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10.10. 나해_연중 28주일
대한성공회 최초의 의료 선교사 남득시(랜디스), 와일스(1890)
욥기 23:1-9, 16-17 / 시편 22:1-15 / 히브 4:12-16 / 마르 10:17-31
그리스도의 제자도(discipleship)
채야고보 신부 / 성공회 제주한일우정교회, Artist
오늘 복음서 말씀은 모두 세 파트로 나눠져 있습니다. 일견에는 하나의 이야기인 것 같지만, 전승 자료에 상황 묘사를 추가한 ‘상황문’이라 할 수 있습니다. 첫 번째는 부자 청년이 주님의 부르심을 거부한 이야기(17-22), 두 번째는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어렵다는 이야기(23-27), 세 번째는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를 따라나선 제자들에게 주어질 상급에 대한 이야기입니다(28-31). 첫 번째와 두 번째 이야기는 마르코가 너무 적절하게 연결을 시켜놓아 마치 하나의 내러티브(narrative)로 느껴집니다. 두 번째 이야기를 빼고 첫 번째 이야기와 세 번째 이야기를 연결해 읽어도 또 다른 내러티브가 자연스럽게 만들어집니다. 이는 세 이야기가 상호 연관성을 갖는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한 이야기씩 따로 구분하여 자세히 읽으면 서로의 맥락에 차이가 있음을 발견합니다. 각 이야기의 강조점이 조금씩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먼저 첫 번째와 두 번째 이야기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이 두 이야기를 연결한 내러티브는 우리로 하여금 단순히 주님께서 ‘돈’에 대해 경계하는 메시지를 주시는 것으로 쉽게 단정 지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야기를 깊이 분석해보면 오늘 이야기는 ‘제자도(discipleship)와 구원’에 관한 이야기임을 알 수 있습니다. 첫 번째 이야기를 살펴보면 주님께서는 부자 청년을 무척 좋아하셨던 것 같습니다. 그 청년은 모세의 율법도 잘 지키는 모범적이고 성실한 유대 청년이었습니다. 풍요롭고 뭐 하나 부족함이 없는 청년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이 청년에게는 약간의 ‘허세’도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니 주님께 다음과 같은 아부성 발언도 서슴지 않고 합니다.
“선하신 선생님, 제가 무엇을 해야 영원한 생명을 얻겠습니까?”(마르 10:17)
그는 예수를 ‘선하시다’고 표현하며 주님을 높이면서, 그러한 주님을 알아본 자신도 그 반열에 놓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청년도 주님으로부터 자신의 선함을 인정받고 싶었겠지요. 주님께서는 ‘하느님 만이 선하시다’고 딱 잘라 말하시며 청년의 ‘허세’를 먼저 꺾어 놓으십니다. 청년이 말한 ‘영원한 생명’에 대한 질문은 오늘 복음서에서 ‘하느님 나라’, ‘내세’, ‘구원’ 등과 같은 의미로 사용되었습니다. 청년은 예수의 ‘하느님 나라’에 대한 메시지를 들었을 것이고, 이를 ‘영원한 생명’으로 표현했습니다. 주님께서는 이 유대인 청년이 신실한 사람임을 간파하시고, 모세의 율법을 먼저 언급하십니다. 그러니 청년은 자신 있게 그러한 것들을 잘 지키고 있다고 또 자랑을 합니다. 그러나 이렇게 해서 청년은 주님의 유도신문(?)에 걸려들고 맙니다. 주님께서 처음부터 이 청년에게 하시고 싶으셨던 말을 드디어 꺼내십니다. ‘모든 것을 버리고 나를 따르라.’ 자신의 의로움을 자랑하고, 예수를 통해 인정받고 싶어 찾아왔던 청년은 주님의 갑작스러운 부르심에 매우 당황했습니다. 신실한 부자 청년은 아직 다른 제자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모든 것을 버리고 따를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그 부르심이 바로 ‘제자도’입니다. ‘집이나 형제, 가족, 직업’ 등을 버리고 주님의 부르심에 즉시 따라나섰던 제자들과 대비가 됩니다. 이 이야기는 다음과 같은 말로 끝이 납니다.
