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경배, 한국기독교사회운동사, 대한기독교출판사, 1976 pp.42 ~ 122 를 읽고…
다시 그 개혁의 깃발을 들자!
-한국초대기독교의 사회개혁적 민족운동과 사회개혁-
채 야고보
한국초대기독교의 모습을 살펴본다는 것은 한국기독교의 뿌리를 살펴보는 매우 의미 있는 일이다. 어떻게 한국기독교가 형성되고 한민족 속에 뿌리를 내려왔는지를 알게 된다면 현재 한국교회가 당면한 많은 문제들의 원인에 조금이라도 접근할 수 있지 않은가 생각된다. 특히 기독교와 한민족의 관계가 어떻게 형성되어 왔는 지를 알아 봄으로써 현대교회의 서구지향적 성격과 복음주의적 성향의 원인을 살펴볼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의 저자인 민경배는 대체적으로 ‘친선교사적인’ 논조로 한국초대기독교의 역사를 설명하고 있다. 저자는 선교사들의 관점과 자료를 인용해서 일본제국주의에 대한 반감을 표현한 반면 서구제국주의에 대한 견해는 생략하고 있다. 서구제국주의적 관점에서 일본제국주의의 조선침략은 아마도 서구 선교사들에게는 불쾌한 일로 비춰졌을 것을 감안한다면 저자의 친선교사적 관점에는 문제가 제기될 수 있을 것이다. 한국초대기독교에 대한 자료가 대부분 선교사들에 의해 기록된 것이 많다는 점을 생각한다면 충분히 이해는 간다. 그렇다 하더라도 우리가, 물론 나는 그들의 업적을 비하시키려는 의도는 전혀 없지만, 초기 선교사들을 언급할 때 그들과 제국주의의 연관성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저자의 편향된(?) 시각에도 불구하고 나는 한국 초대기독교를 민족주의와 연결 시킨 그의 시도에 깊은 관심을 갖고 이 책을 읽었다.
민경배는 ‘한국기독교사회운동사’에서 한국기독교 사회운동의 전개를 1) 사회개혁적 민족운동과 사회개혁(1900년 이전), 2) 민족의식의 요새(민족교회로서의 과업수행, 1900~1919년), 3) 사회봉사와 사회사업 및 농촌운동 전개(1920~1940년)으로 구분하고 있다. 여기서는 서양선교사들에 의해 진행된 ‘사회개혁적 민족운동과 사회개혁’에 대해 간단히 정리한다.
[초기 서양선교사들의 선교전략]
초기 개신교 선교사들은 “서양문명이 기독교 신앙과 그 윤리의 결실이요 그 필연적인 축복”임을 그들의 선교활동에 드러내야 했다. 이러한 이들의 “박람행각(博覽行脚)”은 서구 세계의 발전된 문명을 한민족에게 시위(?)했고 결국 우리 민족은 서양 문화의 이면에 있는 기독교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언더우드 여사의 다음과 같은 언급은 이 같은 점을 증거하고 있다.
“조선 사람들은 서양 문화에서 최선의 것을, 사람의 힘을 분발시켜 최선의 결과를 가져오게 하는 동력이 바로 기독교에 있다는 것을 깨닫고 있다.”
‘발전된 서양문명이 기독교의 결실’이란 서양선교사들의 인식과 조선인들의 이 같은 깨달음은 조선 선교에 활력을 불어넣기에 충분했다. 그래서 초기 기독교 선교는 사회개혁운동에 중점을 두며 “복음주의적인 개인구원과 그 도적적 변화”와 “자선과 교육과 같은 과정을 통한 온건과 경륜(經綸)”으로 그 추진력을 삼았다.
