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모음/신학이야기

[독서]"알기쉬운 구약입문"- 제4부 왕정시대 (요약/ 2016)

James Chae 2022. 2. 7. 11:52

 

 안토니 R .세레스코, 알기쉬운 구약입문, 성찬성/김은규 譯, 바오로딸, 1994, 서울  p.p.197~280 [요약]                                       

 작성자: 채창완

 

"알기쉬원 구약입문"  요약

제4부 왕정시대

11. 신명기와 신명기계 역사서

p.199
왕정기
 
-왕정의 역사는 사울이 지도자로 있던 때부터(B.C.1020~1000) 기원전 587년에 예루살렘이 함락되고 바빌론 유배가 시작되는 때까지의 450년을 망라한다.
-신명기계 역사서는 신명기 외에 여호수아기,판관기, 사무엘 상/, 열왕기 상/하 등이 있다.
p.200
신명기전승의 특징
-북 이스라엘의 엘로히스트 기자들 외에 신명기계 저자들 또는 신명기계 학파라고 불리는 집단들이 존재했을 것으로 추정한다. 그들은 레위인들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 특징은 다분히 훈계조로서, 표현이 판에 박힌 듯 일정한 종속절을 지녔다. 내용의 초점은 사람들에게 야훼와의 계약에 따른 의무와 책임을 가르치고 독려하는 한편, 계약 사항을 준수하지 않았을 때 오는 결과를 경고하는 것이었다. 간단히 말해 하느님을 사랑하면 복을 받을 받고 그렇지 않으면 벌을 받는다는 서술 구조를 갖고 있다.
p.201 -추측컨데 이러한 양식은 정기적으로 계약을 갱신하는 예식 기간에 발전하면서 전승을 공들여 다듬어 냈을 것이다. 이러한 전승은 일차적으로 신명기에서 종합되었다.
-이들은 기원전 722년 북이스라엘이 아시리아로부터 멸망당했을 때, 남부로 피난하여 신명기 전승을 보존하고 맥을 이어갔다.
pp.201~203
신명기전승의 남유다 유입
-이 집단은 히즈키야(기원전 715~686)의 개혁에 영향을 줬고 그의 아들 므나쎄때 잠시 주춤하다가 므나쎄의 아들 요시아 때 야훼 신앙을 장려하며 다시 꽃을 피운다. 기원전 622년에 요시야의 명령으로 이스라엘을 대상으로 하는 일련의 재건,보수,혁신 사업이 이루워졌는데, 이때 발견된 책이 바로 이 신명기 전승을 담은 책이라고 전한다.
p.204
 
-신명기계 전승은 남부에서 검토,발전되는 과정에서 중요한 남부 요소들을 다수 흡수하는데, 예루살렘을 예배 중심지로 부각시키거나 계약 궤에 비중을 두는 일 등이 그 예다. 그러나 이 전승의 뿌리와 사료의 대부분은 북부에서 기원했다. 이것은 전승에 나타나는 강력한 예언적 특성, 왕정제에 대한 이중적 태도, 모세가 점유한 중심적 위치 등에서 특히 두드러지게 엿보인다.
pp.205~206
신명기전승의 사회-정치적 측면
-신명기를 읽을 때 주의할 점은 저자들의 시각을 그대로 수용하여 종교-신학적 측면에 초점을 맞추면서, 그와 결부된 사회-정치적 측면을 경시 또는 무시하는 것이다.
-계명들은 인류 평등주의 질서를 바탕으로 깔고 있다. 그러므로 계명을 어긴다는 것은 곧 이스라엘의 해체를 의미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희년 규정은 부의 집중을 방지하는 역할에 촛점이 맞춰져 있다.(신명15)
-또한 왕의 권리와 권력을 제한했다: 신명17:16~19 군마를 늘리거나 재산 축적을 제한.
-사회적 약자에 대한 배려: 신명24:19~22  - 추수 때 놓고 온 곡식단이나 지나쳐온 과일 나무의 열매는 이방인과 고아와 과부의 몫으로 남겨둬라.
pp.207~208
신명기역사서의 기원
-요시야의 죽음으로 개혁에 제동이 걸렸을 때, 신명기계 저자들은 개혁의 방향을 바꿔 이 두 번째 히브리어 성경을 저술하는 데 관심과 열정을 쏟았다. 이를 전기 예언서라 부른다.  신명기계 역사서(DH) : 신명기,여호수아기, 판관기,사무엘상,, 열왕기 상,
-중심 주제 : 왜 북왕국은 망했으며, 왜 하느님은 그것을 허락하셨는가? 이는 신정론에 대한 질문이다.
-그 물음에 대한 해답의 근거를 신명기 저자들은 모세의 계약과 전승에 뒀다.  임금들이 모세의 계약에 불충실했던 점을 그들의 땅에 덮친 재난의 근본 원인으로 보았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의 살길은 계약을 충실히 이행하는 것이다.
pp.209~212
신명기계 역사서의 목적
 
