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8. 22. 나해_연중21주일
열왕상 8:[1, 6, 10-11], 22-30, 41-43 / 시편 84 / 에페 6:10-20 / 요한 6:56-69
머물기
-성찬례의 영성 4-
채야고보 신부 / 제주한일우정교회, Artist
우리는 요한복음 6장을 통해 4주간 동안 성찬례의 영성에 대해 묵상하고 있습니다. 오늘이 그 마지막 시간입니다. 그동안 우리는 ‘오병이어 이야기’가 주님의 성만찬의 표징임을 첫 번째로 살펴봤습니다. 두 번째로 생명을 주는 주님의 빵이 어떻게 만물을 관통하여 우리를 하나로 엮어 ‘상호 기도’로 우리가 그리스도의 몸을 이뤄가는지도 살펴보았습니다. 그리고 세 번째로 ‘생명의 빵’이신 성육신 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살(σάρξ 사르크스)’이 어떻게 영성체를 통해 우리가 그의 살과 피를 먹음으로써 영원한 생명의 약속을 얻게 되는지 또한 살펴보았습니다. 또 “주님의 변모 축일”에는 그 이야기에 담긴 ‘떠남’의 의미에 대해 살펴보며 ‘상호 기도’를 위한 거룩한 거리두기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오늘은 우리의 영적 순례에서 ‘떠남’ 다음에 오는 ‘머물기’에 대해 살펴보려 합니다. 영적 순례에서 ‘머물기’는 ‘떠남’과 다른 영적 묵상으로 우리를 이끌어 줍니다. 물론 이 둘은 서로 상반된 개념이 아니라 하나입니다. ‘떠남’이 있고, 그다음에 ‘머물기’로 영적 순례는 마무리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머물기’는 곧 ‘존재의 자리’에 대한 묵상이 됩니다. ‘떠남’과 ‘머물기’는 영적 순례의 순환구조를 이루고 있습니다. 이러한 순환은 우리의 삶 속에서 계속 반복되는 현상으로 나타납니다. 그래서 야곱이 이집트의 파라오를 만났을 때 다음과 같이 말했던 것입니다.
“이 세상을 떠돌기 벌써 백삼십 년이 됩니다.” (창세 47:8)
야곱은 ‘떠남과 머물기’를 반복하는 자기의 삶을 한마디로 ‘떠돌이의 삶’으로 정의하고 있습니다. 그것도 백삼십 년을…
먼저 순례의 길 후에 머무는 것은 바로 하느님의 현존과 관련됩니다. 그래서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구름기둥과 불기둥이 움직이면 ‘떠남’을, 그것이 멈춰 서면 ‘머물기’를 반복하며 광야에서 40년의 시간을 보냈습니다. 즉 하느님이 현존하시는 곳, 기도하는 장소, 그곳이 ‘머물기’의 장소가 됨을 알 수 있습니다. 오늘 1 독서 말씀에서 솔로몬은 이러한 ‘머물기’와 하느님의 현존을 잘 이해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하느님, 하느님께서 이 땅에 사람과 같이 자리 잡으시기를 어찌 바라겠습니까? 저 하늘, 저 꼭대기 하늘도 주를 모시지 못할 터인데 소인이 지은 이 전이야말로 말해 무엇하겠습니까?" (열왕상 8:27)
그동안 법궤에 머물던 하느님의 현존이 솔로몬이 지어 봉헌한 하느님의 성전에 ‘머물기’를 시작했습니다. 이로써 이스라엘의 출애굽에서 시작된 ‘떠남’의 역사는 ‘잠시’ 마무리됩니다. ‘잠시’라는 말은 이스라엘이 또다시 앗시리아와 바벨론 포로 생활을 하게 될 것을 염두에 두고 사용한 말입니다. ‘머물기’가 익숙함이 되고, 그 익숙함이 영적 나태함이 되면 결국 하느님의 백성은 또다시 떠남을 시작해야 하는 때가 반드시 오고야 맙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은 세상 끝날까지 이러한 ‘떠남’과 ‘머물기’의 실존적 순환 속에 놓이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시편은 하느님의 현존 앞에 심지어 참새와 제비도 둥지를 틀고 ‘머물기’를 한다고 합니다. 그리고 시편 기자는 주님의 현존이 있는 성전을 너무 사모하여 하염없는 감격에 겨워 순례길의 모든 괴로움을 다 잊은 듯합니다.
