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1.31. 나해_연중4주일_감사성찬례
신명 18:15-20_ 시편 111_ 1고린 8:1-13_ 마르 1:21-28
“양가성(兩價性,ambivalence)의 감정”
채야고보 신부 / artist, 성공회 사제
“어찌하여 우리를 간섭하시려는 것입니까?”
"τί ἐμοὶ καὶ σοί" 는 70인 역본에 의하면 다음과 같은 뜻으로 사용됩니다. (나와 그대 사이에 무엇이 잘못됐다고/판관기 11:12 ; 어른께서는 나와 무슨 상관이 있다고/열왕상 17:18 ; 나에게 무슨 볼일이 있습니까?/ 열왕하 3:13 ; 유다 왕이여, 당신이 나와 무슨 관계가 있소?/ 역대하 35:21) “당신과 나 사이에 뭐가 문제입니까?”, “당신은 나에 대해 무엇을 합니까?”, “내가 당신과 무엇을 해야 합니까?” 좀 더 쉽게 풀어서 번역하면, 당신과 내가 상관이 없으니 그냥 내버려 두고 가라는 뜻이 될 겁니다. 물론 단수인 “나에게,에모이ἐμοὶ”가 아니라 오늘 본문에서는 복수형인 “우리에게,헤민ἡμῖν”을 사용했습니다. 이 악령은 하나가 아니라 다수이기 때문입니다. 이는 악령이 예수를 보고 뱉은 첫마디입니다. 아마 이런 표현은 우리의 일상에서 너무 자주 접하는 표현이 아닌가 싶습니다. 누군가가 자신에게 간섭하고 성가시게 굴면 우리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상관 말라”, “너나 잘해라”, “내 맘이다.” “내가 알아서 잘할 거다.” 그래서 우리는 남에게 간섭받기 싫고 남에게 간섭하기도 싫습니다. 간섭받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은 별로 없는 것 같습니다. 오늘 악령도 예수를 보고 첫 반응이 그러했습니다. 철저히 너와 나의 관계성을 차단합니다. 너와 나, 너와 우리, 여기에서 둘을 잇는 ‘와 또는 과’는 의미를 잃습니다. 관계의 단절입니다. 악령은 예수가 누구인지 알았고, 그와 상관해서는 유익이 없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러니 악령은 “양가적 감정” 속에서 첫 번째 반응으로 “관계의 단절”을 선택했습니다.
예수의 공생애에서 ‘기적 전승 자료’들을 빼면 복음서의 모든 구조가 무너질 정도로 ‘기적 이야기’는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많은 신학자들에게 ‘기적 전승’을 해석하는 일은 늘 고역이었습니다. 미국 가톨릭의 대표적 역사적 예수 연구 성서학자인 존 필 마이어((J.P.Meier)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만일 우리가 예수의 공적 활동으로부터 나온 기적 전승 모두를 비역사적인 것으로 치부한다면, 예수에 관한 다른 복음서 전승들도 모두 그렇게 해야 한다.” 이 말은 무엇입니까? 기적 전승 없이는 복음서가 성립이 되지 않는다는 의미입니다. 사실 예수 당시에 다양한 기적을 일으키는 사람들이 실제로 존재했다는 것이 많은 문헌들을 통해 밝혀졌습니다. 예수 당시의 자료들에 의하면 유대교 랍비 ‘하니나 벤 도사(Hanina Ben Dosa, 기원후 1세기)’는 다양한 병자들을 고쳤고, ‘엘르아살’은 귀신을 축출했으며, ‘티야나의 아폴리니우스’는 죽은 이를 살리기도 했다고 합니다. 다만, 그들과 예수의 차이점을 굳이 찾는다면, 예수께서는 엑소시즘(Exorcism)이나 치유를 행하실 때 도구나, 주문 등을 사용하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아마도 ‘침’이 유일한 예외일 겁니다.(마르 8:23 참조)
합리적인 접근을 하는 학자들은 기적을 일종의 속임수나 조작으로 설명을 했고, 어떤 학자들은 기적 사화를 “신화적으로 해석하여 메시아적 이념을 표출하는 문학적 요소”로 설명하기도 했습니다. 불트만은 고대 배경사를 연구하여 기적 사화가 고대 헬레니즘의 영향을 받은 것이라 설명했습니다. 이럴 경우 기적은 예수의 메시지를 강화시키고 보증하는 기능을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기적 사화를 예수의 메시지를 위한 ‘아포프테그마(상황어)’로 보기도 했습니다. 기적의 사실 여부보다는 메시지에 중점을 둔 것입니다. 그러나 학자들의 이러한 논의에도 불구하고 예수의 기적 전승 자료는 초기 자료까지 소급되며, 아마도 예수에게까지 소급되는 것으로 많은 학자들이 동의를 합니다. 기적의 사실 여부를 증명하는 것은 아마도 불가능에 가까울 겁니다. 그것은 증명할 수도 또 증명해도 믿게 할 수도 없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모세와 예언자들의 말도 듣지 않는다면 어떤 사람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다 해도 믿지 않을 것이다.” (루가16:31)