 
-하느님께서 세상에서 어떻게 역사하시는가를 이스라엘 민족의 삶 속에 계시된 바에 따라 설명하는 데 있었다.이 작품의 주요 주제 가운데 하나는 예언과 실현이다. 실현은 하느님이 당신 약속에 충실하심을 두드러지게 부각시킨다.
-이 역사서에 예언자 엘리야와 엘리사에 대한 이야기가 중심을 차지하고 있다는 사실은예언과 실현이란 주제가 중요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예언과 실현
 
 
 
 
-예언과 실현이란 주제를 기본틀로 하여 이스라엘의 6백 년 역사를 재구성했다.  야훼께서 당신과 계약을 맺은 백성에게 한결같이 약속을 지키고 계약에 충실하다는 점에 초점이 맞추어진다.” 이는 북이스라엘의 멸망을 설명하는 관점으로 제시된다. 북이스라엘의 불충실과 한결같은 하느님의 충실이라는 상호작용의 틀을 기본으로 사용했다.
신명기 역사 기술의 네가지 순환 방식
 
-이러한 순환방식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이스라엘이 계약에 충실하지 않는다. 이것은 곧 . 둘째, 그 결과 이스라엘이 적의 수중에 넘어가거나 적의 세력에 억눌리는 따위의 징벌이나 고통을 당한다. 셋째, 이스라엘이 하느님께 구원을 부르짓는다. 넷째, 한결같이 충실하신 하느님이 이스라엘을 위해 개입하신다.”
마음과 정신의 동기 -“마음이란 주제: 신명기에 41회 등장. 이는 폴 틸리히가 궁극적 관심(ultimate concern)”이라 부른 바로 그 말씀이다.
너희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신명6:5)
-“ ‘마음이라는 주제와 함께 우리는 인간 역사에서 처음으로 하느님과 인간의 관계에서 동기’motivation’ 중심의 인식을 갖게 된다. 신명기 저자는 우리에게 행동의 차원을 낮추고, 더 깊은 차원의 행위를 하게 한다. 말씀과 행동이라는 종교의 외적 모습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더욱 중요한 것은 내면적인 것, 곧 하느님의 주권을 깨닫고 인식하는 정신의 의지다.”
pp.212~215
신명기 사가들이 사용한 두 가지 서술 기술
-신명기는 이스라엘이 모압평야에서 약속의 땅에 들어가기 전의 상황을 역사적 배경으로 상정하고 모세가 이스라엘인들에게 시나이산에서 가져온 계약법을 두 번째로 낭송하는 자리를 빌려 제시되었다. 그래서 신명기는 두 번째 율법(δευτερος νομóς)이라 부른다.
-신명기계 역사가들은 다양한 부족과 집단에서 유래한 다양한 이야기들을 한데 엮고 재포장하면서 두 가지 장치를 이용했다.
1)시기 구분 : 두 시기로 나눔 ex) 여호수아 이야기를 정복 수호라는 두 가지 시기로 배치했다. 
2)씨족이나 부족의 부분적 이야기를 이스라엘 민족 전체와 결부시켜 기술했다.
-왕정의 출현: 사무엘과 사울에 관한 이야기와 다윗의 생애라는 두 가지 이야기로 설명
-북부의 예언자 엘리야와 엘리사의 이야기를 활용 : 예언과 실현이란 주제를 이야기로 전개.
pp.215
신명기계 역사서의 두 차례 편집
-신명기계 역사서는 두 차례에 걸쳐 편집되었다.
1) 1차는 기원전 609년에 요시야왕의 죽음으로 개혁이 중단된 이후: 저자들의 관심을 역사적 저술에 집중했다. 그 목적은 아시리아에 의한 기원전 722년 북왕국의 멸망을 설명하려는 데 있었던 것 같다.
특히 예로보암왕의 죄를 강조(북왕국의 남단과 북단인 베텔과 단에 성소를 하나씩 세움) :신명기 법전의 단일 성소 명령을 어김.
2) 2차는 기원전 587년 남유다의 멸망과 바빌론 유배 이후: 북이스라엘의 경우를 예로들어 남유다를 경고했지만, 결국 남유다도 죄를 지어 멸망함. 그러나 유다 임금 여호야킨이 바빌론 감옥에서 풀려나 바빌론 임금으로부터 호의를 받았다는 사실을 기술함으로 야훼에 대한 희망의 표징으로 삼았다.(2열왕8:46~53)
-결론적으로 이스라엘의  충실한 남은 자들은 자기네 민족을 덮친 대재난에도 야훼를 꾸준히 믿고 신뢰했다는 점을 강조하여 계약법에 대한 충실과 복종을 새롭게 부각시켰다.
 