“주님의 집 뜰 안이면 다른 곳의 천 날보다 더 나은 하루이오니 악인의 편한 집에 살기보다는 차라리 하느님 집 문지기로 있으리이다.”(시편 84:10)
시편 기자의 ‘머물기’는 결국 ‘하느님의 품’이었습니다. 많은 불편을 감수하고라도 성전의 문지기가 되는 편이 화려한 악인의 집에서 머무는 것보다 훨씬 자신에게 행복하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세속적인 모든 안락의 유혹을 거부하고 주님의 품에 머물기를 바라는 시편 기자의 결기가 느껴집니다. ‘머물기’는 이와 같이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놓고 하느님의 현존 안에 머물고자 세상의 고난도 마다하지 않을 용기와 믿음입니다. 이는 철저한 ‘자기 비움과 자기 포기’에서 나오는 결단입니다.
오늘 에페소인들에게 보낸 편지의 말씀에도 ‘머물기’에 대한 언급이 있습니다. 영적 전쟁에 임하면서 제일 먼저 요구되는 것은 다음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굳건히 서서 진리로 허리를 동이고 정의로 가슴에 무장을 하고” (에페 6:14)
여기에서 ‘굳건히 서다’는 헬라어 히스테미 ἵστημι를 사용했습니다. 이 뜻은 ‘멈춰서 바로 세운다’는 의미입니다. 삶의 고난과 실존의 고통 속에서 시시각각 우리를 괴롭히는 영적 도전들 앞에 우리는 굳건히, 또 홀연히 ‘머물러’ 서야 한다는 것입니다. 굳건한 바위 위에 서야 홍수에 휩쓸려가지 않는 원리와 같습니다. 마치 바위 위에 지은 집과 같은 이미지입니다. 그 바위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굳건한 반석 되시니 그 위에 내가 서리라, 그 위에 내가 서리라”는 찬양이 생각납니다. 이와 같이 모든 시련 앞에서 우리는 도망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의지할 바위를 찾아 시련의 급물살을 의연히 이겨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머물기’에는 우리가 감당해야 하는 시련 또한 동반됩니다. 결코 쉽지 않은 ‘머물기’입니다. 그래서 예수의 제자들은 유대인들이 다퉜던 것처럼 ‘오병이어 기적’과 ‘생명의 빵’에 대한 얘기를 듣고, 그리고 ‘주님의 살’을 먹으라는 주님의 요청에 모두 당황하여 갈등이 생겼습니다.
“이때부터 많은 제자들이 예수를 버리고 물러갔으며 더 이상 따라다니지 않았다.” (요한 6: 66)
얼마나 많은 제자들이 ‘생명의 빵’ 이야기를 듣고 떠나갔는지 잘 모르지만, 많은 사람들이 떠난 것은 분명한 것 같습니다. ‘가롯 유다’를 위시해서, 혁명을 꿈꿨던 젤롯 당원들, 배고픔을 채워줄 왕인 줄 알고 예수를 따랐던 사람들, 육신을 경시하고 초월적 신성만을 추구했던 ‘가현설주의자들’…많은 사람들이 떠나갔습니다. 그들은 처음에 예수를 따라 자신이 익숙한 곳에서 떠나 광야로 나왔으나, 결국 주님 곁에 ‘머물기’를 실패하고 다시 자신이 익숙했던 곳으로 모두 돌아갔습니다. 모두가 하느님이 원하시는 구원이 아니라 자신들이 만들어놓은 구원의 개념에 이끌려 간 것입니다. 믿음보다는 자신의 신념을 더 신봉한 사람들입니다.
