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5.1. 부활3주일
사도 9:1-6(7-20) / 시 편 30 / 묵시 5:11-14 / 요한 21:1-19
“부활-그리스도교의 사회적 소명” (4)
채야고보 신부 / 대한성공회 제주교회, Artist
부활은 매우 중요하지만 이에 관해 이야기하는 것은 많은 난관에 부딪힙니다. ‘부활의 실재’에 대해 이야기를 하면, 우리 가운데 ‘부활의 실재’를 체험한 사람들이 없기에, 결국에는 ‘신앙적 간증’이나 ‘믿음의 고백’이 되고 말기 때문입니다. 또 ‘부활에 대한 신앙’을 이야기하면, ‘믿음’이라는 것이 매우 개인적이고 주관적이라, 일반적인 차원에서 이야기를 전개하려면 원론적이고 교리적인 답변 이상을 말하기 어렵습니다. 결국 ‘부활의 실재’를 경험하지 않은 우리로서는 부활을 이야기할 때 ‘부활의 케리그마’를 이야기할 수밖에 없고, 그 ‘케리그마’에 담긴 계시를 읽어내기 위해서는 ‘신학적’ 내러티브를 전개할 수밖에 없습니다. 좀 딱딱하지만, 당위론적이고 원론적인 이야기에서 조금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우리의 부활 신앙에 대해 이제 우리의 이성을 사용하여 살펴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부활밤 예식부터 저는 차례대로 ‘부활의 증거’, ‘부활의 증언’, ‘부활의 소명’을 이야기했습니다. 오늘은 부활 사건이 어떻게 우리 그리스도교의 시작에 영향을 끼쳤으며 우리에게 주어진 ‘사회적 소명’이 무엇인지 살펴보고자 합니다.
오늘 읽은 복음서는 요한복음 저자의 후계자들이 요한복음에 덧붙인 것으로 학자들은 추정하고 있습니다. 원래 요한복음은 20장에서 “맺음말”을 하는 것으로 보아 20장이 끝이었던 것 같습니다. 21장은 그 부록으로 보아야 타당할 것입니다. 오늘 읽은 갈릴래아의 발현 사화는 “교회론적이고 사목적인 목적”에서 기록된 것으로 보입니다. 장소도 이전의 발현사화가 예루살렘 중심이라면, 이제 배경은 갈릴래아 지방의 ‘티베리아 호수’가 됩니다. 앞 장의 발현 사화들과 분위기도 사뭇 다릅니다. 이미 예수의 현현을 예루살렘에서 목격했던 제자들이 그 소명을 무시하고 갈릴래아로 돌아가 고기잡이를 한 것은 앞 장의 내용들과 매우 대치됩니다. 세 번째 발현 인대도 주님을 못 알아봤다는 것은 잘 납득이 가지 않습니다. 이러한 이유들이 21장이 요한복음의 부록이라는 주장을 뒷받침합니다. 이 21장에서 언급된 일곱 제자들은 베드로, 토마, 나타나엘, 제베대오의 두 아들인 야고보와 요한, 그리고 다른 두 사람 등입니다. 일곱 이란 수가 지닌 상징성으로 미루어 짐작하건대 이들은 부활 후 존재했던 모든 예수 공동체를 대표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러한 공동체에 대한 사목권을 베드로에게 위탁하는 장면이 15절에서 19절에 나옵니다. 베드로의 배신과 대조되는 세 번의 사랑 고백 확인을 통해 베드로의 권위를 회복시키고 그에게 사목권의 대표성을 부여하는 내용입니다.
