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8.9. 가해_연중19주일_감사성찬례
열왕상 19:9-18 / 시편 85:8-13 / 로마 10:5-15 / 마태 14:22-33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
(디카이오쉬네 δικαιοσύνη, 의)
채야고보 신부(artist / 성공회 사제)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공동번역 성서는 ‘의, 디카이오쉬네 δικαιοσύνη, righteousness’를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로 번역을 했습니다. 아마도 ‘의’라는 말의 의미를 의역한 것으로 보입니다. 좀 쉽게 풀어서 설명한 것이지요.
그러나 막상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가 과연 무엇인가?라고 할 때 간단히 대답하기 쉽지 않습니다. ‘의’, ‘디카이오쉬네’는 헬라어 명사형으로 ‘정직’, ‘정의’, ‘법 실행’, ‘법 이행’의 의미를 가진 법정 용어로 사용되던 단어입니다. 사도 바울로는 이 ‘디카이오쉬네’를 구약의 개념에서 가져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구원의 개념을 설명하고자 했습니다. 이스라엘 바빌론 유수 이전에는 이 “하느님의 의”라는 개념이 하느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심판하실 때 정의롭고, 공정하게 심판하신다는 의미로 사용되었습니다. 그러나 바빌론 유수 이후에는 이 개념이 하느님께서 심판하실 때 은총을 베풀어 “사면하신다”는 의미로 사용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로의 “의”의 개념은 바로 바빌론 유수 이후의 이스라엘의 ‘의’의 개념에서 가져온 것입니다.
70인 역에서 디카이오쉬네로 번역한 히브리어는 ‘emet’인데 ‘신의, 진실’이라는 의미입니다. 또한 ‘은총과 자비’를 나타내는 히브리어 hesed를 또한 디카이오쉬네로 번역했습니다. 결국 그 의미는 “하느님의 자비”를 표현한 말이라 할 수 있습니다.(정양모) 왜냐하면 ‘하느님의 의로움’에 반대되는 단어는 ‘하느님의 진노’이기 때문입니다. 멸망받을 수밖에 없는 죄인을 심판의 순간에 그 죄를 관면해주는 것. 이것이 하느님의 자비가 아니면 무엇이겠습니까?
“우리가 이제 그리스도의 피로써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를 얻었으니 그리스도의 덕분으로 하느님의 진노에서 벗어나게 될 것은 너무나 분명합니다.”(로마 5:9)
“의롭게 함”(디카오시스 dikaiosis, 의화)이라는 명사형과 “의롭게 하다”(디카이오운 dikaioun, 수동형, 의롭게 되다, 의로워지다)라는 동사형을 사도 바울로는 동시에 사용했는데, 이 동사형 디카이오운은 바울로 서신에서 25번 정도 나옵니다. 여기에서 보듯이 디카이오운은 “의롭워지다”라는 수동형입니다. 사도 바울로가 말하는 구원의 개념은 “우리가 의로워진다는 의미”이지요. 우리 스스로 의로워지는 것이 아니라 바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의로움입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서 모든 사람을 죄에서 풀어주시고 당신과 올바른 관계를 가질 수 있는 은총을 거저 베풀어주셨습니다.”(로마 3:24)
사도 바울로는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사역을 구약의 “하느님의 계시 중심”에 대입하여 해석했습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 의로우시다는 의미보다, 하느님께서 죄인을 의롭다 하심에 더 방점이 맞춰져 있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구속의 은총으로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이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는 “칭의”라고 부릅니다. 이를 통해 하느님의 의가 세상에 드러난 것입니다.
그렇다면 한번 질문을 해보겠습니다.
‘칭의’를 받은 우리는 존재론적으로 의로워진 걸까요? 아니면 의로워졌다고 믿는 심리학적 인식의 동의일까요?
이건 심리학적 문제이면서도 동시에 어려운 신학적 질문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의롭다 함을 받은 순간 즉 칭의의 순간에 우리는 이미 의로워진 걸까요? 다시 한번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더 쉽게 말씀을 드리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순간 또는 세례를 받는 순간 우리는 그 순간에 의로워진 것일까요?
만약 그렇다면 우리는 존재론적으로 변화를 받은 것입니다.
만약 그렇다면 아마 이 세상은 이미 천국으로 변했어야 할 겁니다. 세상에 있는 크리스천의 숫자만큼 의인들이 많을 것이기 때문에...
