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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심하는 토마”_2025.4.27. 다해_부활2주일 설교문

James Chae 2025. 4. 27. 14:27

 

 

2025.4.27. 다해_부활2주일

사도 5:27-32 / 시편 118:14-29 / 묵시 1:4-8 / 요한 20:19-31

 

 

의심하는 토마

 

 

채야고보 신부 / 대한성공회 제주우정교회, Artist

 

의심하는 토마

이야기는 우리가 너무나 아는 이야기입니다. 토마의 이름 앞에는 의심이라는 말이 붙여져서 불명예스러운 그의 별명이 됐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말씀을 자세히 읽어보면 방점이의심 있는 것이 아니라믿음 있음을 알게 됩니다. 요한이 예수와 토마의 이야기를 막달라 마리아의 부활현현체험과 제자들의 집단 부활현현체험 다음에 편집한 목적은 분명합니다. 이는 당시 요한 공동체를 비롯하여 후대에 전하고자 하는 분명한 메시지가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미 막달라 마리아와 제자들의 부활현현체험에서도 확인하는바보았다라는 표현은 정확하게 그들이 예수의 부활을 체험했다는 뜻입니다. 말은 초기 제자단에서도 그러한 체험을 사람들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 존재함을 암시합니다. 예수의 공생애를 함께했던 제자단에서도 이러한 구분이 있었는데, 하물며 몇십 후의 요한공동체는 어떠했으며, 오늘의 교회는 어떠하겠습니까? 분명 초대교회는 부활을 체험한 제자군을 명으로 제한을 두고 사도라는 칭호를 붙였습니다. 사도는 바로 부활의 증인을 뜻합니다. 막달라 마리아와 함께 예수의 현현을 체험했던 여인들의 이름은 사도 명단에서 빠져 있습니다. 이유가 어떠하든 부활에 관한 증언은체험 방점이 있는 것이 아니라, 결국은믿음 방점이 있음을 이야기는 말하고 있습니다. 의심하는 토마의 이야기는 부활현현을 체험하지 못한 모든 후대의 그리스도인을 위한 표징입니다. 

 

과거 요한공동체뿐만 아니라, 오늘날의 교회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부활의 실재를 믿지 않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토마처럼 실증적인 것을 요구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러한 사람들은 모종의 체험을 추구합니다. 그러나 요한복음의 기자는 이러한 점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막달라 마리아도 예수의 현현을 체험하고 했던 말이나는 주님을 뵈었다였습니다. 그리고 토마를 제외한 제자들도 주님의 현현을 체험하고우리는 주님을 뵈었다.”라고 말합니다. 이러한 표현은 분명체험 방점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부활현현체험은 매우 제한적이고 일시적인 경험에 머뭅니다. 체험이 이상 지속성을 가지지 못하는 지점에서 바로 믿음이 시작됩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의 부활을 체험하기 이전이나, 토마가 예수의 부활을 경험하기 이전이나 똑같이 성서는문이 잠겨 있었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정확하게 부활을 믿지 않는 사람의 마음 상태를 반영합니다. 부활에 대한 불신은 결국 닫힌 마음입니다. 불신과 닫힌 마음은 우리를 두려움과 혼돈으로 이끕니다. 부활하신 예수께서 두려워하는 제자들의 가운데서셨다는 뜻은 그분이 이제부터 그들의 삶과 믿음의 중심에 서심을 뜻합니다. 역사적 예수가 아닌 부활하신 예수에 대한 믿음이 바로서지 않는한 온전한 평화도, 온전한 믿음도 불가능합니다.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져보는 것은 체험의 차원입니다. 그러나 믿음은 그러한 체험을 넘어섭니다. 요한이 제자들의 부활현현체험과 부활소명사화를 하나로 합쳐 표현한 이유는 그들의 믿음의 실존에 성령의 역할을 분명하게 각인시키시기 위함입니다. 성령이 없이는 부활현현체험도 의미가 없기 때문입니다. 체험은 체험일 뿐이지만, 성령께서는 믿음을 통해 그다음 단계로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나를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라고 말씀하십니다. 말은 부활현현체험을 하지 않고도 주님의 부활을 믿는 사람이 행복하다는 뜻입니다. 

