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11. 14. 나해_ 추수감사주일_연중 33 주일
신명 8:1-10 / 시편 65 / 야고 1:17-18, 21-27 / 마태 6:25-33
“너희는 새보다 훨씬 귀하다.”
채야고보 신부 / 성공회 제주한일우정교회 사제, Artist
오늘 말씀은 주님께서 실제로 발설하셨을 가능성이 큰 문장들로 구성되었습니다. 비슷한 단어나 문장을 운율에 맞춰 대비시켜 표현하는 ‘대구법’을 사용한 것은 그 특징입니다. 이런 화법은 주님의 것이 분명한 것 같습니다. 앞 문장과 뒷 문장, 앞에 나온 단어와 뒤에 나온 단어가 각각 짝을 이룹니다. 음식과 목숨, 옷과 몸 등이 서로 대비됩니다. 달변가이셨던 주님께는 이런 대구법을 통해 본인이 말씀하시고자 하는 바를 정확하게 청자에게 전달하셨습니다. 이런 문장을 묵상하다 보면 주님께서 어디서 이런 수사법을 배우셨는지 놀랍기만 합니다.
주님께서 설교를 하실 때 주변에 새들이 날아다녔던 것 같습니다. 주님께서는 그 순간을 놓치지 않으시고 새의 나는 모습을 보며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저 새들은 여러분들처럼 ‘씨를 뿌리거나 거두거나 곳간에 모아들이지 않아도’ 저렇게 잘 먹고 잘 살지 않느냐?”라고. 주님의 산상설교를 듣기 위해 몰려든 사람들은 대부분 가난한 사람들이었고, 또 원근 각처에서 왔기 때문에 매우 지치고 굶주린 사람들이 많았을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청중의 행색과 표정에서 그들의 고달픈 삶의 그늘을 읽으셨습니다. 예수께서는 그들의 필요와 육신의 배고픔을 달래주실 수 있는 분이셨습니다. 그러나 그분은 그들의 육신적 삶의 고통 이면에 더 근원적인 문제에 집중하셨습니다. 그것은 그들의 ‘존엄성(尊嚴性, dignity)’과 관련된 것이었습니다.
너희는 새보다 훨씬 귀하지 않느냐? (마태 6: 26하)
“너희는 새보다 귀한 존재이다!” 하느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인간의 존엄성. 먹고사는 문제에 짓눌려 그 존엄성이 무너지고 있는 현장을 그들의 모습 속에서 목격하신 것입니다. 그들의 배를 채워주고, 그들의 필요를 채워준들 그들 스스로 자신들이 존엄한 존재라는 사실, 즉 하느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존재로서의 존엄성을 회복 할리 만무했습니다. 무너진 존엄성을 다시 회복하는 것은 말같이 쉽지가 않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독일의 자연과학자 게랄트 휘터가 그의 저서 “존엄하게 산다는 것”에서 말한 것처럼 학습되고 길러질 수 있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아무것도 걸치지 않고 빈손으로 왔지만, 존재 자체만으로도 귀했던 태아기적 모습 그대로, 인간은 그 탄생 자체로 경이로운 존재라는 사실. 아담과 하와가 창조되던 태곳적 순간은 우리 인간의 탄생의 순간과 이미지적으로 교차됩니다. 아담과 하와는 자신의 존재 자체로 부끄러움을 전혀 몰랐던 존재였습니다. 사람은 자신의 존엄성을 잃기 시작하면서 처음으로 자신의 부끄러움을 경험합니다. 그래서 아담과 하와는 하느님의 시선으로부터 자신들을 숨겼고, 또 서로를 향해 각자의 몸을 가리기 시작했습니다.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은 그렇게 우리로부터 멀어지기 시작했습니다. 태초부터 현재까지 인간이 실존적으로 이렇게 처참하게 유린당해온 것은 전적으로 우리가 우리의 존엄성을 잃었기 때문입니다. 존재로서의 존엄 말입니다. 존재 자체가 인간의 전부이던 것이 ‘실낙원’ 이후로는 소유가 그 존재의 자리를 대신하기 시작했습니다. 아담과 하와의 첫째 아들인 가인은 곡식을 농사지으며 농산물 축적과 저장의 방법, 그리고 땅의 소유를 통해 점점 소유형 인간으로 나아갔습니다. 농사는 혼자 지을 수 없기 때문에 종을 부리게 되고, 농사지을 땅의 유무는 인간 존재를 소유의 불평등 속에서 계급을 형성하게 했습니다. 반면 아벨은 양 떼를 몰고 유목생활을 하며 철저히 자연에 순응하는 존재형 인간으로 살았습니다. 유목민은 언제나 계절을 따라 가축을 데리고 이동을 해야 했기 때문에 축적이나 저장, 그리고 땅의 소유가 불가능했습니다. 양들을 위한 푸른 초장은 그들이 심거나 가꾼 것이 아니라 자연의 선물이며 야훼의 은총이었습니다. 아벨은 땅이 없이 떠돌아다녔고, 가인은 땅을 소유했습니다. 그들의 운명은 이토록 달랐습니다. 소유형 인간은 존재형 인간을 결코 감당할 수 없었습니다. 그 결과가 어떠했는지 우리는 창세기 4장을 통해 잘 알고 있습니다. 소유형 인간은 결국 존재형 인간을 제거해야만 했습니다. 인류의 비극의 시작입니다. 아벨의 억울함이 어떠했는지 성서는 다음과 같이 기록했습니다. “네 아우의 피가 땅에서 나에게 울부짖고 있다.”(창세 4: 10하)라고. 그래서 아벨의 때부터 지금까지 땅은 소유형 인간에 의해 핍박받고 고난당하는 가난한 자들의 신음 소리를 모두 기억합니다. 하느님의 관점에서 땅은 결코 소유의 대상이 아닙니다.
