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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과 현실의 경계 - 시각적 패러독스의 세계

James Chae 2011. 9. 2. 18:08

 

 

꿈과 현실의 경계 - 시각적 패러독스의 세계 
 
르네 마그리트전을 다녀와서……(서울시립미술관, 2007. 4.1 까지) 
 
 

채창완 


 
 ※ 여기서 사용한 도판들은 시립미술관의 허락을 필한 것으로 저작권자의 허락 없이 무단 복제를 금합니다. 이 도판들의 저작권은 ⓒADAGP, PARIS, 2006에 귀속됨을 밝힙니다.

 

 

 

 

▲ 검은마술Black Magic_La magie noire_1945_oil on canvas,80x60,
ⓒADAGP, PARIS, 2006


 

 

우리는 우리의 머리 밖에 세계가 실제로 있고, 또 우리가 그 세계를 객관적으로 인식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자연과학도 이러한 사실을 전제하며, 실상 우리의 삶은 늘 이러한 전제하에 이루어지는 것이 사실이다. 그래서 우리는 꿈이나 환상 같이 실제로 있을 것 같지 않은 것들을 ‘비현실’이란 용어로 정의하고 일상적인 삶과는 거리감을 둔다. 데카르트 이후로 현재에까지 서구문명은 이러한 세계관 위에 놓여있다.

 

그러나 성서를 살펴보면 우리는 많은 ‘비현실’이 ‘현실’이 되는 경우를 종종 접하게 된다. 야곱의 환상에서부터 다니엘서 그리고 요한계시록에 이르기까지…… 성서에서 말하는 ‘계시’는 꿈과 환상을 통해 현실 또는 미래를 전제한다는 차원에서 ‘현실적’ 또는 ‘비현실적’이라 쉽게 단언하기 어렵다. ‘계시’는 꿈과 환상과도 관계하지만 동시에 현실과도 관계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계시’가 지닌 수수께끼이며 패러독스이다.

 

꿈에서 나비가 된 노자가 꿈에서 깨어나 자신이 나비인지 나비가 자신인지 혼란스러웠다는 얘기가 있다. 최소한 우리는 일상적인 삶 속에서 노자의 경험만큼은 아니더라도 꿈과 현실의 경계에서 혼란스러웠던 경험들을 나름대로 조금씩 가지고 있을 것이다.

 

특히 종교인들은 계시나 환상에 대해 일반인들보다 더 예민한 경우가 많다. 그러나 ‘계시’나 ‘환상’이 종교적 ‘신앙’의 울타리를 넘어서면 철학과 예술의 주제가 된다. 우리는 그러한 경험을 현실 속에서 쉽게 망각하곤 하지만 최소한 예술가들 특히, 초현실주의 작가들이나 철학자들에게는 예외인 것 같다.

 

 

 

 
  
▲ 골콘다Golconde_1953_gouache,
ⓒADAGP, PARIS, 2006


 

 

오늘 소개하는 마그리트는 우리를 이러한 꿈과 현실의 경계로 인도한다. 절대로 함께 공존할 수 없을 것 같은 대상들의 대비들 즉, 와인 잔에 담긴 구름, 빗방울 같이 허공에 떠 있는 사람들, 하늘과 새의 이미지의 중첩, 몸에서 분리된 얼굴 등 우리의 일상 속에서 보이는 것들을 일상과 다른 상황 속에 재 배치하고 조합함으로 전혀 새로운 그림 속 ‘현실’을 보여준다.

 

그는 이러한 형식을 통해 ‘존재와 세계’에 대한 끊임없는 질문을 우리에게 던지는 것이다. 이를 위해 마그리트는 어떤 대상을 전혀 색다른 상황에 배치시키는 ‘고립’, 사물의 재질을 전혀 다른 것으로 바꾸는 ‘변경’, 두 가지의 이질적인 대상을 하나로 합치는 ‘사물의 잡종화’, 사물의 ‘크기의 변화’, 두 대상을 하나로 만드는 ‘이미지의 중첩’ 등과 같은 방법을 사용한다. 이러한 시각적 ‘패러독스’를 통해 그는 일종의 긴장감과 신비감을 화면에 표현하고 있다.