 

오늘 이야기에서 토마가 예수께 받은 책망보다 토마가 예수께 했던 고백이 강조됩니다. “나의 주님, 나의 하느님”. 의심했던 토마는 의심을 넘어서서 믿음을 가지는 순간 주님께서 바로 자신의 주님임을 인식하게 됩니다. 다른 사람의 고백이나 체험에 의존하는 믿음이 아니라, 바로 토마 자신의 주체적인 믿음입니다. 이는 부활하신 예수님과 토마가 인격적 관계를 맺게 됐음을 뜻합니다. 우리는 토마가 실제로 주님의 손과 옆구리를 만졌는지 수는 없습니다. 많은 화가들이 그렇게 묘사하는 바람에 우리는 토마가 주님의 성흔을 만졌을 것이라 여깁니다. 그러나 요한복음은 이에 대해 침묵합니다. 그것은 우리의 상상에 맡겨져 있습니다. 그가 예수의 몸을 만졌든 만지지 않았던 이야기는 체험보다는 믿음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부활에 대한 체험이 전혀 없는 교회의 시대는 믿음과 성령의 시대가 되는 것입니다. 이는 루가복음 기자가 교회의 시대를 성령의 시대로 여긴 것과 맥을 같이합니다. 예수님의 부활 이후 교회의 시대에서 체험보다는 믿음이 강조되어 이유입니다. 부활현현의 체험은 극히 제한된 제자단에 국한됩니다.

 

우리 성공회는성서. 이성. 전통 강조하는 교단입니다. 흥미로운 것은믿음대신에이성 강조했다는 점입니다. 리차드 후커가 강조한 이성은 분명 르네상스와 종교개혁을 가능하게 했던 인문주의적이면서 합리적인 이성을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 성공회는 믿기 위해 이성을 사용하는 교단입니다. 믿기 위해 알기를 원하는 전통이 있습니다. 의심은 이성의 작용입니다. 의심하지 않는 것은 분별이나 판단을 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그것은 믿음이 아니라 맹신이 됩니다. 무조건 믿는 것이 믿음이 아닙니다. 자신이 아는 , 자신이 경험한 ,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의심 없이 믿는 것을 우리는 확신이라 부릅니다. 이러한 확신에 의심이라는 이성적 작용이 없다면 확신은 언제든지 우리를 맹신으로 이끌 위험이 있습니다. 우리가 자연을 인식하는 방식은 모두 체험에 의존합니다. 그것이 이론적이든 아니면 이성적이든 말입니다. 그러나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형이상학적인 것을 인식하는 것은 완전히 다른 인식 체계를 가져야 합니다. 그래서 믿음은 믿음이라는 신앙적 인식 체계를 우리 안에 만듭니다. 이러한 믿음은 의심이라는 우리의 이성적 판단력을 통해 우리를 믿음의 신비로 이끕니다. 

 

최근에 프란시스 교황이 서거하시기 전에 마치 교황의 선종을 예언한 듯한 영화 [콘클라베] 이런 차원에서 다시 세간의 주목을 받고 있습니다. 영화에서 제게 가장 인상적인 장면은 주인공 로렌스 추기경이 다음과 같은 말을 장면입니다.

 

제가 무엇보다 두려워하는 죄는 바로 확신입니다. 확신은 통합의 가장 큰 적입니다. 확신은 관용의 치명적인 적입니다.
심지어 그리스도조차 마지막 순간에는 확신하지 못하셨습니다. ‘주여, 주여, 어찌하여 저를 버리시나이까(엘리 엘리 라마 사박타니).‘ 십자가에서 9시간을 매달리신 후 고통 속에서 그렇게 외치셨죠.
우리의 신앙이 살아 있는 것은 의심과 함께 걸어가기 때문입니다. 오직 확신만 있고 의심이 없다면, 신비도 없을 것이고, 그렇다면 믿음도 필요하지 않을 것입니다.
의심하는 교황을 보내주십사 주님께 기도합시다. 죄를 짓고 용서를 구하고 실천하는 교황을 주시기를.

-영화 [콘클라베] 중에서 로렌스 추기경의 대사 중에서-.