“너희는 저 새들보다 귀하고 저 들의 꽃들보다 귀하다”. 이 존재론적인 선포의 말씀을 이해하려면, 이 말씀 앞부분에 무슨 말씀이 있었는지 주목해봐야 합니다. 오늘 읽은 말씀 바로 앞에는 “하느님이냐 아니면 재물이냐?”(마태 6:24 비교) 우리의 선택을 요청하는 말씀이 나옵니다. 여기에서 사용한 ‘재물’이란 단어의 헬라어는 ‘마모나스μαμωνᾶς’입니다. 마모나스는 샘족 언어로는 “사람이 신뢰하는 보물”을 뜻합니다. 이는 우리가 잘 아는 ‘맘몬 mammon’으로도 번역 가능합니다. 맘몬은 인간에게 가장 치명적인 사탄입니다. 이것이 주님께서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고 단정하신 이유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주변에 몰려온 사람들의 형편을 아셨지만, 그들이 그토록 바라고 원했던 입는 문제와 먹는 문제와 같은 소유의 문제 대신 더 본질적인 문제로 청자들의 시선을 이동시키고자 하셨습니다. “당장의 허기를 채우고 추위를 피하게 하는 물질의 소유이냐?” 아니면 “하느님의 뜻과 그의 의를 구하는 존재의 문제이냐?” 참 어려운 선택을 그들에게 요청하십니다. 허기를 달래고 추위를 피하는 것은 당장에 필요한 것이지만, ‘존재의 존엄’을 구하는 것이 지금 그들의 상황에서 과연 무슨 의미가 있을까? 아마도 예수 주변에 모였던 사람들은 매우 의아하게 생각했을 것입니다. 당장 배고프고, 헐벗었기 때문입니다.
먹고사는 문제에 대한 시험은 이미 광야에서 주님께서도 받으셨던 시험이었습니다. 이제 그러한 시험을 예수께 나온 사람들이 예수의 입을 통해 똑같은 도전을 받고 있습니다. 천만다행인 것은 그러한 도전이 사탄으로부터 나온 것이 아니라, 바로 예수님으로부터 도전받았다는 점입니다. 오늘 말씀이 어떤 상황에서 실제로 발설됐는지 우리는 모릅니다. 다만 마태오가 산상수훈에 예수의 설교전승자료들을 모두 모아 두었기 때문에 이에 대한 배경을 ‘산 또는 언덕’으로 가정할 뿐입니다. 분명한 것은 지금 주님께서는 에리히 프롬의 말처럼 ‘존재이냐 또는 소유이냐’ 그들에게 결단을 요구하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말씀을 들은 사람들은 과연 어떻게 반응을 했을까요? 여러분도 잠시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만약 여러분도 똑같은 말씀을 듣는다면 어떻게 반응하시겠습니까? “존재입니까? 아니면 소유입니까? 이 양자택일 앞에 과연 우리는 어떤 선택을 할까요? 하느님의 일과 세상의 일이 중첩될 때, 여러분의 우선권은 과연 어떤 것입니까? 일주일 중 5일 또는 6일의 시간을 소유를 위해 노력하고, 단 하루를 존재를 위해 노력하는 것이 왜 이토록 힘들까요? 일주일 전부를 소유를 위해 헌신한다면, 우리의 존재는 과연 안녕해질까요? 그리고 우리의 일상이 정말 평안할까요? 우리 안에 넓은 공허가 우리의 일상을, 우리의 감정을 지배하고 있는대도 우리는 과연 소유에만 집착할 수 있을까요? 인간 존재의 존엄성은 마치 보호자가 필요한 어린아이처럼 우리가 내면적으로 가꾸고 보듬고 사랑하고 그리고 타인을 통해 배우지 않으면 금방 그 생명력을 잃어버리고 맙니다. 우리 내면의 빛은 그대로 방치하면 사탄의 점유물이 되고 맙니다. 그래서 자본이나 돈을 우리는 ‘맘몬’이라 부릅니다. 우리 존재의 내면의 빛이 빛을 잃는 순간 우리의 무의식은 끊임없이 우리에게 여러 경로로 경고를 보내지만, 소유를 향한 우리의 일상은 도저히 멈출 줄을 모릅니다. 그래서 우리는 결국에 우리의 ‘존엄’도 잃고, 또 우리의 ‘소유’도 잃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 중에는 인생의 막다른 골목이나 절벽에 섰다가 회심하고 돌아오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자신의 운명이 몰아치는 그 한계점까지 가서 직접 체험해 보고, 경험해 봐야만 사람은 정신을 차립니다. 제 자신의 삶 또한 그런 경우였기에 변명의 여지가 없음을 고백합니다. 소유가 무너지고 존재가 무너진 지점에서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은 오직 단 한 가지밖에 없음을 바로 그 순간 깨닫습니다. 존재의 존엄을 회복하지 않고는 결코 한 발짝도 우리는 앞으로 나갈 수 없다는 사실을. 존재의 존엄을 잃으면 우리는 커다란 수렁같이 질퍽한 허무를 우리 안에서 경험하게 됩니다. 그 허무는 모든 것을 공허하게 만듭니다.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모든 것을 공허한 것으로 만듭니다. 그래서 그 끝은 언제나 절망이 됩니다. 그것이 바로 죽음의 권세임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하느님께서 의롭게 여기시는 것을 구하여라. 그러면 이 모든 것도 곁들여 받게 될 것이다. (마태 6:33)
