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모음/설교문

자비慈悲의 시선

James Chae 2021. 7. 17. 08:48

 

2021. 7.18. 나해_연중16주일

사무하 7:1-14 / 시편 89:20-36 / 에페 2:11-22 / 마르 6:30-34, 53-56

 

 

자비慈悲의 시선

 

채야고보 신부 / 제주 한일우정의 교회, Artist

 

오늘 복음서 말씀은 도입부와 후반부로만 전례독서가 구성되어 있습니다. 중심 이야기인오병이어 이야기’(음식기적사화)  위를 걸으신 예수님 이야기’(자연기적사화) 생략됐습니다. 성서정과가 이렇게 구성될 때는 이유를 깊이 있게 묵상하게 됩니다. 중심 이야기를 생략해서 읽었을까? 오늘 도입 부분인 30~34절은 주님께서 오병이어 기적을 베푸신 근거를 보여줍니다. 주님은 측은히 여기시는 마음, 자비가 넘치시는 분이시다는 점이 강조됩니다. 그리고 후반부인 53~56절은  예수의 기적 능력에 대한요약문(Summarion)’입니다. 마르코는 예수님의 이야기를 기록하면서 이와 같이 그분의 사역을 정리하는 차원에서요약문 여러 군데 사용했습니다(마르코 1 32-34, 마르3:7-12 ). 이러한 요약문은 예수께서 당시에 어떤 사역을 하셨는지를 간명하게 우리에게 전해줍니다. 예수님이 가시는 곳마다 병자들과 고통받는 사람들이 따라다녔고, 주님께서는 그들을 치료해 주셨다는 점입니다. 가르치시고, 고치시며, 마귀를 쫒으시고, 사람들과 함께하심이 그분 활동의 전부였습니다.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몰려와서 시간이나 식사할 시간조차 없었다고 오늘 말씀은 전합니다. 이렇게 지칠 모르시는 주님의 에너지는 과연 어디에서 나온 것일까요? 오늘 말씀은 문장으로 이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목자 없는 양과 같은 그들을 측은히 여기시어…(마르6:34b)

 

측은히 여기다 σπλαγχνίζομαι 스프랑크니조마이 마음 깊이에서 일어나는 동정과 자비의 마음을 뜻합니다. 주님께서 고통받는 자들을 보시고 마치목자 없는 양같이여겨 그들의 고통에 공감하셨다는 표현입니다. 그들이 겪는 고통만큼 본인의 마음도 아프셨다는 뜻이죠. 불쌍한 사람을 보고 동정이나 측은함을 느끼는 것이 인간 본연의 마음이지만, 유난히 정이 많으셨던 주님께서는 측은한 마음에 쉬지도 못하시고 그들을 만나주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자신을 찾아오는 사람들을 번도 마다하시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주님과 함께 했던 제자들은 아마 무척 피곤하고 배가 고팠을 겁니다. 제자들은 아직 주님의 마음을 헤아릴 있을 정도로 성숙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오병이어 이야기를 보면 주님께서 사람들에게 먹을 것을 주라고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을 다음과 같이 제자들은 투덜댔던 것입니다.

 

“그러면 저희가 가서 빵을 이백 데나리온 어치나 사다가 먹이라는 말씀입니까?” (마르6:37)

 

대답은 주님께 대한 불평이었습니다. 퉁명스럽고 피곤한 투로 주님께 투덜댄 것이지요. 쉬지도 못하고 사람들에게 시달리던 제자들은 주님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했기에 이렇게 반응을 했을 겁니다. 우리의 모습을 제자들의 모습 속에서 발견하는 같아 부끄러운 생각이 듭니다. 저도 누군가의 부탁을 들으면 주님같이 즉시예스 하는 것이 아니라 조금은 머뭇거리곤 하기 때문입니다. 이유를 생각하게 되고, 나의 스케줄을 검토하고, 적절한 변명을 찾다가 남의 요청에 응답할 타이밍을 놓치곤 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전혀 망설임이 없으셨습니다. 누군가 부탁을 해오면 즉시 응하셨습니다. 그러한 주님을 아마 제자들은 감당하기가 힘들었을 겁니다. 부지런하시고, 자비하시며, 당당하시고, 쾌활하셨던 주님이십니다. 오늘 시편은 주님의 이러한 성품을 다음과 같이 노래합니다.

