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2. 7. 나해_연중 5 주일_감사성찬례
이사 40:21-31 _ 시편 147:1-11 _ 1고린 9:16-23 _ 마르 1:29-39
“베드로의 장모”
채야고보 신부 / artist, 성공회 사제
오늘 복음서에서 베드로의 장모가 앓았던 “열병”에 해당되는 헬라어 “퓌레쑤싸 πυρέσσουσα”는 “퓌레쏘 πυρέσσω 열병 나다”라는 동사의 현재능동태분사형입니다. 장모가 드러누운 이유를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명사형은 31절에 나오는 “열병,퓌레토스πυρετός” 입니다. 루가복음(루가 4:38-39)과 마태오복음(마태 8:14-15)의 병행 구절에도 동일한 단어가 사용되고 있습니다. 다만 마태오는 마르코를 충실히 따라 열병의 원인에 대한 언급은 생략한 반면, ‘섬세하고, 친절한’ 루가는 마르코 버전에 약간의 각색을 합니다. “꾸짖다”는 동사 “에피티마오 ἐπιτιμάω”를 사용하여 열병을 ‘꾸짖어’ 쫓아냅니다. 열병이 마치 마귀에 의한 것이라는 뉘앙스를 풍깁니다. 이 ‘에피티마오’는 예수께서 바람을 꾸짖으실 때(마태 8:26), 사탄을 내쫓으실 때(마태 17:18), 제자들을 꾸짖으실 때(마르 9:25) 등에서 사용된 단어입니다.
칠십인역에서는 명사형으로 ‘퓌레토스πυρετός’를 주로 사용하는데, 대표적인 것은 신명기 28장 22절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야훼께서 폐병과 열병과 염병을 내려 너희를 치시고 무더위와 열풍을 몰아오고 깜부기병을 내려 너희를 치실 것이다.” (신명 28:22상) 여기에서 열병의 원인은 야훼 하느님입니다. 하느님 앞에서 죄를 지은 자들에게 내리는 처벌 중의 하나가 열병입니다. 많은 유대교 랍비들이 이러한 해석을 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열병의 또 다른 원인은 악령입니다. 바이러스나 세균에 대한 개념이 없던 시대라 열병을 불가항력적인 종교적 힘에서 원인을 찾은 것이지요. 하느님의 형벌 때문이든, 악령 때문이든, 질병 때문이든 고대인들에게 열병은 종교와 떼려야 뗄 수 없는 연관성을 가진 것으로 여겨졌습니다. 그러므로 열병은 종교적 힘으로 다뤄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재미있는 점은 열병을 뜻하는 “퓌레토스πυρετός”의 원형이 “퓌르πῦρ”인데, 이는 “불(火)”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어쩌면 ‘열병熱病’보다는 우리말 ‘화병火病’이 더 헬라어 원뜻에 가까운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그래서 베드로의 장모의 병이 ‘화병’ 때문이었을 가능성 또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화병은 거듭되는 ‘화 또는 스트레스’를 참다가 생기는 병이기 때문입니다. 아마도 마르코는 섣불리 베드로의 장모의 병의 원인을 언급하고 싶지 않았을 겁니다. 그 당시의 대중의 통념대로 이 전승을 이해하자면, 예수의 수제자인 베드로의 장모가 하느님의 형벌을 받았거나, 악령의 공격을 받은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설명을 잘하는 ‘친절한’ 루가 조차도 마귀를 쫓아낼 때 사용하는 동사인 “에피티마오 ἐπιτιμάω”를 사용할 뿐 구체적으로 열병의 원인을 언급하지 않습니다. 초기 전승 자료 또한 이에 대해 침묵을 했을 것이므로, 복음사가들도 이를 따랐을 것으로 보입니다. 아마도 예수의 수제자 베드로에 대한 배려가 아니었을까 생각됩니다. 그 덕분에 우리에게는 그 행간을 상상할 여지가 남겨집니다.
