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7.26. 가해_연중17주일_감사성찬례
안나와 요아킴(성모 마리아의 부모)
창세 29:15-28_ 시편 105:1-11,45_ 로마 8:26-39_ 마태 13:31-33, 44-52
고통과 서러움의 계보: 레아에서 그리스도까지
채야고보 신부 (artist / 성공회 사제)
레아와 라헬
레아에게서 유다가 나왔으니 그녀는 남유다의 조상이고, 라헬의 아들 요셉에게서 에브라임과 므낫세가 나왔으니 그녀는 북이스라엘의 조상이 됩니다. 여기에서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으로 이어지는 이스라엘의 장자권이 누구에게로 간 것일까요? 레아와 라헬 간의 갈등은 그대로 야곱의 12 아들들에게 대물림 됐습니다. 그래서 야곱 가문의 가장 큰 비극인 요셉 이야기가 등장하는 것입니다. 레아에게서 유다가 나왔고 그 유다 지파에서 다윗이 나왔으며, 그의 계보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태어나셨으니 하느님의 구속사의 계보는 참 아이러니합니다. 하느님의 장자권의 계보가 단순히 인간적인 선택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철저히 하느님의 주권에 의해 내려왔음을 이를 통해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야곱의 입장에서는 그가 가장 사랑하는 라헬의 자녀를 통해 그 장자권이 계승되길 원했는지 모릅니다. 지극히 인간적인 당연한 생각일 겁니다. 요셉은 강대국 이집트의 재상이기도 했으니 신분면에서도 그는 장자권을 이어갈 명분이 분명했습니다. 그러나 야곱의 사랑을 받지 못했던 레아를 통해 그리스도의 장자권이 계승된 것입니다. 이러한 진술들을 통해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알게 됩니다. 구약은 일관성 있게 하느님의 약속과 그 약속이 실현되는 이스라엘의 역사를 통해 하느님의 의지와 그 주권이 드러났음을 말해줍니다.
아침에 잠자리에서 일어나 자기와 잠자리를 함께한 여인이 라헬이 아니라 레아였다는 사실을 알고 야곱은 무척 분개했습니다. 그러나 야곱을 속이고 몰래 잠자리에 동생을 대신해서 들어가 숨죽이며 밤을 보냈을 레아의 기분은 그 순간 어떠했을까? ‘서러움’. ‘서글픔’. 사랑받지 못하고 환영받지 못한 한 여인의 ‘한’과 ‘서러움’이 느껴집니다. 장녀이면서, 본부인인데도 동생에게 밀려나 철저히 조연 같은 삶을 살아야 했던 레아입니다. 거기에다 남편을 속여서라도 결혼을 할 수밖에 없었던 자신의 처지에 대한 수치심과 동생에 대한 깊은 열등감도 있었을 겁니다. 상상해 보십시오. 자신의 목소리를 야곱이 알아챌까 밤새 신음소리 한마디도 못했을 레아를 말입니다.
물론 라헬의 입장에서도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과의 첫 잠자리를 언니인 레아에게 빼앗긴 것이 억울했을 겁니다. 그렇지만 그녀는 남편의 사랑을 평생 독차지했던 여인입니다. 레아와는 비교가 안 되게 주연으로 살았습니다. “레아는 눈매가 부드러웠지만, 라헬은 몸매도 아름답고 용모도 예뻐서”(창세 29:17)라고 창세기 기자는 레아와 라헬의 외모에 대해 기록했습니다. 한마디로 레아는 외모는 별로였지만 마음이 부드러웠던 것 같습니다. 물론 라헬은 객관적으로 아름다운 용모를 가진 것 같습니다. 인간의 외적인 조건보다 마음의 중심을 보시는 하느님은 비록 야곱이 라헬을 사랑했지만, 레아를 통해 하느님의 장자권을 이어가십니다.
