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진흥아트홀 10주년 기념전 고백confession과 표현expression(2008.2.26~3.29 / 진흥아트홀 )의 전시 서문입니다.
고백confession과 표현expression
문화와 선교의 관점으로 본 기독교 미술
채야고보
“예술이 인간의 문제를 주제로 삼는다면, 예술은 언제나 어느 정도 신학을 포함하고 있다.”
“예술이 말로 표현되는 신학적 통찰에 선행하며, 신학적 통찰을 형상화한다”
-테오 순더마이어
“표현된 것은 이미 초월된 것이다. “
“예술가는 종교를 거부한다고 할지라도 종교를 탈피할 수 없다. 왜냐하면 종교가 궁극적으로 관심하는 존재의 상태이기 때문이다.”
– 폴 틸리히
들어가는 말
기독교예술이란 무엇인가? 기독교인에 의해, 기독교인을 위한, 기독교적 주제의 작품만이 기독교예술일까? 비기독교인에 의해 제작된 기독교적 내용의 작품이지만 그 작품이 많은 기독교인들의 삶에 감동을 준다면 우리는 그런 작품을 어떻게 분류해야 할까? 예술은 그냥 예술이지 예술에 ‘기독교’라는 말을 붙이는 것이 오히려 문제가 되는 것일까? 톨스토이가 말한 것처럼 ‘선과 악’이라는 이분법적인 잣대를 예술 작품에 적용하는 것이 실제로 간단한 문제일까? 이미지 해체적인 현대미술은 악하기 때문에 기독교미술에서는 배격해야만 하는 것일까? 기독교예술은 늘 성경적 텍스트만을 주제로 삼아야 하는 것일까? 이와 같이 어떤 것이 예술이냐라는 예술에 대한 담론만큼이나 기독교예술에 대한 정의도 결코 쉽지가 않다. 이미지에 대하여 우호적이지 않은 개신교의 분위기에서 여러 예술 장르 중 특히 ‘이미지image’를 사용하는 ‘미술’에 대한 담론은 더욱 복잡한 양상을 띤다. 이미지에 대한 확고한 교리를 갖고 있는 동방정교회나 이에 대하여 우호적인 가톨릭과 달리 텍스트text 중심의 개신교적 분위기에서 미술이나 이미지 담론을 전개하는 것은 결코 쉬운 문제가 아니다. 이는 개신교가 강세인 한국의 기독교도 결코 예외가 아니다. 그 결과 한국 교회에서 미술과 이미지 담론은 늘 뒷전으로 밀려난 것이 사실이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도 최근 몇 년 동안 기독교 작가들과 단체를 중심으로 기독교미술에 대한 논의가 양적으로 많은 진척을 보이는 것은 참 다행한 일이라 할 수 있다. 한국 기독교의 성장에서 늘 외면 받아 왔던 기독교미술이기에 많은 이들의 관심을 끈다는 것은 기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그러한 논의들의 이면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아직까지도 칼빈주의신학이나 북유럽의 개혁주의신학의 한계에 머물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텍스트 중심의 한국 개신교의 분위기에서 당연한 결과일 수도 있지만 다양한 신학적 접근이 부족한 것이 너무 아쉽다. 왜냐하면 미술과 이미지 담론은 그 특성상 텍스트text와 컨텍스트context를 분리해서는 결코 성립할 수 없기 때문이다. 즉 다시 말해서 기독교미술에 대한 정의는 성경이라는 텍스트에 문화라는 컨텍스트를 접목시킬 때 객관성을 담보할 수 있다는 말이다.