그러나 칭의는 말 그대로 “의롭다 함”의 선고를 받은 것입니다. 적절한 비유일지 모르지만 “집행유예”를 받은 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는 이스라엘이 신봉하는 율법의 효력과 인간의 선행과 공적을 무력하게 만들 수 있는 강력한 선고입니다. 이를 통해 실질적인 효과가 우리에게 나타나는 것입니다.
“복음은 하느님께서 인간을 당신과 올바른 관계에 놓아주시는 길을 보여주십니다. 인간은 오직 믿음을 통해서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를 가지게 됩니다. 성서에도 "믿음을 통해서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를 가지게 된 사람은 살 것이다." 하지 않았습니까?”(로마 1:17)
그러나 이것은 존재론적인 변화가 아닙니다. 이것을 칸트적으로 말하면 우리의 인식이 변화된 것이고, 삼위일체 신학의 관점에서 말하면 “위격 또는 인격의 변화”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신앙은 전적으로 신앙하는 그 대상과의 관계 속에서 정의되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칭의는 인간 개인과 하느님과의 “개별화”된 관계 속에서 인식될 수밖에 없습니다. 이렇게 인식된 개별화된 신앙은 자연스럽게 신앙의 대상에 대한 ‘순종’으로 드러납니다. 그 동기는 ‘칭의에 대한 감사’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칭의는 자연스럽게 순종과 하나가 됩니다. 순종은 단순한 심리학적 반응에 머물지 않고 개인에게 “결단과 행동”을 요구합니다. 여기에서 개신교와 천주교의 신학적 차이가 드러납니다. 개신교는 ‘칭의’에 비중을 두고, 천주교는 ‘성화’에 비중을 둡니다. 그러나 신학적으로 칭의와 성화를 구분하여 설명하려 해도 본질적으로 이 칭의와 성화가 불가분의 관계입니다. 왜냐하면 칭의에는 반드시 그에 맞는 개인적 삶의 양식의 변화가 함께 요구되기 때문입니다.
폴 틸리히는 고전적인 신학 용어를 우리 시대의 언어로 바꾸어 말하길 좋아한 신학자입니다. 중생을 “참여”로, 칭의를 “수용”으로 그리고 성화를 “변화”로 표현했지요. 이 세 가지를 “새로운 존재에 대한 참여의 관점”에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새로운 존재”란 바로 그리스도를 틸리히가 바꿔 부른 현대적 용어입니다. 이러한 “참여”는 결국 신앙의 대상과의 관계와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결정되는 것입니다. “참여-수용-성화”. 이 세 가지가 바로 사도 바울로가 말한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 즉 “의”에 포함된 하나의 개념입니다. “참여(중생)”는 우리가 세상에서 그리스도에게로 나아가는 결단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이는 매우 개인적인 변화의 단계입니다. 이는 “회개”의 과정을 통해 견인되며, 개인적 결단에 의한 “세례”를 통해 공동체 앞에서 표현됩니다. 이다음 단계가 바로 “의롭다 하심”을 받는 “수용(칭의)”의 단계입니다. 바로 집 나갔던 탕자가 참회를 통해 아버지 품으로 돌아온 것처럼, 우리는 하느님의 품 안으로 받아들여짐을 받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단계가 바로 “성화”의 단계입니다. “성화”는 “수용(칭의)”에 대한 우리의 응답이며 우리의 감사의 표현입니다. 이것은 순간이 아니라 우리의 전 삶을 통해 표현되는 과정입니다. 그리고 틸리히는 이 성화의 과정을 개인적인 차원이 아니라 교회 공동체 속에서 표현된다고 합니다. “참여와 수용”이 개인적이고 심리학적 차원에 머문다면 이 성화의 과정은 바로 교회 공동체와 사회와의 관계 속에서 표현되는 “공동체성”을 띄는 과정입니다. 그러므로 “참여(중생)-수용(칭의)-성화”는 “하느님의 의” 속에 모두 불가분의 관계로 엮여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로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나는 이 희망을 이미 이루었다는 것도 아니고 또 이미 완전한 사람이 되었다는 것도 아닙니다. 다만 나는 그것을 붙들려고 달음질칠 뿐입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나를 붙드신 목적이 바로 이것입니다. 형제 여러분, 나는 그것을 이미 붙들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다만 나는 내 뒤에 있는 것을 잊고 앞에 있는 것만 바라보면서 목표를 향하여 달려갈 뿐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이 성숙한 사람은 모두 이와 같은 마음가짐으로 살아가야 합니다.”(필립피 3:12~15)
“참여와 수용”은 한순간이지만 결국 성화는 한 개인의 삶 전체를 요구합니다. 그것은 미래를 향해 나아가는 과정이 아니라 반대로 미래가 현재 속으로 계속해서 침범해 들어오게 하는 것입니다. 이와 동시에 “수용과 칭의”는 과거가 끊임없이 현재에 닿아 있습니다. 그래서 “수용-칭의-성화”가 모두 현재 속에 하나가 됩니다.
