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5.25. 다해_부활6주일
사도 16:9-15 / 시편 67 / 묵시 21:10, 22-22:5 / 요한 14:23-29
“사랑과 평화”
채야고보 신부 / 대한성공회 제주우정교회, Artist
요한복음 14장에서 17장까지 전개되는 고별담화의 전체적 기조는 한마디로 “위로”입니다. 누구를 위로하는 것입니까? 물론 내용상으로는 예수님의 제자들이지만, 이는 좁게는 요한복음 공동체이고 넓게는 오늘날까지 주님의 다시 오심을 기다리는 모든 교회라 할 수 있습니다. 제 개인적으로도 힘들고 지칠 때는 이 고별담화를 종종 묵상하고 많은 위로를 얻곤 합니다. 마치 주님과 마지막 만찬을 하고, 마지막 유언을 듣는다는 심정으로 이 고별담화를 읽으면 감회가 늘 새롭습니다.
요한복음을 이해하는 방법의 하나는 일종의 방향성입니다. 주님께서 어디로 향하시는지 초점을 맞춰 읽어보면 요한복음의 묘미를 더 잘 느낄 수 있습니다. 14장 처음부터 14장 14절까지의 기조는 주님의 방향성이 “어디 어디로 간다”는 점에 방점이 있습니다. 십자가로 향하시고, 제자들을 떠나 아버지께로 가시고… 모두 어디론가로 떠나신다는 이별에 대한 언급들입니다. 그러나 14장 15절부터는 이제 “다시 오심”에 대한 이야기가 전개됩니다. 그동안 주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그들의 스승이며 “협조자”로 함께하셨는데, 이제 주님께서 아버지께로 상승하시고 나면, 주님을 대신해서 다른 “협조자”를 보내신다고 약속하십니다. 다시 오실 협조자는 물론 “성령 즉 파라클레토스(παράκλητος)”를 뜻합니다. 이별의 말씀은 제자들을 당황하게 했지만, 이제 본격적으로 그들을 위로하시는 말씀이 이어집니다. 위로는 지극한 하느님의 사랑에 기반하고 또 우리의 믿음에 기초하며, 우리의 신뢰를 촉구합니다. 우리가 주님을 사랑하면 그 증거로 “새 계명”을 지킬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새 계명”은 주님께서 공생애 동안 제자들에게 가르치신 내용이고, 스스로 본을 보이신 바로 그 사랑입니다. 이 새 계명으로 이전의 주님과 다시 오실 성령 간에 연관성이 생깁니다. 다시 오실 “협조자”는 공생애 기간에 주님께서 하시던 일을 그대로 이어가실 분이십니다. 주님의 가심과 성령의 오심으로 말미암아 이제 이 세상은 두 부류로 나뉘게 됩니다. 하느님을 모르는 세상과 예수를 믿고 기다리는 그리스도인으로 말입니다. 결국 예수의 제자는 이러한 양분된 세계를 주님께로 인도하는 “사람 낚는 어부”로서의 사명을 완수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그들의 연약함을 “협조자”이신 “파라클레토스”께서 도와주십니다. 우리 안에 내주하신 하느님은 이렇게 주님의 부재를 대신하는 하느님의 성령이십니다. 우리는 세상 끝 날까지 그분의 도우심을 약속받은 자들입니다.
이미 말씀드린 대로 파라클레토스의 역할은 이전에 주님께서 제자들과 함께하셨던 사역의 연장입니다. 가난한 자들과 죄인의 친구이셨던 주님께서는 어떤 사람도 판단하지 않으시고 거리낌 없이 그들과 어울리고 먹고 마시셨습니다. 편견 없이 사람들을 만나셨고, 신분의 귀천을 가리지 않으셨으며, 모든 사람을 사랑으로 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다시 오실 협조자 또한 우리에게 그런 일을 가르치시고, 우리가 그분의 가르침대로 살아가도록 도와주시는 분이십니다. 이것이 주님의 가심으로 우리가 받게 되는 첫 번째 선물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나는 너희와 함께 있는 동안에 여러 가지 이야기를 들려주었거니와 이제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주실 성령 곧 그 협조자는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쳐주실 뿐만 아니라 내가 너희에게 한 말을 모두 되새기게 하여주실 것이다.” 요한 14:25-26
제자들이 주님에게서 듣고 배웠던 모든 것, 그러나 현재 제자들이 잊고 있는 것을 다시 상기시켜 주시는 일을 성령께서 하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것을 요한은 “새 계명”이라 말합니다. 그것은 모세가 시나이산에서 받은 율법의 기본 정신입니다. 십계명의 모든 내용은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으로 요약됩니다. 그리고 이제부터는 영분별이 너무나 간단해집니다. 이전에는 율법 준수 여부가 사람을 판단하는 기준이었지만, 이제부터는 사랑이 모든 판단의 기준이 됩니다.