오늘은 기적에 대한 해석학적 분석을 여기까지만 하겠습니다. 다음에 다시 정리해서 말씀드릴 기회가 있을 겁니다. 오늘은 우리의 주제에 집중하고자 합니다. "τί ἡμῖν καὶ σοί" “당신과 우리가 무슨 상관입니까?” 이건 제가 의역한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공동번역에 이렇게 번역됐습니다. “어찌하여 우리를 간섭하시려는 것입니까?” 마르코는 악령의 입을 통해 예수의 정체를 드러냅니다. “나자렛 예수”, “하느님의 거룩한 분 ὁ ἅγιος τοῦ θεοῦ”. 아직 예수가 하느님의 아들이란 정체는 여전히 은폐됩니다. 중요한 것은 악령이 예수에 대해 가지는 “양가성”입니다. 예수의 정체를 알지만, 동시에 그를 영접하는 대신 그와의 관계를 단절하고자 합니다. 이러한 악령의 반응은 정확하게 예수를 만난 사람들에게 느껴지는 양가성이기도 합니다. “양가성(兩價性, ambivalence)”은 “동일 대상에 대한 상반된 태도가 동시에 존재하는 성질”을 말합니다. 쉽게 말해서 어떤 사람에 대해 미워하는 마음과 사랑하는 마음이 동시에 생길 때 생기는 감정입니다. 저의 경우는 가끔 부부싸움을 할 때 아내에 대해 이런 양가적 감정이 들곤 합니다. 물론 이런 감정이 계속되면 부부관계를 지속하기 어렵죠. 부부싸움은 칼로 물 베기처럼, 또 언제 싸웠냐는 듯 금방 웃고 서로 잘 지냅니다. 그러나 오늘 악령은 정말 심각합니다. 그는 예수와 결코 함께할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에 그를 받아들일 수도 또 그를 피할 수도 없는 지경에 놓인 것입니다. 그래서 악령이 예수의 정체에 대해했던 고백은 가증스러운 것으로 아무런 의미 없는 소리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악령은 꾸짖어서 내쫓는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의 정체와 예수가 행한 기적에는 늘 이러한 양가성이 존재합니다. 악령을 쫓아내고, 병자를 고쳐도 놀라움은 잠시뿐 그것은 결코 그것을 본 사람들에게 믿음을 추동해주지 않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예수께서 베엘제불의 힘을 빌려 기적을 행한다고 비판하기도 했습니다.(루가 11:15 참조) 현상은 부정할 수 없으니 그 권위를 최대한 깎아내리려는 의도입니다. 그래서 예수의 가족들과 예수를 잘 알던 가버나움 사람들이 특히 더 예수를 부정합니다. 그동안 그들과 함께 지냈던 예수에게서 전혀 다른 모습이 발견됐지만, 그들은 그것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것입니다. 자기와 비슷한 수준의 친구가 갑자기 잘 되면 그것을 사실 그대로 인정하고 싶지 않은 게 인간의 본성에 있는 양가성입니다.
예수의 기적뿐만 아니라 우리 신앙의 삶 자체가 어쩌면 이러한 양가성 안에 놓여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사도 바울로는 다음과 같이 이러한 느낌을 고백합니다.
“나는 내가 하는 일을 도무지 알 수가 없습니다. 내가 해야겠다고 생각하는 일은 하지 않고 도리어 해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하는 일을 하고 있으니 말입니다.”(로마 7:15)
우리 마음은 늘 이러한 양가성 때문에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처럼 괴로워합니다. 예수를 영접하고 믿음을 가지고 살면 진리가 우리를 자유케 한다고 했는데 왜 우리는 늘 이러한 양가성 속에서 흔들리는 것일까요? 결단을 해도 삼일을 지속하기 어렵고, 결단을 하자니 두 마음이 들어 괴롭습니다. 누구를 사랑하고 싶지만, 동시에 미운 마음 또한 듭니다. 하나를 선택하면 다른 하나가 아쉽고, 하나를 포기하면 다른 하나가 눈에 밟힙니다. 그래서 우리는 모두 양가성 속에서 “결정장애자”가 되어가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음식이 우리를 하느님께로 가까이 나가게 해주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을 안 먹었다고 해서 손해 될 것도 없고 먹었다고 해서 더 이로울 것도 없습니다.” (1고린 8:8)
오늘 2 독서 말씀입니다. 사도 바울로는 우상에 바쳐진 음식이 본질이 아니라 형제를 실족시키지 않는 사랑이 본질이라고 말합니다. 우상의 음식에 대해 드는 양가적 감정을 더 본질적인 것을 선택함으로 해결하라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서 구마 사화에서 사람들은 악령보다도 더 본질을 보지 못합니다.
