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3. 14. 나해_사순 4주일_감사성찬례
민수 21:4-9_ 시편 107:1-3, 17-22_ 에페 2:1-10_ 요한 3:14-21
“예수에 대한 이미지” (2)
채야고보 신부 / artist, 성공회 사제
하느님은 누구시고, 어떤 분이실까?
많은 사람들이 하느님을 안다고 생각하고, 자신의 믿음대로 하느님을 믿고 있습니다.
그러나 정말 우리는 하느님을 잘 알고, 하느님을 잘 믿고 있는 것일까요? 하느님의 영광을 보지 않기 위해 모세가 얼굴을 가리고 그분의 이미지를 봤던 것처럼 우리는 그분의 본질은 감히 볼 수 없고 그분에 대한 이미지(imāgō)를 볼뿐입니다.
구약을 읽어보면, 이스라엘 백성은 끊임없이 하느님을 망각하고, 오해하고, 잘못 섬긴 이야기들로 가득합니다. 그래서 선지자들의 일은 끊임없이 하느님이 누구신지 이스라엘 백성을 깨우치는 역할을 했던 것입니다. 그들이 외친 것은 하느님께 돌아오라는 회개의 외침이었지만, 그들이 제시한 하느님에 대한 이미지는 늘 두 가지로 압축이 됩니다. 하나는 천지를 만드시고 주관하시는 분으로서의 ‘창조주 하느님’, 또 하나는 이스라엘을 종살이 이집트에서 구원해주신, ‘구원자 또는 해방자로서의 하느님’입니다.
“당신 힘으로 땅을 만드시고 당신 지혜로 땅덩어리를 고정시키시고, 당신 재주로 하늘을 펼치셨다. 한번 호령하시면 하늘에서 물이 출렁이고, 먹구름이 지평선에서 올라오고, 번개가 번쩍이며 비가 쏟아지면 가두어두셨던 바람을 풀어놓으신다.” (예레 10:13-14)
천지를 만드신 분, 삼라만상의 현상을 주관하시는 분. 이것이 이스라엘이 생각했던 하느님에 대한 이미지였습니다.
하느님의 형상이 없었으니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황금송아지상을 만들어 이것이 바로 야훼라고 아론이 외쳐도 그대로 믿을 수밖에 없었을 겁니다.
또 다른 이미지는 다음과 같습니다.
“행여나 교만한 생각으로 너희 하느님 야훼를 잊는 일이 없도록 하여라. 하느님께서 너를 이집트 땅 종살이하던 집에서 이끌어내 주시지 않았느냐? 저 끝없고 두렵던 광야, 불뱀과 전갈이 우글거리고 물이 없어 타던 땅에서 너희 발길을 인도해 주시며 차돌 바위에서 물이 터져 나오게 해주시지 않았느냐?”(신명 9:14-15)
이집트 종살이에서 해방시켜주신 하느님. 구원자, 해방자 하느님. 이러한 이미지는 시내산 계약으로 성문화 된 ‘율법의 하느님’이란 이미지를 결국 만들게 됩니다. 그러한 계약이 다윗 왕조를 통해 또 다른 이미지를 형성하게 되지만 큰 틀에서 이러한 ‘이스라엘의 구원자, 해방자 이미지’가 하느님에 대한 이미지였습니다. 고통과 고난 속에서 늘 이스라엘을 돌보시고 구원해 주시는 하느님 말입니다. 이러한 이미지는 결국 그리스와 로마의 핍박 속에서 자연스럽게 메시아에 대한 종말론적 이미지로 연결이 되는 것입니다.
