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5.8. 부활4주일
사도 9:36-43 / 시편 23 / 묵시 7:9-17 / 요한 10:22-30
“인격적 관계의 회복- 부활(5)”
채야고보 신부 / 대한성공회 제주교회, Artist
오늘 읽은 요한복음은 왜 그리스도교가 유대교와 하나가 될 수 없는지를 잘 보여줍니다. 유대교의 한 분파로 시작된 예수 운동은 아주 근본적인 부분에서 유대교와 일치할 수 없었습니다. 이는 요한복음의 ‘삶의 자리’에서 어떻게 요한공동체가 유대교와 결별할 수밖에 없었는지를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인간이 초월적 존재의 거룩함의 일부를 수여받아 성스러운 신성을 얻을 수는 있어도 인간과 하느님을 본질적으로 하나라고 말하는 자는 유대교에서 ‘신성모독’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스도교의 초기 이단들도 이러한 배경 속에서 발생한 것입니다. 하느님의 신성과 유일성을 강조한 ‘아리우스주의’는 성자를 성부에 종속된 개념으로 이해했습니다. ‘네스토리우스파’는 예수의 신성과 인성이 각각 나뉜다고 믿었습니다. 예수께서 ‘아버지와 나는 하나이다.’라고 선포한 것은 단순히 ‘반신반인’인 헬라 신화의 ‘데미갓(Demigod)’을 의미한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 아버지와 아들을 존재론적으로 하나라고 한 것입니다. 예수의 발언에서 하느님 아버지와 아들 예수 간에 존재적 구별은 사라집니다. 영원한 존재가 아닌 우리 인간은 존재와 비존재를 동시에 공유하는 유한한 존재입니다. 이러한 유한성을 지닌 인간이 무한성을 공유하면 과연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예수 이전에도 예수 이후에도 존재론적으로 ‘존재와 존재자’가 하나 인적은 없었습니다. 절대적인 왕권을 강조하기 위해 ‘신의 아들’이란 칭호를 황제에게 사용한 적은 있어도, 그것이 은유이지 존재론적 본질에서 하나임을 뜻하지 않았습니다.
오늘 읽은 1 독서인 사도행전 9장에서 루가는 기독교의 두 인물의 이야기를 인상적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바울로의 ‘다메섹 회심 이야기’이고, 다른 하나는 베드로의 두 가지 기적 이야기입니다. 물론 이러한 기록으로 루가가 강조하고자 하는 바는 뒤늦게 개종을 한 바울로보다는 수제자인 베드로의 사도적 권위를 더 집중하고 있습니다. 베드로는 ‘애네아’라는 중풍병자를 일으켰고, 심지어 ‘다비타’라는 죽은 여인을 ‘소생’시키는 기적도 베풀었으니 말입니다. 우리는 오늘 베드로의 ‘다비타 소생 이야기’와 ‘아버지와 나는 하나이다’라는 예수의 선언을 통해 드러난 부활과 인격의 문제를 짚어보려 합니다.
모든 종교가 가지고 있는 특징 중 하나는 초월적이고 절대적인 신이 인간의 실존 속에서 ‘인격화’되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거룩함은 인격화되지 않으면 인간에게 결코 인지될 수 없습니다. 모든 거룩함은 인격화될 때 우리 안에 체화되고 우리가 인식할 수 있게됩니다. 종교는 절대적 존재를 모든 만물을 통해 인격화의 대상으로 전환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나무와 돌, 다양한 자연물들에 어떤 성스러움의 인격을 부여하곤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인간의 편에서 초월은 절대로 인지되거나 표현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거룩함의 담지자’가 되는 대상은 그것이 인간이든 아니든 신비함을 지닌 ‘인격적인 요소’를 통해 표현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이러한 인격화는 ‘나와 너’ 또는 ‘나와 그것’ 간에 형성된 관계성이 없이는 절대 성취될 수 없습니다. 인격화는 매우 상대적이라는 말입니다. 이 말은 다른 말로 우리 자아의 인격이나 이러한 종교적 인격화는 모두 문화적인 배경의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흔히 말하는 영적 체험은 이러한 문화적인 인격화의 배경을 지닌다고 생각하면 됩니다. 동양에서 사는 사람이 서구적 배경의 영적 체험을 할 가능성은 상대적으로 적은 것이지요. 어떠한 영적 체험이든 초월이 내재에 투영될 때에는 그 ‘거룩함의 담지자’가 속한 공동체와 문화, 사회적 영향이 반영될 수밖에 없습니다.