“이것을 보고 모두들 놀라 “이게 어찌 된 일이냐? 이것은 권위 있는 새 교훈이다. 그의 명령에는 더러운 악령들도 굴복하는구나!””(마르 1:27)
악령은 예수의 존재를 인식했습니다. 그래서 예수와 관계를 끊으려 했던 것입니다. 이 이야기의 핵심을 이러한 악령을 통해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자신의 공생애를 통해 우리와 새로운 관계를 설정하고자 하셨습니다. 악령은 그러한 예수와 관계를 거절했고, 사람들은 그러한 관계보다는 구마 기적에 집중했습니다. 여기에서 어느 누구도 예수와 새로운 관계를 구축한 사람은 없습니다. 거부와 놀람이 전부였습니다. 회당에서 예수께서 어떤 가르침을 하셨는지는 기록이 안 되어 있지만, 사람들은 전혀 새로운 가르침을 들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 가르침은 구마 기적으로 증명이 됩니다. 사람들의 놀람은 그냥 놀람으로 끝입니다. 소문도 그 놀람에 대한 여파일 겁니다. 어느 누구도 예수께 대해 당신과 내가 무슨 관계입니까?라고 질문하지 않습니다. 가르침과 기적은 현상이지만, 그곳에 서 계셨던 주님은 존재 자체였습니다. 사람들은 분명 악령처럼 양가성의 감정을 가졌던 것이 분명합니다. 뭔가 새로운 것을 듣고 보았는데 기존의 생각과 경험이 새로운 것과 충돌을 일으킵니다. 분명 기적을 목격했지만, 착각은 아니었는지? 속임수는 아니었는지? 금방 흔들립니다. 권위 있는 율법사도 아닌 가난한 나자렛 출신의 한 젊은 이에 대해 그들이 양가적 감정을 느꼈을 것은 당연합니다.
왜 이러한 양가적인 감정이 우리 안에서 생겨나는 것일까요?
“여자가 그 나무를 쳐다보니 과연 먹음직하고 보기에 탐스러울뿐더러 사람을 영리하게 해 줄 것 같아서”(창세 3:6)
하와는 에덴동산의 생명나무에 대해 이러한 양가적 감정을 느꼈습니다. 뱀은 정확하게 이러한 약점을 파고들었습니다. 그 열매를 먹으면 죽지 않고 선과 악을 아는 지혜를 가질 것이라고 여자를 유혹합니다. 양가적 감정에 휩싸인 사람에게 이러한 말처럼 혹하는 말도 없을 겁니다. 강한 확신은 남에게 전염성도 큰 법입니다.
“그렇다면 그런 일을 하는 것은 내가 아니라 내 속에 도사리고 있는 죄입니다.”(로마 7:17)
사도 바울로는 이 부분을 정확히 간파한 것 같습니다. 물론 그의 설명에 이분법적인 위험도 도사리고 있지만, 그는 이러한 양가성이 우리 안에 있는 “죄ἁμαρτία”에서 기인한다고 합니다. “하마르티아”는 “죄”라는 뜻과 “실패”라는 뜻을 동시에 가진 단어입니다. “죄”라고 할 때는 그릇된 행위나 인간 본성의 죄성과 관계됩니다. “실패”라고 할 때는 과녁을 빗나갔다는 뜻일 겁니다. 중요한 것은 이 하마르티아가 우리의 두려움과 연관된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죄나 실패를 모두 두려워합니다. 죄나 실패 모두 감추고 싶고, 남 앞에 드러내는 것이 두렵습니다. 죄와 실패가 두려운 것은 그것들이 “죽음의 독침”이기 때문입니다. 죄책감과 두려움의 끝은 바로 죽음입니다. 사도 바울로가 사용하는 죽음이란 뜻의 헬라어 θάνατος는 몸과 영혼의 죽음을 동시에 뜻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로는 다음과 같이 유명한 선포를 합니다. “죽음의 독침은 죄요, 죄의 힘은 율법입니다.”(1 고린15:56) 죄는 죽음에서 기원하고, 죄의 권세는 율법입니다. 결국 양가적 감정과 싸우는 일은 인간 본질의 죄성과 싸우는 것이 됩니다.
