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아~ 노올자!"
표현으로 본 공동육아와 미술
채창완
“표현되어진다면, 그것은 이미 초월되어진 것이다.” - 폴 틸리히
▲ 김한슬(7세) 나비와 꽃
‘공동육아’라는 말은 이미 교육계에서는 보통명사가 되어가지만 아직 일반에게는 생소한 것 같다. 90년 대 말 기존 육아교육에 대한 대안으로 시작된 공동육아는, 간단히 설명하면, 부모와 교사 그리고 사회가 교육의 주체가 되어 함께 육아교육에 공통적 책임을 지는 것이다.
사실 기존의 사설 육아교육 기관들은 교육을 중시한다 해도, 운영상 ‘영리성’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한계를 가지기 때문에 아이들을 위한 올바른 교육환경과 프로그램 개발에 늘 제약을 받아왔다. 물론 부모들의 교육과 운영에 대한 참여 또한 제한되었다. 공동육아는 이러한 한계들을 극복하기 위해 ‘비영리성’, ‘생태교육’, ‘열린교육’, ‘참여교육’ 등을 지향하며 아이들의 성장과 교육을 가정, 사회 그리고 생태의 관계 속에서 펼쳐가려는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 강지우(7세) 고양이 야웁
여기서 육아에 대한 사회적 공동의 책임이 중요하지만, 현재 공동육아 어린이집의 운영은 아동의 부모의 참여에 의존하고 있는 실태(實態)이다. 공동육아에서 부모들은 조합을 구성하여 어린이집을 설립하고 그 운영의 주체로서 활동한다. 여기서 어린이집의 운영과 교사의 채용 그리고 교육 전반에 걸친 부모들의 참여는 필수적이다. 부모들은 아이의 교육을 교육기관에 위탁하는 차원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시간과 노력을 투자해야 한다.
‘공동’이란 말에는 아이의 육아를 함께 책임을 진다는 의미가 있는 만큼, 부모들에게 자신의 아이 만을 생각하는 단계를 넘어 다른 아이들까지 품어주는 것을 기본 덕목으로 요구된다. 그래서 공동육아에서 부모나 아이 모두가 ‘내 부모’, ‘내 자식’이란 경계를 허물고 ‘더 불어 살아 가기’를 함께 배워가는 것이다.
▲ 채기쁨(4세) 친구 수정이
그렇다면 공동육아 어린이집과 일반 어린이집의 차이는 실제적 교육성과에서 어떻게 나타날까? 어떻게 아이들은 공동육아를 통해 성장해가고 있을까? 많은 사람들이 궁금해 하는 질문이다. 그것은 또한 그 동안 진행되어온 ‘공동육아’의 실제적인 교육성과에 대한 자기 반성적 질문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러한 질문에 늘 주의할 것은 그것이 어떤 것이 옳고 그르냐를 판별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단지 우리는 이러한 질문들을 통해 두 가지 교육시스템에 대한 어떤 ‘차이’를 확인할 수 있을 따름이다. ‘차이’는 ‘다름’이지, ‘옳고 그름’이나 ‘흑’과 ‘백’을 나누는 이분법적 구분이 아니다.
현재 그러한 비교연구가 활발하게 진행 중이겠지만, 어떤 결과를 내어 놓기에는 공동육아의 짧은 역사를 생각하면 시기적으로 아직 이른 감이 있다. 그러나 그 동안 내 개인적 관찰의 경험에 비추어 공동육아 아이들의 그림들에서 드러나는 중요한 특징을 통해, 비록 제한적이지만, 이러한 질문에 대한 나름대로의 답을 제시하고자 한다.
▲ 박해별(4세) 사람
그에 앞서 먼저 ‘표현’이란 관점에서 아이들의 그림을 생각하고 넘어가자. 폴 틸리히가 이미 강조했던 것처럼, ‘표현’은 예술과 인간의 삶에 매우 중요한 부분으로 표현이 없으면 인간 문화의 양식은 결국 무의미해질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점은 아이들에게도 적용된다. 아이들의 그림은 주변, 특히 선생님이나 부모, 친구들의 영향을 받을 수 밖에 없다. 그래서 작은 ‘평가'나 ‘칭찬’에도 아이들은 영향을 받기 쉽다.
그림은 아직 말이나 글을 통한 표현력이 성숙하지 않은 아이들이 ‘자신을 표현하는’ 아주 중요한 매체이다. 자신이 느낀 감정, 자신이 아는 것, 자신이 본 것, 자신이 생각하는 것 등이 그대로 아이들의 그림에 나타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아이의 그림은 곧 그 아이 ‘자신’인 것이다. 달팽이가 딱딱한 껍질 속에 연약한 살을 보호하듯이 아이들은 자신의 존재를 ‘자아’라는 껍질 속에 감춰두길 원한다. 그래서 아이들이 자신의 연약한 ‘속살’을 세상에 드러낼 때 상처 받을까 두려워하고, 보호 받고 싶어하는 것은 당연한 것 같다.
