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6. 13. 나해_연중11주일
사무상 15:34-16:13 / 시편 20 / 2고린 5:6-10(11-13)(14-17) / 마르 4:26-34
하느님 나라의 일상성(日常性) 1
채야고보 신부 / 제주 한일우정의 교회 사제, Artist
하느님 나라는 특수성과 일상성을 동시에 지닙니다.
니고데모에게 예수께서 말씀하신 대로, 우리는 ‘하늘의 것(τὰ’ ἐπουράνια)을 알 수도 이해할 수도 없습니다. 하느님의 계시가 없으면 이해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계시해 주신 ‘하늘의 것’을 믿습니다. 곧 하느님께서 세상을 사랑하셔서 하느님의 외아들을 육신으로 보내셨고, 그가 고난 받아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셨으며, 언젠가 다시 오신다는 것 말입니다. 이러한 것은 성서와 우리 믿음의 선배로부터 우리가 전해받은 것이고, 우리는 그것이 진실임을 믿고, 또 성령께서 이를 우리 안에 확증해 주십니다. 이를 우리는 하느님 나라의 특수성이라 부를 수 있습니다. 특수성이라 함은 그것이 인간 스스로 깨달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특수계시가 수반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느님 나라의 일상성은 잘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살아가는 일상 가운데 있고 또 우리가 상식적으로 알고 있는 자연법칙에 위배되지도 않습니다. 이를 보통 ‘일반 계시’라 부르지만, 저는 이를 ‘일상성’이라 부릅니다. 바람이 불어 구름이 끼면 비가 오고, 잎이 지고 해가 기울면 겨울이 오는 이치와 같습니다. 주님께서는 이 땅에 우리의 믿음의 선배들과 함께 계실 때 하느님의 나라의 일상성을 우리의 경험에서 이해할 수 있도록 비유로 설명해 주셨습니다. 오늘 본문은 이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땅이 저절로 열매를 맺게 하는 것인데 처음에는 싹이 돋고 그 다음에는 이삭이 패고 마침내 이삭에 알찬 낟알이 맺힌다. (마르 4:28)
씨를 뿌리고 나면 어떻게 싹이 트는지는 잘 모르지만 식물은 자라납니다. 거기에 우리의 노력이 더해져서 피를 뽑고 거름과 비료를 주면서 잘 가꾸면 곡식이 익고, 우리는 추수 때가 된 줄 알고 수확을 합니다. 또 싹이 돋으면 이삭이 패고 그리고 알찬 낟알이 맺힙니다. 이러한 것은 농부가 아니더라도 모두가 알 수 있는 너무나 자명한 사실입니다. 이와 같이 하느님의 나라는 땅에 심긴 씨앗처럼 저절로 계속해서 자라납니다. 즉 하느님의 나라는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끊임없이 우리의 일상 속에서 성장해 간다는 뜻입니다. 그 성장은 바로 현재에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오늘과 또 다가오는 오늘들이 연속해서 현재를 규정합니다. 이러한 현재는 끊임없이 움직이고 자라나는 현재입니다.(박태식)
하느님 나라를 무엇에 견주며 무엇으로 비유할 수 있을까? 그것은 겨자씨 한 알과 같다.(마르 4: 30-31)
여기에서도 주님께서는 너무나 일상적이고 상식적인 차원에서 ‘하느님 나라’를 설명해주고 계십니다. 겨자씨는 자라나서(현재) 언젠가는 겨자 나무가 되고 새들의 안식처가 됩니다(미래). 겨자씨가 자라 큰 나무가 되듯이 하느님의 나라는 이와 같이 일상 속에서 성장합니다. 현재에 계속해서 성장을 거듭하며 종국에는 모든 생명을 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느님 나라는 성장하는 현재와 특정한 시기에 완성될 미래라는 중의적 의미를 지닙니다. 정리해보면 하느님 나라는 현재에 끊임없이 움직이고 성장하며 결국 종말에 완성될 것입니다. ‘성장의 현재성’과 ‘실현될 미래성’이 동시에 존재합니다. 그래서 신학자들은 ‘이미 그러나 아직’이란 말로 이를 표현합니다.
