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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 선교• 사목 - 삼위일체적 교회론

James Chae 2021. 8. 6. 23:13

성공회 서울대성당 내부 _ 사진출처: wikimedia

*이 글은 2017년 성공회대학원 선교신학 발제로 작성된 글입니다. 

 

교회• 선교• 사목

삼위일체적 교회론

 

채창완 야고보 / 2017.6.26 작성

 

“그리스도의 교회가 선교를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선교가 교회를 갖는다.”(Adrian Hasting)

 

교회와 선교 그리고 사목의 관계를 선교신학 강의 내용과 자료에 근거하여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 먼저 교회란 무엇인지에 대해 정리하고, 에클레시아와 코이노니아에 관해, 교회와 선교의 관계, 예수와 선교, 사목과 교회의 관계, 그리고 교회와 직제에 대해 각각 정리하고자 한다. 교회와 선교와 사목을 분리해서 설명하기 보다는 삼위일체의 개념과 선교적 교회론에 입각하여 정리한다. 통합적이고 상호 상통적인 시각으로 이러한 개념들을 연관시켜 설명하고자 한다. 

 

1. 교회란 무엇인가?

교회가 잠정적이라 함은 궁극적으로 교회의 목표나 초점이 교회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님을 말한다. 가시적인 교회는 언젠가는 사라질 보이지 않는 교회의 표징이며 하느님 나라를 목표로 하면서 그것을 선포하고 증언하는 공동체이다. 하느님 나라의 성취를 위해 섬기고, 선포하고, 증언하는 공동체로서의 교회는 결코 하나의 가시적인 교회로만  안주하는 것이 아니라 역동적이고 가변적이며 포용적이면서 끊임없이 역사 속에서 자신을 변화시켜 나간다. (교회의) 잠정성은 교회들이 역사적이며, 따라서 필 연적으로 사라질 운명을 가지고 있음을 뜻한다. 이는 교회 들이 가치를 결여하고 있다는 경멸어린 판단이 아니다. 잠 정성은 혁신의 조건이자 지속적인 창조의 조건이며, 변화 하는 상황들 속에서 현존을 위한 조건이다.( C. Duquoc)

 

이러한 교회는 본질상 선교적이며, 또한 순례적이다.” 이는 교회의 존재가 결코 선교와 분리해서 설명될 수 없다는 것이다. 선교활동은 교회 삶의 본성이고 교회가 존재하는 것은 선교를 위함이다. 교회는 단순히 사람들이 모여 위안과 공동체적인 사귐 그리고 일치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이러한 하나됨의 거룩한 사명도 경히 여겨서는 안 되지만, 교회의 목표는 선교에 닿아 있다. 

 

“교회는 부활하신 주님과 그의 복음에 대한 증언을 담지 하고 있는 제자 공동체다. 그러므로 복음화의 과정이야 말로 교회의 존재이유다.” (1990, 아시아 주교회의 신학 자문위원회) 

 

복음을 증거하는 일이야 말로 교회 활동의 중심이다. 교회 공동체는 이러한 활동을 위해 부름받은 사람들의 공동체이다. 성령께서 이러한 교회의 활동에 동기를 부여해주시고 복음의 성취를 위한 순례의 길에 늘 함께 동행하신다. 이러한 순례는 세상의 마지막 날까지 계속될 것이며 그 무대는 인류의 역사 위가 될 것이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서는 교회의 최종적인 모습은 존재하지 않는다. 교회가 순례적인 것은 교회의 존재 자체가 종말론적이기 때문이다. 즉 교회는 스스로 언젠가는 사라질 운명을 가졌다. 그리고 순례적이라 함은 교회가 움직이며 선교하는 것을 암시한다. 교회가 가시적으로 이 지상에 천년 만년 존재할 듯이 안착하는 데 집중하면 할 수록 교회는 성령의 사역과 멀어질 운명을 지닌 것이다. 

 

“잠정성은 특정 순간을 정지시켜 보려 한다든가 양식들의 운동성을 멈추게 한다든가, 끝내 사라질 수 밖에 없는 관계들의 유한성을 막아보려고 하는 고집스러운 관심과는 반대된다.”  (C. Duquoc: Provisional Church , SCM Press, 1986 , 90 )

 

그러므로 교회는 종말의 시간까지 이 세상과 역사 속에서 순례자처럼 자신이 처한 문화와 상황에 안주하지 않고 각각의  삶의 경계들을 넘나들며 복음을 선포하는 선교 공동체이다. 

 

2. 교회: 에클레시아와 코이노니아

그러나 이러한 교회의 정체성 만으로 교회를 다 설명할 수 없다. 왜냐하면 잠정성, 역동성 그리고 순례적 교회, 선교적 교회라는 말은 모두 교회 정체성의 원심력을 구성하는 요소들이기 때문이다. 교회 공동체는 외향적인 원심력 뿐만 아니라 내향적인 구심력 또한 갖고 있다. 바깥의 모든 것들을 교회의 중심으로 끌어당기는 구심력 말이다.