주님께서는 오늘 추수감사절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존재를 위해 살라고. 그러면 소유는 곁들여 받게 될 것이라고. 이것은 삶의 지혜를 말씀하신 주님의 잠언입니다. 인생에게 가장 중요한 삶의 우선순위와 가치의 척도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소유는 잃어도 다시 얻으면 되지만, 존재의 존엄성을 잃는 순간 우리는 삶의 모든 기반을 잃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소유를 추구하고 그것을 지키고자 하는 삶은 그 한계가 명약관화합니다. 추수감사절 전례 독서가 이러한 부분을 우리에게 상기시키는 점은 매우 의미심장합니다. 한 해 동안 우리가 노력한 것을 가인과 아벨처럼 하느님께 감사하는 날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기억할 것은 하느님께서는 가인의 제사를 기뻐 아니하셨다는 사실입니다. 아무리 땅의 소출이 많아 소유가 늘고 우리가 풍요해진들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지 생각해 보자는 것입니다. 땅은 끊임없이 아벨의 피로부터 지금까지 많은 착취받는 사람들의 피와 땀을 흡수해 왔습니다. 땅은 인간의 고통을 기억합니다. 누군가 많은 것을 가졌다면 반드시 누군가는 상대적으로 가지지 못하게 되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한정된 자원을 공유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소유는 불평등의 원인이 됩니다. ‘가인의 소유’는 우리 인간의 존엄을 처참하게 짓밟아 왔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우리의 감사가 바로 희생의 피 위에서 드려지는 제사이길 바라신 것입니다. 그것이 아벨이 드린 희생의 피의 제사였습니다.
오늘 이렇게 많은 감사의 상징물과 소출들을 제대 앞에 가져오셨지만, 이 시간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제물은 바로 우리 자신이란 점을 기억하셨으면 좋겠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십자가의 핏값으로 구원받은 존재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소유가 아닌 우리 자신의 존엄성을 깨닫고 우리가 스스로 하느님의 제물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주님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우리가 잃었던 태초의 그 존엄성을 각자가 회복하길 원하십니다. 여러분은 저 공중의 새들보다, 저 들판의 꽃들보다 더 아름답고 귀한 존재들이기 때문입니다. 지난 한 해 동안 우리의 소유가 늘어난 것도 기쁜 일이지만, 비록 소유가 늘지 않았어도 우리는 기뻐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존재는 끊임없이 성장해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각자가 하느님의 귀한 선물이기에 우리는 서로 곁에 있는 교우들을 바라보면서 하느님께 감사해야 합니다. 이렇게 건강한 모습으로 매주일 서로를 만날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축복인지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우리는 서로로 인해 오늘 하느님께 감사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가 아벨과 같은 존재형 인간으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우리는 서로를 절실히 필요로 합니다. 창세부터 우리 안에 내재된 존재의 존엄성이 우리 가운데 아름답고 풍성해지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그것이 하느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는 길입니다. 하느님의 나라와 의는 이러한 존재형 인간들로 인해 더욱 넓어지고 깊어질 것입니다. 이러한 우리가 됩시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말씀을 나눴습니다. 아멘.
