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6. 6. 나해_연중10주일
사무상 8:4-11, 16-20 / 시편 138 / 2고린 4:13-5:1 / 마르 3:20-35
“의지의 지향점”
-인지부조화의 상태에서 벗어나기-
채야고보 신부 / 제주 한일우정의 교회 사제, Artist
마르코는 전승 자료를 편집하면서 ‘예수의 가족과 친척들이 예수를 방문한 이야기’와 ‘베엘제불과 성령에 대한 논쟁 이야기’를 하나로 묶었습니다. 예수의 가족과 친척들이 예수를 방문한 것은 예수가 미쳤다는 소문 때문입니다. 마르코는 이 이야기를 둘로 나누고 그 사이에 ‘베엘제불 논쟁 사화’를 삽입했습니다. 이 이야기는 마태오복음 12장과 루가복음 11장에도 동시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냥 읽어보면 하나의 이야기인 것 같지만, 행간을 잘 살펴보면 오늘 본문은 다양한 ‘단절어’ 전승 자료들을 한 데 묶어놓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면도날’처럼 첨부된 부분들을 제외하고 관련된 구절들을 세밀하게 잘라보면, 5개 혹은 6개의 각각 다른 전승 자료들이 발견됩니다. ‘단절어’라 함은 예수에 대한 전승 자료들 중 전후 관계가 없이 짧은 문장으로만 전해진 자료들을 말합니다. 단절어들이 어떤 상황에서 예수의 입에서 발설되었는지 모르기 때문에 편집 과정에서 유사한 주제끼리 하나로 묶는 작업을 복음서 기자들은 많이 했습니다. 이러한 문장을 ‘단절어 집성문’이라 합니다. ‘단절어 집성문’은 편집자의 신학적 관점을 잘 드러내기 때문에 이를 통해 저자들의 편집 의도를 파악하면 복음서가 쓰인 공동체의 ‘삶의 자리’와 편집자의 의도를 오늘날에도 확인해 볼 수 있게 됩니다.
마르코는 예수의 가족과 친척들의 방문 이야기를 ‘상황어(아포프테그마)’ 형식으로 담았습니다. 상황어는 예수의 메시지에 어떤 상황을 덧붙여 그 메시지의 의미를 강조하기 위한 헬라시대의 수사적 기법입니다. (불트만) 그러므로 20절-21절, 31절-35절은 비록 나뉘어 있지만 하나의 이야기로 봐도 무방합니다. 예수의 가족과 친척들의 방문이야기는 그 사이에 끼여있는 논쟁 사화의 주제를 더 명확하게 강조합니다. 오늘 읽은 복음서 바로 앞인 마르코복음 3장 13절-19절에는 ‘열 두 사도를 세운 이야기’가 나옵니다. 여기에서 예수께서는 사역의 핵심인 ‘하느님의 말씀 선포’와 ‘구마 사역’을 제자들에게 위임하십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은 ‘하느님의 말씀 선포’와 ‘구마’의 역사가 과연 어떤 권위와 능력으로 이루어진 것인가?라는 질문에 답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해석학적 배경을 기초로 오늘 말씀을 따라가 봅니다.
예수께서 12 사도들에게 주신 이러한 두 가지 임무는 하느님 나라의 선포 사역에 불가분의 관계였음이 오늘 복음서를 통해 드러납니다. 예수께서는 가시는 곳마다 말씀을 전하시고 마귀를 쫓고 병자들을 치료하셨습니다. 가시는 곳마다 신기한 일이 벌어진 거죠. 그래서 예수에 대해 안 좋은 소문이 퍼지기 시작했습니다. 바로 예수께서 베엘제불의 힘을 빌어 마귀를 쫓아낸다는 소문 말입니다.
“‘그는 마귀의 두목 베엘제불의 힘을 빌어 마귀를 쫓아내고 있는 것이다.’하고 헐뜯었다.” (마태 12:24 b)
사람들이 가지는 이러한 오해는 단순한 시기심이나 질투심을 넘어선 “인지부조화”가 그 원인일 수 있습니다. 인지부조화는 두 가지 이상의 상반되는 어떤 현상이나 믿음, 가치 등을 혼란스럽게 경험하게 될 때 개인이 받게 되는 정신적 스트레스나 내적인 혼란상태를 말합니다. 말씀과 병 고침의 현상 앞에서 사람들은 처음 경험하는 신기한 일에 마음이 둘로 나뉘는 ‘양가적 감정’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현상은 분명 실제로 목격됐지만, 그걸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도 또 무시할 수도 없었습니다. 또한 율법사들이나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그 신비한 능력이 예수로부터 말미암은 것이라는 걸 더더욱 인정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인지부조화 상태는 예수의 권위를 깎아내리는 방향으로 해결점을 찾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의 능력이 ‘베엘제불’에게서 비롯됐다고 거짓 증언을 했습니다.