 

이러한 교회 개념에 가장 적합한 것이 에클레시아와 코이노니아일 것이다. 에클레시아κκλησία (assembly)”의 어원인  κκαλέω “~로 부터 부르다는 뜻으로 사도 바울로가 자주 사용한 개념이다. 원래는 고대 그리스의 정치적 용어였던 이 용어는 세상으로 부터 불러낸”, “세상으로 부터 구별된 등의 의미를 지니며 유대인의 시나고그(συναγωγή)에 대응하는 말이었다. “코이노니아κοινωνία(communion, association, partnership, fellowship)κοινωνέω  “~와 관계되어 있다 라는 의미로 교회공동체 내의 구성원 간의 친밀한 관계성을 드러낸 개념이다. 이러한 에클레시아와 코이노니아는 교회를 뜻하는 말로 교회가 지닌 특징을 잘 드러낸다. 교회의 표징인 그리스도의 몸은 바로 이러한 에클레시아와 코이노니아에 의해 구성된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하느님 안에 하나의 몸을 이루고 우리 각 개인이 그리스도의 지체로서 그리스도의 몸을 구성해 간다는 개념은 에클레시아와 코이노니아라는 말에 모두 포함된다.

 

그러면 이러한 구심력을 구성하는 에클레시아와 코이노니아는 교회의 잠정성과 선교성과 어떤 연관성을 가지는가? 교회는 이러한 구심력과 원심력이 팽팽하게 긴장을 유지하는 그 접점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분명히 드러낸다고 나는 생각한다. 즉 구심력과 원심력이 균형을 이루는 지점에서 교회는 선교적이고 잠정적이면서도 코이노니아적이고 또한 에클레시아적이다.  교회가 구심력만을 강조하다 보면 교회는 분명 일개 종교집단의 이기적인 모임 그 이상이 될 수 없다. 즉 교제 안으로 들어오는 자와 그 교제 밖에 제외된 자 간의 구별과 차별이 존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교회는 안으로의 결속을 유지하면서도 밖으로 자신을 내어주는 공동체이다. 교회가 잠정성과 선교성을 잃으면 역동성과 종말적인 긴장감을 상실하게 되고 결국 고인물 처럼 썪어갈 수 밖에 없다. 교회사는 이러한 점을 분명히 우리에게 증언한다. 정체되고 자가당착에 빠진 교회 공동체는 늘 성령의 역동성에 의해 개혁의 대상이 되곤했다. 

 

에클레시아와 코이노니아에도 분명 잠정성이 존재한다. 왜냐하면 이러한 모든 개념도 결국 하느님 나라의 표징일 뿐이기 때문이다. 진정한 성도간의 교제와 친교는 종말에 완성된다. 이 세상에서의 교제와 친교는 분명 잠정적일 수밖에 없다. 그렇기 때문에 교제와 친교에만 안주하는 고립성을 배제하면서 교회는 끊임없이 역동적으로 역사 속에서 자신을 변혁해 나가야 한다. 선교는 이러한 교회의 역동적 정체성을 대변한다. 그러므로 교회의 선교에는 변혁과 개혁이란 개념도 포함된 것이다.

 

“cross frontiers”라는 말은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교회는 끊임없이 자신의 경계를 넘어, 역사 속으로, 사회와 문화 속으로, 다양한 사람들의 삶 속으로 침투해 들어가는 것이다.  교회가 선포하는 메시지가 구체적인 역사와 삶 속에서 사람들의 회심을 불러 일으키고 변혁을 일으키는 사건이(이러한 사건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 자체일텐데) 바로 선교이다. 이러한 선교는 다음과 같은 특징을 드러낸다. “1) 교회는 개별적으로 또는 공동체적으로 선교한다. 2) 선교를 통해 선포되는 복음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가르침과, 삶과, 그 나라와, 신비가 담겨있어야 한다. 그리고 이러한 선포는 선포되는 지역의 문화와 전통에 존경심을 잃지 않는 맥락에서 진행되어야 한다. 3) 선교는 에클레시아적이며 코이노니아적이어야 한다. 한번 부름을 받아 교회의 공동체에 들어온 사람들과 함께 사랑의 교제를 통해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면서 다시 세상을 향해 나아가는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 결국 교회는 이러한 구심력이란 에클레시아와 원심력의 선교가 그 균형을 이루면서 세상의 종말까지 자신들의 사명을 다하면서 존재하는 것이다.”

