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8.23. 가해_연중21주일_감사성찬례
이사 51:1-6 / 시편 138 / 로마12:1-8 / 마태 16:13-20
성聖과 속俗, 그 경계의 창문에서
성(sacrum, sacred)과 속(profanum, profane)
채야고보 신부 / artist, 성공회 사제
근대 이전의 인간은 거룩한 것과 속된 것의 구분이 실재(實在)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돌을 숭배하고 나무를 숭배하던 고대인들에게 이 자연은 속된 어떤 것이었지만, 그 이면에는 알 수 없는 거룩함이 실재한다고 믿었습니다. 신성하게 여기는 돌과 나무는 자연세계의 돌과 나무와 본질적으로 전혀 차이가 없지만, 그 자체에 거룩함이 현존하는 순간 그것의 의미는 달라집니다. 그것을 종교학자들은 ‘성현 (hierophany, ἱερός, 신성한 - 엘리아데)’이라 부릅니다. 즉 성스러운 것의 현현입니다. 고대 종교로부터 오늘의 기독교에 이르기까지 많은 종교들은 신이 다양한 방법으로 이 자연세계에 자신의 거룩함을 드러낸다고 고백해왔습니다. 속된 물질의 세계에 거룩한 무엇인가가 실재한다는 믿음이지요. 이러한 믿음이 작용하는 데에는 자연세계 안에서 인간의 경험을 넘어서는, 인간의 판단을 넘어서는 어떤 “두려운 힘” 또는 “경건한 두려움”이 요구됩니다. 이를 미학적으로 ‘숭고 Sublime’라고 표현하기도 합니다. 모든 종교의 근원뿐만 아니라 인간 개개인의 내면에는 이러한 성과 속의 긴장감이 늘 자리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볼까요? 시간과 공간이 균질한 세상에서 심지어 비종교인이라 할지라도 자신들이 기념하는 특별한 시간과 장소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한 개인이 기억하는 첫사랑의 장소와 때는 이러한 균질적인 공간 속에서 그 개인에게 특별한 의미를 지니는 법입니다. 또 생일은 어떻습니까?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의 생일을 매년 챙기면서 그 날을 다른 날과 구분하여 특별하게 기념합니다. 또한 종교적인 신념이 없는 사람조차도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의 사진을 발로 밟으라 하면 주저하는 게 당연합니다. 단지 종이 위에 잉크로 인쇄된 사진 인대도 말입니다. 이러한 인간의 성향은 인간의 의식과 무의식 속에 깊이 자리한 ‘성과 속’에 대한 원초적 본성에 뿌리를 둡니다.
그래서 마태오복음 16장 1절에서 바리사이파와 사두가이파 사람들이 “하느님의 인정을 받았다는 표가 될 만한 기적”을 예수께 요구했던 것입니다. 거룩한 것에는 시간과 공간의 균질성을 깨트리는 특별한 뭔가가 요구되기 때문입니다. 아마도 그들은 “오천 명을 먹이신 기적(14:13-21)”과 “사천 명을 먹이신 기적(15:32-39)” 이야기를 들었을 겁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하늘의 기적”을 요구한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아침에는 '하늘이 붉고 흐린 것을 보니 오늘은 날씨가 궂겠구나.' 한다”라고 말하시면서, 자연의 징조조차 구분 못하면서 ‘성스러운 징조’를 찾는 그들의 어리석음에 대해 책망하십니다. 즉 인간은 본능적으로 이미 성스러운 것과 속된 것을 구분하려는 성향이 있음을 알고 계셨던 것입니다. 마음만 먹으면 바리사이파와 사두가이파 사람들은 이미 예수 그리스도의 그동안의 행적을 통해 예수님의 성스러움을 쉽게 파악할 수 있었을 겁니다. 그러나 그들은 시기와 질투에 눈이 멀어 쉽게 알아볼 수 있는 자연현상도 제대로 인식 못할 정도로 판단력이 왜곡되어 있었습니다.
우리는 오늘 마태오복음 14장 34절에서 물 위로 걸어오신 예수님을 보고 제자들이 처음으로 “주님은 참으로 하느님의 아들이십니다.”라는 고백을 했던 것을 알고 있습니다. 인간의 경험과 판단을 넘어서는 경이로움에 자연스러운 고백이 나왔던 것이지요. 그리고 그 고백은 오늘 베드로의 고백으로 이어집니다. 아마도 이 고백은 앞 장에서 봤던 ‘오병이어’의 기적과 연관된 고백일 겁니다. 주님께서는 끊임없이 제자들의 경험과 인식으로는 감당하기 어려운 놀라운 일들을 그들 앞에서 행하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분명히 자신들과 같은 몸을 가진 사람이고, 자신들과 비슷한 또래의 한 청년인 예수. 그러한 예수는 딴 세상에서 온 사람처럼 자신들과는 전혀 다른 행동을 하고 계셨던 겁니다. 그에게서 이 세상에서 볼 수 없는 뭔가 ‘성스러운’ 어떤 기운을 제자들은 그로부터 느꼈을 겁니다. 이러한 성과 속에 대한 심리적인 갈등과 이성적인 혼란은 늘 제자들의 인식을 혼란스럽게 만들었습니다. 이러한 혼란은 제자들이 체험한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 이전까지 계속됩니다.
