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10.31. 나해_ 모든 성인의 날 _ 연중 31 주일
이사 25:6-9 / 시편 24 / 묵시 21:1-6상 / 요한 11:32-44
‘새로운 내러티브’로의 초대
채야고보 신부 / 성공회 제주한일우정교회, Artist
예수께서 마리아뿐만 아니라 같이 따라온 유다인들까지 우는 것을 보시고 비통한 마음이 북받쳐 올랐다. (요한 11:33)
여기에서 “비통한 마음이 북받쳐 올랐다.”라는 표현은 주님께서 몹시 당황하여 화를 내시는 모습을 표현한 것입니다.
“비통한 마음”으로 번역된 부분은 “ἐμβριμάομαι 엠브리마오마이”로 “분노하다, 화나다”라는 뜻의 단순과거동사입니다. 이 엠브리마오마이는 화가 나서 코로 숨을 씩씩거리는 모습을 연상시키는 단어입니다. 주님께서 정말 화가 나셨다는 표현을 하기 위해 요한이 선택한 단어일 겁니다. 그 수위는 분노의 수준입니다. 주님의 마음이 분노로 가득 찼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그다음에 나오는 “북받쳐 올랐다”는 ‘ταράσσω 타라쏘’로 ‘혼란시키다, 동요케 하다’ 라는 의미의 단순과거입니다. 주님께서는 분노하셨고, 또 혼란스러우셨습니다. 주님께서 화가 나셔도 단단히 나셨습니다. 그런데 왜 그러셨을까요? 어떤 이유 때문에 이토록 흥분하여 화가 나신 것일까요? 오늘 복음서는 이러한 주님의 분노를 두 번 표현합니다. 첫 번째는 마리아와 사람들이 함께 우는 것을 보신 다음에, 두 번째는 사람들의 비아냥거리는 말 다음입니다. 요한복음은 끊임없이 영적인 것과 육적인 것을 구분하여 말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영적인 것, 즉 아버지께로부터 보고 들은 것을 말하는 데 반해, 사람들은 늘 자신들의 경험의 관점, 이 세상의 관점에만 머뭅니다. 이러한 기조는 오늘 이야기에서도 유지됩니다. 사람들은 예수께서 죄의 권세를 이기신 분이심을 인지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인간을 사로잡고 있는 ‘죄와 사망의 권세’와 그 권세에 눌려버린 인간 실존의 연약함 때문에 화가 나신 것입니다. 인간이 좀처럼 죄와 사망을 넘어 한발짝도 내딛지 못하는 현실에 대한 안타까움입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화가 나신 이유에 대해 조금 더 깊이 들어가보면 마리아의 발언에서도 또 다른 이유를 찾을 수 있습니다.
“주님, 주님께서 여기에 계셨더라면 제 오빠가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 (요한 11:32)
이 말은 요한복음 11장 21절에서 마르타가 먼저 했던 말입니다. 언뜻 듣기에는 믿음과 예수의 능력에 대한 신뢰처럼 들립니다. 지금이라도 주님께서 하느님께 구하시면 하느님께서 들어주실 것이라는 고백이 뒤따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마르타는 예수를 단지 ‘기적을 베푸시는 분’으로 인식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것이 마르타의 고백이 지닌 한계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러나 같은 말이지만, 마리아의 말 다음에는 다른 표현이 없고, 곧바로 마리아와 사람들이 슬픔에 빠져 우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러한 점을 토대로 유추해보면 마리아는 주님에 대한 전적인 신뢰에서 고백을 했지만, 오라버니를 잃은 슬픔이 그녀의 모든 믿음을 덮어버린 것 같습니다. 자신의 오빠의 죽음에 대한 책임이 마치 예수님께 있는 듯 따지는 듯한 뉘앙스도 풍깁니다. 한마디로 예수께서 계시지 않았기 때문에 오빠가 죽었다는 것입니다. 예수의 전존재를 믿었던 마리아가 왜 갑작스럽게 이렇게 무너진 것일까요? 예수께서 그 자리에 그들과 함께 계시든 안 계시든 상관없이 이미 그분은 죽음의 권세를 이기신 분이십니다. 주님은 인간들처럼 죄와 죽음의 권세 아래 놓이신 분이 아니시며, 단순히 기적만을 행하시는 분 또한 아닙니다. 그분은 생명이고 부활이십니다. 이를 마리아가 망각한 것일까요?
