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S.Sugirtharajah, POSTCOLONIAL CRITICISM AND BIBLICAL INTERPRETATION, Oxford University Press, New York, 2002
/ Translated form English by James Chae
2부: 포스트식민주의의 편견들
제7장 전환기의 해석학: 디아스포라와 해석
내가 바라는 모든 바는 지도가 없는 그와 같은 땅을 걷는 것이다.
(잉글리쉬 페이션트, 온닷제 1993: 261)
나는 우리가 ‘h-o-m-e’을 찾는 것을 시작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버섯들의 합창, 고투 1997:4)
나의 책들이 있는 곳이 바로 나의 집이다. (리스자드 카푸친스키)
반쯤은 진지하고 반쯤은 유머러스하게 디아스포라적 상황의 분위기를 잘 표현한 ‘믿음 지키기’라는 영화의 다음 장면을 생각해보자. 에드워드 노턴이 연기한 가톨릭 사제 브라이언 핀은 순결서약에도 불구하고 사랑에 빠진다. 그러나 그의 꿈의 소녀는 그의 절친한 유대교 랍비인 친구 제이크 스키람과 관계를 맺고 있다. 밤새도록 술판을 벌린 후에, 핀은 자신의 열정을 뉴욕의 어느 아일랜드식 술집의 한 아시아계 바텐더에게 털어놓으며 자신의 마음이 무너진 것을 애통해 했다. 여러분이 상상하기엔 혼란스럽겠지만, 그 아시안계 바텐더가 하는 말에 주의해보자. 그가 말하기를 ‘오 이런, 내가 무엇을 알겠습니까? 나는 반은 펀잡비 시크교도이며, 4분의 1은 타밀 분리주의자입니다. 나의 누이는 뉴 저지주의 유대인 의사와 결혼했고, 나를 이 술집에서 일하게 한 나의 조모는 아일랜드계 수녀였습니다. 그것은 길고 긴 얘기지요.’ 핀은 무척 당황했습니다. ‘당신은 유대인 매부를 둔 시크-가톨릭-무슬림이라구요? 라고 그가 물었다. ‘그럼 그렇고 말고요. 그것은 날 매우 혼란하게 하지요. 그래서 나는 다이어네틱스란 심리요법책을 읽습니다.’
최근 몇 해 동안 국경 넘기, 경계선 위반하기, 추방, 송환, 이민과 이주, 비영토화, 사이 공간에서 살기 등의 가능성과 문제들이 넓고 다양한 분야에서 ‘디아스포라’의 주석 하에서 급선무의 일로 점점 증가하고 있다.
디아스포라의 정의
디아스포라는 종교적 뿌리를 가진 세속적인 용어이고, 시작단계에서 이 용어는 유대인과 크리스천 범위에 한정되었다. 이 용어의 사용은 원 유대인-크리스천 틀로부터 너무 급속히 변화하여 ‘유대교와 크리스천 신학적 연구의 대다수의 학자들 조차 그 낱말의 대중성과 그들 규율 밖에서의 그 용어의 사용을 전혀 인식하지 못했다’라고 마틴 바우만이 말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바우만 1997: 386)
비록 유대인과 크리스천의 생각 안에도, ‘디아스포라’라는 용어는 많은 지속적인 정의에 대한 논쟁과 변천을 거듭해왔다. 그 용어의 기원을 연구하는 로빈 코헨은 성서적인 상황에서부터 그리스적 상황으로 이 용어에 대한 위상의 변화를 주장했다. 그는 그 용어가 성서적인 의미와 관련되기 전에, 그것은 고대 그리스 시대의 그리스인 사이에서 아시아 하층과 지중해 지역의 식민화를 설명하는 ‘이주와 식민화’란 의미였다고 주장했다. 가난, 이동, 그리고 이산의 원인이 되는 전쟁 등에도 불구하고, 디아스포라의 주요한 특징은 ‘약탈, 군사적 정복, 식민화 그리고 이주를 통한 확장’으로 보여진다(코헨 1999:2). 그렇지만, 코헨의 주장은 논박되어왔다. ‘디아스포라’란 용어는 기원전 5세기에 철학자들과 헬레니즘 작가들 사이에서 널리 유포되었는데, 이는 ‘이산과 해체, 그리고 서로간에 더 이상의 관계성이 없는 다양한 부분으로 분리되는 과정’이란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디아스포라’라는 용어는, 유대인과 크리스천의 신학과 역사 속에서 사용될 때, 이동, 고난, 그리고 고통과 같은 의미를 함축함으로 새로운 총체적인 강조가 요구되는데, 그것은 바로 ‘희생’이다. 그 용어는 일반적으로 ‘약속된 땅(팔레스타인)’ 밖에 사는 유대인들을 의미하는데, 이는 세가지 맞물린 의미를 가진다- 이산의 행위, 이산 되어 넘는 땅, 그리고 이산 된 사람들. 희생적 표상을 불러일으킨 그 근원의 사건은 기원전 597년에 유대인들에게 있었던 포로 이송이었다. 오직 하나의 이송만 있었다는 일반적인 믿음과 달리 세 번의 이송이 있었다. 어떤 의미에서는 유대인 공동체의 분산은 기원전 722년에 북왕국의 인구를 메소포타미아로 분산시키는 원인이 되었던 앗시리아의 침공 때 시작되었다(2Kgs.15:29). 대중적 표상으로 널리 알려진 두 번째 이송은 기원전 597년 경에 있었는데, 이때 바빌론의 느브갓네살왕은 유대왕 여호아킴과 많은 관료 집단들을 포로로 잡아갔다. 그러나 그로부터 10년 후인 제데키아 치하에 강력한 반란이 있었다. 이전에 관대했었던 것과는 다르게 느브갓네살왕은 자비를 보이지 않았고, 유다왕을 포로로 잡아갔으며, 상류층을 바빌론에 정착하도록 강요했다. 그리고 유대땅의 모든 것들, 즉 금, 은, 동 그리고 성전에서 사용되는 물병과 그릇까지 뿌리째 가져갔다. 사람들은 약속의 땅으로부터 도망치도록 강요받었다: ‘그래서 유다는 자신의 땅으로부터 추방되었다’ (2Kgs. 25: 21 and also Jer. 52:12-14). 그러나 모두가 추방된 것은 아니었다. 사실, 포도주 만드는 자들, 경작하는 자들, 그리고 공예가들과 같이 그 땅의 가장 가난한 거주자들을 포함한 많은 수가 남아 있었다. 세 번째 추방은 기원전 582년에 발생했다. 그러나 일찍이 시작된 바빌론의 침공과 이스라엘의 멸망은 이스라엘의 추방의 역사 속에서 규정된 본질적인 순간이 되었다. 예루살렘은 유대인들에게 상징적 중심지가 되었는데, 그 곳에서 그들은 방향성과 궁극적인 귀환을 발견한다. 포로상태의 그들의 외로움과 슬픔은 시편 137편에 기념비적으로 기록되어있다:
우리가 바빌론의 강변 곳곳에 앉아서, 시온을 기억하면서 울었다.
그 강변 버드나무 가지에 우리의 수금을 걸어 두었더니,
우리를 사로잡아 온 자들이 거기에서 우리에게 노래를 청하고,
우리를 억압한 자들이 저희들 흥을 돋우어 주기를 요구하며,
시온의 노래 한 가락을 저희들을 위해 불러 보라고 하는구나.
