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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실성의 빛 quasi luce securitatis"

James Chae 2021. 5. 15. 21:33

 

 

2021. 2. 21.  나해_사순 1주일_감사성찬례

창세 9:8-17_ 시편 25:1-10_ 1베드 3:18-22_ 마르 1:9-15

 

 

 

확실성의

quasi luce securitatis

 

채야고보 신부 / artist, 성공회 사제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  Σὺ εἶ ὁ υἱός μου ὁ ἀγαπητός, ἐν σοὶ εὐδόκησα.” 
“You are My beloved Son, in You I am well-pleased.”(마르 1:11)

 

"너는 내 아들, 나 오늘 너를 낳았노라.  Υἱός μου εἶ σύ, ἐγὼ σήμερον γεγέννηκά σε” 
“You are My Son, Today I have begotten You.” (시편 2:7)

 

오늘은 여러분이 아시는히포의 어거스틴(St. Augustine of Hippo)’ 이야기로 시작하고자 합니다.

오랫동안 마니교에 빠져 길을 잃고 헤매던 어거스틴은 신플라톤 철학을 접하면서 처음으로지적인 회심'을 경험했습니다. 그러나 현상의 세계를 초월한 이데아의 세계가 존재함을 깨달았지만, 현상의 세계와 초월적 세계 간에 소통의 한계를 깨닫고, 새로운 길을 찾아 바울 서신을 읽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그러던 어느 무화과나무 밑에서 자신의 영혼과 죄의 문제를 깊이 고민하며 슬픔에 잠겨 있을 , 갑자기 이웃집에서 들려오는 동네 아이들의 외치는 노래소리를 듣습니다.

 

“들고 읽어라, 들고 읽어라.” (tolle lege, tolle lege)

 

그것이 어떤 놀이에서 부르는 노래인지는 모르지만, 그는 소리에 깊은 전율을 느꼈고 눈물을 흘렸다고 합니다. 그는 노랫소리를성서를 펼쳐 첫눈에 들어오는 구절을 읽으라는 하느님의 명령으로 인식했습니다. 그가 그렇게 이해한 것은 이전에 안토니우스의 회심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입니다. 안토니우스도 어느 교회에서 복음서 낭독을 듣다가 말씀이 자신에게 하시는 하느님의 음성으로 느꼈다고 합니다. 이러한 생각에 이르자, 어거스틴은 즉시 무화과나무 밑에 두고 왔던 바울로의 책을 기억하고 자리로 돌아갑니다. 그가 사도의 책을 펼쳐 처음 읽은 구절은 다음과 같습니다. 

 

“진탕 먹고 마시고 취하거나 음행과 방종에 빠지거나 분쟁과 시기를 일삼거나 하지 말고 언제나 대낮으로 생각하고 단정하게 살아갑시다.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온몸을 무장하십시오. 그리고 육체의 정욕을 만족시키려는 생각은 아예 하지 마십시오.” (로마 13:13-14) 

 

그는 구절을 읽고 확실성의 (quasi luce securitatis) 마음에 들어와(infusa cordi meo) 의심의 모든 어두운 그림자를 몰아냈습니다.”라고 고백록(성어거스틴의 고백록, 선한용 )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는 의심의 어둠 속에서 오랫동안 방황하는 시간을 보냈지만, 깨달음은 한순간이었습니다. 깨달음은 각고의 수련 끝에 도달하는도통道通 아니었습니다. 외부에서 그의 내부로 순간에 주입된 것입니다. 실로 깨달음의 빛이 한순간에 사람의 존재를쪼개고( קָרַע 쿼라)” 관통한 것입니다.

