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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율성의 회복”_2025.5. 4. 다해_부활3주일

James Chae 2025. 5. 4. 18:35

 

2025.5. 4. 다해_부활3주일

사도 9:1-6(7-20) / 시편30 / 묵시 5:11-14 / 요한 21:1-19

 

 

자율성의 회복

 

 

채야고보 신부 / 대한성공회 제주우정교회, Artist

 

세상의 모든 갈등과 분쟁, 범죄와 사건, 사고에는 가해자와 피해자가 존재합니다. 갈등과 분쟁에는 가해자와 피해자가 명확한 경우도 있고, 쌍방이 가해자인 경우, 쌍방이 모두 피해자인 경우도 있습니다. 이러한 대립과 갈등 속에서 가해자와 피해자를 분별하고, 피해의 정도에 따라응보의 기술 통해 적절하게 가해자의 자율성을 빼앗는 것이 우리의 사법 시스템입니다. 물론 이러한 사법 시스템에서 가해자이든 피해자이든 어느 쪽도 사법적 결과에 만족하는 경우는 매우 드뭅니다. 피해자의 피해가 사법적인 응보에 의해 가해자에게 부가됐다고 해도 피해자가 입은 상처와 자율성의 회복은 만족할 정도로 기대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가해자 또한 응보에 의한 처벌에 대해 부당하게 생각하며 타의에 의해 그러한 처벌을 감내해 내면서 자신의 잘못이 상쇄된다고 가볍게 생각합니다. 그래서 가해자와 피해자는 영원히회복 경험하지 못한 자율성의 침해로 인한 영원한 상호 상처 속에서 살아가게 됩니다. 물론 피해자가 받은 고통은 무엇으로도 복구가 되지 않은 말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수난과 부활 사건 이야기를 읽으며 예수께 피해를 입힌 사람의 가해자를 발견하게 됩니다. 하나는 가리옷사람 유다이고, 다른 하나는 사도 베드로입니다. 사람이 어떻게 예수에게 가해를 입혔는지는 제가 다시 설명드리지 않아도 여러분도 알고 계실 겁니다. 사람은 똑같이 예수를 팔아 배신하거나, 예수를 부인함으로써 배반한 사람들입니다. 사법적으로 어느 정도 문제가 될지는 가늠하기 어렵지만, 도의적인 책임은 분명 사람 모두에게 있습니다. 결과 그들이 공통적으로 갖게 감정은죄책감입니다. 가리옷 사람 유다는 자기 결정권을 가지고 예수를 유다인들에게 팔아넘겼습니다.  물론 자기 결정권에 분명 외부적 동기도 있었을 겁니다. 그러나 그러한 사회적, 외부적 동기에 대해서는 성서가 침묵하기 때문에 우리가 그것을 길은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서를 근거로 그의 내적 동기에 의한 자율성에 따라 그가 예수를 배신했다고 추측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가 행한 행위로 말미암아 그는 영원히배신자라는 낙인이 찍힌나쁜 사람으로 우리에게 기억됩니다. 

 

그의 최후에 대한 기록은 신약성서에 마태오복음과 사도행전에만 전합니다. 마태오복음 27장은 유다가 후회하며 서른 닢을 제사장들에게 돌려주려 했지만, 그들이 받지 않았고, 죄책감에 스스로 목을 자살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도행전은 유다가 예수를 배신하고 받은 은으로 밭을 샀다가 땅에 거꾸러져 배가 터져 죽었다고 기록했습니다. 그래서 밭의 이름을아겔다마피밭이라고 부른다고 합니다(사도 1:18~19). 기록의 공통점은 유다가 죄책감에 결국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점입니다. 그가 자기 결정권을 가지고 예수의 자율성을 침해한 결과 그는 스승의 죽음에 가담했다는 죄책감에 시달렸습니다. 인간의 자유의지에 기반한 모든 자율성에는 책임이 따르므로 그의 선택은 나름 자유의지에 기반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복음서의 기록들을 통해 예수가 사전에 그의 배신을 예언한 것을 알고 있습니다. 물론 그것은사후예언 가능성이 크지만, 역사적 예수가 그의 배신을 예감했을 가능성 또한 배제할 없습니다. 요한복음은 그가 제자단의 돈주머니를 맡은 사람이어서 그가 돈을 횡령하는 도둑이라고 기록함으로써 그를 부정적으로 묘사했습니다(요한 12:6). 역사적 예수께서도 그의 품성과 품행을 전혀 눈치채지 못하시지는 않았을 겁니다. 그런 그를 주님께서는 마지막까지 제자단에서 배제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주님께서 그러셨는지는 우리는 없습니다.