그래서 필자는 이 글에서 기독교미술에 대한 두 가지 관점을 소개하고자 하는데, 그 하나는 ‘선교신학’적 관점이고, 다른 하나는 ‘문화신학’적 관점이다. 물론 전자는 테오 순더마이어에게 후자는 폴 틸리히에게 각각 그 이론적 뿌리를 둔다. 그들의 관점은 예술 담론에서 개혁주의적이고 복음주의적인 텍스트 중심의 신학이 놓치기 쉬운 컨텍스트, 즉 ‘문화’와 ‘선교’라는 커다란 틀을 우리에게 제시해줄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예술이란 화두를 미술에 국한시켜 한국기독교미술에서 나타나는 ‘고백’과 ‘표현’이라는 두 가지 특징들을 살펴봄으로써 한국 기독교미술의 현재적 위치를 가늠해보고자 한다. 이러한 방법들을 통해 기독교예술, 특히 기독교미술에 대한 일반의 이해를 넓히고 어느 정도 기독교미술에 대한 가이드 라인을 제시하고자 한다. 물론 이러한 방법은 소경이 코끼리를 더듬듯 부분적인 것일 수 밖에 없지만, 거대한 실체를 모르는 상황에서 실체에 접근하는 다양한 방법 중 하나로 유효할 것이다.
1. 예술은 사건이다.
‘예술은 사건이다’.
이를 기독교적인 언어로 다시 말하면 ‘예술은 선교’이다. 선교는 인간의 역사와 문화 속에서 하나님의 섭리를 발견하고 증거하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선교는 인간의 역사와 문화와는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다. 그러므로 문화의 한 부분인 예술은 역사적 사건이며 동시에 선교적 사건이다. 인간이 자연 상태에서 벗어나 삶의 목적과 이상을 갖고 만들어낸 유무형의 모든 것이 문화라고 한다면 학문, 종교, 예술, 도덕, 과학 등은 문화라는 넓은 테두리에서 서로 상관성을 갖는다. 예술과 종교를 결코 분리해서 논할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틸리히의 상관관계적 방법론에 힘입지 않더라도 예술 작품을 이해하고 해석하는 데에는 많은 요소들이 필요함을 우리는 안다. 어떤 작품이 만들어진 당시의 시대적 상황과 그 작품이 미친 영향력, 그 작품이 가지는 역사적 위치, 그리고 오늘날의 관점에서의 재해석과 분석 등이 필요하다. 이는 한 작품이 결코 작품 자체로만 해석되지 않는다는 것을 말해준다. 우리가 기독교미술을 논하는데 있어서도 이러한 관점은 유지되어야 할 것이다. 이를 정리하면 크게 두 가지가 된다. [1]예술에 대한 선교적관점과 [2] 예술에 대한 상관관계적 관점이 그것이다. 이 둘은 상호보완적인 관계에 있다.
[1] 예술에 대한 선교적 관점: 예술이 선교적 사건이라면 예술 작품과 행위 속에는 하나님의 섭리와 성령의 역사가 나타난다는 것이다. “예술이 인간의 문제를 주제로 삼는다면, 예술은 언제나 어느 정도 신학을 포함하고 있다.” 는 테오 순더마이어의 말처럼 모든 예술 작품 속에는 기독교적인 해석의 공간이 많이 자리하고 있다. 형식적으로 종교 예술의 범위를 넘어 현재 진행되고 있는 모든 예술 분야에서 인간의 삶 속에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섭리와 성령의 역사의 ‘흔적’을 찾는 것. 이것이 선교적 관점에서 ‘사건’으로써 기독교예술을 해석하는 관점이다. 선교에는 ‘고백’과 ‘선포’라는 개념이 이미 들어있는바 기독교예술에서도 이러한 점이 포함돼야 할 것이다.