 

12. 필리스티아인과 사울

pp.220~225
배경
 
 
 
 
 
 
-평등주의를 지향하던 부족 단위의 연합체인 이스라엘이 왕정제로 이행하게 된 주요 외부 요인은 필리스티아인들이 부족 연합체에 가한 압박이었다.
-배경: 후기 청동기 시대인 B.C.1500~1200년 경에 고대 근동은 그리스 미케네 등과의 교류가 활발했고, 이 지역에서의 이집트 제국의 영향력도 전성기를 맞었던 시대였다. 히타이트 제국이 새롭게 발흥했고 인도 아리아 계열의 마리얀누 집단은 북부 메소포타미아의 후리족을 지배했다. 이 마리얀누 집단은 이집트가 지배하는 시리아 팔레스티나와 남동쪽에 자리 잡은 메소포타미아, 그리고 서쪽을 차지한 히타이트 제국의 틈바구니에서 세 세력의 힘의 균형을 잡는 구실을 했다.
후기 청동기 시대의 근동지역의 급격한 질서의 붕괴 요인
 
 
 
 
 
 
 
-이러한 전성기를 지난 후 후기 청동기 시대(B.C. 13C~12C)에 이 지역의 사회,경제,정치적 질서가 붕괴된 요인
1) 전염성 질병이나 질병에 대한 공포의 급격한 확산 : 레위기,신명기,민수기의 위생 문제에 대한 지나친 관심과 금지 관습에 이러한 점들이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2) 동부 지중해 연안 외부 지역의 기후 형태 변화: 기근과 흉작 등. 그 결과 다양한 집단의 이동 및 이주가 빈번했을 것으로 추정한다.
3) 이스라엘을 출현시킨 집단과 같은 억눌린 하류계급과 예속 민족의 반란
-정확한 요인이 어떠했든 분명한 사실은 그 당시 주요 도시들과 제국 세력이 영향을 받았다는 것과 기록에 해양 민족으로 총칭되는 다양한 이주 집단이 동부 지중해 해안선을 따라 출현했다는 것이다. 히타이트 제국이 사라진 것도 이 B.C.13C 말엽이다. 이 해양 민족은 그리스나 인근 지역에서 발생한 것 같다.
필리스티아인의 기원 -이들 민족은 이집트를 침공하기도 했는데, 그 중 하나였던 -- pi-las-tu라는 집단이 성경에 나오는 필리스티아인들로 학자들은 추정하고 있다. 그들의 발원지는 크레타 섬으로 추측된다. 이들이 이집트와 타협을 하여 반자치 속국 형태로 정착한 지역이 이집트 북동쪽 해안선을 따라 뻗은 길고 좁은 땅인데, 이는 이집트와 아시아 사이의 교역과 통신의 연결 부위로서 아시아 진출의 발판에 해당한다. 이들은 철기(사무17:7 의 골리앗의 창)를 사용하는 일치단결된 동맹 관계의 민족이었다. 따라서 이들은 중앙 산간지대에서 성장하고 있던 이스라엘 부족 연합에 위협이 되었을 것이 명백하다. 판관기의 이야기들은 이 두 민족 간의 긴장과 갈등을 보여준다. 
pp.226~227
이스라엘의 왕정제 출현 원인
-필리스티아의 제국주의적 야심과 산간지대에서 세력을 확장한 강력한 이스라엘 동맹의 위협은 결국 1050년에 아펙(오늘날의 텔 아비브 근처. 1사무 4장 참조)에서 두 민족 간의 충돌로 나타났고 여기서 필리스티아인이 승리를 거뒀다. 이때 이스라엘의 계약궤를 빼았겼고, 실로의 성소 또한 파괴되었다. 결국 이 계약궤는 되찾기는 했지만 오랫동안 방치되다 다윗 시대에 예루살렘으로 옮겨졌다.
-그 후 실로의 성소를 재건하지 못했다는 사실은 당시 이스라엘 부족 연합에 중대한 변화가 있었음을 보여준다. 이는 이스라엘 민족에게 새로운 형태의 협동과 정치 사회적 전술이 요구되는 계기가 됐다.
-이스라엘 부족 연합은 필리스티아인들로부터 심각한 생명의 위협에 직면했다. 이러한 배경에서 결국 이스라엘은 외부적 압력에 내부적 요구가 결부되면서 왕정제을 선택하게 된다.(사무엘기 상권 첫 부분 참조)
p.228
왕정제 선택의 내부적 요인
 