 

사도 베드로 또한 사전에 예수께서 그가 배신할 것이라 예언했다고 성서는 기록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절대로 그런 일이 없을 것이라고 장담했습니다. 그런 그도 예수께서 잡히시던 밤에비겁하게도망을 쳤고, 번씩이나 예수를 부인했습니다. 그것도 맹세까지 하면서 말입니다(마르 14:71). 물론 그의 본심은 그렇지 않았을 것으로 추측되지만, 또한 자신의 안위를 위해 예수를 부인했습니다. 자신의 선한 의지에 반해서 결과적으로 자신이 원치 않은 짓을 것입니다. 사도 바울로도 인간의 죄에 대한 불가항력적인 여려 요인이 있었음을 로마서 7장에 언급한 있습니다. 죄를 짓지 않으려 하지만 우리의 자율성을 침범하는 죄의 권세에 인간은 너무나 쉽게 굴복한다는 점을 그는 지적했습니다. 그러므로 베드로는 자신의 배신에 대해 어떤 변명의 여지도 없습니다. 행위의 결과가 사람을 정의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또한 가리옷 사람 유다처럼 죄책감에 시달렸음에 틀림없습니다. 그는 예수의 수제자 중의 수제자였기 때문에 더욱 그러했을 겁니다. 아마도 부끄러워 제자들 앞에 당당히 서기도 어려웠을 겁니다. 그러니 그는 동료들을 이끌고 예수 운동을 중단하고 갈릴레아로 돌아가 다시 어부 일을 시작했다고 요한복음은 기록합니다. 물론 이야기를 기록한 요한복음 21장은 요한학파의 제자들이 후대에 덧붙인 기록입니다. 실제로 요한복음은 20장의 토마의 의심 이야기로 끝이 납니다. 요한복음 20 30~31절이 바로 요한복음 원본의 맺음말 부분입니다. 맺음말에는 요한복음의 기록 목적을 밝히며 끝을 맺고 있습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21장에 갈릴래아 이야기가 다시 나오는 것은 순서상 어색합니다. 아무튼 오늘 읽은 요한복음 21장은 부활발현사화와 소명사화를 결합한 형태로 이를 통해 교회론과 사목적 가르침을 전하고 있습니다. 자료들은 모두 요한 기자의 독자적인 전승 자료입니다. 부활을 번이나 목격한 제자들이 번째 만남에서 예수를 전혀 알아보지 못했다는 점이 이를 뒷받침합니다. 

 

이야기에서 독특한 점은 사도 베드로에 대한 사면과 복권입니다. 죄책감에 모든 것을 포기했던 사도 베드로가 여기에서 다시 주님의 소명을 받고 사도로서의 권위가 회복된 것이지요. 내용을 살펴보면 예수께서 매우 신중하게 베드로를 다루고 계심을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그의 배반 행위에 대해 어떤 판단이나 판결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책망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이야기는 죄책감에 사로잡힌 사람을 어떻게 하느님께서 회복시키시는지를 보여줍니다. 주님께서는 그가 주님을 배신할 그의 자율성이 여러 내적, 외적 요인에 의해 잠식됐음을 알고 계셨습니다. 주님께서는 그가 본심과 다르게 행동할 수밖에 없는 연약한 존재임을 아셨습니다. 베드로의 본심은 주님을 따라 죽는 것이지만, 그는 아직 그럴만한 준비가 되지 않았던 것이지요. 그래서 주님께서는 우회적인 방법으로 그가 다시 자신의 자율성을 회복할 기회를 주십니다. 그것은 자율성과 자기 선택권의 회복을 통해 인간의 존엄을 회복시키는 하느님의 방법이었습니다. 예수께서는 그가 주님을 부인했던 것처럼, 번씩이나 그의 사랑을 확인하기 위한 고백을 유도하십니다. 번의 사랑 고백마다 베드로의 소명을 각각 각인시켜 주십니다. 그래서 번째 예수의 반복된 질문에 그는마음이 슬퍼졌다 성서는 기록합니다. 그리고 베드로는 자신이 주님을 사랑한다는 것을 주님께서 아신다고 고백합니다. 그는 자신의 자율성을 이제 온전히 하느님의 손에 의탁한 것입니다. 자기 확신에 가득 차서 자신은 절대로 배신하지 않을 것이라 장담했던 이전의 베드로와는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자기 잘못을 스스로 깨닫게 하여 인간의 자율성을 회복시키시는 주님의 방법에 놀라움을 금할 수가 없습니다. 이런 판사가 만약 있다면 우리의 사법 시스템도 오늘과 같지는 않을 겁니다. 진정한 회개와 회복은 바로 이런 것입니다. 자기의 자율성을 하느님께 의탁할 진정한 회개와 회복도 가능합니다. 자신의 자율성을 온전히 하느님께 의탁함으로써 인간은 진정한 사랑이 무엇인지도 깨닫게 됩니다.

