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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원순의 "한국 천주교회 기원에 대한 검토"를 읽고...

James Chae 2012. 12. 11. 21:42


이원순의 "한국 천주교회 기원에 대한 검토" 를 읽고…[‘민족사와 교회사’, 한국교회사연구소, pp.19~61]





평신도로부터 시작된 한국의 기독교


그 뿌리는 민족정신에 있는가?


채야고보

 

 

기독교의 한국 전례에 대해서는 자료의 부족으로 인해 아직 많은 주장들이 제기되고 있는 상황이지만 한국 기독교회의 시작에 대해서는 학자들간에 상당한 이견에도 불구하고 많은 연구들이 현재 진행 중이다. 당나라의 경교나 경교에 뿌리를 둔 원나라의 야리가온또는 일본의 기리시탄등의 영향으로 전파되었다는 주장은 ,한국의 기독교 전례의 관점에서 보면, 당나라와 신라, 원나라와 고려의 외교적 상황을 고려한다면 충분히 설득력 있는 주장이라고 여겨진다. 그러나 임진왜란 때 일본의 기리시탄에 의해 전파되었다는 설은 여러 가지로 논란이 되고 있다. 이와 같이 기독교의 한국 전례에 대한 문제와 한국 기독교회의 기원에 대한 문제를 분명히 달리 해야 복잡한 혼란을 피할 수 있을 것이다.


이 글에서는 기독교의 한국 전례보다는 한국 기독교회의 시작특히 천주교회의 시작을 다루고 있다. ‘한국 기독교의 시작을 바로 교회 공동체의 시작으로 이원순은 생각한다. ‘교회는 하나의 신앙을 같이하는 다수 신자들의 믿음의 조직이요, 한 사회에 기여하는 역사적 활동 실체인 것이다라고 그는 언급하고 있다. 그는 한국 교회사의 시작을 신학적으로 접근한 것이 아니라 역사학자의 시각으로 접근했음을 알 수 있다. 그의 주장을 간단히 요약해 본다.

 

이원순은 이 책에서 한국천주교회의 기원에 대한 몇몇 주장들을 먼저 반박하고 한국 교회사에서 가장 설득력 있는 주장인 ‘이승훈 기원설’을 정설로 주장한다. 메디나 신부에 의해 제기되었던 ‘임진왜란 기원설’에 대해서는 조목조목 반론을 제기하고 있다. 친일적인 메디나 신부의 역사관에 의문을 제기하고 그의 친일편향적인 한국천주교사를 비판했다. 그러나 이원순의 주장대로 메디나 신부의 연구를 비하시키는 것 보다 예수회 자료를 중점으로 한 메디나 신부의 연구를 기독교회의 시작의 관점이 아니라 기독교 전례사의 관점에서는 충분히 연구 가치가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든다.


허균-홍유한 기원설’ 에 대해서는 개인적 차원의 신앙생활과 천주학의 연구에 국한된 것이라고 주장한다. 또한 서학파 학자들에 의해 열렸던 천진암 주어사 강학회(天眞菴 走魚寺 講學會) 기원설도 교회활동으로 볼 수 없다고 한다. 그 근거는 세례 받은 자가 없었고, 강학회가 지속적인 역사적 실체로 남지 않았다는데 있다. 결국 이원순은 한국 천주교회의 기원을 이승훈과 이벽에서 찾는다(1784년 경). 이승훈은 이벽의 권유로 중국 북경 방문차 천주당天主堂을 찾아서 서양 선교사(프랑스의 그라몽 신부)로부터 천주교 신앙을 전수 받고 세례를 받은 한국 최초의 세례 교인이고, 이벽은 이승훈의 선배로서 이승훈이 전해준 기독교 서적과 이승훈의 설명으로 기독교의 진리를 터득하고 이승훈으로부터 대세代洗를 받고 기독교인이 된 자이다. 이승훈과 이벽은 기독교인이 된 후 활발한 전도활동을 폈고 이후 김범우의 집에서 한국 최초의 교회 형태인 세례 교인들의 정기적인 모임이 결성되었다. 이는 조선의 천주교의 실체가 만방에 드러나게 되었던 최초의 천주교 박해 사건인 을사추조적발사건乙巳秋曹摘發事件의 원인이 된다. 김범우의 집에서 신도들의 집회가 당국에 의해 적발된 것이다. 이로서 김범우는 유배 조치되었고 이때부터 천주교는 조선에서 뜨거운 사회적 문제로 떠오르게 된 것이다.