동생 안드레아와 함께 고기잡이의 가업을 물려받은 베드로. 그의 장모가 오늘 말씀에 언급된 것으로 보아 그는 결혼을 했음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동생 안드레아는 미혼으로 추정됩니다. 결혼을 했다는 성서의 기록이 없고, 그가 베드로의 집에 형과 함께 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베드로는 아마도 미혼인 동생까지 책임지고 있었던 ‘가장’이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집안의 경제력을 책임지고 가업을 이어갈 가장 말입니다. 그러나 그런 그가 어느 날 갑자기 가업인 어부의 직업을 포기하고, 갈릴리 출신의 가난한 청년 예수를 따라나서니 베드로의 가정에 큰일이 났을 겁니다. 웬만큼 부요한 집안이 아니고서는 그런 모험을 감행하기에 너무 무리가 있어 보입니다. 토지가 경제 수단의 원천이었던 당시의 시대적 배경 하에서 민물고기를 잡는 어부들의 경제사정이 어느 정도였는지는 기록이 많지 않아 확실하지 않습니다. 베드로가 자기의 배(시몬의 배, 루가 5:3)와 그물(마태 4:21)을 소유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복음서 기록들을 보면 그런대로 베드로 집안은 아주 가난하지는 않았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그렇지만 농사를 기본으로 하는 경제 사회에서 땅도 없이 농사 대신 고기잡이를 하는 사람들이 제대로 된 대접을 받지 못했을 가능성은 큽니다. 그리고 땅을 독점했던 기득권 세력들이 제한된 자원이지만 돈이 되는 어업을 독점했을 가능성 또한 큽니다. 실제로 예수의 활동지인 ‘가버나움’에는 작은 부두들이 많았고, 막달라 마리아의 고향인 ‘막달라’에서는 생선을 소금에 절이는 가공을 했던 장소들이 고고학 탐사로 밝혀지기도 했습니다. 그만큼 갈릴리 호수에서의 어업활동이 활발했다는 증거입니다. 그러나 누구나 물고기를 잡을 수 있었던 것은 아닐 것이고, 분명 허가받은 자들이나 조합들이 헤롯 가문과 기득권층에 세금을 내고 어업권을 독점했을 것입니다. 또한 더운 날씨에 부패를 막기 위해 생선을 가공시켜 유통하는 데에도 분명 세금이 많이 부과되었을 겁니다. 당시 농부들의 처참한 삶의 기록들을 보면 갈릴리 어부들의 삶 조차 별반 다르지 않았을 것임은 쉽게 추측해 볼 수 있습니다.
농사만큼이나 고기잡이를 하려면 정말 많은 시간을 집중하고 투자해야 하는 일인 것은 분명했습니다. 배도 정기적으로 유지 보수해야 하고, 비싼 그물도 잘 관리해야 했습니다.(마태 4:21) 이러한 일들은 단순히 일용직 근로자들에게만 맡겨둘 일도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집안의 남자들이 모두 할 일을 버리고 예수를 따라나서니 베드로의 집안에 걱정거리가 생긴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그래서 베드로의 처는 이를 자신의 어머니에게 알렸을 것이고, 그 소식을 들은 장모는 자식 걱정에 아마도 속병이 난 것이 아닌가 추측해봅니다. 장모가 원래 사위 집에서 살았느지 아니면 잠시 방문했다가 사위 집에서 열병이 나 드러누웠는지도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분명한 것은 장모가 병이 났다는 사실 만으로도 그 집안에 큰 우환이 닥쳤다는 것을 추측할 수 있습니다. 처음에 장모는 사위를 설득하려 노력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무뚝뚝하고 고집 센 사위를 설득하는 데 실패하고 결국 자기 마음만 문드러지고 터져서 속병이 난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원래 ‘화병’은 반복된 스트레스를 참고 참다가 울화통이 터져서 생기는 병이기 때문입니다. 사위가 속을 썩이면 딸보다도 장모가 더 괴로운 것이 인지상정입니다. 자기 딸이 시집가서 개고생 하는 것을 좋아할 장모는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생면부지의 예수를 따르기 위해 가족조차도 버린 무책임한 사위의 행동을 장모는 절대 이해할 수가 없었을 겁니다. 더욱이 예수의 가르침에는 다음과 같이 장모의 속을 뒤집어 놓는 말씀도 있었습니다.
