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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의 부재”_2024.11.21.목. 오후3시 제주교도소 예배 설교문

James Chae 2024. 11. 24. 05:52

시편 42

2024.11.21.. 오후3 제주교도소 예배 설교문

하느님의 부재

 

채야고보 신부(성공회 부산교구 제주우정교회 관할사제)

 

우리는 하느님의 있음을 정말 느끼며 살고 있을까요? 보이지 않는 하느님이 실제로 곁에 있는 동료들처럼, 우리가 보고 만질 있는 우리의 몸처럼 하느님의 있음이 실제로 느껴지시나요? 그러나 실제로 우리는 일상에서 이러한 질문이 별로 중요하게 다가오지 않습니다. 하느님이 계시다고 생각하든 계시다고 생각하든 우리의 일상은 전혀 달라지는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느님이 계신 것도 같고 아닌 것도 같은 애매한 입장을 취하고 때가 많습니다. 하느님은 정말 살아계신 걸까요? 만약 그렇다면 우리는 그런 하느님을 느끼지 못하고, 믿는다 하면서 하느님의 뜻대로 살지 못하는 걸까요? 어쩌면 우리는 애써 일상의 속에서 하느님의 현존을 오히려 인식하기 싫어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순간 우리가 그분을 인정하고 인식하며 산다는 것은 우리 삶에 있어서 많은 부분에 자유보다는 제약이 뒤따름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마치 하느님이 계신 것처럼 생각하고 행동할 때가 우리는 자유롭습니다.  하느님은 예배 중에만 잠깐 생각하면 되는 종교적 존재로만 우리는 여기는 같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시편 42편의 시인은 우리와는 다르게 하느님의 있음이 아니라하느님의 부재 깊이 체험하고 이를 노래했습니다. 그에게 있어서하느님의 부재 영문도 모른 갑자기 그의 삶에 닥쳐온 것입니다. 그는하느님의 있음 인식하고 믿음으로 살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그가 어느 갑자기 하느님의 없음을 느낍니다. 그것은 그에게 마치 하나가 잘려나간 흔적을 보는 것처럼 고통을 안긴 같습니다. 그는목마름으로’, ‘눈물이 음식이 정도로’, ‘뼈를 깎는 아픔으로이러한 하느님의 부재를 체험합니다. 하느님의 부재 체험 속에서 그는 다음과 같이 노래합니다.

 

“하느님, 생명을 주시는 나의 하느님, 당신이 그리워 목이 탑니다. 언제나 임 계신 데 이르러 당신의 얼굴을 뵈오리이까?” 시편 42:2

 

 

하느님의 현존을 느끼는 상황이라면 이런 기도는 없습니다. 그는 목놓아 울부짖어도 하느님을 느낄 없는 상황 가운데 놓인 것입니다. 이런 그에게 사람들은너의 하느님이 어디 있느냐?”라고 조롱까지 합니다. 그는 숨을 없는 공황장애 속에서 폭풍에 휩쓸려 사라지는 같은 극심한 공포와 고통을 겪습니다. 그는 사람들의 참소에 침묵 말고는 어떠한 말도 없었습니다.

 

누군가가 만약 여러분에게너의 하느님이 어디 있느냐?”라고 조롱한다면 여러분은 어떻게 반응하시겠습니까? 분노가 치밀까요? 아니면 무덤덤하게 웃고 넘어갈까요? 아마도 우리는 별다른 감흥도 느끼고 상대말을 회피함으로써 상황을 지나치고 싶을 겁니다. 그렇습니까? 오늘 시편 기자와 우리 사이에는 과연 무슨 차이가 있는 것일까요? 시편 기자는 하느님의 부재 때문에 격렬하게 고통스러워하는데 우리는 하느님의 있음과 없음의 문제에 대해 전혀 고민하지 않습니다. 하느님이 없어도 우리의 일상은 전혀 문제가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시편 42편의 시인은 하느님의 현존을 깊이 체험했던 사람입니다. 4, 6, 8절에서 그가 과거 하느님과의 관계를 회상하는 장면을 보면, 그가 얼마나 하느님을 사랑했던 사람인지 추측할 있습니다. 그런데 역설적이게도 그는 이제 하느님의 없음, 하느님의 부재를 경험합니다. 어떠한 이유 때문인지 몰라도 그가 겪고 있는 고통 가운데 가장 고통은 하느님의 부재로 인한 공허함입니다. 그것은 아마도 그가 너무 깊고 강한 하느님의 현존을 체험했기 때문일 겁니다. 하느님에 대한 강한 체험만큼이나 그분의 부재에 대한 체험도 매우 강렬했던 같습니다.