 
 
 
-평등과 제국에 대한 저항 정신을 기반으로 구성된 이스라엘 공동체가 자신들의 가치관과 대립되는 왕정제를 체택한 것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분명한 주요 외부 요인은 필리스티아의 위협이었다. 가나안 도시국가와 동일한 체제이고 이집트 파라오와 다를 바 없던 그들은 이스라엘인이 보기에 이스라엘의 생활양식에 정면으로 상충되고 위협이 되는 제국주의적 야심과 가치관을 이중으로 구체화하는 존재였다. 따라서 연합체의 종교,사회적 자기표현이 지니는 이데올로기적 힘을 연합체 구성원 대부분을 규합해 내는 데 이용함으로써, 그들로 하여금 최근 필리스티아 군주들의 형상으로 등장한 전설 속의 적 이집트 파라오에게 대적하도록 만드는 일은 비교적 어렵지 않은 일이었을 것이다.
pp.231~234
나기드
 
 
 
-사울이 임금으로 기름부음받았으나 아직 호칭은 수장,영도자,수령으로 번역하는 나기드라 했다. : 이는 부족 연합이 아직은 왕정국가조직으로 성장하지 못했음을 시사한다. 사울은 온전한 의미의 임금으로 간주되지 않았으며, 주로 군사 문제에 한정된 수장이나 지도자로서의 임무만 수행했다. 이는 사울의 지도권이 이스라엘을 군사적 위기로 부터 보호하는 데 목적이 있었음을 암시한다.
사울이 몰락한 두 가지 요인 -사울이 몰락한 두 가지 요인 : 사울의 수장직의 취약점
1)이스라엘의 금속제 기술의 후진성 : 이스라엘은 금속제(철기와 청동기) 무기를 다루는 기술을 필리스티아인들에게 의지했다. 당시 이스라엘에는 대장장이가 없었다. 필리스티아인들은 이스라엘이 금속제 기술을 갖는 것을 막았다.(1사무13:19~22참조)
2)지도자로서의 지도력에 해를 주는 우울증과 질투 성향(1사무16:14~23;18:8~9)

 

13. 수장에서 임금으로

pp.236~237
이상적 유형으로서의 부족 연합
이스라엘 부족 연합 조직은 하나의 이상적 유형이었다. 이는 모든 구성원들의 이상과 목표를 담보해서 조직된 것이다. 이러한 이상적 유형의 조직에는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사항이 전제된다.
1) 사회 구성원 전체가 그들 스스로 서약한 조직의 근간인 헌장 또는 계약을 이해하고 진지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목표와 비전의 공유)
2) 다양한 문중과 부족이 임으로 할 수 있는 비옥한 땅과 자원이 비슷하게 균형이 맞고 대등하게 배분되어 있어야 한다. (부의 배분)
3) 모든 계약 당사자가 흉작과 기근과 질병이나 외적의 침략으로 인한 피해에 대해 상부상조와 지원을 담당해야 한다. (공공의 안정과 질서 유지에 대한 책임과 의무)
  -이러한 전제 조건들은 사실 유지하기 어렵다. 예를 들어 산간지대의 농산물의 소출은 각 부족마다 차이가 날 수 밖에 없었다. 특히 벤야민 부족과, 에프라임 부족 그리고 유다 부족의 세력이 막강했다. 여호수아 사울 또한 이러한 막강한 벤야민 부족 출신이었다.(1사무9:1) 이러한 이상적 유형의 조직은 이미 그 조직 안에 그 태생적 한계를 품고 있었던 것이다. 
p.239
다윗의 예루살렘 공략
-북부의 사울이 죽자 북부 지파 중에서 후계자를 찾는 노력도 있었으나(7년 간의 권력투쟁), 결국 남부의 유다 지파 출신인 다윗이 수장권을 갖게 되었다.
-다윗은 북부와 남부를 모두 아우를 수 있는 지정학적 위치인 여부스족의 요새 예루살렘을 공략하여 남과 북을 통합 통치할 기반을 닦았다.(1사무5:6~90) 이로써 남과 북의 불평을 잠재우고, 세력 균형을 이루면서 중앙집권의 토대를 마련할 수 있었다.
pp.240~241
중앙집권의 토대: 통합과 조화 그리고 균형
 