 

오늘 복음서 본문을 보면 마르코는 예수의 세례에 대한 전승 자료에 충실했던 같습니다. 그는 예수의 세례에 대한 배경을 전혀 우리에게 전해주지 않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을 읽어보면 하늘이 갈라지는 것도, 성령이 비둘기처럼 내려오시는 것도, 그리고 사랑하는 아들이란 음성도 오직 예수만 보고 들은 것으로 묘사됩니다. 단순과거직설법 3인칭단수 εἶδεν 사용하여그가 봤다 표현됩니다. 단순과거직설법이므로 동작의 종류는 일회적이고 시제는 과거입니다. 문맥으로는 세례자 요한도 광경과 음성을 보고 들었는지 확인하기가 애매합니다. 요한복음 1 32절에서 세례자 요한이 예수님 위로 성령이 임하시는 것을 보았다고 증언한 것과는 차이가 있습니다. 마르코의 이야기가 ‘3인칭 관찰자 시점으로 기록되었기에 예수의 주변 인물들은 사건의 전모를 알지 못한 것으로 추측됩니다. 연극을 본다고 생각하시면 쉽게 이해가 것입니다. 예수님 위로 하늘이쪼개지고”, 성령이 비둘기처럼 사뿐히 예수의 머리 위로 내려오는 장면, 그리고 하늘로부터 들리는 목소리... 예수와 ‘3인칭 관찰자이외에 다른 사람들은 장면의 의미를 없습니다. 그래서 단어와 단어, 행과 , 사건과 사건, 등장인물 사이에 묘한 긴장감이 존재합니다. 마르코는 마치하드보일드 장르 소설같이 사건을 감정 없이, 설명 없이 무덤덤하게 묘사했습니다. 그래서 긴장감은 고스란히 복음서의 독자 또는 청자의 몫으로 남겨집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집고 넘어갈 것이 하나 있습니다. 오늘 설교를 시작하면서 읽어드렸던 구절인 시편 2:7 마르코가 인용하면서 각색을 했다는 점입니다. 시편 2 7절에서아들앞에사랑하는(ἀγαπητός)” 삽입하여 사랑하는 아들이라 표현했습니다. 오늘 너를 낳았노라라는 대신에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라고 바꿔 기록합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해볼 있습니다. 예수께서 자신이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언제 인지하셨을까요? 나실 때부터 일까요? 아니면 성장하시면서? 아니면 세례 시에? 우리가 알고 있는 교리적이고 고백적인 내용을 잠시 접고 우리의 이성으로 생각해 봤으면 합니다. 예수에 대한 교리적, 신학적 정립이 되지 않았던원시 그리스도교 돌아가서 질문을 다시 생각해 봅시다. 예수께서는 언제 본인이하느님의 아들임을 인식하셨을까요? 

 

우리가 복음을 읽을 쉽게 간과하고 넘어가는 부분이라 잠깐 언급하고 가겠습니다. 마르코 복음에는 예수가 세례 시에하느님의 아들임을 인지한 것으로 묘사됩니다. 요한복음을 따르면 예수는 창세 전부터 하느님과 함께 계신 것으로 기록되었습니다. 마태오와 루가는 이를 각각 예수의 출생과 연관시킵니다. 사도 바울로는하느님께서 당신의 아들을 많은 인간의 모습으로 보내셨다”(로마 8:3, 필립 2:6-11)라고 하여선재적 그리스도론 말했습니다. 신학자 불트만은 부활 이후에하느님의 아들이라는 예수의 정체성이 드러났다고 봅니다. 다른 신학자 예레미야스는 예수의 세례 시에 예수께서 자신의소명 확인했다고 합니다. 콘첼만의 경우는 예수께서 세례시에하느님의 아들임을 인식하셨고, 변화산의 변모 하느님의 아들 확증받았다고 설명합니다.(마르 9:2-18) 하나의 사건에 대해 이렇게 많은 관점들이 존재합니다.

