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모음/설교문

떠남; 거룩한 거리두기 - 주님의 변모

James Chae 2021. 8. 7. 09:35

 

2021. 8. 8. 나해_주님의 변모 축일_연중19주일

 

다니 7:9-10, 13-14 / 시편 97 / 2베드 1:16-19 / 루가 9:28-36

 

 

 

떠남; 거룩한 거리두기

 

야고보 신부 / 제주 한일우정의 교회, artist

 

 

루가는주님의 변모 이야기 마르코복음을 참조했습니다. 물론 가지 첨언과 첨삭이 편집 과정에서 있었습니다. 이러한 부분을 살펴보면 마르코복음과 다른 루가복음만의 관점으로 이야기를 다르게 조명할 있게 됩니다. 루가의 첨언과 첨삭을 모두 살펴보는 것은 시간상 불가능하여 저는 루가의 첨언 중요한 하나를 통해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메시지가 무엇인지 살펴보고자 합니다.

 

영광에 싸여 나타난 그들은 예수께서 머지않아 예루살렘에서 이루시려고 하시는 일 곧 그의 죽음에 관하여 예수와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οἳ ὀφθέντες ἐν δόξῃ ἔλεγον τὴν ἔξοδον αὐτοῦ ἣν ἤμελλεν πληροῦν ἐν Ἰερουσαλήμ. (루가 9:31)

 

오늘 본문에는 예수께서예루살렘에서 이루시려고 하시는 그의 죽음에 관하여라고 의역이 되어 있지만, 본문을 직역하면예루살렘에서 이룩하실 , 그분이 떠나가실 됩니다. 그의 죽음으로 번역된 부분은그분이 떠나가실 ’, 엑소도스ἔξοδος 말하고 있습니다. 엑소도스라는 말은 우리에게 익숙한 말입니다. 구약의 출애굽기의 영문 이름이엑소더스 Exodus’이기 때문입니다. 헬라어 엑소도스는 원래 어떤 장소에서 다른 장소로 떠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출애굽기는 노예의 상태에서 자유의 상태로 떠난 이스라엘의 해방 이야기가 되는 것입니다. 공동번역성서가 엑소도스를 단순히죽음으로 의역을 하는 바람에 우리는 의미를 한정해서 묵상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떠남’, 엑소도스 우리에게 많은 영감으로 묵상을 이끌어줍니다.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음을 당하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심을 이렇게 루가는엑소도스’, 떠남으로 묘사한 것입니다. 루가의 관점에서 예수의 십자가는 이러한 떠남의 시작인 것입니다. 삶에서 죽음으로, 죽음에서 부활로, 부활에서 승천으로 이어지는 여정. 이러한 예수님의 떠남의 여정이 변모 이야기 속에 담긴 진실 하나를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루가가 변모 이야기를베드로의 메시아 고백’(루가9:18~21)수난과 부활에 대한 번째 예고’(루가9:22) 다음에 배치한 것을 보면 변모 사건은 정확하게 예수의 십자가와 후에 다가올 예수의 영광을 가리키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변모 사건은 주님께서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변모하여 자신의 죽음과 부활 그리고 영광을 미리 제자들에게 계시한 사건입니다. 그리고 동시에 장차 우리 그리스도인 모두가 성화되어 변모될 모습을 미리 보여준 사건이기도 합니다. 이에 대해 고린토인들에게 보낸 둘째 편지 3 18절은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얼굴의 너울을 벗어버리고 거울처럼 주님의 영광을 비추어줍니다. 동시에 우리는 주님과 같은 모습으로 변화하여 영광스러운 상태에서 더욱 영광스러운 상태로 옮아가고 있습니다.(2 고린 3:18)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성화되어 가고 마침내 그리스도의 영광에 참예하는 합일이 이루어지는 순례의 , 구원의 영광을 미리 보여주는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순례의 길이 바로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을 했던 것처럼, ‘떠남에서 시작된다는 것은 매우 의미심장합니다. 4세기 로마에 의해 기독교가 공인되고 제도화되어 가면서 점차 교회의 본질을 상실하고 세속화되어 가던 당시 교회를 향해 사막의 교부들이 끊임없이 외쳤던 메시지이기도 합니다. 안일하고 익숙하고 죄악 모든 것으로부터의떠남’, 도피(fleeing)’ 말입니다. 물론떠남도피 의미적 차이는 분명 있지만, 도피도떠남에서 시작된다는 점에서떠남 모든 영적 순례의 시작이라 있습니다.