우리가 어찌 남의 나라 땅에서 주의 노래를 부를 수 있으랴? (시 137:1-4)
앗시리아와 바빌론의 침공과 연관된 추방과 분산으로서의 디아스포라에 대한 설명은 그것의 고통과 고난이란 표현을 포함해서 곧 바뀌었다. 알렉산더 대왕 후손들의 식민화 노력은 로마제국의 다양한 사람들을 섞는 원인이 되었다. 칼 루드윙 스치미트의 관점에 따르면, 그것은 현재 추방이란 의미에 더해서 ‘자발적인 이민’(스치미트1964: 100)까지 포함하는 디아스포라의 의미의 확장에 기여했다,는 것이다. 애가적 풍과 함께, 하나님의 백성의 분산에 관한 거룩한 심판으로써 예언자적 비난과 저주 또한 사라지고, ‘디아스포라’는 ‘헬레니즘적인 낙관주의’와 조율하기에 이른다(스키미트 1964: 100). 셉투아긴트septuagint에서, 그 말은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벌하시는 추방의 심판으로 설명되는 자비 없는 히브리적 표현의 뚜렷한 엄격성을 가리는데’ 사용되곤 한다(스키미트 1964: 100). 이 말의 초기의 설명이 지정학적인 추방과 소외를 가리키는 한편, 그 새로운 정의는 팔레스타인 너머에 사는 유대인 인구들의 정치적, 사회적, 그리고 종교적 차원을 포함하고 있다.
이후에 유대인들이 살기위해 디아스포라로 가면 갈수록, 이스라엘의 이방인으로서의 지위에 대한 개념에 반드시 영향을 미친다. 한편으로는 그 지위를 확대하는 쪽으로, 또 다른 반대편으로는 그 지위를 축소하는 쪽으로 말이다. 초기 기독교도 뒤따랐던 종말론적이고 묵시록적인 유다이즘으로 인해, 추방을 바빌론 포로의 회상으로 그리고 직접적으로 팔레스타인 땅과 함께 연관시킴으로, 결국 헬레니즘적 유다이즘은 자신의 길을 가게 되고, 점차적으로 역사적인 결속력이 약화되었다. (스키미트 와 스키미트 1967:848)
디아스포라의 개념은 크리스천들이 이를 유통시킨 기원후 1세기에 또 다른 변화를 겪는다. 그리고 그 시대의 신학적 요구에 부응하도록 재 작업됐고, 기독교 종말론적 사고에 의해 확정되었다. 야고보서의 첫 문장 – ‘분산되어있는 12 지파에게’-는 크리스천 교회가 새로운 하나님의 백성의 상징임을 지시하는 하나의 징표이다. 복잡한 문제에 대해 자세히 들어가는 대신에 야고보서와 베드로서에 언급된 크리스천 교회가 유대인들 또는 이방인들을 구성하는지, 또는 이들 중 하나를 디아스포라인으로 선발하든지 간에, 중요하게 깨닫는 것은 기독교적 용도에서 그 용어는 종교적 감각을 요구한다는 것이다. 현재는 하나님의 초기 약속의 성취로써 자신을 볼 수 있는 크리스천 공동체는 임시적인 주거인으로서의 자신들의 새로운 지위를 설명하는 것으로 그 용어를 수정한다. 그 크리스천 교회는, 하나님의 종말론적 목적을 성취하는 도구들이라는 관점에서, 떠돌아다니는 순례자와 분산된 공동체로 여겨진다. 그들이 찾고자 하는 집은 이 땅의 집이 아니라 하늘에 있고 아직 도래하지 않은 집이다: ‘그러나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으니, 우리는 그 곳으로부터 구주로 오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고 있습니다’(Phil. 3:20; 또한 Heb.13:14: ‘실상 우리에게는 이 땅 위에 영원한 도시가 없고, 우리는 장차 올 도시를 찾고 있습니다’). 세상에서 추방된 크리스천의 삶은 예수의 메시지를 유포시키는 씨앗으로써 기능 한다. 크리스천들이 자신들에 대해 설명하곤 하는 그 말은, 모든 곳이 집이지만 진정한 집은 어디에도 없다는 의미의 파로이코이paroikoi-‘이방의 거주자’(1 Peter 2:11)-이었다. 존 엘리옷의 관점은 그의 베드로전서 연구에서 그 편지 속의 설교자는 그 용어의 현대적 느낌에서 망명한 자는 아니지만, 망명자들 보다 훨씬 나은 상태가 아닌, 적은 시민권을 지닌 지방의 가난한 자로서의 설교자라는 것이다(엘리옷 1981: 46). 왜냐하면 그들의 그리스도 영접 때문이기도 하지만, 베드로전서는 종말론적 운명과 목적을 언급함으로써 제 2의 집에 대한 그들의 필요로 본질을 바꾸어 놓았다. 그들은 그들이 보다 넓은 세계적이고 구원사적 중요성을 가진 구별된 방식으로 살고있다는 것을 알았다. 제국을 건너 다른 사람들과 그들이 나누는 삶에 대해 가톨릭적이고 보편주의적인 어떤 것이 존재한다. 그렇지만, 조직적인 지위를 획득한 후에 그 초기 크리스천 운동은 체류하고 떠돌아다니는 초국가적인 성향의 하나님의 백성이란 개념을 천천히 망각했다. 크리스천들은 아직도 파로이코이-‘이방의 거주자’로 불려지지만, 그 용어는 거주자들과 소교구민들로서 그들의 새롭게 수립된 지위를 뜻하는 새로운 의미에 다다른다. 알란 크레이더는 그 바뀐 상태에 대해 주목한다:
그것은 (이방의 거주자) 이제 거주자, 소교구민, 백성을 의미했는데, 그들의 차별성은 그들의 이웃과 같지않다는 것이 아니라, 지도자들이 다른 믿음을 받아들인 다른 나라의 백성들과 같지 않다는 것이었다. 모든 사람들이 크리스천이었던 곳에서는, 그들의 최고의 헌신은 더 이상 다국적인 하나님의 가족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은 오히려 일반적인 인종과 장소를 함께 나누는 사람들에게 있었다. 그러므로 초기 기독교의 국제주의는 시들해졌고, 하나님은 우선적으로 그 자기 자신만의 국가와 연합하기에 이르렀다. (크레이터 1994: 29)
한때 최변방의 공동체와 임시적인 체류의 정신을 담은 완전한 패러다임으로 보여진 크리스천 공동체는 점차 자신의 하위성을 잃었고 현재 중심으로 이동하고 있는 것이다.
포스트식민주의와 디아스포라
한때 그리스인과 유대인의 분산으로 묘사되곤 하던 디아스포라는 용어는 현재 식민주의 계획의 중요한 결과인 다국적인 이주에 기초한 수평적 경험과 같은 다른 의미로 더 넓게 사용된다. 이러한 의미에서 첫 번째 그 용어의 적용은 대서양을 건넌 아프리카 노예들의 이동에 있을 것이다. 그와 같은 사용의 첫 번째 주창자는 유대인의 국외추방과 식민지 노예 거래를 통한 사하라 사막 이남의 아프리카인들의 분산 사이에서 역사적 일치들을 본 조지 쉐퍼슨이었다. 그것은 집을 되찾고자 하는 추방당한 이들과 함께하는 강제적인 퇴거로 보여진다. 그 이후로 많은 디아스포라가 있어왔는데 몇 가지만 말해보면, 아일랜드인, 타밀인, 아르메니아인 등이 있다. 우리가 이미 본 것같이, 역사적으로 디아스포라의 개념은 문자적으로 서술된 영적인 경험으로써 유대인의 추방을 언급하는 것이다. 그것의 보다 최근의 추방에 대해 언급하는 포스트식민주의적 사용은 유대-크리스천적 사용과 다르다. 최근의 논의에서 본래의 유대 종교적 배경을 넘어서 그것을 세속적, 은유적 단계에 두는 한 경향이 있다. 포스트식민주의 논의에서 디아스포라는 중요한 핵심어가 되었다. 포스트식민주의 연구의 핵심개념으로서의 디아스포라의 편입은 그 용어의 사전적 기원과 함께 시작되고, 그 다음엔 식민주의에 의한 디아스포라에 대해 말하는 것으로, 처음엔 노예 거래에 관한 것이고, 이후엔 식민지의 부족한 노동력을 필요로 하는 세계로 3백만 인디언들을 배로 실어 나르는 계기가 된 계약직 노동력의 소개에 의한 노예제 폐지에 의한 것으로 나아간다(Ashcroft, Griffiths, and Tiffin 1998: 68-70). 적응과 경향면에서 강력하게 세속적인 포스트식민주의 논의는 그 원래의 유대적-크리스천적 환경을 무시하고, 그 개념을 식민주의적 배경에 위치시킴으로, 따라서 그 용어의 세속적 지위를 지지하는 것을 촉진한다.