모든 시간과 공간이 ‘균질성(homogeneity)’을 가지고 있다는 전제는 아인슈타인이 등장하기 이전까지는 근대 과학의 기본이었습니다. 미국에서의 시간과 한국에서의 시간은 동일하고, 달리는 물체의 시간과 멈춰있는 물체의 시간은 차이가 없어야 합니다. 그러나 시간과 공간이 물체의 운동에 따라 상대적으로 전혀 다르게 측정된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은 이제 현대 과학에서는 상식이 되었습니다. 고대 인간들이 가졌던 시간과 공간에 대한 개념이 오히려 아인슈타인과 어느 부분 일치하고 있는 것입니다. 시간과 공간은 움직이는 주체에 의해 전혀 다르게 인식될 수 있습니다.
성과 속의 구분을 모르고, 모든 시간과 공간이 ‘균질성’을 가졌다고 믿는 현대의 비종교인들은 시간과 공간을 성과 속으로 구분하는 종교인들의 신앙을 너무 쉽게 무시합니다. 그래서 한 존재가 신앙 안에서 ‘새로운 존재’로 변화될 수 있다는 가능성 또한 절대로 믿지 않습니다. 성스러운 시간과 공간은 그들에게 미신적인 것으로 치부됩니다. 우리와 같은 공간과 시간에 제한을 받는 몸을 가지고 이 세상에 오셨던 성육신 하신 예수. 그러한 한계를 가진 인간에게서 성과 속이 동시에 존재한다는 것을 인정할 수 없었던 바리사이파 사람과 사두가이파 사람들은 우리 시대의 비종교적인 사람들과 별반 다를 것이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물론 예수님을 따르던 제자들은 그 경계에 서 있었겠지요. 예수님의 모습과 언행에서 자신들과 다른 뭔가를 느꼈지만 그것이 무엇인지 제자들 또한 처음에는 확신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로는 우리에게 다음과 같이 충고합니다.
“여러분은 이 세상을 본받지 말고 마음을 새롭게 하여 새 사람이 되십시오.” (로마12:2)
“새 사람이 되십시오.” 의 ‘되십시오’는 “메타모르포우스테 μεταμορφοῦσθε” 즉 2인칭 복수수동현재명령어입니다. 물론 중간태로도 해석 가능합니다. 중요한 것은 “새 사람이 되어지세요.” 입니다. 우리나라 말로는 해석이 어색하지요. 이 단어는 마태오와 마르코가 예수님의 변화산에서의 변모 사건을 묘사한 단어와 같은 단어입니다. “μετεμορφώθη메테모르포테.” 그러므로 영광스러운 예수님의 변모와 사도 바울로가 말한 ‘새 사람’으로의 변화는 모두 같은 의미입니다. 즉 ‘속’에 속한 사람이 아니라 ‘성’에 속한 새로운 사람이 ‘되어진 것’입니다. 수동태이므로 자신의 의지가 아니라 전적으로 외부로부터 오는 능력으로 그렇게 된 것입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의지를 가지고 할 수 있는 것은, 첫째, 이 세상 사람들을 본받지 말 것이고, 둘째, 우리 마음을 새롭게 바꾸는 것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를 새롭게 만드시는 성령께서 우리 안에 역사하실 ‘거룩한 빈 공간’이 생기게 되는 것입니다. 그릇은 먼저 이전 것을 비우기 전에는 새로운 것을 결코 담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성스러운 지향성을 갖는 순간, 우리는 동시에 그러한 지점을 향하는 또 다른 ‘타자’를 우리 내부에서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 생각하는가?라는 주님의 질문.
“선생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십니다.”(마태 16:16상)라는 베드로의 고백.
