수 있는 것은 초기 기독교 미술에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일반 미술 양식들을 적극적으로 수용해서 자신만의 독자적인 조형 양식(미의식)을 만들어냈던 것처럼 오늘날 현대 기독교 미술인들도 예술적 성숙을 위한 각고의 노력이 요구된다. 





결 론


‘현대 기독교 미술은 그 역할과 기능을 올바로 수행하지 못하고 있다.’ 라는 것이 오늘날 기독교 미술의 자가 진단이다. 본 연구에서는 이러한 진단을 전제로 하여 현대 기독교 미술의 개념을 새롭게 정립하고 앞으로의 발전 방향을 모색하려는 입장에서 논지를 전개하였다. 이를 위해 먼저 1장에서는 성경과 형상과의 관계, 개혁주의 신학자 칼빈의 사상과 형상의 관계에 대한 이해를 통하여 기독교 미술의 근본적 문제인 ‘신앙과 형상’의 관계를 현대 기독교 미술의 입장에서 분석하였다. 그리고 분석의 결과로 이 시대에는 ‘형상’이 ‘성상’이나 ‘예배의 대상’이 아닌 하나님의 영광을 찬미하는 ‘도구’이며 ‘방법’이라는 사실을 주장하였다. 그리고 2장에서는 기독교 미술이란 무엇인가? 라는 가장 근본적인 물음을 던지면서, 현대 기독교 미술의 정체성을 찾기 위한 목적으로 먼저 ‘현대 기독교 미술의 범주와 의미’를 설정하였다. 그 범주로서 제시한 것이 ‘수용성’과 ‘지향성’이다. 그리고 현대 기독교 미술의 의미를  ‘믿음’이라는 신앙적 토대 위에 형성된 ‘내적 진정성’을 통하여 형식주의, 소재주의적 자세에서 벗어나서 기독교의 본질을 추구해야 한다는 것에서 찾고 있다. 그리고 끝으로 ‘현대 기독교 미술의 유형’을 ‘수용성’과 ‘지향성’이라는 형식으로 구분하여 현대 기독교미술의 정체성 문제를 밝혔다. ‘수용적 범주’로는 ‘창조적 다양성과 기독교 세계관의 반영’을 제시하고 있으며. ‘지향적 범주’로는 ‘사역적 소명의식과 예배로서의 미술’, ‘예술적 공교함과 시대정신’을 제시하였다.

 

이 연구를 통하여 우리가 확인 할 수 있는 것은 현대 기독교 미술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여 새로운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게 된 작가의 신앙고백이고 예배이며,  구원의 기쁨과 영생의 소망의 메시지를 전하는 사역적 도구이며,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세상의 아름다움을 통해 하나님 영광을 찬양하는 찬양의 도구라는 사실이다. 그리고 이러한 ‘다양성’속의 ‘진정성’이 ‘현대 기독교 미술의 모습’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가장 서글픈’ 예술가는 자신이 그리스도인임에도 불구하고 그의 예술품속에 성경적 세계관을 전혀 갖지 못한 채 비 기독교적인 세계관을 구현하는 자이다.”라고 밝힌 F. 쉐퍼의 말이 그리스도인임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신앙과 예술관을 일치시키지 못하고 있는 수많은 미술가들의 귓가에 더욱 크게 들려지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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