그러나 ‘문자’나 ‘말’에 의한 ‘고백’과 ‘선포’와 달리 예술은 ‘상징’을 통한다. 상징은 타자를 해석에 참여시키고 예술의 다의성을 다의적인 방법으로 해석할 여지를 남긴다는 것이 특징이다. 물론 예술에 반드시 해석이 따를 필요가 없을 경우도 많다. 한 작품 앞에서나 자연의 경관 앞에서나 우리는 때때로 아무런 해석도 필요 없이 깊은 감동에 빠질 때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러한 순간을 제외하고 현실 속에서 이성적으로 모든 작품들은 다의성 속에서 해석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예술의 속성이 원래 다의적이기 때문이다. 코에 걸면 코걸이 식의 해석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면 이 해석에는 어느 정도 역사와 문화 전반에 걸친 해석의 틀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예술에서 선포되고 고백되는 모든 것들은 상관관계 속에서 해석되어야 한다. 이것은 기독교미술에 대한 두 번째 관점으로 연결된다.
[2] 예술에 대한 상관관계적 관점: 예술이 선교적 사건이라면 그것은 반드시 문화적인 콘텍스트context 속에서 이야기되고 해석되어야 한다. 예술 자체가 다의적 성격을 갖기 때문에 문화적인 상관관계 속에서 기독교예술도 그러해야 한다. 종교나 텍스트라는 틀 속에서만이 아니라 인간 전체 삶을 아우르는 문화라는 테두리 속에서 말이다. 그러므로 예술의 해석에는 다문화와 역사적 이해가 필수이다. 예술이 가지는 에큐메니즘적 특징이 여기에 있다. 포스트모던의 문화적 콘텍스트 속에서 예술은 예술, 종교는 종교라는 식의 이분법적인 구별은 그 힘을 상실한다. 사건은 단지 사건 하나로만 끝나는 것이 아니다. 오늘날의 생태문제를 예로 들면 그것은 더욱 명확해진다. 인류가 당면한 온난화문제와 생태문제 앞에 우리는 다국적, 다문화적, 다종교적 접근이 필요하다. 그것은 우리 국가만의 문제가 아니며 우리 종교와 우리 민족만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최근에 ‘지구촌’이란 전 인류와 생태계를 아우르는 용어가 등장한 것도 이와 맥을 같이 한다. 많은 크리스천들은 현대미술의 급진성에 대하여 도덕적인 우려의 말을 쏟아낸다. 그러나 그러한 현대미술 속에서 현대인의 상실된 존재의 실존적 아픔에 대해 논하려 하지 않는다. 현대미술은 현재 ‘성령의 전도된 가치’ 속에 놓여있다. 현대미술은 끊임없이 이러한 전도된 가치의 모순을 드러내고 고발한다. “표현된 것은 이미 초월된 것이다”라는 틸리히의 말처럼 그들은 표현하고 드러내면서 인간 실존의 아픔을 종교적 영역에까지 호소하고 있는 것이다. 표현된 것은 이미 신의 영역에 닿아있다. 성령께서 역사하는 공간이 바로 여기에 있다. 물론 윤리적, 종교적 이유에 의해 경계되어야 할 작품들도 많지만 현대미술 전반에 흐르는 인간 실존적 고백들을 교회는 무시하지 말아야 한다. 예술작품을 하나의 윤리적이며, 종교적인 틀에서만 볼 경우 예술은 늘 피고인의 신세를 면하지 못할 것이다. 예술 속에 역사하시는 성령의 역사를 인정한다면 우리는 그 속에서 예언자적인 시대의 아픔과 비전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것이 선교와 예술 앞에선 교회와 우리들에게 남겨진 과제이다.
2. 고백과 표현
우리는 문자와 말로 된 고백과 표현에 너무 익숙하다. 그러나 문자와 말은 늘 구체적인 해석을 요하고 그 해석에 다의성을 배제하는 경향이 있다. 예를 들어 우리는 ‘어머니’는 문자 그대로 ‘어머니’이지 또 다른 의미를 갖는 것을 꺼려하는 경향이 있다. 예술이 다른 점이 여기에 있다. 물론 예술도 ‘해석’을 요구하지만 반드시 하나의 해석만을 고집하지 않는다. 그것은 예술이 다의적이기 때문이다. 이는 예술의 속성 중 하나인 ‘상징성’ 때문인데 ‘상징’은 분명 어떤 실재를 지향하지만 늘 한가지 지향성을 갖는 것은 아니다. 해석의 다의적 접근에 의해 다양한 의미가 산출된다. 예술이 다른 장르에 비해 ‘자유롭다’는 것은 이러한 다의적 상징체계 안에 있기 때문이다. 예술은 하나의 ‘정답’을 요구하지 않는다. 특히 미술에서는 이러한 경향이 더욱 두드러진다.