‘부활의 현현 사건’을 ‘계시’로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먼저 이에 접근하는 인간의 이성적 경로들에 대해 잠시 살펴봐야겠습니다. ‘계시’는 절대적인 무한한 존재가 유한한 인간 실존에 관여하는 어떤 것입니다. 대부분 이러한 ‘계시’는 신비의 형태를 띱니다. 인간이 이러한 ‘계시’에 다가가는 경로는 크게 두 가지입니다(폴 틸리히). 하나는 ‘종교’이고 다른 하나는 ‘철학’입니다. 물론 인간의 본성에 의존하는 ‘자연 종교’는 논외로 합니다. ‘종교’와 ‘철학’은 인간의 ‘삶의 자리’에서 이러한 ‘초월’과 ‘계시’를 이해하고자 하는 노력이라 할 수 있습니다. ‘신학’의 위치는 이러한 ‘종교’와 ‘철학’의 사이 어디쯤입니다. 철학은 ‘계시’를 ‘존재론적인 물음’에서 시작하여 이를 “구조적으로 구축”하는 데 노력합니다. 즉 “존재의 현존과 그 구조”를 조직적으로 구성하려 합니다. 그래서 철학은 인간이 어디에서 왔고, 인간이 무엇이고, 존재가 무엇인지에 대해 끊임없이 질문합니다. 이러한 질문은 종교도 마찬가지입니다. 다만 철학은 여기에서 ‘존재에 대한 신비’를 제거함으로 종교와 다른 방향으로 나아갑니다. 그러나 결국에는 존재를 구성한다는 차원에서 종교는 철학과 만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종교가 철학적 사유의 용어와 구조를 기독교 변증에 사용하는 한 신학은 철학에 많은 빚을 질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이유로 이성을 제외시키고 온전히 ‘계시’에 대한 신심과 믿음만 종교가 추구한다면 ‘이성’과 ‘철학’ 그리고 ‘신학’은 결국 상호 연관성을 찾기가 매우 어려워질 것입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부활의 현현 사건’은 인간 측에서는 ‘하느님의 계시’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 복음서는 어떻게 그 부활의 사건이 종교성을 덧입는지를 잘 보여줍니다. 처음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모든 예수 운동의 마지막으로 여겨졌습니다. 최소한 유대인들과 로마인들은 그렇게 생각했을 겁니다. 물론 예수 운동 추종자들도 그랬을 것이고요. 이로써 모든 논란은 종식될 것으로 여겼지만 실상은 그것이 새로운 시작이었던 것입니다. 제자들이 십자가 사건 이후 두려움과 절망 속에서 떨었다는 기록을 우리는 지난 요한복음 20장을 통해 봤습니다. 예수 운동의 마지막은 그러했습니다. 부활 사건이 발생하기 전까지 말입니다. 그리고 이후 제자들 앞에 ‘부활의 현현’이 실제화됐을 때, 초월이 인간 실존 안으로 침투했을 때, 계시가 현상의 세계에 그 신비를 드러낼 때, 제자들이 얼마나 당황하고 두려워했는지도 우리는 압니다. 우리의 이성과 경험을 넘어서는 현상에, 칸트가 말했듯이, 인간은 경이 또는 두려움을 느끼는 게 당연합니다. 감당할 수 없는 감정의 소용돌이. 영혼을 집어삼킬듯한 격동. 그것을 우리는 ‘숭고’라 부릅니다. 걷잡을 수 없는 감정의 격동 속에서 인간의 마음은 그 반대급부로써 강한 안정감을 오히려 갈망하게 됩니다. 그러한 상태가 우리 안에 감정적 진공 상태를 만듭니다. 격동과 안정성을 향한 팽팽한 긴장감. 이것이 인간의 인식에 반응하여 감정이 작동하는 방식이고, 그러한 숭고적 감정을 이해하는 ‘이성적 이해’의 틈이 조금은 생기는 것입니다.
오늘 읽은 21장은 이미 시간적으로 ‘부활 현현 사건’이 원시기독교공동체 내에서 상당히 교리적으로 편입된 이후의 기록으로 여겨집니다. 굳이 이 이야기를 20장의 이전 이야기와 연결을 짓는다면 아마도 ‘마리아의 부활 체험 이야기’와 연결시키는 것이 훨씬 자연스러웠을 겁니다. 그러나 이 부분은 요한학파의 추종자들이 나중에 다른 출처의 전승자료를 참고하여 덧붙인 부분이기에 시간적으로도 내용적으로도 일관성이 부재할 수밖에 없었을 겁니다. 그리고 요한복음은 21장의 갈릴래아 부활 현현 이야기가 제자들이 세 번째로 예수를 만난 사건이라 진술하면서 이전의 기록과 연관성을 만듭니다.