 

 

여기에서 말하는확신 물론 개인과 공동체가 가진 믿음을 뜻합니다. 자신이 믿고 의지하는 것에 대해 일점일획도 의심해 적이 없는 사람은 매우 위험한 사람이 있습니다. 이러한확신 견고한 성채처럼 타자의 의견이 들어올 틈을 차단하고, 오직 자신의 것만이 진리라고 주장을 합니다. 이렇게 자신의 확신을 주장하다 보면 타자로부터 고립되는 처지가 되기 쉽습니다. 최근 우리 한국 사회는 계엄과 탄핵정국을 거치면서 얼마나 많은 이러한확신 주장하는 사람들을 보아왔습니까? 우리의 모든 상식이 무너지는 듯한 느낌에 고개를 절레절레하며 밤잠을 설친 것이 번이었습니까? 우리 사회를 지탱하는 최소한의 상식을 허무는 상위 엘리트 계층의 확신에 목소리들이 우리에게는 소음을 넘어 고문처럼 느껴지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가 신뢰했던 모든 것들에 대해 의심하고 판단하며 다시 우리의 믿음 체계를 세워야 하는 시점에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부활현현체험을 경험하지 않은 교회공동체가 믿음 위에 예수의 신앙의 체계를 세워갈 의심하는 토마의 이야기는 자신들의 믿음에 대해 끊임없이 자문하게 했을 겁니다. 사도였던 토마가 의심했다면 부활을 목격하지 못한 우리는 과연 어떻게 것이냐고 말입니다. 의심은 우리가 확신하는 모든 것을 이성적으로 다시 체계화하는 과정입니다. 이성은 절대로 우리의 신앙에 반하지 않습니다. 의심과 확신 사이 어느 적당한 지점이 바로 우리의 믿음의 자리임은 틀림없습니다. 아마도 우리는 마치 기타의 현을 튜닝하듯이 정확한 믿음의 자리를 찾기 위해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할 때마다 우리는 의심하는 토마로 말미암아 우리의 의심을 부끄러워하지 않게 됩니다. 의심은 우리로 하여금 믿지 않는 사람이 아니라 믿는 사람이 되게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의심을 통과할 우리는 토마처럼 자신의 인격과 일치하는나의 주님, 나의 하느님이라는 고백을 하게 됩니다. 그것은 우리 각자가 의심을 통해 믿음을 완전히 자신의 것으로 체화한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다른 사람들의 확신을 의심하기보다 먼저 자기 자신이 아는 , 자신이 확신하는 , 자신이 믿는 것을 의심하기 시작합니다. 이것이 우리 이성에 대한 비판이고 자기 확신에 대한 자가 판단의 시작입니다. 이것을 우리는 영분별이라 부릅니다. 이렇게 의심은 우리가 올바른 이성과 믿음을 가진 사람으로 성장하게 합니다. 이러한 자기반성이 토마의 이야기를 통해 우리에게 커다란 영감이 되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아멘.

 

 


 

 

전례독서_부활2 (다해)

 

본기도

살아계신 하느님, 영원한 생명의 문을 열어 놓고 우리를 기다리시나이다. 구하오니, 우리를 이끄시어 모든 의심의 벽을 넘어 그리스도를 만나게 하시고, 우리를 위해 흘리신 주님의 상처를 보게 하소서성부와 성령과 함께 하느님이신 우리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나이다. 아멘.

 

 

 

1독서_사도 5:27-32

27 그들이 사도들을 의회에 데려다 세워놓자 대사제가 이렇게 심문하였다. 28예수의 이름으로는 가르치지 말라고 단단히 일러두었는데도 당신들은 어쩌자고 예루살렘에다 당신네 교를 퍼뜨리는 거요? 예수의 피에 대한 책임을 우리에게 뒤집어씌울 작정이오?” 29 베드로와 사도들은 이렇게 대답하였다. “사람에게 복종하는 것보다 오히려 하느님께 복종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30 우리 조상들의 하느님께서는 여러분들이 나무에 매달아 죽인 예수를 다시 살리셨습니다. 31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그분을 지도자와 구세주로 세워 당신의 오른편에 높이 올리셔서 이스라엘을 회개시키고 죄를 용서받게 하셨습니다. 32 우리는 모든 일의 증인입니다. 하느님께서 당신에게 복종하는 사람들에게 주신 성령도 증인이십니다.”

 

 

 