 

그러나, 사랑만은 거두지 않으리라. 성실만은 지키리라. (시편 89:33)

 

 

사랑과 자비와 성실. 바로 우리 주님의 성품이십니다. 절박한 심정으로 주님께 몰려왔던 사람들을 상상해보시기 바랍니다. 주님의 옷자락 만이라도 만지고 싶은 심정을 말입니다. 다음 구절은 그들의 절박함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 근처 온 지방을 뛰어다니면서 병자들을 요에 눕혀가지고 예수가 계시다는 곳을 찾아 그리로 데려왔다. (마르 6:55)

 

 

그들은 예수께 오기 위해 심지어뛰어다녔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고통 가운데 있는 자들의 절박함의 표현입니다. 그런 절박감을 가지고 찾아온 사람들을 주님께서 외면한다는 것은 결코 있을 없는 일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에서 주님의 자비를 단순히 그분의 성품으로 환원시키는 우를 범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만약 그렇다면 그것은 우리의 영적 게으름에 면제부를 주는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분의 자비의 영성이 어디에서부터 시작되고 그것이 의미하는 바를 살펴봐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 또한 주님의 자비하심을 따라 그러한 자비를 우리의 일상 속에 실현할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말씀을 묵상해보면 흥미로 단어가 눈에 들어옵니다. 주님의 자비심을 추동하는 단계는 바로바라봄입니다.  

 

“예수께서 배에서 내려 군중이 많이 모여 있는 것을 보시고…” (마르 6: 34a)

 

여기에서 보셨다는 동사는 ‘ὁράω 호라오입니다. 보다 동사는 복음서에서 단순히 본다는 의미를 넘어서 다양한 뜻을 가집니다. “보다, 경험하다, 지각하다, 주목하다, 유의하다, 돌보다. 숙고하면서 눈여겨본다는 의미의 ‘θεωρέω 테오레오보다 광범위하게 사용된 단어입니다. 특히 요한복음 20장에서 부활하신 예수를 보았다는 제자들의 증언에도 단어가 사용됩니다. 

 

다른 제자들이 그에게 "우리는 주님을 뵈었소." 하고 말하자 토마는 그들에게 "나는 눈으로 그분의 손에 있는 못자국을 보고 손가락을 못자국에 넣어보고 손을 그분의 옆구리에 넣어보지 않고는 결코 믿지 못하겠소." 하고 말하였다. (요한 20:25)

 

여기에서 있듯이 본다는 것은 단순히 시신경의 작용을 넘어서는 의미를 지닙니다. 보는 것이 우리의 인식의 작용이고, 이는 우리의 믿음과 연결됨을 발견합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요한복음 1장에서 세례자 요한의 제자들이 찾아왔을 와서 보라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뒤돌아 서서 그들이 따라오는 것을 보시고 "너희가 바라는 것이 무엇이냐?" 하고 물으셨다. 그들은 "라삐, 묵고 계시는 데가 어딘지 알고 싶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라삐는 선생님이라는 뜻이다.) 예수께서 와서 보라고 하시자 그들은 따라가서 예수께서 계시는 곳을 보고 그날은 거기에서 예수와 함께 지냈다. 때는 네 시쯤이었다. (요한 1: 38-39)

 

와서 보는 직접 눈으로 보고 인식하며 깨닫고 따르는 것을 뜻합니다. 이것이 예수께서 말씀하시는제자도입니다. 예수의 제자들이 그랬듯이 사막의 은수자들도 스승의 삶을 직접 보고 깨닫고 따르는 제자도를 실천했습니다. 결국 믿음은 일회적으로 보고 인식해서 한순간에 생기는 것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보고 관찰하고 따를 생기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과 사막의 교부들이 제자들을 가르치신 방법이었습니다. 