어쩌면 마태오복음 1장에 나오는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에 다섯 여인들의 삶도 레아와 다를 바가 없었을 겁니다. 모두가 박한 운명을 타고난 여인들 같습니다. 남편에게 사랑받지 못한 아내였던 레아처럼 그들의 삶도 고통과 서러움의 계보 안에 있습니다. 남편의 계보를 이어가기 위해 근친상간도 마다했던 여인 다말, 몸을 팔아 생명을 부지해야만 했던 여인 라합, 남편을 잃고 시어머니를 따라 이스라엘로 이주하여 난민의 서러움을 이겨낸 여인 룻, 남편 몰래 바람을 피우고 남편을 죽음으로 내 몬 여인 밧세바,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혼외 자식을 낳아야 했던 여인 마리아…이들의 운명은 고대 이스라엘 사회 속에서도 차별과 편견의 대상이었습니다. 고통과 서러움은 이렇게 그리스도의 계보 속에 녹아있었습니다. 이것은 인간 구원의 역사가 고통과 서러움 없이는 불가능함을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레아로부터 마리아에 이르기까지 전해진 이러한 계보는 그대로 성육신 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삶으로 이어집니다. 그의 삶 또한 이러한 여인들의 삶처럼 고통과 서러움의 정수를 보여줬습니다.
사실 인간적인 생각으로는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에서 이러한 여인들의 이름을 생략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야훼 신앙은 고대 다른 종교와 다르게 종교의 윤리와 도덕성, 제의적 성격보다 하느님께서 직접 이스라엘의 역사에 관여하신다는 “하느님의 주권 사상”을 더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사무엘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순종하는 것이 제사드리는 것보다 낫고, 그분 말씀을 명심하는 것이 염소의 기름기보다 낫소.”(1사무 15:22하) 그래서 다윗의 부끄러운 계보는 숨길 수없는 이스라엘의 역사가 되고, 하느님 앞에 선 이스라엘의 신앙 고백이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스라엘의 전통을 계승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정체성을 설파했던 마태오도 충실하게 이 부끄러운 계보를 숨김없이 마태오복음 서두에 기록한 것입니다. 이렇게 하느님의 장자권의 계보에는 많은 여인들의 눈물과 한이 서려 있을뿐더러, 동시에 그러한 연약한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 인간의 역사에 관여하시는 하느님의 주권 또한 드러냅니다. 그러므로 구원의 역사는 인간의 의지가 조금도 들어갈 여지가 없는 전적인 하느님의 주권에 속합니다.
이러한 고통과 서러움의 계보에 담겨 있는 여인들의 한과 하느님의 주권.
우리는 이 여인들의 ‘한’ 속에서 인간사에 관여하시는 하느님의 구속사를 목격하게 됩니다. 분명한 것은 그것은 우리 인간의 관점과 편견을 넘어서며, 우리의 행위와 공로와는 전혀 관련성이 없습니다. 이러한 실존에는 인간적인 관점에서는 이해할 수 없는 원리가 작용합니다. 한 개인이 주변인인 것 같지만 하느님 앞에서 실제로 주인공이 되고, 망하는 자 같으나 하느님 앞에서 실제로 복을 받은 자가 되는 겁니다. 그러니 사도 바울로는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이름 없는 자 같으나 유명하고 죽은 것 같으나 이렇게 살아 있습니다. 또 아무리 심한 벌을 받아도 죽지 않으며, 슬픔을 당해도 늘 기뻐하고 가난하지만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만들고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지만 사실은 모든 것을 가지고 있습니다.”(2고린 6:9-10)
사도 바울로는 자신의 실존이 전적으로 하느님의 주권과 섭리에 의해 주관되고 있음을 분명히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하느님의 손이 자신의 존재를 확증하시며, 자신의 삶을 주관하고 계신다는 생각, 곧 믿음이 없었다면 이러한 고백은 절대로 불가능했을 겁니다. 그래서 바울로는 다음과 같은 선포를 오늘 2 독서 말씀에서 하고 있습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들 곧 하느님의 계획에 따라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에게는 모든 일이 서로 작용해서 좋은 결과를 이룬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로마 8:28)
고통과 박해와 서러움 조차도 하느님의 주권 안에서는 서로 상호 작용하면서 선을 이루는 방향으로 나아감을 뜻합니다. 요셉의 이야기는 이를 잘 말해줍니다. 형제들에 의해 불행하게도 이집트에 노예로 팔려가 갖은 고생을 다했던 요셉. 그러한 요셉도 자신의 삶이 하느님의 주권 안에 놓여 있음을 늘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서로 연관될 것 같지 않은 삶의 많은 결들과 점들이 인생의 어느 순간에 서로 연결되어 하느님의 의와 선을 드러냅니다. 그것은 절망 속에서 가지게 되는 단순한 희망의 차원을 넘어, 자신의 존재 깊숙한 곳에서 “하느님 앞에서 선 개인”으로서의 자신의 정체성을 분명히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입니다. 요셉은 이렇게 모든 고난 중에서도 하느님께서 자신을 지켜 주실 것을 굳게 믿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재상이 된 것은 전적으로 하느님의 은총의 결과임을 알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집트의 재상이 되어 형제들에게 복수를 할 수 있는 상황에서도 그는 복수 대신에 다음과 같은 고백을 합니다.