그렇다면 21장의 이야기의 의도는 분명해집니다. 많은 제자들 중 굳이 일곱 제자들의 이름을 함축하여 일일이 언급한 것에서도 추측할 수 있지만, 이미 초대기독교공동체는 계시를 체험한 ‘자연종교’ 단계에서 서서히 조직적인 종교로의 이행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말은 부활 사건 이후 예수의 제자 공동체는 서서히 ‘하느님 나라 운동’에서 ‘종교’로 변모되어 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니 제자들의 대표인 베드로의 위상은 다시 재고될 필요가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예수를 세 번이나 부인했던 전적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를 통해 공동체의 중심으로서의 분명한 ‘소명’과 ‘비전’이 제시되어야 했습니다. 그것은 일반 종교 시스템이 요구하는 사제와 신자의 시스템 구축의 기본이 되기 때문입니다. 이를 우리는 ‘사목’이라 부릅니다. 요한복음에 지속적으로 표현된 예수와 제자들의 관계는 사목적으로 늘 ‘목자와 양’의 관계로 비유됩니다. 이러한 ‘목자와 양’의 사목적 관계는 예수와 제자들 간의 관계에 적용되다가 이제 부활 후 원시기독교공동체에서는 ‘사제와 신자’의 관계로 대체됩니다. ‘예수의 하느님 나라 운동’은 이제 부활 사건으로 새로운 전기를 맞이한 것입니다. 원시기독교공동체는 이렇게 사목적인 비전과 그 비전이 갖는 사랑의 관계성을 새롭게 정리하며 체계적인 종교 시스템을 갖춰가기 시작합니다. 계시는 단순히 ‘케리그마’ 차원을 넘어 이제 신학적인 변증으로 구축되기 시작됩니다. 이러한 신학적 변증은 부활 현현에 대한 다방면의 도전으로부터 원시기독교공동체를 지키고 유지시키는 방향으로 나아갔습니다. 바야흐로 ‘그리스도교’ 탄생의 서막이 열린 것입니다. 계시 - 혼란 - 이해와 수용 - 적용이라는 종교 시스템 구축의 단계를 요한복음은 이렇게 ‘부활 이야기’를 통해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종교화 이전에 부활을 체험했던 제자들은 처음부터 유대교로부터 분리된 자신들의 독자적인 정체성을 갖지는 못했습니다. 그들은 대부분 유대교 종파의 한 부분으로 자신들을 인식했습니다. 이러한 부활공동체와 유대교 사이에 관계적 긴장은 우리가 루가가 기록한 사도행전을 통해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부활의 신앙이 공동체의 성격과 시스템, 그리고 교리를 형성하기 시작하고, 성령강림사건이 더해지면서 원시기독교공동체는 급격하게 유대교로부터 분리되기 시작했습니다. 요한복음서 전반적으로 이러한 분리의 흐름이 행간에서 읽힙니다. 디아스포라 유대교 회당을 처음에는 상호 공유하다가 어떤 이유에서 유대교의 박해로 인해 요한공동체는 차츰 그들과 결별을 했습니다. 요한복음에서 사용된 ‘어린양’, ‘랍삐’, ‘메시아’라는 말은 유대교의 용어들로써 이들이 유대교와 처음에는 깊은 관련이 있었음을 보여줍니다. 그러던 관계가 어떤 이유에서 상호 경색됩니다. 요한복음 9장 22절을 보면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부르는 사람은 누구나 회당에서 쫓아낸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갈등 구도는 결국 요한공동체를 유대교와 결별하게 만들어 ‘반유대적 경향’을 갖게 만들었습니다. 그것은 요한공동체가 예수와 하느님 아버지를 본질상 동격으로 선포하면서 둘 사이는 완전한 결별이 이루어집니다. )
이제 부활의 신앙이 ‘종교’ 시스템의 구축을 추동하면서 부활의 증인들인 ‘사도들’은 교회의 중심이 됩니다. 물론 베드로는 교회의 기둥이 되지요.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종교’라는 말에 약간의 불편함을 느끼는 것 같습니다. 특히 보수적인 신앙을 가지신 분들일 경우 더하지요. 기독교의 ‘계시’는 전능하신 하느님으로부터 기인하는 것으로 ‘계시’는 결코 일반적인 종교 시스템 안에 편입될 수 없다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한마디로 ‘절대 진리’라 여기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보수적인 그리스도인들은 다른 종교와 대화조차 하려 하지 않습니다. 