이러한 초기교회의 사회운동은 초기 선교사들의 선교신학방법론, 즉 “복음화에 의한 사회개혁”이 적용된 시기와 “친일 개화 사회운동과 거리를 두고 진행된 의식적인 자발적 온건 개혁의 복음주의 개혁의 단계”로 민경배는 구분했다. 초기한국교회는 “내적변화와 신앙의 결실이 개인에게 성취되면 ‘자연’ 외연(外延)해서 나라나 사회의 정돈 자유 부강이 곧 실현된다는 철저한 확신” 위에 있었다. 즉 “사회개혁이 복음화에서 진행된다”는 입장을 한국교회는 분명히 했다. 이와 같이 1900년 이전에 전개된 사회개혁은 초기 선교사들의 복음주의적 입장에서의 사회개혁적 성격이 강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성향은 일본의 개화와 거리를 둔 한국기독교의 반일 민족사회 운동으로 전개되었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개화기의 조선 사회의 사회 전반에 걸친 개혁활동으로 나타났다. 그 대표적인 것은 “여권신장”, “의료선교”, “노비문제”, “공직의 윤리성” 등을 들 수 있다.
[한국 기독교의 반일 민족 사회 운동]
초기 기독교 선교사들이 조선에 들어오는데 일본이나 친일인사의 도움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선교사들, 즉 애비슨(O.R.Avision), 할버트(H.B.Hulbert), 홀(W.J.Hall) 등과 같은 초기선교사들은 “친왕실적 성향”을 띠었고 이는 자연스럽게 “반일적 성향”과 연결되어 일제의 비판을 받았다. 이러한 초기 기독교 선교사들의 반일본적 성향은 명성황후 시해의 ‘을미사변’, ‘단발령’, ‘아관파천’으로 이어지는 사건들을 통해 더욱 두드러진다. 1884년에 있었던 ‘갑신정변’의 배후에 일제가 있었고 이러한 친일개화추진세력을 언더우드는 “음모자들(conspirators)”이라고 하여 적대감을 보였다. 선교사들의 반일성향은 1895년 11월에 친일정권세력들에 의해 공표된 “단발령”에서 더욱 두드러진다. 이는 명성황후 시해가 있은 지 얼마 되지 않은 때에 내려진 것으로 이러한 일본의 침략정책은 초기기독교인들과 선교사들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선교사들은 “그 단발은 조선의 민족적 주체성을 지워 없이해버리고 일본에 동화”시키려는 잘못된 계책이라고 비난했으며, 반면 “민중들이 경험과 실례로서 그 불편함과 부조리를 깨닫고 난 다음 스스로 폐기”되어야 무리가 없다는 ‘단발’에 대한 입장을 가지고 있었다. 민경배는 조선에서의 민족주의의 대두를 이시기에 형성된 것이 아닐까 하는 조심스런 의견을 제시한다. 그리고 다음과 같이 이 교회의 민족주의와 단발령에 대한 입장을 정리했다.
“이 단발이 우리 겨레에게 인간으로서의 도덕성 상실을 의미하였기 때문에, 이 민족주의는 심각한 반일 감정에 정의감 부여라는 단계까지 거쳤다. 하지만 그 성취는 초월자에 대한 신앙, 그것을 통할 수 밖에 없다는 ‘복음전파’를 긴박한 구국의 시운으로 포착한 것이 교회였다.”
결국 교회는 개개인의 복음화에 의한 각 사람의 변화를 통해 한국사회전반에 걸친 개혁이 가능하다고 믿었다고 할 수 있다.
이 책에서 흥미로운 사실은 ‘교회와 독립협회’의 관계에 대한 설명에서 ‘독립협회’를 친일적 성향의 단체로 묘사했다는 것이다. 내 개인적으로 ‘독립협회’는 ‘독립문’과 ‘독립신문’들을 발간한 최초의 민족주체적 정치 운동의 하나로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이러한 저자의 설명은 매우 흥미를 더했다. 민경배는 이에 대한 증거로 윤치호의 “기독교화 다음에 일본화”가 그의 초기 개화사상의 일관된 입장이었다는 점과 서재필과 같은 “친일적 성향의 인사들”이 섞여있다는 점 등을 들었다. 또한 그는 “감리교 선교부는 ‘독립신문’인쇄 계약을 ‘끊임없이 후회’하였다”고 했으며 “언더우드는 기회 있을 때마다 ‘독립신문’에 대해서 비판과 반발을 보여 왔다”는 점도 진술하고 있다. 비록 독립협회에 서재필, 윤치호, 정기준등은 기독교인이었지만 교회는 “독립협회의 경일성(傾日性), 반왕성(反王性), 그리고 혁명적 과격성”을 비판했다. 물론 독립협회와 교회의 관련설도 있었던 것으로 보아 교회는 독립협회에 대해 이중적 성향을 가진 것 같다고 저자는 말한다. 민경배는 ‘독립협회’에 대한 교회의 태도가 이분되었다고 주장하며 다음과 같이 진술한다. 물론 그의 말은 독립협회가 친일적이라는 것에 무게를 두고 있다.