 
 
 
 
 
p.243
야훼 신앙 적용
-사울이 부족 연합의 종교적 사안에 함부로 개입함으로써 이스라엘의 신뢰을 잃은 것에 반해 다윗은 새로운 정치 구조와 부족 연합의 종교 전승 사이의 연결 고리를 유지-강화하는 데 상당한 관심을 기울였다. (ex. 북부 실로 성소의 파괴로 방치되었던 계약궤를 성대한 의식을 거쳐 예루살렘에 모셔왔다.2사무6:12~15)
-가나안 제의를 담당했던 예루살렘 대사제 차독을 영입한 것 처럼 다윗은 사회적으로나 문화적으로 서로 다른 이스라엘인과 가나안인이 자기 치하에서 어느 형태로든 융합하거나 최소한 균형을 유지하며 공존하도록 조화를 꾀하였다. 다윗은 북이스라엘 대 남유다의 관계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 대 가나안의 관계에도 집중했다. 그 결과 많은 가나안 부족들이 필리스티아 세력으로 부터 벗어나 다윗의 세력 하로 들어왔다. 이와 같이 다윗은 이스라엘의 수장일 뿐만 아니라 가나안 주민에 대한 종주권도 행사하게 되었다.
-촌락과 부족적 토대를 지닌 야훼 신앙이 이러한 이중 구조 속에 자리 잡으면서 종교적으로 두 가지 신학이나 종교적 경향으로 발전할 여지를 열었다 : 야훼 신앙으로 다윗은 이스라엘 부족 연합의 지속적인 지원을 보장받았으며, 다른 한편으로 이 야훼스트 전승을 가나안의 공식 종교 체계, 곧 예루살렘에 있는 국가적 신전과 제의와 대사제직과 새로운 방식으로 결부시킴으로써, 그의 지배 아래 새롭게 편입된 지극히 가나안적인 요소들의 지원을 끌러내는 수단이 되었다.
pp.243~247
왕권과 시온
-야훼 신앙은 고대 근동의 왕권 개념과 임금과 신과의 특별한 관계 개념을 결합했다. 또한 시온 전승, 즉 가나안의 신화적,우주론적 언어와 심상의 복합체로서의 고대 예루살렘 종교 전승도 결합했다. 결과적으로 이러한 야훼 신앙은 이스라엘 왕권을 강화하며 두 가지 측면의 긍정적인 기능을 수행하게 된다.
1) 임금과 신과의 특별한 관계 개념: 임금은 야훼와 백성을 잇는 중재자요, 하느님의 뜻을 받들어 정의를 행하고 특히 사회 구성원 가운데 힘없는 이들을 보호하는 사람이다. 그러나 이러한 임금의 개념은 임금의 권력 남용을 비판하는 근거로 사용되기도 했다.
2) 시온 전승 : 시온 산을 가나안과 고대 근동 신화에 나오는 우주의 산과 그 밖의 비슷한 주제에 결부시켜 복합적인 종교 전승을 발전시켰던 것 같다. 난공불락의 요새, 다산과 풍요의 진원지라는 예루살렘의 이미지는 다양한 부족 전승들과 결함하며 여타 도시들과 민족 가운데 독보적 위치를 점유하는 데 일익을 담당한다. 
pp.247~248
평등주의 이상과 왕권 사이의 경계선을 넘음
-다윗의 재임 말년, 이스라엘 평등주의의 이상이 지배하는 공동체와 지배 계층이 자기네 뜻을 대다수에게 관철시키는 완숙한 왕정국가 사이의 경계선을 넘어섰다. : 옛 부족 체제가 기능을 발휘하도록 허용하면서도 새로운 왕정의 발판을 만듦. 
-이러한 배경에는 다윗이 국가재정낭비를 최소화하면서(국책사업최소화), 재정의 부담을 부족들에게 돌리지 않고 국가 재원을 새로 정복한 필리스티아 지역에서 충당한 점이다. 
-또 다른 배경은 당시(B.C.1200~750) 근동 지방을 지배할 강력한 세력이 없어 이 지역에 거주한 다양한 민족들이 숨 돌릴 틈을 갖게 된 점도 있다.
pp.248~251
고대 근동의 전형적인 왕정 국가의 특징을 보여주는 솔로몬의 통치