“그러나 믿음을 통해서 얻는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에 대해서는 하느님께서 "누가 저 높은 하늘까지 올라갈까 하고 속으로 걱정하지 마라." 하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그리스도를 모셔 내리기 위해서 하늘까지 올라갈 필요는 없다는 말씀입니다.”(로마 10:6)
이 말씀은 무슨 뜻입니까? 이는 신명기 30:11-14의 말씀을 사도 바울로가 그리스도론에 대입하여 해석한 것입니다. 그 뜻은 “율법은 알기도 쉽고 지키기도 쉽다.”(정양모)는 의미입니다. 이를 사도 바울로는 더 이상 율법을 알기 위해 하늘로 올라갈 필요가 없다고 선포합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이미 우리와 현존하시기 때문입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의 현존성을 강조하며 이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구원을 설명한 것입니다.
저는 이것을 그리스도의 현존성과 현재성을 강조하여 다음과 같이 해석합니다.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를 위해 공간과 시간적으로 초월성이나 내세에 매달리지 말라는 의미로 해석합니다. 미래에 이루어질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를 생각하며, 현재를 무시하고 먼 미래만을 바라보지 말라는 겁니다. 미래를 기다리며 미래를 위해 사는 것이 아니고, 미래가 우리의 현재의 삶 속으로 침범해 들어오길 기대하며 오늘에 충실하라는 것입니다. 강조점은 미래가 아니라 현재입니다.
“또 하느님께서 "누가 저 깊은 땅 속까지 내려갈까 하고 걱정하지 마라." 하십니다. 이 말씀은 그리스도를 죽음의 세계에서 모셔 올리기 위하여 땅 속까지 내려갈 필요는 없다는 말씀입니다.”(로마 10:6)
저는 이것을 다음과 같이 해석합니다. 이미 과거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오셨고, 죽으시고 부활하셨는데, 그러한 과거에 만 붙들려 현재의 시간과 공간에서 그리스도의 현존을 망각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과거에 매달리는 것이 아니라, 현재의 삶에 충실할 때 과거는 늘 우리의 현재 속으로 침투해 들어온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합니까? 그것은 ‘기억과 기념’을 뜻하는 ‘아남네시스’에 의해 가능합니다. 이에 대해서는 다음에 또 말씀을 드릴 기회가 있을 겁니다. 아무튼 이것이 그리스도의 현존의 비밀이며,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가 지닌 현재성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로는 다음과 같이 선포합니다.
“지금이 바로 그 자비의 때이며 오늘이 바로 구원의 날입니다.” (2 고린 6:2 하)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을 것이다”라는 1차원적인 “칭의의 신학”에서 우리의 신앙을 건져낼 필요가 있습니다. 통전적인 이성과 믿음으로 우리의 신앙을 반성해 보아야 합니다. 긴장이 풀리고 나태해져 있는 현재의 자신에게 다시 한번 과거의 세례와 중생의 순간을 현재로 이끌어 와야 합니다. 그리고 미래로부터 다가오는 우리의 온전한 구원의 완성을 현재로 이끌어 와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종말론적인 긴장감과 긴박함. 이러한 것이 바울로 서신에 넘쳐나는 정서임을 고려해 볼 때 우리는 과거와 미래가 우리의 현재로 돌진해오는 긴장감 속에 현재를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중심점은 ‘여기’라는 공간과 ‘지금’이라는 시간입니다.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는 오늘 지금 여기에서 드러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로의 “의”를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로 번역한 공동번역 성서. 여기에서 “올바른”이란 말이 결코 우리의 관점에서 사용된 말은 아닐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하느님께서 “올바르다”라고 인정하셔야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 판단에 결정권이 없습니다. 하느님과 나와의 관계가 “올바른지”에 대한 절대 기준은 오직 하느님께만 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의 믿음도, 율법의 준수도, 우리의 선행도, 우리의 모든 행위와 마음도 “올바르다”는 판결에 어떠한 영향도 줄 수 없습니다. 여기에서도 “하느님 앞에 선 개인”이 결국은 ‘하느님의 절대 주권” 아래 있음이 판명됩니다.