그러나, 이와 같이 상처 받기 쉬운 우리 아이들은 ‘자기 표현’이란 두려움 속에 침묵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다양한 방법으로, 다양한 상황 속에서 표현하고 있다. 행동으로, 그림으로, 말로, 표정으로, 놀이로, 그리고 심지어는 꾀병이나 질병으로 말이다. 그들의 표현을 통한 세상과의 소통은 너무 평범해서 우리 어른들이 쉽게 간과하기 쉬운 일상적인 것들이다. 그림 또한 그러한 아이의 자기 표현의 한 방법이다. 그러므로 그림에 표현되는 아이의 세계는 바로 그 아이 ‘자신’이며, 그 아이는 그 그림을 통해 세상과 소통을 시도하는 것이다.
▲ 오선재(5세) 얼굴
공동육아 아이들의 그림에서 나타나는 가장 큰 특징은 ‘자유로움’과 ‘개성’이다. 아이들의 그림이 ‘자유롭다’는 것은 위에서 언급한 바, ‘자기 표현’이란 의미에서 중요하다. 그것은 아이의 생각이 유연하고 아직 누구의 간섭을 받지도 않으면서 자신을 표현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철저히 아이 자신을 표현한 것임으로 ‘개성이 있다’라고 할 수 있겠다. ‘자유롭다’는 것은 아이가 구속 받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증거이며 그들의 상상과 기쁨이 함께 녹아있다는 것이다.
일부 사설 어린이집에서 나타나는 ‘보여지기 위한 그림’들은 늘 어떤 ‘완성’을 지향하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아이들에게 강요 아닌 ‘강요’(?)가 따르게 마련이다. 이 경우 ‘완성’의 기준은 아이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늘 어른의 몫이 된다. 어른들, 즉 선생님이나 부모들의 기준이 늘 아이들에게 ‘강요’되는 것이다. 물론 모든 사설 어린이집이 그런 것은 아니지만, 획일화 되고 제도화된 교육을 하다 보면, 늘 ‘기준’ 또는 ‘표준’이 제시되어야 함은 어쩔 수가 없는 노릇인 듯하다.
공동육아에서는 이러한 완성에 대한 ‘기준’을 늘 아이 개인에게 둔다. 어떤 면에서는 ‘방관’이란 오해도 있을 수 있지만, 최대한 아이들 개인의 완성에 대한 생각을 존중한다. 아이들의 완성에 대한 개념은 아이의 성장에 맞게 스스로 진화해 간다. 그렇기 때문에 아이들의 그림에서 어떤 표준화된 ‘완성’을 찾는 것은 어쩌면 무의미한 노력일지도 모른다.
▲ 민이원호(4세) 햇님하고,무지개 그리고 긴집
이번에 소개하는 아이들의 그림들은 모두 하나같이 ‘자유롭다’. 획일화 된 느낌은 없다. ‘자유로움’이 획일화라고 한다면 모를까 아이들 각자의 개성이 넘쳐 난다. 혹자는 아직 미완성인데……라고 할 지도 모른다. 빈 화면이나, 마치 그리다 만 것 같은 이미지들, 그리고 미숙한 선들, 알아보기 힘든 모양들로 넘쳐 나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대미술작품을 방불케(?)하는 기발한 이미지들과 아이들 만의 상상력이 가득하다. 그리고 아이들의 즐거움이 그 안에서 느껴진다. 아이들에게 그림은 과정 중에 있는 ‘놀이’이지 완수해야 할 ‘과제’가 아니다. 아이들은 그림들과 놀면서 자신을 드러낸다. 아이들의 놀이가 누구에게 보이기 위한 놀이가 아니듯이, 그들의 그림도 선생님이나 부모님께 보이기 위한 것이 아니다.
아이들은 자신이 놀다가 싫증 난 장난감을 집어 던지듯이, 그림의 과정을 즐기지 그 결과물에 집착하지 않는다. 그래서 아이들은 ‘완성’이나 ‘보존’에 대해 관심이 없다. 아이들의 성장이 ‘과정’ 속에 있듯이, 그들은 모든 것을 그들의 놀이의 과정으로 생각한다. 그러므로 그림은 그들에게 즐거운 ‘놀이’이며, 그들 존재의 ‘표현’의 한 방법이다.
▲ 유지은(6세) 우리 가족
▲ 박해솔(6세) 사람
▲ 양찬우(6세) 민들레
▲ 문수정(4세) 친구 기쁨이
▲ 김수란(7세) 엄마
▲ 김가영(5세) 친구들
▲ 김한결(4세) 드로잉
▲ 박준아(6세) 비오는날
▲ 조봄(6세) 친구들
▲ 권진남(5세) 드로잉
▲ 유승환(5세) 드로잉
▲ 엄태준(5세) 사다리차
▲ 장마리(5세) 마리 혼자 있을때
▲ 정민석(4세) 여러가지 이미지
▲ 이어진(6세) 엄마
▲ 이재하(5세) 뱀과 물고기
▲ 장미르(5세) 열기구 타고 여행
▲ 한이솔(5세) 기찻길
▲ 김여진(8세) 양치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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