기독교가 아닌 종교는 그들의 관점에서는 ‘우상숭배’로 보일 뿐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초월적인 ‘계시’가 인간 편에서 이해되는 과정을 면밀히 살펴본다면, 이러한 오해와 편견에서 조금은 벗어날 수 있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결국 모든 ‘계시’는 ‘특정 환경’, ‘특정 상황’, ‘특정 사람들’, ‘특정 집단’에 의해 수용되고 해석될 수밖에 없습니다. ‘계시’를 받은 사람은 반드시 자신이 속한 사회의 “삶의 자리”에서 그 ‘계시’를 증언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자기의 말과 자기의 사고, 그리고 자기가 속한 세계관의 틀을 벗어나 ‘계시’를 설명할 길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기독교가 하느님 ‘계시’의 위대성과 존엄을 주장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표현되는 세상은 늘 우리의 일반적인 사회의 시스템을 벗어나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문화와 문명이라는 거대한 시스템 속에서 신비와 절대적인 존재를 믿고 그 가르침을 따르며 추앙하는 사람들이 속한 공동체 시스템을 ‘종교’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문제는 기독교가 자신들이 이런 일반적인 ‘종교’ 안에 있다는 사실을 부인하거나 망각할 때 발생합니다. 분명 사회시스템에서 우리는 ‘종교’로 분류됨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인들은 마치 스스로를 ‘진리의 담지자’로 생각하며 그러한 타종교들과 자신들을 구별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예수 천당, 불신 지옥”이란 구호가 지닌 위험성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이러한 구원은 우리 기독교를 ‘종교’라는 사회시스템에서 소외시키는 결과를 가져올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 결국에는 종교에게 부여된 사회적 책임과 의무는 쉽게 망각되고 기독교 자신의 이익과 권리만을 주장하는 옹졸하고 이기적인 집단의 모습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기독교가 대중으로부터 외면받는 이유가 바로 이러합니다. 사회적 의무와 책임보다 신앙적 의무와 믿음이 더 강조되다 보니 사회 시스템 안에 있으면서도 우리는 스스로를 사회로부터 소외시키는 실수를 하게 됩니다. 물론 이러한 위험성은 기독교뿐만 아니라 다른 여타 종교에도 발생할 수 있는 문제점입니다. 그래서 모든 종교의 적은 결국 ‘근본주의’에 입각한 ‘종교지상주의’가 아닐까 생각됩니다. 종교가 ‘계시’를 해석하고 이해하는 과정에서 사회와 문화적인 영향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는 점을 분명히 인식한다면, 우리는 우리가 몸담고 살아가는 사회와 문명과 함께 살아가는 방법을 더욱 진지하게 고민해야 하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과 더불어 함께 살 수 있기에 사람은 ‘인간(人間)’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문명과 사회 시스템을 구축한 것은 사람이 아니라 ‘인간’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영적인 존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오늘 요한복음 21장을 통해 우리 기독교가 지닌 위대한 가르침을 깨닫습니다. 우리 인간이 이룩한 문명과 사회 시스템을 더욱 견고하게 그리고 안정적으로 결합시키고 유지하는 데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말입니다. 바로 ‘사랑’입니다. 주님께서는 부활하셔서 베드로와 어그러졌던 관계를 회복시키십니다. 그 방법은 어떤 책망도 어떤 ‘잔소리’도 아니었습니다. 말없이 숯불을 지피시고 아침을 준비하신 주님, 그들의 허기를 달랠 생선을 구워 직접 제자들을 섬기셨던 주님, 그리고 세 번이나 예수를 배반했던 수제자에게 사랑의 고백 확인을 통해 우회적인 회개를 촉구하신 주님. 이러한 일련의 주님의 행위들은 바로 우리가 기억하고 따라야 할 가르침 그 자체입니다.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린다.”(요한 10:11)
이것이 주님께서 자신들의 양들을 돌보시는 사랑의 방식이고 우리 교회 사목의 핵심입니다. 그분은 그 방식대로 사셨고 죽으셨고 또 부활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분의 사랑이 너무 감사해서, 너무 기뻐서, 너무 감격해서 이렇게 예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부활은 그러므로 그분께서 우리를 끝까지 사랑하신다는 약속의 보증이 됩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결코 버리지 않으십니다. 그러니 우리도 우리가 속해 살아가는 이 사회를 끝까지 사랑하고 그들과 함께 부활을 더불어 살아낼 소명이 있는 것입니다. 부활의 신앙과 정신은 결국 ‘사랑’으로 표현될 수밖에 없습니다. 모든 사랑에는 의무와 책임이 따릅니다. 이것이 사랑의 종교인 우리 기독교가 가진 사회적 책임과 소명입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말씀을 나눴습니다. 아멘.