예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나는 분명히 말한다.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또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머니나 아버지나 자녀나 토지를 버린 사람은 현세에서 박해도 받겠지만 집과 형제와 자매와 어머니와 자녀와 토지의 복도 백 배나 받을 것이며 내세에서는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다. (마르 10:26-27)
이러니 장모가 병이 안 나고 배길 수 없었을 겁니다.
이렇게 우리는 오늘 복음서 행간에서 가정불화의 정황을 읽을 수 있습니다. 그 불화의 원인은 ‘부르심’입니다. 마르코 복음 1장의 기록된 순서대로 보면, 예수의 세례 > 광야의 시험 > 4명의 제자를 부르심 > 첫 번째로 악령을 쫓아내심 > 그리고 베드로의 집 방문으로 이어집니다. 회당에서 주로 사역을 하셨다는 기록 이후 ‘가정방문”은 첫 기록입니다. 아마도 예수께서 장모의 열병을 치료하셨다는 전승은 공간 복음이 모두 다루고 있는 것으로 보아 초기 전승에까지 소급되는 것 같습니다. 제자의 집, 그것도 수제자의 집을 방문한 사건이고, 또 그곳에서 장모를 치료하신 사건은 오래도록 사람들에게 회자되었을 법합니다. 이러한 전승을 마르코는 본인이 설정한 기적 사화 모티브를 이용해 다시 정리를 했습니다. 마르코 복음서에서 앞으로 우리가 보게 될 많은 이적 또는 기적 사화들은 다음과 같은 모티브를 따르고 있습니다. 1) 상황묘사 2) 기적묘사 3) 기적실증 4) 주변반응 등입니다. 여기에서 네 번째 ‘주변반응’은 종종 생략되기도 합니다. 이러한 모티브를 사용하여 오늘 구문을 잠깐 편집비평적으로 분석해 보겠습니다.
마르코는 베드로 장모 치유 사화 앞과 뒤에 ‘요약문’을 배치합니다. 요약문은 앞의 예수의 활동 내용들을 간단히 요약하고 다음에 나올 내용을 대략 암시하는 역할을 합니다.
-요약문: 얼마 뒤에 예수께서 회당에서 나와 야고보와 요한과 함께 시몬과 안드레아의 집에 들어가셨다.(29)
- 상황묘사: 때마침 시몬의 장모가 열병으로 누워 있었는데 사람들이 그 사정을 예수께 알렸다.(30)
- 기적묘사: 예수께서 그 부인 곁으로 가서 손을 잡아 일으키시자 열이 내리고(31)
- 기적실증: 부인은 그들의 시중을 들었다.(31).
-요약문: ‘주변반응’은 생략되고 곧바로 요약문이 나옵니다. 그래서 마르코는 ‘요약문’으로 ‘주변반응’을 대신하는 것 같습니다. 32~34절이 요약문입니다. 이를 간단히 정리해보면, 사람들이 많은 병자와 마귀 들린 사람들을 예수께 데려와서 치료를 받았다는 이야기와 이 사실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는 ‘함구령’이 이 요약문의 요지입니다.
마르코 복음의 기적사화가 모두 이러한 모티브를 따르므로 잘 기억해두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마태오와 루가는 이러한 마르코의 기적사화 모티브에 자신들의 설명이나 관점을 조금씩 추가했지만, 이 기본 틀은 그대로 유지합니다. 마르코는 이러한 모티브를 사용하면서 결코 자신의 설명이나 기적의 인과관계를 설명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유일하게 덧붙인 것이 기적을 비밀로 하라는 ‘함구령’입니다. 마르코가 함구령으로 숨기고자 하는 것이 결국은 이 기적사화의 주제와 연관된다는 것은 쉽게 추정 가능합니다. 함구령은 곧 ‘예수의 정체’에 대한 비밀입니다. “예수의 기적은 드러내되, 예수의 정체는 철저히 숨긴다”는 모티브입니다. 바로 브레데가 말한 “그리스도 비밀 사상”입니다. 이에 대해서는 일전에 잠깐 소개를 했기에 오늘은 그냥 넘어가겠습니다.(2020.12.6. 나해_대림2주일 설교 참조)
함구령의 모티브가 예수의 정체와 연관성을 가지듯이 결국 기적사화도 모두 예수의 정체와 관련을 갖습니다. 그것은 예수의 정체를 보증하고 그의 권위를 드러내는 역할을 합니다. “예수는 그리스도이시고, 하느님의 아들이시며, 그는 죄와 마귀에 대해 지배권을 가지셨고, 그를 통해 하느님의 나라가 여기에 임했다.”라는 메시지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몰이해’ 속에서도 기적을 보고 다음과 같이 반응하는 것입니다.
