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후감] 거다 러너의‘왜 여성사인가' (강정하 옮김, 푸른역사, 2006, 서울) 를 읽고
페미니즘은 21 세기의 새로운 유토피아적 비전이 될 수 있는가?
채 야고보
인종차별주의, 성차별주의와 같은 계서제의 이데올로기들을 종식시키지 않고서는 인류의 미래를 기대할 수 없다. 계몽주의 이후 20세기까지 남성을 중심으로 이루어져온 사회적 혁명과 변혁은 철저하게 폭력적으로 결말이 났다. 제국주의와 군국주의, 공산혁명과 테러리즘에 이르기까지 폭력적인 혁명적 전복은 또 다른 폭력을 낳았고, 이러한 전복에 의해 창출된 새로운 권력은 또 다른 사회적 폭력을 형성하며 ‘차이’에 의한 차별을 만드는데 기여했다. “폭력적인 전복”이 사회의 희망이었던 20세기는 우리 인류에게 커다란 상처를 남기며 이제 과거 속으로 물러갔다. 그러나 새로운 21세기에도 인류는 20세기의 폭력성을 그대로 유지한 채 신자유주의, 테러리즘, 신제국주의, 핵 위기 등과 같은 새로운 갈등 속에 휘말려 들고 있다. 최근에 북한의 핵 문제는 과거 냉전시대의 쿠바위기 때와는 전혀 다른 21세기의 새로운 갈등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갈등의 근간에는 여전히 남성중심적인 폭력성이 드리워져 있음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어디 하나 비폭력적이고 평화적인 문제 해결의 실마리를 찾고자 노력하는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그것은 북미 양자간의 핵을 담보로 한 기 싸움에서 드러나듯 양자 간에 평화적 대화의 노력은 전혀 부재한 상태이다. 우리들은 오직 힘의 균형을 가늠하는데 급급하다.
거다 러너는 서구문명의 남성중심적인 사회 변혁의 폭력성을 설명하며 이 책 5장에서 언급한 “비폭력 저항”을 21세기의 사회 변혁의 중요한 개념으로 제시한다.
“따라서 사회 변화를 도모하는 데 헌신하는 남성들은 여성에 대한 가부장적 지배에서 얻는 이득을 버려야 한다…중략…나는 페미니즘과 그것의 고유한 전술이 남성과 여성에게 가장 적절한 변혁 철학과 실천을 제공하리라고 믿는다.”
페미니즘의 “고유한 전술”이란, 거다 러너가 이미 언급한 것 같이, 미국의 노예해방운동과 여성운동 그리고 인권운동 등에서 보여진 ‘비폭력, 무저항 주의’를 말한다. 저자는 이러한 비폭력 운동의 중심에 여성이 있다는 것을 강조하며 21세기의 사회 변혁의 비전을 남성과 여성이 함께 이뤄나가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러너가 말하는 페미니즘 혁명은 “전복overthrow”이 아니라 “변혁transformation”이다. 인류의 생존을 위협하는 폭력적 전복을 꿈꾸는 “마초macho” 남성들은 여성들의 “예민함, 설득력, 인내, 평화 애호, 타협적인 권위, 양육과 보존에 관심을 기울이는 능력, 지구와 그 자원 혹은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의 보호 등”을 중시하는 여성성으로부터 교훈을 얻어야 한다. ‘가부장화’ 되어버린 여성을 반대하며, 남녀가 동등한 역사의 주체로서 21세기의 인류의 당면 문제를 풀어가자는 것이 러너의 생각이다. 러너는 그의 유토피아적 비전을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내가 꿈꾸는 세계는 여성과 남성이 가부장적 사고에서 벗어나서 마음이 자유로운 곳이고, 그래서 지배와 서열이 사라진 곳이니, 이것이야말로 진실로 인간다운 세계일 것이다.”
이러한 유토피아는 칼 융이 언급한 Anima(여성성)와 Animus(남성성)가 조화를 이룬 세계와 유사하다. 나 또한 이러한 러너의 유토피아에 동의한다. 그러나 러너의 유토피아가 그렇게 이루어지기 위해 한가지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러너의 ‘가부장제에 대한 비판’이 매우 설득력 있으며, 아울러 제1세계와 제3세계에서도 모두 통용될 수 있는 보편성을 확보하지만 ‘제국주의에 대한 비판’이 결여되어 있다는 점을 지적해야겠다. 남아프리카 여성 신학자 무사 두베가 이미 지적한 것처럼 제국주의는 가부장제보다 더 폭 넓은 상위 개념이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제 3세계 여성은 가부장제와 제국주의 그리고 인종 차별이라는 삼중 고에 시달리고 있기 때문이다. 제국주의는 지리적 한계를 넘어 타 국가의 남녀노소 할 것 없이 가차 없이 타 국민들을 차별과 착취의 대상으로 삼고 있다. 현재 이루어지는 서구의 여성주의 담론들은 가부장제라는 보편성을 담보로 제3세계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그러나 그러한 주장 이면에는 에드워드 사이드가 말한 ‘오리엔탈리즘’이 늘 저변에서 작동하고 있다.
