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와 상징
채창완
그분은 하나님의 모습을 지니셨으나, 하나님과 동등함을 당연하게 생각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서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과 같이 되셨습니다. 그는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셔서,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순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기까지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그를 지극히 높이시고,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그에게 주셨습니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 하늘과 땅 위와 땅 아래에 있는 이들 모두가 예수의 이름 앞에 무릎을 꿇게 하시고, 모두가 예수 그리스도는 주님이시라고 고백하게 하셔서,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습니다.
(빌2: 6~11 표준새번역)
백 마디의 말보다도 그리스도를 가장 잘 표현하는 시각적 이미지는 십자가일 것이다. 글은 논리와 이성에 호소하지만 이미지는 느낌과 마음에 호소한다. 십자가 이미지가 오늘날 우리에게 감동과 신앙적 영감을 주는 것은 그 십자가가 지니는 상징성 때문이다. 사실 십자가는 기독교 이전에 고대 이방 종교에서도 있었던 것이고, 고대 로마시대에는 정치범의 사형 틀로 사용되던 공포의 상징이기도 했다. 그러나 바울은 그 십자가를 고난과 구원의 상징으로 바꿔놓았다. 인간의 전적인 타락과 그리스도의 자기비하 그리고 십자가의 고난에서 부활로 이어지는 바울의 십자가신학은 하나님의 자기비하(낮추심)를 십자가 사건으로부터 이끌어냈다.
1. 구숙현 <십자가의 길>
수 천년 동안 십자가가 많은 사람들을 감동시키고, 화가들에 의해 작품으로 제작된 것은 하나님의 자기비하에 대한 인간의 신앙적 감사와 응답의 표현이었다. 하나님이 죄인 된 인간의 모습으로 자신을 낮추시고, 우리의 고통과 아픔을 친히 경험하셨다는 사실. 그것만큼 우리에게 커다란 위안과 감동을 주는 사건이 또 있을까? 세상의 어떤 신이 죄인 된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 스스로 고난과 고통을 감수하는 신이 있을까? 신이 가장 많다는 인도에서도 고난과 고통을 상징하는 신이 없어 십자가이미지를 고난의 상징으로 인도작가들의 작품에 사용한 것을 보면 십자가가 타 종교와도 구별되는 독특한 상징임에 틀림없다.
2. 김영일 <메노라-촛대>
이와 같이 십자가의 고통과 위로의 상징성은 모든 인간의 실존과 결코 뗄래야 뗄 수 없기에 인간의 실존문제를 그 근간으로 하는 현대미술에서도 그 의미가 결코 퇴색되지 않는다. 오늘날의 십자 이미지들은 십자가의 특징인 종횡의 구도를 그대로 유지한 채 작가의 개성과 의도에 따라 다양한 모습을 지닌다. 십자가의 재현에 중점을 두기보다 그것의 상징성에 더 중점을 두기에 그러한 변형이 가능해진다. 구숙현의 T자형 십자가와 이요한의 십자가 그림자는 모두 인간의 고난과 그리스도의 고난을 동일화하는 상징성을 가진다. 김영일의 십자가 촛대는 예배를, 안나영의 붉은 바탕의 하얀색 십자가는, 십자가 중간에 그려진 새싹이 상징하듯, 고난을 통한 생명을 각각 표현한 것이다. 특히 재미있는 것은 서미영의 작품인데, 여러 개의 사각형으로 분할된 화면에 표현된 십자가의 이미지들은 고난 받는 그리스도가 마치 춤을 추듯 묘사되었다는 것이다. 고난이 찬양으로 승화된 것일까? 그의 작품 속의 십자가들은 찬미로 가득하다. 고난의 십자가가 그의 작품에서 승리의 십자가로 화한다. 그리고 그 십자가는 이미 고난이 아니라 부활의 상징이 된다. 이와 같이 현대미술 속에서 십자가는 우리의 신심에 호소하는 다양한 표현으로 재해석되고 있는 것이다. 그 상징성이 갖는 힘은 늘 인간 실존의 문제와 연결되어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을 과거의 자리가 아닌, 바로 오늘 이 자리로 옮겨 놓는다. 그리스도교가 역사 속에서 늘 그 자리를 지켜왔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3. 서미영 <부활>
4. 안나영
5. 이요한 <하늘가는 밝은 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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