비록 그리스 용어 ‘디아스포라’가 분산이란 영어로 번역되지만, 포스트식민주의적 집필에서 그것은 보다 섬세한 함축적 의미를 가진다. 그것은 많은 장에서, 즉 시나 소설에 쓰여진 많은 사람들과 많은 경험들 가운데 본국에 있는 존재의 양의성과 모순성에 관한 것이다. 그것은 인간의 넓게 연결된 운동의 실제를 통하여 영토적으로 제한된 민족적 문화의 개념에 도전한다. 포스트식민주의적 용어로 디아스포라는 다양성과 차이에 기초한 정체성들의 형성을 암시하며, 모국에 대한 경건한 개념과 재결합하는 용어로 유용하게 보이지 않는다. 그것은, 공통의 기억과 역사를 만들기 위해 단련하면서 동시에 모든 디아스포라가 똑 같지 않다는 것을 인정하는, 모국에서 새로운 장소로의 여행들에 대한 이야기이다. 그들이 짜맞추려 노력하는 그 공통의 일반적 이야기는 매우 논쟁하기를 좋아하는데; 그것은 다른 문화들, 역사들, 구술 이야기들, 종교들, 의식들, 문학작품들, 철학들, 그리고 사회-경제적 배경 등을 심오하게 반영한다. 중요하게도, 사실 다국적 이주의 이러한 형식들은 문화와 영토적 소유 사이의 관계단절로 귀착하는 것이 아니다. 만약 어떤 것이든, 추방된 사람들은 종종, ‘집’에 대해서 명확한 표상같이, 증대된 갈망을 경험하는 경향이 있다. 집의 개념은 누군가 뒤에 두고 온 모국과 누군가 새로운 ‘집’을 세우기 위해 노력하는 호스트 랜드로 날카롭게 나누어진다. 반드시 새로운 디아스포라가 해야 하는 것은, 동양과 서양이 만날 가능성이 없이, 모국의 종교적이고 문화적인 전통을 주최국의 복잡하고 다양한 문화들 속으로 엮을 가능성도 없이, 동양은 동양이고 서양은 서양이라는, 키풀링적인 패러다임에 도전하는 것이다. 디아스포라적 작가들, 간략히 언급한다면 V.S. 나이파울, 부치 엠메체타, 한니프 쿠레이쉬, 칼 필립스, 그리고 영국의 벤자민 제퍼나이아, 바라티 무커르지, 주움파 라히리, 에이미 탄, 그리고 미국의 창래 리, 그리고 캐나다의 M.G. 바싼지, 오스트렐리아의 아딥 칸 등에 의해 생산된 문학은 얼마나 성공적으로 이들 작가들이 그들의 모국의 기억과, 그들의 이중성, 그리고 그들의 경계적 지위 등에 대해 탐험할 수 있는지를, 그리고 획일화에 대한 압력에 저항할 수 있고, 귀속과 고착의 보수적인 생각에 도전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원본과 개인들의 근절들: 디아스포라와 성서적 해석
디아스포라적 문학이 비판적으로 시선을 끄는 문학적 영역에서와 같지 않게 디아스포라적 성서적 해석은 아직도 유년기에 머물러 있다. 단지 소수의 성서학 학자들이 이 임무에 관여하고 있지만, 그들의 작업에 대한 어떤 비판적 평가를 하기에는 아직 너무 이르다. 그렇지만 우리가 이미 주지하고 있는 바와 같이, 디아스포라적 담론의 부분으로써 아프리카계 미국인을 포함하는 움직임이 있고, 그 현재의 아프리카계 미국인 해석학은 디아스포로라의 논제들에 초점을 맞추는 것 보다 성서 속에서 흑인의 존재와 정체성을 회복하는데 더욱 흥미를 가진다. 그렇지만, 디아스포라적 해석의 방법 속에서 지금까지 드러난 것을 통하여 우리는 적어도 세가지 종류의 약속을 볼 수 있다. 그 첫번째는 디아스포라적 경험을 이론화하는 시도를 수반한다. 이러한 임무에 독자적으로 종사하는 사람으로 쿠바계 미국인인 페루난도 세고비아가 있다. 그는 ‘해석학적 디아스포라 – 약속과 다름의 히스페닉 아메리칸 해석학’과 다음의 것들을 포함하는 읽기의 전략을 주창했다: (a) 문화적 특수성으로서의 본문의 인식과 분석; (b) 범보편주의적인 것이 아닌 사회적이고 역사적으로 조건 지어진 것에 위치하는 육과 피로서의 독자들; (c) 본문과 독자들 양자의 비판적 분석; 그리고 (d) 유럽중심적 연구를 제거함에 따라서 모든 해석자들이 동등한 목소리를 내는 전세계적 담론을 만들고, 그들 자신의 고유한 사회적 위치와 다름으로부터 말할 수 있는 성서적 연구의 탈식민화(세고비아 1995: 58-9). 세고비아가 제안하는 것은 모든 성서 해석의 목표가 되어야 하지만, 무엇이 이러한 디아스포라적 본성 또는 내용에 대하여 그렇게 특별한지는 명확하지 않다. 세고비아가 아직도 그의 신학적 가설에 기초한 성서해석적 예들로부터 작업을 하고있는 이래로, 비록 시간적으로 적절하고 중요한 중재이긴 했지만, 그의 제안은 하나의 개념에 머문다.
두 번째 임무는 성서 안에서 현재의 근절성을 비준하고 정당성을 갖기 위해 비교 경험들을 드러내는 것이다. 예를 들어 탈출, 도주, 그리고 약속의 땅에 도착하는 성서적인 유대인들의 경험들은 디아스포라적 공동체들의 삶 속에 반복적이며 유사한 것으로 나타난다. 그러한 현재 미국에 정착한 해석학자들의 열매들 중 가장 초기의 인물 중 하나인 정영리는 1950년대 전쟁으로 피폐한 한국으로부터 미국으로 온 그의 경험을 사막을 떠돌아다닌 유대인의 경험과 유사한 것으로 회상한다: ‘그러한 유대인들처럼, 나 역시, 40년 동안이 아닌 4년 동안이지만, 사막을 경험했는데, 그 기간 동안 나는 집이나 재산도 없이 한 장소에서 다른 장소로 배회했었다. 내가 굶주림과 육체적 고통에서 생존한 것은 기적이거나, 아니면 하나님의 은혜에 의한 것이었다. 내가 미국에 온 것은 약속의 땅에 이른 이스라엘의 도착과 같다’(리 1999:39). 이와 유사하게, 일본계 미국인 데이비드 폴 나가노는 그와 같은 출애굽 경험으로부터 그와 그의 다른 일본계 미국인들이 2차 세계 대전 중에 처했던 매장의 모욕에 대한 하나의 적절한 패러다임을 이끌어낸다(나가노 1999:77).