“그 일부 기독자들의 독립협회밀착은 반일의 민족 감정이 형성된 과정에 대하여 정확한 인식이 없이 독립협회 활동에 동조한 한 시대적 현상이라 판단된다. 이것은 기독교를 민족운동의 조직적 배경으로 간주한 일부 과격 기독자들의 경향이기도 하였다.”
이러한 한국기독교의 민족주의와 친일적 정치세력과의 갈등은 향후 선교사들의 ‘복음의 정교분리적 선교’의 원인을 제공한다고 필자는 말하고 있다. 이는 “1907년 대부흥의 한국교회 비정치화 수행과 연결”된다. 즉 민족주의적 성향을 가졌던 한국초대교회가 어떻게 일제 식민지 정책하에서 친일적 성향을 띠며 생존할 수 있었는지 예측할 수 있는 대목이다.
아무튼 민경배의 이와 같은 ‘독립협회’에 대한 입장은 그 창시자 ‘서재필’의 경우를 잠깐 살펴보아도 내 개인적으로 충분히 이해가 된다. 서재필이 어떤 사람인가? 그는 1884년의 ‘갑신정변’의 주역이었다. 이 ‘갑신정변에서 독립협회의 창설’까지의 역사를 잠깐 살펴보자. 이 갑신정변은 청나라의 비호를 받고 있던 명성황후 중심의 ‘사대당’에 대한 친일적 개혁파인 ‘개화당’의 반란에서 일어난 것인데 비록 이 개혁은 실패로 돌아갔고 개혁의 주체세력들은 모두 일본으로 망명을 했다. 이후 청.일 전쟁에 승리한 일본은 조선침략에 다시 박차를 가했으며 청나라 세력을 잃은 명성황후가 친러시아 성향을 보이기 시작하자 결국 그녀를 시해하기에 이른다(을미사변, 1895). 이로서 일제는 조선의 주도권을 획득하지만 오래지 않아 ‘아관파천(1896년)’으로 다시 그 주도권을 러시아에 넘겨준다. 바로 그 같은 해 7월, 즉 러시아와 일본이 첨예하게 대립한 시기, 에 갑신정변의 주역인 서재필의 ‘독립협회’가 창설된 것은 역사적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일본은 친일편향적인 개화파를 앞세워 민족자주를 앞세우며 러시아의 세력을 경계하려 했던 것 같다. 여기서 우리는 일본으로 망명까지 했던 서재필이 ‘친일’은 아니었다 하더라도 ‘반일’은 분명 아니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이는 독립협회의 ‘반러시아적 성향’에서도 나타난다고 이 책은 적고 있다. 나는 ‘독립협회’가 ‘반일’단체가 아니었다는 필자의 주장에 동의한다. 이는 갑신정변의 서재필과 같은 친일 개화적 인물이 ‘독립협회’에 관여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추측해 볼 수 있다.
[초기 기독교의 사회개혁]
이 책의 제5장에 서술된 많은 기독교 사회개혁운동 중 나는 다음 몇 가지만 언급하고자 한다. 이는 오늘날의 한국교회와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 한국 교회가 한국개화기의 초기사역들을 역사적으로 되돌아보면서 현재 한국교회에 산재해 있는 문제들을 하나씩 해결할 그 역사적 근거를 여기서 찾을 수 있지 않을까 내 나름대로 생각해 보았다.