“ Ἐγώ εἰμι 에고 에이미”, “나는 ~이다. 나는 있다” 요한은 요한복음의 전형적인 예수 선포 형식을 바로 오늘 이야기 전인 요한복음 11장 25-26절에도 배치를 시킵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겠고, 또 살아서 믿는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 (요한 11:25-26)
“ Ἐγώ εἰμι ἡ ἀνάστασις·” “나는 부활이다.” , “Ἐγώ εἰμι ἡ ζωή·” “나는 생명이다.” 요한 기자가 이러한 예수 정체 선포 다음에 일곱 번째 표징인 ‘나자로의 소생 이야기’를 배치한 이유는 분명합니다. “나자로의 소생”은 예수께서 죽음의 권세를 이기신 부활이고 생명이신 분임을 선포하기 위함입니다. 그는 단지 선지자들처럼 기적을 행하는 하느님의 사람이 아니라 부활이고 생명 그 자체이십니다. 그런 예수께서 그가 가장 사랑하시는 측근인 마리아와 마르타의 슬픔을 통해 인간 실존의 한계에 허덕이는 인간의 아픔과 고통을 절실히 통감하신 것입니다. 오빠를 잃은 슬픔에 빠져 마리아는 믿음이 흔들리고, 깊은 슬픔이 그녀의 전존재를 덮어버렸습니다. 어둠입니다. 그래서 마리아는 예수님께서 곁에 계신데도 다른 믿음 없는 사람들처럼 슬픔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울고 있었습니다. 두려움입니다. 주님께서 화가 나신 것은 바로 이런 부분 때문입니다. 즉 사망의 권세가 어떻게 인간에게 작용하고, 인간을 속이며, 인간의 전존재를 괴롭히고, 인간성을 말살하는지 목격하셨기 때문입니다. 운명의 거센 채찍질에 벌거벗은 인간의 나약함이 모두 드러나고 말았습니다. 아마도 마리아는 깊은 어둠과 절망에 빠졌던 것 같습니다. 영혼의 근원을 붙들고 놓아주지 않는 깊은 어둠. 우울증. 마치 ‘모래 수렁’처럼 움직이면 움직일수록 더욱 빨려 들어가는 짙은 어둠입니다. 이는 마리아의 예수에 대한 믿음을 완전히 흔들어 놓았습니다. 절망의 힘은 이렇게 강력합니다. 절망의 권세는 두려움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인간을 짓누르는 세상의 권세가 인간을 어떻게 무기력하게 넘어뜨리는지를 목격하셨기에 분노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의 분노는 결국 마리아를 향한, 그리고 우리의 인생을 향한 안타까운 ‘자비의 분노’라 할 수 있습니다.
아마도 우리 모두는 세월호 참사의 장면 속에서 인간의 한계를 마주하고 이러한 절망적인 분노를 한 번쯤은 경험해 보셨을 것입니다. 또한 개인적으로도 병이나 사고, 또는 경제적 어려움으로 인해 절망과 고통을 경험해 보셨을 것입니다. 인간의 능력으로 어쩔 수 없는 극한의 상황에서 느껴지는 안타까움과 분노. 인간의 절대적 무기력함. 망연자실. 그것이 만약 하나님을 향하게 되면 하느님에 대한 원망과 불평이 되기도 합니다. 그것이 다른 사람에게 향하게 되면 타인에 대한 원망과 비난으로 이어집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이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다가 어처구니없는 일을 당하면 더 쉽게 일반인들보다 이러한 유혹에 빠지곤 합니다. ‘열심히 하느님을 믿었는데 왜 이런 일이 내게 생기는 것이지?’ 그러고 보면 각 개인에게 주어진 인생은 절대 공평하지 않다는 생각이 듭니다. 누구는 평생을 울퉁불퉁한 길을 가고, 누구는 탄탄대로를 달립니다. 누구는 허덕이며 달렸더니 낭떠러지에 다다르고, 누구는 별 노력을 하지 않은 듯한데 인생이 꽃길입니다. 우리는 왜 하느님께서 서로에게 다른 능력과 다른 출발점, 그리고 다른 달란트를 주셨는지 그 이유는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인생이 불공평하기 때문에 함부로 다른 사람의 인생을 판단하거나 평가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혹 누가 잘났다면 그것 또한 주님의 축복이고, 누가 못났다면 그것 또한 주님의 섭리입니다. 그러니 우리 인간 편에서 할 수 있는 것은 각자의 삶의 처지를 인정하며 비관하지 말고, 다른 이들의 인생을 함부로 평가하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각자에게 다른 능력과 달란트를 주신 것은 연약한 인간들이 서로 도우며 의지해서 살라는 뜻입니다. 