필리핀계 미국인 엘리자 페르난데즈 또한 그러한 출애굽 이야기를 사용하지만 이를 다르게 해석한다. 그는 그러한 이야기에 수반되는 ‘해방’, ‘자유’, ‘정복’, 그리고 ‘하나님의 선택’과 같은 주제에 관심을 두지 않고, 이 이야기를 가나안(필리핀)에 만연했던 것과 같은 가난과 체념으로부터의 해방으로 보거나, 또한 부와 기회의 땅인 이집트(미국)를 향한 탈출로 본다. 이집트에서 탈출하거나, 시작하는 전통적 이야기와 다르게, 페르난데즈의 해석학적 전략은 출애굽 이야기가 가나안/필리핀에서 시작하여 이집트/미국에서 끝나는 것이다. 이러한 개정된 구조에서 그 이야기는 이집트의 모세의 공로와 함께 시작하지 않고 창세기에 나오는 야곱과 그의 후손들, 특히 요셉과 그를 이집트로 이끈 사건들로부터 시작한다. 그러므로 그의 모세는 사람들을 이집트로부터 인도해 내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이집트로 인도한다. 성서적인 이스라엘과 다르게, 필리핀계 미국인들은 이집트로부터 떠날 의도를 가지지 않고, 대신에 그들은 새로운 땅에 그들의 운명을 던지기로 결심하며, 다소 미완성적이고, 다소 악몽 같은 그들의 꿈을 그곳에서 가지기 시작한다. 페르난데즈를 위하여 출애굽 이야기가 말해주는 것은 이민과 정착이다. 그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나는 그 이야기가 또한 새로운 땅에 정착하는 과정과 미국에 이민하는 경험과 관련한다는 것을 강조하기 원한다. 그러므로 그러한 이집트로의 대이동의 이야기는 두 가지 측면으로써, 즉 이주(대이동)와 이민(정착)으로 보여져야 한다. 그와 같은 대이동의 관점은 모세와 같은 돌파적인 인물에 의해 인도된 일회성 사건이 아닌 자유를 위한 끊임없는 투쟁으로써 그 이야기의 영속적인 해석과 일치된다. (페르난데즈 2001: 169-70)
쿠바계 미국인 아다 마리아 이사시-디아즈의 경우에는 시편이 이러한 역할을 하는데, 특히 우리가 이미 앞에서 본 것 같이, 시편 137편에서 낯선 나라에서 느끼는 소외감과 모욕감에 대한 그녀의 느낌을 정의했다. 그 속에서 그녀는 원래 그 노래를 부른 이들과 미국에 이주한 한 쿠바인으로서의 그녀 자신과 같은 평행적인 환경을 발견했다. (이사시-디아즈 1995: 149-63)
역사적 사건들을 넘어서서, 다른 디아스포라적 해석자들은 특히, 에스더와 요셉같이, 그들 자신의 근절된 경험을 정당화함으로써 궁정에 진출했던 성서 속의 인물들에서 가치를 찾는다. 에스더는 아시아계 미국인 사이에서 적절한 모델로 여겨지는데, 이는 그녀가 자신의 유대교성을 숨기면서 이방 세계에서 주변인으로서 성공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녀의 정체성을 회복했고, 또한 그녀 자신의 생명의 위험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그녀의 백성들에게 내려진 선고를 바꿀 수 있었기 때문이다(사노 1979: 258-64; 쿠안 2000: 161-73).
영감을 주는 또 다른 성서적 인물은 요셉인데, 그의 이집트에서의 디아스포라적 존재는 분산, 이간, 배신, 고난, 권력과 지배력, 그리고 우연한 성취에 대한 이야기로 보여진다. 쿠바계 미국인, 프란시스코 그라시아-트렌토는 이주한 쿠바인의 이미지를 지지하기 위하여 요셉의 이야기를 사용했다:
바빌론에 있는 예루살렘 디아스포라같이, 미국에 있는 라틴 아메리카인의 디아스포라같이, 요셉은 이집트에서의 자신을 자발적이지 않은 근절의 결과로써 발견하는데, 즉 그것은 그의 유년기와 청년기를 성장시킨 중심으로부터 자기 자신의 형제들의 행위에 의해 쪼개져 떨어져 나와, 새로운 사회에서 가장 주변인의 처지에 놓였다는 것이다 (그의 경우는 외국인 노예와 죄인으로서). 이와 동시에 고대 예루살렘의 디아스포라의 많은 구성원들에 관해서나, 현대의 하바나에 관해서나, 그의 추방된 땅에서의 요셉의 경험은 정착, 동화, 그리고 미미한 생존을 훨씬 넘어서는 성공 중에 하나이다. (그라시아-트렌토 2000: 136)
계속해서 그라시아-트렌토는, 창세기 39-41장에 묘사된 요셉의 상승, 즉 이집트 사회의 중심에 자신을 놓이게 하는 계기가 된, 완전한 무능력으로부터 제한이 없는 권력으로의 상승은 요셉의 디아스포라적 이야기에서 전환점이 된다고 말한다. 그라시아-트렌토는 그가 ‘미국의 쿠바인 디아스포라의 구성원의 관점으로부터’ 그 이야기에 접근할 때 그는 이 장들이 ‘하나의 특별한 방법으로 조명되는’ 것을 발견했다고 주장한다(그라시아-크렌토 2000: 136). 한 이방의 나라에서 이민자들의 투쟁과 고통스런 현실은 하나님의 예정된 추방인 요셉의 경험과 유형학적으로 비교된다. 에스더와 요셉의 이야기가 유명한 이유는 그들이 아메리카 드림을 암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성서적 인물들 양자는 거절당하고 굴욕당하고 그리고 최종적으로 이방 세계에서 그것을 크게 만들 이방인의 모든 보증들을 지닌다.
그렇지만 이러한 연구들이 그와 같은 성서적 인물들로부터 해석학적 영양물을 이끌어내지만 그들은 그 이야기들의 나머지 속에 있는 그 인물들의 양의적 본질을 간과하거나, 성서적 인물들의 역할을 문제 삼는 것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 인물들의 복잡성과 다양성은 단순화되어졌다. 에스더와 요셉 둘은 그들의 사회적-경제적 지위를 지탱해주는 동화를 추구한다. 에스더의 경우, 그 이야기의 식민주의적 배경은 우회적으로만 다뤄진다. 세밀하게 읽기는 그 이야기가 해방적 이야기이기 보다 오히려 생존자의 강령임을 드러낼 것이다. 그것은 비협조와 동화를 주장하는 것이다. 이러한 전략을 사용하면, 에스더는 우연히 왕족으로 편입된 것이고, 모르디게는 식민지 행정부에 임명된 것이다. 동화의 전략은 모두를 위해 좋은 것으로 간주되는 지배사회의 기대들과 가치들에 순응하기를 조장한다. 요셉의 이야기의 도용 또한 문제가 있다. 그 역시 동화되었고, 귀족의 지위에 임명되었다. 그렇지만, 우리가 이미 앞 장에서 본 것과 같이, 요셉은 자신의 기회가 왔을 때 그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일반 사람들에게 보다 강력한 고통을 부과하는데 자신의 특권적 지위를 사용했다. 그라시아-트렌토는 요셉의 착취적인 성질을 증거하는 것으로 창세기 47장을 살펴본다. 우리가 이미 본 것과 같이, 우연한 요셉의 성공은 그의 백성들의 노예화를 이끈다. 디아스포라적 해석에서 이러한 초기의 시도들은 해석의 일에 종사하는 모두에게, 개인의 특정한 관점에 걸쇠를 거는 것으로, 또는 그것을 성서적인 관점으로 광범위하게 초과 투사하면서, 종종 굴복하는 유혹의 먹이가 되기 쉽다. 그러한 간편한 결론과 성서적 인물들의 호의적인 대우는 디아스포라적 해석학이 아직 자기 자신의 해석학적 가정들에 직면하지 못했고, 자기 자신 만의 비판을 제공하지 못했다는 징표이다.