베드로는 거룩한 확신에 차서 그러한 고백을 한 것은 아닐 것입니다. 그가 이후에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했던 사실은 이를 잘 말해줍니다. 그는 예수님과 동행하며 매일 성스러운 감정과 속된 감정 사이에서 혼란스러웠을 겁니다. 그것이 성과 속의 경계에서 갈등하는 우리의 모습과 일치합니다. 거룩함으로 넘어가기에 우리는 너무 연약하고 무디며, 너무도 많은 제약과 유혹들이 우리의 발목을 붙잡습니다. 그래서 성과 속의 경계를 넘나들 수 있는 “야곱의 사다리”와 같은 것이 우리 삶 속으로 들어와야 합니다. 그러한 “야곱의 사다리”를 우리는 성과 속을 경계 짓는 “문지방”이라 부를 수 있습니다. 저는 이것을 ‘창문’이라 표현합니다. 그러한 ‘창문’이 없다면 우리에게 성과 속의 구분도 필요가 없어집니다. 그러한 구분이 없다면 모든 시간이 똑같고, 모든 공간이 똑같습니다. 이러한 균질성은 결국 선과 악의 구분 조차 모호하게 만듭니다. 결국에는 죄에 대한 감수성 또한 사라집니다.
모든 공간과 시간이 균질하다면, 이 광활한 우주에서 우리는 절대적 중심을 찾을 수 없습니다. 절대적 중심이 없다는 것은 결국 방향감각을 잃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디에 서 있는지, 어디쯤 가고 있는지 도무지 알 수 없습니다. 어두운 망망대해에서 갈 바를 알지 못해 방황하는 인간. 이것이 우리 현대인의 실존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마태오복음 14장에서 어두운 밤에 풍랑에 시달리던 제자들의 모습과 너무 유사합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나다, 안심하여라. 겁낼 것 없다." (마태 14:27) 균질적인 시간과 공간의 틈을 꿰뚫는 ‘성현’의 순간이 바로 예수님께서 물 위를 걷는 순간에 드러난 것입니다. 그 균질한 시간과 공간이 깨지는 순간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시간과 공간의 ‘중심’이 되신 것입니다. 그러니 더 이상 두려워할 이유가 없는 겁니다. ‘중심’에 서면 방향을 가늠해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매일 반복되는 일상의 시간과 공간이 제한적이고 균질하다 할 지라도, 우리의 작은 노력으로 그 균질성을 깨는 각자의 ‘창문’을 세웠으면 좋겠습니다. 그 창문은 우리의 기도이고, 예배이며, 그리고 우리의 섬김입니다. 이를 통해 성스러움과 속된 것 사이에 균열이 생기고 우리는 성과 속을 제대로 관조할 수 있게 됩니다. 그리하여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과 공간이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축으로 하여 조금은 더 성스러운 방향으로 나아갔으면 좋겠습니다. 그러한 우리의 작은 노력을 통해 우리 자신이 어제보다는 오늘 더 거룩함을 덧입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일상의 시간과 공간에서 거룩함에 대한 애정을 가지는 훈련. 이러한 아주 작은 실천을 통해, 그리고 그 반복되는 실천이 아름다운 습관이 되도록 매일매일 우리의 집중력을 잃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이러한 우리의 작은 노력이 우리 자신과 주변을 더욱 성화시켜나가는 데 귀한 밑거름이 되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거룩한 영이신 성령님의 은총과 도우심이 여러분과 늘 함께하시길 기원합니다. 아멘.
연중 21 주일 (가해) 성서말씀 (공동번역)
본기도
영원하신 하느님, 사도 베드로의 고백을 우리 믿음의 반석으로 삼으셨나이다. 비오니, 성령의 빛을 비추시어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느님을 보게 하시고, 거룩한 교회에서 쓰임 받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한 분 하느님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나이다. 아멘.
이사 51:1-6
1 나의 말을 들어라.
⋅ 정의를 추구하고 야훼를 찾는 자들아.
⋅ 너희를 떼어낸 바위를 우러러보고
⋅ 너희를 파낸 동굴을 쳐다보아라.
2 너희 조상 아브라함을 우러러보고
⋅ 너희를 낳아준 사라를 쳐다보아라.
⋅ 내가 부를 때 그는 혼자였으나
⋅ 나는 그에게 복을 내려 자손이 번성하게 하였다.
3 그렇다, 야훼가 시온을 불쌍하게 보고
⋅ 다 허물어진 그 모습을 가엾게 여기리라.
⋅ 그리하여 그 황무지를 에덴처럼 만들고
⋅ 그 벌판을 야훼의 동산처럼 만들어
⋅ 흥겨움과 즐거움이 넘치고
⋅ 감사의 노랫가락이 울려 퍼지게 하리라.
4 뭇 백성들아, 똑바로 나를 쳐다보아라.
⋅ 부족들아, 내 말에 귀를 기울여라.
⋅ 훈계가 나에게서 나간다.
⋅ 나의 법이 뭇 백성의 빛이 되리라.
5 내가 세울 정의가 홀연히 닥쳐오고
⋅ 내가 베풀 구원이 빛처럼 쏟아져 오리라.
⋅ 내가 팔을 휘둘러 뭇 백성을 재판하면,
⋅ 바닷가 주민이 나에게 희망을 두고
⋅ 나의 팔에 기대를 걸리라.