성시_시편 118:14-29

14  주님은 나의 나의 노래
.     나의 구원이시다.
15  의로운 사람들의 집집에서
.     터져 나오는 승리의 함성
16  주님의 오른손이 번쩍 들렸다.
.     주님의 오른손이 힘을 떨치셨다.
17  나는 죽지 않고 살아서
.     주께서 하신 일을 널리 선포하리라.
18  주께서는 나를 벌하시고 벌하셨지만
.     그러나 죽게 버려두지는 아니하셨다.
19  정의의 문을 열어라.
.     내가 들어가 주님께 감사기도 드리리라.
20  이것이 주님의 문이니,
.     의인들이 이리로 들어가리라.
21  나의 기도 들으시고 나를 구해 주셨으니
.     주님께 감사기도 드립니다.
22  집짓는 자들이 버린 돌이
.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
23  우리 눈에는 놀라운 ,
.     주께서 하신 일이다.
24   날은 주께서 내신 ,
.     함께 기뻐하며 즐거워하자.
25  주소서, 주여, 구원을 주소서.
.     주소서, 주여, 승리를 주소서.
26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     찬미 받으소서.
.     우리가 주님의 집에서 당신을 축하하리라.
27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빛을 주신다.
.     나뭇가지 손에 들고, 줄줄이 제단 돌며 춤을 추어라.
28  당신은 나의 하느님이시오니,
.     당신께 감사기도 드립니다.
.     당신은 나의 하느님이시오니,
.     당신을 기리옵니다.
29  주님께 감사노래 불러라. 그는 어지시다.
.     그의 사랑 영원하시다.
⦿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     처음과 같이 지금도 그리고 영원히, 아멘.

 

 

 

2독서_묵시 1:4-8

4 요한은 아시아에 있는 일곱 교회에 편지를 씁니다. 지금 계시고 전에도 계셨고 장차 오실 그분과 그분의 옥좌 앞에 있는 일곱 영신께서, 5 그리고 진실한 증인이시며, 죽음으로부터 제일 먼저 살아나신 분이시며, 위의 모든 왕들의 지배자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여러분에게 은총과 평화를 내려주시기를 빕니다.
우리를 사랑하신 나머지 당신의 피로써 우리를 죄에서 해방시켜 주시고 6 우리로 하여금 왕국을 이루게 하시고 당신의 하느님 아버지를 섬기는 사제가 되게 하신 그분께서 영광과 권세를 영원 무궁토록 누리시기를 빕니다. 아멘.
7   
그분은 구름을 타고 오십니다. 다니 7:13
.    
모든 눈이 그를 것이며
.    
그분을 찌른 자들도 것입니다.
.    
위에서는 모든 민족이 그분 때문에
.    
가슴을 것입니다. 즈가 12:10
그렇게 것입니다. 아멘.
8
지금 계시고 전에도 계셨고 장차 오실 전능하신 하느님께서나는 알파요 오메가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복음서_요한 20:19-31

19 안식일 다음날 저녁에 제자들은 유다인들이 무서워서 어떤 집에 모여 문을 모두 닫아걸고 있었다. 그런데 예수께서 들어오셔서 그들 한가운데 서시며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 하고 인사하셨다. 20 그리고 나서 당신의 손과 옆구리를 보여주셨다. 제자들은 주님을 뵙고 너무 기뻐서 어쩔 줄을 몰랐다. 21 예수께서 다시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주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낸다.” 하고 말씀하셨다. 22 이렇게 말씀하신 다음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숨을 내쉬시며 말씀을 계속하셨다. “성령을 받아라. 23 누구의 죄든지 너희가 용서해 주면 그들의 죄는 용서받을 것이고 용서해 주지 않으면 용서받지 못한 남아 있을 것이다.”
24 열두 제자 하나로서 쌍둥이라고 불리던 토마는 예수께서 오셨을 때에 그들과 함께 있지 않았었다. 25 다른 제자들이 그에게우리는 주님을 뵈었소.” 하고 말하자 토마는 그들에게나는 눈으로 그분의 손에 있는 못자국을 보고 손가락을 못자국에 넣어보고 손을 그분의 옆구리에 넣어보지 않고는 결코 믿지 못하겠소.” 하고 말하였다.
26 여드레 뒤에 제자들이 다시 안에 모여 있었는데 자리에는 토마도 같이 있었다. 문이 잠겨 있었는데도 예수께서 들어오셔서 그들 한가운데 서시며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 하고 인사하셨다. 27 그리고 토마에게 손가락으로 손을 만져보아라. 손을 옆구리에 넣어보아라. 그리고 의심을 버리고 믿어라.” 하고 말씀하셨다. 28 토마가 예수께나의 주님, 나의 하느님!” 하고 대답하자 29 예수께서는너는 나를 보고야 믿느냐? 나를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 하고 말씀하셨다.
30 예수께서는 제자들 앞에서 책에 기록되지 않은 다른 기적들도 수없이 행하셨다. 31 책을 목적은 다만 사람들이 예수는 그리스도이시며 하느님의 아들이심을 믿고, 그렇게 믿어서 주님의 이름으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