 

“이 말씀을 하신 뒤 여드레쯤 지나서 예수께서는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를 데리고 기도하러 산으로 올라가셨다. 예수께서 기도하시는 동안에 그 모습이 변하고 옷이 눈부시게 빛났다.” (루가 9:28)

 

말씀에서 있듯이 루가는 마태오와 마르코와 달리 예수의 변모 사건이 발생한 배경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기도와 성령을 강조하는 루가답게 그는 예수께서기도하시는 모습이 변하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루가는 기도의 중요성을 다른 복음사가들 보다 강조합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시는 예수님께서는핏방울이 땅에 떨어지듯기도하셨다고 실감 나게 묘사한 것도 루가이고, 오순절 성령강림사건도 제자들이 모여 기도하는 중에 이루어졌다고 기록한 또한 루가입니다. 그는 하느님의 구원 사역이 기도와 함께 시작됨을 우리에게 보여주고자 했습니다. 그러므로 기도는떠남 시작이 됩니다.

 

우리는 주님의 변모가 구체적으로 어떻게 건지 알지 못합니다. 우리는 단지 사도 베드로의 다음과 같은 고백을 따라 이를 이해합니다.

 

우리가 여러분에게 알려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권능과 강림의 이야기는 사람들이 꾸며낸 신화에서 나온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그분이 얼마나 위대한 분이신지를 우리의 눈으로 보았습니다. (2 베드 1:16)

 

이러한 고백은 오랜 교회의 전통이고 우리는 그러한 고백 위에서 이러한 변모 사건을 바라봅니다. 다만 변모를 추동한 원인에 대해서는 추측의 여지가 있습니다. 루가는 예수의 변모 이야기를 마르코복음에서 차용하면서변화되어지다 의미의메타모르포오μεταμορφόω’라는 동사 대신헤테로스ἕτερος’라는 형용사를 사용합니다. 물론 이를 수동형으로 사용했습니다. 여기에서 추측할 있는 것은 예수의 변모는 예수께서 능동적으로 스스로 변화하신 것이 아니라, 성부 하느님의 의지에 따라 변화되어졌다는 사실을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평소대로 기도를 하시고 계셨는데, 생각지도 못한 순간에 자신의 몸이 변화되어지신 것입니다. 변화의 원인을 제공한 것은 바로 성부 하느님이십니다. 성부 하느님께서는 예수께서 장차 어떤 고난을 통해서 하느님의 영광을 덧입으실지를 그분의 의지대로 우리에게 보여주신 것입니다. 또한 루가가 사용한헤테로스라는 형용사는다른(other, another, different)’이란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는 신약에서같은 다른 하나또는연속되는 여러 사물 새로운 다른 가리킬 사용되는 단어입니다. 그러므로 모습이 변하고라는 오늘 구절을 직역해보면그의 얼굴 용모가 달라지셨다 됩니다. 루가는 역사적 예수님의 얼굴과 연속성을 가지면서 그분의 어떤 속성이 변화된 것을 강조한 것입니다. 마르코가 초월적인 변화로 묘사한 것과는 차이가 있습니다. 

 

모세와 엘리야는 죽음을 경험하지 않은 구약의 예언자들로 영적인 존재를 상징합니다. 중요한 것은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변모 자체에도 의미가 있지만 중요한 것은 변모가 말하고자 하는 내용입니다. 예수께서 변모하셔서 신적 영광을 입으신 상태에서 모세와 엘리야와 나눈 얘기의 내용이 바로 예수의떠남 대한 얘기였다는 점은 의미심장합니다. 우리는 떠남에 대해서 자신이 처한 상태에 따라 다양하게 적용하여 묵상할 있습니다. 각자가 말씀을 조용히 진지하게 묵상을 해보시기 바랍니다. 저는 오늘 가지 부분만 언급하고자 합니다. 바로떠남’, ‘우리의 익숙한 것들로부터 떠나는 대한 묵상입니다.