전례독서: 부활3주 (다해)
본기도
전능하신 하느님, 성자 예수께서는 죽음을 이기시고 영원한 생명의 문을 우리에게 열어주셨나이다. 비오니, 주님의 부활을 기념하는 우리가 성령으로 새로워져서 부활의 증인이 되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한 분 하느님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나이다. 아멘.
1독서_ 사도 9:1-6(7-20)
1 한편 사울은 여전히 살기를 띠고 주의 제자들을 위협하며 대사제에게 가서 2 다마스쿠스에 있는 여러 회당에 보내는 공문을 청하였다. 그렇게 해서 그리스도교를 믿는 사람은 남자 여자 할 것 없이 눈에 띄는 대로 잡아서 예루살렘으로 끌어올 수 있는 권한을 받았다. 3 사울이 길을 떠나 다마스쿠스 가까이에 이르렀을 때에 갑자기 하늘에서 빛이 번쩍이며 그의 둘레를 환히 비추었다. 4 그가 땅에 엎드러지자 “사울아, 사울아, 네가 왜 나를 박해하느냐?” 하는 음성이 들려왔다. 5 사울이 “당신은 누구십니까?” 하고 물으니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다. 6 일어나서 시내로 들어가거라. 그러면 네가 해야 할 일을 일러줄 사람이 있을 것이다.” 하는 대답이 들려왔다. (7 사울과 동행하던 사람들도 그 음성은 들었지만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 벙벙해서 서 있기만 하였다. 8 사울은 땅에서 일어나 눈을 떴으나 앞이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사람들이 그의 손을 끌고 다마스쿠스로 데리고 갔다. 9 사울은 사흘 동안 앞을 못 보고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았다.
10 다마스쿠스에 아나니아라는 제자 한 사람이 살고 있었는데 주께서 신비로운 영상 가운데 나타나 “아나니아야!” 하고 부르셨다. 아나니아가 “예, 주님, 말씀하십시오.” 하고 대답하자 11 주께서는 “어서 일어나 ‘곧은 거리’라는 동네에 사는 유다의 집으로 가서 다르소 사람 사울을 찾아라. 사울은 지금 기도를 하고 있는데 12 그는 아나니아라는 사람이 들어와서 손을 얹어 다시 눈을 뜨게 해주는 것을 신비로운 영상으로 보았다.” 하고 말씀하셨다. 13 이 말씀을 듣고 아나니아가 “주님, 그 사람에 대해서는 여러 사람에게서 들은 바 있습니다. 그는 예루살렘에 사는 주님의 성도들에게 많은 해를 끼쳤다고 합니다. 14 더구나 그는 대사제에게서 주님을 믿는 사람들을 잡아갈 권한을 받아가지고 여기 와 있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15 주께서는 그에게 다시 이렇게 말씀하셨다. “그래도 가야 한다. 그 사람은 내가 뽑은 인재로서 내 이름을 이방인들과 제왕들과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널리 전파할 사람이다. 16 나는 그가 내 이름 때문에 얼마나 많은 고난을 받아야 할지 그에게 보여주겠다.” 17 그래서 아나니아는 곧 그 집을 찾아가서 사울에게 손을 얹고 이렇게 말하였다. “사울 형제, 나는 주님의 심부름으로 왔습니다. 그분은 당신이 여기 오는 길에 나타나셨던 예수님이십니다. 그 분이 나를 보내시며 당신의 눈을 뜨게 하고 성령을 가득히 받게 하라고 분부하셨습니다.” 18 그러자 곧 사울의 눈에서 비늘같은 것이 떨어지면서 다시 보게 되었다. 그는 그 자리에서 일어나 세례를 받은 다음, 19 음식을 먹고 기운을 회복하였다. 사울은 며칠 동안 다마스쿠스에 있는 신도들과 함께 지내고 나서 20 곧 여러 회당에서 예수가 바로 하느님의 아들이심을 전파하기 시작하였다.)