디아스포라적 상황 속에서의 성서와의 세 번째 약속은 성서적 연구의 장으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 문학적 세계로부터 온다. 이와 같은 것은 아미 탄의 한 소설, 조이 럭 클럽으로부터 나온다. 그 소설 속에서 성서는 의미의 전달자로서 간주되는 동시에 또한 성서의 위협하는 힘과 상처 받은 현실로 간주된다. 그것은 소설 속에 한 사건으로 매우 명확하게 드러난다(탄 1990:116-30). 그 소설은 미국에 정착한 다섯 명의 중국인 가족들에 대한 이야기이다. 그 이야기는 구세대인 중국인 어머니들과 새로운 세대인 그들의 딸들의 양쪽 관점으로부터 드러난다. 전자가 과거를 그리워하는 동안, 후자는 중국인과 미국인으로서의 그들의 이중적 정체성과 타협하고자 노력한다. 침례교인이었던 그 어머니들 중 한 어머니는 빙이라는 자신의 아들을 해수욕장 익사사고로 잃었다. 그녀는 한번 자신의 마음에 둔 것은 무엇이든 해내는 능력이란 뜻의 능켄nengken의 여자였다. 그리고 능켄은 침례교도적 믿음에 의해 더욱 강화되었는데, 그 믿음은 그녀에게 모든 것들이 실패할 때 믿음이 그것을 이루게 한다는 것을 가르쳤다. 그러나 그 죽은 아들은 돌아오지 않았다. 그녀는 더 이상 그와 같은 믿음에서 가치를 보지 못했다. 그래서 그녀는 그녀가 늘 가지고 다니던 인조가죽 성경책을 식탁 테이블의 다리들 중 하나를 받치려고 바닥에 두었다. 그러나, 그녀의 딸은 그녀의 어머니가 그 성경책을 매일 저녁식사 후에 깨끗하게 하는 것을 지속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고, 그 성경책은 ‘여전히 깨끗한 하얀색’이었다(탄 1990: 116). 식탁 밑 바닥에 성경책을 놓아둠으로 인해 그 어머니는 동시에 그녀의 과거를 비신화화하고 그녀의 어리석음을 포기한다. 언제든지 누군가가 그 성경책이 거기서 무엇을 하고 있냐고 물을 때면, 그녀의 대답은 ‘오! 저런, 내가 잊었네요’ 였다(탄 1990: 116). 그러나, 다른 집안의 이콘들 같이 그녀는 그 성경책을 깨끗이 했다. 하나의 이콘으로써 그 성경책은 낯선 국가에서 결합성과 영속성을 제공한다. 이방적인 환경에서, 의미 있는 삶을 붙드는 것은 이콘을 품에 안는 것을 포함하는데, 그 이콘들은 힘을 중재하고 연결성과 영속성을 위한 힘있는 자원들을 공급한다. 하나의 이콘으로서, 그 중국인 어머니는 그 성경책의 신비스러운 힘에 위협 받지 않는다. 그녀는 과거에 대한 필요를 깨닫고 그것을 붙들려고 애쓴다. 그렇지만 이와 동시에 그녀는 그녀 자신에게 그 과거에 대한 감상적 집착을 허락하지 않음으로 현재의 이주 생활의 요구들을 결정했다. 그 어머니의 행위가 가리키는 것은 그녀와 다른 디아스포라인들이 그녀같이 과거와 현재의 새로운 비판적 기억을 창조해야만 한다는 것, 그들의 피해자적 지위를 떠나야 하다는 것, 그들의 향수병을 없애는 것, 그들의 어리석음을 포기하는 것, 그리고 종종 자비롭지 못하고, 종종 적대적인 그들의 환경 속에 그들을 계속 머물게 할 지혜의 해석학들을 해결하는 것 등이다. 성경책을 계속해서 깨끗이 하는 것은 새로운 걱정들과 새로운 기회들 양자를 유발시키는 새로운 상황으로써 그 훈련의 한 부분이 된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분리상태들과 양의성(兩義性)들과 함께 구체화하고, 살아가며, 그리고 함께 일하는 것이다.
디아스포라적 해석학: 어떤 표시들
디아스포라적 실존과 현재의 세계화는 인간은 더 이상 하나의 존재가 아니라 다른 존재라는 것을 말해준다. 모든 정체성들은 본질적으로 연합적이고 다층적인데 그 속에서 그들은 친화성의 한 장을 구성하는 것을 추구한다. 한니프 쿠레이쉬는 그의 소설 검은 앨범 속의 인물들 중 하나로서 그것을 진술한다; ‘고정된 자아는 없다; 확실히 우리들의 많은 자아들은 매일같이 녹아지고, 변이하는가? 이 세상에 샐 수 없는 많은 존재의 방식들은 있어야 만 한다’ (쿠레이쉬 1996: 274). 정체성들이 중요하더라도 그것들을 단순히 너무 강조하는 것 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그 임무는 무엇이 정체성들을 설립하고, 무슨 목적에 그것들이 봉사하는지, 무슨 요소들이 그것들을 구성하며 나아가는지를 설명하는 것이다.
비록 사람들이 고정된 삶을 살았지만, 그리고 비록 그들의 삶이 나누어진 가치들과 의미들의 문화적 전체성이란 말로 개념화 될 수 있지만, 성서적 해석학의 기본적인 가정들 중 하나는 해석적 활동과 연합하는 것이다. 성서해석의 중요한 부분은, 그리고 그 문제에 대한 아시아, 아프리카, 라틴 아메리카, 케리비안해 지역, 그리고 태평양 지역 등으로부터 온 대부분의 신학들은, 정착된, 지방화된, 합병된, 그리고 자급자족적인, 정착된 삶에 의해 인도되는 공동체와 함께 그러한 임무를 수행한다. 토착적인 해석학은, 사람들이 한 정착된 삶을 인도했을 때, 그리고 문화적 통합체라는 견지에서 생각했을 때, 칭송받을 한 이유가 된다. 현재, 세계화에 의해 사람들의 삶이 다시 재정립되는 이때에, 그리고 정치적 투쟁들과 자연 재해에 의해, 또는 어떤 경우에는 직업적인 이유에 의해, 사람들의 지속적인 움직임이 있는 이때에, 문화적-특수성의 유사를 찾는 것은 점점 더 어려운 임무인지도 모른다. 토착적인 사람들과 세계화된 사람들 사이의 연결은 오늘날 너무 깊어서 무엇이 토착적이고 무엇이 비토착적인지 결정하기가 점점 더 어렵게 되어가고 있다. 물론, 궁극적으로, 그것의 새로운 다중화적 시각과 함께 디아스포라적 해석학은 지금까지 미지로 남은 그것 자체의 상사(相似)를 던져버려야 할지 모른다. 대중적이고 엘리트적인 단계들 양자에서 문화적 상호 혼합이 있는 때와 지방/세계와 토착민/대도시인의 구분들이 축소되는 때와 동시에, 디아스포라적 해석학은 뿌리내리기에 대한 것이기 보다 더욱 움직임에 대한 것이 된다.
따라서, 디아스포라적 해석학은 ‘집 없음’의 상태를 설명하는 것으로 불려진다. 그것은 정치적이거나 직업적인 환경들 때문에, 아니면 자연재해로 인해 집을 읽게 된 그러한 사람들을 위해 집을 찾기 위한 한 시도이며, 그리고 또한 그들의 역사들과, 언어들, 종교들, 그리고 그들이 그들과 함께 가지고 있는 텍스트들을 위한 집을 찾기 위한 시도이다. 그것은 하나의 세상에서 정착물들 없이 집을 찾는 것이다.
집과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을 시간에 대해 꿈을 꾸는 것보다, 그리고 더욱 더 논쟁할 만한 것이 되어가는 과거를 개간하기 위해 노력하기 보다, 오히려 디아스포라적 해석학의 미래는 해석의 혼종적(혼합적) 스타일을 발전시키는 그 능력에 놓인 것 같이 생각된다. 그것의 타당성은 고대 문명의 잃어버린 신비성을 간청하거나 또는 복음의 순수성을 관리하는 그 능력에 의하지 않고, 비판적 거리를 보증하고 신학적 혼종성의 알레고리를 창조하는 그 능력에 의해 가늠될 것이다. 그 성공은 다양한 재평가를 견뎌내는 것을, 진리의 하나뿐인 전달자임을 주장하기를 포기하는 것을, 그리고 차이들을 만드는 그것의 역할을 재검토하는 것을 기꺼이 수행하기에 달려있다. 불변의 인식론적인 관점도 없고 동질성의 유일한 진리도 없다고 인식하는 것은 필수적이다.
