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6. 20. 나해_연중12주일
사무상 17:32-49 / 시편 9:9-20 / 2고린 6:1-13 / 마르 4:35-41
기도의 일상성(日常性) 2
채야고보 신부 / 제주 한일우정의 교회, Artist
그런데 마침 거센 바람이 일더니 물결이 배 안으로 들이쳐서 물이 배에 거의 가득 차게 되었다. 그런데도 예수께서는 뱃고물을 베개 삼아 주무시고 계셨다. (마르 4:31-32a)
배에 물이 가득 찼는 데도 주님께서는 뱃고물을 베개 삼아 주무시고 계셨습니다. 이 장면을 늘 읽을 때마다 저는 안절부절못하고 두려움에 떠는 제자들과 태연하게 주무시는 주님의 얼굴이 대비해서 떠오르곤 합니다. ‘거센 바람’과 파도가 몰아치는 상황을 주님께서 전혀 모르시지 않으셨을 겁니다. 단지 주님께서는 늘 평소에 하시던 대로 사역을 마치고 기도 처소로 이동하시는 동안 잠시 눈을 부치신 것으로 보입니다. 그날은 평소의 일상과 전혀 다르지 않은 밤이었을 겁니다. 평소와 똑같은 일상이었지만, 그날따라 바람이 갑자기 불면서 그 일상성은 깨지고 맙니다. 제자들은 그 바람과 파도에 두려워 떨었습니다. 그들의 일상성과 항상성은 두려움과 함께 한순간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그러고 보면 흔들린 것은 배가 아니라 제자들의 마음이었을지도 모릅니다. 제자들의 반응과 흐트러짐 없는 주님의 모습은 강한 심리적 상태의 대비를 보여줍니다. 평온함과 불안함. 주님의 평온한 모습을 상상하면 전 경이로움과 부러움이 생기곤 합니다. 우리의 일상 속에서 저러한 평온함 그리고 항상성을 언제나 유지할 수 있다면 좋겠다는 생각.
오늘 복음서 말씀은 대표적인 ‘자연이적사화’입니다. 그 편집 형식은 ‘치유-구마이적사화’의 틀을 그대로 따르고 있음을 봅니다. 상황묘사(35-38) - 기적묘사(39a) - 기적실증(39b) - 주변반응(41). 40절에 제자들의 믿음 없음을 꾸짖는 대목은 전형적인 마르코의 스타일입니다. 지난번에 말씀 드렸던 ‘메시아 비밀 사상’ 중 ‘제자들의 몰이해’를 표현한 것입니다. 학자들은 이러한 ‘자연이적사화’를 요나의 이야기에서 그 모티브를 발견합니다. 요나서 1장의 말씀이 이와 유사한 형식을 띄고 있기 때문입니다. 폭풍이 일어나고, 요나는 배 밑창에서 잠이 들었고, 그리고 선장이 찾아와 다급하게 요나를 잠에서 깨웁니다. 결국 요나를 바다에 던진 후에 성난 바다가 잠잠해졌다는 것이 요나 이야기의 틀입니다. 오늘 이야기와 유사성이 발견됩니다. 만약 마르코가 이러한 요나 이야기에서 모티브를 가져왔다면 그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요나보다 월등하신 분으로서 예수님을 소개하고자 한 것입니다. 즉 폭풍과 바다를 잠잠하게 하시는 하느님의 권능을 가진 분으로 말입니다. 그래서 학자들은 ‘치유-구마이적사화’는 역사적 가능성을 인정하는 반면, ‘자연이적사화’에 대해서는 신빙성이 부족하다고 말합니다. 사실을 확인할 길이 없으니 우리는 역사적 사실보다는 이 이야기에 담긴 ‘의미의 진실’을 따라가는 편이 훨씬 좋을 것 같습니다.
평소에 늘 하던 대로 예수와 제자들은 이동을 했습니다. 그러나 갑자기 몰아친 바람 때문에 배가 출렁이고 파도가 휘몰아치는 변수가 생긴 겁니다. 평소에는 모두가 잘 견딜 것 같고, 모두 잘할 것 같고, 별 탈이 없는 듯하다가도, 한번 위기가 닥치면 훈련되고 준비된 자와 그렇지 않은 자는 큰 차이가 나게 마련입니다. 그래서 군대나 직장에서 ‘위기관리 능력’을 키우기 위해 실제 상황을 가정하여 훈련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과 영적인 일상도 이와 전혀 다르지 않습니다. 그래서 사막의 교부들은 끊임없이 우리에게 일상 속에서의 ‘고독과 침묵 그리고 기도’(헨리 나우웬)를 가르친 것입니다. 일상이 분주하고 바쁠수록 더욱더 그렇게 하라고 말입니다.
