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모음/설교문

보내심, 들림, 자기 비움 그리고 영광 (3)

James Chae 2021. 5. 16. 17:48

 

2021. 3. 21.  나해_사순 5주일_감사성찬례

토마스 크랜머(캔터베리대주교, 전례개혁자, 순교자, 1556년)

예레 31:31-34 _ 시편 51:1-12 _ 히브 5:5-10 _ 요한 12:20-33

 

 

 

보내심, 들림, 자기 비움 그리고 영광” (3)

 

 

채야고보 신부 / artist, 성공회 사제

 

현대에는 성서해석학과 그리스도론의 발전으로 우리는 다양한 신학적, 교리적 결과물의 혜택을 보고 있습니다. 감사한 일입니다. 그러나 원시 그리스도 교회의 사정은 녹록지 않았습니다. 오늘날과 같은 권으로 성서는 물론 편의 성서를 교회가 소유하는 것조차 제정적 어려움과 갖은 핍박 때문에 쉽지 않던 시기였습니다. 예수의 생애와 수난 그리고 부활을 경험했던 사도들과 제자들 그리고 예수를 따랐던 많은 사람들의 기억에 의존하여 구술된 이야기가 전부였습니다. 만약 존재했다면 예수의 단편적인 말들을 기록한 전승 자료, 예수 어록이라 불리는로기아(Logia Jesu)’ 등이 있었을 겁니다. 문서보다 구술에 의해 기록이 전해지던 시대를 우리는 이해할 없지만, 우리보다는 기억하는 방법이 달랐을 것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과거에나 오늘에나 인간 기억에는 한계가 있는 법이고, 다양한 각색과 첨언 또는 첨삭이 있었을 것은 당연해 보입니다.

 

십자가에서 사형을 당한 사람이 어떻게 우리를 구원할 그리스도가 있는가? 그리스도가 어떻게 하느님의 아들이 되며, 어떻게 보이지 않는 하느님이 인간이 있는가? 그렇다면 예수는 인간인가 아니면 하느님인가? 그리스도는 하느님과 본질적으로 같은가 다른가? 정말 다양한 궁금증과 질문 그리고 의심들이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았을 것입니다. 예수의 부활을 목격했던 사도들이 없었다면 기독교는 초기 단계에서 여러 갈래로 붕괴되고 말았을 겁니다. 사도들의 증언과 예수를 기억하는 사람들의 구술 자료 그리고 존재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예수 어록(로기아) 등이 예수 이야기의 출발을 가능하게 했던 귀중한 자료들입니다. 이를 우리는 초기 전승 자료라고 합니다. 

 

요한의 공동체는 다양한 도전 앞에 놓여 있었습니다. 그중에 하나가 요한복음이 쓰여진 것으로 추정되는에페소에서 성행했던영지주의(Gnosticism)’ 영향입니다. 영지주의는 일자에서 유출된(파송된) ‘위대한 생명의 아들 (만다 다하이예 Manda d’Haijye)’ 아버지와 같은 본질을 가지고 이를 믿는 사람들을 동일한 본성으로 만들어 일자와 합일시킨다고 가르쳤습니다. 그리고 영과 육을 철저히 구분하는 이원론을 견지했기 때문에 육을 경멸했고, 영과 육의 합일을 불가능한 것으로 봤습니다. 그러나 요한은 이러한 도전에 대항하여 하느님과 선재하신 로고스가 어떻게 인간의 몸을 지닌 예수를(성육신) 통해 우리 가운데 오셨는지 설명합니다. 요한이 말하는 로고스는 일자로부터 유출된 것도 아니고, 세상 안에 있는 피조물도 아님을 주장했습니다. 이를 위해 그는 모호하지만, 선포를 통해 명확하게 이러한 영지주의의 영향을 벗어납니다. ‘로고스가 처음부터 하느님과 함께 계셨고, 로고스가 인간의 몸을 입으셨으며, 그가 하느님이시다.’ 이러한 성육신에 대한 요한의 주장은 하느님과 로고스 예수 그리스도가 본질적으로 하나임을 선포함으로써 모든 형이상학적 공격을 피해 갑니다. 이는 몸이 없으면 결코 가능하지 않을 일입니다. 그것은 바로 하느님의 계시에 대한 적극적인 해석입니다. 하느님께서 그리스도를 파송한 것은 이제 하느님의 구원 사역에 하느님께서 직접 책임을 지신다는 약속이고 선포입니다.  그래서보내심이란 단어는하느님의 책임감 드러내는 중요한 단어가 됩니다. 예수께서는 그의 고별사인 요한복음 14 18절에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나는 너희를 고아들처럼 버려두지 않겠다.”