“그러나 나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내 말을 지키지 않는다.” 요한 14:24 a
예수를 사랑하는 사람은 하느님도, 이웃도 사랑합니다. 이로써 우리는 그리스도인과 그리스도인이 아닌 사람을 분별할 수 있습니다. 세상에는 교회에 다니지 않는 사람인데도 이러한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이 있고, 교회를 다니는 사람인데도 전혀 사랑할 줄 모르는 사람이 있습니다. 여기에 기독교의 딜레마가 있습니다. 과연 하느님을 믿지 않지만, 은연중에 하느님의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과 하느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사랑을 실천하지 않는 사람 중 누구를 하느님께서 구원하실까요? 요한복음은 아주 간단히 정리합니다. 하느님을 믿는 사람은 곧 하느님의 새 계명, 사랑의 계명을 실천하는 사람이라고. 만약 그러한 실천이 없는 사람은 하느님의 양무리에 들지 않는다고 말입니다. 사랑은 모두 하느님에게서 나온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은 예수에 대한 지식이 없을지라도 그는 이미 하느님의 일을 하는 것입니다. 예수를 안다는 것은 곧 지식으로 그를 아는 것이 아니라 그의 말씀을 실천함으로 아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 다니며 예배드리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기준이 되지 않습니다. 사랑을 할 수 있는지 아닌지가 우리 믿음의 기준이 됩니다. 자신이 그리스도인인지 아닌지를 나누는 시금석은 바로 사랑입니다. 성령께서는 주님께서 보여주신 사랑을 늘 현재에도 우리에게 상기시켜 주셔서 그러한 사랑을 할 수 있도록 우리를 도와주십니다. 그러므로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성령을 의지하지 않는 사람이고, 성령을 의지하지 않는 사람은 예수를 모르는 사람입니다.
이제 주님께서 가심으로써 얻어지는 또 다른 두 번째 선물을 언급하십니다. 그것은 바로 평화입니다.
평화는 이스라엘의 인사말이기도 하지만 또한 작별의 인사이기도 합니다. 우리나라 인사말 “안녕하세요”, “안녕히 가세요”라는 말과 의미가 비슷합니다.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그리고 교회 공동체에 평화를 선물로 주고 가심을 뜻합니다. 주님께서 가시니 역설적으로 이제 평화가 우리에게 옵니다. 물론 이 평화는 작별 인사이면서 동시에 종말론적인 인사이기도 합니다. 예수의 재림으로 이루어질 영원한 평화 또한 약속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현재의 평화뿐만 아니라 마지막 날의 평화를 동시에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약속하십니다. 부활하신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처음 하신 말도 바로 이 평화입니다. 평화가 우리에게 임하면 두렵고 떨리고 황망한 우리의 마음이 산란해지지 않고 안정됩니다. 그리고 어떠한 상황 가운데서도 낙담하지 않을 힘이 생깁니다. 이러한 평화의 힘은 예수님 공생애 동안에도 제자들이 느끼지 못했던 평화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풍랑 치는 바다를 보고 두려워 떨었고, 주님께서 잡히시던 밤에 모두 도망을 쳤던 것입니다. 이제 주님께서 가시고 다시 우리에게 다가온 평화는 협조자이신 성령으로 말미암는 평화임으로 우리의 실존을 견딜 힘을 명확하게 또 굳건하게 해주십니다. 