우리 안에서 생겨나는 양가성. 특히 말씀을 접할 때, 예배를 드릴 때, 또 기도의 응답이나 기적을 체험할 때, 우리는 그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가 힘듭니다. 우리에게 이성이 있고, 또 감정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앞에서 말씀드린 대로 그 양가성은 우리의 두려움과 분명히 연관성이 있습니다. 또 우리는 그러한 것을 우리의 이성과 감정의 동의를 얻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맞는 말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프로세스 중에 한 가지는 분명히 말씀드리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신비μυστήριον’입니다. 예수의 공생애를 기록한 복음사가들, 특히 마르코는 이러한 ‘신비’에 어떠한 설명이나 인과관계를 설명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이 전해 듣고, 전승받은 자료들에 입각하여 그 모든 내용을 있는 그대로 서술을 했습니다. 처음 마르코가 전승 자료를 접했을 때 느꼈을 흥분과 모호함 그리고 당황스러움이 마르코 복음 전반에 반영됐습니다. 그는 본인이 듣고 본 대로 그대로 회중 앞에 이야기를 펼쳐 놓았습니다. 이해하여 설명하기보다는 있는 그대로 드러내길 원했습니다. 그래서 마르코 복음서에서 생략된 부분을 우리는 ‘신비’라고 칭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이성과 감성의 영역이 아닌 말 그대로 ‘신비’입니다. ‘신비’는 우리의 이성과 인과관계로부터 자유롭습니다. ‘신비’가 이 현상의 세계에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기 전에는 아무도 그것을 인지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마르코의 이야기를 대하는 사람들이 느낄 양가성은 이제 그 복음을 듣고, 읽는 사람들의 몫이 됩니다. 다만 마르코는 자신이 기록한 복음서를 읽고 듣는 사람들에게 그 행간에 숨겨진 ‘신비’를 하느님께서 직접 드러내실 것을 믿었을 겁니다. 그러한 믿음이 없었다면 그는 이렇게 단순하고 거칠게 복음서를 진술하지 않았을 겁니다. 예수의 기적을 목격한 사람들이나, 그 전승 자료를 접한 마르코나, 그 이야기를 읽고 듣는 우리나, 모두 이러한 양가적 생각에 놓이는 것은 당연합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어떻게 더 나아가야 할지 그것은 전적으로 ‘신비’의 영역에 놓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의 마음과 눈을 열어주시길 간절히 소원합니다. 아멘.
연중4주 (나해) 전례 말씀(공동번역)
본기도
자비하신 하느님, 그리스도를 통하여 주님의 한없는 사랑을 보여주셨나이다. 비오니, 우리에게 힘을 주시어 주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 우리도 주님과 이웃을 사랑하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한 분 하느님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나이다. 아멘.
신명 18:15-20
15 너희 하느님 야훼께서는 나와 같은 예언자를 동족 가운데서 일으키시어 세워주실 것이다.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야 한다. 16 이것은 호렙에서 대회가 열렸던 날 너희가 너희 하느님 야훼께 청을 드렸던 바로 그것이다. ‘나의 하느님 야훼의 소리를 다시는 직접 듣지 않게 해주십시오. 이 무서운 불을 다시는 보지 않게 해주십시오. 내가 죽을까 두렵습니다.’ 17 야훼께서는 옳은 말이라고 하시면서 나에게 이렇게 일러주셨다. 18 ‘나는 네 동족 가운데서 너와 같은 예언자를 일으키리라. 내가 나의 말을 그의 입에 담아주리니, 그는 나에게서 지시받은 것을 그대로 다 일러줄 것이다. 19 그가 내 이름으로 하는 말을 전할 때 듣지 않는 사람이 있으면 내가 친히 그에게 추궁할 것이다. 20 그러나 내가 말하라고 시키지 않은 것을 주제넘게 내 이름으로 말하거나 다른 신들의 이름으로 말하는 예언자는 죽임을 당하리라.’
시편 111
1 알렐루야!
. 정직한 이들이 많이 모인 자리에서 ◯
. 내 마음 다 쏟아 주님께 감사하리라.
2 주께서 하시는 일들 하도 장하시어 ◯
. 그 일들을 좋아하는 사람, 모두 깊이 생각한다.
3 그 하신 일 영광스럽고 찬란하여 ◯
. 그 정의는 영원히 남으리라.
4 그 놀라운 일들을 기념토록 남기셨으니, ◯
. 주께서는 자비롭고 인자하시다.
5 맺으신 계약을 길이 잊지 아니하시고 ◯
. 당신을 경외하는 자에게 먹을 것을 주신다.