 

이것이 하느님 아버지의 책임감입니다. 사랑의 책임 말입니다. 하느님께서 아들을 파송하신 것도, 파송에 하느님의 아들이 순종하신 것도 모두 하느님의 사랑이 동기가 하느님의 책임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으로 하느님의 아들을 보내심으로 세상 안에서 자신의 사랑을 표현할 기회를 적극적으로 마련하셨습니다. 그것은 하느님 아들 안에 있는 선재한 영광으로 증명이 됩니다. 영광은 하느님께서 태초에 당신의 영광으로 세상을 만드시고 보시기에 좋았다고 선포하신 바로 영광입니다. 그러나 영광과 사랑은 인간의자기 비움(케노시스κένωσις)’ 없이는 불가능한 것입니다. 죄의 죽음 없이는, 자기 비움없이는 사랑은 성립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람의 아들이 그리스도는 반드시 들림을 받으셔야 했습니다. 들림은 영광이면서 동시에자기 비움입니다. ‘자기 비움 먼저이고 영광이 다음입니다.

 

요한은 역사적 예수의 일대기를 기록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성육신하시고, 죽으시고, 부활하신 하느님의 아들을 통해 드러난 하느님의 사랑을 설명하고자 했습니다. 마르코처럼 예수의 십자가의 의미를 은밀하게(?) 설명하려고도 하지 않았습니다. 요한의 핵심은 바로사랑이었습니다. 요한은 하느님께서 하느님의 아들을 보내신 것이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시기 때문임을 알기에 그러한 사랑을 증명하고 싶었습니다.(요한 3:16) 그래서 요한복음은사랑이란 키워드를 제외하고는 이해할 없는 것입니다. 요한복음을 제외한 공관복음은 그리스도의 선재 사상이 없습니다. 공관복음이 예수의 생애와 십자가에 집중하는 동안 요한은 예수의 생애의 영적인 의미에 집중했습니다. 그래서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는 요한복음을영적인 복음이라 불렀습니다. 우리는 공관복음을 읽으면서 동시에 요한복음도 함께 읽어야 합니다. 그러할 요한복음이 공관복음서의 신학적 주석 역할을 한다고 할까요? 그럴 정도로 요한복음은 하느님의 사랑을 중심으로 신학적 설명들로 가득합니다.

 

오늘 말씀을 보면, 명절에 올라온 사람들 중에 그리스 사람들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들은 유대인이 아닌 이방인이지만 유대교를 따르는 사람들로하느님을 경외하는 자들”(사도 10:2, 35)이라 불렸던 사람들일 것으로 추정됩니다. 그들이 필립보와 안드레아를 만난 것은 제자들이 헬라어를 았았기 때문일 겁니다. 그들의 이름이 그리스식 이름이라는 점에서 이를 추측할 있습니다. 그리스 사람들이 어떤 질문을 예수께 했는지 요한은 침묵합니다. 대신 그들을 만났다는 진술 후에 곧바로 예수께서는 그리스도의 죽음과 영광에 대한 암시의 말씀을 하십니다. 이를 통해 우리가 있는 것은 이방인에게까지 그리스도의 소문이 퍼졌다는 점입니다. 오늘 본문 바로 전에 나오는 구절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자, 이제는 다 틀렸습니다. 모든 사람이 다 그를 따라가고 있지 않습니까?’하며 서로 걱정하였다.”(요한 12:19)