이러한 현상은 예수의 가족과 친척들에게서도 목격됩니다. 그들은 예수의 나쁜 소문에 무척 곤혹스러웠을 것으로 여겨집니다. 오죽했으면 예수를 붙들려고 가족, 친척들이 총동원이 됐겠습니까? 가족들 또한 예수와 그의 능력에 대해 인정하고 싶지 않은 ‘인지부조화’의 상태에 놓이게 됩니다. 사람들은 자신들이 믿고 싶은 것 또는 자신들이 좋아하는 것을 지향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자기보다 잘 난 사람이 잘되는 것에는 별 반응을 안 하던 사람도, 자기와 비슷하던가 또는 좀 열등하다 생각한 사람이 잘되면 내적으로 심한 혼란을 겪게 됩니다. 이러할 때 우리 내면에서 두 마음의 ‘양가적 감정’이 생기고, 어떤 것을 어떻게 수용해야 할지 결정을 해야 하는 심각한 내적 갈등상태에 놓입니다. 자기가 인정하기 싫은 것들에 대해 사람들은 애써 무시하거나, 그것을 수용하는 척 함으로써 ‘인지부조화’의 상태에 놓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심리가 작동하는 방식입니다.
“성령을 모독하는 사람은 영원히 용서받지 못할 것이며 그 죄는 영원히 벗어날 길이 없을 것이다.”(마르 3:29)
이런 관점에서 우리는 이 어려운 말씀을 이해할 단초를 얻습니다. 결국 ‘인지부조화’의 상태는 성령의 역사에 대한 불신앙이 그 원인임이 드러납니다. 인지부조화의 상태에서 벗어나는 길은 우리에게 주신 ‘선한 의지’를 하느님이 원하시는 방향으로 지향점을 설정하는 것뿐입니다.
“한 나라가 갈라져 서로 싸우면 그 나라는 제대로 설 수 없다. 또 한 가정이 갈라져 서로 싸우면 그 가정도 버티어 나갈 수 없다.” (마르 3:24-25)
여기에서 “한 나라”, “한 가정”에 대한 다툼의 비유를 말했지만, 정작 이것은 우리 내면에서 일어나는 인지부조화 상태를 암시합니다. 하느님의 일과 세상의 일 사이에서 우리의 의지를 어느 쪽으로 향하게 할지는 전적으로 개인의 자유 의지에 달려 있습니다. 우리 안에 생기는 이러한 갈등들은 결국 우리의 영혼을 병들게 합니다. 많은 정신질환의 출발점이 이러한 ‘인지부조화’에서 기인하는 사실은 매우 의미심장합니다. 우리 의지가 하느님에게 영향을 받을 수 있다면, 사탄에게도 영향을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자기 결정의 주인이라 생각하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면 우리는 다양하게 주변의 영향을 받거나 또 남에게 영향을 주면서 생활하게 마련입니다. 아내, 남편, 자녀들, 부모님, 그리고 친구들이나 동료들 등. 우리는 결코 독단적으로 어떤 선택을 자유롭게 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의지가 다른 외부적인 요인들에 의해 유린당하지 않도록 자신을 잘 살피고 하느님 앞에 깨어 있을 필요가 있습니다. 마르코가 명확하게 기록하지 않은 부분을 마태오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나는 하느님께서 보내신 성령의 힘으로 마귀를 쫓아내고 있다.”(마태 12:28 a)
예수의 사역에 대한 율법사들의 비난은 결국 예수에 대한 모독일 뿐만 아니라 성령에 대한 불경죄인 것입니다. 성령의 역사 앞에 우리의 ‘인지부조화’의 상태가 결국 성령을 거부하는 것임이 드러납니다. 이는 우리의 자유의지가 하느님을 향하지 않은 결과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마르코 복음은 이를 ‘성령을 모독하는 사람’이라고 규정합니다. 종말론적으로 그러한 사람은 영원히 용서받지 못한다고 엄중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께 대한 비방은 곧 성령에 대한 비방이며, 그것은 성령의 능력을 거부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보이는 것에 눈길을 돌리지 않고 보이지 않는 것에 눈길을 돌립니다. 보이는 것은 잠시뿐이지만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하기 때문입니다. (2 고린 4:18)
결국 우리 내면에 생기는 ‘양가적 감정’이나 ‘인지부조화’는 우리의 의지가 어디를 바라보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우리의 의지는 눈에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향하는 것이 아니라, 보이는 것, 허망한 것을 향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세세하게 우리 마음의 소리에 귀 기울이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허망한 것에 마음을 두지 않도록 사도 바울로는 다음과 같이 우리에게 제안합니다.
