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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울리히 단네만 "칼바르트의 정치신학": 사회의 화해로서의 예수 그리스도

James Chae 2012. 12. 12. 12:32

울리히 단네만, 칼바르트의 政治神學, 이신건 역, 한국신학연구소, 1994, 서울,  p.p 193~225 [요약/작성자: 채 야고보]


 




III.사회의 화해로서의 예수 그리스도

 

 

바르트는 교회교의학 제4권에서 화해되지 못한 사회의 개념을 예수 그리스도가 사회의 위기로서 맞서는 사회, 그리고 화해된 사회 개념을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희망을 성취한 사회로 각각 정의했다. 다음은 이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들이다.



1.  화해되지 못한 사회의 위기로서의 예수 그리스도


1) 화해되지 못한 사회 개념

화해되지 못한 사회는 고립되고 자율적인 사적 존재들의 사회이다. 이는 이기주의를 뜻하며 이것의 자기실현은, 이기주의의 실현이다. 로마서 주석에서 바르트가 말한바, 이러한 사회는 소유의 범주, 재산의 획득과 증식이 지배하는 사회이다.[1] 이러한 사회는 평화가 없고 갈등과 적대관계 만 존재한다.

 

또한 화해되지 못한 사회는 인간이 사회적 힘에 의해 지배 받고 현실에 복종할 수 밖에 없는 관료주의화 된 사회이다. 또한 이러한 사회는 부자유한 사회이며 소유의 범주가 지배함으로 분배투쟁을 불러 일으킨다. 개인적 이기주의는 집단적 이기주의를 낳으며 이는 계급이기주의로 이어진다. 결론적으로 화해되지 못한 사회는 결국 자유와 평화가 없는 사회를 말한다.



2) 화해되지 못한 사회의 출현 형태로서의 자본주의

현대 자본주의의 특징은 화해되지 못한 사회의 특징과 일치한다. 자본은 인간들의 행동과 사고가 지향하는 사물이며, 자본주의에서 이 자본은 인간 존재의 회전축을 이루는 만물의 척도이며 중심이다. 여기에서 인간의 소외와 물화가 생겨난다.

 

[자본의 지배] 자본은 자본주의에서 인간을 지배하는 사물이다. 자본소유의 획득과 증식을 본질로 갖기 때문에 결국 소유의 축적은 자본의 본질이 된다. 소유의 획득과 증식은 그 자체가 목적이며 이러한 소유로서의 자본은 결국 다른 사람들을 노예화한다. 자본의 진정한 소유자는 자본 그 자체이며 자본은 현대 사회에서 곧 화폐로 존재하게 된다. 화폐자본을 지향하는 인간의 소외와 물화를 초래하게 하는 힘이다.

 

[자본과 노동자의 소외] 돈 혹은 자본은 사적 소유로 획득되지만, 그것은 항상 사회적 노동과정의 태두리 안에서 생기고 증식된다.

노동과정 내의 자본의 기능을 살펴보면, 고용자들노동자들과 달리 자본과 관계를 맺는 반면 노동자들은 살아가기 위해 노동에 의존하지만 자신의 시간과 노동력 그리고 자기 자신 외에는 어떠한 재산을 제공할 수가 없는 자들이다. 여기서 노동력을 팔 수 밖에 없는 노동시장이 형성되고, 고용자들은 노동자들에게 노동을 제공하는 대신 자본과 생산수단의 소유자가 된다. 결국 노동자들도 노동의 의미를 노동 자체가 아니라 노동의 임금으로 생각하는 노동의 금전적 가치 자본주의적 사고에 빠질 수 밖에 없게 된다.

 

이와 같이 노동과정에 참여하는 자들인간의 생활욕구와 인간 자신을 섬겨야 할 노동을 버리고 노동의 대가(代價)를 섬긴다. 노동이 금전가치로 전락하면서 노동의 물화가 이루어진다. 이는 노동자의 노동의 소외이며 동시에 노동자의 자기 소외을 의미한다.