이 글의 마지막에 이원순은 한국 천주교회 기원의 특징을 교회건물 없는 교회에서, ‘대세代洗 받은 신자들에 의해, 그리고 사제가 없는 평신도들의 자율적인 활동에 의해 시작되었음을 주장한다. 그러나 이원순의 주장도 교리와 교회중심의 로마 가톨릭 교회 전통의 영향을 벗어나지는 못한 것 같다. 이는 한국 최초의 교회의 기원을 세례를 받은 이승훈과 그로부터 대세代洗를 받은 이벽에서 찾는 것에서 볼 수 있다. 그러나 교회가 세례 받은 자들의 공동체이어야 한다는 개념은 교회의 개념을 어떻게 설정하느냐에 따라 다르게 나타날 수 있는 문제가 아닐까? 세례 받은 자가 기독교인인가 라는 문제는 단순하게 인정하고 넘어가기에는 많은 신학적인 논란의 여지가 있다. 왜냐하면 정치적,경제적 이유로 명목상의 세례를 받고 기독교인이 된 사람들이 역사상 얼마나 많았는가! 이벽과 이승훈의 세례 후의 활동으로 미뤄보아 그들이 기독교인이었음에는 변론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그들로부터 세례를 받은 자들의 회심에 대해서 우리는 아는 바가 별로 없다. 정치적 목적이었는지, 학문적 목적이었는지 우리는 자세히 알 수 없다. 아무튼 기독교 활동이 조직적으로 시작된 것에 대해서는 이벽과 이승훈으로부터 기인하는 것이 현재 가장 보편성을 얻는 주장이다.


나는 이 글을 읽는 동안 기독교사의 연구가 역사적,신학적인 연구와 병행해서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라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어떤 사건에 대한 신학적인 적립과 역사적인 연구는 늘 함께 가야만 올바른 교회사를 볼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가톨릭 교회중심적 교리에 입각하여 쓰여진 이원순의 글의 한계가 여기에 있다는 생각이 든다.


끝으로 나는 한국 기독교의 역사가 평신도들에 의해 자율적으로 이루어졌다는 점에 주목하고 싶다. 이는 우리 한민족의 정신 속에 흐르는 단군의 ‘홍익인간弘益人間의 정신이 기독교의 박애정신과 자연스럽게 조화를 이룬 결과가 아닐까?  또한 상제上帝를 섬긴 우리 민족의 종교성과 기독교의 하늘 아버지의 개념의 유사성도 한번 생각해 볼 문제인 것 같다. 물론 기독교를 수용했던 서학자들이 새로운 정치사회적이념을 찾는 지적 호기심의 과정에서 정치적으로 또는 학문적으로 기독교를 수용을 한 측면도 있겠지만, 어느 누구의 강요도 없이 스스로 기독교의 교리를 연구하고 기독교인이 된 서학자들의 정신 속에 흐르던 한민족의 종교성을 무시할 수 없을 것이다. 그들은 널리 인간을 이롭게 할사상으로 기독교를 선택한 것이 아닐까?  또한 이러한 민족정신의 바탕 위에 세워진 한국의 기독교이기에 중국이나 일본의 기독교와는 차별성을 갖고 발전한 것이 아닐까이는 교리 중심, 교회 중심의 권위주의에 빠져있는 한국 교회가 한 번은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일 것이다


기독교사가 교회의 설립에 중점을 두고 진행되는 것도 나름대로 의의가 있겠지만 민족종교사의 관점에서 기독교의 수용과 영향을 연구해 보는 것도 중요할 것 같다.(물론 민경배 선생을 중심으로 민족사관의 연구가 있어왔다.) 만일 기독교가 우리의 민족 정신에 위배되었다면 어떻게 기독교의 자발적 수용이 가능했겠는가? 한국기독교의 초기 역사가 피로 물든 까닭은 우리의 고유한 정신이 아닌 중국의 유교사상 때문이 아닌가? 기독교전통과 유교전통의 대립, 그리고 외세에 대한 반감이 기독교의 수용에 걸림돌이 된 것이지 우리 민족 고유의 敬天愛人’, ‘弘益人間의 정신이 기독교를 배척한 것은 아니다. 우리 민족의 고유한 사상과 종교성이 기독교의 것과 많은 부분에서 일치한다는 주장이 과연 억측에만 머물 것인가 자문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