거다 러너는 “1차 세계대전은 제국주의 세력들이 구축한 안정된 세계와 식민지 지배가 사실상 끝났음을 알렸다”고 기술하고 있지만 과연 그럴까? 1945년 2차 세계 대전이 종식하며 이 지구상에 제국주의가 자취를 감춘 것일까? 그렇다면 오늘날 진행되는 ‘신제국주의’ 담론은 갑자기 탄생한 것일까? 근대 제국주의 시대에는 서양의 제국과 동양의 식민지라는 관계가 설정되었지만 20세기 중반 이후 즉 냉전시대에는 ‘선진국’과 ‘개발도상국’이란 관계가 새롭게 설정되었다. 사이드는 이를 서구적 오리엔탈리즘의 결과라고 이미 지적한바 있다. 서구하면 ‘선진국’, 동양하면 ‘개발도상국’이란 등식이 성립되는 것은 우연의 일치가 아니다. 흔히 말하는 ‘개발도상국’들은 모두 근대 제국주의의 피해자들이었다.
러너는 세계의 부국과 빈국 간의 간격을 ‘냉전’의 산물로 생각하는 것 같지만 실상 그렇지 않다. 오늘날의 서구 세계의 부는 과연 어디에서 왔는가? 소위 ‘선진국’이라는 서구 세계가 19C 식민지 착취에 의존하지 않고 오늘날의 ‘부’를 형성할 수 있었을까? 오늘날의 영국의 대영박물관과 같은 서구세계의 박물관 마다 가득한 식민지 유물들은 서구세계가 착취한 경제적 부의 한 단면일 뿐이다. 그들은 여전히 오늘 날에도 착취물들을 그 원래의 주인에게 돌려줄 생각을 전혀 하지 않는다.
러너가 사용하는 ‘국제적인’이란 말은 현재 진행되는 ‘신자유주의’와 동의어이다. ‘세계화’, ‘국제화’의 주체는 늘 서구세계이다. 제3세계는 끊임없이 이 ‘자유’에 문을 열어야 하는 압박에 시달린다. FTA는 이러한 좋은 예가 될 것이다. 서구세계가 말하는 ‘신자유주의’는 결국 자본의 자유를 말하는 것이다. 신자유주의의 ‘자유’가 인력 시장의 개방으로 이어지지 않는 것을 보아도 잘 알 수 있다. 서구세계는 여전히 제3세계의 노동자들의 노동력을 수입하는데 제한을 가하고 있다. 18세기에 서구는 부르주아지 즉 자본가의 자유를 부르짖었다면 현대의 자유주의는 바로 그들이 가진 ‘자본의 자유’를 부르짖는다. 여전히 가난한 제3세계는 과거 식민주의시대와 동일한 착취 상태에 놓여있다. 현대의 제국주의는 더 이상 타 국가의 영토를 장악할 이유가 없다. ‘자본’과 ‘자원’을 장악하면 자연스럽게 제3세계에 대한 헤게모니를 유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이러한 제국주의를 염두에 두지 않으면 페미니스트 담론이 또 다른 제국주의의 도구로 사용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인도나 무슬림 국가의 여성들의 인권 문제가 심각하다고 페미니스트 운동가들은 끊임없이 지적하고 있다. 여기에 서방국가들은 늘 이를 제3세계 국가에 정치적 압력으로 사용할 여지를 가진다. 오늘 날의 제국은 늘 ‘인권’이란 가면을 쓰고 제3세계를 압박한다. 제1세계는 자신들의 문제보다 제3세계의 문제에 간섭하는 것을 더 즐기는 듯하다. 마치 옆집에서 우리집 문제를 놓고 간섭하는 것과 같다. 제3세계의 여성주의 담론은 그 국가의 특성에 맞게 자생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다른 나라의 간섭은 또 다른 갈등을 일으킬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페미니스트들의 서구와 제3세계간의 교류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제3세계의 여성주의 담론이 단순히 서구 세계의 담론을 답습하는 식이라면 제3세계는 언제나 피식민자의 위치에 설수 밖에 없다. 그것은 여전히 페미니스트 담론의 주변에 머무는 것으로 주체적인 변혁은 불가능하게 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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