그러나 그 사람은 재산이 많았기 때문에 이 말씀을 듣고 울상이 되어 근심하며 떠나갔다.(마르 10:22)
예수를 따라나섰던 제자들이 제자도의 부르심에 ‘즉시’ 결단했던 것을 생각하면, 청년은 지금의 삶이 너무 만족스러웠던 것 같습니다. 유대교 엘리트로 생활하는 현재가 너무 좋았던 것이죠. 또한 율법을 잘 지켜 아마도 유대교식 구원에 대한 확신도 있었을 것입니다. 율법적이며, 유대교적인 사회에서 모두에게 인정받는 청년이 무엇이 아쉬워 예수를 따르는 고생길에 들어서겠습니까? 사실 이 말씀은 이 청년뿐만 아니라 오늘날 주님의 부르심을 받는 모든 사람들에게도 해당되는 말씀입니다. 하느님께서는 현재에도 매 주일, 매 기도 시간마다, 또 우리의 일상 속에서 우리를 늘 부르시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나를 따라오너라!”
부자 청년이 아직 돈과 자신의 삶에 대한 미련을 버릴 용기가 없었던 것처럼, 우리들도 늘 주님의 일상의 부르심 앞에서 똑같은 심정으로 망설이기 일쑤입니다. 하느님께서 내게 바라시는 것이 무엇인지 알면서도, 쉽게 ‘아멘’하며 순종하기 어렵습니다. 설교나 성서에서 선포되는 말씀은 ‘아, 좋구나’ 정도로 동의하고 뒤돌아서면 그것으로 끝입니다. 교회 문을 나설 때는 주님의 부르심을 호주머니에 넣어두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 세상의 부르심에 따라 ‘허우적거리며’ 살아갑니다. 주님의 제자도는 교회와 성서 그리고 우리의 양심 속에서만 맴도는 메아리가 될 뿐입니다.
우리 양심과 생각은 늘 양가성(兩價性)을 지닙니다. 모두가 이것만은 절대 포기할 수 없다는 것을 하나씩은 가지고 있게 마련입니다. 누구에게는 그것이 ‘가족’이고, 누구에게는 오늘 청년처럼 ‘재산’이고, 누구에게는 ‘취미’나 ‘직업’이고, 또 누구에게는 자신이 가진 일말의 ‘자존심’ 일 수도 있습니다. 마치 그것을 포기하면 자신의 모든 ‘존재의 기반’이 무너질 것 같은 것들 말입니다. 그러한 것에는 우리가 소중하게 여기고 아끼는 것뿐만 아니라, 우리 안에 있는 우리의 ‘어그러진 어둠’ 또한 포함됩니다. 열등감, 의기소침, 우월감, 용기 없음, 공포, 두려움 등등. 일상의 자리에서 우리를 휘감아 오는 어두운 감정들 또한 우리를 제자도에 들어서지 못하게 방해를 합니다. ‘내가 뭘 할 수 있겠어?’, ‘괜히 나서는 것 아니야?’, ‘예수님 말씀대로 살면 손해 보는데 어떻게 그렇게 살아’, ‘아마 내가 하느님의 음성을 잘못 들었을 거야’, ‘나는 내 몸 하나 가누기도 힘든데…’ 등등. 우리가 지키고 싶은 소중한 것이든, 우리 안에 있는 어두움이든, 이러한 모든 것들이 주님의 제자도에 장애가 되는 것이 분명합니다. 지나친 자신감도, 필요 이상의 의기소침도 모두 우리를 제자도로부터 멀어지게 합니다. 그것은 결국 우리가 주님보다 ‘나’라는 자아를, 또 세상적인 물질과 성공을 더 갈구하기 때문에 벌어지는 현상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것들을 버리고 주님을 신뢰하는 것이 바로 주님의 제자도에 들어서는 첫걸음 임을 오늘 주님께서는 말씀하고 계십니다. 포기하고 내려놓을 줄 모르는 모든 것이 제자도에 걸림돌입니다. 우리의 기쁨도, 아픔도 절대적으로 우리 안에 머무를 수 없는 것들이고, 또 우리가 지금 가지고 있는 모든 것도 움켜쥔다고 해서 우리에게 영원히 남을 것도 아닙니다. 모든 집착이나 번민과 번뇌들이 우리 안에서 흘러 지나가게 할 필요가 있습니다. 들어오는 입구를 열어뒀다면, 이제 나가는 출구도 닫지 마시기 바랍니다. 고이고 갇힌 것은 썩고 탁해지게 마련입니다. ‘비우고 내려놓고 흘러 지나가게 하기’. 쉽지 않은 제자도의 첫걸음입니다. 그러나 제자로 첫걸음을 딛는 것은 처음에는 넘어지고 아파도 결국에는 걸음마를 배우는 아가처럼 성령의 인도함을 받아 시간이 지나면서 더욱 성숙해 갈 수 있는 것입니다. ‘파라클레토스παράκλητος’이신 성령께서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십니다.