6 눈을 들어 하늘을 바라보아라.
⋅ 땅을 굽어보아라.
⋅ 하늘은 연기처럼 스러지고,
⋅ 땅은 옷처럼 해어져
⋅ 주민이 하루살이처럼 꺼지리라.
⋅ 그러나 내가 베풀 구원은 영원하고
⋅ 내가 세울 정의는 넘어지지 않는다.
시편 138
1 주여, 내 마음 다하여 감사기도 드립니다. ◯
. 당신을 모시고 서있는 이들 앞에서, 당신을 찬양합니다.
2 거룩한 당신의 궁전 향하여 엎드려 ◯
. 인자함과 성실함을 우러르며
. 당신의 이름 받들어 감사기도 드립니다. ◯
. 언약하신 그 말씀, 당신 명성보 다 크게 퍼졌습니다.
3 내가 부르짖을 때 당신은 들어주시고 ◯
. 힘을 한껏 북돋우어 주셨습니다.
4 주여, 당신의 언약 말씀을 듣고서 ◯
. 세상의 모든 왕들이 당신께 감사노래 부릅니다.
5 그들이 주께서 밟으신 길을 찬양하며 ◯
. “주 그 영광 크시다” 노래합니다.
6 주여, 당신은 높이 계셔도 낮은 사람 굽어보시고 ◯
. 멀리 계셔도 거만한 자 아십니다.
7 내가 고생길을 걸을 때에 이 몸 살려주시며,
. 손을 드시어 살기 띤 원수들을 치시고 ◯
. 오른손으로 붙들어 이 몸 구해주십니다.
8 주여, 모든 일 나를 위해 하심이오니,
. 이미 시작하신 일에서 손을 떼지 마소서. ◯
. 당신의 사랑 영원하시옵니다.
⦿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
. 처음과 같이 지금도 그리고 영원히, 아멘.
로마 12:1-8
1 그러므로 형제 여러분, 하느님의 자비가 이토록 크시니 나는 여러분에게 권고합니다. 여러분 자신을 하느님께서 기쁘게 받아주실 거룩한 산 제물로 바치십시오. 그것이 여러분이 드릴 진정한 예배입니다. 2 여러분은 이 세상을 본받지 말고 마음을 새롭게 하여 새 사람이 되십시오. 이리하여 무엇이 하느님의 뜻인지, 무엇이 선하고 무엇이 그분 마음에 들며 무엇이 완전한 것인지를 분간하도록 하십시오.
3 나는 하느님의 은총을 받은 사람으로서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말합니다. 여러분은 자신을 과대 평가하지 말고 하느님께서 각자에게 나누어주신 믿음의 정도에 따라 분수에 맞는 생각을 하십시오. 4 사람의 몸은 하나이지만 그 몸에는 여러 가지 지체가 있고 그 지체의 기능도 각각 다릅니다. 5 이와 같이 우리도 수효는 많지만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을 이루고 각각 서로 서로의 지체 구실을 하고 있습니다. 6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은총의 선물은 각각 다릅니다. 가령 그것이 예언이라면 자기 믿음의 정도에 따라서 써야 하고 7 그것이 봉사하는 일이라면 봉사하는 데 써야 하고 가르치는 일이라면 가르치는 데 써야 하고 8 격려하는 일이라면 격려하는 데 써야 합니다. 희사하는 사람은 순수한 마음으로 해야 하고 지도하는 사람은 열성을 다해서 해야 하며 자선을 베푸는 사람은 기쁜 마음으로 해야 합니다.
마태 16:13-20
13 예수께서 필립보의 가이사리아 지방에 이르렀을 때에 제자들에게 “사람의 아들을 누구라고 하더냐?” 하고 물으셨다. 14 “어떤 사람들은 세례자 요한이라 하고 어떤 사람들은 엘리야라 하고 또 예레미야나 예언자 가운데 한 분이라고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제자들이 이렇게 대답하자 15 예수께서 이번에는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하고 물으셨다. 16 “선생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십니다.” 시몬 베드로가 이렇게 대답하자 17 예수께서는 “시몬 바르요나, 너에게 그것을 알려주신 분은 사람이 아니라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 너는 복이 있다. 18 잘 들어라. 너는 베드로이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울 터인즉 죽음의 힘도 감히 그것을 누르지 못할 것이다. 19 또 나는 너에게 하늘 나라의 열쇠를 주겠다.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도 매여 있을 것이며 땅에서 풀면 하늘에도 풀려 있을 것이다.” 하고 말씀하셨다. 20 그리고 나서 예수께서는 자신이 그리스도라는 것을 아무에게도 말 하지 말라고 단단히 당부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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