 

사람들은 불편하고 거북한 것도 점점 익숙해지면 그것에 적응하게 됩니다. 심지어 폭력에 대해서도 익숙해지면 가해하는 사람이나 당하는 사람이나 모두가 이에 익숙해진다는 점입니다. 스톡홀름 증후군은 이러한 예를 보여줍니다. 또한 익숙함은 우리에게 새로운 변화를 갖지 못하게 합니다. 우리가 운전을 , 가까운 길이 있고, 익숙한 길이 있을 경우 우리는 익숙한 길을 선택하게 마련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내비게이션의 안내보다는 자신에게 익숙한 길을 선택합니다. 우리는 익숙한 것에 안전함과 평안함을 느끼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익숙한 것에는 모종의 자신감 또한 깃들어 있습니다. 평안함을 느끼는 것은 우리가 익숙해졌다는 뜻이고 우리는 익숙해진 것에 특별히 관심을 기울여 조심하지 않는 경향도 있습니다. 실제로 위험 요소가 없는 것이 아니라, 익숙한 것에서 우리는 위험요소들을 찾으려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고의 대부분은 우리의 단순한 부주의 때문이 아니라 우리의 익숙함에서 오는 부주의가 원인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특히 교회에서 이러한 익숙함은 보수성으로 드러납니다. 교회에서 보수성이 더욱 심화되는 이유는 익숙함에 대한 공동체 간의 무언의 합의가 있기 때문입니다. 익숙함은 시스템과 형식을 만들지만, 반면 다른 다양성을 배제합니다. 결과 교회 공동체의 익숙한 시스템은 성령의 역사를 제한하는 결과를 낳기도 합니다. 익숙함은 사람들의 생각과 삶의 모든 양태를 획일화시킬 위험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것은 교회의 역사 속에서 많은 예를 찾을 있습니다. 그래서 위기나 전쟁 등이 우리의 익숙함을 앗아 때에만 인류와 교회는 새로운 방향을 모색하게 됐던 것입니다. 우리의 익숙함은 우리에게 주어지는 다양한 도전들을 새로운 관점에서 바라보지 못하게 합니다. 특히 신앙인들에게 익숙함이 독이 되는 것은 성령의 역사를 인지하지 못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우상숭배적 문화에 익숙했던 북이스라엘은 자신들의 멸망이 다가온다는 선지자들의 외침에 전혀 귀를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결과 북이스라엘이 앗시리아에 어떻게 멸망됐는지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우리가 익숙한 것에 안주하면서 우리에게 다가오는 위험성을 점점 인지하지 못하게 되고, 결국 교회 공동체는 성령의 음성에 귀를 닫아버리게 됩니다. 신앙과 영적 나태함은 바로 이러한 익숙함에서 기인합니다. 변화를 두려워하고, 새로운 것을 거부하며, 자신에게 익숙한 것에 대한 편안함이 우리를 병들게 하고, ‘ 해봐도 라는 패배 의식을 낳으며, 결국 우리를 하느님으로부터 멀어지게 만듭니다.

 