말이나 글보다도 시각적 ‘이미지’는 이성을 사용하는 해석보다도 먼저 직관을 요구한다. 직관적인 인상을 작품에서 받으면 그 다음에 이성적 해석이 뒤따르게 된다. 한 작품의 해석과 직관적으로 느낀 인상이 차이가 난다 해도 별반 문제될 것이 없다. 그것은 ‘보는 자觀者’에 의해 그 작품에 대한 많은 해석 중 하나를 더하는 것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미지’는 결코 하나의 지향성을 갖는 상징 만을 고집하지 않는다. 오래 전 인류가 만들었던 라스코 동굴의 벽화는 오늘 날 우리가 그것을 해석하는 것과 그 당시의 사람들이 해석하는 것에 분명 차이가 있다. 두 가지의 해석 모두 유효하다. 과거의 해석 만을 고집한다면 더 이상 라스코 동굴의 벽화는 오늘날 우리와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과거 로마의 사형 틀로 사용된 ‘십자가’는 당시에는 공포의 상징이었지만 현재 우리에게는 구원의 상징이 되었다. 상징은 시대에 따라 문화에 따라 변화한다. 이러한 상징은 예술가들에게 중요한 무기이다.
기독교미술가들은 ‘상징’적 방법으로 자신의 신앙과 세계관을 ‘고백’하고 ‘표현’한다. 어떤 이들은 ‘고백’과 ‘선포’에 집중하고 어떤 이들은 자신의 느낌과 경험, 생각들을 ‘표현’한다. 전자는 ‘신앙적 표현’에 후자는 ‘창작적 표현’에 각각 비중을 둔다. ‘고백’은 작가의 신앙을 중심으로 작품을 통한 신앙의 ‘고백’과 ‘감사’ 그리고 ‘선포’에 중점을 둔 작품들에서 나타나는 특징이다. 여기에서는 작품이 지향하는 방향성이 작가의 신앙의 대상, 즉 ‘하나님’이 된다. 신앙적 관계성은 ‘수직적’이다. ‘표현’은 예술적 표현에 중점을 두며 다양한 주제를 작품을 통해 표현한 작품들에서 나타나는 특징이다. 여기에서는 작품의 지향성이 다방면으로 나타나는데, 예를 들어 가족, 자아, 관계, 존재, 사랑, 사물, 실존 등 신앙의 ‘수평적’ 관계를 나타낸다. 그러나 이러한 ‘고백’과 ‘표현’은 불가분의 상관관계를 갖는다.
‘고백’은 기독교미술의 가장 중요한 특징 중 하나이다. 텍스트 중심의 개신교 신앙에서 ‘고백'과 ‘선포'가 지니는 의미는 이미지 자체보다 앞선다. 그림의 이미지는 단지 ‘고백’을 위한 보조적 역할이며, 음악이나 미술 등과 같은 예술은 ‘고백’과 ‘선포’를 위한 도구일 뿐이다. 현재 한국기독교미술에서 진행되는 한 축이 바로 이러한 ‘고백’적 성격을 띤 작품들이다. 그들이 표현한 이미지는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 ‘상징’체계를 갖고 있기는 하지만 대부분 그 의도가 쉽게 이해된다. 왜냐하면 ‘문자적’이고 ‘설교적’ 요소들을 분명히 담고 있기 때문이다. 문자적 상징이 다의성을 띠기가 어렵듯이 ‘고백’적 작품에 나타나는 이미지들의 해석도 다의적이지 않을 경우가 많다. 예를 들어 십자가를 모티브로 한 작품에서는 해석이 다의적이기 어렵다. 십자가는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구원을 상징적으로 지향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고백’적 작품에는 개신교의 예배적 요소들이 함축되어 나타난다. 그림의 의미는 ‘메시지’가 되고, 그림의 느낌은 ‘찬양’이 된다. 문자로 기록되고 선포되는 복음이 그대로 이미지로 형상화한 것이다.