더 많은 사람들이 하느님의 은총을 받고 감사하는 마음이 넘쳐서 하느님께 영광이 되게 하려는 것입니다. (2 고린 4:15)
‘하느님의 은총’을 받길 갈구하면서, 매사에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라고 말입니다. 쉽지 않은 일이지만, 또한 불가능한 일도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우리의 것이라 믿고 있는 ‘자유 의지’가 올바른 지향점을 갖는 것입니다. 커다란 배를 움직이는 것은 배에 달린 작은 키이고, 그 키를 움직이는 것은 더 작은 조종 핸들입니다. 키를 조종하는 핸들을 조금만 각도를 바꿔도 시간이 흐르면서 배는 천천히 방향을 선회할 수 있게 됩니다. 급격한 방향 전환은 결국 배를 침몰시키고 맙니다. 우리 의지의 지향점을 움직이는 조종 핸들을 배를 움직이듯이 조금만 각도를 틀어보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우리의 일상이 배처럼 천천히 어느 순간에 방향을 선회할 수 있게 됩니다. 의지의 지향점을 하느님께 고정하시고 늘 감사의 마음을 가져보시길 바랍니다. 성령께서 늘 우리의 약한 의지를 도와주십니다. 일단 선한 의지가 하느님을 향하기 시작하면 그때부터 성령께서 여러분을 인도하실 것입니다. 일상의 많은 시간들 중에 여러분의 시간이 거룩하게 선별되고, 의지가 성화되는 귀한 시간을 조금씩 만들어가시기 바랍니다. 그러다 보면 언젠가는 여러분의 배가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방향으로 순풍을 타고 자연스럽게 나아가고 있을 것입니다. 기도는 인간 실존이라는 거대한 바다에서 우리를 길 잃지 않도록 늘 성령과 연결해 주는 등대와 같은 빛입니다. 여러분의 선한 의지가 오직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 사용되길 간절히 기원합니다. 아멘.
연중10주일 (나해) 전례독서
본기도
전능하신 하느님, 성령을 통하여 우리를 향한 주님의 뜻을 알려주시나이다. 비오니, 우리가 주님의 사랑과 능력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희망을 견고히 붙들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한 분 하느님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나이다. 아멘.
사무상 8:4-11, 16-20
4 그러자 모든 이스라엘 장로들이 한 곳에 모여 라마로 사무엘을 찾아가 5 건의하였다. “당신은 이제 늙고 아드님들은 당신의 길을 따르지 않으니 다른 모든 나라처럼 왕을 세워 우리를 다스리게 해주십시오.” 6 사무엘이 “우리를 다스릴 왕을 세워주시오.” 하는 말을 듣고, 마음이 언짢아 야훼께 기도하니 7 야훼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셨다. “백성이 하는 말을 그대로 들어주어라. 그들은 너를 배척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왕으로 모시기 싫어서 나를 배척하는 것이다. 8 그들은 내가 이집트에서 데려내온 이후 이날이때까지 나를 저버리고 다른 신들을 섬기며 그런 짓을 해왔다. 너한테도 지금 그렇게 하는 것이다. 9 그러니 이제 그들의 말을 들어주어라. 그러나 엄히 경고하여 왕이 그들을 어떻게 다스릴 것인지를 일러주어라.”
10 사무엘은 왕을 세워달라는 백성에게 야훼께서 하신 말씀을 낱낱이 일러주 었다. 11 사무엘은 이렇게 일러주었다. “왕이 너희를 어떻게 다스릴 것인지 알려 주겠다. 그는 너희 아들들을 데려다가 병거대나 기마대의 일을 시키고 병거 앞에서 달리게 할 것이다. … 16 너희의 남종 여종을 데려다가 일을 시키고 좋은 소와 나귀를 끌어다가 부려먹고 17 양떼에서도 십분의 일 세를 거두어갈 것이며 너희들마저 종으로 삼으리라. 18 그 때에 가서야 너희는 너희들이 스스로 뽑아 세운 왕에게 등을 돌리고 울부짖겠지만, 그 날에 야훼께서는 들은 체도 하지 않으실 것이다.”
19 사무엘이 이렇게 말해 주었건만 백성은 여전히 고집을 부렸다.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왕을 모셔야겠습니다. 20 그래야 우리도 다른 나라처럼 되지 않겠습니까? 우리를 다스려줄 왕, 전쟁이 일어나면 우리를 이끌고 나가 싸워줄 왕이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시편 138
1 주여,
. 내 마음 다하여 감사기도 드립니다. ◯
. 당신을 모시고 서 있는 이들 앞에서
. 당신을 찬양합니다.