 

기독교의 영성 관조觀照 또는 관상觀想이 이와 같이 보는 것과 관계합니다. 신이나 어떤 대상을 집중해서 보고 묵상하는 영성 수련의 방법입니다. 로완 윌리암스는 이를 조류학자들이 새를 관찰하는 것에 비유하여 말한 있습니다. 어떤 새의 특별한 특징을 포착하는 순간을 위해 며칠을 고통을 참고 인내하면서 새를 바라보고 관찰하는 조류학자를 빗대어 설명했습니다. 적절한 비유입니다. 그러나 사물을 그리기 위해 오랜 시간을 대상을 뚫어지게 관찰하는 화가들의 시선 또한 이와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대상의 표면적인 모양이나 색을 넘어 대상의 이면에까지 작가의 시선이 닿을 훌륭한 작품이 탄생하는 것과 같습니다. 보는 것은 우리의 인식이 작용하는 작용점이며, 그것은 또한 매우 영적인 것이기도 합니다. 현상의 세계 속에 숨겨진 진리를 찾는 것은 결국 어떻게 세상을 바라보느냐와 매우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세상을 바라보는 우리의 인식과 관점을세계관이라 말합니다. 어떻게 세상을 보는 가에 따라 개인의 삶이 달라집니다. 마더 데레사가 인도 콜카타에 처음 도착했을 그녀의 시선을 사로잡은 것은 길거리에서 보살핌없이 고통 속에서 죽어가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녀가 사역했던 콜카타의칼리 가트(Kalighat)’ 디딜 틈이 없이 많은 사람들이 모이는 곳입니다.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그곳에 있었지만 길거리에서 매일 죽어가는 사람들을 사람은 오직 마더 테레사뿐입니다. 다른 이들도 죽어가는 자들을 봤겠지만 결국 그것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녀가 것은 하느님의 시선, 자비의 시선으로 것입니다. 자비의 시선은 우리로 하여금 보고, 인식하고, 깨닫고, 행하게 만듭니다. 강도 만난 사람을 것도 결국에는선한 사마리아인이었음을 우리는 압니다.

 

주님께서 자신을 찾아온 자들을 바라보신 방법은 바로 자비의 시선이었습니다. 그분의 보는 방식을 요한복음은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정말 잘 들어두어라. 아들은 아버지께서 하시는 일을 보고 그대로 할 뿐이지 무슨 일이나 마음대로 할 수는 없다. 아버지께서 하시는 일을 아들도 할 따름이다. (요한 5: 19b)

 