“의”,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
오늘 주제에 대한 신학적 성찰을 통해 우리는 “하느님의 의의 현재성”을 발견하게 됩니다.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는 과거의 한 순간에 있었거나, 또는 종말의 한 순간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시간과 공간의 제약 속에서도 신앙적 자유를 누릴 수 있는 것은 우리가 하느님의 관계성을 현재 속에서 깨달을 때입니다. 1주일에 한번 드리는 우리의 감사성찬례를 통해 작으나마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가 이루어지는 한 순간을 우리는 현재에서 맛봅니다. 짧은 순간이지만, 그 성사의 순간이 우리 삶의 변화의 마중물이 될 것입니다. 여기에 하느님의 말씀과 성령님의 도우심 속에 우리는 매일의 삶 속에서 조금씩 “성화”되어 가는 것입니다. 작은 누룩이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밀가루 반죽을 부풀려 맛있는 빵이 되듯이, 우리 작은 삶의 성사를 통해, 말씀의 능력을 통해 우리는 조금씩 변화되어 갑니다. 틸리히가 성화를 공동체성 속에서 표현한 것은 이런 이유에서 입니다. 우리는 비록 개인으로 부르심을 받았지만, 함께 성화의 과정을 거치면서, 함께 구원을 얻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는 지금 여기에 그리고 우리 가운데서 이루어져가고 있습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말씀을 나눴습니다. 아멘.
연중19주일(가해) 성서말씀 (공동번역)
열왕상 19:9-18
9. 그가 거기 한 동굴에 이르러 그 속에서 그 날 밤을 지내는데 갑자기 야훼의 말씀이 들려왔다. "엘리야야, 네가 여기에서 무엇을 하고 있느냐?" 10. 엘리야가 대답하였다. "저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당신과 맺은 계약을 저버리는 것을 보고 만군의 하느님 야훼를 생각하여 가슴에 불이 붙고 있습니다. 이 백성은 당신의 제단을 헐었을 뿐 아니라 당신의 예언자들을 칼로 쳐죽였습니다. 이제 예언자라고는 저 하나 남았는데 그들이 저마저 죽이려고 찾고 있습니다." 11.다시 음성이 들려왔다. "앞으로 나가서 야훼 앞에 있는 산 위에 서 있거라." 그리고 야훼께서 지나가시는데 크고 강한 바람 한 줄기가 일어 산을 뒤흔들고 야훼 앞에 있는 바위를 산산조각 내었다. 그러나 야훼께서는 바람 가운데 계시지 않았다. 바람이 지나간 다음에 지진이 일어났다. 그러나 야훼께서는 지진 가운데도 계시지 않았다. 12.지진 다음에 불이 일어났다. 그러나 야훼께서는 불길 가운데도 계시지 않았다. 불길이 지나간 다음, 조용하고 여린 소리가 들려왔다. 13.엘리야는 목소리를 듣고 겉옷자락으로 얼굴을 가리우고 동굴 어귀로 나와 섰다. 그러자 그에게 한 소리가 들려왔다. "엘리야야, 네가 여기에서 무엇을 하고 있느냐?" 14.엘리야가 대답하였다. "저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당신과 맺은 계약을 저버리는 것을 보고 만군의 하느님 야훼를 생각하여 가슴에 불이 붙고 있습니다. 이 백성은 당신의 제단을 헐었을 뿐 아니라 당신의 예언자들을 칼로 쳐죽였습니다. 이제 예언자라고는 저 하나 남았는데 그들이 저마저 죽이려고 찾고 있습니다." 15.야훼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다마스쿠스 광야로 해서 돌아가거라. 다마스쿠스 성에 들어가거든 하자엘을 기름 부어 시리아의 왕으로 세우고 16.님시의 아들 예후를 기름 부어 이스라엘의 왕으로 세워라. 그리고 아벨므홀라 출신 사밧의 아들 엘리사를 기름 부어 네 뒤를 이을 예언자로 세워라. 17.하자엘의 칼을 피하여 살아난 자는 예후에게 죽을 것이고 예후의 칼을 피한 자는 엘리사에게 죽으리라. 18.그러나 내가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서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도, 입맞추지도 않았던 칠천 명을 남겨두리라."
시편85:8-13
8. 나는 듣나니, 야훼께서 무슨 말씀 하셨는가? 하느님께서 하신 말씀 그것은 분명히 평화, 당신 백성과 당신을 따르는 자들, 또다시 망령된 데로 돌아가지 않으면 그들에게 주시는 평화로다.