"나에게 못할 짓을 꾸민 것은 틀림없이 형들이오. 하지만 하느님께서는 도리어 그것을 좋게 꾸미시어 오늘날 이렇게 뭇 백성을 살리시지 않았습니까?”(창세 50:20)
요셉의 사건을 많은 학자들은 그리스도의 유비로 말합니다. 이러한 생각이 잘 담겨 있는 복음서가 바로 마르코 복음서입니다. 인간이 필요 없다고 여겨 외면하고 버린 모퉁이 돌이 결국은 하느님의 구원을 이루는 반석이었다는 ‘메시아 비밀 사상’(W. 브레데이다)의 반전 메시지. 처음에는 실패한 것 같고, 적들이 성공한 것 같지만, 결국 최후에는 하느님의 뜻에 따라 실패자가 승리자가 된 것입니다. 이러한 이야기는 마치 반전 드라마와도 같은 통쾌한 결말을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너희가 핍박하고 죽인 예수가 결국은 우리를 구원하실 그리스도이시다.” 물론 선은 반드시 최후에 승리한다는 ‘권선징악’의 메시지도 여기에서 어렴풋하게 읽힙니다. 그러나 이 메시지는 그렇게 단순하게 희망고문을 하는 얘기가 아닙니다. 실제로 우리의 삶 속에서 ‘악’이 승리하는 경우가 너무도 많기 때문입니다. 남에게 잘해주다가 피해본 사람, 빚보증을 섰다가 망한 사람, 늘 우리 주변에는 착하게 살다가 고생을 하는 사람들이 더 많이 보이기 때문입니다. 정직하고 정의로운 사람들이 살기 힘든 세상입니다.
야곱에게 사랑을 받지는 못했지만 그리스도의 조상이 된 레아. 그녀는 분명 본부인이라는 자신의 정체성에 걸맞지 않게 야곱의 가정에서 라헬보다는 늘 열등한 존재였습니다. 주연의 삶을 갈망했지만, 그녀에게는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야곱에게 장자를 낳아 줬음에도 그녀의 지위는 늘 라헬 다음이었습니다. 야곱이 라헬의 자식인 요셉과 베냐민을 얼마나 사랑했는지를 성서는 말해줍니다. 그의 편애는 결국 형제간의 불화의 원인이었습니다. 그러나 레아는 묵묵히 그 아픔을 품으며 하느님의 장자권을 잇는 자신의 소명을 따라 자신의 삶을 살아갑니다. 그녀의 삶은 주변인의 삶인 것 같지만, 그녀는 당당히 그리스도의 계보에 오르는 중심의 삶이었습니다. 어쩌면 그녀의 슬픔과 서러움은 몇 천년 뒤에 있을 마리아의 아픔과 연결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앞에 언급했던 그리스도의 계보 속의 여인들의 서러움과 아픔은 온전히 마리아의 아픔으로 환원되는 것 같습니다. 그 고통과 서러움이 깊으면 깊을수록 마지막에 있을 그리스도의 영광의 빛은 더욱 밝고 환하게 빛나는 법입니다.
지금까지의 진술을 오늘의 복음서와 연결시켜 마무리를 하고자 합니다.