전례독서: 추수감사주일
본기도
전능하시고 은혜로우신 하느님, 우리의 필요에 따라 풍성한 수확을 주시니 감사하나이다. 비오니, 바다와 육지의 소산물을 기르고 수확하는 이들을 축복하시며, 우리로 하여금 허락하신 은총을 잘 관리하고 나누는 충성된 청지기가 되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한 분 하느님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나이다. 아멘.
신명 8:1-10
너희는 내가 오늘 명하는 모든 계명을 성심껏 지켜야 한다. 그래야 너희는 행복하게 살며 번성할 것이고 야훼께서 너희의 선조들에게 주겠다고 맹세하신 땅에 들어가 그 땅을 차지할 것이다. 2 너희는 지난 사십 년간 광야에서 너희 하느님 야훼께서 어떻게 너희를 인도해 주셨던가 더듬어 생각해 보아라. 하느님께서 너희를 고생시킨 것은 너희가 당신의 계명을 지킬 것인지 아닌지 시련을 주어 시험해 보려고 하신 것이다. 3 하느님께서는 너희를 고생시키시고 굶기시다가 너희가 일찍이 몰랐고 너희 선조들도 몰랐던 만나를 먹여주셨다. 이는 사람이 빵만으로는 살지 못하고 야훼의 입에서 떨어지는 말씀을 따라야 산다는 것을 너희에게 가르쳐주시려는 것이었다. 4 지난 사십 년 동안 너희 몸에 걸친 옷이 떨어진 일이 없었고, 발이 부르튼 일도 없었다. 5 너희 하느님 야훼께서는 사람이 자기 자식을 잘되라고 고생시키듯이 그렇게 너희를 잘되라고 고생시키신 것이니, 이를 마음에 새겨두어라. 6 너희는 너희 하느님 야훼를 경외하여 그의 계명을 지키고 그가 보여주신 길만을 따라가도록 하여라. 7 너희 하느님 야훼께서는 이제 너희를 기름지고 넓은 땅, 골짜기와 산에서 지하수가 솟아 샘이 되고 냇물이 흐르는 땅으로 이끌어들이려고 하신다. 8 그 곳은 밀과 보리가 자라고 포도와 무화과와 석류가 여는 땅이요, 올리브 나무 기름과 꿀이 나는 땅이다. 9 굶주리지 않고 먹을 수 있는 땅, 아쉬운 것 하나 없는 땅, 돌에서는 쇠를, 산에서는 구리를 캐낼 수 있는 땅이다. 10 너희 하느님 야훼께서 너희에게 주신 이 좋은 땅에서 너희는 배불리 먹으며 하느님을 기리게 될 것이다.
시편 65
1 하느님,
. 시온에서 찬미받으심이 마땅하오니 ◯
. 당신께 바친 서원 이루어지게 하소서.
2 당신은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십니다. ◯
. 죄지은 모든 사람 당신께 나아가 고백하오니,
3 우리가 지은 죄 힘겹도록 무거우나 ◯
. 당신은 그것을 씻어주십니다.
4 복되어라,
. 당신께 뽑혀 한 식구 된 사람, ◯
. 당신 궁정에서 살게 되었으니,
. 당신의 집, 당신의 거룩한 성전에서, ◯
. 우리도 마음껏 복을 누리고 싶습니다.
5 우리를 구원하시는 하느님,
. 놀라운 기적으로 정의를 세우시고,
. 우리 소원 들어주시니, ◯
. 땅 끝까지 먼 바다 끝까지
. 사람들의 소망입니다.
6 그 크신 힘으로 산들의 뿌리를 박으셨으며 ◯
. 권능의 띠를 허리에 질끈 동이시고
7 설레는 바다와 술렁이는 물결 ◯
. 설치는 부족들을 가라앉히셨습니다.
8 땅 끝에 사는 사람들이
. 당신의 손길을 보고 놀라며 ◯
. 해뜨는 데서 일으키신 노랫소리,
. 해지는 곳에 메아리칩니다.