두 번째 이야기는 인간 스스로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보여줍니다. 마르코는 ‘예수께서는 제자들을 둘러보시고’라는 상황 묘사를 첨가하여 부자 청년 이야기와 두 번째 이야기를 결합시킵니다. 그래서 ‘재물을 많이 가진 사람’이란 말과 ‘부자’라는 말은 마르코가 삽입한 편집일 가능성이 큽니다. 원래 전승 자료는 그냥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어렵다’고 전해졌을 가능성이 큽니다.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유독 부자들에게만 불가능한 것이겠습니까? 구원은 가난한 자나 부자나 모두 어렵습니다. 아마도 마르코 공동체의 상황이 반영된 결과일 겁니다. 여기에서 주님께서는 인간의 자력 구원의 길을 원천적으로 차단하십니다. 사람이 자력으로 구원을 받는 것은 마치 낙타가 바늘구멍으로 들어가는 것만큼 어렵다고 하십니다. 단순히 돈에 대한 욕심 때문이 아닙니다. 자력 구원은 한마디로 ‘불가능’합니다. 율법을 준수하면 구원의 길이 있을 것으로 여겼던 당시의 유대교 상식으로는 도저히 이해가 안 되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니 제자들조차 “그러면 구원받을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마르 10:26)라고 놀랐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아무도 없습니다. 구원은 전적으로 하느님의 은총 구원뿐입니다. 인간은 할 수 없는 일이지만, 오직 하느님 만이 하실 수 있습니다. 그것이 하느님의 능력이고, 자비인 것입니다. 유대교의 상식은 이렇게 주님 앞에서 무너집니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첫 번째 이야기와 세 번째 이야기를 연결한 내러티브도 연결이 자연스럽습니다. 이 경우 ‘제자도’라는 주제의 내러티브가 더 선명하게 드러납니다. 첫 번째로 부자 청년을 부르신 이야기는 자연스럽게 모든 것을 버리고 제자도를 따른 제자들에게 주어질 내세의 축복 이야기로 이어집니다. 그러면서 이제 제자도에 요청되는 ‘새로운 관계성의 변화’로 인해 전혀 다른 내러티브로 일상이 달라집니다. 제자도에 들어선 후에는 기존의 모든 사람들과의 관계와 세상과의 관계가 하느님 안에서 완전히 바뀝니다. 기존에 자신을 묘사하던 관계성의 내러티브들이 전혀 새로운 내러티브로 바뀝니다. 새로운 가족, 새로운 친구, 새로운 세상, 새로운 이야기로 채워집니다. 바뀐 것은 나 하나인데, 그 바뀜으로 말미암아 나와 관계하던 모든 세상이 달라 보입니다. 낯선 사람들이 하느님 안에서 새로운 가족이 될 가능성이 열렸고, 나와 이해관계가 없는 사람들이 나의 친구가 되며, 도저히 포기할 수 없었던 집착들이 하나둘씩 자신에게 무의미한 것이 됩니다. 그리고 기존에 자신을 설명하던 모든 내러티브들이 무의미해지고 새로운 이야기를 시작할 수 있게 됩니다. 그것이 제자도를 따르는 제자들에게 주어진 축복입니다. 달라진 것은 제자도에 순종한 것뿐이데, 세상과의 모든 관계 또한 새로워집니다. 이야기가 새롭게 시작되는 것이지요. 제자도는 기존의 내러티브에 일대 변화를 가져오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교회 안에서 이러한 변화를 겪는 사람들이 갑자기 달라진 모습을 종종 보게 됩니다. 매 마르고 세속화되어 있던 18세기 영국성공회에서 ‘만인 구원’을 외치며 ‘회심’의 운동을 폈던 존 웨슬리의 외침은 이러한 점에서 위대한 것입니다. 사도 바울로가 그러했고, 히포의 어거스틴도 많은 육체적 타락과 죄악 속에 빠져 있다 주님을 만나 제자도에 들어서게 됐습니다. 이들 모두 제자도를 통해 자신의 삶의 내러티브가 180도 달라진 사람들입니다. 고통과 어려움, 우울과 좌절, 실패와 가난에 시달리던 사람이 ‘회심’ 후에 천사처럼 밝은 표정으로 교회 일에 헌신을 합니다. 교회에 그러한 변화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교회의 분위기가 갑자기 바뀌기도 합니다. 은총과 기쁨과 환희를 그러한 사람을 통해 우리도 느끼고 함께 감사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회심이 가져오는 제자도의 축복입니다. 이렇게 강한 회심을 체험한 사람들은 결코 제자도에서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첫째가 꼴찌가 되고 꼴찌가 첫째가 되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마르 10:31)