 

모든 사람 세상 모두 예수를 따랐다는 것은 이방인들도 예수 그리스도의 메시지를 들었다는 뜻이고, 이제 그리스도의 영광을 드러낼 때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구원 사역은 유대인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이방인까지 포함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는 이러한 이방인들과의 만남을 통해 자신이 들림 받을 때가 되었음을 직감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공관복음서 기자들과 다르게, 요한은 그리스도의 죽음과 하느님의 영광을 직접 연결시킵니다. 고통을 통해 쾌락을 느끼는마조히스트 masochist’ 아니고, 십자가에 달린 그리스도는 환영일 뿐이라고 주장하는가현설 Docetism’ 주장자도 아니면서 자신의 고통을 이렇게 담담하게 찬양하는 모습은 정말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다른 배경을 상상해 있습니다. 요한은 이런 극단적인 진술을 이방인들의 질문 다음에 배치했을까? 예수를 방문했던 그리스 사람들의 질문이 헬라 세계에 퍼져있던 영지주의 사상과 관련됐을 가능성입니다. 요한은 이에 대해 침묵하지만, 요한은 영지주의에 관련된 헬라인들을 염두에 뒀던 같습니다. 그들은 육신을영혼의 감옥이라고 생각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육체의 욕망을 철저히 억제하든가, 아니면 육체의 탐욕을 극대화하는 방향으로 나갔던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육신이 인간 구원에 장애가 된다고 생각했던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육신의 연약함과 고통을 통한 영광을 말씀하시고, 그것이 씨앗이 죽어 열매를 맺듯이 많은 빛의 열매를 얻는 방법이라고 말씀하신 같습니다. 육신을 무용한 것으로 여기는 것이 아니라, ‘성육신 통해 드러난 인간육신의 연약함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도구가 된다는 메시지입니다. 그리고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내가 지금 이렇게 마음을 걷잡을 수 없으니 무슨 말을 할까? ‘아버지, 이 시간을 면하게 하여주소서.’라고 기원할까? 아니다. 나는 바로 이 고난의 시간을 겪으러 온 것이다.”(요한 12: 27)

 

여기에서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것은 그의 실체가 아니라 환영이라고 주장하는 영지주의의가현설 비켜가는 요한의 진술을 발견합니다. 십자가에 달리셨던 예수는 참인간이시기에 우리와 똑같이 고통과 고뇌를 느끼셨다는 점이 강조됩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들림을 말씀하시면서 동시에 인간으로서의 예수의 복잡한 심경을 표현한 것입니다. 공관복음에는 예수께서 십자가 고난 전에 겟세마네의 고뇌를 표현한 장면이 있지만, 요한복음에는 여기가 유일합니다. 이를 통해 인간 예수의 고뇌의 일면을 엿볼 있습니다. 예수는 하느님이시면서 동시에 인간이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십자가에서 우리와 똑같은 고통을 느끼셨다는 것이 요한의 진술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모든 것이 알의 밀알이 죽어야 열매를 맺듯이, 사람의 아들 안에 선재해 있는 하느님의 영광이 세상에 드러나는 순간도 바로자기 비움 통해 가능한 것입니다. ‘하느님의 신성 내려놓는자기 비움 하느님의 영광을 견인합니다. 영광은 다름 아닌 세상을 구원하시고자 하는하느님의 사랑 기초한 것입니다.