성시_ 시편 30
1 주여,
. 나를 건져주셨으니
. 높이 받들어 기리나이다. ◯
. 원수들이 나를 보고
. 비웃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2 나의 주 하느님,
. 살려 달라 외치는 내 소리를 들으시고 ◯
. 병들었던 이 몸을 고쳐주셨습니다.
3 주여, 내 목숨 지하에서 건져 주시고 ◯
. 깊은 구렁에 떨어지지 않게 살려주셨습니다.
4 주님을 믿는 자들아, 찬양노래 불러라. ◯
. 그의 거룩하신 이름에 감사기도 바쳐라.
5 그의 진노는 잠시뿐이요
. 그 어지심은 영원하시니 ◯
. 저녁에 눈물 흘려도 아침이면 기쁘리라.
6 마음 편히 지낼 때에는 스스로 말하기를 ◯
. 이제는 절대로 안심이다 하였는데,
7 나를 어여삐 여겨,
. 산 위에 든든히 세워 주시던 ◯
. 주께서 외면하셨을 때는
. 두려워 어쩔 줄 몰랐습니다.
8 주여, 이 몸은 당신께 부르짖으며, ◯
. 당신의 자비만을 구하였습니다.
9 이 몸이 피를 흘리고 땅 속에 묻힌다 해서 ◯
. 당신께 좋을 일이 무엇이겠습니까?
¶ 티끌들이 당신을 찬미할 수 있으리이까? ◯
. 당신의 미쁘심을 알릴 수 있으리이까?
10 주여,
. 이 애원을 들으시고 불쌍히 여겨주소서. ◯
. 주여, 부디 도와주소서.
11 당신은 나의 통곡하는 슬픔을
. 춤으로 바꿔 주시고 ◯
. 베옷을 벗기시고
. 잔치옷으로 갈아입히셨습니다.
12 이는 내 영혼이 끊임없이
. 주님을 찬미하라 하심이니 ◯
. 주, 나의 하느님,
. 그 은총 노래에 담아 영원히 찬양하리이다.
⦿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
. 처음과 같이 지금도 그리고 영원히, 아멘.
2독서_ 묵시 5:11-14
11 나는 또 그 옥좌를 둘러선 많은 천사들과 생물들과 원로들을 보았고 그들의 음성도 들었습니다. 그들의 수효는 수천 수만이었습니다. 12 그들은 큰소리로
. “죽임을 당하신 어린 양은
. 권능과 부귀와 지혜와 힘과 영예와 영광과
. 찬양을 받으실 자격이 있으십니다.”
하고 외치고 있었습니다. 13 그리고 나는 하늘과 땅과 땅 아래와 바다에 있는 모든 피조물 곧 온 우주 안에 있는 만물이,
. “옥좌에 앉으신 분과 어린 양께서
. 찬양과 영예와 영광과 권능을
. 영원 무궁토록 받으소서!”
하고 외치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14 그러자 네 생물은 “아멘.” 하고 화답했으며 원로들은 엎드려 경배했습니다.