포스트식민주의적 혼종성(혼합성)의 개념은 차이들의 해결에 대한 것이 아니라 차이들을 만드는 힘의 구조를 재검토하는 것이다. 그것은 동화와 동의어가 아니다. 동화는 식민주의자들과 그 이후의 민족주의자들이 주장했던 어떤 것이다. 혼종성은 두 방향의 과정이 있는데, 그 속에서 양쪽 부분들은 상호작용적이어서 결과적으로 새로운 어떤 것이 창조된다. 다양한 상황 속에서 살아가기는 크리스천 정체성을 재형성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와 같은 방법으로 그것은 다른 종교적 담론을 보충하는 것으로써 그리고 종교적 조화와 진리를 찾는 동반자로써 수용될 것이다.
비록 디아스포라적 해석학이 이미 어떤 심오한 것들을 가졌다 할지라도, 말하자면 하이픈으로 이어지고 혼종화된 정체성의 형식들에 대해, 그리고 어떻게 그것들이 개인들과 공동체들 속에서 작동하는지에 대해, 그것은 아직도 성서 연구들 속에서 해석적 전략으로써 문서적 해석의 어떤 혼종적인 형식을 만들어내야만 한다. 제3세계의 성서적 해석학은 아직도 혼합주의에 반대하는, 공공연히 그 전망에서 기독교 중심적이고, 그 크리스천 정신적 지주들을 해방하는데 망설이는, 선교사들의 경고에 붙들려있다. 혼합주의와 혼종성이 동종의 말일지라도, 혼종성 홀로 그것(성서 해석학)에 기여하는 긍정적인 함의를 가진다. 선교적 생각의 이상적인 세계에서는 문화적이고 신학적으로 명확한 경계들이 크리스천 정체성과 크리스천 복음을 유지하고 정당화하기 위해 주요했었다. 이러한 세계관에서 합체하기 또는 상호교류를 위한 어떠한 제안도 복음의 조악화와 붕괴로써 보여졌다. 혼종성은 문화적 교류에서 보다 역동적인 관점을 제시할 뿐만 아니라 또한 식민주의적 지배의 뚜렷한 역사와 식민주의를 환기시키는 경험을 하게하는 현재의 불평등성에 관심을 끈다.
해석학의 좋은 예가 되고 그리고 혼종적인 형태를 만들어 확장시킨 사람이 바로 마하트마 간디이다. 그 당시의 사정에서 그의 힌두교적 믿음의 체액 속에 확고하게 자리한 간디의 해석학은 구술적 전통들 뿐만 아니라, 불교, 자이나교, 그리고 이슬람교 등과 같은 다양한 문헌적 전통들로부터 독창적으로 차용함으로써 더욱 풍부해지고 널리 알려졌다. 그의 다원주의는 상류층의 산스크리트와 비 상류층 전통 양자로부터 차용하는 것을 포함했다. 따라서, 캘커타의 한 선교사들의 모임의 연설에서, 간디는 다양한 종교적 본문들의 본질들을 요약하기 위하여 수드라 카스트로부터 나온 중세의 봉헌 시를 인용했다. 한 자서전 또는 나의 진리와 함께한 실험 이라는 그의 회고록에서 간디는 그 자신의 생각에 대한 실마리를 주었다:
그러나 신약성서는 하나의 다른 인상을 제공하는데, 특히 나의 마음에 직접적으로 다가왔던 산상설교가 그랬다. 나는 그것을 기타와 비교했다. ‘그러나 내가 너에게 말하는데 너는 악에게 저항하지 말라; 그대신 누구든지 너의 오른 뺨을 치면, 그에게 나머지도 돌려대라. 이와 같이 만약 어떤 사람이 너의 윗도리를 가져간다면 그가 너의 외투 역시도 가져가게 하라’라는 그 구절은 나를 셀 수 없을 정도로 매우 기쁘게 했고, 나를 ‘한 그릇의 물을 위해서 상당한 양의 음식을 주어라’는 샤말 밧트의 마음에 놓이게 했다. 나의 젊은 마음은 아시아의 빛인 그 기타와 산상설교의 가르침을 연합하기 위해 노력했다. (간디 1927:51)
간디의 해석학은 두 가지의 가정들 위에 세워졌다. 첫번째, 그는 다양한 종교들은 궁극적으로 하나이고 같은 자원으로부터 나온 것으로 본다. 모든 종교들은 양자간 같고 불완전하다: ‘모든 믿음들은 진리의 현현을 구성하지만, 모두 불완전하고 잘못되기 쉽다. 다른 믿음들에 대한 존경이 우리를 그것들의 결점들에 눈멀게 할 필요는 없다.’ 그 나머지는 모든 종교적 전통들은 상호의존적이고 모든 진리를 담고있는 하나의 종교는 없다는 것이다: ‘세상은, 그러므로 우리도, 우리가 모하메드 또는 우파니샤드의 가르침 없이 할 수 있는 것보다는 오히려 예수의 가르침들 없이는 더 할 수 없다. 나는 배타적인 경우 없이 서로 다른 것들의 상보적인 모든 그것들을 붙들었다. 그들의 진실한 의미들, 그들의 상호 의존성과 상호관계성은 우리들에게 끊임없이 드러나야만 한다’ (엘스버그 1991: 40).
다양한 종교적 전통들로부터 나온 간디의 비협조와 재해석의 생각들은 두 가지 그의 신념들-사탸그라하satyagraha와 모든 종교들의 연합-에서 매우 분명하다. 간디의 생각을 지배하는 중요한 개념들 중 하나인 사탸그라하는, 비폭력주의로 종종 묘사되지만 진리를 위한 투쟁을 의미하는, 다양한 종교적 전통들의 한 아말감이다. 사탸그라하를 위한 틀은 종교적 그리고 세속적 양자의 여러 가지 텍스트들로부터 왔다. 그것은 자이나교와 불교 개념들의 아힘사ahimsa(비폭력)에 의해 영향을 받았다. 그것은 간디가 그의 산상설교 읽기에서 주워 모은 것들, 특히 ‘너의 원수들을 사랑하고, 너를 핍박하는 자들을 축복하라’ 라는 예수의 말씀을 담고있다(마 5:44). 그 개념에 결정적인 그 사심 없는 서비스의 개념은 바가바드기타의 니쉬카마 카르마nishkama Karma 개념으로부터 나왔다. 러시아의 소설가 레오 톨스토이의 절대적 평화주의의 개념 또한 그것으로 엮어졌다. 유사하게 간디의 다측면으로서의 진리에 대한 생각은 부분적이고, 밑그림적이며, 파편적인 우리의 진실의 이해의 본성을 내포하는 자이나교의 아네칸타바다anekantavada의 개념에 의해 영향을 받았었다. 간디는 단순하게 이들 다양한 작가들과 텍스트들을 흡수하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그것들을 해석학적 감각으로 만들기 위해 그리고 그것들을 정치적 목적들을 위해 사용하도록 비판적으로 합쳐 엮고 있었다. 확실히 그는 그들의 생각들에 자극을 받았지만 그는 그 자신의 해석학적 필요들에 어울리도록 그들을 재정립했다.