그것이 주님께서 우리에게 요청하시는 이웃 사랑입니다. 우리 몸의 각 지체들의 기능과 역할은 비록 다를지라도, 그것들이 모여 한 몸을 이루는 것과 같은 원리입니다. 그것이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교회입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인간 실존에는 늘 절대적 절망감과 무기력감, 그리고 우리의 믿음을 모조리 앗아 가는 강력한 힘인 슬픔과 두려움이 늘 암초처럼 놓여 있습니다. 그래서 이사야서 41장 10절에서 인간을 향해 “두려워 말라, 놀라지 말라”라는 하느님의 선포가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두려움과 무기력감이 미치는 영향이 어떠할지 알기에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주시는 당부입니다. 믿음의 사람은 마음이 무너지면 결국 모든 것이 무너지고 말기 때문입니다. 마음은 늘 중립적인 곳입니다. 성령과 사탄 그리고 우리의 자아도 이곳에서 늘 대립을 합니다. 그곳이 우리의 ‘자유 의지’가 활동하는 공간입니다. 그곳은 선택과 책임이 따르는 공간입니다. 두려움이든 하느님에 대한 신뢰이든 결국에는 우리 자신이 선택을 하는 것입니다. 슬퍼할 것도, 두렵지 않을 것도 결국은 우리의 선택에 의해 좌우됩니다. 감정적 선택 말입니다. 그러므로 슬픔도 두려움도 단순한 감정의 차원이 아님을 말해줍니다. 슬픔, 두려움, 그리고 사랑도 선택의 자유 의지에 그 뿌리를 둡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러한 마음에 쌓인 생각과 감정의 더러운 쓰레기들을 비우고 마음의 상태가 늘 “광대한 빈 평원”(에티 힐레숨)이 되도록 만들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야 우리가 부활이고, 생명이신 주님의 요청에 응답할 준비가 되는 것입니다. 자유 의지는 늘 우리로 하여금 선택해야 하는 상황을 마주하게 합니다. 그 선택의 결과는 아무도 예측할 수 없습니다. 마리아 같은 예수의 수제자도 슬픔과 절망 앞에서 이렇게 무너지는데 하물며 우리는 어떻겠습니까?
이런 생각을 하면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결코 녹록지 않다는 생각이 종종 듭니다. 그래서 매 주일 예배를 드리고 매일의 삶 속에서 제자도를 따르고자 노력하며 실천과 기도의 삶을 사시는 분들이 위대해 보입니다. 교회에 출석하면 모두가 복을 받고, 돈도 많이 벌고, 별 탈 없이 생활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그런 순탄한 삶을 보장받는다면 아마도 교회는 더 많은 사람들로 가득 채워질 것입니다. 70-80년대 소위 ‘예수 믿으면 복 받는다’라는 소리가 개발성장 위주의 사회적 분위기에 잘 편승하여 너무도 많은 사람들을 실제 복음과 다른 ‘기복 신앙’으로 이끈 것은 우리 기독교의 뼈 아픈 실수입니다. 그 결과가 오늘날과 같이 기독교가 “개독교”가 된 수치스러운 현실로 판명이 났습니다. 오늘 같은 ‘모든 성인의 날’에 우리 신앙의 선배들 앞에 너무나 부끄러운 생각이 듭니다. 이빨 빠진 호랑이 같고, 바람 빠진 고무풍선처럼 맥이 다 빠져버린 교회. 정말 우리의 성인들은 이러한 무기력한 교회를 위해 자신들의 전 생애를 내어놓은 것일까요? 아닐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과 똑같은 방식으로, 때론 세상 사람들보다 더 악랄하게, 세상 속에서 전혀 그리스도인답지 않게 살면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다시 십자가로 내몰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것은 ‘모든 성인들’ 앞에 우리의 부끄러움입니다. 짠맛을 잃은 소금처럼 더 이상 우리는 썩어가는 세상에서 전혀 영향을 끼치지 못하고 있습니다. 코로나는 우리 교회의 참모습을 세상에 적나라하게 보여줬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개독교”가 됐습니다.