아마도 제자들이 예수를 버리고 갔다는 이야기는 요한의 공동체의 상황을 반영한 것으로 보입니다. 요한복음이 쓰인 장소는 아시아의 ‘에페소’ 일 가능성이 크다고 학자들은 말합니다. 교부 이레네우스가 그의 글에서 제시한 장소이기도 하고, 요한복음을 잘 활용했던 성령론자로서 이단으로 정죄된 몬타누스가 활동했던 ‘프리기아’도 에페소와 가깝기 때문입니다. 요한의 공동체는 처음에는 유대교 회당과 매우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점차 둘 사이에 신앙적 충돌로 인한 갈등이 늘어가면서 유대교 회당에서 축출되는 상황을 맞이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러한 갈등에 대한 표현과 유대교와의 결별로 인한 반유대적 정서가 요한복음 곳곳에서 발견됩니다. 오늘 본문에서 제자들이 떠나는 상황이 바로 이에 대한 반영으로 보입니다. 지난주에 봤던 6장 52절에 유대인들과 예수께서 다투신 장면을 기억하십니까? 오늘 제자들이 예수를 버리고 떠난 상황은 그러한 다툼의 연장입니다. 유대교와 가현설주의자들로 골머리 않던 관계는 이렇게 해서 정리가 됩니다. 아마도 유대교 회당에서 축출된 요한 공동체의 심정과 예수의 곁에 머물기로 작정한 수제자들의 심정이 서로 오늘 말씀에서 교감을 일으킵니다. 주님과 함께 머물기는 이렇게 기존의 질서와 세상으로부터 이질적인 것이라 세상과 일치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육적인 것은 아무 쓸모가 없지만 영적인 것은 생명을 준다. 내가 너희에게 한 말은 영적인 것이며 생명이다.” (요한 6:63)
여기에서 주님께서는 세상을 쫓아가는 것을 ‘육적인 것’이라 단정을 짓습니다. 그리고 본인의 입에서 나오는 말이 곧 영적인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를 믿는 자는 예수 곁에 머물 수 있습니다. 세상의 안락과 자신의 신념을 추구하는 사람은 결국 육적인 것에 이끌려 ‘영원성’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은 여기에 가롯 유다의 배반에 대한 언급을 하면서 요한 공동체를 떠난 사람들에 대한 안타까움을 표현한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믿지 않는 사람들이 누구며 자기를 배반할 자가 누구인지 처음부터 알고 계셨던 것이다.” (요한 6:64b)
‘머물기’는 많은 갈등을 유발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기존에 있던 사람들의 텃새를 견뎌야 하고,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는 낯섦 또한 익숙해지는 데 많은 시간이 걸립니다. 그래서 실수도 많이 하고 모든 기반이 부족하여 허우적 될 가능성도 큽니다. 이미 익숙한 곳에서 떠나왔기에 새로운 곳에 머물기는 더 많은 집중력과 적응력을 필요로 합니다. 그래서 ‘떠남’ 보다 ‘머물기’가 어쩌면 더 힘든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듭니다. ‘떠남’은 익숙한 관계에서 떠나면 그만이지만, ‘머물기’는 새로운 관계성을 만들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을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교회에 갈등이 있으면 먼저 떠나는 편을 쉽게 선택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머물러서’ 문제를 새롭게 조명하고 풀어가기에는 ‘떠남’의 유혹이 더 큽니다. 차라리 안 보고 말지. 하면서 말입니다. 그런데 뭘 안 본다는 것일까요? 주님을? 아니면 교우들을? 아니면 성직자를? 그러나 안 보고 마는 것으로 모든 문제가 해결된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그것은 또 다른 문제의 시작을 야기할 뿐입니다.