사람들은 ‘하느님 나라’를 ‘천국’으로 이해하기도 하고, 죽어서 가는 곳으로 이해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마르코가 전하는 복음에 담긴 ‘하느님 나라’는 장소적인 것이 아닙니다. 뉴튼의 법칙에 따라 우리가 이해하는 ‘공간’과 ‘장소’의 개념은 여기에 없습니다. 하느님 나라를 장소로 보는 것보다는 오히려 ‘통치’라는 개념으로 해석하는 것이 더 성서의 해석에 가깝습니다. ‘βασιλεία τοῦ Θεοῦ 바실레이아 투 테우’. 그러나 유대인들은 하느님의 이름을 직접 거론하는 것을 꺼리기 때문에 랍비문학에서는 이를 완곡하게 표현해서 ‘하늘나라’라고 했습니다. 하느님께서 왕이 심을 강조한 표현입니다. 복음사가 중 유일하게 마태오도 ‘하늘나라’라는 표현을 사용했습니다. ‘하늘 οὐρανός’이란 말은 ‘통치’라는 의미를 포함하고, 이러한 통치에 대한 왕권은 인간적 노력에 의해 생겨난 것이 아님을 강조한 것입니다. 왕국은 늘 통치자를 전제하기 때문에 결국 하느님의 나라는 모든 세상을 주관하시고 통치하시는 왕이신 그리스도께서 다스리시는 나라로 이해하면 무난합니다. 즉 세상 모든 만물과 우리 인간의 삶과 모든 부분들이 그분께 종속됨을 의미합니다. 여기에는 우리의 현재인 ‘일상’도 포함됩니다.
오늘의 말씀에 담긴 비유들은 결국 하느님께서 우리의 일상에 관여하시고, 우리를 통치하시는 방식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나라는 인간의 언어로 표현하는 데 한계가 있기 때문에 예수께서는 늘 비유로 이를 설명하셨습니다. 오늘 읽은 말씀처럼 너무 일상적이라서 새로운 것, 특별한 것을 기대했던 대중의 눈높이랑은 차이가 있습니다. 일상은 늘 우리에게 매일 반복되는 치열한 삶의 현장과 긴장으로 다가옵니다. 생일이나 여행을 간다든지, 무슨 특별한 일이 생겨야 우리는 우리의 일상에서 잠시 놓임을 받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관점은 우리와 다릅니다. 그분은 우리 일상의 소소하고 세세한 부분들을 놓치지 않으셨습니다. 일상의 단조로움과 고단함 속에서도 주님께서는 일상 속에서 늘 ‘작은 것들’에 대한 배려가 있으셨습니다. 주님께서 일상에서 소외된 자들의 친구가 되어주신 것은 그러한 연유에서 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일상의 소소한 것들에 집중하셨고 또 이를 비유로도 사용하신 것입니다.
다음은 제가 어떤 전시회에서 봤던 작품 라벨에 담긴 문구들입니다. 작가가 길가에 나뒹구는 나뭇잎과 솔방울 등을 바라보며 느꼈던 느낌을 담은 것입니다.
“새 잎이 돋을 때의 기쁨”, “무성한 지난 여름의 추억”, “가을날 화려한 색의 변신”, “초겨울 낙하, 아름다운 마무리”, “봄날의 따스한 햇볕”, “꿀벌들의 화려한 행진”, “바람을 타고 오는 진한 향기”, “찬바람을 견뎌 낸 강인함”, “신선한 아침 이슬” (2021 숲, 가게 by design studio loci)
작가가 숲에서 느꼈을 많은 일상의 감흥들이 아름답게 작품과 문구들 속에 담겼습니다.