요즘같이 급변하고, 다양한 정보와 우리의 흥미와 관심을 끄는 것이 넘쳐나는 시대에서 우리의 일상을 평온하게 유지하는 것이 결코 쉽지 않습니다. 더욱 자극적이고 충격적인 것에 길들여진 우리의 감각과 마음은 이제 웬만한 충격에도 반응을 잘하지 않게 된 것 같습니다. 언론의 자극적인 기사도 문제이지만, 그만큼 우리는 자극적인 정보의 홍수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이러한 환경에서 지난주에 말씀드렸던 ‘하느님 나라의 일상성’의 섬세함을 우리 일상 속에 적용하는 것이 말처럼 쉽지 않음을 느낍니다. 그래서 우리는 영적인 일상성을 회복하기 위해 무감각해지고 무뎌진 우리 자신을 깨우는 훈련이 필요합니다. 그 시작이 기도임은 두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기도라 하면 우리는 단순히 바라는 것을 ‘간구’하거나 ‘간청’하는 것으로 오해하곤 합니다. 그래서 기도제목이 없으면 기도를 게을리하게 됩니다. 그러한 간구의 기도도 물론 기도이지만, 그것은 우리를 깊은 하느님의 현존 앞으로 이끌지는 못합니다. 하느님의 나라가 일상성을 지니고 있는 것처럼, 우리의 기도도 일상성을 요구합니다. 이러한 기도는 우리의 의지가 발현되며, 훈련을 통해서 다져지고 우리의 호흡이 우리의 몸과 하나가 되듯이 기도가 우리의 일상과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기도가 일성성을 획득하는 순간이 우리가 ‘하느님 앞에 선 개인’으로 자신을 발견하게 되는 순간입니다.
‘하느님 앞에 선 개인’은 다음과 같은 말씀을 통해 드러납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생각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님이신 너의 하느님을 사랑하여라.'(마르 12:30)
틸리히는 이 말씀을 ‘궁극적 관심(ultimate concern)’이라 했지만, 저는 이를 ‘하느님 앞에 선 개인’의 실존을 드러내는 말이라 생각합니다. 하느님 앞에서는 어떤 것도 숨길 수 없고, 구할 수도 없고, 가릴 수도 없는 있는 그대로의 우리 존재가 모두 드러납니다. 그래서 기도는 우리가 있는 그대로의 상태를 하느님께 온전히 열어 보이는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은 후 두려움과 부끄러움에 자신을 숨긴 것은 하느님의 현존을 두려워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 앞에 자신을 솔직하게 드러내지 못하는 게 죄였던 것입니다. 이것이 기도의 일상성이 가진 핵심입니다. 주님 앞에서는 아름다운 기도 문구도, 논리적이고 설득력 있는 언변도 필요가 없습니다. 필요 이상의 표현은 우리 마음을 하느님께 집중하게 하기보다 우리의 생각에 붙들리게 만듭니다. 생각은 만악의 저장소입니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잡념을 없애는 ‘삼매경’을 수련하는 것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바로 너희 가운데 있다.(루가 17:21b)
‘가운데’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ἐντός 엔토스’라 하는데 이는 ‘가운데 또는 사이에’라고 우리말로 번역될 수 있습니다. 즉 ‘우리 마음 안에’ 또는 ‘우리 공동체 사이에’ 모두 해석 가능합니다. 여기서 ‘하느님의 나라’에 대한 장소를 굳이 찾는다면 결국 우리 마음 안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마음은 단순한 물리적 공간이 아님을 우리는 압니다. 우리가 느끼는 모든 감정의 결들이 이곳에 집중됩니다. 그래서 마음은 우리가 하느님의 현존을 체험하는 장소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곳은 늘 중립적이라 무방비 상태에 놓이면 사탄의 공격이 가해지기 쉬운 곳이기도 합니다.
기도의 일상성은 이러한 마음 가운데 이르는 과정입니다. 마음이 생각에 이끌리는 것이 아니라, 생각이 마음에 이끌립니다. 마음은 단순하면서도, 반복적이고, 지속적인 것에 작용하는 특징이 있습니다. 이는 우리가 누군가를 사랑하는 방식을 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누군가를 사랑하면 우리는 끊임없이 마음이 움직이는 대로 그 사람을 생각하고, 그리워하며, 보고 싶어 합니다. 마음의 모든 지향점이 사랑하는 누군가에게 쏠리게 됩니다. 이러한 마음의 작용이 기도의 일상성으로 우리를 인도합니다. 말이나 생각보다는 마음으로 느낌으로써 우리의 상태를 그대로 하느님께 올려드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동방정교회에서는 이러한 훈련의 일환으로 ‘예수 기도’를 가르칩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 하느님의 외아들이시여, 이 죄인을 (저를) 불쌍히 여기소서” 이를 반복적으로 하면서 마음의 움직임을 감지합니다. 단순성, 반복성, 지속성과 항상성이 이 기도의 특징입니다.