“"이게 어찌 된 일이냐? 이것은 권위 있는 새 교훈이다. 그의 명령에는 더러운 악령들도 굴복하는구나!" 하며 서로 수군거렸다. 예수의 소문은 삽시간에 온 갈릴래아와 그 근방에 두루 퍼졌다.”(마르 1:27-28)
질병의 원인을 잘 몰랐던 고대인들에게 열병은 불가항력적인 고통이고 질병이었습니다. 그래서 종교나 주술에 의지하거나, 의술에 의지하기도 하면서 치료를 위해 많은 공을 들였습니다. 한 집안에 이러한 병이 생기면 그 집안이 경제적으로 기우는 것은 당연했습니다. 한마디로 우환이고, 또 무질서이며, 혼돈이었습니다. 그래도 여러 노력 끝에 병든 가족이 나으면 다행이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는 가족들에게 많은 상처를 남기기도 하고, 남은 가족의 생존을 위태롭게 만들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인간 실존의 혼돈과 무질서와 고통 가운데 이제 예수로 말미암아 새로운 질서의 관계성이 세워집니다. “빛이 생겨라!”라는 말씀 한 마디에 질서가 이 세상에 임했듯이, 이제 예수의 입에서 발설된 권위ἐξουσία 있는 말씀 한 마디에 인간 실존을 괴롭히던 병이 치료되고, 마귀가 쫓겨나며, 바람과 물결이 잠잠해집니다. 혼돈과 무질서에 질서가 임한 것입니다. 예수가 등장하기 이전에 있던 혼돈과 무질서는 예수의 등장으로 “하느님께서 보시니 참 좋았다.”는 상태로 회복됩니다. 태초에 “깊은 어둠으로 덮인 물” 위를 운행하시던 성령께서 이제 인간 실존의 깊은 어둠 속에서 예수를 통해 다시 운행하시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께서는 그의 부르심을 받은 수제자 베드로의 가정의 위기와 혼돈을 한 순간에 질서로 돌려놓습니다. 그의 방문으로 가정의 갈등이 해소되고, 모두에게 평화가 임합니다.
앓아 누었던 장모가 치료를 받자마자 예수와 그 일행들을 시중들었다는 점은 ‘화’로 인해 무너졌던 모든 관계가 정상으로 회복되었음을 말해줍니다. 장모는 사위에 대해 그동안 가져왔던 불신을 씻었고, 자신의 딸에 대한 걱정을 모두 내려놓게 된 것입니다. 예수께서 물질적인 축복을 주신 것도 아닌데 이제 장모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에 대한 염려를 하지 않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그녀는 앞으로 사는 날 동안 예수의 손에서 느낀 그 따스함과 그녀를 바라보던 온화한 눈빛을 평생 잊을 수 없었을 겁니다. 아무 말 없이 그녀를 바라보며 내밀었던 그의 손. 그 순간에 형성된 그녀와 예수 사이의 라포(rapport). 그것은 다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귀한 선물이었습니다. 장모는 그렇게 예수와 관계를 새롭게 세웠고, 또 사위와 딸아이와도 관계를 온전하게 다시 세울 수 있었습니다. 치료는 “귄위 (또는 권한 ἐξουσία)”있는 말에 의해 추동되며 “능력(δύναμις)”으로 실현됩니다.