그러고 보면 우리의 일상은 결코 우리 인간만을 위해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아름답고 왕성한 다양한 생명들의 기운들로 가득 찼습니다. 어느 것 하나 소중하지 않은 것들이 없습니다. 귀하게 여기고 애정을 가지고 바라보면 모든 것이 다 소중하게 다가옵니다. 바로 하느님 나라는 그러한 생명들의 실존에 관여하기에 우리의 일상과 결코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에 놓입니다.
예수께서는 그들이 알아들을 수 있을 정도로 이와 같은 여러 가지 비유로써 말씀을 전하셨다. 그들에게는 이렇게 비유로만 말씀하셨지만 제자들에게는 따로 일일이 그 뜻을 풀이해 주셨다. (마르 4: 33-34)
“알아들을 수 있을 정도로” 설명을 하시고서는 또 제자들에게 “따로 일일이 그 뜻을” 설명해 주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한 마디로 이렇게 쉬운 것도 제자들이 알아듣지 못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이를 학자들은 ‘제자들의 몰이해’라고 표현합니다. 이는 마르코의 신학적 의도가 반영된 것으로 봅니다. 앞으로 우리는 전례 독서에 따라 올 한 해 동안 마르코 복음을 계속 읽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마르코 복음이 지닌 이런 특징은 주지할 필요가 있습니다. 가장 일상적인 상식의 차원에서 예수께서 말씀을 하셔도 끊임없이 제자들의 몰이해가 계속됩니다. 이런 제자들의 몰이해 다음에는 반드시 ‘제자 특수 교육’이 이어집니다. 이러한 편집 구성은 분명 마르코의 신학적 의도를 담고 있습니다. 여기서 다 설명을 드릴 수 없지만, 한 가지 기억하실 것은, 이는 ‘예수의 십자가 처형’이라는 이해할 수 없는 수치를 숨기는 방식입니다. 처음에는 숨겼다가 때가 되면 우리가 죽인 예수가 우리를 구원하실 바로 그 그리스도이심이 밝혀진다는 설정입니다. 이를 우리는 ‘그리스도 비밀 사상’이라 부릅니다. 윌리엄 브레데라는 학자가 처음 주장한 이론입니다.
그러나 저는 여기에 한 가지를 덧붙이고 자 합니다. “그들이 알아들을 수 있을 정도로” 쉽게 말씀하신 것은 철저히 예수님의 일상성을 반영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 나라의 특수성은 우리에게 계시가 있기 전에는 결코 우리 스스로 이해할 수도 알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우리와 소통하는 일상의 방식을 선택하신 것입니다. 주님의 ‘비유’는 이러한 소통의 강력한 배려입니다. 무슨 배려입니까? 죽을 수밖에 없는 우리 인간에 대한 따뜻한 사랑. 이것이 주님께서 사신 일상의 한 단면입니다. 그는 자비가 넘치는 분이셨습니다.
여기에서 잠시 우리 자신을 돌아봅니다.
우리의 일상은 안녕합니까?
우리의 현재가, 우리의 일상이 무의미하게 흘러가고 있지는 않습니까? 어제와 오늘이 같고, 오늘과 내일이 같은 매일의 반복과 지루함과 단조로움으로 가득한 일상. 우리는 우리의 일상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습니까? 하느님 나라의 현재성이 씨앗이 움트듯이 일상 속에서 계속해서 성장하고 움직이고 있다는 점을 상기하시기 바랍니다. 일상은 그냥 흘려보내는 시간이 아닙니다. 매 순간 시시각각 성장과 변화와 움직임으로 가득한 시간인 것입니다. 모든 생태계의 생명들이 이러한 일상을 함께 공유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생명이 멈추는 것은 곧 죽음이기 때문입니다. 일상은 생명을 품고 끊임없이 우리의 주위를 맴돕니다. 그러니 허투루 하루를 보낼 수 없습니다. 어떻게 싹이 움트고 열매가 맺히는지 우리는 모르지만, 그러한 기다림의 과정이 필요한 것을 알고 있습니다. 성장의 프로세스. 결코 한 걸음에 십리를 갈 수는 없는 법입니다. 빨리 꽃이나 열매를 보겠다고 자라고 있는 식물을 닦달할 수도 없습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일상의 단조로움과 지속성 속에서도 끊임없이 자신의 속도로 우리의 일상 속에 스며듭니다. 그래서 매 순간 우리는 기도하게 되는 것입니다. 강박증같이 들릴 수도 있지만, 하느님 나라의 영성은 늘 섬세함과 세세함 그리고 소소함을 요구하기 때문입니다. 인도의 작가 아룬다티 로이는 이를 ‘작은 것들의 하느님’이라 표현했습니다.