2 거룩한 당신의 궁전 향하여 엎드려 ◯
. 인자함과 성실함을 우러르며,
¶ 당신의 이름 받들어 감사기도 드립니다. ◯
. 언약하신 그 말씀,
. 당신 명성보 다 크게 퍼졌습니다.
3 내가 부르짖을 때 당신은 들어주시고 ◯
. 힘을 한껏 북돋우어주셨습니다.
4 주여,
. 당신의 언약 말씀을 듣고서 ◯
. 세상의 모든 왕들이
. 당신께 감사노래 부릅니다.
5 그들이 주께서 밟으신 길을 찬양하며 ◯
. “주 그 영광 크시다” 노래합니다.
6 주여,
. 당신은 높이 계셔도 낮은 사람 굽어보시고 ◯
. 멀리 계셔도 거만한 자 아십니다.
7 내가 고생길을 걸을 때에 이 몸 살려주시며,
. 손을 드시어 살기 띤 원수들을 치시고 ◯
. 오른손으로 붙들어 이 몸 구해주십니다.
8 주여,
. 모든 일 나를 위해 하심이오니,
. 이미 시작하신 일에서 손을 떼지 마소서. ◯
. 당신의 사랑 영원하시옵니다.
⦿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
. 처음과 같이 지금도 그리고 영원히, 아멘.
2고린 4:13-5:1
13 “나는 믿었다. 그러므로 나는 말하였다. 시편 116:10”라는 말씀이 성서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도 이와 똑같은 믿음의 정신을 가지고 믿고 또 말합니다. 14 그것은 주 예수를 다시 살리신 분이 예수와 함께 우리도 다시 살리시고 여러분과 함께 우리를 그분 곁에 앉히시리라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15 이것은 모두 여러분을 위한 것으로서 더 많은 사람들이 하느님의 은총을 받고 감사하는 마음이 넘쳐서 하느님께 영광이 되게 하려는 것입니다.
16 그러므로 우리는 낙심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외적 인간은 낡아지지만 내적 인간은 나날이 새로워지고 있습니다. 17 우리는 지금 잠시 동안 가벼운 고난을 겪고 있지만 그것은 한량없이 크고 영원한 영광을 우리에게 가져다 줄 것입니다. 18 우리는 보이는 것에 눈길을 돌리지 않고 보이지 않는 것에 눈길을 돌립니다. 보이는 것은 잠시뿐이지만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하기 때문입니다.
5:1 우리가 들어 있는 지상의 장막집이 무너지면 우리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에 들게 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것은 사람의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세워주시는 집입니다.
마르 3:20-35
20 예수께서 집에 돌아오시자 군중이 다시 모여들어서 예수의 일행은 음식을 먹을 겨를도 없었다.
21 이 소식을 들은 예수의 친척들은 예수를 붙들러 나섰다. 예수가 미쳤다는 소문이 돌고 있었기 때문이다.
22 예루살렘에서 내려온 율법학자들도 예수가 베엘제불에게 사로잡혔다느니 또는 마귀 두목의 힘을 빌려 마귀를 쫓아낸다느니 하고 떠들었다.
23 그래서 예수께서는 그들을 불러다 놓고 비유로 말씀하셨다. “사탄이 어떻게 사탄을 쫓아낼 수 있겠느냐? 24 한 나라가 갈라져 서로 싸우면 그 나라는 제대로 설 수 없다. 25 또 한 가정이 갈라져 서로 싸우면 그 가정도 버티어 나갈 수 없다. 26 만일 사탄의 나라가 내분으로 갈라진다면 그 나라는 지탱하지 못하고 망하게 될 것이다.
27 또 누가 힘센 사람의 집에 들어가서 그 세간을 털어가려면 그는 먼저 그 힘센 사람을 묶어놓아야 하지 않겠느냐? 그래야 그 집을 털 수 있을 것이다.
28 나는 분명히 말한다. 사람들이 어떤 죄를 짓든 입으로 어떤 욕설을 하든 그것은 다 용서받을 수 있으나 29 성령을 모독하는 사람은 영원히 용서받지 못할 것이며 그 죄는 영원히 벗어날 길이 없을 것이다.” 30 이 말씀을 하신 것은 사람들이 예수를 더러운 악령에 사로잡혔다고 비방했기 때문이다.
31 그 때 예수의 어머니와 형제들이 밖에 와 서서 예수를 불러달라고 사람을 들여보냈다. 32 둘러앉았던 군중이 예수께 “선생님, 선생님의 어머님과 형제분들 이 밖에서 찾으십니다.” 하고 말하였다. 33 예수께서는 “누가 내 어머니이고 내 형제들이냐?” 하고 반문하시고 34 둘러앉은 사람들을 돌아보시며 말씀하셨다. “바로 이 사람들이 내 어머니이고 내 형제들이다. 35 하느님의 뜻을 행하는 사람이 곧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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