‘표현’적인 요소는 최근의 한국기독교미술에서 나타나는 특징이다. 현대 미술이 그러하듯이 이러한 작품에서는 대상의 ‘재현’보다는 작가의 ‘표현’에 더 집중한다. 여기서 말하는 ‘표현’은 제 1차 세계 대전 이후의 독일 ‘표현주의’의 특징과 거리가 멀다. 인간 내면의 표현에 집중하는 것을 넘어 주변의 일상적인 것들로부터 작가 내면의 세계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요소들을 표현적 소재로 삼기 때문이다. 신앙의 고백적인 요소보다 여기에서는 자연스럽게 작가들의 기독교적인 세계관이 더 중요시 된다. 가족, 사회, 자연, 도시, 이웃, 사물, 존재와 실존 등에 대한 작가들의 기독교적인 관점이 그대로 반영된다. 상징체계는 다의적으로 나타난다. 예를 들어 어떤 작가가 표현한 빈 의자나 책상 등은 더 이상 재현된 이미지의 의미에 한정되지 않는다. ‘빈 의자’는 쉼 또는 안락, 권위 또는 권력, 가정의 행복 또는 이별 이라는 다양한 해석이 가능해진다. 그 ‘빈 의자’를 보는 사람의 관점에 따라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다. 이별을 경험한 사람은 그 빈 의자에서 쓸쓸함 또는 외로움을 느낄 수 있고, 지쳐있는 자에게는 ‘쉼’을 상징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해석은 보는 자와 시대적 문화적 상황에 따라 다의적으로 나타난다.
‘표현’적인 작품의 또 다른 특징은 기독교인의 삶의 즐거움과 고통 등을 ‘솔직’하게 표현한다는 것이다. 우회적인 방법을 사용하지만 작가 자신들의 얘기를 숨김없이 드러낸다. 여기에서 작품은 작가와 대중의 만남의 경계선에 위치한다. 그렇기 때문에 ‘표현’적인 작품들은 ‘고백’적인 작품들에 비해 기독교미술로 분류하기에 어려움이 많다. 왜냐하면 표현 양식상 현대 미술과 구분이 모호하기 때문이다. 또한 작가가 반드시 기독교인이어야 하는가라는 문제도 생길 수 있다. 예를 들어 ‘가정’의 삶에 대한 아름다움을 표현한 작가가 있다고 하자. 그러나 그가 꼭 기독교인이 아닐 경우도 있다. 그의 작품은 기독교적인 가정관을 담고 있는데 정작 그 작가 자신은 기독교인이 아니다. 이럴 경우 우리는 그의 작품을 어떻게 정의하고 분류해야 할까? 독일의 선교신학자인 테오 순더마이어는 현대 미술에 대한 더 넓은 선교적 관점을 제시한다. “예술이 인간의 문제를 주제로 삼는다면, 예술은 언제나 어느 정도 신학을 포함하고 있다고 하겠다.” 또한 문화신학자로 유명한 폴 틸리히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예술가는 종교를 거부한다고 할지라도 종교를 탈피할 수 없다. 왜냐하면 종교가 궁극적으로 관심하는 존재의 상태이기 때문이다.” 예술가가 ‘인간의 자기 해석’과 ‘궁극적인 삶의 의미의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접근하는 한 그의 작품은 충분히 ‘기독교예술’로 분류될 여지를 이 두 신학자는 남겼다. 이러한 관점은 종교와 예술을 분리하는 이중적 관점을 지양하고 모든 것을 ‘상관관계’ 속에서 설명할 때 가능한 것이다. 예술과 종교는 서로 같다고는 할 수 없지만 서로 뗄래야 뗄 수 없는 불가분의 관계 속에 있다고 할 수 있다. 둘 다 존재에 대한 지향성을 갖기 때문이다. 이런 관점에서 양식적으로 기독교적 세계관을 담고 있는 작품들은 기독교 미술로 분류될 여지가 생긴다. 물론 논란의 여지는 여전히 존재한다. 이에 대한 논의의 확대는 이 글의 성격을 넘어서기에 여기서 줄인다.