4세기에 활동했던 이집트의 사막 교부 마카리오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기도할 때 많은 말이 필요 없어요. 자주 손을 펴 들고 ‘주여, 당신이 원하시고 아시는 바대로 저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말하세요. 그대의 영혼이 어려움 중에 있을 때는 ‘저를 구해 주소서’라고 하세요. 그러면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자비를 보여 주실 겁니다. 그분은 우리에게 무엇이 적당한 것인가를 알고 계시니까요. (Macaire 19)
또 마르틴 루터는 다음과 같이 고백했습니다.
성령을 통해 배우는 한마디의 가르침은 수천 마디의 기도보다 낫습니다. 나는 많은 독서와 숙고로부터 배운 것보다 ‘한마디 기도’에서 배운 것이 더 많습니다. (‘단순한 기도’-마르틴 루터)
사도 바울로는 데살로니카인들에게 보낸 첫째 편지에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항상 기뻐하십시오. 늘(끊임없이) 기도하십시오.(1데살 5:16,17)
늘 기도하라는 말은 원어대로 하면 “ἀδιαλείπτως 아디아레이프토스 : 끊임없이, 또는 멈추지 말고” 기도하라는 말입니다. 이 말씀이 ‘예수 기도’나 교부 마카리오의 가르침의 출발점입니다. 멈추지 말고 기도하는 이유를 바울로 사도는 ‘성령을 끄지 않도록’(비교 1데살 5:19)이라고 표현합니다. 마치 성령을 촛불처럼 상징하여 표현한 것입니다. 바람에 흔들리면 쉽게 꺼지는 촛불처럼 조심해서 우리 안에 있는 성령이 소멸되지 않도록 기도하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제자들이 두려움에 떨었던 이유가 이제 드러납니다. 주님의 가르침과 여러 기적들을 통해 받았던 성령의 감동들이 그들 마음속에서 일상성을 놓치는 순간 촛불이 바람에 꺼지듯 믿음이 사라진 것입니다. 아우슈비츠의 가스실에서 최후를 맞이했던 성녀 에디트 슈타인은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우리가 할 수 있고 또 해야 하는 일은, 은총을 향해 우리 자신을 여는 것입니다!”(내적 침묵으로 향하는 길/에디트 슈타인)
기도의 일상성은 우리의 일상과 기도를 통해 우리 자신의 마음을 ‘은총을 향해’ 열고 그분의 ‘현존’ 안에 잠기는 것입니다. 우리가 무엇을 간구할지 주님께서는 이미 다 아십니다. 그러니 많은 말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어떻게 우리가 ‘하느님 앞에 선 개인’으로 그분의 현존 앞에 나아가느냐입니다. 거룩한 습관은 여러분을 이러한 일상으로 인도할 것입니다. 비움과 단순성, 지속성, 항상성을 가지고 일상의 삶 속에서 여러분의 습관을 조금씩 성화시켜 가시기 바랍니다. 무엇을 구하기 위해 굳이 생각을 짜내고, 멋진 말을 구사하려고 마음의 집중을 흩트리지 마시고 그분 앞에서 여러분의 전존재를 있는 그대로 열어보이시기 바랍니다. 그러할 때 출렁이는 파도와 거센 바람 속에서도 뱃고물을 베개 삼고 주무시던 평온한 주님의 일상성과 만나게 될 것입니다. 이러한 평온함이 여러분에게 함께 하시길 기원합니다. 아멘.
연중12주일 (나해) 전례독서
본기도
전능하신 하느님, 주님은 우리를 온갖 유혹과 위험에서 보호하시나이다. 비오니, 우리에게 굳센 믿음을 주시어 모든 절망과 두려움에서 지켜주시고 인도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한 분 하느님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나이다. 아멘.
사무상 17:32-49
32 다윗이 사울에게 말하였다. “저자 때문에 상심하지 마십시오. 소인이 나가 저 불레셋 놈과 싸우겠습니다.” 33 그러나 사울은 다윗을 말리며 말했다. “네가 나가 저 불레셋 놈과 싸우다니, 어림도 없는 일이다. 그는 어렸을 때부터 싸움으로 몸을 단련해 온 자인데, 너는 아직 나이 어린 소년이 아니냐?”