오늘 마태오복음 13장은 비유설교집입니다. 이 비유를 간단하게 3가지로 구분하면 다음과 같은 의미를 찾을 수 있습니다.
1. 겨자씨와 누룩의 비유: 겨자씨는 눈에 띄지 않을 정도로 작고, 반죽에 들어가는 누룩도 그러합니다. 그러나 이렇게 작은 것들이 나중에 상상할 수 없이 커지고 부풀어 오른다는 이야기입니다. 이는 하늘 나라는 우리의 인식과 인지능력을 넘어 우리에게 생각지 못한 상태로 드러난다는 의미를 보여줍니다.
2. 밭에 숨겨둔 보물과 값진 진주의 비유: 이 비유는 하늘 나라의 가치를 발견하면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쳐서라도 그것을 얻기 위해 힘써야 한다는 것입니다.
3. 그물의 비유는 나쁜 것과 좋은 것을 가려내는 종말론적인 이야기입니다. 결국 하늘 나라는 모두에게 열려있지만 누구나 선택받는 것은 아니라는 의미입니다.
정리해보면 하늘 나라는 우리 인간에게 감춰져 있어도 언젠가는 은연중에 드러나며, 그 가치를 깨달은 사람은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쳐서 그것을 얻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그러나 종말에 선택받거나 선택받지 않는 것은 인간의 노력 여하에 달려있는 것이 아니라 전적인 하느님의 주권에 달린 문제입니다.
결국 하느님의 장자권의 계보 안에 담긴 비밀은 이러합니다. 그것은 누룩처럼 눈에 보이지 않게 밀가루 반죽을 부풀게 하고, 눈에 띄지 않는 작은 씨앗이지만 종국에는 새들이 깃들 수 있는 거대한 나무가 되는 것과 같이 가장 작아 보이지만 거대한 역사를 이루는 것입니다. 그러하기에 장자권은 목숨을 바쳐서라도 지켜야 하는 귀한 보물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장자권을 가지고 종말에 하느님의 선택을 받을지 말지는 전적으로 하느님의 주권에 달려있습니다. 그래서 구약신학에서는 하느님과 인간의 계약 관계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계약은 전 인격을 주관하며 어떠한 유보 조건도 없이 복종하기를 요구한다.” (발터 아이히로트, 구약성서신학 I. p.44) 이것이 자연종교와 다른 야훼 신앙의 특징입니다. 하느님과의 관계는 단순히 상호관계를 넘어 전적인 하느님의 주권 사상이 포함된 관계입니다. 그래서 하늘 나라의 그물 비유에서 하느님의 주권의 종말론적인 성격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좋은 것을 고르고 나쁜 것을 버리는 것의 기준은 인간의 선행과 업적, 믿음이 아닌 전적으로 하느님의 주권에 속합니다.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으로 이어지는 장자권의 계보는 이제 하느님의 맏아들이신 그리스도를 통해 오늘 우리에게까지 이릅니다. 고통과 아픔의 인간 실존에 새겨진 이 귀한 권한은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도 주어진 권한입니다. “눈물을 흘리며 씨 뿌리는 자, 기뻐하며 거두어들이리라.”(시편 126:5) 오늘 우리가 살펴본 눈물과 서러움의 계보는 우리에게 깊은 신앙적인 변화를 촉구합니다. 이 계보에 담긴 약속이 단순한 “희망 고문”이 아님을 우리는 주님의 약속이 눈물과 서러움의 계보 속에서 어떻게 이루어져 왔는지를 통해 깨달을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절대 주권과 인간의 처참한 실존이 이러한 계보 속에 동시에 담겨 있습니다. 변화의 시작은 전적으로 우리 자신의 몫입니다. 우리의 연약함 속에서도 전적인 하느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삶. 그것이 ‘하느님 앞에 선 개인’으로서의 삶입니다. 이러한 삶을 살고자 결단하시는 분들에게 하느님의 은총이 함께하시길 기원합니다. 아멘.