이러한 표현들은 4 복음서에 너무 자주 등장하는 것으로 우리는 이를 ‘유행어’라고 부릅니다. 이는 약방의 감초처럼 자주 등장하여 중요한 점을 우리에게 환기시켜주는 역할을 합니다. 이 말씀은 여기에서 ‘회심’에 대한 이야기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구원은 그러한 것입니다. 아무리 오래 교회를 다니고 모태에서부터 그리스도인이 되었다 하더라도 먼저 된 자가 나중이 될 수 있는 법입니다. 평생을 하느님을 모르고 살다가 늦은 나이에 회심을 한 사람은 ‘늦게 된 자이지만 먼저 된 자’가 될 수도 있습니다. 하느님의 은총 구원에는 선후가 없습니다. 새벽부터 일한 일꾼이나, 오후 5시에 마감 전에 와서 일한 일꾼이나 받는 삯은 똑같았습니다. 구원은 자력이 아니라 오직 은총이기 때문입니다. 구원은 남과 비교하는 공덕이 아니라 하느님과 개인 간에 설정되는 관계입니다. 성실하게 아버지 곁에서 가업을 지키고 있었던 큰아들보다 방탕하여 죄악에 빠졌던 작은 아들이 오히려 아버지의 용서와 환영을 받았습니다. 우리의 상식으로는 도저히 납득이 되지 않지만, 그것이 ‘은총 구원’의 핵심입니다. 아무도 자력으로, 자신의 공로를 내세워 구원을 주장할 수 없습니다. 구원에 반드시 ‘회심의 은총’이 따른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제자도에 발을 들여놓으면 은총 또한 함께합니다. 제자도는 기존의 삶의 방식과 다른 세계관을 우리에게 요구합니다. 우리가 그동안 가져왔던 관계와 일상이 새로운 은총과 일상으로 재배치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때부터 자신의 인생의 내러티브를 다시 쓸 수 있게 됩니다. 이것이 제자도에 주어지는 한량없는 은총입니다.
정리하면 ‘제자도와 구원’은 상호 밀접하게 관계가 있는 것입니다. 제자도는 실천을 전제로 하기 때문에 마치 자신의 공로를 강조하는 것 같지만, 제자도의 실천은 어디까지나 주님의 은총에 감사한 우리의 반응이고, 자발적인 사랑의 순종입니다. 제자도가 구원의 선제 조건이 될 수 없는 이유입니다. 주님께서는 구원의 은총을 주시면서 동시에 우리의 제자도의 헌신 또한 요구하십니다. 그러므로 제자도는 은총에 대한 감사의 표현입니다. 그것이 바로 주님과 사랑의 관계를 형성하는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은총을 주시지만, 우리로부터 자발적인 헌신과 사랑도 기다리고 계십니다. 제자도를 간단히 풀어 설명하면, ‘거룩한 부르심’에 응답하여 그리스도의 제자로서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주님을 닮아가는 제자가 되는 것이지요. 그러나 제자도는 몇몇 사람에게 특수하게 주어지는 부르심이 아니라, 모든 구원받은 자들에게 요구되는 주님의 요청입니다. 귀 있는 자, 들을 준비가 되어 있는 자만이 그 음성을 들을 수 있습니다. 듣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은총에 감사하여 응답하는 자만이 그러한 제자도 위에서 자신의 새로운 내러티브를 써내려 갈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부자 청년처럼 그러한 부르심을 듣고도 결단하는 것이 결코 쉽지 않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강요가 아니라 요청이기에 우리는 따를 권리도, 거부할 자유도 동시에 있습니다. 해답은 우리 각자가 아마 이미 알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아무리 우리가 ‘자기 합리화’를 시도한다 해도 우리의 양심은 늘 제자도의 빛으로 가득합니다.