베드로는 다비타와 자신만을 남기고 모든 사람들을 방에서 내보냅니다. 그 방에는 이제 죽은 다비타와 베드로뿐입니다. 베드로가 ‘무릎을 꿇고 기도했다.’라고 루가는 기록합니다. 그가 무릎을 꿇은 것은 온전히 거룩함의 현존을 기다린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는 모든 인식적 편견과 자신의 신앙적 경험, 그리고 인간의 한계를 모두 내려놓고 기도를 했을 겁니다. 본인도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면서… 다비타는 이미 생명이 부재한 상태였고, 베드로는 자신의 한계 안에서 그 생명을 다시 품고자 했습니다. 왜냐하면 생명이 부재한 사람은 ‘비인격적인 존재’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우리는 ‘죽음’이라 부릅니다. ‘비인격적인 것’이 다시 인격적 존재로 되기 위해서는 하느님의 전적인 은총이 아니면 불가능합니다. 베드로가 꿇은 무릎은 그러한 은총에 자신의 모든 것을 겸손히 비우는 행위였을 겁니다. ‘존재의 힘’이 사라진 곳에서 다시 존재의 생명을 불러내는 것은 주님께서 생전에 하시던 일이었습니다. 이제 그러한 일이 베드로에게도 일어날지 아무도 장담할 수 없는 순간. 마치 부활한 예수의 현현을 마주하듯이 베드로는 확신에 차서 창백한 그녀의 얼굴을 향하여 “다비타야 일어나라”라고 외칩니다. 이는 “나자로야, 나오너라!”라는 예수님의 외침처럼 ‘비인격적 권세’를 돌파하는 외침이었습니다. 이를 통해 루가는 사도 베드로를 ‘거룩함의 담지자’로 우리에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루가는 이 ‘다비타 소생 이야기’에 이어서 이방인 전도에 전환점을 만들어준 ‘고르넬리오 가족의 회심 이야기’를 배치함으로써 ‘거룩함의 담지자’로서의 베드로의 위상과 이방인 전도에 일대 전환점을 만듭니다. 이제 ‘부활의 현현 사건’은 이를 통해 유대인 공동체에서 이방 세계로 확대되는 계기가 마련됩니다. 이러한 일련의 사건을 루가는 매우 담담한 필체로 감정을 이입시키지 않고 가급적 객관적으로 기록을 하려 했던 것 같습니다. ‘기적 사화’에서 흔히 등장하는 주변의 놀라는 반응도 여기에서는 생략됐습니다.
오늘 복음서에서 언급된 ‘봉헌절(하누카 축제)’은 ‘유다 마카베오’가 기원전 164년에 시리아 셀레우코스 제국의 왕 ‘안티오코스 4세’를 물리치고 예루살렘을 시리아로부터 해방시킨 날을 기념한 절기입니다. 안티오코스 4세는 예루살렘을 정복하고 성전을 더럽히며 유대인들의 문화를 헬라화시키는 데 전력을 다했던 사람입니다. 한마디로 유대교 입장에서는 ‘신성모독자’이고 문화 말살자입니다. 외경인 ‘마카베오 하권’은 이러한 마카베오 가문의 투쟁기를 담고 있습니다. 과월절 해방의 메시지처럼, 유대인들은 이 ‘봉헌절’을 기리며 두 번 다시 예루살렘 성전이 농락당하는 일이 없게 하겠다는 다짐을 했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러한 봉헌절 축제가 한창일 때 예수께서 자신을 ‘하느님과 하나’임을 선포한 사건은 안티오코스 4세가 예루살렘과 성전을 농락한 일 못지않게 유대인들에게는 ‘신성모독’으로 느껴졌을 겁니다. 물론 안티오코스 4세는 군사적 무력을 통해 예루살렘을 농락했지만, 이 사람 예수는 그의 말과 행위의 권위 만으로 이런 일을 벌인 것이 차이입니다. 유대인들이 느꼈을 당혹스러움이 어땠을지 짐작이 갑니다. 유대인들의 입장에서 성전을 물리적으로 더럽힌 시리아의 왕이나 ‘하느님과 자신을은 하나'라고 주장하며 이스라엘의 종교와 신학 체계를 뒤집어놓은 예수의 발언이나 별반 다를 것이 없었을 겁니다.