그래서 교회 안에 ‘머물기’는 서로가 서로의 모습 속에서 그리스도의 모습을 발견하고, 서로가 서로에게 기대하며 함께 그리스도의 지체를 만들어 가는 어려운 작업입니다. 눈과 귀, 얼굴과 몸, 손과 발, 우리 몸의 지체 중 어느 것 하나 중요하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생명의 빵으로 자양분을 삼아 우리 그리스도의 몸 구석구석까지 생명의 자양분을 공급받아야 합니다. 단 한 명의 지체도 소외됨 없이. 그러할 때 주님께서 우리 안에 우리가 주님 안에 각각 머물 수 있는 ‘상호 거주’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이러한 역사가 매 주일 성찬례를 통해 고백되는 것. 또 우리 몸과 마음으로 느끼고 체화하는 것. 이것이 예수님의 곁에 머물기로 결단했던 예수의 제자들처럼 성찬례 안에 머무는 우리의 결단입니다. 이러한 결단으로 매주일 주님의 성찬을 접하는 우리 모두는 참 복 받은 존재들입니다. 이제 이 ‘머물기’로 4주에 걸친 ‘성찬례의 영성’에 대한 이야기를 마칩니다. 항상 주님 안에 머무시는 것을 갈망하시길 바랍니다. 비록 하느님의 성전의 문지기라도 하느님의 현존 안에 머물고자 갈망했던 오늘의 시편 기자처럼 우리 모두 하느님 안에 그리고 우리 교회 공동체 안에 머무시기 바랍니다. 코로나 19로 비록 함께 얼굴을 맞댈 수는 없지만, 하느님 안에서 일치와 동시성을 추구하는 우리의 갈망을 아무도 막을 수 없습니다. 우리의 성찬례가 하느님의 현존 안에 ‘머무는’ 감사의 제사가 되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아멘.
연중21주 (나해) 전례독서
본기도
살아계신 하느님, 주님은 성령으로 온 교회를 다스리시고 거룩하게 하시나이다. 비오니, 교회를 위해 드리는 신자들의 기도를 들으시고, 우리 각자의 소명에 따라 진실로 주님을 섬기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한 분 하느님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나이다. 아멘.
열왕상 8:[1, 6, 10-11], 22-30, 41-43
[1 그리고 나서 솔로몬은 야훼의 계약궤를 시온의 다윗 성에서 모셔 오려고 이스라엘의 장로들과 이스라엘 백성 각 가문의 대표들인 지파의 어른들을 예루살렘으로 소집하였다. … 6 그리고 나서 사제들이 야훼의 계약궤를 성전의 밀실, 지성소 거룹의 날개 아래 마련된 자리에 안치해 놓았다. … 10 사제들이 성소에서 나올 때 구름이 야훼의 전에 차 있었다. 11 사제들은 그 구름이 너무 짙었으므로 서서 일을 볼 수가 없었다. 야훼의 영광이 야훼의 전에 가득 차 있었기 때문이다. …]
22 그리고 나서 솔로몬은 이스라엘 온 회중이 보는 가운데 야훼의 제단 앞에 서서 하늘을 향하여 두 팔을 들어올리고 23 기도하였다. “이스라엘의 하느님 야훼여, 위로 하늘이나 아래로 땅 그 어디에도 당신과 같은 신은 없습니다. 주님 앞에서 한마음으로 살아가는 종들에게 신실하시며 맺은 계약을 지켜주시는 분이십니다. 24 당신의 종인 저의 아버지 다윗에게 약속하신 것을 그대로 지켜주셨습니다. 친히 말씀하신 것을 오늘 이렇게 손수 이루어주셨습니다. 