 

가리옷 사람 유다에게도 이러한 자율성의 회복인 회개의 기회가 있었을지 모릅니다. 그가 죽음을 택하지 않고 제자단에 다시 돌아갔다면 제자들이 그를 배척하지는 않았을 겁니다. 물론 책망과 원망은 들었을지언정왜냐하면 제자들도 실상 모두 예수를 버린 전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이나 가리옷 사람 유다나 모두 예수를 배반한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유다의 죄가 조금 무거울 죄는 죄이지요. 역사에는 가정이 없지만 만약 가리옷 사람 유다가 회개를 했다면 어떻게 됐을까요? 그러나 그는 자기 스스로 길을 차단했습니다. 죄책감을 이겨낼 자신의 자유의지가 박약했던 것이지요. 그가 자기 스스로 내린 결정에 스스로 책임을 진다는 것이 목숨을 끊는 것이었습니다. 행동에는 피해자이신 예수님에 대한 배려도 사과도 전혀 없습니다. 물론 동료들에 대한 미안함도 없습니다. 그는 오직 자기 연민에서 벗어날 없었을 뿐입니다. 자기의 자율성을 자기를 파괴하는 방향으로 사용한 것입니다. 이와 반대로 베드로는 모든 것을 내려놓고 다시 시작점으로 돌아갔습니다. 예수와 처음 만났던 , 자신이 평생 해왔던 일상으로의 복귀 말입니다. 베드로는 자율성을 유다처럼 파괴적으로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또한 죄책감에 자기 자신을 파괴할 가능성도 있었습니다. 제자들 앞에서 부끄러움에 그런 선택을 했을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기를 지지하는 동료들을 이끌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는 선택을 했던 것입니다. 그러니 그에게는 아직도 자기 결정권의 기회가 남은 것입니다. ‘회개의 기회말입니다. 그래서 개가 죽은 사자보다 나은 ”(전도 9:14)입니다. 살아 있는 자에게는 반드시 새로운 기회가 오기 마련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소중한 자기 결정권과 자율성을 함부로 사용하여 자기 자신을 파괴했던 가리옷 사람 유다처럼 되어서는 되겠습니다. 우리가 수만 있다면 사도 베드로처럼 자기 결정권을 주님께 의탁하여 새로운 기회를 얻고 새출발하는 우리들이 되길 바랍니다. “, 주님께서 아시는 바와 같이 저는 주님을 사랑합니다.”라는 사도 베드로의 고백은 자신의 한계와 하느님의 전능하심, 그리고 그분의 사랑에 대한 확신에 대한 고백임에 틀림없습니다. 진정한 회개와 회복은 우리의 자율성이 온전히 하느님을 향할 가능합니다. 주님의 부활의 은총으로 우리의 어그러진 자율성이 주님과 함께 다시 회복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아멘.

 

 

 

 


 

 

 

 

전례독서_부활3 (다해)

 

본기도

전능하신 하느님, 성자 예수께서는 죽음을 이기시고 영원한 생명의 문을 우리에게 열어주셨나이다. 비오니, 주님의 부활을 기념하는 우리가 성령으로 새로워져서 부활의 증인이 되게 하소서성부와 성령과 함께 하느님이신 우리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나이다. 아멘.

 

 

 

1독서_사도 9:1-6(7-20)