우리가 익숙한 것에서 벗어나고자 제일 먼저 고려할 점은사람들과의 익숙한 관계에서 떠나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우리를 지지하고 칭찬해주는 사람들이나, 반대로 나를 비판하고 미워하는 사람 모두를 포함합니다. 우리를 지지하는 사람들은 나에게 힘을 주고 나를 격려하지만 나를 의존적인 사람으로 만들고 자기 자신을 객관적으로 없게 만들기도 합니다. 나를 비판하고 싫어하는 사람들은 나의 존재의 존엄성과 가치를 무시하게 만들어 나의 존엄성에 상처를 입힙니다. 그래서 우리는 현재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적당한 거리를 만들기 위한떠남 필요합니다. 서로가 서로에게 너무 익숙해지지 않는 거리, 서로가 서로를 너무 간섭하지 않는 거리. 그러할 우리는 서로가 서로를 바라보고, 서로에 대한 예의를 지키며, 상대를 배려해 여유를 갖게 되기 때문입니다. 너무 가깝지도 않고, 너무 멀리 떨어지지도 않는 거리. 너무 가까워서 간섭받는 거리가 아닌, 너무 멀어서 서로에게 소원해지는 거리가 아닌상호섬김상호존중 가능한 거리. 이러한 관계의 거리를 설정하기 위해 우리는 익숙한 관계에서떠남 필요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떠나셔서 승천하셨기에 역설적으로 그분은 우리와 함께하실 있게 됐습니다. 예수님과 우리 간에 적당한 거리가 설정되어야 했습니다. 너무 가까워도, 너무 멀어도 우리는 주님을 느낄 없습니다. 십자가 밑에서 예수를 바라봤던 여인들의 거리와 멀리에서 숨어서 십자가를 바라봤던 제자들의 거리는 분명 달랐습니다. 제자들은 너무 멀리 있었습니다. 간격이 좁아진 것은 성령강림절에 성령께서 그들에게 오셨을 때입니다. 그들은 주님을 떠나보낸 후에야 주님과 적절한 거리를 가질 있었습니다. 3 동안 예수님과 지근의 거리에서 생활을 했어도 제자들은 거리가 너무 가까워 오히려 예수님의 실체를 없었습니다. 예수님이 떠나시고, 예수님과 제자들 간에 적당한 거리가 생긴 후에야 그들은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심을 깨달았습니다. 초월과 내재 간에는 상호 적당한 거리가 필요합니다. 이와 같이 우리가 다른 사람들과 하느님과 온전한 관계를 유지하려면 현재 익숙한 관계에서 적당한 거리 설정이 필요합니다. 저는 이러한 적당한 거리 설정이 바로 기도를 위한거룩한 거리두기’라 생각합니다. 너무 가까이 있으면 서로에게 방해가 되기 때문에 기도에 집중할 수가 없습니다. 익숙한 관계 속에서 기도의 시간과 공간을 갖기 위해서는 익숙한 시간에서의 떠남, 익숙한 공간에서의 떠남이 필요합니다. 주님께서도 바쁜 일상과 많은 사람들 속에서도 기도하시기 위해 사람들과 적당한 거리와 시간을 만드셨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골방의 기도’(마태 6:6)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와 같이 익숙한 일상과 관계 속에서 적당한 거리두기를 하기 위해 우리는 매일 익숙한 것들로부터 떠나는 시간과 공간을 가질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므로떠남 결국 모든 관계에서 적당한존재의 자리 찾는 여정이라 있습니다. 모든 존재에게는 자신 만의 자리가 있기 때문입니다. 존재의 자리 바로 개인의 실존의 자리이고 하느님과 관계하는 자리이기 때문입니다. 너무 관계가 가까우면 강한 쪽에 끌려가 하나에 흡수되거나 충돌을 일으키게 마련입니다. 인력이 강한 별에 약한 별이 끌려가 충돌하는 이치와 같습니다. 지구와 달이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고, 태양과 지구가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기 때문에 우리가 이런 아름다운 지구에 있게 것입니다. 사람들과의 관계도 바로 그러합니다. 그러므로 익숙함에서 떠나 여러분이 자유로울 있는 거리에 여러분의 자리를 만드시고 서로를 위해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가족이든, 친척이든, 친구이든 모든 관계에 적당한 거리를 만드시기 바랍니다. 거리가 바로 여러분의 기도의 자리가 것입니다. 익숙함에서 벗어나 영적 순례를 시작하고자 결단하는 모든 분들에게 주님의 은총이 함께하시길 기원합니다. 아멘. 

 


 

주님의 변모 축일 전례독서

 

 

본기도

영광의 하느님, 독생 성자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제자들에게 놀라운 변화를 나타내 보이셨나이다. 비오니, 우리들이 세상의 근심과 불안에서 벗어나, 영광스러운 주님의 모습을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하느님이신 우리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나이다. 아멘.

 

 

다니 7:9-10, 13-14

9    내가 바라보니

.     옥좌가 놓이고 태곳적부터 계신 이가 위에 앉으셨는데,

.     옷은 눈같이 희고

.     머리털은 양털같이 윤이 났다.

.     옥좌에서는 불꽃이 일었고 바퀴에서는 불길이 치솟았으며,

10   앞으로는 불길이 강물처럼 흘러 나왔다.

.     천만 신하들이 떠받들어 모시고

.     억조 창생들이 모시고 섰는데,

.     그는 법정을 열고 조서를 펼치셨다.

.    