 

이러한 자본에 대한 노동자의 의존은 노동자와 고용자의 실제적 관계에 의존하게 되고 여기서 불평등한 노동계약[2]과 자본가의 착취[3]가 생겨나고 노동자는 진정한 의미의 노동[4]으로부터 소외된다.

 

[자본과 고용자의 소외] 바르트는 계급투쟁의 개념을 위로부터의 계급투쟁[5]아래로부터의 계급투쟁[6]으로 이해했으며 결국 프롤레타리아의 계급이기주의는 부르주와의 계급이기주의에 대한 반항으로 생각했다. 고용자에 의한 계급투쟁은 노동자와 고용자의 관계에서 친구-적의 경쟁관계, 독재자와 노예의 억압관계, 그리고 노동과 고용자를 단지 노동자 자신의 이해관철의 수단으로서만 섬기는 고용자와 노동자의 관계의 관료주의화 등으로 정의된다.

 

고용자의 소외는 그가 노동자와 맺는 관계의 성격에 관해 기만 당한다는 점에서 드러난다. 착취계급투쟁을 합리화하면서도 이 관계의 현실을 인정하지 않는다. 고용자는 이익경제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부정함으로써 이를 정당화한다.

 

또한 자본가들은 다음과 같은 주장을 한다. 생산수단의 사적소유의 권리는 결코 침해 될 수 없다, 고용자는 가장 우수한 노동자이며, 그의 특권은 그의 유능함에 근거한다, 인간들 간의 경쟁은 경제적.기술적 발전의 원동력이다, 자본주의는 더 낫게 개선되었고, 자본주의가 망하리라는 예언들은 적중되지 않았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에 대해 바르트는 경제적 현실을 은폐하는 것이라 비판했다. 이러한 은폐에서 고용자의 소외가 일어난다고 그는 생각했다. 1)고용자는 그의 이익이해와 부르주와적 계급이기주의 때문에 그와 노동자의 관계의 비인간성을 더 이상 파악하지 못한다 2)고용자는 그 자신의 상황에 관한 자기 기만에 사로잡히는데, 이것은 노동과정의 조직에 심대한 결과를 미친다. 그 원인은 노동자는 고용자에게 그의 이익이해의 도구이기 때문이다. 고용자는 자본을 섬긴다. 이는 돈과 소유의 증식으로 표현되는 그의 이기주의를 섬기는 것이다. 결국 자본의 노예가 되려고 하지 않는 자본가도 바로 노예가 된다. 고용자와 자본의 관계는 물화의 과정에 빠져든다. 고용자도  결국 자본의 도구가 될 수 밖에 없다.

 

그러나 바르트는 인간으로서의 고용자를 불신하려고 하지 않았다. 그의 비판의 목적은 오히려 자본의 지배와 자본주의는 화해되지 못한 사회의 출현 형태로서 그 속에서 일하고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에게 상처를 입힌다는 사실을 보여 주려는 것이다. 그의 비판은 자본이 노동자와 고용자를 지배할 수 있게 만드는 상황을 겨냥한 것이고 자본주의의 원리를 겨냥한 것이다.

 

[자본주의와 국가] 국내의 계급투쟁은 국제적인 전쟁정치로 뒤바뀐다. 전쟁은 더 큰 경제적 권력을 획득하기 위한 국가들 간의 계급투쟁이 된다. 전쟁산업은 많은 부존자원을 소모하게 하고, 또 더 많은 수요를 만들어내기 위해 새로운 전쟁을 일으킨다. 국가의 위기는 1)국제적으로는 경제적 이해의 도구가 되며(자본주의적 제국주의) 2) 국내적으로는 더 이상 만인 대 만인의 투쟁(홉스, Thomas Hobbes 15881679)과 강자의 약자 억압의 억제를 위한 도구로서의 역할을 감당하지 못하고, 거꾸로 강자의 약자억압을 위한 도구로 전락하는데 있다.