여기에서는보다 동사 ‘βλέπω 블레포 사용합니다. 면밀히 관찰하며 본다는 뜻입니다. 주님께서는 아버지께서 하시는 일을 보고 그대로 뿐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이 하느님의 시선으로 바라봄입니다. 시선은 일회적인 것이 아니라 지속적이고 연속적인 바라봄입니다. 주님께서는 성부께로부터 이외에는 아무것도 하실 없음을 말씀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하느님의 시선을 벗어나서 보는 법을 모르셨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변화산에서 주님의 영광을 봤을 , 자신들의 시선으로만 주님을 봤기 때문에, 그의 영광에 담긴 희생과 자비의 빛을 보지 못하고 그곳에 초막을 짓고 자신들의 영화를 먼저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에서 예수를 찾아온 많은 사람들도 분명 예수를 봤습니다. 그들은 소문으로만 듣던 예수를 호기심과 기대에 눈으로 보고, 그분의 행동과 생활, 말투, 눈빛들을 세심히 바라봤을 겁니다. 그래서 예수를 찾아와서 예수를 보고 믿었던 세례자 요한의 제자들처럼 그들도 예수를 보고 믿음을 얻었을 겁니다. 이러한 믿음이 그분의 옷자락이라도 만지면 자신의 병이 나을 것이라는 확신과 기대를 갖게 만들었습니다. 결국 본다는 것은 믿음을 추동하고, 그것은 우리 안에기대라는 희망을 갖게 만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늘 말씀에서 본다는 것이 적극적인 사랑과 믿음과 자비의 행위임을 감지합니다. 보고, 믿고, 기대하고, 사랑하게 됩니다. 사람들은 사랑하는 사람은 자꾸 보고 싶지만,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시선을 피하고 싶어지는 인지상정입니다. 본다는 것은 적극적인 사랑의 행위이며 표현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시선이 아닌 하느님의 시선으로 대상을 바라볼 우리는 주님의 마음을 우리도 품을 있게 된다는 사실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이것은 영적이면서 동시에 현상적이기 때문에 섬세한 분별과 훈련이 요구됩니다. 말씀은 이러한 우리의 시선을 하느님의 시선으로 바라볼 있도록 인도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끊임없이 말씀에 비추어 세상을, 그리고 자기 자신을 살펴보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 제대로 본다는 , 하느님의 시선으로 본다는 것은 자비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본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시선으로 우리를 바라보시는 성령님을 상상하면 마음이 두근거립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시선으로부터 결코 자유로울 없는 존재들입니다. 주님의 은총 가운데 있는 자들은 그분의 시선 안에 있는 자들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느님의 시선으로 우리 자신과 세상을 바라보고, 우리 형제와 자매를 바라보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바라봄에는 자비에 대한 기대가 서려있게 마련입니다. 미운 사람도 자꾸 보다 보면 정이 들게 마련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바라보고, 이웃을 바라보는 것은 그곳에는 어떤 기대감이 있기 때문입니다. 설렘의 정체를 우리는 은총이라 있습니다. 우리가 기도하고 바라는 것들이 이루어질 것이라는 기대. 우리가 바라보는 형제와 자매들이 더욱 잘되고 성장할 것이라는 기대. 바라봄은 우리가 바라보는 대상에 대해 은총의 기대감을 갖게 만듭니다. 그러한 기대감이 우리를 믿음과 소망과 사랑으로 인도합니다. 그러한 기대감이 있었기에 오늘 본문 속의 사람들은뛰어다녔고 그분의 옷자락을 만지게 해달라고 간청했던 것입니다. 그들은 기대감을 가졌고, 기대감으로 주님을 바라봤으며, 결국 원하는 바를 그분의 자비로 인해 얻을 있었습니다. 

 

주님의 자비가 이와 같이 다양한 요소들과 얽히고설켜 작용됨을 깨닫습니다. 단순한 것들이 매우 섬세하게 서로 상관관계를 가지며 은총의 빛을 빚어내고 있습니다. 이러한 주님의 자비의 시선으로 우리가 우리 자신을 바라보고 우리 이웃을 바라보길 바랍니다. 자비의 시작이 바라봄이라면 주님께서 우리를 언제나 바라보심같이 우리도 세상을 그러한 자비의 시선으로 바라볼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러한 자비의 시선이 시간 우리와 우리 이웃 가운데 은총으로 임하시길 간절히 기원합니다. 아멘.

 

 


 

연중16주일 (나해) _ 전례독서

 

본기도

영원하신 하느님, 주님은 우리 생명의 시작이며 끝이 되시나이다. 비오니, 세상의 모든 유혹과 고통 중에서 우리를 인도하시어 영원한 평화를 주시는 주님께 이르도록 지켜주소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하느님이신 우리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나이다. 아멘.

 

 

사무하 7:1-14

11야훼께서 사면의 원수를 물리쳐주셨으므로 다윗 왕은 궁에서 마음놓고 살게 되었다. 2 그렇게 되자 왕은 예언자 나단에게 말하였다. “ 말을 들으시오. 나는 이렇게 송백으로 지은 궁에서 사는데, 하느님의 궤는 아직도 휘장 안에 모셔둔 그대로 있소.” 3 나단이 왕에게 아뢰었다. “야훼께서 함께 계시니 무엇이든지 뜻대로 하십시오.”