6 뭇 민족의 땅을 그들에게 유산으로 주시고 ◯
. 그 위력을 당신 백성에게 보여 주신다.
7 하시는 일은 정의와 진리이시며 ◯
. 그 모든 법은 진실 그 자체이시니,
8 영원히 흔들리지 않도록 ◯
. 진실과 정직으로 제정되었다.
9 속전을 내어 당신 백성을 구해 내시고
. 영원히 지킬 계약을 맺으셨으니, ◯
. 그의 이름 두렵고도 거룩하여라.
10 주님을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원이요,
. 그대로 사는 사람이 슬기를 깨치나니,◯
. 주님 찬송 영원히 올려라.
⦿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
. 처음과 같이 지금도 그리고 영원히, 아멘.
1고린 8:1-13
1 이제는 우상 앞에 놓았던 제물에 관하여 말하겠습니다. “우리는 다 지식이 있다.”고 여러분은 말하는데 사실 그렇습니다. 그러나 지식은 사람을 교만하게 만듭니다. 사람을 향상시켜 주는 것은 사랑입니다. 2 자기가 무엇을 좀 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을 아직 알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3 그러나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하느님께서도 그를 알아주십니다.
4 우상 앞에 놓았던 제물을 먹는 문제가 나왔지만 우리가 알고 있는 대로 세상에 있는 우상은 아무것도 아니고 또 하느님은 한 분밖에 안 계십니다. 5 남들은 하느님도 많고 주님도 많아서 소위 신이라는 것들이 하늘에도 있고 땅에도 있다고들 하지만 6 우리에게는 아버지가 되시는 하느님 한 분이 계실 뿐입니다. 그분은 만물을 창조하신 분이며 우리는 그분을 위해서 있습니다. 또 주님은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이 계실 뿐이고 그분을 통해서 만물이 존재하고 우리도 그분으로 말미암아 살아갑니다. 7 그러나 모든 사람이 다 이런 지식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교우들은 아직까지도 우상을 섬기던 관습에 젖어 있어서 우상에게 바쳤던 제물을 먹을 때는 그것이 참말로 우상의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들의 양심이 약하기 때문에 그 음식으로 말미암아 자기들이 더럽혀졌다고 생각합니다. 8 음식이 우리를 하느님께로 가까이 나가게 해주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을 안 먹었다고 해서 손해될 것도 없고 먹었다고 해서 더 이로울 것도 없습니다. 9 다만 여러분의 자유로운 행동이 믿음이 약한 사람을 넘어지게 하는 일이 없도록 조심하십시오. 10 지식이 있다는 여러분이 우상의 사당에 앉아 제물을 먹고 있는 것을 믿음이 약한 사람이 본다면 그는 양심에 꺼리면서도 용기를 얻어 가지고 우상의 제물을 먹게 되지 않겠습니까? 11 그렇게 되면 믿음이 약한 그 사람은 여러분의 그 지식 때문에 망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그 형제를 위해서도 죽으시지 않았습니까? 12 여러분이 이렇게 형제에게 죄를 짓고 그들의 약한 양심에 상처를 입히는 것은 결국 여러분이 그리스도께 죄를 짓는 것입니다. 13 만일 음식이 내 형제를 넘어뜨린다면 나는 그를 넘어뜨리지 않기 위해서 절대로 고기를 다시 입에 대지 않겠습니다.
마르 1:21-28
21 예수의 일행은 가파르나움으로 갔다. 안식일에 예수께서는 회당에 들어가 가르치셨는데 22 사람들은 그 가르침을 듣고 놀랐다. 그 가르치시는 것이 율법학자들과는 달리 권위가 있었기 때문이다. 23 그 때 더러운 악령 들린 사람 하나가 회당에 있다가 큰소리로 24 “나자렛 예수님, 어찌하여 우리를 간섭하시려는 것입니까? 우리를 없애려고 오셨습니까? 나는 당신이 누구신지 압니다. 당신은 하느님께서 보내신 거룩한 분이십니다.” 하고 외쳤다. 25 그래서 예수께서 “입을 다물고 이 사람에게서 나가거라.” 하고 꾸짖으시자 26 더러운 악령은 그 사람에게 발작을 일으켜놓고 큰소리를 지르며 떠나갔다. 27 이것을 보고 모두들 놀라 “이게 어찌 된 일이냐? 이것은 권위 있는 새 교훈이다. 그의 명령에는 더러운 악령들도 굴복하는구나!” 하며 서로 수군거렸다. 28 예수의 소문은 삽시간에 온 갈릴래아와 그 근방에 두루 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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