신약에 와서 우리는 또 같은 질문을 할 수 있습니다. “예수는 누구시고, 어떤 분이실까?” 이 질문은 결국 그리스도론에 대한 질문이고, 그 답변은 실로 간단한 것이 아님을 역사적으로 많은 신학자들의 그리스도론 논쟁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그러한 많은 논란 중에서 오늘 요한 복음서는 우리에게 두 가지 예수의 이미지를 전해주고 있습니다. 하나는 “사람의 아들 ὁ υἱός τοῦ ἀνθρώπου” 이고, 다른 하나는 “하느님의 아들 ὁ θεὸς τὸν υἱὸν”이란 이미지입니다. 이 두 말은 같은 듯 다른, 신학적으로 매우 섬세한 해석이 필요한 말입니다. 그리고 각 복음서 기자들과 바울로의 관점도 약간씩 차이가 있습니다. 또 성서 본문 문장에 따라 묘하게 뒤섞여 해석되기도 합니다. 복잡한 부분을 최대한 단순화시켜 말씀을 드리려 합니다. 복잡한 것들을 배제했으므로 이견의 여지가 많다는 의미입니다. 그래도 본문에 집중하며 요한이 이 두 이미지를 어떤 의미로 사용했는지 살펴보고자 합니다.
복음서에서 이 칭호가 모두 ‘예수’를 지칭하는 것은 분명합니다. “아들”이란 말은 히브리말로는 “벤(ben)”, 아람어로는 “바르(bar)”라 합니다. 원래 뜻은 그냥 “아들”, “자손”이란 뜻으로 사용되던 단어였습니다. 그래서 “사람의 아들, 바르 에냐사 bar enasa”는 일반적인 용법으로 “그 사람” 또는 “한 사람”이란 뜻으로 사용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칭호가 특별히 종교적 의미를 가지게 된 것은 다니엘 7장 13절에서 나타납니다. (나는 밤에 또 이상한 광경을 보았는데 사람 모습을 한 이가 하늘에서 구름을 타고 와서 태곳적부터 계신 이 앞으로 인도되어 나아갔다.) 묵시문학적 칭호로 사용된 것입니다. 아마도 원시 그리스도 교회는 이 칭호를 메시아적 의미로 예수에게 적용을 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 칭호는 복음서에만 82회 정도 나오는데, 그중 공관복음서에만 69회나 사용됩니다. 요한복음에는 13회 정도 사용됩니다. 사도 바울로도 이 칭호를 알았을 것으로 여겨지는데, 그는 그냥 ‘아들’을 빼고 “바르 에냐사”의 본 뜻인 “그 사람 (ὁ ἄνθρωπος)”을 사용합니다.(2디모 2:5) 그래서 우리는 전승사적으로 이 칭호가 정말 예수에게까지 소급되는지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학자들 마다 견해가 다르지만 이 칭호가 예수의 입에서만 발설된 것으로 여겨지며, 2차 전승 자료로 추정되는 ‘하느님의 아들’이란 칭호보다 더 초기 전승에 가까운 것 같습니다. 그리스도론이 성립되기 이전이라 이 칭호의 의미에 약간의 해석적 어려움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예수께서는 늘 자신을 지칭하실 때 ‘사람의 아들’이란 칭호를 3인칭으로 사용하셨습니다. 그 이유를 어떤 학자들은 예수가 아닌 다른 제 삼자를 말하는 것이라고도 합니다. 그러나 J. 예레미야스는 이를 현재의 예수 자신과 미래에 ‘승귀’될 자신을 구분하여 표현한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어떤 해석이든 추측일 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전승의 기록을 따라 이 부분을 그냥 신비로 남겨 놓는 것이 더 좋을 듯합니다.
요한이 말하는 예수 그리스도론의 핵심을 우리는 요한복음 1장의 ‘로고스 찬가’ 중 다음 구절에서 발견합니다.