4 , 야훼의 말씀이 나단에게 내렸다. 5너는 나의 다윗에게 가서 야훼의 말이라 하고 이렇게 일러라. ‘내가 집을 네가 짓겠다는 말이냐? 6 나는 이스라엘 자손을 이집트에서 이끌어내던 때부터 지금까지 천막을 치고 옮겨 다녔고, 안에서 살아본 적이 없다. 7 내가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 여기 저기 옮겨 다니는 동안, 백성 이스라엘을 맡겨 보살피게 어느 영웅에게 어찌하여 나의 집을 송백으로 지어주지 않느냐고 말한 적이 있었더냐?’ 8 너는 이제 나의 다윗에게 만군의 야훼의 말이라 하며 이렇게 일러주어라. ‘나는 양떼를 따라다니던 너를 목장에서 데려내다가 백성 이스라엘의 영도자로 삼았다. 9 그리고 나는 네가 어디를 가든지 너와 함께 있으면서 모든 원수들을 앞에서 없애버렸다. 세상에서 이름난 어떤 위인 못지않게 이름을 떨치게 해주리라. 10 나는 백성 이스라엘이 머무를 곳을 정해 주어 곳에 뿌리를 박고 전처럼 악한들에게 억압당하는 일이 없이 안심하고 살게 하리라. 11 지난날 내가 위정자들을 시켜 백성 이스라엘을 다스리게 하던 때와는 달리 너희를 모든 원수에게서 구해 내어 평안하게 하리라. 야훼가 왕조를 일으켜 너희를 위대하게 만들어주리라12 네가 만큼 살고 조상들 옆에 누워 잠든 다음, 몸에서 자식 하나를 후계자로 삼을 터이니 그가 국권을 튼튼히 하고 13 나에게 집을 지어 바쳐 나의 이름을 빛낼 것이며, 나는 그의 나라를 영원히 든든하게 다지리라. 14 내가 친히 그의 아비가 되고 그는 아들이 되리라.

7:1-29 1역대 17장을 참조하십시오.

 

 

시편 89:20-36

20  나는 나의 다윗을 찾아내어
.     나의 거룩한 기름을 부어주었다.

21  내가 손으로 그를 돕겠고
.     팔로 그를 강하게 하리니

22  원수가 그를 당해 내지 못하고
.     간악한 자도 그를 괴롭히지 못하리라.

23  내가 그의 면전에서 그의 적들을 짓부수고
.     원수들을 쳐부수리라.

24  나의 진실과 사랑이 그의 곁에 있으리니
.    
그가 이름으로 뿔을 높이 들리라.

25  그의 손을 바다 위에 뻗치게 하고
.     오른손을 강에까지 뻗게 하리니

26  그는 나를 불러나의 아버지, 나의 하느님,
.     구원의 바위이십니다하겠으며,

27  나는 그를 맏아들로 삼아
.     세상 임금 중에 가장 높은 임금으로 세우리라.

28  그에 대한 나의 사랑, 영원히 간직하겠고
.     그와 맺은 나의 계약, 성실하게 지키리라.

29  길이길이 그의 후손 이어 주리니,
.     그의 왕조는 하늘이 무너지기까지 이어가리라.

30  그러나, 만일 그의 자손이 나의 법을 저버리고
.     계명을 따라 살지 않으면,

31,32  명을 어기고 정해 법도를 지키지 않는다면
.     나는 죄를 채찍으로 다스리고
.     잘못을 매로써 치리로다.

33  그러나, 사랑만은 거두지 않으리라.
.    
성실만은 지키리라.

34  맺은 계약 틀림없이 지키고,
.     입으로 말한 변경하지 않으리라.

35  나의 거룩함을 걸고 한번 맹세하였거늘
.     어찌 다윗을 속이겠느냐?