주님께서 떠나가심으로 인해 이제 하느님께서 우리 안에 거하실 수 있게 됐습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팔레스타인의 공간에 한정되지 않으십니다. 어느 한 민족에게 귀속되지도 않습니다. 하느님의 현존이 시나이산 꼭대기도 아니고, 예루살렘 성전도 아니며, 이제 인간 안에, 그를 믿는 교회 공동체 안이 됩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내가 떠나갔다가 너희에게로 다시 오겠다는 말을 너희가 듣지 않았느냐? 아버지께서는 나보다 훌륭하신 분이니 만일 너희가 나를 사랑한다면 내가 아버지께로 가는 것을 기뻐했을 것이다.” 요한 14:28
지금의 이별은 슬프지만, 주님께서 가심이 오히려 제자들에게 더 큰 유익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제 성령께서 오시고, 우리 안에 하느님의 현존으로 말미암는 평화가 임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이 말로 서로 위로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지난 2천 년 동안 교회의 역사를 통해 이러한 하느님의 말씀의 실현을 목도해 왔습니다. 때론 교회가 성령의 역사를 거부할 때도 있었고, 사람들에게 지탄받을 어리석은 죄악도 저질렀지만, 교회는 예수의 가심과 다시 오심의 중간 시대에서 다양한 선한 영향력도 행사했음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요즘 교회의 위기라고 말들 하지만, 성령께서 만드신 이 사랑과 평화의 물줄기는 아직도 도도하게 흘러가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때론 큰 강이 되기도 하고, 때론 시냇물처럼 좁아지기도 하지만, 성령의 이 물줄기는 끊임없이 흘러 마지막 하느님의 나라라는 바다로 흘러갈 것입니다. 교회가 탈도 많고 문제도 많지만, 그래도 이 “잠정적인 교회”를 통해 성령과 믿음에 감화된 사람들의 헌신에 의해 아직 이 세상이 유지되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들을 우리는 예수의 제자들이라 부를 수 있을 겁니다. 비록 그들이 소수일지라도 예수의 새 계명을 실천하는 사람들은 반드시 존재하기 마련이기 때문입니다.
의인 열 명이 없어 멸망한 소돔과 고모라의 이야기가 결코 허투루 들리지 않는 요즘입니다. 진리와 진실이 무너진 “탈진실의 시대”가 된 지 오래입니다. 버젓이 거짓말을 하면서도 부끄러움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소돔과 고모라 사람들과 유사합니다. 세례자 요한의 말대로 이미 도끼는 나무뿌리에 닿아 있지만, 우리는 그것을 전혀 인지하지 못하고 살고 있는 것 같습니다. 마지막 심판이 있다는 믿음이 희미해지면서 더욱 사람들은 자기 자신을 단순히 진화된 단백질 덩어리처럼 취급하고 있는듯한 느낌이 듭니다. 고깃덩어리와 인간이 전혀 구분되지 않는 인간 존엄의 상실 시대. 인간이 얼마나 하느님의 지극한 사랑을 받는 존재라는 사실을, 성령으로 말미암아 인간이 하느님 현존의 처소가 되었다는 사실을, 인간이 하느님의 이미지로 지음 받았다는 그 존엄성을, 현대인은 스스로 부인하고 싶은 것 같습니다. 그러한 생각은 전 근대적인 생각으로 치부됩니다. 오늘날 현대인은 “하느님의 사랑과 평화”란 말에 전혀 반응하지 않게 됐습니다. 사랑과 평화를 우리가 매우 간절히 원하면서도 그 말을 입에 담기에는 너무나 식상한 말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러니 우리 마음에 커다란 구멍이 뚫린 것 같은 느낌이 사라지지 않는 것은 당연합니다. 이러한 인지부조화의 정신증을 벗어나기 위해 우리는 정말 정신과적인 치료와 상담에만 의지해야 할까요?
생각, 마음, 행동.