25 그러니 이제 이스라엘의 하느님 야훼여, 당신의 종인 저의 아버지 다윗에게 내리신 약속, ‘네가 내 앞에서 산 것처럼 네 자손들도 길을 벗어나지 않고 내 앞에서 살아가기만 하면 이스라엘 왕위에 오를 후손이 끊기지 아니하리라.’ 하신 말씀을 지켜주십시오. 26 그러니 이제 이스라엘의 하느님이여, 당신의 종인 저의 아버지 다윗에게 약속하신 말씀을 이루어주십시오. 27 그러나 하느님, 하느님께서 이 땅에 사람과 같이 자리잡으시기를 어찌 바라겠습니까? 저 하늘, 저 꼭대기 하늘도 주를 모시지 못할 터인데 소인이 지은 이 전이야말로 말해 무엇하겠습니까? 28 그러나 나의 하느님 야훼여, 소인의 기도와 간청에 귀를 기울여주십시오. 오늘 당신 앞에서 울부짖으며 드리는 이 기도를 들어주십시오. 29 당신께서 ‘내 이름이 거기에 있을 것이다.’ 하고 말씀하신 곳입니다. 밤낮으로 이 전을 보살펴 주십시오. 소인이 이 곳을 바라보며 올리는 기도를 부디 들어주십시오. 30 소인과 당신의 백성 이스라엘이 이 곳을 바라보며 간절히 기도할 때 부디 들어주십시오. 당신께서 계시는 곳, 하늘에서 들어주십시오. 들으시고 용서해 주십시오. … 41 당신의 백성 이스라엘이 아닌 외국인이라도 그가 당신의 명성을 듣고 멀리서 찾아오거든, 42 당신께서 손을 펼치사 위력을 드러내시어 널리 알려진 당신의 명성을 듣고 와서 당신께서 사시는 전을 바라보며 기도드리거든 43 당신께서는 자리잡으신 곳, 하늘에서 들으시고 그 외국인의 청을 들어 그대로 이루어주십시오. 그리하시면 이 지상의 모든 백성들이 당신의 백성 이스라엘처럼 당신의 이름을 알게 되고 당신을 경외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소인이 지은 이 전이 당신의 성전임을 알게 될 것입니다. …
시편 84
1 만군의 주여,
. 계시는 곳 얼마나 좋으신가! ◯
. 내 영혼이
. 주님의 성전 뜰 안이 그리워 애타다가 지치옵니다.
2 나의 마음, 나의 이 몸이 살아 계신 하느님께 ◯
. 쁜 노래 부르옵니다.
3 나의 왕, 나의 하느님, 만군의 주여,
. 당신의 제단 곁에는 참새도 깃들이고 ◯
. 제비도 새끼 칠 보금자리 얻었습니다.
4 당신 집에 사는 사람 복되오니 ◯
. 길이길이 당신을 찬미하옵니다.
5 주님께 힘을 얻어 ◯
. 순례길에 오른 사람 복되어라.
6 메마른 골짜기를 지나갈 적에
. 거기에서 샘이 터지고, ◯
. 이른 비가 복을 내려 주리라.
7 그들은 오르고 또 올라 시온 산에서 ◯
. 마침내 하느님을 뵙게 되리라.
8 주, 만군의 하느님, 내 기도를 들어 주소서. ◯
. 야곱의 하느님, 귀를 기울이 소서.
9 우리의 방패이신 하느님이여, ◯
. 손수 축복하신 우리 임금을 굽어보소서.
10 주님의 집 뜰 안이면 다른 곳의 천 날보다
. 더 나은 하루이오니 ◯
. 악인의 편한 집에 살기보다는 차라리
. 하느님 집 문지기로 있으리이다.
11 주 하느님은 성채이며 방패이시니 ◯
. 우리에게 은총과 영광을 내려 주시고
¶ 흠없이 사는 사람에게 ◯
. 아낌없이 복을 내려 주십니다.
12 주 하느님, 만군의 주여, ◯
. 당신께 의지하는 사람은 복되옵니다.
⦿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
. 처음과 같이 지금도 그리고 영원히, 아멘.