오늘 저는 이러한 부끄러움 속에서 ‘모든 성인의 날’을 맞이 합니다. 그분들의 영광이 오늘날의 우리들로 인해 수치를 당하고 있습니다. 하물며 예수님은 언급할 자신조차 없습니다. 모두가 자신들만의 내러티브 속에서 빠져 전혀 다른 사람들의 내러티브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습니다. 우물 안 개구리처럼 우리는 우리 자신들의 이야기만 하기 바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의미를 깨닫지 못했던 ‘제자들의 몰이해’처럼 우리들도 자신의 내러티브 안에서 ‘절대적 몰이해’ 속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기리는 ‘모든 성인들’은 자신만의 내러티브를 버리고 예수님과 함께 새로운 내러티브를 쓴 사람들입니다. 분명한 것은 그 전환점은 바로 골고다의 십자가였을 것입니다. 인간 실존의 모든 슬픔과 고통을 주님께서는 우리를 대신하여 그 십자가 위에서 경험하셨고 사탄의 속임수를 끊어놓으셨습니다. 십자가는 모든 사망의 권세를 무너트렸습니다. 그러니 이제 우리만의 내러티브에서 제발 벗어나야 할 것입니다. 자신의 겉옷을 벗어던진 바르티매오처럼 나만의 이야기, 나만의 자존심, 나의 가면들, 나의 슬픔과 우울, 나의 절망을 벗어던지고, 주님과 성인들과 함께하는 새로운 내러티브를 만들 때입니다. 그러한 이야기 속에서는 우리 모두가 중요한 등장인물이 됩니다. 주님께서는 감독으로 우리 모두를 인도하실 것이고 각자에게 어울리는 배역으로 우리를 이끄실 것입니다. 우리가 함께 만들어갈 내러티브는 골고다에서 시작하여 제자들과 성인들을 관통하며 오늘에 다다른 이야기입니다. 그곳에 우리의 미래 또한 있습니다. 그래서 ‘모든 성인의 날’은 닫혀있는 내러티브가 아니라 오늘에도 끊임없이 미래를 향해 열린 이야기입니다. 그것은 우리를 위해, 우리를 통해 이루어질 하느님의 구원의 내러티브입니다. 우리는 예수님과 모든 성인들의 이야기를 이어갈 사명을 가진 예수님의 제자들입니다. 그러므로 “라자로야, 나오너라.”라는 주님의 외침은 우리로 하여금 절망과 슬픔과 두려움에서 당당히 나와 새로운 부활의 내러티브를 써가라는 주님의 초대인 것입니다. ‘아멘’은 이러한 초대에 대한 우리의 응답이며, 성령께서는 우리의 힘이되십니다. 우리 모두 ‘모든 성인들’과 함께 그러한 내러티브를 이어가는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길 간절히 축원합니다. 아멘.
전례독서: 모든 성인의 날 / 연중31주 (나해)
본기도
전능하신 하느님, 성인들의 믿음과 헌신으로 교회를 새롭게 하셨나이다. 비오니, 우리도 앞서간 모든 성인들의 거룩한 삶을 본받아 주님의 진리를 이 세상에 증거하고, 마지막 날에 성인들과 더불어 영원한 잔치에 참여하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한 분 하느님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나이다. 아멘.
이사 25:6-9
6 이 산 위에서 만군의 야훼, 모든 민족에게 잔치를 차려주시리라.
. 살진 고기를 굽고 술을 잘 익히고
. 연한 살코기를 볶고 술을 맑게 걸러 잔치를 차려주시리라.
7 이 산 위에서 모든 백성들의 얼굴을 가리던 너울을 찢으시리라.
. 모든 민족들을 덮었던 보자기를 찢으시리라.
8 그리고 죽음을 영원히 없애버리시리라.
. 야훼, 나의 주께서 모든 사람의 얼굴에서 눈물을 닦아주시고,
. 당신 백성의 수치를 온 세상에서 벗겨주시리라.
. 이것은 야훼께서 하신 약속이다.
9 그 날 이렇게들 말하리라.
. “이분이 우리 하느님이시다.
. 구원해 주시리라 믿고 기다리던 우리 하느님이시다.
. 이분이 야훼시다.
. 우리가 믿고 기다리던 야훼시다.
. 기뻐하고 노래하며 즐거워하자.
. 그가 우리를 구원하셨다.”
시편 24
1 이 세상과, 그 안에 가득한 것이
. 모두 주님의 것, ◯
. 이 땅과 그 위에 사는 것이
. 모두 주님의 것
2 주께서 바다 밑에 기둥을 박으시고 ◯
. 이 땅을 그 물 위에 든든히 세우셨다.
3 어떤 사람이 주님의 산에 오르랴? ◯
. 어떤 사람이 그 성소에 들어서랴?
4 행실과 마음이 깨끗한 사람,
. 허망한 데 뜻을 두지 않고 ◯
. 거짓 맹세 아니하는 사람이다.