 

[자본주의의 현실과 그 합리성] 사물성에 대한 비판 : 1) 만약 자본의 획득과 증식이 의미 있는 이성적 행위라면, 그렇다면 모든 자본가의 소유,특권 등도 이성적이다. 사물성은 사회 안에서 지배하는 사물의 척도에 따라 사회를 조직하고 그 속에서 행동한다(만약그렇다면의 합리성)  2) 관료주의적 합리주의는 형식적인 합리주의이며, 이는 자본의 지배의 영향을 받는 사회의 제반 관계를 가능한 한 효율적으로 만드는 것만을 추구한다. 여기서 사회는 하나의 큰 사무실로 되고 사회는 관료지배로 변한다. 인간은 노동의 목적을 스스로 설정하지 못하고 단지 자본에 의해 주어진 자본의 증식에 필요한 수단 만을 만들어 낸다 3) 사물의 합리성은 하느님의 합리성(ratio), 하느님과 인간 간의 계약의 합리성, 화해역사의 합리성과 맺는 사물의 관계로부터 생겨난다. 그러나 화해의 합리성에 상응하는 인간 행동의 이 합리성을 자본주의는 제시할 수 없다. 자본의 지배는 하느님의 인간 사랑의 이성에 거역하기 때문에, 비이성적인 것으로, 세계의 무질서와 인간의 혼란(confusion hominum)의 표현으로 나타난다.(자본주의의 비합리성)

 

결론적으로 바르트는 현대의 자본주의적 사물성이 불충분한 합리성이며 또한 인간의 휴머니티에 매우 해로운 합리성이라고 비판한다.

 



2.  화해된 사회의 희망으로서의 예수 그리스도


1)  화해된 사회의 개념

[화해되지 못한 사회의 혁명적 변혁으로서의 사회의 화해] 예수 그리스도의 화해 활동에 근거하여 사회의 화해는 사회의 존립기반의 혁신,역전 및 혁명, 그 형태의 갱신을 뜻한다. 화해는 화해되지 못한 것과 화목하게 지내는 것, 악한 사회와 올바른 사회를 평화롭게 조정하는 것을 뜻하지 않고 하느님의 혁명이 일어남으로 가능하다.

 

[하느님 나라와 화해된 사회] 화해의 역사에서 화해의 신학적 자리는 화해의 포괄성구원의 미완에 있다. 화해되지 못한 사회에서 인간은 주인이 되려 하지만 결국 인간이 생산한 주인 없는 힘의 노예가 된다. 그러나 화해된 사회 안에서 인간은 더 이상 주인이 되려 하지 않고 이 되려 한다. 인간은 하느님께 순종하면서 능동적 주체성을 통해 이웃을 섬기고, 결국 그러한 섬김의 행위 속에서 주인이 된다.

 

이러한 화해된 사회는 구원 속에서 오고 있는 하느님 나라와 질적으로 구분된다. 화해된 사회의 실현은 예수 그리스도의 파루시아(Parousia,재림)의 중간 형태의 역사의 요소이고, 중간시대의 화해가 구원 속에서 궁극적으로 승리한 것이 아니라 아직 유보된 것이다.

 

[자유로운 인간들의 공동체로서의 화해된 사회] 사회의 화해는 자본주의 지배가 초래한 인간존재의 소외와 물화의 제거에 의해 이루어 진다. 여기서 하느님이 인간에게 선사한 자기 규정의 자유, 인간 존재의 능동적 주체성이 그 권리를 되찾는다. 노동은 이러한 인간의 자기 정립에 속한다. 인간은 더 이상 노동과정의 단순한 대상이 아니라 노동의 주체로서 사물들을 지배하고, 역으로 사물들은 이러한 인간의 행위를 섬기게 된다. 화해된 사회는 자본이 아닌 인간이 주인이 되는 사회이며, 인간의 자유와 인간들 간의 평화가 있는 사회이다.

 


2)  민주주의와 사회주의의 기본가치들과 화해된 사회의 목표의 친화성

 

여기서는 화해된 사회의 구체적인 정치적 목표설정 다룬다.