유대교의 입장에서 전능하신 하느님은 본인이 창조하신 세계에 내재하실 수는 있지만, 피조된 대상이 창조주의 본질을 나눠갖는다는 것은 그들의 신학과 교리로는 도저히 납득이 될 수 없었습니다. 물론 유대교도 하느님과 피조물 간에 ‘인격적 관계’를 말하고 있습니다. 초월적 존재가 ‘인격적 관계’를 가지지 않으면 피조된 대상과 관계할 방법이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구약성서를 통해 알고 있는 ‘인격적 관계’는 야훼와 아브라함과 같은 한 개인 또는 이스라엘과 같은 한 공동체와의 관계입니다. 모든 인격적 관계는 상호 관련 속에서 관계성이 만들어지게 마련입니다. 그 시작은 바로 ‘말’에 있습니다. ‘말’은 한 인격과 다른 인격을 연결시킵니다(폴 틸리히). 또한 ‘말’은 한 인격과 다른 인격 간에 적당한 ‘거리’를 두게 만듭니다. ‘말’이 소통이 되기 위해서는 적절한 거리가 있어야만 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대화와 소통의 간격’입니다. 그리고 한 인격이 다른 인격에게 ‘말’을 함으로써 상호 관계성은 생깁니다. 물론 ‘말’이라는 것이 ‘언어’에만 국한되는 것은 아닙니다. 몸짓이든 손짓이든 상호 소통이 가능한 것은 인격 대 인격의 관계를 만들게 마련입니다. 그래서 사람과 사람 사이에 ‘말’이 사라지는 것은 상호 인격적 관계의 종말을 의미합니다. 그 관계는 ‘비인격적’으로 흐를 수밖에 없습니다. ‘바벨탑 사건’에서 모든 사람들의 말이 혼란된 것은 그들의 관계가 더 이상 ‘나와 너’라는 인격적 관계가 아니라, ‘나와 그것’이라는 비인격적 관계로 전환됐다는 뜻입니다. 말의 소통이 끊긴 곳에는 모든 관계가 ‘비인격적’으로 흘러갑니다. 그래서 개인 간이나 국가 간에도 대화가 상실한 지점에서는 다툼이나 전쟁이 있게 마련입니다. ‘말’은 그러한 ‘관계성의 힘’이고 ‘말’은 인격의 특징입니다.
구약에서 초월적 하느님께서 인간과 ‘인격적인 만남’을 하실 때 늘 먼저 인간을 부르시는 것을 우리는 볼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말씀하시고 인간은 듣습니다.” 이것이 구약성서가 보여준 초월과 내재의 단절이 ‘인격성’을 통해 연관성을 갖는 순간입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은 이러한 표징이고, 결국에 야훼는 한 민족인 이스라엘과 이러한 인격적인 관계를 형성하십니다. 그 인격화의 가시화된 관계가 바로 ‘율법’으로 표현됐습니다. 그리고 하느님과 이스라엘의 관계성이 ‘비인격적인 관계’로 전환될 때마다 야훼는 ‘선지자’들을 보내셔서 그러한 관계를 회복시키려 노력하셨습니다. 구약은 이러한 진술들로 넘쳐납니다. 하느님께서 인격화되지 않는 한 초월적 하느님은 우리와 무관한 존재로서 존재할 뿐입니다. 거기에는 사랑도 없고, 관계도 없습니다. 그러나 인격적 관계는 바로 ‘사랑’으로 연결된 관계입니다. 성서는 우리에게 철학이 말하는 ‘존재의 초월’이나 ‘존재의 통합’보다 인간과 인격적 만남을 하시는 ‘존재의 내재’를 우리에게 말합니다. 이러한 것이 가능한 것은 하느님께서 이 모든 세상의 창조자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그분의 의지대로 세상을 창조하셨고, 하느님께서 ‘말’로 세상을 창조하신 순간 하느님과 인간, 하느님과 세계 간에는 적절한 ‘인격적 거리’가 설정됩니다. 그 거리는 ‘인격적 관계’를 위한 ‘소통의 거리’입니다. 이것이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하셨다는 창세기의 의미입니다. ‘말’은 모든 대상 간에 적적한 거리와 소통의 간격을 만듭니다. 그리고 ‘말’은 ‘나와 너’라는 인격의 관계를 만들고, 그 ‘말’이 사라진 곳에는 ‘나와 그것’이라는 비인격적 관계가 만들어집니다. 하느님께서는 아담을 만드시고 아담과 ‘나와 너’라는 인격적 관계를 만드셨습니다. 아담과 하느님 간에 ‘말의 거리’는 정확히 ‘선악과’ 만큼의 거리감입니다. 그것은 상호 대화를 위한 거리였습니다. 그 간격이 무너질 때 초월은 더 이상 내재와 인격적 관계를 유지할 수 없습니다. 이것이 하느님과 분리된 인간의 죄입니다.