말씀이 사람이 되셔서 우리와 함께 계셨는데 우리는 그분의 영광을 보았다. 그것은 외아들이 아버지에게서 받은 영광이었다. 그분에게는 은총과 진리가 충만하였다.(요한 1:14)
예수를 그리스도요, ‘하느님의 아들’로 인정하는 공관복음서 저자들과 사도 바울로도 예수를 감히 본질적으로 하느님과 동등하신 분으로 인정하기를 주저하는데 비해 요한은 이를 과감하게 선포합니다. 예수를 통해 우리는 하느님의 영광을 보았고, 그는 하느님과 동등하신 ‘선재’ 하시는 하느님이시다. 이를 케제만은 ‘영광 그리스도론’이라 불렀습니다. 그렇다면 이미 선재하신 하느님이신 예수께서 어떻게 사람의 모습으로 우리에게 나타나신 것일까요? 무한하고 전능하신 하느님께서 어떻게 유한하고 제한적인 인간이 될 수 있었을까요? 요한은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하느님은 이 세상을 극진히 사랑하셔서 외아들을 보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든지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여 주셨다. (요한 3:16)
이 문장을 우리는 “하강 그리스도론”이라 부릅니다. 즉 성부께서 자신의 외아들을 우리 인간을 너무 사랑하셔서 인간의 모습으로 내려보내셨다는 뜻입니다.(파송) 이러한 그리스도론은 예수가 인간으로 태어나 신성을 얻어 ‘하느님의 아들’이 되었다는 “상승 그리스도론”과 다릅니다. ‘하느님의 아들’이 하느님과의 관계성 속에서 사랑이 동기가 되어 우리 인간으로 오셨다는 것이 요한의 주장입니다. 그러면서 요한은 오늘 말씀에서 “상승, 고양”에 대한 언급을 추가합니다. 이는 예수께서 ‘들려 올려지실 때’ 바로 하느님의 계시가 드러난다고 말입니다.
구리뱀이 광야에서 모세의 손에 높이 들렸던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높이 들려야 한다. (요한 3:14)
‘상승’ 즉 ‘들림’은 결국 십자가의 고난을 상징하지만, 또한 이 상승은 예수가 원래 지니셨던 영광이 드러나는 사건이기도 합니다. 그것은 부활에 의해 가능합니다. 부활을 통해 예수에게 선재해 있던 영광이 증명이 됩니다. 이를 우리는 “하강-상승 그리스도론”이라 부릅니다. 위에서 내려오신 후에 다시 부활을 통해 하늘로 들려 올려짐을 뜻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요한은 예수의 십자가 처형을 ‘고양’, ‘상승’이라 생각하여 영광으로 보고 있는 것입니다. 이는 공관복음서 저자들과는 차이가 있습니다.
거칠게 표현하면 ‘사람의 아들’이란 칭호는 ‘고난 받는 종’, ‘종말론적인 메시아’의 이미지를 갖는 것 같습니다. ‘하느님의 아들’은 이 보다 뒤에 나온 제2차 전승으로 소급되며, 선재하신 ‘하느님의 아들’의 이미지를 갖는 것 같습니다. 다만 ‘사람의 아들’이란 말은 늘 예수의 발언에서만 전승되어 왔습니다. 원시 그리스도교의 신앙 고백이나 복음서 어디에도 예수를 ‘사람의 아들’로 칭한 곳은 없습니다. 이는 마치 ‘신성불가침적인’ 것이어서 아무도 예수의 발언에서 이를 제외시킬 수 없었던 것 같습니다.(예레미야스) 전승사적으로 “사람의 아들”의 이미지가 먼저이고 그 후에 ‘하느님의 아들’이란 이미지가 더해진 것 같습니다.
이러한 예수에 대한 이미지에 따라 요한의 그리스도론은 단호합니다. 예수를 믿지 않는 것이 죄라고 단언하기 때문입니다.