민경배는 “복음은 남녀의 창조 질서 안에서의 인간적 존엄성을 설교하고 그 동등성을 필연으로 갈파하고 있었다” 고 진술했으며 더 나아가 “교회는 부부와 가정의 문제에 있어서 성서적 교훈과 동양적 고유 미덕의 기초를 원만하게 지지하였다”고 밝히고 있다. 즉 “여권의 신장이 전통파괴의 이변”으로 강요된 것이 아니라 인륜의 기초에 뿌리 박고 있던 인간원초적질서가 기독교에 의해 발휘된 것으로 여긴 것이라는 의견을 폈다. 이러한 “여성의 지위 향상은 무지와 천대에서의 해방이 동시에 진행”될 수 있는 교육으로 이어진 것이다. 초기한국교회의 이 같은 노력에 힘입어 한국근대사에서 여성들의 지위가 많이 향상되긴 했지만 오늘날 한국교회 내의 여성의 지위에 대해서는 아직까지도 많은 문제들이 있다. 특히 여성 사제의 안수 문제 등이 그 대표적인 예일 것이다. 남녀 평등의 기독교 윤리에 어긋난 현재 한국교회는 개화당시의 한국교회의 남녀 평등의 노력을 다시 거울 삼아야 할 것이다. 당시 유교적 전통 사회에서 여성의 지위향상을 부르짖은 교회가 현재 한국교회의 여성차별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있는 것은 역사적 아이러니이다.
기독교 선교사들에 의한 의료선교는 한국의 근대화에 가장 지대한 영향을 끼친 것으로 평가된다. 1885년 4월10일 알렌 선교사에 의해 조선 최초의 서양의료기관인 ‘광혜원’이 설립되고 언더우드, 스크랜톤, 헤론 등과 같은 의료선교사들의 조선정착명분도 이러한 의료선교사업과 무관하지 않았다. 이 책에서 민경배는 의료선교의 의의를, 물론 제고의 여지가 있지만, 다음과 같은 여섯 가지로 정리했다.
1) 몽매한 전근대적 미신의 폐습과 그 무당에 의한 치료의 폐해를 근절
2) 계층간의 소외 의식제거와 무산에 기여함 : 위로는 고종으로부터 아래로는 천한 하류층의 사람들을 함께 시료함으로써
3) 의료를 통한 심원한 기독교적 인간애의 실현: 1895년에 창권했던 호열자들에 대한 치료와 방역 사업에서 보여준 선교사들과 기독인들의 헌신과 박애정신은 좋은 예가 될 것이다.
4) 근대의 과학적 의학 지식의 보급과 새로운 시대에로의 문호개방에 기여 : 보건위생과 새로운 서구지식의 유입
5) 의료사업에서의 여성의 참여를 통한 여성들의 사회 활동의 여건 조성
6) 의료선교사업을 통해서 기독교나 그 문명의 세계에 대한 한국의 접촉과 교류의 통로가 개방되었다는 사실
그러나 “의료 사업은 다만 복음 전파의 시녀(侍女)로서의 소임을 다하는데 그 가치가 있었을 뿐임을 교회가 다짐하고 있었다.” 의료선교는 교회의 궁극적 목적인 복음전파의 하나의 선교전략으로 초기 선교사들과 교회는 인식했다. 그러므로 초기 교회는 이러한 의료선교를 통해 복음전파에 더욱 효과적일 수 있었다. 특히 전염병자 치료에 헌신을 다한 기독인들의 사랑과 봉사는 당시 사람들의 귀감이 되기에 충분했을 것이다.
아울러 무어(S.F.Moore, 1860~1906)의 노력에 의해 1895년5월13일의 ‘백정의 신분해방’은 한국기독교사에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당시 사회적으로 불가촉천민에 해당되던 ‘백정’에 대한 기독교의 관심은 교회내 뿐만 아니라 조선사회의 신분철폐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백정신자들과 양반신자들 사이의 신분적 갈등 때문에 교회는 고민했지만 결국 초기한국교회는 신분제도의 벽을 넘을 수 있었다고 민경배는 이에 대한 의의를 적고 있다.
“그것은 제도나 구조의 변혁 이상의 차원, 정신적 , 도덕적 현신을 요구하고 있었다. 교회의 사회 개혁이 바로 이런 첩경을 선택한 개혁 추진 동력이었다. 그래서 ‘한국에서는 하나님의 복음이 사회 혁명’을 이끌어 갈 수 있는 적절하고도 이상적인 모형이요, 그 저력이었다.”