좌우를 둘러보시기 바랍니다. 항상 낯익은 얼굴들이 보이시죠. 다음 주에는 각자가 씨앗이 자라듯이 조금은 더 성장한 모습을 서로에게서 보시게 될 것입니다. “처음에는 싹이 돋고 그 다음에는 이삭이 패고 마침내 이삭에 알찬 낟알이 맺힌다.”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매주일 이렇게 만나면서 조금씩 서로의 변화와 성장을 감지했으면 좋겠습니다. 점점 늙어가고 지쳐가는 우리의 모습이 아니라, 점점 성장하는 하느님 나라의 모습이 우리 안에서 발견되길 바랍니다. 그러면 우리의 일상이 점점 더 풍성해질 것입니다.
이제 말씀을 마칩니다. 종말에 완성될 하느님 나라를 바라보고 현재를 살 수는 없습니다. 사후에 하느님 곁에 가서 만나게 될 하느님 나라를 바라 보고 살 수도 없습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인간 실존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욱 가혹하고 또 우리의 일상을 송두리째 좌절시키기도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참 힘든 일상을 보내고 있습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우리는 현재를 놓칠 수 없습니다. 주님께서 배려해주신 일상의 소중함을 다시 깨닫고 그 속에 깃든 아름다운 하느님 나라를 찾아가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할 때 우리의 일상이 성화되고, 우리의 일상이 온전히 하느님께 봉헌으로 드려지게 되는 것입니다. 거룩함은 여러분에게 또 다른 삶의 아름다움을 선사해 줄 것입니다. 이건 저의 말이 아니라 성서가 보증하는 말입니다. 여러분의 일상이 ‘하느님 나라의 일상성’으로 가득하시길 기원합니다. 아멘.
연중11주일 (나해) 전례독서
본기도
전능하신 하느님, 우리가 성령을 따라 살지 않으면 주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나이다. 비오니, 우리에게 성령을 내리시어 모든 일에서 우리 마음을 이끄시고 다스리소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한 분 하느님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나이다. 아멘.
사무상 15:34-16:13
34 사무엘은 라마로 돌아가고 사울은 기브아에 있는 궁궐로 돌아갔다. 35 사무엘은 죽는 날까지 사울을 두 번 다시 만나지 않았다. 그리고 야훼께서 사울을 이스라엘 위에 왕으로 세우셨다가 후회하신 일을 생각하며 통곡하여 마지않았다.