 

요한의 해석으로 우리는 역사적 예수와 신앙의 예수를 연결하는 고리를 발견하게 됩니다. 그것은 바로 자기 비움 통한 하느님의 사랑의 실현입니다. 그리스도의자기 비움 하느님의 아들로서의 자신의 신성을 내려놓음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인간과 하느님 간에 합일의 가능성이 열립니다. 아담의 타락으로 말미암아 죄의 노예가 되었던 저주받은 육신이, 이제 성육신을 통해 하느님께로 나아가는 통로가 됩니다. 우리 육신의 연약함과 죄성은 하느님의 은총을 받는 장이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구원의 신비를 찬양하고 감사하는 것입니다. 이미 우리가 아는 사실이고, 우리의 믿음이지만, 이러한 신앙 고백이 우리에게 가능한 것은 모두 위대한 요한의 깨달음 덕분입니다. 

 

동안 성서정과를 따라 우리는 마르코 복음을 읽게 됩니다. 그러나 그러한 과정 속에서도 마르코복음과 병행해서 이러한 요한복음을 함께 읽는다면 우리는 하느님의 사랑이 어떻게 마르코 복음에서도 표현되는지 함께 살펴볼 있을 것입니다. 사랑 없이는 그리스도의오심, 들림, 자기 비움 그리고 영광 우리는 설명할 수가 없습니다. 이제 고난주간을 앞두고 우리는 그리스도의자기 비움 절정을 묵상하고 느끼며 기도하게 것입니다. 그의 들림과자기 비움안에 담긴 우리를 향한 하느님의 사랑을 우리가 깊이 깨달을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그분의 사랑을 우리가 담아내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진지하게 우리 자신에게 물어야 것입니다. ‘자기 비움없이는 영광이 없듯이, 우리 자신을 비우지 않고는 그분의 은총을 담을 여지 또한 우리에게 없습니다. 무엇을 비우고 덜어내야 할지는 각자가 진지하게 고민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사순절을 마무리하고 고난주간을 맞이 하는 우리의 자세가 되어야 것입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말씀을 나눴습니다. 아멘.

 

 

 


 

 

사순5 (나해)

 

본기도

우리의 구원이신 하느님,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목숨을 바쳐 아버지의 뜻을 이루셨나이다. 비오니, 연약한 우리를 성령으로 도우시어, 하느님 나라를 위해 바쳐진 씨앗으로 살게 하소서성부와 성령과 함께 하느님이신 우리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나이다. 아멘.

 

 

예레 31:31-34

31 “앞으로 내가 이스라엘과 유다의 가문과 계약을 맺을 날이 온다. 야훼가 분명히 일러둔다. 32 계약은 백성의 조상들의 손을 잡아 이집트에서 데려내오던 때에 맺은 것과는 같지 않다. 나는 그들을 것으로 삼았지만, 그들은 나와 맺은 계약을 깨뜨리고 말았다. 귀담아들어라. 33 내가 이스라엘 가문과 맺을 계약이란 그들의 가슴에 새겨줄 법을 말한다. 내가 분명히 말해 둔다. 마음에 법을 새겨주어, 나는 그들의 하느님이 되고 그들은 백성이 것이다. 34 내가 그들의 잘못을 다시는 기억하지 아니하고 죄를 용서하여 주리니, 다시는 이웃이나 동기끼리 서로 깨우쳐주며 야훼의 심정을 알아드리자고 하지 않아도 것이며, 높은 사람이나 낮은 사람이나 마음을 모르는 사람이 없으리라. 이는 말이라, 어김이 없다.”

 

 

시편 51:1-12

1    하느님, 선한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     어지신 분이여, 죄를 없애주소서.

2    허물을 말끔히 씻어주시고
.     잘못을 깨끗이 없애주소서.

3     내가 알고 있으며
.     잘못 항상 앞에 아른거립니다.

4    당신께, 오로지 당신께만 죄를 지은 ,
.     당신 눈에 거슬리는 일을 몸입니다.
  벌을 내리신들 말이 있으리이까?
.     당신께서 내리신 선고, 천번 만번 옳습니다.

5     몸은 중에 태어났고,
.     모태에 있을 때부터, 이미 죄인이었습니다.

6    당신은 마음 속의 진실을 기뻐하시니
.     지혜의 심오함을 나에게 가르치소서.