5 이런 사람은 주님께 복을 받고 ◯
. 하느님께 구원받을 사람이다.
6 이런 사람이 하느님을 찾는 사람이며 ◯
. 야곱의 하느님 앞에 나아갈 사람이다.
7 문들아, 머리를 들어라.
. 오래된 문들아, 일어서라. ◯
. 영광의 왕께서 드신다.
8 영광의 왕이 누구신가?
. 힘세고 용맹하신 주님이시다. ◯
. 싸움에 용맹 떨치신 주님이시다.
9 문들아, 머리를 들어라.
. 오래된 문들아, 일어서라 ◯
. 영광의 왕께서 드신다.
10 영광의 왕이 누구신가? ◯
. 만군의 주께서 영광의 왕, 그분이시다.
⦿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
. 처음과 같이 지금도 그리고 영원히, 아멘.
묵시 21:1-6상
1 그 뒤에 나는 새 하늘과 새 땅을 보았습니다. 이전의 하늘과 이전의 땅은 사라지고 바다도 없어졌습니다. 2 나는 또 거룩한 도성 새 예루살렘이 신랑을 맞을 신부가 단장한 것처럼 차리고 하느님께서 계시는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3 그 때 나는 옥좌로부터 울려 나오는 큰 음성을 들었습니다. “이제 하느님의 집은 사람들이 사는 곳에 있다. 하느님은 사람들과 함께 계시고 사람들은 하느님의 백성이 될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친히 그들과 함께 계시고 그들의 하느님이 되셔서 4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주실 것이다. 이제는 죽음이 없고 슬픔도 울부짖음도 고통도 없을 것이다. 이전 것들이 다 사라져버렸기 때문이다.”
5 그 때 옥좌에 앉으신 분이 “보아라, 내가 모든 것을 새롭게 만든다.” 하고 말씀하신 뒤 다시금 “기록하여라, 이 말은 확실하고 참된 말이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6 또 이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제 다 이루었다. 나는 알파와 오메가, 곧 처음과 마지막이다. 나는 목마른 자에게 생명의 샘물을 거저 마시게 하겠다.”
묵시 21:3 – 레위 26:11-12; 2역대 6:18; 에제 37:27; 즈가 2:10.
묵시 21:4 – 이사 25:8.
요한 11:32-44
32 마리아는 예수께서 계신 곳에 찾아가 뵙고 그 앞에 엎드려 “주님, 주님께서 여기에 계셨더라면 제 오빠가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고 말하였다. 33 예수께서 마리아뿐만 아니라 같이 따라온 유다인들까지 우는 것을 보시고 비통한 마음이 북받쳐 올랐다. 34 “그를 어디에 묻었느냐?” 하고 예수께서 물으시자 그들이 “주님, 오셔서 보십시오.” 하고 대답하였다. 35 예수께서는 눈물을 흘리셨다. 36 그래서 유다인들은 “저것 보시오. 라자로를 무척 사랑했던가 봅니다.” 하고 말하였다. 37 또 그들 가운데에는 “소경의 눈을 뜨게 한 사람이 라자로를 죽지 않게 할 수가 없었단 말인가?” 하는 사람도 있었다.
38 예수께서는 다시 비통한 심정에 잠겨 무덤으로 가셨다. 그 무덤은 동굴로 되어 있었고 입구는 돌로 막혀 있었다. 39 예수께서 “돌을 치워라.” 하시자 죽은 사람의 누이 마르타가 “주님, 그가 죽은 지 나흘이나 되어서 벌써 냄새가 납니다.” 하고 말씀 드렸다. 40 예수께서 마르타에게 “네가 믿기만 하면 하느님의 영광을 보게 되리라고 내가 말하지 않았느냐?” 하시자 41 사람들이 돌을 치웠다. 예수께서는 하늘을 우러러보시며 이렇게 기도하셨다. “아버지, 제 청을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42 그리고 언제나 제 청을 들어주시는 것을 저는 잘 압니다. 그러나 이제 저는 여기 둘러선 사람들로 하여금 아버지께서 저를 보내주셨다는 것을 믿게 하려고 이 말을 합니다.” 43 말씀을 마치시고 “라자로야, 나오너라.” 하고 큰소리로 외치시자 44 죽었던 사람이 밖으로 나왔는데 손발은 베로 묶여 있었고 얼굴은 수건으로 감겨 있었다. 예수께서 사람들에게 “그를 풀어주어 가게 하여라.” 하고 말씀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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