 

아직 삼위일체설이 정립이 되지 않았던 1세기원시 그리스도교에서도 이렇게 다양한 견해들이 뒤섞여 있었습니다.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실 또는 변화산에서 변모되셨을 하느님의 아들로 확증되었다는 주장을양자설(Adoptionism)’이라 부릅니다. 그것을 주장하던 사람들은 2세기에에비온파 Ἐβιωναῖοι’ 하여 결국에는 이단으로 정죄를 받습니다. 이러한단성론아리우스파(Arianism)’ 이어지다 325 니케아공의회에서 삼위일체 교리(St. Athanasius) 정립되면서 이단으로 정죄받습니다. 그들의 주장은 하느님은 분뿐이시고, 예수는 원래 사람이신데 하느님으로부터 신성을 얻었다고 믿었습니다. 서기 70 경에 기록된 것으로 여겨지는 마르코 복음에는 이러한 단성론적 배경이 존재했습니다. 마르코가 시편 2 7절을 인용하면서 오늘 너를 낳았노라라는 부분 대신에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 고쳐 기록한 것도 이러한 영향 때문으로 여겨집니다. 삼위일체론이 완전히 성립되기 이전이라 충분히 이해가 됩니다. 마르코는 예수께서 선재적으로 하느님과 함께 하셨는지 아닌지에 대해서는 침묵합니다. 대신 예수께서 세례 시에 본인이하느님의 아들임을 처음 인식하신 것으로 기록합니다.

 

마르코는 예수의 세례 사건에성령의 개입하느님의 음성 접목시킵니다. 이제아들이란 보통명사가 예수에게만 특별히 적용되어 독특한 의미로 재탄생됩니다. ‘하느님의 아들이란 말은 과거 왕의 즉위식에서 왕을 지칭하거나, 이스라엘 백성을 지칭할 사용되었습니다. 야훼와 , 또는 야훼와 이스라엘 백성 간에 맺어진 계약관계를 보여주는 용어였습니다. 다윗 가문의 왕은하느님의 아들로서 하느님과 양자 관계가 되는 것입니다. 계약의 근거는 시내산 계약이고( 8:5)   예언자 나단은 이를 다음과 같이 예언합니다. “내가 친히 그의 아비가 되고 그는 아들이 되리라.”( 2 사무 7:14)  왕이나, 하느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을 지칭하던하느님의 아들이란 말이 이제 예수에게만 적용되어 그의 정체를 설명하는 말이 되었습니다.

 

사실 하늘이쪼개지면서들리는 하늘의 음성이 정확이 무엇인지 우리는 모릅니다. 어거스틴이 무화과나무 밑에서 아이들의 노래를 들었을 , 그것이 그에게 특별한 의미로 다가온 현상도 우리는 명확히 설명하기 어렵습니다. 그것이 오늘 이야기에서 우리가 느끼는 당혹감이고 마르코가 제시하는신비 아닐까 생각합니다. 예수 위에 성령이 임하신 것은 단일회적 사건이라 우리가 현상을 유추할 소스가 전혀 없습니다. 그래도 어거스틴의 경우는 많은 신앙인들의 회심 사건에서 자주 접하는 부분이라 그나마 이해의 여지가 남습니다. 우리도 일상적으로 듣고 알고 있던 말이 어느 순간 전혀 새로운 의미로 우리에게 다가왔던 경험들이 있습니다. 항상 읽던 성서 구절이 어느 순간에는 우리의 뇌리 속에 깊이 새겨질 때도 있습니다. 아름다운 예술 작품이나 풍경이 아니더라도, 우리의 일상에서 소소한 것들이 우리에게 전혀 다른 의미와 감동으로 다가올 때도 있습니다. 조도를 뜻하는 일반적인 빛인 룩스(lux) 성스러운 스테인드 글라스를 통과하면 신학적으로 루멘(lumen) 되는데, 그것은 바로 고딕 성당의 내부를 온화하게 감싸며 밝혀주는 신비로운 천상의 빛으로 이해됩니다. 어거스틴이 자신의 체험을확실성의 이라 표현한 것은 문학적 수사이지만, 빛은 한순간에 어둠을 밝히고, 우리의 고정관념과 일상성을 깨뜨리며; 우리 안에서 어둠을 몰아내고; 모든 의심을 일순간에 제거하며; 우리가 자신의 존재와 실존을 전혀 새롭게 인식하게 만듭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의 노력이나, 수덕, 선행에 의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의 외부로부터 내부로 침투하는 은총입니다. 예수께서 세례 받으실 빛이 그의 머리 위에 임하셨습니다. 사도 바울로는 다마스쿠스로 가는 도중에 보았습니다. 어거스틴은 무화과나무 밑에서 체험했습니다. 빛은 다름 아닌 성령의 빛이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가지 기억할 것이 있습니다. 이러한 성령의 역사에는 그것을 보증하고 확증해주는 보증인들이 있었다는 점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이러한 개인적 체험은 자기 안에서 고립될 위험이 큽니다. 고립된 것은 우리 안에서 곪아터지게 마련입니다. 개인의 성령 체험이 고립성을 탈피해 보편성을 얻기 위해서는 현상을 분별하고 세워주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성령의 역사는 결국 사람을 통해 확증되고, 보다 넓어지며, 서로를 세우는 사랑의 역사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께는세례자 요한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로에게는아나니아 있었습니다. 어거스틴에게는 그의 어머니모니카 있었습니다. 그녀는 자신의 아들의 신비한 체험 이야기를 듣고기뻐 뛰며 춤을 추었다.”라고 합니다. 저의 경우를 회상하면, 제가 대학시절에 회심을 체험했을 저를 따뜻하게 인도해준 기독교 동아리의 동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의 환대와 사랑에 대한 기억은 아직까지도 저를 지탱해주는 힘입니다.

