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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사랑하기 때문에 혼인하셨습니까? - 권혁주

James Chae 2014. 10. 30. 03:22

 

** 제비꽃의 꽃말은 '겸양', '진실한 사랑', '순진무구한 사랑', '나를 생각해 주세요' 라네요^^

 

 

 

[삶의 동반자, 부부]

사랑하기 때문에 혼인하셨습니까? / 권혁주

 

 

 

다음은 주일학교 선생님과 학생의 대화입니다.

선생 - 아담이 범한 죄가 뭐지?

학생 - 선악과를 따 먹은 거요!

선생 - 그래서 하느님께 어떤 벌을 받았지?

학생 - 에이, 선생님! 그것도 몰라요? 그 벌로 하와하고 결혼했잖아요!

 

 

설마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벌을 주시려고 혼인을 만드시진 않았겠지요. 하지만 실제로 부부 서로에 대한 불만 때문에 갈등의 골이 깊어지게 되면 “내가 전생에 무슨 죄를 지어서 이렇게 하느님한테 벌을 받는 걸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우스갯소리로 자녀는 전생에 연인이었고, 배우자는 철천지원수였다는 말을 하곤 합니다. 그렇다면 진짜로 전생에서 원수였기 때문에 부부가 되는 벌을 받은 것일까요?

 

실제로 윤회(괷廻)를 중요시하는 불교에서는 부부의 인연을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불가에서는 매우 긴 시간을 표현할 때 ‘겁(劫)’이라는 단어를 씁니다. 1겁의 시간은 ‘천년에 한 방울씩 떨어지는 낙숫물이 집채만 한 바위를 뚫어내는 시간’, ‘산만한 바위를 일 년에 한 번씩 새가 날아와 앉았다 가면서 모래로 변하게 하는 시간’, ‘천년에 한 번씩 내려오는 선녀의 옷자락이 사방 40리의 바위를 닳아 없애는 시간’을 의미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부부의 인연은 7천 겁의 인연이 쌓여야 비로소 맺어진다고 합니다. 그만큼 하늘이 맺어준 소중한 인연이라는 것이지요.

 

 

‘사랑하려고’ 결혼하라

 

혼인을 앞둔 예비부부들에게 혼인을 결심하게 된 이유에 대해 물어보면 가장 많이 나오는 대답은 이렇습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유재하의 유명한 노래 제목이기도 하지요. 그런데 사실 이 대답은 혼인의 본질적인 요소가 결여되어 있습니다. 물론 서로가 사랑하기 때문에 혼인을 합니다. 하지만 이는 과거지향적인 표현입니다.

 

서로가 사랑하기 때문에 혼인을 하게 되면, 사랑이 혼인에서 본질이 아닌 조건으로 전락되어 버립니다. 곧 혼인생활을 하다가 서로에 대한 사랑이 식으면 더 이상 함께 살아가야 할 이유가 사라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더욱 하느님 뜻에 맞갖은 표현이라면 “사랑하려고….”라고 해야 합니다.

 

이 두 표현은 언뜻 비슷해 보이지만 커다란 차이가 있습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혼인한 부부는 혼인생활에 위기가 찾아왔을 때 “사랑하기 때문에 혼인을 했는데 지금은 사랑하지 않으니까 더 이상 함께 살아갈 이유가 없다!”라는 생각을 하기 쉽습니다. 실제로 많은 부부들이 이러한 말을 남기며 파경을 맞습니다.

 

반대로 사랑하려고 혼인한 부부는 위기에 대처하는 관점이 다릅니다. “사랑하려고 혼인을 했기 때문에 우리 앞에 놓인 어려움을 사랑으로 이겨내겠다!” 이러한 정신은 가톨릭교회의 혼인서약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나 ( )는 당신을 내 아내로(남편으로) 맞아들여 즐거울 때나 괴로울 때나 성하거나 병들거나, 일생 당신을 사랑하고 존경하며 신의를 지키겠습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말하는 결혼서약에서 ‘서약’이라는 말은 ‘자르다, 가르다’라는 의미를 지닌 히브리어로 ‘베리쓰(beriyth)’에서 유래되었습니다.

 

예수님이 태어나시기 전인 구약시절에는 결혼할 때 짐승을 반으로 갈라서 마주 놓은 고기 사이를 계약당사자인 신랑과 신부가 지나가게 하였습니다. 이러한 의식을 했던 이유는 이 계약을 파기하면 반으로 갈라놓은 짐승처럼 죽겠다는 맹세의 표현이었다고 합니다.

 

현대의 결혼식에서 중앙 통로를 중심으로 양쪽에 나뉘어 앉는 신랑, 신부의 일가족과 친지들은 결혼 서약에 들어갈 때에 양쪽에 정돈해 놓은 희생제물, 곧 갈라놓은 짐승을 상징합니다. 결혼을 하는 방식은 바뀌었지만, 즐거울 때나 괴로울 때나 성하거나 병들거나, 일생 서로를 사랑하고 존경하며 신의를 지키겠다는 혼인서약의 정신은 예나 지금이나 똑같습니다.

 

 

동고동락인가 동거동락인가

 

우리 신앙인에게 혼인은 성사입니다. 성사란 눈으로 볼 수 없는 하느님의 현존과 사랑을 눈으로 볼 수 있는 행동이나 관계로 나타내는 표지(Sign)를 말합니다. 혼인은 부부의 사랑을 통해 하느님의 사랑을 나타내는 하나의 성사입니다.