인격적 관계는 상호 관계 속에서 상호 반응하게 됩니다. 한쪽이 A라고 하면 다른 한쪽은 Á로 반응하게 됩니다. 그러나 한쪽이 그렇게 했다고 해서 반드시 다른 쪽이 그렇게 반응하리라고 기대할 수는 없습니다. 모든 인격적 관계에는 ‘비결정성’이 전제됩니다. 인격적 관계에서 상호 반응은 아무도 예측 가능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인격에는 ‘자유의지’가 있기 때문입니다. 한 자극에 대하여 다양한 반응이 있을 수 있습니다. 하느님과 인간의 관계가 인격적이지만, 하느님이 말씀하셔도 인간은 자주 하느님의 명령을 거부합니다. 또 역으로 우리가 아무리 기도해도 하느님 편에서 우리의 기도를 안 들어주실 개연성 또한 존재합니다. ‘인격적 관계’는 이와 같이 ‘비결정적’이며 ‘상대적’입니다. 모든 것이 입력된 값의 인과율에 따라 답이 나오지 않는 것이 ‘인격적 관계’의 특징입니다. 이러한 모든 '인격적 관계’에는 우리의 ‘자유 의지’가 작동하기 때문입니다. 그 ‘자유’는 바로 ‘사랑’에서 추동되는 자유라고 성서는 말합니다.
다비타가 ‘비인격’이라는 죽음의 상태에서 다시 ‘인격체’로 소생하고, 유한한 인간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로 인해 하느님과 새로운 ‘인격적 관계성’을 갖게 된 사건은 이렇게 정리될 수 있습니다. 부활은 이와 같이 ‘비인격적인’ 모든 것을 ‘인격화’시키는 새로운 하느님의 능력이 됩니다. 그 능력은 ‘관계의 힘’이며 그 ‘힘’은 이 세상을 사랑하시는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우리는 같은 그리스도교 국가가 상대를 ‘비인격화’시키며 ‘나와 그것’이 되어버린 참혹한 현실을 목격하고 있습니다. 아이들이 있는 학교 건물을 파괴한 러시아의 폭격은 ‘건물과 어린아이’를 같은 ‘비인격체’로 여겼기 때문에 벌어진 잔혹한 일입니다. 전쟁은 모든 ‘인격적인 것’을 ‘물성화’된 ‘비인격체’로 만들어버립니다. 우리는 이러한 비인격성을 코로나로 인해 지난 2년 간 겪었습니다. 코로나 사태와 더불어 급속하게 번지기 시작한 인류의 ‘비인격화’는 이번 우크라이나 전쟁을 통해 표면에 여실히 드러났습니다. 전염병으로 우리는 ‘나와 너’라는 관계성보다 ‘나와 그것’, ‘나와 코로나’라는 ‘비인격적 관계성’을 더 키워왔는지 모르겠습니다. 방역이란 이름으로 서로가 서로를 멀리하고, 서로가 서로를 조심하는 ‘비인격화의 경계심’이 우리 가운데 만연했습니다. 대화의 적절한 거리는 더 멀어지고, 말을 위한 우리의 입은 마스크로 봉인됐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Zoom이나 화상통화를 통해 서로 더 가까워진 듯하지만, 오히려 ‘인격적 거리’는 더 멀어진 듯한 느낌을 갖습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따뜻한 ‘인격적 온기’가 사라졌습니다. 나와 가족, 나와 우리 교회, 나와 내 직장… 그 이외는 모든 관계가 ‘비인격화’로 흘러가고 있는 게 아닌가 생각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사회에 만연한 ‘혐오’를 발견합니다. 뉴스를 통해 접하는 우리의 사회현상은 상대에 대한 ‘혐오’로 넘쳐납니다. 서로를 위한 인격적 배려는 사라지고 모든 관계성들이 ‘비인격화’됐습니다. ‘나와 너’라는 관계가 사라진 곳에는 모든 것이 ‘나와 그것’이라는 ‘비인격’만 남습니다.