그를 믿는 사람은 죄인으로 판결받지 않으나 믿지 않는 사람은 이미 죄인으로 판결을 받았다. 하느님의 외아들을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 (요한 3:18)
요한의 관점에서 ‘하느님의 아들’을 믿지 않는 것은 어둠을 사랑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믿지 않는 사람은 이미 죄인으로 판명이 납니다. 요한에게서 ‘하느님의 아들’은 ‘구원자’이시면서 동시에 ‘심판자’이십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의 아들’을 보내신 하느님의 사랑을 거부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요한이 가지고 있는 예수에 대한 이미지입니다. 결국 ‘하느님의 아들’이란, 요한의 관점에서는 ‘하느님의 사랑’을 표현한 가장 확실한 이미지인 것입니다. 그 이미지는 하느님의 영광의 이미지이며 처음부터 하느님과 함께했던 선재하신 그리스도의 이미지이며 또한 종말론적으로 심판의 이미지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본질을 볼 수 없지만, 이러한 요한이 전하는 예수를 통해 드러난 하느님의 이미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론이 복잡하게 이를 정리하고 있지만, 요한의 표현대로 하면 그것은 ‘사랑’이란 말로 관계성 속에서 드러납니다. 하느님께서 선재하신 ‘하느님의 아들’을 파송하신 것도 우리 인간을 “너무나”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아들’이 하느님께 순종하신 것도 바로 ‘사랑의 관계’ 때문입니다. 그분이 오신 것은 우리와 하느님이 하나 되는 사랑의 관계를 통해 구원하시기 위함입니다. 그러나 그분이 드러나심은 자연스럽게 심판을 동반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분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결국 하느님의 사랑을 거부하는 것이고, 하느님과 상관없는 관계가 되기 때문입니다. 요한의 종말론적인 관점은 심판보다는 구원에 방점이 있지만, 심판 또한 피할 수 없는 사실임이 드러납니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진리를 따라 사는 사람은 빛이 있는 데로 나아간다.”(요한 3:21 상)
예수 안에서 하느님의 사랑을 발견한 사람은 결국 그 행실이 빛 가운데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빛 가운데 있는 사람은 결코 멸망받을 수 없습니다. 반면 어둠을 사랑한 사람은 그 행실도 어둠 속에 묻히게 마련입니다. 이제 우리는 요한을 통해 하느님에 대한 명확한 이미지를 가지게 됩니다. 바로 ‘하느님은 사랑이시다.’라는 이미지 말입니다. ‘하느님의 아들’을 보내실 정도로 하느님께서 우리를 너무 사랑하신다는 이미지. ‘사람의 아들’, ‘하느님의 아들’에는 이러한 사랑의 관계성이 녹아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이스라엘을 오랫동안 옥죄었던 율법을 넘어서는 하느님과 하나 되는 사랑입니다. 그 사랑이 우리에게 ‘하강하시고’(하강) ‘다시 들림을 받으신’(상승)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증명이 된 것입니다.
어려움과 고통 가운데서도 이러한 이미지를 묵상할 때 우리는 선한 일에 결코 좌절하지 않을 용기를 얻는 것 같습니다. 하느님의 일에 아무런 열매가 없는 듯하고, 사람들의 인정이 그립고, 내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게 혼란스러울 때 저는 이러한 부분을 묵상합니다. 누군가로부터 사랑을 받고 있다는 것만큼 삶에 확신과 위로를 주는 말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사순 4주일을 보내며 참회와 경건의 여정 속에서 잠시나마 이러한 위로가 삶에 지친 우리를 감싸주시길 기대합니다. 요한이 바라봤던 예수를 우리 또한 우리의 심상으로 오래도록 간직하게 되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아멘.
사순4주 (나해) 전례독서
본기도
사랑의 하느님, 우리는 주님 안에서만 참 평화를 누릴 수 있나이다. 비오니, 우리가 주님의 지극한 사랑 안에서 진리를 따라 삶으로써 어둠의 행실을 벗고 영원한 생명에 이르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한 분 하느님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나이다. 아멘.
민수 21:4-9
4 그들은 에돔 지방을 피해 가려고 호르 산을 떠나 홍해 쪽으로 돌아갔다. 길을 가는 동안 백성들은 참지 못하고 5 하느님과 모세에게 대들었다. “어쩌자고 우리를 이집트에서 데려내왔습니까? 이 광야에서 죽일 작정입니까? 먹을 것도 없고 마실 물도 없습니다. 이 거친 음식은 이제 진저리가 납니다.”
6 그러자 야훼께서는 백성에게 불뱀을 보내셨다. 불뱀이 많은 이스라엘 백성을 물어 죽이자, 7 백성들은 마침내 모세에게 와서 간청하였다. “우리가 야훼와 당신께 대든 것은 잘못이었습니다. 뱀이 물러가게 야훼께 기도해 주십시오.” 모세가 백성을 위하여 기도를 드리자, 8 야훼께서 모세에게 대답하셨다. “너는 불뱀을 만들어 기둥에 달아놓고 뱀에게 물린 사람마다 그것을 쳐다보게 하여라. 그리하면 죽지 아니하리라.” 9 모세는 구리로 뱀을 만들어 기둥에 달아놓았다. 뱀에게 물렸어도 그 구리 뱀을 쳐다본 사람은 죽지 않았다.