34 ¶ 그러나 다윗은 굽히지 않았다. “소인은 아버지의 양을 쳐왔습니다. 사자나 곰이 나타나 양 새끼를 한 마리라도 물어가면 35 소인은 한사코 뒤쫓아가서 그 놈을 쳐 그 아가리에서 양 새끼를 빼내곤 했습니다. 그놈이 돌아서서 덤벼들면 턱수염을 휘어잡고 때려죽였습니다. 36 소인은 이렇게 사자도 죽이고 곰도 죽였습니다. 저 불레셋의 오랑캐놈도 그렇게 해치우겠습니다. 살아 계시는 하느님께서 거느리시는 이 군대에게 욕지거리를 퍼붓는 자를 어찌 그냥 내버려두겠습니까?” 37 계속해서 다윗이 말하였다. “사자와 곰으로부터 소인을 살려내신 야훼께서 저 불레셋 놈에게서도 소인을 살려내실 것입니다.” 그제야 사울이 다윗에게 허락을 내렸다. “그러면 나가거라. 야훼께서 너와 함께 하시기를 빈다.”
38 사울은 자기 군복을 다윗에게 입힌 다음, 머리에는 놋투구를 씌워주고 몸에는 갑옷을 입혔다. 39 그리고 자기 칼을 다윗의 군복에 채워주었다. 그러나 다윗은 이런 것을 입어본 일이 없었으므로 몸을 제대로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래서 다윗은 사울에게 “이런 것은 입어본 적이 없습니다. 이래 가지고는 몸을 제대로 움직일 수가 없습니다.” 하고는 그것을 모두 벗어버렸다. 40 그리고 다윗은 자기의 막대기를 집어 들고 개울가에서 자갈 다섯 개를 골라 목동 주머니에 넣은 다음 돌팔매 끈을 가지고 그 불레셋 장수 쪽으로 걸어갔다. 41 불레셋 장수도 방패 당번을 앞세우고 한 걸음 한 걸음 다윗에게 다가왔다. 42 불레셋 장수는 다윗을 건너다보고 볼이 붉은 잘생긴 어린아이라는 것을 알고는 우습게 여겨, 43 “막대기는 왜 가지고 나왔느냐? 내가 개란 말이냐?” 하고는 자기 신의 이름을 부르며 다윗을 저주하였다. 44 그리고 불레셋 장수는 다윗을 을러메었다. “어서 나오너라. 네 살점을 하늘의 새와 들짐승의 밥으로 만들어주마.” 45 그러나 다윗은 불레셋 장수에게 이렇게 응수하였다. “네가 칼을 차고 창과 표창을 잡고 나왔다만, 나는 만군의 야훼의 이름을 믿고 나왔다. 네가 욕지거리를 퍼붓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느님의 이름을 믿고 나왔다. 46 오늘 야훼께서 너를 내 손아귀에 넣어주셨다. 나야말로 네놈을 쳐서 목을 떨어뜨리고 네 시체와 불레셋 전군의 시체를 하늘의 새와 들짐승의 밥으로 만들어주리라. 그리하여 이스라엘이 모시는 하느님이 어떤 분이신지 천하에 알리리라. 47 여기 모인 모든 사람은 이제 야훼께서는 칼이나 창 따위를 써서 구원하시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리라. 야훼께서 몸소 싸우시어 네놈들을 우리 손에 넘겨주실 것이다.”
48 불레셋 장수가 한 걸음 한 걸음 다가오자, 다윗은 재빨리 대열에서 벗어나 뛰쳐나가다가 49 주머니에서 돌 하나를 꺼내어 팔매질을 하여 그 불레셋 장수의 이마를 맞혔다. 돌이 이마에 박히자 그는 땅바닥에 쓰러졌다.
시편 9:9-20
9 주여,
. 억울한 자의 요새 되시고 ◯
. 곤궁할 때 몸 담을 성채 되소서.
10 주여,
. 당신을 찾는 자를 아니 버리시기에, ◯
. 당신 이름 받드는 자 그 품에 안깁니다.
11 시온에 계시는 주님께 찬미하여라. ◯
. 그 하신 일들 만민에게 모두 알려라.
12 무죄한 피를 갚으시는 분께서
. 그들을 잊지 아니하시고 ◯
. 불쌍한 이의 울부짖음을
. 모르는 체하지 않으신다.