 

환대와 사랑으로 우리를 가장 이해하고 우리의 신앙의 길을 동행할 사람이 우리 곁에 있다면 그건 축복입니다. 그래서 이번 사순절을 시작하며 가지를 함께 기도하길 제안드립니다. 첫째는 우리의 영혼을 쪼개는확실성의 우리의 삶과 우리의 실존에 들러붙어 있던 어두움과 의심들을 몰아낼 있도록 기도했으면 좋겠습니다. 둘째는 그러한 빛이 우리 영혼을 비출 , 기쁨을 함께 나누고, 서로의 믿음을 세워줄 좋은 신앙의 동역자를 위해 기도했으면 좋겠습니다. 동역자가 우리의 배우자, 자녀들, 친구들, 직장 동료들 또는 우리 교우들이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사순절 기간 동안 성령께서 우리를 어떻게 인도하실지 많은 기대가 됩니다. 오늘 우리가 살펴봤던확실성의 사순절 동안 우리를 온화하게 감싸주고 인도해주시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아멘

 

 


 

사순1 (나해) 전례독서

 

본기도

생명의 하느님, 홍수로써 세상 죄악을 씻어내셨듯이 세례로써 우리에게 새로운 생명을 주시나이다. 구하오니, 세례를 통하여 거듭난 우리가 마귀와 세속과 정욕을 이기며 성령의 능력 안에 살아가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하느님이신 우리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나이다. 아멘.

 

창세 9:8-17

8 하느님께서 노아와 그의 아들들에게 말씀하셨다.

9이제 나는 너희와 너희 후손과 계약을 세운다. 10 밖으로 나와, 너와 함께 있는 새와 집짐승과 들짐승과 밖에 땅에 있는 모든 짐승과도 나는 계약을 세운다. 11 나는 너희와 계약을 세워 다시는 홍수로 모든 동물을 없애버리지 않을 것이요, 다시는 홍수로 땅을 멸하지 않으리라.”

12 하느님께서 말씀하셨다.

너뿐 아니라 너와 함께 지내며 숨쉬는 모든 짐승과 사이에 대대로 세우는 계약의 이것이다. 13 내가 구름 사이에 무지개를 터이니, 이것이 나와 사이에 세워진 계약의 표가 것이다. 14 내가 구름으로 땅을 덮을 , 구름 사이에 무지개가 나타나면, 15 나는 너뿐 아니라 숨쉬는 모든 짐승과 사이에 세워진 계약을 기억하고 다시는 물이 홍수가 되어 모든 동물을 쓸어버리지 못하게 하리라. 16 무지개가 구름 사이에 나타나면, 나는 그것을 보고 하느님과 땅에 살고 있는 모든 동물 사이에 세워진 영원한 계약을 기억할 것이다.”