간디의 방법은 단순하고 직접적이었기에 역사적-비평적 전통에서 성장한 학자들을 두렵게 하곤 했다. 그는 그의 해석학적 임무, 즉 이름하여 ‘우리 주변에서 발생하는 것의 견지에서’란 메시지를 다시 읽는 것, 에 유용할거라고 생각되는 편집하는 단계에서 텍스트들을 선택했다, (엘스버그 1991:41). 그는 그 이야기들의 역사적 배경과 같은 성가신 질문들에 대하여, 즉 용어들의 언어학적 기원이나, 또는 누가 그것들을 썼느냐 조차도, 지나치게 걱정하지 않았다. 그의 선교사들과의 많은 대화들 중 하나에서, 간디는 텍스트들 속의 많은 것들은 현대과학의 빛이 아닌, 영적인 세계에서 직접적 경험들의 형태로써 모든 믿음들에 공통인, 토론의 빛 속에서 반드시 해석될 것을 그들에게 말했다(엘스버그 1991:41). 간디의 해석학에서 혹자는 디아스포라적 감수성-근절과 열림-의 흔적을 발견한다. 그의 토속적 힌두교의 고대적 유산에 뿌리내린, 그는 그렇지만 다양한 종교적 전통들의 영적인 유산들에도 열려있었다. 선교사들에게 한 간디의 충고는 오늘날의 해석학에도 똑같이 연관된다: ‘만약 당신들이 풍부한 경험들의 보물들을 주기위해 왔다면, 이 땅의 보물들을 받으려고 애쓴다면, 당신들의 마음을 여십시오. 그러면 당신들은 결코 실망하지도, 또한 성서의 메시지를 잘못 인도하게 되지도 않을 것입니다’(엘스버그 1991:41). 혼종적 텍스트들은 상속된 크리스천 개념들과 일반적인 해석들에 철저하게 모순된다. 그것들은 순결한 텍스트적 순수함과 진실성의 거짓 개념에 도전하고 저항한다.
다른 신학적 선입견같이 혼종주의는 오늘날의 해석학적 임무 속에서 매우 강력한 이데올로기가 될 수 있다. 하나의 진리, 하나의 세계관, 그리고 하나의 역사 만을 주장하는 더욱 억압적인 담론의 측면에서는, 혼종주의의 포스트식민주의적 방식은 그것과 반대로, 효과적으로 해석학적 어젠다를 통제하기 위해 노력하거나 그것을 소유하게 만들 수 있는, 사탄이 될 수도 있다. 그 경우는 현재 강력하게 남아있지만, 그래도 억압적인 담론들보다 오히려 수용적이다. 치명적인 민족주의와 지방중심주의의 시대에서, 그것의 비판적 통합에 대한 주장과 함께한 혼종주의는 당파주의를 수축시킬 뿐만 아니라 또한 정체성들의 재정의들을 촉진시킨다.
레이 쵸우는 포스트모더니스트적 생각에 의해 당연한 것으로 치부되는 ‘민족주의는 행복한 혼종성의 승인을 뜻하지 않는다는 것’에 대해 비평하기를 경고해왔다. 포스트모던 사전 속의 혼종성은 해방의 잠재성과 민족주의자 생각의 치명적인 형식에 해독제를 지닌 것으로써 정의된다. 민족주의가 고유한 문화에서 불결의 어떤 형식을 근절하는 것을 찾는 동안, 혼종성의 포스트모던 개념들은 식민주의의 문화적이고 정치적인 영향을 숨기는 경향이 있다. 그와 같은 혼종성의 개념은 진행중인 현실인 경제적 어려움, 절망, 그리고 소외 등에 부주의하다(쵸우 1998a: 155).
모든 경계를 넘는 것들이 혼종성을 촉진하는 것은 아니다. 그들의 경험들을 명료하게 하기와 같은 사치를 가지지 못하는 다른 이주 노동자들, 망명자들 그리고 보호소를 찾는 자들이 트럭 속에 가득 실리는 동안, 제3세계 대도시 엘리트들의 몇몇은 쉽게 동질화 될 수 있고, 그들의 혼종성을 찬양할 수도 있다. 그렇지만 또 다른 간부들(엘리트들), 특히 국제적 회사를 위해 일하는 그들은, 더욱 노력없이, 혼종해야 하는 어떤 필요도 없이 문화들과 나라들을 가로지른다.
혼종성이, 토론적 실천으로서, 행하는 것은 정체성의 개념화를 옮기는 것이다. 신뢰할 수 있는 참조점으로써 정체성을 보기보다, 그것은 하나의 다른 ‘인식론적 패러다임을 전환하는데, 그 패러다임 속에는 발단적인 것, 불안정한 것, 불순결한 것, 정체성의 형식을 알게 하는 운동과 유동성이 있다’ (쵸우 1998b: 166). 다중문화주의는 고정된 문화들의 병렬을 내포하는데 반해, 혼종성은 문화들과 그들의 상호작용의 유동적이고 변화시키는 기초와 관련한다. 다중문화적인 사회로써 존재하게 하고 분리되게 하는 것은 한 사회를 위해 완벽하게 가능하다.
한가지 점에서, 그 혼종적 상태는 새롭지 않다. 그것들의 초기의 신학자들 중 하나이며, 실천적 신학의 형식으로써 혼종적 형태를 진지하게 취했던 사람은 뱅갈리인 브라마반데브 우파댜야(1861-1907)였다. 그는 그가 소피아를 썼을 때 혼종적 상태의 본질을 포착했었다:
태어날 때부터 우리는 힌두이고 죽을 때까지 힌두로 남을 것이다. 그렇지만 우리의 신성한 재탄생의 능력에 의한 드비자dvija(두 번 태어남)로써, 우리는 가톨릭적이고, 우리는 모든 세대와 나라들을 품는 결점 없는 공동체의 구성원들이다. 관습과 예절 속에서, 카스트와 사회적 차별들을 지키는 속에서, 먹고 마시는 속에서, 우리들의 생명과 삶 속에서 우리는 진짜 힌두이다: 그렇지만 우리들의 신앙에서 우리들은 힌두도, 유럽인도, 미국인도, 중국인도 아니라 모두를 아우른다. 우리들의 신앙은 그 전체 세계를 채우며 어떤 나라나 인종으로 제한되지 않고, 우리들의 신앙은 우주적이고 중요하게 모든 진리들을 포함한다. (우파탸야 1898: 25)
모두가 집중해야 만 하는 혼종성의 초기 형식들에 세 가지 측면들이 있다. 첫번째, 인도 크리스천들의 자기 정체성을 강하게 하는 것을 비준하는 시험으로써 여겨진다. 인도 크리스천 신학의 바로 그 유물들은, 아니면 인도 교회의 그 당면한 문제를 위한, 인내가 필요한 시기에 그것이 사회에 반응하는 수용력에 의존하는데, 그렇지만 종종 회의적인 비주류의 공동체들은 외국이 기원인 종교에 위탁했고, 최근의 식민주의와 연결되고 융합되었다. 복음과 고유의 문화를 혼합하기는 인도 크리스천들이 인도 문화의 한 부분이라는 것을 보여줬다. 두 번째, 그전의 시도들은 아직도 크리스천 복음의 우수성의 가정 위에 작용했다. 다른 종교적 전통들이 분석되고 설명된 것에 반대되는 척도를 제공한 것은 바로 그 복음이었다. 세 번째, 우파탸야의 제안은 비판적 실천으로써의 포스트식민주의가 제국의 깃발을 내린 이후에 시작되었다는 생각과 다툰다. 식민지 기간 동안에 우파탸야의 글들과 셀 수 없는 다른 글들은 한 토착적 작가가 식민주의적 공격에 직면해서 그 또는 그녀의 정체성을 재형성하기 위하여 펜을 종이에 놓을 때면 언제나, 그 포스트식민주의의 계획은 진행 중에 있었다는 것을 알려준다.
몇 가지 결론적인 언급들
그 디아스포라적 해석의 임무는, 호미 바바의 구절을 사용하면, ‘토종적인vernacular 세계주의자’가 되야 하는 것이다. 바바의 관점에서, 토종적인 세계주의자는, 문화들 사이에서 번역해야 하고, 거대한 민족주의적이고 사회적인 대화들 속으로 들어가기를 시도함과 동시에, ‘지역성’이 그것 자신의 언어로 주장하는 한 위치로부터 전통들을 재검토해야 한다. 그것은 영광스럽게 문화들을 가로지르고, 계몽된 조합을 세우는, 보편주의자들의 인본주의적 생각의 형태들에 의해 영감을 받은 정예의 다양성의 세계주의가 아니다. 토종적인 세계주의자들은 생존의 한 행위로써의 문화적 해석과 함께하는 약속을 만들도록 요구된다. 그들의 특별하고 지역적인 역사들은, 종종 협박을 받고 억압되지만, 중요한 문화적 실천들의 ‘경계들 사이에’ 삽입된다. (바바 2000:139)
경계의 가장자리에 있는 사람들은 선택의 여지가 없이 생존의 전략으로써 사이의 공간을 점령하는 수 밖에 없다. 그러한 갈라진 틈의 공간으로부터 문화적 순결성, 완전성, 또는 자주성을 주장하는 것은 영속적인 상호문화적 교류, 병렬, 질문, 그리고 일탈 등의 혼종적 디아스포라적 상태들보다 별로 중요하지 않다. 토종적 세계주의는 어떤 방랑자와 어떤 이동자로 존재하기의 불명료함에 대한 것이다.