13 나는 밤에 이상한 광경을 보았는데 사람 모습을 이가 하늘에서 구름을 타고 와서 태곳적부터 계신 앞으로 인도되어 나아갔다. 14 주권과 영화와 나라가 그에게 맡겨지고 인종과 말이 다른 백성들의 섬김을 받게 되었다. 그의 주권은 스러지지 아니하고 영원히 것이며 그의 나라는 멸망하지 아니하리라.

 

 

시편 97

1    주께서 왕위에 오르셨다.

.      땅은 춤을 추어라.
.     많은 섬들아 즐거워하여라.

2    안개와 구름에 둘러싸이고
.     정의와 공평이 옥좌의 바탕이요.

3    불길이 그를 앞서 가며
.     에워 원수들을 살라 버린다.

4    번개가 한번 번쩍 세상을 비추니
.      땅이 이를 보고 부들부들 떤다.

5    산들도 앞에서, 땅의 주님 앞에서
.     초처럼 녹아내린다.

6    하늘이 의로우심을 선포하고
.     만백성은 영광을 뵈옵는다.

7    잡신들을 섬기는 자들아,

.     허수아비를 자랑하는 자들아,

.     창피를 당하여라.
.     모든 신들아 앞에 엎드려라.

8    주여, 당신의 재판은 공정하시오니

.     시온이 이를 듣고 즐거워하며
.     유다의 딸들도 기뻐하옵니다.

9    주여, 당신은 세상에 으뜸이시오니
.      많은 신들 훨씬 위에 계시옵니다.

10  악을 미워하는 자를 주께서 사랑하시고,

.     당신을 믿는 자의 목숨을 지켜 주시어
.     악인들의 손에서 건져 주신다.

11  바르게 살면 앞이 환히 트이고
.     마음이 정직하면 즐거움이 돌아온다.

12  올바르게 사는 자들,

.     주님의 품에서 즐거워하여라.
.     거룩하신 이름을 찬양하여라.

⦿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     처음과 같이 지금도 그리고 영원히, 아멘.

 

 

 

2베드 1:16-19

16 우리가 여러분에게 알려준 우리 예수 그리스도의 권능과 강림의 이야기는 사람들이 꾸며낸 신화에서 나온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그분이 얼마나 위대한 분이신지를 우리의 눈으로 보았습니다. 17 그분은 분명히 하느님 아버지로부터 영예와 영광을 받으셨습니다. 그것은 최고의 영광을 지니신 하느님께서 분을 가리켜이는 사랑하는 아들,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 마태 17:5하고 말씀하시는 음성이 들려왔을 때의 일입니다. 18 우리는 거룩한 산에서 그분과 함께 있었으므로 하늘에서 들려오는 음성을 직접 들었습니다. 19 이것으로 예언의 말씀이 더욱 확실해졌습니다. 여러분의 마음속에 동이 트고 샛별이 떠오를 때까지는 어둠 속을 밝혀주는 등불을 바라보듯이 말씀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 좋겠습니다.

 

 

 

루가 9:28-36

28 말씀을 하신 여드레쯤 지나서 예수께서는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를 데리고 기도하러 산으로 올라가셨다. 29 예수께서 기도하시는 동안에 모습이 변하고 옷이 눈부시게 빛났다. 30 그러자 난데없이 사람이 나타나 예수와 함께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들은 모세와 엘리야였다. 31 영광에 싸여 나타난 그들은 예수께서 머지않아 예루살렘에서 이루시려고 하시는 그의 죽음에 관하여 예수와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32 베드로와 그의 동료들은 깊이 잠들었다가 깨어나 예수의 영광스러운 모습과 거기 함께 있는 사람을 보았다. 33 사람이 떠나려 베드로가 나서서선생님, 저희가 여기서 지내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저희가 초막 셋을 지어 하나는 선생님께, 하나는 모세에게, 하나는 엘리야에게 드리겠습니다.” 하고 예수께 말하였다. 무슨 소리를 하는지 자기도 모르고 말이었다. 34 베드로가 이런 말을 하고 있는 사이에 구름이 일어 그들을 뒤덮었다. 그들이 구름 속으로 사라져 들어가자 제자들은 그만 겁에 질려버렸다. 35 구름 속에서이는 아들, 내가 택한 아들이니 그의 말을 들어라! 시편 2:7; 이사 42:1; 신명 18:15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36 소리가 그친 뒤에 보니 예수밖에는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제자들은 아무 말도 못하고 자기들이 것을 얼마 동안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