1 한편 사울은 여전히 살기를 띠고 주의 제자들을 위협하며 대사제에게 가서 2 다마스쿠스에 있는 여러 회당에 보내는 공문을 청하였다. 그렇게 해서 그리스도교를 믿는 사람은 남자 여자 없이 눈에 띄는 대로 잡아서 예루살렘으로 끌어올 있는 권한을 받았다. 3 사울이 길을 떠나 다마스쿠스 가까이에 이르렀을 때에 갑자기 하늘에서 빛이 번쩍이며 그의 둘레를 환히 비추었다. 4 그가 땅에 엎드러지자사울아, 사울아, 네가 나를 박해하느냐?” 하는 음성이 들려왔다. 5 사울이당신은 누구십니까?” 하고 물으니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다. 6 일어나서 시내로 들어가거라. 그러면 네가 해야 일을 일러줄 사람이 있을 것이다.” 하는 대답이 들려왔다. (7 사울과 동행하던 사람들도 음성은 들었지만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 벙벙해서 있기만 하였다. 8 사울은 땅에서 일어나 눈을 떴으나 앞이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사람들이 그의 손을 끌고 다마스쿠스로 데리고 갔다. 9 사울은 사흘 동안 앞을 보고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았다.
10 ¶ 다마스쿠스에 아나니아라는 제자 사람이 살고 있었는데 주께서 신비로운 영상 가운데 나타나아나니아야!” 하고 부르셨다. 아나니아가, 주님, 말씀하십시오.” 하고 대답하자 11 주께서는어서 일어나곧은 거리라는 동네에 사는 유다의 집으로 가서 다르소 사람 사울을 찾아라. 사울은 지금 기도를 하고 있는데 12 그는 아나니아라는 사람이 들어와서 손을 얹어 다시 눈을 뜨게 해주는 것을 신비로운 영상으로 보았다.” 하고 말씀하셨다. 13 말씀을 듣고 아나니아가주님, 사람에 대해서는 여러 사람에게서 들은 있습니다. 그는 예루살렘에 사는 주님의 성도들에게 많은 해를 끼쳤다고 합니다. 14 더구나 그는 대사제에게서 주님을 믿는 사람들을 잡아갈 권한을 받아가지고 여기 있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15 주께서는 그에게 다시 이렇게 말씀하셨다. “그래도 가야 한다. 사람은 내가 뽑은 인재로서 이름을 이방인들과 제왕들과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널리 전파할 사람이다. 16 나는 그가 이름 때문에 얼마나 많은 고난을 받아야 할지 그에게 보여주겠다.” 17 그래서 아나니아는 집을 찾아가서 사울에게 손을 얹고 이렇게 말하였다. “사울 형제, 나는 주님의 심부름으로 왔습니다. 그분은 당신이 여기 오는 길에 나타나셨던 예수님이십니다. 분이 나를 보내시며 당신의 눈을 뜨게 하고 성령을 가득히 받게 하라고 분부하셨습니다.” 18 그러자 사울의 눈에서 비늘같은 것이 떨어지면서 다시 보게 되었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세례를 받은 다음, 19 음식을 먹고 기운을 회복하였다. 사울은 며칠 동안 다마스쿠스에 있는 신도들과 함께 지내고 나서 20 여러 회당에서 예수가 바로 하느님의 아들이심을 전파하기 시작하였다.)

 

 

 

성시_시편 30

1    주여,
.     나를 건져주셨으니
.     높이 받들어 기리나이다.
.     원수들이 나를 보고
.     비웃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2    나의 하느님,
.     살려 달라 외치는 소리를 들으시고
.     병들었던 몸을 고쳐주셨습니다.
3    주여, 목숨 지하에서 건져 주시고
.     깊은 구렁에 떨어지지 않게 살려주셨습니다.
4    주님을 믿는 자들아, 찬양노래 불러라.
.     그의 거룩하신 이름에 감사기도 바쳐라.
5    그의 진노는 잠시뿐이요
.     어지심은 영원하시니 
.     저녁에 눈물 흘려도 아침이면 기쁘리라.
6    마음 편히 지낼 때에는 스스로 말하기를
.     이제는 절대로 안심이다 하였는데,
7    나를 어여삐 여겨,
.     위에 든든히 세워 주시던
.     주께서 외면하셨을 때는
.     두려워 어쩔 몰랐습니다.
8    주여, 몸은 당신께 부르짖으며,
.     당신의 자비만을 구하였습니다.
9     몸이 피를 흘리고 속에 묻힌다 해서
.     당신께 좋을 일이 무엇이겠습니까?
  티끌들이 당신을 찬미할 있으리이까?
.     당신의 미쁘심을 알릴 있으리이까?
10  주여,
.     애원을 들으시고 불쌍히 여겨주소서.
.     주여, 부디 도와주소서.
11  당신은 나의 통곡하는 슬픔을
.     춤으로 바꿔 주시고
.     베옷을 벗기시고
.     잔치옷으로 갈아입히셨습니다.
12  이는 영혼이 끊임없이
.     주님을 찬미하라 하심이니
.     , 나의 하느님,
.     은총 노래에 담아 영원히 찬양하리이다.
⦿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     처음과 같이 지금도 그리고 영원히, 아멘.