우리는 오늘 예수의 공생애 첫 장에서 제자를 배려하시는 예수님을 봤습니다. 하느님의 뜻을 따라 모든 것을 포기한 사람들과 그 가정을 서운하지 않게 챙기시는 모습. 한 가정의 어그러진 무질서를 바로 세우고 모든 관계성과 라포를 새롭게 만드시는 평화의 주님. 이제 제자 베드로는 가업인 ‘고기 낚는 어부’에서 조금씩 ‘사람 낚는 어부’로 변화되어 갈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이야기는 제자 베드로의 성장 드라마의 시작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앞으로 마르코 복음을 읽어 나가며 이러한 사실을 점점 확인해 갈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께서 그를 만나는 모든 사람들과 어떻게 라포를 형성해가시는지도 확인해 갈 것입니다. 그리고 그를 만나는 사람들이 체험하는 기적들이 어떻게 그의 말의 권위를 드러내며 새로운 관계성의 밑거름이 되는지도 보게 될 것입니다. 복음서의 서론으로 아마 이만한 이야기도 없을 것 같습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말씀을 나눴습니다. 아멘.
연중5주 (나해) 전례독서
본기도
구원의 하느님,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병든 이들을 고치시어 몸과 마음을 온전하게 하셨나이다. 비오니, 주님의 사랑으로 우리의 상한 몸과 영혼을 치유하시고, 성령의 능력으로 복음을 전하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한 분 하느님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나이다. 아멘.
이사 40:21-31
21 너희는 모르느냐?
. 듣지 못하였느냐?
. 한 처음부터 너희 인간에게 알려진 것이 아니냐?
. 땅의 터가 잡힐 때부터 잘 알고 있던 일이 아니냐?
22 지구의 대기권 위에 앉아 계시는 이,
. 그의 앞에서 세상 주민은 메뚜기 같지 않느냐?
. 그는 이 하늘을 엷은 포목인 양 펴시고
. 사람 사는 천막인 양 쳐놓으셨다.
23 고위층 인사들을 없애버리시고
. 위정자들을 그 자취도 남겨두지 아니하신다.
24 나무를 심기가 무섭게,
. 씨를 뿌리기가 무섭게,
. 그루가 땅에 뿌리를 박기가 무섭게,
. 하느님께서 입김을 부시니 그것들은 말라버리고
. 불어오는 거센 바람에 검불처럼 날려가고 만다.
25 “내가 누구의 모습이라도 닮았다는 말이냐?
. 내가 누구와 같다는 말이냐?”
. 거룩하신 이께서 말씀하신다.
26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아라.
. 누가 저 별들을 창조하였느냐?
. 그 군대를 불러내시어
. 하나하나 이름을 불러 점호하시는 이는 그분이시다.
. 힘이 세고 기력이 장사이신 그분의 부르심에
. 누가 빠질 수 있으랴?
27 야곱아, 네가 어찌 이런 말을 하느냐?
. 이스라엘아, 네가 어찌 이런 주장을 펴느냐?
. “야훼께서는 나의 고생길 같은 것은 관심도 두지 않으신다.
. 하느님께서는 내 권리 따위, 알은체도 않으신다.”
28 너희는 모르느냐?
. 듣지 못하였느냐?
. 야훼께서는 영원하신 하느님,
. 땅의 끝까지 창조하신 분이시다.
. 힘이 솟구쳐 피곤을 모르시고,
. 슬기가 무궁하신 분이시다.
29 힘이 빠진 사람에게 힘을 주시고
. 기진한 사람에게 기력을 주시는 분이시다.
30 청년들도 힘이 빠져 허덕이겠고
. 장정들도 비틀거리겠지만
31 야훼를 믿고 바라는 사람은 새 힘이 솟아나리라.
. 날개쳐 솟아오르는 독수리처럼
. 아무리 뛰어도 고단하지 아니하고
. 아무리 걸어도 지치지 아니하리라.
시편 147:1-11
1 알렐루야!
. 주님을 찬양하여라.
. 그 노래 얼마나 좋으냐. ◯
. 우리 하느님,
. 그 찬미 얼마나 부드러우냐.
2 주님은 예루살렘을 세우신 분, ◯
. 흩어졌던 이스라엘을 모아들이시는 분,
3 상처 입은 마음을 고치시고 ◯
. 터진 상처를 싸매주시는 분,
4 별들의 수효를 헤아리시고 ◯
. 낱낱이 이름을 붙여주시는 분,
5 전능하신 우리의 주님 얼마나 크시냐. ◯
. 그의 슬기 형용할 길 없어라.