 

[후기 바르트의 민주주의 이해와 사회주의 이해]

시민공동체의 민주주의적 질서가 자유와 평화를 만든다. 민주주의의 특징은 1)시민의 평등과 연대성 2)아래로부터 건설된 시민 공동체이다. 그러나 이러한 민주주의적 사회가 하느님 나라와 동일한 것은 아니다. 이와 같이 사회적 진보나 사회주의도 세계의 구원에 관해 결정을 내리지 못한다. 그 결정은 인간의 모든 무신성과 불의에 맞선 하느님의 혁명에서 나온다. 바르트에 의하면 사회주의[7]는 사회의 노동질서를 비교적 더 낫게, 더 인간적으로 조직하려는 시도를 뜻한다.

 

결론적으로 바르트는 민주주의와 사회주의, 이 둘을 상대적으로 더 낫고, 더 인간적인 사회질서에 다 함께 속하는 것들로, 사회적 민주주의의 구성요소들로 이해했다. 사회적 민주주의사회는 민주적이면서 동시에 사회주의적인 사회이다. 이 둘은 서로에게 각각 봉사한다.

 

[지금까지의 민주주의 모델과 사회주의 모델에 대한 바르트의 비판]

바르트는 지금까지의 민주주의는 그에 상응하는 사회적 내용, 즉 사회주의가 부재한 형식적 민주주의였으며, 지금까지의 사회주의는 국가나 정당이 부르주아의 지배를 대신한 국가 사회주의에 지나지 않는다라고 비판했다. [8] 특히 국가 사회주의에서는 노동과정의 지도가 자본가에서 국가로 넘어갔으며, 인간을 자본의 목적의 수단이나 도구로 삼는 자본주의의 불의가 계속될 뿐이다. 국가 사회주의에서 강력한 정당은 새로운 권력엘리트로 떠올랐고, 지배하고 먹고 노는 소수의 이익에 따른 전체주의적 국가질서와 사회질서가 수립되었다.[9]

 

바르트의 이 두 가지 사회체제에 대한 비판은 신학적.정치적 비판[10]에 근거하며 그의 사회적 민주주의의 구상은 이 두 가지 체제를 넘어서는 제3의 길이다. 그가 말한 이 제3의 길은 제2차 대전 후 독일의 재건과 무관하지 않으며, 새 독일은 민주주의적이면서도 사회주의적인 것이 되어야 한다는 그의 염원이 이에 담겨있다.

 

[사회의 소외와 물화, 그 자본주의적 출현형태에 맞선 반대운동으로서의 민주주의와 사회주의] 민주주의와 사회주의는 세계와 하느님의 화해, 화해된 사회와의 친화성을 보여준다. 왜냐하면 그 기본 가치들(자유-평등-형제애 또는 자유-정의-연대성)은 하느님의 화해역사의 목표와 또한 그에 상응하는 인간의 정치적 목적설정과 목표설정과의 친화성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민주주의와 사회주의는 바르트의 의미에서 중간시대에서 하느님이 인간에게 요구하는 자유의 세계 내적.상대적 실천이다.

 

바르트는 사회적 민주주의와 민주주의적 사회주의를 위한 투쟁을 세계와 하느님의 화해, 화해된 사회에 상응하는 것으로 규정했기 때문에 민주주의와 사회주의를 인간의 사회적 소외의 자본주의적 (그리고 국가사회주의적) 출현형태에 맞선 반대운동으로도 여겼다.

 

 



[1] 사적 존재의 자율은 움켜지고 취하고 획득하는 것으로서 이는 다른 사람들을 굴복시키고 방해하고 강탈하는 것이다.

[2] 노동계약: 노동자와 고용자 간의 자유로운(?) 합의. 그러나 노동계약에서 노동자와 고용자 가느이 평등은 실재하지 않는다. 이는 고용자가 자본의 소유자로서 노동자보다 월등한 우월권을 갖기 때문이다. 이 계약은 결국 고용자의 자유로운, 자신이 좋아하는대로 이루어진다. 형식적으론 평등하나 내용적으론 불평등한 노동계약이 이루어진다. 고용자가 경제적 약자의 노동이 받는 금전가치를 결정하기 때문이다. 결국 노동계약은 노동과정의 자본주의적 조직 안에서 비인간성의 가리개가 된다. 노동계약은 노동자와 고용자의 불평등을 은폐하는 것이고, 아울러 이를 이데올로기적으로 위장하는 것이다.