복음서_ 요한 21:1-19
1 그 뒤 예수께서 티베리아 호숫가에서 제자들에게 다시 나타나셨는데 그 경위는 이러하다. 2 시몬 베드로와 쌍둥이라는 토마와 갈릴래아 가나 사람 나타나엘과 제베대오의 아들들과 그 밖의 두 제자가 한자리에 모여 있었다. 3 그 때 시몬 베드로가 “나는 고기를 잡으러 가겠소.” 하자 나머지 사람들도 같이 가겠다고 따라나섰다. 그들은 배를 타고 고기잡이를 나갔으나 그 날 밤에는 아무것도 잡지 못하였다. 4 이튿날 날이 밝아올 때 예수께서 호숫가에 서 계셨다. 그러나 제자들은 그분이 예수이신 줄을 미처 몰랐다. 5 예수께서 “얘들아, 무얼 좀 잡았느냐?” 하고 물으시자 그들은 “아무것도 못 잡았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6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져보아라. 그러면 고기가 잡힐 것이다.” 그들이 예수께서 이르시는 대로 그물을 던졌더니 그물을 끌어올릴 수 없을 만큼 고기가 많이 걸려들었다. 7 예수의 사랑을 받던 제자가 베드로에게 “저분은 주님이십니다.” 하고 말하였다. 주님이시라는 말을 듣자 옷을 벗고 있던 시몬 베드로는 몸에 겉옷을 두르고 그냥 물 속에 뛰어들었다. 8 나머지 제자들은 고기가 잔뜩 걸려든 그물을 끌며 배를 저어 육지로 나왔다. 그들이 들어갔던 곳은 육지에서 백 미터쯤밖에 떨어지지 않은 곳이었다. 9 그들이 육지에 올라와 보니 숯불이 있고 그 위에 생선이 놓여 있었다. 그리고 빵도 있었다. 10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방금 잡은 고기를 몇 마리 가져오너라.” 하고 말씀하셨다. 11 시몬 베드로는 배에 가서 그물을 육지로 끌어올렸다. 그물 속에는 백쉰세 마리나 되는 큰 고기가 가득히 들어 있었다. 그렇게 많은 고기가 들어 있었는데도 그물은 터지지 않았다. 12 예수께서 그들에게 “와서 아침을 들어라.” 하고 말씀하셨다. 제자들 중에는 감히 “당신은 누구십니까?” 하고 묻는 사람이 없었다. 그분이 바로 주님이시라는 것이 분명하였기 때문이다. 13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가까이 오셔서 빵을 집어주시고 또 생선도 집어주셨다. 14 예수께서 부활하신 뒤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것은 이것이 세 번째였다.
15 ¶ 모두들 조반을 끝내자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이 나를 사랑하는 것보다 더 나를 사랑하느냐?” 하고 물으셨다. 베드로가 “예, 주님. 아시는 바와 같이 저는 주님을 사랑합니다.” 하고 대답하자 예수께서는 “내 어린 양들을 잘 돌보아라.” 하고 이르셨다. 16 예수께서 두 번째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정말 사랑하느냐?” 하고 물으셨다. “예, 주님. 아시는 바와 같이 저는 주님을 사랑합니다.” 베드로가 이렇게 대답하자 예수께서는 “내 양들을 잘 돌보아라.” 하고 이르셨다. 17 예수께서 세 번째로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고 물으시자 베드로는 세 번이나 예수께서 “나를 사랑하느냐?” 하고 물으시는 바람에 마음이 슬퍼졌다. 그러나 “주님, 주님께서는 모든 일을 다 알고 계십니다. 그러니 제가 주님을 사랑한다는 것을 모르실 리가 없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그러자 예수께서 “내 양들을 잘 돌보아라.” 하고 분부하셨다. 18 이어서 “정말 잘 들어두어라. 네가 젊었을 때에는 제 손으로 띠를 띠고 마음대로 돌아다닐 수 있었다. 그러나 이제 나이를 먹으면 그 때는 팔을 벌리고 남이 와서 허리를 묶어 네가 원하지 않는 곳으로 끌고 갈 것이다.” 하고 말씀하셨다. 19 예수의 이 말씀은 베드로가 장차 어떻게 죽어서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게 될 것인가를 암시하신 말씀이었다. 이 말씀을 하신 뒤 예수께서는 베드로에게 “나를 따라라.” 하고 말씀하셨다.
'글모음 > 설교문' 카테고리의 다른 글
“종교 너머의 교회”- 부활(6) (0) | 2022.05.14 |
---|---|
“인격적 관계의 회복- 부활(5)” (0) | 2022.05.07 |
"문이 다 잠겨 있었는데도" - 부활의 소명 (3) (0) | 2022.04.23 |
‘부활의 증언’ (2) (0) | 2022.04.17 |
‘부활의 증거’ (1) (0) | 2022.04.1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