연중 17 주일 (가해) 성서 말씀
창세29:15-28
15 하루는 라반이 야곱에게 물었다. "네가 내 골육이라고 해서 내 일을 거저 해서야 되겠느냐? 품삯을 얼마나 주면 좋겠는지 말해 보아라." 16 그런데 라반에게는 딸이 둘 있었다. 큰딸은 레아요, 작은딸은 라헬이었다. 17 레아는 눈매가 부드러웠지만, 라헬은 몸매도 아름답고 용모도 예뻐서 18 야곱은 라헬을 더 좋아하였다. 그래서 그는 칠 년 동안 외삼촌 일을 해드릴 터이니 작은 따님 라헬을 달라고 청하였다. 19 라반은 "다른 사람에게 주느니보다 너에게 주는 편이 낫겠다." 하면서 같이 살자고 하였다. 20그로부터 야곱은 라헬에게 장가들 생각으로 일을 했다. 칠 년이라는 세월도 며칠밖에 안 되듯 지나갔다. 그만큼 그는 라헬을 좋아했던 것이다. 21 마침내 야곱은 라반에게 기한이 다 찼으니 라헬을 아내로 맞아 같이 살게 해달라고 요구했다. 22 그래서 라반은 그 고장에 사는 사람들을 모두 청해 놓고 잔치를 베풀었다. 23 밤이 되어 라반은 딸 레아를 야곱에게 데려다 주었다. 그것도 모르고 야곱은 그와 한자리에 들었다. 24 이 때 라반은 딸 레아에게 자기의 계집종 질바를 몸종으로 주어 거느리게 하였다. 25 아침이 되어 야곱이 눈을 떠보니 어이없게도 그것은 레아였다. 야곱은 라반에게 항의하였다. "삼촌이 저에게 이러실 수가 있습니까? 저는 라헬에게 장가들려고 삼촌 일을 해드린 것이 아닙니까? 왜 저를 속이시는 것입니까?" 26 라반은 "우리 고장에서는 작은딸을 큰딸보다 먼저 시집 보내는 법이 없네." 하며 부탁하였다. 27 "초례 기간 한 주일만 채우면 작은딸도 주지. 그 대신 또 칠 년 동안 내 일을 해주어야 하네." 28 야곱은 그 말대로 한 주일을 채웠다. 그제야 라반은 야곱에게 딸 라헬을 아내로 주었다.
시편105:1-11, 45
1. 야훼께 감사하며 그 이름 높이 불러라. 그 장하신 일들을 만방에 알려라.
2. 그분께 노래불러라, 수금 타며 노래불러 드려라. 놀라운 그 일들을 이야기하여라.
3. 그 거룩하신 이름을 자랑하여라. 야훼 찾는 마음에 기쁨 있어라.
4. 야훼를 찾아라, 그의 힘을 빌려라. 잠시도 그의 곁을 떠나지 마라.
5. 얼마나 묘한 일들 하셨는지 생각들 하여라. 그의 기적들, 그 입으로 내리신 판단을 명심하여라.
6. 그의 종 아브라함의 후손들아, 그가 뽑으신 야곱의 자손들아,
7. 그분이 바로 야훼 우리 하느님, 온 세상을 바로 다스리시는 분이시다.
8. 계약을 맺으시며 만대에 내리신 말씀 영원히 잊지 아니하신다.
9. 아브라함과 맺으신 계약, 이사악과 맹세하셨다.
10. 이것은 야곱에게 지키라고 세워주신 법령, 이스라엘이 언제까지나 어길 수 없는 계약이다.
11. "이 가나안 땅을 너희에게 준다. 대대로 물려줄 너희 유산이다."
45. 그 값으로 이스라엘은 주신 법규를 따르고 가르쳐주신 법을 지켜야만 하였다. 할렐루야.