9. 당신을 경외하는 자에게는 구원이 정녕 가까우니 그의 영광이 우리 땅에 깃들이시리라.
10사랑과 진실이 눈을 맞추고 정의와 평화가 입을 맞추리라.
11.땅에서는 진실이 돋아 나오고 하늘에선 정의가 굽어보리라.
12.야훼께서 복을 내리시리니 우리 땅이 열매를 맺어주리라.
13.정의가 당신 앞을 걸어 나가고, 평화가 그 발자취를 따라가리라.
로마 10:5-15
5.모세는 사람이 율법을 통해서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를 가질 수 있다고 하면서 "율법을 지키는 사람은 그것을 지킴으로써 생명을 얻는다."고 기록하였습니다. 6.그러나 믿음을 통해서 얻는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에 대해서는 하느님께서 "누가 저 높은 하늘까지 올라갈까 하고 속으로 걱정하지 마라." 하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그리스도를 모셔 내리기 위해서 하늘까지 올라갈 필요는 없다는 말씀입니다. 7.또 하느님께서 "누가 저 깊은 땅 속까지 내려갈까 하고 걱정하지 마라." 하십니다. 이 말씀은 그리스도를 죽음의 세계에서 모셔 올리기 위하여 땅 속까지 내려갈 필요는 없다는 말씀입니다. 8.하느님께서 "말씀은 네 바로 곁에 있고 네 입에 있고 네 마음에 있다." 하셨는데 이것은 우리가 전파하는 믿음의 말씀을 가리켜 하신 말씀입니다. 9.예수는 주님이시라고 입으로 고백하고 또 하느님께서 예수를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셨다는 것을 마음으로 믿는 사람은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 10.곧 마음으로 믿어서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에 놓이게 되고 입으로 고백하여 구원을 얻게 됩니다. 11.성서에도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든지 수치를 당하지 않으리라."는 말씀이 있지 않습니까? 12.유다인이나 이방인이나 아무런 구별이 없습니다. 같은 주님께서 만민의 주님이 되시고 당신의 이름을 부르며 찾는 모든 사람에게 풍성한 복을 내리십니다. 13."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은 누구든지 구원을 얻으리라."는 말씀이 있지 않습니까? 14.그러나 믿지 않는 분의 이름을 어떻게 부를 수 있겠습니까? 또 들어보지도 못한 분을 어떻게 믿겠습니까? 말씀을 전해 주는 사람이 없으면 어떻게 들을 수 있겠습니까? 15.전도자로서 파견받지 않고서 어떻게 전도를 할 수 있겠습니까? "기쁜 소식을 전하는 이들의 발이 얼마나 아름다운가!" 하는 말이 바로 그 말씀입니다.
마태14:22-33
22.예수께서 곧 제자들을 재촉하여 배를 태워 건너편으로 먼저 가게 하시고 그 동안에 군중을 돌려보내셨다.
23.군중을 보내신 뒤에 조용히 기도하시려고 산으로 올라가셔서 날이 이미 저물었는데도 거기에 혼자 계셨다.
24.그 동안에 배는 육지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는데 역풍을 만나 풍랑에 시달리고 있었다.
25.새벽 네 시쯤 되어 예수께서 물 위를 걸어서 제자들에게 오셨다.
26.예수께서 물 위를 걸어오시는 것을 본 제자들은 겁에 질려 엉겁결에 "유령이다!" 하며 소리를 질렀다.
27.예수께서 제자들을 향하여 "나다, 안심하여라. 겁낼 것 없다." 하고 말씀하셨다.
28.베드로가 예수께 "주님이십니까? 그러시다면 저더러 물 위로 걸어오라고 하십시오." 하고 소리쳤다.
29.예수께서 "오너라." 하시자 베드로는 배에서 내려 물 위를 밟고 그에게로 걸어갔다.
30.그러다가 거센 바람을 보자 그만 무서운 생각이 들어 물에 빠져들게 되었다. 그는 "주님, 살려주십시오!" 하고 비명을 질렀다.
31.예수께서 곧 손을 내밀어 그를 붙잡으시며 "왜 의심을 품었느냐? 그렇게도 믿음이 약하냐?" 하고 말씀하셨다.
32.그리고 함께 배에 오르시자 바람이 그쳤다.
33.배 안에 있던 사람들이 그 앞에 엎드려 절하며 "주님은 참으로 하느님의 아들이십니다." 하고 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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