 

부부는 날마다 사랑하고 봉사하고 용서하는 행동을 통하여 서로에 대한 하느님 사랑의 성사가 됩니다. 배우자가 사랑스러울 때만이 아니라 사랑스럽지 않다고 여겨질 때에도, 내 마음이 기쁘고 즐거울 때만이 아니라 어둠의 깊은 나락으로 떨어져 있을 때에도, 자기의 전인격을 걸고 하느님의 사랑을 보여주는 성사가 되겠다는 서약을 하는 것입니다.

 

부부는 고통과 행복을 함께하는 동고동락 관계입니다. 하지만 현대의 많은 부부들은 행복은 함께하지만 고통은 함께하기를 원하지 않는 ‘동거동락(同居同樂)’ 관계를 지향합니다. 사실 대부분의 부부들은 행복을 꿈꾸며 혼인을 합니다. 하지만 행복은 혼인생활의 일부분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행복을 목적으로 하는 혼인은 쉽게 실망과 좌절에 부딪치게 됩니다.

 

그렇다면 혼인의 진정한 목적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부부의 일치’입니다. 행복이라는 것은 부부의 일치를 위해 노력하는 과정에서 선물처럼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부부의 일치’는 무엇일까요?

 

필자는 올해로 혼인한 지 10년차이고 3명의 자녀를 두고 있습니다. 그런데 솔직히 부부의 일치가 무엇인지에 대해 똑부러지게 설명을 해낼 자신이 없습니다. 물론 이론적인 설명은 할 수 있겠지요.

 

하지만 이를 글로써 풀어낸다는 것은 정말이지 한계가 느껴집니다. 마치 장미의 향기를 글로 써야 한다거나 어머니의 젖내음을 글로 써야 하는 기분이랄까요. 다만 길지는 않지만 제가 부부로 살아온 인생여정 속에서 느낄 수 있었던 행복 이상의 어떤 느낌, 편안함 이상의 어떤 느낌, 내가 더 이상 내가 아니고 아내가 더 이상 아내가 아니라는 느낌, 무언가 하나가 된다는 느낌…, 이런 것들이 혹시 부부의 일치가 아닐까 하고 주님께 질문을 던져볼 뿐입니다.

 

혼인은 하느님의 부르심입니다. 부부의 소명은 서로 사랑하는 일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서로 사랑하도록 우리를 부르십니다. 우리는 사랑을 통하여 이 세상에서 하느님 사랑의 전달자가 될 수 있습니다. 서로 사랑하는 부부의 삶을 통하여 세상 모든 곳에 하느님의 거룩한 현존을 전할 수 있습니다.

 

 

지금 사랑한다는 말을 전하는 부부

 

부부는 세상 곳곳에 심어져 있는 하느님 사랑의 씨앗이며 이 세상에 현존하시는 하느님 사랑의 표지입니다. 부부는 그리스도 성체의 살아있는 세포입니다. 그것도 신체의 여러 기관을 만들어 나가는 줄기세포에 해당합니다.

 

줄기세포가 심장, 뇌, 간, 눈, 코, 입, 손, 발 등 인간의 몸을 구성하는 모든 신체기관을 만들어내듯이, 부부는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이 세상을 구성하고 있는 모든 것들을 만들고 가꾸어나가는 원동력이 됩니다. 그 이유는 혼인성사는 모든 성사의 출발점이 되기 때문입니다.

 

세례성사, 고해성사, 성체성사, 견진성사, 성품성사, 혼인성사, 병자성사 등 이 모두가 가정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이루어집니다. 지금 나라는 존재는 가정에서 태어나 성장해 왔고, 지금 이 순간 가정에서 살고 있으며, 앞으로 가정에서 생의 마지막을 맞게 될 것입니다. 가정은 인간의 일생에 거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니며, 이러한 가정의 시작과 중심축이 바로 부부입니다.

 

부부를 중심으로 한 가정의 영성은 삶의 중심, 세상의 중심이 되는 영성입니다. 부부가 서로 사랑한다는 것은 세상 모두를 사랑하고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이 됩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사랑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하느님 안에 머무르고 하느님께서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르십니다”(1요한 4,16).

 

사랑 안에 있는 사람이 하느님 안에 있듯이, 서로 사랑하는 부부 안에는 언제나 하느님이 계십니다. 부부는 서로의 존재를 통해 하느님의 사랑을 체험합니다. 서로가 사랑하는 부부는 하느님을 알고 있습니다. 그 사랑이 바로 주님께서 주신 선물이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과거와 미래에 있지 않습니다. 사랑이 있어야 할 자리는 바로 지금 이 순간입니다. 예전에 사랑했다는 말보다는, 나중에 사랑하겠다는 말보다는, 지금 사랑한다는 말을 전하는 부부로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권혁주 라자로 - 서울대교구 사목국 가정사목부, 가족관계 프로그램 개발 연구원. 그동안 서울대교구 혼인강좌, 부부여정, 아버지여정 등의 프로그램을 개발하였다.

 

[경향잡지, 2011년 11월호]

 

 

자료출처: http://pds.catholic.or.kr/attbox/bbs/attboard/read.asp?getSeq=199&group_id=8&gubun=100&id=597&maingroup=1&seq=199&sub_id=3&table=gnattboard&user_auth=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