 

 

 

 
  
▲ 기억Memory_1948_oil on canvas_60x50,
ⓒADAGP, PARIS, 2006


 

 

“나는 사물의 표면과 그 표면이 숨기고 있는 것에 관한 문제에 대해 생각한다. 나는 표면 아래 항구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있다거나 그 표면과는 다른 것이 존재한다고 믿지 않는다. 우리의 사고(실재)가 그 스스로 드러나지 않는다면 사물의 표면이 숨기고 있는 실재는 곧 우리의 사유가 바라보는 표면이 아닐까?” – 르네 마그리트

 

우리가 일상적으로 여기는 ‘현실’이 실재로 우리의 인식 밖에 존재하는 것일까 아니면 우리의 인식 속에 존재하는 것일까? 우리는 쉽게 간과하는 문제를 철학자 같이 집요하게 마그리트는 그의 작품을 통해 ‘이야기’하는 것이다.

 

‘이야기’한다 함은 그의 작품이 끊임없는 그의 사유의 결과물이기 때문이다. 서구 철학적 사유의 핵심인 주체와 객체의 문제는 그의 작품에서 이분법적으로 분리해서 나타나지 않는다. 우리가 현실로 믿고 있는 세상이 그의 작품을 통해 현실이 아닐 수 있다는 가능성으로 나타난다. 그것이 그가 ‘보여주는’ 패러독스이다.

 

현실과 꿈, 어떤 것이 참이고 거짓인가는 그의 작품에서는 중요하지 않다. 메를로 퐁티는 주관과 객관이 공존하는 방식을 ‘살’이라고 표현한바 있지만 마그리트는 이러한 존재 방식을 넘어 현실과 환상을 하나로 결합하는 ‘패러독스’를 창조한다. 그렇게 함으로 그가 얻는 것은 인간이 꿈을 꿀 때 느끼는 그 ‘자유’이다.

 

그는 현실과 꿈이 공존하는 상태를 ‘실재’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며 인간은 이러한 ‘현실과 꿈의 경계에 서 있는 존재’라는 거다. 그러한 ‘경계’를 작품적 이미지로 형상화한 것에 그의 천재성이 빛난다. 현대철학자들이 끊임없이 언어로 표현하려 했던 것을 마그리트는 ‘이미지’를 통해 한번에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 대화의기술The Art of Conversation_L_Art de la conversation_1950_oil on canvas_65x81
ⓒADAGP, PARIS, 2006


 

그의 그림을 감상하다 보면 끊임없이 다음과 같은 질문이 머리 속에서 계속 되풀이 되곤 한다. ‘계시’는 현실인가 아니면 환상인가? 세계는 우리의 인식을 떠나 실재하는 것일까 아니면 우리의 인식 속에서 만 존재하는 것일까? 그림 안의 사물이 실재를 닮은 것일까 아니면 실재가 그림 안의 사물을 닮은 것일까? 어디까지가 꿈이고 어디까지가 현실일까?

 

그의 작품은 늘 이러한 질문 위에 놓여 있다. 어쩌면 우리는 이러한 질문에 영원히 답을 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사실 세계는 마그리트가 보여준 바와 같이 이러한 패러독스 위에 놓여 있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 보이지 않는 선수The Secret Player_Le joueur secret_1927_oil on canvas_152x195,
ⓒADAGP, PARIS, 2006

 

 

 
  

▲ 붉은모델The Red Model_1953_oil on canvas_38x46,
ⓒADAGP, PARIS, 2006

 

 
  
▲ 순례자Le Pelerin_1966_oil on canvas_81x65,
ⓒADAGP, PARIS, 2006

 

 
  
▲ 신뢰Good Faith_La Bonne Foi_1964-5_oil on canvas,41x33,
ⓒADAGP, PARIS, 2006

 

 
  
▲ 심금The Heartstring_1960_oil on canvas,114x146,
ⓒADAGP, PARIS, 2006

 

 
  
▲ 회귀The Return_Le retour_1940_oil on canvas,50x65,
ⓒADAGP, PARIS, 20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