13 주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 원수들에게 당하는 이 억울함을 살피시며, ◯
. 죽음의 문턱에서 나를 끌어내소서.
14 구해주신 그 일을 한껏 기뻐하며
. 아끼시는 이 수도 시온의 성문에서 ◯
. 끝없이 당신을 찬양하리라.
15 저 민족들은 저희가 판 구덩이에 빠지고 ◯
. 저희가 친 덫에 걸리리라.
16 주께서 공정한 재판으로 그 모습을 드러내시고 ◯
. 악한 자는 자기가 한 일로 걸려들리라.
17 하느님을 저버린 저 민족들,
. 죽음의 나라로 물러가거라. ◯
. 악인들아, 너희도 물러가라.
18 가난한 사람, 아주 잊혀지지 아니하고 ◯
. 억눌린 자의 희망, 영영 헛되지 아니하리라.
19 주여! 일어나소서. 사람이 우쭐대지 못하게 하소서. ◯
. 저 민족들로 하여금 당신 앞에서 심판받게 하소서.
20 주여! 저 민족들을 혼내 주시고 ◯
. 스스로 사람에 지나지 않음을 깨닫게 하소서.
⦿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
. 처음과 같이 지금도 그리고 영원히, 아멘.
2고린 6:1-13
1 우리는 하느님과 함께 일하는 사람으로서 여러분에게 간곡히 부탁합니다. 여러분이 받은 하느님의 은총을 헛되게 하지 마십시오.
2 하느님께서는,
. “너에게 자비를 베풀 만한 때에
. 네 말을 들어주었고
. 너를 구원해야 할 날에 너를 도와주었다.” 이사 49:8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지금이 바로 그 자비의 때이며 오늘이 바로 구원의 날입니다. 3 우리가 하는 전도 사업이 비난을 받지 않기 위해서 우리는 사람들의 비위를 상하게 하는 일은 조금도 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4 우리는 무슨 일에나 하느님의 일꾼으로서 일할 따름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환난과 궁핍과 역경도 잘 참아냈고 5 매질과 옥살이와 폭동을 잘 겪어냈으며 심한 노동을 하고 잠을 못 자고 굶주리면서도 그 고통을 잘 견디어냈습니다. 6 우리는 순결과 지식과 끈기와 착한 마음을 가지고 성령의 도우심과 꾸밈없는 사랑과 7 진리의 말씀과 하느님의 능력으로 살고 있습니다. 두 손에는 정의의 무기를 들고 8 영광을 받거나 수치를 당하거나 비난을 받거나 칭찬을 받거나 언제든지 하느님의 일꾼답게 살아갑니다. 우리는 속이는 자 같으나 진실하고 9 이름 없는 자 같으나 유명하고 죽은 것 같으나 이렇게 살아 있습니다. 또 아무리 심한 벌을 받아도 죽지 않으며 10 슬픔을 당해도 늘 기뻐하고 가난하지만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만들고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지만 사실은 모든 것을 가지고 있습니다.
11 고린토의 교우 여러분, 나는 여러분에게 숨김없이 다 말하였고 내 마음은 여러분에게 활짝 열려 있습니다. 12 여러분을 대하는 우리의 마음이 옹색한 것이 아니라 여러분이 자기 마음을 스스로 옹색하게 만들었습니다. 13 나는 여러분을 내 자녀처럼 생각하고 말합니다. 여러분도 우리와 같이 마음을 활짝 여십시오.
마르 4:35-41
35 그 날 저녁이 되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호수 저편으로 건너가자.” 하고 말씀하셨다. 36 그래서 그들이 군중을 남겨둔 채 예수께서 타고 계신 배를 저어 가자 다른 배들도 함께 따라갔다. 37 그런데 마침 거센 바람이 일더니 물결이 배 안으로 들이쳐서 물이 배에 거의 가득 차게 되었다. 38 그런데도 예수께서는 뱃고물을 베개삼아 주무시고 계셨다. 제자들이 예수를 깨우며 “선생님, 저희가 죽게 되었는데도 돌보시지 않습니까?” 하고 부르짖었다. 39 예수께서 일어나 바람을 꾸짖으시며 바다를 향하여 “고요하고 잠잠해져라!” 하고 호령하시자 바람은 그치고 바다는 아주 잔잔해졌다. 40 그렇게 하시고 나서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왜 그렇게들 겁이 많으냐? 아직도 믿음이 없느냐?” 하고 책망하셨다. 41 그들은 두려움에 사로잡혀 “도대체 이분이 누구인데 바람과 바다까지 복종할까?” 하며 서로 수군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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