1 야훼께서 사무엘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사울을 이스라엘 왕의 자리에서 파면시켰다고 해서 너는 언제까지 이렇게 슬퍼만 하고 있을 셈이냐? 기름을 뿔에 채워가지고 길을 떠나거라. 내가 너를 베들레헴에 사는 이새라는 사람에게 로 보낸다. 그의 아들 가운데서 내가 왕으로 세울 사람을 하나 보아두었다.” 2 사무엘이 “사울이 알면 저를 죽일 텐데 어떻게 갑니까?” 하고 여쭙자 야훼께서는, “암송아지 한 마리를 끌고 가거라. 야훼께 제사를 드리러 왔다고 하면서 3 이새를 제사에 초청하여라. 그러면 네가 할 일을 내가 알려주리라. 너는 내가 지적하여 일러주는 자에게 기름을 부어 그를 성별시켜 나에게 바쳐라.” 하고 이르셨다. 4 사무엘은 야훼께서 이르시는 대로 하였다. 그가 베들레헴에 다다르자 그 성읍의 장로들은 안절부절못하고 그를 맞으며 “언짢은 일로 오신 것은 아니겠지요?” 하고 물었다. 5 “아니오. 좋은 일로 왔소. 야훼께 제사를 드리러 온 것이오. 그러니 모두들 목욕재계하고 함께 제사 드리러 갑시다.” 이렇게 일러놓고 사무엘은 이새와 그의 아들들을 목욕재계시킨 다음 제사에 나오라고 초청하였 다. 6 그들이 나타나자 사무엘은 엘리압을 보고 속으로 “바로 여기 야훼께서 기름 부어 성별하실 자가 있구나.” 하고 생각하였다. 7 그러나 야훼께서는 사무엘에게 “용모나 신장을 보지는 마라. 그는 이미 내 눈 밖에 났다. 하느님은 사람 들처럼 보지 않는다. 사람들은 겉모양을 보지만 나 야훼는 속마음을 들여다본다.” 하고 이르셨다. 8 다음으로 이새는 아비나답을 불러 사무엘 앞에 나와 서게 하였다. 그러나 사무엘은 “이 아들도 야훼께서 뽑으신 아들이 아니오.” 하고 말하였다. 9 이새가 다시 삼마를 보여드렸지만, 사무엘은 그도 야훼께서 뽑으신 아들이 아니라고 하였다. 10 이렇게 이새가 아들 일곱을 사무엘 앞에 나와 뵙게 하였다. 그러나 사무엘은 “이 아들 가운데는 야훼께서 뽑으신 아들이 없소.” 하고 11 이새에게 그 밖에 아들은 또 없느냐고 물었다. 이새가 “막내가 또 있긴 하지만 지금 양을 치고 있습니다.” 하고 대답하자, 사무엘이 이새에게 “사람을 보내 데려오시오. 그가 올 때까지 우리는 식탁에 앉을 수가 없소.” 하고 일렀다. 12 이새가 사람을 보내어 데려온 그는 볼이 붉고 눈이 반짝이는 잘생긴 아이였다. 야훼께서 말씀을 내리셨다. “바로 이 아이다. 어서 이 아이에게 기름을 부어라.” 13 그리하여 사무엘은 기름 채운 뿔을 집어 들고 형들이 보는 앞에서 그에게 기름을 부었다. 그러자 야훼의 영이 다윗에게 내려 그 날부터 줄곧 그에게 머물러 있었다. 사무엘은 길을 떠나 라마로 갔다.
시편 20
1 주님께 비오니, 우리 임금이 곤경에서 기도하거든 ◯
. 야곱의 하느님은 그 기도를 들으시고 지켜 주소서.
2 성소로부터 임금에게 도움을 내리시고 ◯
. 시온산에서 임금을 붙들어주소서.
3 임금이 바치는 예물을 마음에 두시고 ◯
. 드리는 번제를 즐거이 받아주소서.
4 임금의 계획을 이루어 주시고, ◯
. 그의 소원 그대로 채워주소서.
5 임금의 승리를 소리 높여 기뻐하고,
. 하느님 이름으로 깃발 높이 치키리니, ◯
. 주여, 우리 임금의 모든 청원을 들어주소서.
6 이제는 알았습니다. 주께서 기름 부으신 임금에게 승리 주심을,
. 그 거룩한 하늘에서 그의 기도 들으시고 ◯
. 오른손 힘차게 뻗어 승리 주심을!
7 누구든 병거를 믿고 또 누구는 기마를 믿지만 ◯
. 우리는 우리 하느님 야훼의 이름을 믿습니다.