17 하느님께서는 노아에게이것이 위에 있는 모든 짐승과 사이에 세워진 계약의 표이다.” 하고 다시 다짐하셨다.

 

 

시편 25:1-10

1    주여,

.     영혼이 당신을 우러러 뵈오며
.     나의 하느님,

.     당신만을 믿습니다.

2    그러므로 부끄러운 당하지 않게 하시고
.     원수들이 으시대지 못하게 하소서.

3    당신만을 믿고 바라면 망신을 당하지 않으나,
.     당신을 함부로 배신하는 수치를 당하리이다.

4    주여, 당신의 길을 가리켜주시고
.     어떻게 살아야 할지 가르쳐주소서.

5    당신만이 나를 구해 주실 하느님이시오니,
.     당신의 진리 따라 나를 인도하시고 가르치소서.
.     날마다 당신의 도움만을 기다립니다.

6    주여, 당신의 자비와
.     한결같으신 사랑을 기억하시고

7    젊어서 저지른 나의 잘못과 죄를 잊어주소서.
.     주여, 어지신 분이여, 자비하신 마음으로 나를 생각하소서.

8    주여, 당신은 바르고 어지시기에
.     죄인들에게 길을 가르치시고

9    겸손한 옳은 길로 인도하시며
.     그들에게 당신의 길을 가르치십니다.

10  당신의 계약과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    
당신의 모든 길이 사랑이며 진리입니다.

⦿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     처음과 같이 지금도 그리고 영원히, 아멘.

 

 

1베드 3:18-22

18 그리스도께서도 여러분의 때문에 죽으셨습니다. 없으신 분이 죄인을 위해서 죽으신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죽으심으로써 여러분의 죄를 용서해 주시고 하느님께로 인도해 주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몸으로는 죽으셨지만 영적으로는 다시 사셨습니 . 19 이리하여 그리스도께서는 갇혀 있는 영혼들에게도 가셔서 기쁜 소식을 선포하셨습니다. 20 그들은 옛날에 노아가 방주를 만들었을 하느님께서 오래 참고 기다리셨지만 끝내 순종하지 않던 자들입니다. 방주에 들어가 물에 빠지지 않고 구원을 받은 사람은 겨우 여덟 사람뿐이었습니다. 21 그것은 오늘날 여러분에게 구원을 가져다 주는 세례를 미리 보여준 것입니다. 세례는 몸에서 더러운 때를 벗기는 것이 아니라 깨끗한 양심으로 살겠다고 하느님께 서약을 하는 것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로써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22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늘에 올라가셔서 하느님의 오른편에 계시며 천사들과 세력과 능력의 천신들을 당신에게 복종시키셨습니다.

 

 

마르 1:9-15

9 무렵에 예수께서는 갈릴래아 나자렛에서 요르단 강으로 요한을 찾아와 세례를 받으셨다. 10 그리고 물에서 올라오실 하늘이 갈라지며 성령이 비둘기 모양으로 당신에게 내려오시는 것을 보셨다. 11 하늘에서너는 사랑하는 아들,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 시편 2:7; 창세 22:2; 이사 42:1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12 뒤에 성령이 예수를 광야로 내보내셨다. 13 예수께서는 사십 동안 곳에 계시면서 사탄에게 유혹을 받으셨다. 동안 예수께서는 들짐승들과 함께 지내셨는데 천사들이 그분의 시중을 들었다.

14 요한이 잡힌 뒤에 예수께서 갈릴래아에 오셔서 하느님의 복음을 전파하시며 15때가 되어 하느님의 나라가 다가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 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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