이 세 가지는 우리의 믿음을 인지하는 중요한 기재들입니다. 이 세 가지 중 어떤 것을 변화시키면 우리가 진정으로 사랑을 행할 수 있게 될까요? 사랑은 결코 지식으로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우리의 생각과 마음, 그리고 행동이 종합적으로 작동할 때 우리는 온전한 사랑을 느끼고 또 사랑을 실천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생각과 마음을 바꾸는 것이 행동을 바꾸는 것보다 더 힘들다고 정신과 전문의들은 말합니다. 오히려 행동을 조금씩 바꿔 가는 것이 결국에는 생각과 마음도 바꾸는 힘이 된다고 합니다. 생각과 마음이 없어도 인간은 가식적인 행동을 할 수 있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할 수 없는 사람에게 조금씩 가식적이나마 “감사하다, 고맙다”라는 말을 하게 되면 그 말과 행위에 의해 점점 그 자신의 생각과 마음도 변한다고 합니다. 행동 교정이 결국에는 생각과 마음의 교정으로 이어지는 것이지요. 신기한 것은 생각과 마음을 먼저 바꾼 후에 실천하려고 하면 결국에는 행위는 더욱 묘연해지고 망설임만 지속된다고 합니다. 감정과 생각의 늪에서 잘 빠져나오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펌프로 지하수를 끌어 올릴 때 마중물이 필요하듯이 생각과 마음을 끌어올리기 위해서는 행위와 행동이 마중물 역할을 해야 합니다. 행위가 먼저 따르지 않는다면 생각과 마음은 우리 안에 차폐되고 맙니다. 그래서일까요? 주님께서는 말보다 늘 행동이 먼저이셨던 분이십니다. 그분의 십자가 수난은 그분의 말이 아니라 그분의 행위의 결과였습니다. 그는 우리에게 희생적 사랑을 말로 강요하신 것이 아니라 몸소 그것을 우리에게 보여주셨습니다. 그 행위의 결과 우리는 “자기 비움, 즉 케노시스”가 무엇인지를 깨닫습니다. 우리가 조금씩 우리의 행동과 행위들을 주님의 새 계명에 맞춰서 실천하기 시작하면, 우리의 움직이지 않던 생각과 마음도 햇볕에 얼음이 녹듯이 조금씩 녹아내릴 것입니다. 물론 시간은 좀 걸려도, 이렇게라도 우리의 행동을 교정하는 것부터 실천하여 우리의 전인격이 그분의 새 계명에 순응하고 순종하는 방향으로 성장해 가길 간절히 바랍니다. 이러한 사랑과 평화의 축복이 주님의 가심과 성령의 오심을 고백하는 “주님의 승천일”과 “성령강림절”을 앞두고 우리 모두에게 함께하시길 간절히 기원합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전례독서_부활6주 (다해)
본기도
사랑의 하느님,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 세상이 줄 수 없는 참된 평화를 약속하셨나이다. 비오니, 우리에게 성령을 내리시어 주님의 말씀과 사랑 위에 굳게 서게 하시고, 모든 두려움과 불안을 떨쳐버리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한 분 하느님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나이다. 아멘.
1독서_사도 16:9-15
9 어느 날 밤 바울로는 거기에서 신비로운 영상을 보았다. 마케도니아 사람 하나가 바울로 앞에 서서 “마케도니아로 건너와서 우리를 도와주십시오.” 하고 간청하였던 것이다. 10 바울로가 그 영상을 보고 난 뒤에 우리는 곧 마케도니아로 떠날 채비를 서둘렀다. 마케도니아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하느님께서 우리를 부르신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11 ¶ 우리는 배를 타고 트로아스를 떠나 사모드라게로 직행하여 이튿날 네아폴리스로 갔다가 12 거기에서 다시 필립비로 갔다. 그 곳은 마케도니아의 첫 지방의 도시로서 로마의 식민지였다. 우리는 며칠 동안 이 도시에 머물러 있었다. 13 안식일이 되어 우리는 성문 밖으로 나가 유다인의 기도처가 있으리라고 짐작되는 강가에 이르렀다. 그리고 거기에 앉아서 모여든 여자들에게 말씀을 전하였다. 14 그들 가운데는 리디아라는 여자가 있었는데 그는 티아디라 출신으로 자색 옷감 장수였고 하느님을 공경하는 여자였다. 주께서는 그 여자의 마음을 열어 바울로의 말을 귀담아듣게 하셨다. 15 리디아는 온 집안 식구와 함께 세례를 받고 나서 “정말 저를 주님의 충실한 신도로 여기신다면 제 집에 오셔서 머물러주십시오.” 하고 간청하면서 우리를 자기 집으로 데리고 갔다.
성시_시편 67
1 하느님,
. 우리를 어여삐 보시고, 축복을 내리소서. ◯
. 웃는 얼굴을 우리에게 보여주소서.
2 세상이 당신의 길을 알게 하시고 ◯
. 만방이 당신의 구원을 깨닫게 하소서.