그러나 이제 방역 마스크도 벗게 되면서 조금은 우리의 관계성이 ‘인격적’으로 변화되길 소망해봅니다. 바이러스가 우리의 인격성을 짓밟았지만, 그래도 이제는 ‘다비타야. 일어나라!’라는 외침처럼 우리도 다시 일어서는 계기를 만들었으면 좋겠습니다. ‘일어나라!’라는 헬라어 ‘아니스테미ἀνίστημι’는 루가가 예수의 부활 사건에도 사용한 동일한 단어입니다. 그러므로 부활의 외침은 모든 ‘비인격화’된 것들이나 상태들이 ‘인격적인 관계성’으로 회복되는 하느님의 신비입니다. 베드로는 그러한 ‘일어나라!’라는 외침을 통해 본인도 이제 부활을 살아내는 하느님의 은총 가운데 놓임을 알고 유대인 전도에서 담대히 이방인 전도로 한 발짝 더 나갈 수 있었습니다. 유대인들이 모든 이방인들과 맺었던 ‘비인격적 관계’가 부활 사건 이후 그리스도인들에 의해 ‘인격적인 관계’로 회복되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러한 ‘인격적 관계’가 우리 가운데도 더욱 풍성해지길 간절히 기원합니다. 아멘.
전례독서: 부활4주 (다해)
본기도
은혜로우신 하느님, 잃은 양들을 찾아 바른길로 이끌어주시나이다. 비오니, 우리가 그리스도의 음성을 듣고 순종함으로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한 분 하느님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나이다. 아멘.
1독서_ 사도 9:36-43
36 한편 요빠에는 다비타라는 여신도가 살고 있었다. 그 이름은 그리스 말로 도르가, 곧 사슴이라는 뜻이다. 그 여자는 착한 일과 구제 사업을 많이 한 사람이었는데 37 그 무렵에 병이 들어 죽었다. 그래서 사람들이 그 시체를 깨끗이 씻어서 이층 방에 눕혀놓았다. 38 리따는 요빠에서 가까운 곳이어서 베드로가 리따에 있다는 말을 들은 신도들이 그에게 사람 둘을 보내어 지체하지 말고 와 달라고 청하였다. 39 그래서 베드로는 곧 그들을 따라 나섰다. 베드로가 요빠에 이르자 사람들이 그를 이층 방으로 안내하였다. 과부들이 모두 베드로에게 몰려 와서 울며 도르가가 살아 있을 때에 만들어두었던 속옷과 겉옷을 보여주었다. 40 베드로는 사람들을 방에서 모두 내보낸 뒤 무릎을 꿇고 기도를 드리고 나서 시체쪽으로 돌아서며 “다비타, 일어나시오.” 하고 말하였다. 그러자 그 여자는 눈을 뜨고 베드로를 바라보며 일어나 앉았다. 41 베드로는 그 여자의 손을 잡아 일으켜 세웠다. 그리고 성도들과 과부들을 불러들여 다시 살아난 도르가를 보여 주었다. 42 이 소문이 온 요빠에 알려지자 많은 사람이 주를 믿게 되었다. 43 그 뒤 베드로는 한동안 요빠에서 피장이 시몬의 집에 머물러 있었다.