8 그 사람들은 휘청거려 쓰러지겠지만 ◯
. 우리는 꿋꿋이 선 채 넘어지지 않습니다.
9 주여! 임금에게 승리를 주소서. ◯
. 우리가 부르짖을 때에 들어주소서.
⦿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
. 처음과 같이 지금도 그리고 영원히, 아멘.
2고린 5:6-10(11-13), 14-17
6 그러므로 우리는 언제나 마음이 든든합니다. 그러나 육체에 머물러 있는 동안에는 우리가 주님에게서 멀리 떠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7 사실 우리는 보이는 것으로 살아가지 않고 믿음으로 살아갑니다. 8 그러므로 우리는 마음이 든든하며 오히려 육체를 떠나서 주님과 함께 평안히 살기를 원합니다. 9 그러나 우리가 육체에 머물러 있든지 떠나서 주님 곁에 가 있든지 오직 그분을 기쁘게 해드리는 일만이 우리의 소원입니다. 10 우리가 다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나가는 날에는 우리가 육체에 머물러 있는 동안에 한 일들이 숨김없이 드러나서 잘한 일은 상을 받고 잘못한 일은 벌을 받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11 우리는 주님이 두려운 분이시라는 것을 알고 있으므로 이것을 사람들에게 알리려고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어떤 사람들인지 잘 알고 계십니다. 여러분도 우리를 사실대로 알아주었으면 합니다. 12 그렇다고 여러분에게 또다시 우리 자신을 내세우려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우리를 자랑할 수 있는 근거를 여러분에게 주어 속에는 아무것도 자랑할 것이 없으면서도 겉만 가지고 자랑하는 자들의 말을 반박할 수 있게 해주려는 것뿐입니다. 13 우리가 미쳤다면 그것은 하느님을 위해서 미친 것이고 우리가 온전하다면 그것은 여러분을 위해서 온전한 것입니다. 14 그것은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그토록 강요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그리스도 한 분이 모든 사람을 대신해서 죽으셨으니 결국 모든 사람이 죽은 것입니다. 15 그리스도께서 이렇게 죽으신 것은 사람들이 이제는 자기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자기들을 위해서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신 분을 위하여 살게 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16 그러므로 우리는 이제부터 아무도 세속적인 표준으로 판단하지는 않을 것 입니다. 전에는 우리가 세속적인 표준으로 그리스도를 이해하였지만 이제는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17 누구든지 그리스도를 믿으면 새 사람이 됩니다. 낡은 것은 사라지고 새것이 나타났습니다.
마르 4:26-34
26 예수께서 또 말씀하셨다. “하느님 나라는 이렇게 비유할 수 있다. 어떤 사람이 땅에 씨앗을 뿌려놓았다. 27 하루하루 자고 일어나고 하는 사이에 씨앗은 싹이 트고 자라나지만 그 사람은 그것이 어떻게 자라는지 모른다. 28 땅이 저절로 열매를 맺게 하는 것인데 처음에는 싹이 돋고 그 다음에는 이삭이 패고 마침내 이삭에 알찬 낟알이 맺힌다. 29 곡식이 익으면 그 사람은 추수 때가 된 줄 을 알고 곧 낫을 댄다.”
30 예수께서 또 말씀하셨다. “하느님 나라를 무엇에 견주며 무엇으로 비유할 수 있을까? 31 그것은 겨자씨 한 알과 같다. 땅에 심을 때에는 세상의 어떤 씨앗보다도 더욱 작은 것이지만 32 심어놓으면 어떤 푸성귀보다도 더 크게 자라고 큰 가지가 뻗어서 공중의 새들이 그 그늘에 깃들일 만큼 된다.”
33 예수께서는 그들이 알아들을 수 있을 정도로 이와 같은 여러 가지 비유로써 말씀을 전하셨다. 34 그들에게는 이렇게 비유로만 말씀하셨지만 제자들에게는 따로 일일이 그 뜻을 풀이해 주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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