7    정화수를 나에게 뿌리소서, 몸이 깨끗해지리이다.
.     나를 씻어 주소서, 눈보다 희게 되리이다.

8    기쁨과 즐거움의 소리를 들려주소서.
.     꺾여진 뼈들이 춤을 추리이다.

9    당신의 눈을 나의 죄에서 돌리시고
.     모든 허물을 없애주소서.

10  하느님, 깨끗한 마음을 새로 지어주시고
.     꿋꿋한 뜻을 새로 세워주소서.

11  당신 앞에서 나를 쫓아내지 마시고
.     당신의 거룩한 뜻을 거두지 마옵소서.

12   구원의 기쁨을 나에게 도로 주시고
.     변치 않는 마음, 안에 굳혀주소서.

⦿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     처음과 같이 지금도 그리고 영원히, 아멘.

 

 

히브 5:5-10

5 이와 같이 그리스도께서도 대사제의 영광스러운 자리를 스스로 차지하신 것이 아닙니다. 영광스러운 자리는,

.   “너는 아들, 내가 오늘 너를 낳았다.” 시편2:7

하고 말씀하신 하느님께서 주신 것입니다. 6 성서의 다른 곳을 보면,

.   너는 멜기세덱의 사제 직분을 잇는 영원한 사제이다.” 시편 110:4

하신 말씀도 있습니다. 7 예수께서는 인간으로 세상에 계실 때에 당신을 죽음에서 구해 주실 있는 분에게 큰소리와 눈물로 기도하고 간구하셨고 하느님께서는 당신을 경외하는 마음을 보시고 간구를 들어주셨습니다. 8 예수께서는 하느님의 아들이셨지만 고난을 겪음으로써 복종하는 것을 배우셨습니다. 9 그리고 완전하게 되신 후에 당신에게 복종하는 모든 사람을 위해서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셨으며 10 하느님께로부터 멜기세덱의 사제 직분을 잇는 대사제로 임명받으셨습니다.

 

 

요한 12:20-33

20 명절 때에 예배를 드리러 올라왔던 사람들 중에는 그리스 사람도 몇이 있었다. 21 그들은 갈릴래아 지방 베싸이다에서 필립보에게 가서선생님, 예수를 뵙게 하여주십시오.” 하고 간청하였다. 22 필립보가 안드레아에게 가서 말을 하고 사람이 함께 예수께 가서 말을 전하였다. 23 그러자 예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사람의 아들이 영광을 받을 때가 왔다. 24 정말 들어 두어라.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그대로 남아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25 누구든지 자기 목숨을 아끼는 사람은 잃을 것이며 세상에서 자기 목숨을 미워하는 사람은 목숨을 보존하며 영원히 살게 것이다. 26 누구든지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있는 곳에는 나를 섬기는 사람도 같이 있게 것이다. 누구든지 나를 섬기면 아버지께서 그를 높이실 것이다.”

27 내가 지금 이렇게 마음을 걷잡을 없으니 무슨 말을 할까?아버지, 시간을 면하게 하여주소서.’ 하고 기원할까? 아니다. 나는 바로 고난의 시간을 겪으러 것이다. 28 아버지, 아버지의 영광을 드러내소서. 때에 하늘에서내가 이미 영광을 드러냈고 앞으로도 드러내리라.” 하는 음성이 들려왔다. 29 거기에 서서 소리를 들은 군중 가운데는 천둥이 울렸다고 하는 사람들도 있었고 천사가 예수께 말하였다고 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30 그러나 예수께서는이것은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너희를 위해서 들려온 음성이다. 31 지금은 세상이 심판을 받을 때이다. 이제는 세상의 통치자가 쫓겨나게 되었다32 내가 세상을 떠나 높이 들리게 때에는 모든 사람을 이끌어 나에게 오게 것이다.” 하고 말씀하셨다. 33 이것은 예수께서 당신이 어떻게 돌아가시리라는 것을 암시하신 말씀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