이와 같이 의료사업이나 소외된 자들에 대한 초대 교회의 활동은 한국의 근대화와 사회적 평등을 이룩하고 인간의 인격을 존중하는 기독교 정신의 구현이었다고 생각한다. 대형화와 부의 축적으로 한국 사회의 지탄을 받고 있는 한국교회가 사회봉사와 소외된 자들에 대한 관심으로 다시 한국사회에 봉사할 책임의 역사적 근거가 바로 여기에 있지 않을까?
마지막으로 현재 한국교회는 초기한국기독교의 중요한 특징 중에 하나인 “새 이도윤리(吏道倫理)”를 생각해야 한다.
“확실히 기독교는 이 나라에서 부패와 악덕의 이도를 숙정하고 공직의 민심파악기능을 그 덕으로 우선시키며, 국가에 봉공하여 나라의 복리와 자신의 명예를 지키고, 합리적 봉급으로 살아가는 지위의 확보라는 이도관을 정착시킬 수 있었다.”
초기한국기독교인들의 도덕관은 투철해서 공직자의 부정부패를 좌시하지 않았다. 그래서 기독교인이 많은 고을에 관리로 가는 것을 꺼려했다는 얘기가 나올 정도였다고 한다. 이러한 초대기독교인들의 도덕관은 오늘날, 특히 국회의원의 상당수가 기독교인이고 국민의 4분의1이 기독교인, 에 시사하는 바가 매우 크다 하겠다. 매일 같이 계속 쏟아지는 공직자나 사회각계 각층의 지도자들의 부정부패와 관련한 보도 내용들은 우리 사회, 아니 한국교회의 도덕성에 의문을 제기하지 않을 수 없다. 한국 교회가 무엇을 가르쳤기에 이러한 부도덕성이 난무하는 것일까? 그러나 “이 이도의 윤리는 행정개념에까지 구체화되지 않았고 온전히 정착도 되기 전에 ‘일제 관리상’이 비집고 들어섰던 것이다”라는 이 책의 내용에서 나는 그 이유를 어렴풋하게 짐작을 해본다. 바로 식민지시대의 도덕성을 상실한 ‘일제 관리상’과 부도덕한 식민지 근성에 길들여진 민족성에 그 원인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계속해서 한국의 현대사에서 진행된 반민주적 독재정권은 이 한국사회에 올바른 공직자상과 수준 높은 사회적 도덕을 실현하는데 더욱 커다란 원인을 제공했다. ‘뇌물’와 ‘불법’이 성행하는 것이 현재 한국의 사회가 아닌가? 심지어 기독교인들이 이러한 일에 침묵하거나 동참하고 있음은 슬픈 일이다. 한국교회가 식민지 시대나 군부독재정권의 시대에 사회정의를 위해 올바른 소리를 낼 수 있었다면 오늘날 한국교회는 우리 민족사 앞에 부끄럽지 않게 서 있을 수 있었을 것이다.
현재 한국사회는 개혁을 부르짖고 있다. 또한 낡은 과거역사를 청사하려는 노력을 경주하고 있다. 물론 늦은 감은 있지만 이는 반드시 우리가 이루어야 할 일이다. 그런데 아직까지도 식민지 근성과 독재정권에 아부하던 근성을 버리지 못한 소수 ‘극우기득권층’과 한국보수교회에서 이러한 사회개혁을 반대하고 있다. 특히 한국교회의 현재의 수구적 작태는 한국 민족사에서 또 다시 ‘창씨개명’과 ‘천왕숭배’ 그리고 반민주적 ‘독재권력의 시녀 노릇’을 했던 지난 날의 잘못을 다시 반복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한국교회가 초기기독교의 개혁적 성격과 사회참여를 교훈 삼아 이 사회에 다시 한번 사회적 개혁의 선봉에 서야 한다고 생각한다. 근대 개화기에 한민족의 역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감당했던 기독교가 이제 한국의 미래와 변화를 위해 다시 한번 그 개혁의 깃발을 높이 들 때가 바로 지금이 아닌가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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