자기 비움과 제자도. 그것이 가져올 우리 삶의 변화를 생각해 봅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약속하신 그 은총과 축복 또한. 우리가 매 주일 주님께 예배를 드리고, 적은 시간이지만 하느님을 위해 우리의 시간과 노력을 드리는 것이 제자도를 위한 작은 시작이라 생각합니다. 제가 아직까지 아무에게도 “여러분이 지금 제자도 훈련을 받고 있습니다”라고 말한 적은 없지만, 현재 진행되고 있는 우리 교회의 ‘공동독서모임’이 그러한 제자도에 첫 발을 디디는 훈련의 시작임을 밝힙니다. 미리 말씀을 드리지 않았지만, 우리는 이미 그 제자도의 첫 장을 넘겼습니다. 매주 한번 30분씩 시간을 내어 함께 책을 읽으며 서로의 목소리와 호흡을 알아가고, 서로의 생각을 인정하며, 책을 통해 지혜와 통찰을 배우고, 우리의 내러티브로 책을 읽는 것. 그러는 동안 우리 자신도 조금씩 변화되어 가는 것을 앞으로 느끼시게 될 것입니다. 그 끝은 훈련된 그리스도의 제자로서의 당당한 우리 자신의 모습입니다. 이러한 제자도의 부르심 위에 서신 여러분을 축복하고 환영합니다. 한 명의 낙오자도 없이 이 훈련을 잘 마칠 수 있도록 함께 기도합시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말씀을 나눴습니다.
연중28주일 (나해) 전례독서
본기도
자비하신 하느님, 주님은 영원한 생명에 이르는 참 길을 가르쳐주시나이다. 비오니, 우리가 주님께서 베푸시는 모든 일에 감사하며, 언제나 주님의 풍성한 은총으로 살아가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한 분 하느님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나이다. 아멘.
욥기 23:1-9, 16-17
1 욥이 말을 받는다.
2 오늘 또 이 억울한 마음 털어놓지 않을 수 없고
⋅ 그의 육중한 손에 눌려 신음 소리조차 내지 못하겠구나.
3 그가 어디 계신지 알기만 하면,
⋅ 당장에 찾아가서
4 나의 정당함을 진술하겠네.
⋅ 반증할 말도 궁하지는 않으련만.
5 그가 무슨 말로 답변하실지를 꼭 알아야겠기에
⋅ 그 하시는 말을 하나도 놓치지 않고 들어야겠네.
6 그가 온 힘을 기울여 나를 논박하실까?
⋅ 아니, 나의 말을 듣기만 하시겠지.
7 그러면 나의 옳았음을 아시게 될 것이고
⋅ 나는 나대로 승소할 수 있을 것일세.
8 그런데 앞으로 가보아도 계시지 않고
⋅ 뒤를 돌아보아도 보이지 않는구나.
9 왼쪽으로 가서 찾아도 눈에 뜨이지 아니하고
⋅ 오른쪽으로 눈을 돌려도 보이지 않는구나.
⋅ …
16 하느님 앞에서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고
⋅ 전능하신 분 앞에서는 간담이 서늘해지는구나.
17 차라리 온통 어둠에 싸여,
⋅ 나의 얼굴이여, 흑암 속에 묻혀라.
6절은 “제발 변호사를 내세워 변론하시지 마시고 당신께서 친히 나의 변론을 들어주셔야 할 터인데.”라고 옮길 수도 있음
시편 22:1-15
1 하느님, 나의 하느님,
. 어찌하여 나를 버리십니까? ◯
. 살려 달라 울부짖건만
. 들리지도 않습니까?
2 나의 하느님,
. 온종일 불러 봐도 대답 하나 없으시고, ◯
. 밤새도록 외쳐도 모르는 체하십니까?
3 그러나, 당신은 옥좌에 않으신 거룩하신 분, ◯
. 이스라엘이 찬양하는 분이십니다.
4 우리 선조들은 당신을 믿었고 ◯
. 믿었기에 그들은 구원을 받았습니다.
5 당신께 부르짖어 죽음을 면하고 ◯
. 당신을 믿고서 실망하지 않았습니다.
6 나는 사람도 아닌 구더기, 세상에서 천더기, ◯
. 사람들의 조롱거리가 되었으니,
7 사람마다 나를 보고 삐쭉거리고 ◯
. 머리를 흔들며 빈정댑니다.
8 “주님을 믿었으니 구해 주겠지. ◯
. 마음에 들었으니, 건져 주시겠지.”