6 주, 낮은 자는 들어 올리시고 ◯
. 악인들은 땅에까지 낮추신다.
7 주님께 감사노래 불러라. ◯
. 수금 타며 우리 하느님 찬미하여라.
8 구름으로 하늘 덮어 땅에 비를 내리시고 ◯
. 이 산에도 풀, 저 산에도 풀,
. 사람 먹을 곡식 나게 하시며,
9 짐승들과 울어대는 까마귀 새끼에게 ◯
. 먹이를 마련하시는 분,
10 힘센 말을 기뻐하지 않으시고 ◯
. 힘 좋은 장정의 다리도 반기지 않으신다.
11 당신 두려운 줄 아는 사람, ◯
. 당신 사랑 믿는 사람, 그들만을 반기신다.
⦿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
. 처음과 같이 지금도 그리고 영원히, 아멘.
1고린 9:16-23
16 내가 복음을 전한다 해서 그것이 나에게 자랑거리가 될 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내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이기 때문입니다. 만일 내가 복음을 전하지 않는다면 나에게 화가 미칠 것입니다. 17 만일 내가 내 자유로이 일을 택해서 하고 있다면 응당 보수를 바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은 내 자유로 택한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그 일을 내 직무로 맡겨주신 것입니다. 18 그러니 나에게 무슨 보수가 있겠습니까? 보수가 있다면 그것은 내가 복음을 전하는 사람으로서 응당 받을 수 있는 것을 요구하지 않고 복음을 거저 전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19 나는 어느 누구에게도 매여 있지 않는 자유인이지만 되도록 많은 사람을 얻으려고 스스로 모든 사람의 종이 되었습니다. 20 내가 유다인들을 대할 때에는 그들을 얻으려고 유다인처럼 되었고 율법의 지배를 받는 사람들을 대할 때에는 나 자신은 율법의 지배를 받지 않으면서도 그들을 얻으려고 율법의 지배를 받는 사람처럼 되었습니다. 21 나는 그리스도의 법의 지배를 받고 있으니 실상은 하느님의 율법을 떠난 사람이 아니지만 율법이 없는 사람들을 대할 때에는 그들을 얻으려고 율법이 없는 사람처럼 되었습니다. 22 그리고 내가 믿음이 약한 사람들을 대할 때에는 그들을 얻으려고 약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와 같이 내가 어떤 사람을 대하든지 그들처럼 된 것은 어떻게 해서든지 그들 중에서 다만 몇 사람이라도 구원하려고 한 것입니다. 23 나는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는 무슨 일이라도 하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그들과 다 같이 복음의 축복을 나누려는 것입니다.
마르 1:29-39
29 얼마 뒤에 예수께서 회당에서 나와 야고보와 요한과 함께 시몬과 안드레아의 집에 들어가셨다. 30 때마침 시몬의 장모가 열병으로 누워 있었는데 사람들이 그 사정을 예수께 알렸다. 31 예수께서 그 부인 곁으로 가서 손을 잡아 일으키시자 열이 내리고 부인은 그들의 시중을 들었다. 32 해가 지고 날이 저물었을 때에 사람들이 병자와 마귀 들린 사람들을 모두 예수께 데려왔으며 33 온 동네 사람들이 문 앞에 모여들었다. 34 예수께서는 온갖 병자들을 고쳐주시고 많은 마귀를 쫓아내시며 자기 일을 입 밖에 내지 말라고 당부하셨다. 마귀들은 예수가 누구신지를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35 다음날 새벽 예수께서는 먼동이 트기 전에 일어나 외딴 곳으로 가시어 기도하고 계셨다. 36 그 때 시몬의 일행이 예수를 찾아다니다가 37 만나서 “모두들 선생님을 찾고 있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38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이 근방 다음 동네에도 가자. 거기에서도 전도해야 한다. 나는 이 일을 하러 왔다.” 하고 말씀하셨다. 39 이렇게 갈릴래아 지방을 두루 찾아 여러 회당에서 전도하시며 마귀를 쫓아내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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