 

믿음의 생활을 착실하게 경험이 있으신 분은 오늘 시편 기자와 비슷한 경험을 느끼신 적이 있으실 겁니다. 십자가의 요한 성인은 이러한 하느님의 부재를어둔 이라 표현했습니다. 어둔 밤에서는 하느님에 대한 믿음도, 하느님에 대한 사랑도, 하느님의 존재에 대한 그리고 자신의 존재에 대한 인지조차 전혀 느낄 없는 어둔 밤입니다. 영적인 불감증 상태라고나 할까요? 그러나 밤은 새벽이 오기 바로 전이 가장 어두운 법입니다. 어둔 뒤에는 하느님의 은총의 새벽이 있음은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새벽을 기다리는 마음이 크면 클수록 어둠은 짙고 춥게 느껴지는 법입니다. 은혜를 경험한 사람일수록 은혜가 말라버린 순간 밀려오는 거대한 폭풍 같은 하느님의 부재로 인한 공허함을 종종 경험하게 됩니다. 산이 높으면 골짜기도 그만큼 깊은 법입니다. 이러한 어둔 가운데 있는 사람은 누구에게도 하소연할 없는 답답함 속으로 내몰리고 맙니다. 남몰래 흘리는 눈물, 가족이나 동료도 위로해 없는 외로움. 그러한 상태에 계신 분들에게 우리는 어떠한 위로도 드릴 없습니다. 자칫 섣부른 위로가 고통받는 자에게는 오히려 조롱이 수도 있기 때문이지요. 마치 욥을 위로하러 왔다가 도리어 욥을 비난했던 친구들처럼 말입니다.

 

신앙의 여정에서 좋으나 싫으나 하느님의 현존을 믿는 사람들에게는 이러한 하느님의 부재를 경험하는 시간이 반드시 옵니다. 오늘 시편은 그러한 하느님의 부재 시에 기도하는 법을 우리에게 알려줍니다. 그러한 절망 가운데 우리가 있는 것이 탄식임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자신의 고통을 결코 과장하거나 미화시킬 필요도 없고, 그것을 감출 필요조차 없습니다. 시편 기자는 우리에게 하느님의 부재 속에서 어떻게  하느님의 현존으로 나아가는지를 가르쳐줍니다. 하느님의 부재로 인한 우리 영혼의 목마름을 풀려고 하면 할수록 마치 개미지옥처럼 우리는 헤어날 없습니다. 몸부림친다고 상황이 결코 달라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상황 가운데서 우리는 탄식할 있고 기도할 있습니다. 기도할 있고 탄식할 있다는 것은 아직 살아있고 희망이 있다는 반증입니다. 완전한 절망은 기도조차 없는 진공상태로 우리를 이끕니다. 그래서 오늘 탄식시편은 우리에게 귀한 위로를 줍니다. 하느님의 현존을 체험하는 것이 은혜라면, 하느님의 부재를 체험하는 것도 은혜라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이러한 하느님의 부재를 통해 우리는 더욱 굳건하게 하느님의 현존으로 나아가는 길을 발견할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신앙이 가진 역설이고 신비입니다. 이러한 은총이 오늘 우리 모두에게 함께하시길 간절히 기원합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