9 하느님은 이 땅을 찾아오시어, ◯
. 비를 내리시고 풍년을 주셨습니다.
¶ 손수 파 놓으신 물길에서,
. 물이 넘치게 하시어 ◯
. 이렇게 오곡을 마련해주셨습니다.
10 밭이랑에 물 대시고, 흙덩이를 주무르시고
. 비를 쏟아 땅을 흠뻑 적신 다음 ◯
. 움트는 새싹에 복을 내리십니다.
11 이렇듯이 복을 내려 한 해를 장식하시니 ◯
. 당신 수레 지나는 데마다
. 기름이 철철 흐릅니다.
12 광야의 목장에도 기름기 흐르고 ◯
. 언덕마다 즐거움에 휩싸였습니다.
13 풀밭마다 양떼로 덮이고,
. 골짜기마다 밀 곡식이 깔렸으니 ◯
. 노랫소리 드높이 모두 흥겹습니다.
⦿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
. 처음과 같이 지금도 그리고 영원히, 아멘.
야고 1:17-18, 21-27
17 온갖 훌륭한 은혜와 모든 완전한 선물은 위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하늘의 빛들을 만드신 아버지께로부터 내려오는 것입니다. 하느님 아버지는 변함도 없으시고 우리를 외면하심으로써 그늘 속에 버려두시는 일도 없으십니다. 18 하느님께서는 뜻을 정하시고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모든 피조물의 첫 열매가 된 것입니다. …
21 그러므로 모든 더러운 것과 온갖 악한 행실을 버리고 하느님께서 여러분의 마음속에 심으신 말씀을 공손히 받아들이십시오. 그 말씀에는 여러분을 구원할 능력이 있습니다. 22 그러니 그저 듣기만 하여 자기 자신을 속이는 사람이 되지 말고 말씀대로 실천하는 사람이 되십시오. 23 말씀을 듣고도 실천하지 않는 사람은 제 얼굴의 생김새를 거울에다 비추어보는 사람과 같습니다. 24 그 사람은 제 얼굴을 비추어보고도 물러나서는 곧 제 모습을 잊어버리고 맙니다. 25 그러나 우리에게 자유를 주는 완전한 법을 잘 살피고 꾸준히 지켜 나가는 사람은 그것을 듣고 곧 잊어버리는 일이 없으며 들은 것을 실천에 옮깁니다. 이렇게 실천함으로써 그 사람은 하느님의 축복을 받을 것입니다.
26 누구든지 자기가 신앙 생활을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자기 혀를 억제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자기 자신을 속이는 셈이니 그의 신앙 생활은 결국 헛것이 됩니다. 27 하느님 아버지 앞에 떳떳하고 순수한 신앙 생활을 하는 사람은 어려움을 당하고 있는 고아들과 과부들을 돌보아 주며 자기 자신을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않게 하는 사람입니다.
마태 6:25-33
25 “그러므로 나는 분명히 말한다. 너희는 무엇을 먹고 마시며 살아갈까, 또 몸에는 무엇을 걸칠까 하고 걱정하지 마라. 목숨이 음식보다 소중하지 않느냐? 또 몸이 옷보다 소중하지 않느냐? 26 공중의 새들을 보아라. 그것들은 씨를 뿌리거나 거두거나 곳간에 모아들이지 않아도 하늘에 계신 너희의 아버지께서 먹여주신다. 너희는 새보다 훨씬 귀하지 않느냐? 27 너희 가운데 누가 걱정한다고 목숨을 한 시간인들 더 늘일 수 있겠느냐? 28 또 너희는 어찌하여 옷 걱정을 하느냐? 들꽃이 어떻게 자라는가 살펴보아라. 그것들은 수고도 하지 않고 길쌈도 하지 않는다. 29 그러나 온갖 영화를 누린 솔로몬도 이 꽃 한 송이만큼 화려하게 차려 입지 못하였다. 30 너희는 어찌하여 그렇게도 믿음이 약하냐? 오늘 피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질 들꽃도 하느님께서 이처럼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야 얼마나 더 잘 입히시겠느냐? 31 그러므로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또 무엇을 입을까 하고 걱정하지 마라. 32 이런 것들은 모두 이방인들이 찾는 것이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는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잘 알고 계신다. 33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하느님께서 의롭게 여기시는 것을 구하여라. 그러면 이 모든 것도 곁들여 받게 될 것이다. 34 그러므로 내일 일은 걱정하지 마라. 내일 걱정은 내일에 맡겨라. 하루의 괴로움은 그 날에 겪는 것만으로 족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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