시편 107:1-3, 17-22
1 주님께 감사노래 불러라.
. 그는 어지시다. ◯
. 그의 사랑 영원하시다.
2 주께서 구해 주신 자들아,
. 모두 노래하여라. ◯
. 원수의 손에서 구해 주시고
3 동서남북 사방에서 ◯
. 불러 모아 주셨다.
17 미련한 탓으로 하느님께 거역하다가 ◯
. 그 죄악 때문에 비참하게 된 자들,
18 입맛이 없어 음식마저 지겨워 ◯
. 저승의 문턱에 다다랐던 자들,
19 그러나 그들이 그 고통 중에서 울부짖자 ◯
. 주께서 사경에서 건져 주셨다.
20 말씀 한 마디로 그들을 고치시고 ◯
. 죽음에서 구출해 내셨다.
21 그 사랑, 주님께 감사하여라. ◯
. 인생들에게 베푸신 그 기적들, 모두 찬양 하여라.
22 그 이루신 일들을 노래로 엮어 ◯
. 기쁜 노래 부르며, 감사 예물 바쳐라.
⦿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
. 처음과 같이 지금도 그리고 영원히, 아멘.
에페 2:1-10
1여러분도 전에는 죄와 잘못을 저질러서 죽었던 사람들입니다. 2 여러분이 죄에 얽매여 있던 때에는 이 세상 풍조를 따라 살았고 허공을 다스리는 세력의 두목이 지시하는 대로 살았으며 오늘날 하느님을 거역하는 자들을 조종하는 악령의 지시대로 살았습니다. 3 실상 우리도 다 그들과 같아서 전에는 본능적인 욕망을 따라서 육정에 끌려 살았던 사람들로서 본래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하느님의 진노를 살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4 그러나 한없이 자비로우신 하느님께서는 그 크신 사랑으로 우리를 사랑하셔서 5 잘못을 저지르고 죽었던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려주셨습니다. 여러분은 이렇듯 은총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6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그리스도 예수와 함께 살리셔서 하늘에서도 한자리에 앉게 하여 주셨습니다. 7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은총이 얼마나 풍성한지를 앞으로 올 모든 세대에 보여주시려고 그리스도 예수를 통하여 이렇게 우리에게 자비를 베풀어주셨습니다. 8 여러분이 구원을 받은 것은 하느님의 은총을 입고 그리스도를 믿어서 된 것이지 여러분 자신의 힘으로 된 것이 아닙니다. 이 구원이야말로 하느님께서 주신 선물입니다. 9 이렇게 구원은 사람의 공로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아무도 자기 자랑을 할 수 없을 것입니다. 10 우리는 하느님의 작품입니다. 곧 하느님께서 미리 마련하신 대로 선한 생활을 하도록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서 창조하신 작품입니다.
요한 3:14-21
14 “구리뱀이 광야에서 모세의 손에 높이 들렸던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높이 들려야 한다. 15 그것은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려는 것이다. 16 하느님은 이 세상을 극진히 사랑하셔서 외아들을 보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든지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여주셨다. 17 하느님이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단죄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아들을 시켜 구원하시려는 것이다. 18 그를 믿는 사람은 죄인으로 판결받지 않으나 믿지 않는 사람은 이미 죄인으로 판결을 받았다. 하느님의 외아들을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 19 빛이 세상에 왔지만 사람들은 자기들의 행실이 악하여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했다. 이것이 벌써 죄인으로 판결받았다는 것을 말해준다. 20 과연 악한 일을 일삼는 자는 누구나 자기 죄상이 드러날까봐 빛을 미워하고 멀리한다. 21 그러나 진리를 따라 사는 사람은 빛이 있는 데로 나아간다. 그리하여 그가 한 일은 모두 하느님의 뜻을 따라 한 일이라는 것이 드러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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