에페 6:10-20
10 내가 끝으로 여러분에게 권고할 말은 이것입니다. 여러분은 주님과 함께 살면서 그분에게서 강한 힘을 받아 굳세게 되십시오. 11 속임수를 쓰는 악마에 대항할 수 있도록 하느님께서 주시는 무기로 완전무장을 하십시오. 12 우리가 대항하여 싸워야 할 원수들은 인간이 아니라 권세와 세력의 악신들과 암흑 세계의 지배자들과 하늘의 악령들입니다. 13 그러므로 지금 하느님의 무기로 완전 무장을 하십시오. 그래야 악한 무리가 공격해 올 때에 그들을 대항하여 원수를 완전히 무찌르고 승리를 거둘 수 있을 것입니다. 14 그러므로 굳건히 서서 진리로 허리를 동이고 정의로 가슴에 무장을 하고 15 발에는 평화의 복음을 갖추어 신고 16 손에는 언제나 믿음의 방패를 잡고 있어야 합니다. 그 방패로 여러분은 악마가 쏘는 불화살을 막아 꺼버릴 수 있을 것입니다. 17 구원의 투구를 받아 쓰고 성령의 칼을 받아 쥐십시오. 성령의 칼은 하느님의 말씀입니다. 18 여러분은 또한 언제나 기도하며 하느님의 도우심을 청하십시오. 모든 경우에 성령의 도움을 받아 기도하십시오. 늘 깨어서 꾸준히 기도하며 모든 성도들을 위하여 간구하십시오. 19 나를 위해서도 기도해 주십시오. 내가 말을 할 때 마땅히 해야 할 말을 하고 복음의 심오한 진리를 전할 때에 담대하게 말할 수 있도록 하느님께 기도해 주십시오. 20 나는 지금 갇혀 있기는 하지만 이 복음을 전할 사명을 띤 사람입니다. 그러니 마땅히 해야 할 말은 대담하게 말할 수 있게 되기를 빕니다.
요한 6:56-69
“ … 56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내 안에서 살고 나도 그 안에서 산다. 57 살아 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고 내가 아버지의 힘으로 사는 것과 같이 나를 먹는 사람도 나의 힘으로 살 것이다. 58 이것이 바로 하늘에서 내려온 빵이다. 이 빵은 너희의 조상들이 먹고도 결국 죽어간 그런 빵이 아니다. 이 빵을 먹는 사람은 영원히 살 것이다.” 59 이것은 예수께서 가파르나움 회당에서 가르치실 때 하신 말씀이다.
60 제자들 가운데 여럿이 이 말씀을 듣고 “이렇게 말씀이 어려워서야 누가 알아들을 수 있겠는가?” 하며 수군거렸다. 61 예수께서 제자들이 당신의 말씀을 못마땅해 하는 것을 알아채시고 “내 말이 귀에 거슬리느냐? 62 사람의 아들이 전에 있던 곳으로 올라가는 것을 보게 되면 어떻게 하겠느냐? 63 육적인 것은 아무 쓸모가 없지만 영적인 것은 생명을 준다. 내가 너희에게 한 말은 영적인 것이며 생명이다. 64 그러나 너희 가운데는 믿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하고 말씀하셨다. 예수께서는 믿지 않는 사람들이 누구며 자기를 배반할 자가 누구인지 처음부터 알고 계셨던 것이다. 65 예수께서는 또 이어서 “그래서 나는 아버지께서 허락하신 사람이 아니면 나에게 올 수 없다고 말했던 것이다.” 하고 말씀하셨다.
66 이 때부터 많은 제자들이 예수를 버리고 물러갔으며 더 이상 따라다니지 않았다. 67 그래서 예수께서는 열두 제자를 보시고 “자, 너희는 어떻게 하겠느냐? 너희도 떠나가겠느냐?” 하고 물으셨다. 68 그러자 시몬 베드로가 나서서 “주님, 주님께서 영원한 생명을 주는 말씀을 가지셨는데 우리가 주님을 두고 누구를 찾아가겠습니까? 69 우리는 주님께서 하느님이 보내신 거룩한 분이심을 믿고 또 압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글모음 > 설교문' 카테고리의 다른 글
“사랑의 부스러기 Crumbs of Love”- 편견과 배타성을 부수는 힘 (0) | 2021.09.04 |
---|---|
마음에 심긴 말씀 (0) | 2021.08.28 |
나의 살 σάρξ - 성찬례의 영성 3 (0) | 2021.08.13 |
떠남; 거룩한 거리두기 - 주님의 변모 (0) | 2021.08.07 |
만물을 관통하는 생명의 빵 - 성찬례의 영성 2 (0) | 2021.07.3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