에드워드 사이드는 유량자들, 이주자들, 그리고 소수자들의 가장자리적 위치에서 많은 잠재적인 것들을 본다. 그에게 있어서 그와 같은 사람들은 어떤 결정적인, 계급, 획일성, 그리고 지배권의 권력에 도전할 수 있고, 저항할 수 있는 전망을 제공할 힘을 가졌다:
그렇지만 제국주의의 감금과 황폐에 대한 저항과 반대로 탄생한 지적인 임무로써의 해방은, 정착되고, 설립되고, 그리고 풍토에 적응하게 되는 문화의 원동력들로부터, 그 해방의, 집에서 쫓겨나게 하는, 중심에서 벗어나게 하는, 그리고 유랑적이게 하는 힘들에게로 현재 이동했는데, 오늘날 그 힘들의 육화는 바로 이주자들이다. 그들의 자의식은, 영토들 사이에, 형식들 사이에, 집(고국)들 사이에, 그리고 언어들 사이에 추방당한 지식인들과 예술가들, 그리고 정치적 인물들의 바로 그 자의식이다. (사이드 1993: 403)
디아스포라인들이 새로운 해석학을 만들어내는 특권을 지닌 것과 동시에 유혹들 또한 가지고 있다. 그러한 것은 바로 추방자로서의 그들의 지위를 과장하는 것과 다수자들 또는 주류 지지자들의 이익을 위하는 이민자들이다. 그리고 또 다른 것은 그들이 뒤에 두고 떠나온 고국들에 대하여 이색적인 이미지들을 생산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디아스포라인들은 정형적이고 균질화 하는, 주인-국가의 미디어와 정치인들이 대중적인 영역에 유포시키는 경향이 있는 이미지들에 도전하는 긍정적인 역할을 할 수 있을지 모른다. 이러한 이미지들이 그 이민자 공동체가 다루어지게 하는 방법을 결정하는데 사용된 이래로, 그 방법들은 디아스포라 주체들의 매일의 삶에 대한 그것들의 효과를 가질 것이고, 바로 그 방법에 의해 피난처 찾는 자들이 다루어진다. 이러한 이미지들에 질문하기를 계속하는 것은 중요하고, 그것들을 이상화하거나 낭만화하기 없이 이러한 부정적 묘사들을 수정하는 양자택일의 선택을 구성하는 것은 중요하다.
배제와 공포와 추방의 슬픈 이야기는 단지 그 디아스포라의 이야기의 반쪽만 말할 뿐이다. 이주와 소외는 트럭에 실려가는 망명자들과 황폐케 된 내부-도시 주거지들 속에서 기력이 없이 피난처를 찾는 자들에 의해서보다 오늘날 학문적 영역에서 훨씬 더 얘기된다. 이러한 망명자들에 대해서는, 혼종성과 이동성은 해방의 동인이 아니다. 국경을 넘는 이동과 이주는 종종 가난과 폭력에 의해 촉발되곤 한다. 혼종성을 찬양하지만 망명자들과 피난처를 찾는 자들의 원인을 규명하는 데 실패한 디아스포라적 해석학은 자신의 임무에 실패했다. 해석학적 사명의 힘은 그것이 다루는 원인과 그것이 시스템의 끝을 수용하는 위기에 처한 사람들에게 제공되는 보호를 위해 그것의 최선을 다해야만 계측될 것이다. 그것이 결정적인 문제들을 사람들에게 알리기 위하여 그것의 영역을 확장하는 방법은 그것의 목표들의 정당성에 대한 시험으로써의 행동들과 마주하는 것이다.
포스트식민주의성은 아마도, 점차적으로 수축할 가능성이 있는 세계화된 세계의 넓은 영향들과 경향들로부터 문명과 관습과 구술된 역사와 문학을 제외하는 것이 실현가능하지 않다는 것의 증가된 깨달음의 한 표시일 것이다. 다른 말로, 누군가의 진정한 ‘뿌리들’을 회복하는 것 또는 바로 그 진짜 ‘집’으로 다시 돌아가는 것은 항상 실현 가능한 것이 아니다는 것이다. 사회들이 더욱 다문화적으로 되는 바로 그 때에, 전통들과 역사들 그리고 텍스트들이 뒤섞이거나, 얽히는 곳에서, 어떤 오염되지 않은 순수한 자국적 뿌리들을 위한 탐구는 이해하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위험하다는 것이 증명될 지도 모른다. 그것은 다양한 문화들과 종교들, 그리고 언어들과 함께하는 삶의 일상사에 대하여 복잡한 상태들의 원인이 될지도 모른다. 그것은 일찍이 더 넓고 더 복잡한 문화적 협상과 상호작용의 망에서 자신의 주체를 발견하는 것을 의미한다. 디아스포라적 해석이 지시하는 것은 우리는 다소 골절되고, 혼혈적이며, 이중적이거나, 어떤 면에서 다중적인 정체성들을 수여 받았다는 것이다.
전체로서의 제 3세계는 동질성보다는 다양성에 의해 두드러진다. 그렇지만 현재 문제는: 어떤 것이, 즉 브라질의 통근자들과 버마의 벼생산자들과 한 나이로비의 아파트의 도시 거주자들과 실리콘 벨리의 컴퓨터 기술자들과 다른 아시아인, 아프리카인 그리고 라틴 아메리카인 속에서 존재를 확대하고자 노력하는 샐 수 없이 많은 소작농들, 그리고 서구의 난민 켐프의 활기 없는 피난처를 찾는 자들을 매우 긴밀하게 연결하는 유용한 시스템이냐 하는 것이다. 중요한 삶의 틀들과 정체성의 자원들은 지방적 그리고 세계적 상태의 틈 속에서 일어나는 문화적 장들에서 찾아져야만 한다. 우리는 세계적 상호연결들의 전세계 안에서 거하는 것과 이동하는 것의 상호 관계성에 주의를 집중하는 것을 유도할 필요가 있다. 요구되는 것은 해석학적 공간인데, 그것은 대륙들과 문화들을 가로지르는 사람들의 유동을 참작할 것이다. 그 잠재적 공간들 중 하나가 바로 혼종화된 공간이다. 이 포괄적 공간은 종교적, 민족적, 그리고 민족적 강경론 속으로 난입 된 이른바 배타적인 전망을 피하는 상당히 효과적인 방법일 수 있다.
우리는 에드워드 사이드가 했던 한 질문과 함께 결론을 맺는다. 사실 그것은 12세기 한 수도사, 세인트 빅터의 휴고로부터 나온 것이다. 세드는 그의 문화와 제국주의를 그 중세 사제가 한 말들로 종결 짓는다: ‘자신의 고국이 달콤함을 발견한 사람은 아직도 미숙한 초급자에 불과하지만; 모든 땅이 그의 민족적인 땅인 사람은 이미 강하다’ (사이드 1993: 407). 어떤 면에서 그러한 말들은 디아스포라적 해석의 임무를 평가한다. 그러한 해석자는, 디아스포라적이거나 토착적이거나 상관없이, 토착적인 충동들을 포기하는 것 또는 무비판적으로 세계주의적 가치들을 품는 것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 수도사가 말했던 바와 같이, 그것들을 통해서 일하는 것에 의해 고유성과 자치성을 획득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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