36  그의 후손은 길이길이 이어지고
.     그의 왕조, 앞에서 태양과 같으리라.

⦿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     처음과 같이 지금도 그리고 영원히, 아멘.

 

 

에페 2:11-22

11 이방인으로 태어난 여러분, 지난 날을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은 단지 몸에다 사람의 손으로 행하는 할례를 받은 소위 할례자들로부터 할례받지 않은 사람들이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12 여러분은 그리스도와는 아무 관계도 없었고 이스라엘 시민권도 없는 외국인으로서 약속의 계약에서 제외된 세상에서 희망도 하느님도 없이 살아온 사람들이었습니다. 13 이렇게 여러분이 전에는 하느님과 멀리 떨어져 있었지만 이제는 그리스도께서 피를 흘리심으로써 그리스도 예수로 말미암아 하느님과 가까워졌습니다. 14 그리스도야말로 우리의 평화이십니다. 그분은 자신의 몸을 바쳐서 유다인과 이방인이 서로 원수가 되어 갈리게 했던 담을 헐어버리시고 그들을 화해시켜 하나로 만드시고 15 율법 조문과 규정을 모두 폐지하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을 희생하여 유다인과 이방인을 하나의 민족으로 만들어 평화를 이룩하시고 16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써 둘을 몸으로 만드셔서 하느님과 화해시키시고 원수되었던 모든 요소를 없이하셨습니다. 17 이렇게 그리스도께서는 세상에 오셔서 하느님과 멀리 떨어져 있던 여러분에게나 가까이 있던 유다인들에게나 같이 평화의 기쁜 소식을 전해 주셨습니다.칠십인역 이사 57:19, 52:7; 즈가 9:10 18 그래서 이방인 여러분과 우리 유다인들은 모두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같은 성령을 받아 아버지께로 가까이 나아가게 되었습니다. 19 이제 여러분은 외국인도 아니고 나그네도 아닙니다. 성도들과 같은 시민이며 하느님의 가족입니다. 20 여러분이 건물이라면 그리스도께서는 건물의 가장 요긴한 모퉁잇돌이 되시며 사도들과 예언자들은 건물의 기초가 됩니다. 21 건물은 모퉁잇돌을 중심으로 서로 연결되고 점점 커져서 주님의 거룩한 성전이 됩니다. 22 여러분도 모퉁잇돌을 중심으로 함께 세워 져서 신령한 하느님의 집이 되는 것입니다.

 

 

마르 6:30-34, 53-56

30 사도들이 돌아와서 자기들이 일과 가르친 것을 예수께 낱낱이 보고하였다. 31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따로 한적한 곳으로 가서 함께 쉬자.” 하고 말씀하셨다. 찾아오는 사람이 너무 많아서 그들은 음식을 먹을 겨를조차 없었던 것이다. 32 예수의 일행은 배를 타고 따로 한적한 곳을 찾아 떠났다. 33 그런데 사람들은 일행이 떠나는 것을 보고 그들이 예수의 일행이라는 것을 알고는 여러 동네에서 모두 달려나와 육로로 해서 그들을 앞질러 곳에 갔다. 34 예수께서 배에서 내려 군중이 많이 모여 있는 것을 보시고 목자 없는 양과 같은 그들을 측은히 여기시어 여러 가지로 가르쳐주셨다. 민수 27:17(1열왕 22:17; 에제 34:5 참조) …

53 그들은 바다를 건너 겐네사렛 땅에 배를 대었다. 54 그들이 배에서 내리자 사람들은 예수를 알아보고 55 근처 지방을 뛰어다니면서 병자들을 요에 눕혀가지고 예수가 계시다는 곳을 찾아 그리로 데려왔다. 56 마을이나 도시나 농촌이나 어디든지 예수께서 가시기만 하면 사람들은 병자들을 장터에 데려다 놓고 옷자락만이라도 만지게 해달라고 간청하였다. 그리고 손을 사람은 모두 나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