9 당신은 나를 모태에서 나게 하시고, ◯
. 어머니 젖가슴에 안겨 주신 분,
10 날 때부터 이 몸은 당신께 맡겨진 몸, ◯
. 당신은 모태에서부터 나의 하느님이시오니
11 나를 멀리하지 마옵소서. ◯
. 어려움이 닥쳤는데, 도와 줄 자 없습니다.
12 황소들이 떼 지어 에워쌌으며 ◯
. 바산의 들소들이 에워쌌습니다.
13 으르렁대며 찢어발기는 사자들처럼 ◯
. 입을 벌리고 달려듭니다.
14 물이 잦아들듯 맥이 빠지고
. 뼈 마디마디 어그러지고, ◯
. 가슴 속 심장도 촛농처럼 녹았습니다.
15 깨진 옹기조각처럼 목이 타오르고 ◯
. 혀는 입천장에 달라붙었습니다.
⦿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
⋅ 처음과 같이 지금도 그리고 영원히, 아멘.
히브 4:12-16
12 하느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힘이 있으며 어떤 쌍날칼보다도 더 날카롭습니다. 그래서 사람의 마음을 꿰뚫어 영혼과 정신을 갈라놓고 관절과 골수를 쪼개어 그 마음속에 품은 생각과 속셈을 드러냅니다. 13 피조물치고 하느님 앞에 드러나지 않는 것은 없습니다. 하느님의 눈앞에는 모든 것이 다 벌거숭이로 드러나게 마련입니다. 언젠가는 우리도 그분 앞에서 심판을 받아야 합니다.
14 우리에게는 하늘로 올라가신 위대한 대사제이시며 하느님의 아들이신 예수가 계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분에 대한 신앙을 굳게 지킵시다. 15 우리의 사제는 연약한 우리의 사정을 몰라주시는 분이 아니라 우리와 마찬가지로 모든 일에 유혹을 받으신 분입니다. 그러나 죄는 짓지 않으셨습니다. 16 그러므로 용기를 내어 하느님의 은총의 옥좌로 가까이 나아갑시다. 그러면 우리는 하느님의 자비와 은총을 받아서 필요한 때에 도움을 받게 될 것입니다.
마르 10:17-31
17 예수께서 길을 떠나시는데 어떤 사람이 달려와서 그 앞에 무릎을 꿇고 “선하신 선생님, 제가 무엇을 해야 영원한 생명을 얻겠습니까?” 하고 물었다. 18 예수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셨다. “왜 나를 선하다고 하느냐? 선하신 분은 오직 하느님뿐이시다. 19 ‘살인하지 마라.’ ‘간음하지 마라.’ ‘도둑질하지 마라.’ ‘거짓 증언하지 마라.’ ‘남을 속이지 마라.’ ‘부모를 공경하여라.’ 한 계명들(출애 20:12-16)을 너는 알고 있을 것이다.” 20 그 사람이 “선생님, 그 모든 것은 제가 어려서부터 다 지켜 왔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21 예수께서는 그를 유심히 바라보시고 대견해 하시며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에게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다. 가서 가진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어라. 그러면 하늘에서 보화를 얻게 될 것이다. 그러니 내가 시키는 대로 하고 나서 나를 따라오너라.” 22 그러나 그 사람은 재산이 많았기 때문에 이 말씀을 듣고 울상이 되어 근심하며 떠나갔다.
23 예수께서는 제자들을 둘러보시며 “재물을 많이 가진 사람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모른다.” 하고 말씀하셨다. 24 제자들은 이 말씀을 듣고 놀랐다. 그러나 예수께서 다시 이렇게 말씀하셨다.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는 참으로 어렵다. 25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는 낙타가 바늘귀로 빠져 나가는 것이 더 쉬울 것이다.” 26 제자들은 깜짝 놀라 “그러면 구원받을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하며 서로 수군거렸다. 27 예수께서는 제자들을 똑바로 보시며 “그것은 사람의 힘으로는 할 수 없으나 하느님은 하실 수 있는 일이다. 하느님께서는 무슨 일이나 다 하실 수 있다.” 하고 말씀하셨다.
28 그 때 베드로가 나서서 “보시다시피 저희는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랐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29 예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나는 분명히 말한다.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또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머니나 아버지나 자녀나 토지를 버린 사람은 30 현세에서 박해도 받겠지만 집과 형제와 자매와 어머니와 자녀와 토지의 복도 백 배나 받을 것이며 내세에서는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다. 31 그런데 첫째가 꼴찌가 되고 꼴찌가 첫째가 되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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