나오는 말
“해석이 없다면 실재도 없는 것이다”
미술사가 곰브리치의 말이다. 우리가 대상을 해석하는데 ‘선입견’의 영향을 절대 피할 수 없다는 말이다. 우리가 기독교미술을 논하는 데 있어서도 이러한 지적은 유효하다. 여러 상관관계 속에서 작품을 해석하고 분류하는 데는 우리의 다양한 선입견이 작용한다. 예를 들어 ‘칙칙폭폭’이란 기차 소리는 어디까지나 우리의 언어와 문화 시스템 속에서만 그렇게 표현된다. 다른 언어 구조와 문화를 가진 나라에서는 기차 소리가 결코 ‘칙칙폭폭’이 아니다. 기독교미술에 대한 해석이나 분류도 이러한 제약과 무관하지 않다. 지엽적이고 제한적일 수 밖에 없다. 보편적이고 절대적인 정의가 불가능하다는 주장이 여기서 설득력을 얻는다. 그러므로 기독교미술에 대한 정의나 분류는 보다 열린 담론의 장 속에서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선교’와 ‘문화’적 관점이 필요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문화와 국가의 경계를 넘어, 사회와 종교의 경계를 넘어, 상호 관계성 속에서 담론을 펼쳐야 한다. 바울의 ‘십자가 신학’의 형성이 유대교 보다는 이방종교와의 대립 속에서 더 확고하게 형성된 사실은 우리에게 많은 교훈을 남긴다. 그것은 기독교적인 것이 무엇인지를 확실하게 보여준 사도 바울의 업적이었다. 그것은 십자가가 다른 종교와 문화를 넘어 기독교의 확고한 상징으로 자리매김하게 했다. 이와 같이 ‘기독교미술’에 대한 담론도 다양한 문화적 경계를 넘는 담론의 장에서 정의되어야 할 것이다. 그것의 차이점과 유사점들이 상관관계 속에서 자연스럽게 드러나도록 말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한국기독교미술을 ‘고백’과 ‘표현’으로 정리한 것은 나름 의미가 있다. 물론 이 두 가지가 모든 기독교미술 작품을 대표하는 특징이라고 단언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문화와 선교라는 커다란 맥락에서 이 두 가지의 특징이 존재하는 것 만은 사실이다. 현재 ‘표현’적인 작품들이 강세를 보이면서 기독교미술의 주제와 소재도 더욱 다양해져 가고 있다. 양식적으로 일반 미술과의 구별이 무의미할 정도로 그 경계 또한 모호해진 것이 사실이다. 그렇기 때문에 기독교미술에 대한 담론이 무의미한 것이 아닐까 하는 우려의 목소리도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기독교미술의 존재론적인 담론을 포기할 수는 없는 법이다. 아무리 모든 것이 상관관계 속에 얽혀있다 하더라도 각각의 존재 가치 자체를 포기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모든 존재는 존재함으로 그 의미가 있다. 기독교가 역사 속에서 다양한 문화와 종교와 만나면서 대립과 수용의 관계 속에서 자신의 위치 찾아왔던 것과 같이 기독교미술도 그러한 과정 가운데 놓여있다. 기독교미술이 다양한 문화적 사회적 대화의 가능성을 열어놓아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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