3 하느님, 백성들이 당신을 찬양하게 하소서. ◯
. 만백성이 당신을 찬양하게 하소서.
4 당신께서 열방을 공평하게 다스리시고,
. 온 세상 백성들을 인도하심을, ◯
. 만백성이 기뻐 노래하며 기리게 하소서.
5 하느님, 백성들이 당신을 찬양하게 하소서. ◯
. 만백성이 당신을 찬양하게 하소서.
6 땅에서 오곡백과 거두었으니 ◯
. 하느님, 우리 하느님께서 내리신 축복이라.
7 하느님, 우리에게 복을 내리소서. ◯
. 온 세상 땅 끝까지, 당신을 두려워하게 하소서.
⦿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
. 처음과 같이 지금도 그리고 영원히, 아멘.
2독서_묵시 21:10, 22-22:5
10 그리고 그는 성령의 감동을 받은 나를 데리고 크고 높은 산으로 올라가 하느님께서 계시는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거룩한 도성 예루살렘을 보여주었습니다. …
22 나는 그 도성에서 성전을 보지 못했습니다. 전능하신 주 하느님과 어린 양이 바로 그 도성의 성전이기 때문입니다. 23 그 도성에는 태양이나 달이 비칠 필요가 없습니다. 하느님의 영광이 그 도성을 밝혀주며 어린 양이 그 도성의 등불이기 때문입니다. 24 만국 백성들이 그 빛 속에서 걸어다닐 것이며 땅의 왕들은 그들의 보화를 가지고 그 도성으로 들어올 것입니다. 25 그 도성에는 밤이 없으므로 종일토록 대문들을 닫는 일이 없을 것입니다. 26 그리고 사람들은 여러 나라의 보화와 영예를 그 도성으로 가지고 들어올 것입니다. 27 그러나 더러운 것은 아무것도 그 도성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흉측한 짓과 거짓을 일삼는 자도 결코 들어가지 못합니다. 그 도성에 들어갈 수 있는 자는 다만 어린 양의 생명의 책에 이름이 올라 있는 사람들뿐입니다.
22:1 그 천사는 또 수정같이 빛나는 생명수의 강을 나에게 보여주었습니다. 그 강은 하느님과 어린 양의 옥좌로부터 나와 2 그 도성의 넓은 거리 한가운데를 흐르고 있었습니다. 강 양쪽에는 열두 가지 열매를 맺는 생명나무가 있어서 달마다 열매를 맺고 그 나뭇잎은 만국 백성을 치료하는 약이 됩니다(창세 2:9; 에제 47:12). 3 이제 그 도성에는 저주받을 일이 하나도 없을 것입니다. 하느님과 어린 양의 옥좌가 그 도성 안에 있고 그분의 종들이 그분을 섬기며 4 그 얼굴을 뵈올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의 이마에는 하느님의 이름이 새겨져 있을 것입니다. 5 이제 그 도성에는 밤이 없어서 등불이나 햇빛이 필요없습니다. 주 하느님께서 그들에게 빛을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영원 무궁토록 다스릴 것입니다.
복음서_요한 14:23-29
23 예수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셨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내 말을 잘 지킬 것이다. 그러면 나의 아버지께서도 그를 사랑하시겠고 아버지와 나는 그를 찾아가 그와 함께 살 것이다. 24 그러나 나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내 말을 지키지 않는다. 내가 너희에게 들려주는 것은 내 말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아버지의 말씀이다.”
25 “나는 너희와 함께 있는 동안에 여러 가지 이야기를 들려주었거니와 26 이제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주실 성령 곧 그 협조자는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쳐주실 뿐만 아니라 내가 너희에게 한 말을 모두 되새기게 하여주실 것이다.” 27 “나는 너희에게 평화를 주고 간다. 내 평화를 너희에게 주는 것이다.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는 다르다. 걱정하거나 두려워하지 마라. 28 내가 떠나 갔다가 너희에게로 다시 오겠다는 말을 너희가 듣지 않았느냐? 아버지께서는 나보다 훌륭하신 분이니 만일 너희가 나를 사랑한다면 내가 아버지께로 가는 것을 기뻐했을 것이다. 29 내가 지금 이 일을 미리 알려 주는 것은 그 일이 일어날 때 너희로 하여금 믿게 하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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