[3] 착취: 불평등한 노동계약은 경제적 이해의 논리에 따라 결국엔 고용자에 의한 노동자의 착취를 초래한다. 노동과정은 경제적 강자, 즉 생산수단의 소유자에게 돌아가는 이익의 추구와 획득에 입각해 있다. 생산수단의 소유자의 이익의 동기는 인간에 의한 인간의 억압과 착취를 낳는다. 결국 노동자는 자본의 힘에 내 맡겨지고 자본의 힘은 노동자의 사고와 행동도 결정한다. 여기서 노동자는 진정한 노동으로부터 소외된다.

[4] 바르트는 진정한 노동은 인간 자신의 노동, 즉 노동과정에의 그의 실제적 협력노동자의 생활 욕구에 있다고 생각한다.

[5] 고용자에 의해 저질러지는 노동자의 착취의 구성요소

[6] 경제적 현실 자체의 구성요소

[7] 바르트는 사회주의는 ㄱ. 노동의 목표와 방법을 진정한 인간의 욕구에 맞추는 일, .경쟁적 투쟁과 계급투쟁의 지배가 없이 노동을 인간들의 사회활동으로 형성하는 일, .노동과정에의 참여를 동지적 토대 위에서 규정하고, 노동과정을 경제적 민주주의를 지향하도록 형성하는 일을 포함해야 한다고 이해했다.

[8] 이는 화해의 개념에 대한 바르트와 레닌의 이해의 차이점에서 더 잘 이해된다. 바르트는 철저히 헤겔의 전통에 서서 긍정적으로 화해와 변혁을 일치 시켰고 그와 함께 화해를 전체의 구원으로 이해한 반면에 레닌은 헤겔의 유산을 현저히 무시한 채 화해를 순전히 부정적으로 사회 변혁에 대한 대립, 계급대립의 둔화와 동결 및 프롤레타리아의 항복으로 낙인 찍었다. 이러한 부정적 화해이해는 프롤레타리아 계급이기주의를 독립적인 제도로 영속하게 했으며 그것은 분파주의와 분열을 다시금 정당화하는 사회적 토대를 제공했다. 국가사회주의가 요구한 화해, 이익의 동일성은 박탈당했으며 국가사회주의도 결국 자본주의처럼 적대주의적이고 화해되지 못한 사회의 한 출현형태로 머물게 되었다.

[9] 바르트는 제2,3차 인터내셔날과 같은 노동운동이 부르주아적 계급이기주의에 대항하여 그 프롤레타리아적 계급이기주의를 제시할 줄 밖에 몰랐다고 비판한다. 바르트에 의하면 이러한 계급이기주의도 인간의 소외의 표현인 것이다. 결국 노동운동이 지배관계와 종살이 관계의 교환 만을 목적으로 해왔다. 정당이 운동 대신에 옛 부르주아적 사회의 지배집단이 소유했던 역할과 권력을 넘겨 받았을 뿐이다.

[10] 바르트의 민주주의 이해와 사회주의 이해가 갖는 신학적.정치적 상관 관계 : 1)정치는 하느님이 인간에게 선사한 자유의 실천을 중시한다. 인간의 자유,자율결정,능동적 주체성은 모든 정치의 의미와 목적이다. 2)정치는 인간 존재의 소외와 물화의 억제, 주인없는 권세들의 종살이로부터의 해방을 중시한다. 결국 모든 정치의 목적과 임무는 인간존재의 관료주의화와 이질적 규정의 철폐이다. 3)능동적 주체성, 능동적 행동이란 관료주의적 흥정과는 달리 자기 스스로 목표를 설정한다. 자기 스스로 목표를 설정함도 이웃을 위함이 아니라 이웃과 더불어 설정함이다. 4)자유로운 행동, 능동적 주체성은 변혁과 동일하다. 능동적 행동은 앞을 지시하며, 역동적이고 역사적이다. 자유로운 인간은 예수그리스도의 예언의 역사에서 협동 함으로써 역사를 만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