로마8:26-39
26.성령께서도 연약한 우리를 도와주십니다. 어떻게 기도해야 할지도 모르는 우리를 대신해서 말로 다 할 수 없을 만큼 깊이 탄식하시며 하느님께 간구해 주십니다. 27.이렇게 성령께서는 하느님의 뜻을 따라 성도들을 대신해서 간구해 주십니다. 그리고 마음속까지도 꿰뚫어 보시는 하느님께서는 그러한 성령의 생각을 잘 아십니다. 28.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들 곧 하느님의 계획에 따라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에게는 모든 일이 서로 작용해서 좋은 결과를 이룬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29.하느님께서는 이미 오래 전에 택하신 사람들이 당신의 아들과 같은 모습을 가지도록 미리 정하셨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는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셨습니다. 30.하느님께서는 미리 정하신 사람들을 불러주시고 부르신 사람들을 당신과 올바른 관계에 놓아주시고, 당신과 올바른 관계를 가진 사람들을 영광스럽게 해주셨습니다. 31.그러니 이제 무슨 말을 더 하겠습니까? 하느님께서 우리 편이 되셨으니 누가 감히 우리와 맞서겠습니까? 32.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당신의 아들까지 아낌없이 내어주신 하느님께서 그 아들과 함께 무엇이든지 다 주시지 않겠습니까? 33.하느님께서 택하신 사람들을 누가 감히 고소하겠습니까? 그들에게 무죄를 선언하시는 분이 하느님이신데 34.누가 감히 그들을 단죄할 수 있겠습니까? 그리스도 예수께서 단죄하시겠습니까? 아닙니다. 그분은 우리를 위해서 돌아가셨을 뿐만 아니라 다시 살아나셔서 하느님 오른편에 앉아 우리를 위하여 대신 간구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35.누가 감히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떼어놓을 수 있겠습니까? 환난입니까? 역경입니까? 박해입니까? 굶주림입니까? 헐벗음입니까? 혹 위험이나 칼입니까? 36.우리의 처지는, "우리는 종일토록 당신을 위하여 죽어갑니다. 도살당할 양처럼 천대받습니다."라는 성서의 말씀대로입니다. 37.그러나 우리는 우리를 사랑하시는 그분의 도움으로 이 모든 시련을 이겨내고도 남습니다. 38.나는 확신합니다. 죽음도 생명도 천사들도 권세의 천신들도 현재의 것도 미래의 것도 능력의 천신들도 39.높음도 깊음도 그 밖의 어떤 피조물도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를 통하여 나타날 하느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떼어놓을 수 없습니다.
마태13:31-33, 44-52
31.예수께서 또 다른 비유를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하늘 나라는 겨자씨에 비길 수 있다. 어떤 사람이 밭에 겨자씨를 뿌렸다. 32.겨자씨는 모든 씨앗 중에서 가장 작은 것이지만 싹이 트고 자라나면 어느 푸성귀보다도 커져서 공중의 새들이 날아와 그 가지에 깃들일 만큼 큰 나무가 된다." 33.예수께서 또 다른 비유를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어떤 여자가 누룩을 밀가루 서 말 속에 집어넣었더니 온통 부풀어올랐다. 하늘 나라는 이런 누룩에 비길 수 있다." 44."하늘 나라는 밭에 묻혀 있는 보물에 비길 수 있다. 그 보물을 찾아낸 사람은 그것을 다시 묻어두고 기뻐하며 돌아가서 있는 것을 다 팔아 그 밭을 산다." 45."또 하늘 나라는 어떤 장사꾼이 좋은 진주를 찾아다니는 것에 비길 수 있다. 46.그는 값진 진주를 하나 발견하면 돌아가서 있는 것을 다 팔아 그것을 산다." 47."또 하늘 나라는 바다에 그물을 쳐서 온갖 것을 끌어올리는 것에 비길 수 있다. 48.어부들은 그물이 가득 차면 해변에 끌어올려 놓고 앉아서 좋은 것은 추려 그릇에 담고 나쁜 것은 내버린다. 49.세상 끝날에도 이와 같을 것이다. 천사들이 나타나 선한 사람들 사이에 끼여 있는 악한 자들을 가려내어 50.불구덩이에 처넣을 것이다. 그러면 거기서 그들은 가슴을 치며 통곡할 것이다." 51.예수께서 말씀을 마치시고 "지금 한 말을 다 알아 듣겠느냐?" 하고 물으셨다. 제자들은 "예." 하고 대답하였다. 52.예수께서는 이렇게 말씀을 맺으셨다. "그러므로 하늘 나라의 교육을 받은 율법학자는 마치 자기 곳간에서 새 것도 꺼내고 낡은 것도 꺼내는 집주인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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