-다윗이 죽자 솔로몬은 중앙집권 권력을 굳히는 정부 기구를 완전히 장악했다. 그의 형 아도니야와 다윗 휘하의 군사령관 요압, 다윗의 피난 때 저주를 퍼부었던 시므이, 대사제 에브야타르도 등을 제거했다.
-재원 확보를 위해 주요교역로의 관세를 징수했고, 대외 무역을 촉진시켰다.
-대규모 건축 공사를 진행하기 위해 재원을 보충하는 방법의 일환으로 백성에게 해마다 두 달씩의 부역을 부과했다.
-옛 부족 조직의 영향력을 차단하고 징세 장치를 중앙으로 집중시킬 목적으로 다윗이 정한 부족 단위 행정구역을 좀 더 효율적으로 재정리했다.
-솔로몬은 자신의 수도를 미화하여 격을 높이기 위하여 페니키아 건축 기사와 기능공들에게 성전과 호화로운 궁전을 짓게했다. 이러한 행위는 자신의 왕정을 곤고하게 하려는 것이었다. 수도 한 복판에 세운 호사스런 새 성전과 궁전은 자신이 만든 새로운 질서가 신의 뜻에 따라 신의 축복 속에 수립되었다는 것 강조하기 위함이었다.
-힘의 독점 : 전차 군단 설립, 전략 도시들의 요새화. 이는 북부 부족 권력을 견재하면서 대외 무역을 보호하려는 의도였다.
pp.249~252
모래 위에 지은 집
-솔로몬이 이룩한 부와 번영은 소수 특권층에게 만 돌아 갔고, 상업과 군대의 팽창은 유용한 자원의 분배의 폭을 극도로 제한했다. 그 결과 대내외적으로 많은 부족들이 솔로몬에게 등을 돌렸다.
-에돔과 다마스쿠스가 반란을 일으켜 무역망이 상당히 파괴되었고, 많은 세금과 노역은 대다수의 백성들을 솔로몬으로 부터 등을 돌리게 만들었다.
-평등주의 부족 연합 시절을 기억하는 사람들은 부족의 자기 결정권을 빼앗긴 것을 절감하며 불만이 고조되었다. 
-그 결과 북부 지도자들은 솔로몬의 아들 르하브암의 승계를 인정하지 않고 따로 예로보암을 임금으로 뽑았다. 이렇게 해서 두 세대도 못가서 남북통일왕정은 북왕국 이스라엘과 다윗의 혈통을 잇는 남왕국 유다로 분리되었다.
이스라엘 왕정의 결과와 영향 1. 정치적 변화 : 부족 연합체에서 옛 부족 연합체와 새로운 가나안 주민을 망라하는 원숙한 통일 영토 국가를 형성했다. 또한 정치-사회적 결정권이 부족장에서 왕정 하의 소수 엘리트에게로 이완됐다.
2. 군사적 변화 : 필요할 시 부족 연합 안의 각 부족에서 차출되어 구성되던 군대에서 외국 용병 및 상비군제로 변화됐다.
3. 사회-경제적 변화 : 사회-경제적으로 계층화가 심화되었다. 부의 집중이 소수 엘리트 층에게 집중되었고, 지배계층은 촌락 중심의 이스라엘 옛 부족 조직을 강제했다. 땅은 야훼의 것이라는 개념이 무너져 토지의 사유화가 이루어졌으며, 그 결과 영구히 땅을 잃은 가난한 사람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4. 종교적 변화 : 시골 촌락에서 가문과 지역 성소를 배경으로 육성되던 야훼의 신앙이 왕실 성전에서 임금의 통제와 보호를 받는 국가 수호신 역할도 담당하게 되었다. 조직적인 직업적 사제 계급의 활동이 두드러졌고, 성전 제의문을 읊고 기록하는 서기관 계급도 등장했다. 그 결과 종교 언어와 개념과 심상이 옛 부족 전승에 새롭게 추가되면서 이스라엘의 신앙과 전승에 대한 표현 능력을 높이고 확대했다. 모세의 계약과 관련된 주제들은 하느님이 세우신 임금과 각별한 관계를 바탕으로 왕조신학으로 재정리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