성시_ 시편 23
1 주님은 나의 목자시니 ◯
. 아쉬울 것 없어라.
2 푸른 풀밭에 놀게 하시고 ◯
. 물가로 이끌어 쉬게 하시니
3 지쳤던 이 몸에 생기가 넘친다.
. 그 이름 목자이시니 ◯
. 인도하시는 길, 언제나 곧은 길이요,
4 나 비록 음산한 죽음의 골짜기를 지날지라도◯
. 내 곁에 주님 계시오니 무서울 것 없어라
. 당신의 막대기와 지팡이로 ◯
. 인도하시니 걱정할 것 없어라.
5 원수들 보는 앞에서 상을 차려주시고, ◯
. 기름 부어 내 머리에 발라주시니,
. 내 잔이 넘치옵니다.
6 한평생 은총과 복에 겨워 사는 이 몸, ◯
. 영원히 주님 집에 거하리이다.
⦿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
. 처음과 같이 지금도 그리고 영원히, 아멘.
2독서_ 묵시 7:9-17
9 그 뒤에 나는 아무도 그 수효를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사람이 모인 군중을 보았습니다. 그들은 모든 나라와 민족과 백성과 언어에서 나온 자들로서 흰 두루마기를 입고 손에 종려나무 가지를 들고서 옥좌와 어린 양 앞에 서 있었습니다. 10 그리고 그들은 큰소리로 “구원을 주시는 분은 옥좌에 앉아 계신 우리 하느님과 어린 양이십니다.” 하고 외쳤습니다. 11 그러자 천사들은 모두 옥좌와 원로들과 네 생물을 둘러서 있다가 옥좌 앞에 엎드려 하느님께 경배하며 12 “아멘, 우리 하느님께서 영원 무궁토록 찬양과 영광과 지혜와 감사와 영예와 권능과 세력을 누리시기를 빕니다. 아멘.” 하고 외쳤습니다.
13 그 때 그 원로들 가운데 하나가 “흰 두루마기를 입은 이 사람들은 도대체 누구이며 또 어디에서 왔습니까?” 하고 나에게 물었습니다. 14 “어른께서 잘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하고 내가 대답했더니 그는 나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저 사람들은 큰 환난을 겪어낸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어린 양이 흘리신 피에 자기들의 두루마기를 빨아 희게 만들었습니다.
15 그러므로 그들은 하느님의 옥좌 앞에 있으며
. 하느님의 성전에서 밤낮으로 그분을 섬기는 것입니다.
. 그리고 옥좌에 앉으신 분이 그들을 가려주실 것입니다.
16 그들이 다시는 주리지도 목마르지도 않을 것이며
. 태양이나 어떤 뜨거운 열도 그들을 괴롭히지 못할 것이요,
. 이사 49:10
17 옥좌 한가운데 계신 어린 양이 그들의 목자가 되셔서
. 그들을 생명의 샘터로 인도하실 것이며 시편 23:2
. 하느님께서는 그들의 눈에서 눈물을 말끔히 씻어주실 것입니다.”
. 이사 25:8
복음서_ 요한 10:22-30
22 때는 겨울이었다. 예루살렘에서는 봉헌절 축제가 벌어지고 있었다. 23 예수께서는 성전 구내에 있는 솔로몬 행각을 거닐고 계셨는데 24 유다인들이 예수를 둘러싸고 “당신은 얼마나 더 오래 우리의 마음을 조이게 할 작정입니까? 당신이 정말 그리스도라면 그렇다고 분명히 말해 주시오.” 하고 말하였다. 25 그러자 예수께서는 “내가 이미 말했는데도 너희는 내 말을 믿지 않는구나. 내가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행하는 일들이 바로 나를 증명해 준다. 26 그러나 너희는 내 양이 아니기 때문에 나를 믿지 않는다. 27 내 양들은 내 목소리를 알아듣는다. 나는 내 양들을 알고 그들은 나를 따라온다. 28 나는 그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준다. 그래서 그들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고 아무도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아가지 못할 것이다. 29 아버지께서 내게 맡겨주신 것은 무엇보다도 소중하다. 아무도 그것을 아버지의 손에서 빼앗아갈 수 없다. 30 아버지와 나는 하나이다.” 하고 대답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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