 

 

 

2독서_묵시 5:11-14

11 나는 옥좌를 둘러선 많은 천사들과 생물들과 원로들을 보았고 그들의 음성도 들었습니다. 그들의 수효는 수천 수만이었습니다. 12 그들은 큰소리로
.   “죽임을 당하신 어린 양은
.     권능과 부귀와 지혜와 힘과 영예와 영광과
.     찬양을 받으실 자격이 있으십니다.”
하고 외치고 있었습니다. 13 그리고 나는 하늘과 땅과 아래와 바다에 있는 모든 피조물 우주 안에 있는 만물이,
.   “옥좌에 앉으신 분과 어린 양께서
.     찬양과 영예와 영광과 권능을
.     영원 무궁토록 받으소서!”
하고 외치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14 그러자 생물은아멘.” 하고 화답했으며 원로들은 엎드려 경배했습니다.

 

 

 

복음서_요한 21:1-19

1 예수께서 티베리아 호숫가에서 제자들에게 다시 나타나셨는데 경위는 이러하다. 2 시몬 베드로와 쌍둥이라는 토마와 갈릴래아 가나 사람 나타나엘과 제베대오의 아들들과 밖의 제자가 한자리에 모여 있었다. 3 시몬 베드로가나는 고기를 잡으러 가겠소.” 하자 나머지 사람들도 같이 가겠다고 따라나섰다. 그들은 배를 타고 고기잡이를 나갔으나 밤에는 아무것도 잡지 못하였다. 4 이튿날 날이 밝아올 예수께서 호숫가에 계셨다. 그러나 제자들은 그분이 예수이신 줄을 미처 몰랐다. 5 예수께서얘들아, 무얼 잡았느냐?” 하고 물으시자 그들은아무것도 잡았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6그물을 오른편에 던져보아라. 그러면 고기가 잡힐 것이다.” 그들이 예수께서 이르시는 대로 그물을 던졌더니 그물을 끌어올릴 없을 만큼 고기가 많이 걸려들었다. 7 예수의 사랑을 받던 제자가 베드로에게저분은 주님이십니다.” 하고 말하였다. 주님이시라는 말을 듣자 옷을 벗고 있던 시몬 베드로는 몸에 겉옷을 두르고 그냥 속에 뛰어들었다. 8 나머지 제자들은 고기가 잔뜩 걸려든 그물을 끌며 배를 저어 육지로 나왔다. 그들이 들어갔던 곳은 육지에서 미터쯤밖에 떨어지지 않은 곳이었다. 9 그들이 육지에 올라와 보니 숯불이 있고 위에 생선이 놓여 있었다. 그리고 빵도 있었다. 10 예수께서 제자들에게방금 잡은 고기를 마리 가져오너라.” 하고 말씀하셨다. 11 시몬 베드로는 배에 가서 그물을 육지로 끌어올렸다. 그물 속에는 백쉰세 마리나 되는 고기가 가득히 들어 있었다. 그렇게 많은 고기가 들어 있었는데도 그물은 터지지 않았다. 12 예수께서 그들에게와서 아침을 들어라.” 하고 말씀하셨다. 제자들 중에는 감히당신은 누구십니까?” 하고 묻는 사람이 없었다. 그분이 바로 주님이시라는 것이 분명하였기 때문이다. 13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가까이 오셔서 빵을 집어주시고 생선도 집어주셨다. 14 예수께서 부활하신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것은 이것이 번째였다.
15 모두들 조반을 끝내자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사람들이 나를 사랑하는 것보다 나를 사랑하느냐?하고 물으셨다. 베드로가, 주님. 아시는 바와 같이 저는 주님을 사랑합니다.하고 대답하자 예수께서는 어린 양들을 돌보아라.” 하고 이르셨다. 16 예수께서 번째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정말 사랑하느냐?” 하고 물으셨다. “, 주님. 아시는 바와 같이 저는 주님을 사랑합니다.” 베드로가 이렇게 대답하자 예수께서는 양들을 돌보아라.” 하고 이르셨다. 17 예수께서 번째로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고 물으시자 베드로는 번이나 예수께서나를 사랑하느냐?” 하고 물으시는 바람에 마음이 슬퍼졌다. 그러나주님, 주님께서는 모든 일을 알고 계십니다. 그러니 제가 주님을 사랑한다는 것을 모르실 리가 없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그러자 예수께서 양들을 돌보아라.” 하고 분부하셨다. 18 이어서정말 들어두어라. 네가 젊었을 때에는 손으로 띠를 띠고 마음대로 돌아다닐 있었다. 그러나 이제 나이를 먹으면 때는 팔을 벌리고 남이 와서 허리를 묶어 네가 원하지 않는 곳으로 끌고 것이다.” 하고 말씀하셨다. 19 예수의 말씀은 베드로가 장차 어떻게 죽어서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게 것인가를 암시하신 말씀이었다. 말씀을 하신 예수께서는 베드로에게나를 따라라.” 하고 말씀하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