 

3. 교회와 선교

닭이 먼저냐 아니면 알이 먼저냐라는 존재론적 질문으로 시작해보자. 교회가 먼저인가 아니면 선교가 먼저인가? 사도행전을 유심히 살펴보면 우리는 이에 대한 답을 찾을 수 있다. 오순절에 성령의 강림을 체험했던 예수를 따르던 한 무리의 제자들을 교회의 시작으로 볼 것인가 아니면 스테반 부제의 순교 후에 진행된 박해로 말미암아 흩어진 공동체의 확산으로 말미암아 생겨난 공동체를 교회의 시작으로 보아야 할까? 분명한 것은 오순절에 성령의 강림을 체험했던 사람들은 그 당시까지 아직 구체적인 교회의 개념을 갖고 있지 않았던 것으로 여겨진다. 이 무리들은 예수를 따르던 사람들이 하나 둘씩 자발적으로 은밀히 두려움 속에서 모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즉 이들은 유대인들의 시선을 피해 자신들을 드러내지 않고 숨어서 모였던 무리들이었다. 아직 이들에게는 구체적인 교회에 대한 개념도, 선교에 대한 개념도 전혀 형성되지 않았던 단순한 모임이었다. 그러나 성령의 체험 이후 처음으로 공동체의 자각이 시작되고 동시에 예루살렘 박해로 말미암아 공동체가 흩어지기 시작하면서 이들은 차츰 교회와 선교에 대한 개념을 조금씩 형성해 갔다. 그러나 베드로의 고넬료 선교와 빌립의 이디오피아 선교 이전까지 예루살렘 공동체는 아직도 하나의 유대교 지파의 경계를 넘지 못하고 있었다. 즉 시나고그의 범위를 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고넬료의 회심 이전에 베드로의 회심이 있었고, 이렇게 유대교의 경계를 넘어선 베드로의 선교로 고넬료와 그 가족들이 그리스도를 영접하게 됐다. 빌립 부제의 이디오피아 선교도 유대교의 경계를 넘는 일대 사건이었다. 유대교의 한 종파에 불과했던 원시 기독교 공동체는 처음으로 자신들의 존재를 유대교와 구별된 새로운 공동체와 선교 안에서 찾아갔던 것이다. 즉 교회는 선교를 통해, 경계 넘기를 통해 마침내 탄생한 것이다. 이는 오순절에 교회가 탄생한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교회와 선교는 결코 분리해서 말할 수 없는 개념임에 틀림없다.  데이비드 보쉬가 선교는 교회의 어머니라고 말한 것은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교회는 선교함으로써 교회다. 신자들은 자신들을 공동체로 함께 묶고, 자신들을 양육하고, 그리고 에너지를 집중하여, 죄를 치유 받고, 새로운 비젼과 도전의식을 가지고 하느님의 선교에 임하도록 하기 위해서 교회로 모인다.” 선교는 교회를 만들고, 교회는 코이노니아 속에서 성장하며, 다시 자신을 열어 선교를 통해 새로운 교회를 만든다. 이러한 연결 고리가 종말의 시간까지 이 역사와 문화 속에서 진행되는 것이다. 

 

4. 예수와 선교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 우리는 그의 영광을 보았다. 그 영광은 아버지께서 주신 독생자의 영광이며, 그 안에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였다.”(요한1:14)

 

선교는 하느님의 사역이다. 하느님께서 이 세상에 자신의 아들을 육신으로 보내신 사건은 선교의 원형이다. 육신을 입으신 하느님이 아니고서 어떻게 육신을 지닌 인간을 선교할 수 있겠는가? 보이지 않는 형상으로는 가시적인 사람들과 사귐의 관계를 형성할 수 없다. 예수 그리스도의 삶 전체가 바로 인간을 구원하고자 하는 하느님의 선교의 원형이다. 그는 자신을 비워 인간의 모습을 하셨고 또 공생애 동안 철저히 자신을 내어주며 하느님의 말씀을 선포하셨다. 선교는 결국 자신을 내어주는 행위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선교를 통해 그분의 삶과 가르침, 그리고 그분의 희생과 사랑과 부활의 신비를 선포하는 것이다. 이러한 예수 그리스도의 삶은 하느님의 인간에 대한 지극한 사랑의 표현이다. 이것은 교회의 선교 안에  중심이 되는 내용이다. 

 

5. 선교적 사목과 교회 : 삼위일체적 상통의 구조

교회는 구원받은 사람들이 모인 에클레시아이며, 코이노니아가 이루어지는 친교의 공동체이고 또 세례를 통하여 새로운 언약에 참여하며 성찬례를 통해 그리스도와 하나되는 공동체이다. 또한 말씀과 성사를 통해 하느님 안에서 구성원들이 상통하며, 선교를 통해 자신들의 공동체를 새로운 역사와 문화 속에 확산시켜 나간다. 또한 성삼위 하느님과 함께 관계를 나누며, 성삼위 하느님과 함께 꿈을 꾸며, 성삼위 하느님과 함께 새 나라를 바라보며 걷는 공동체이다.” 

 

이러한 교회는 하느님 나라의 성취라는 공통된 비전과 목표를 공유한다. 이를 위해 교회는 공동체 구성원을 양육하고 교육하며 성장시켜나가는 것이다. 하느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파견하신 것 같이, 또한 예수 그리스도께서 제자들을 세상으로 파견하신 것 같이, 교회는 선교를 위해 끊임없이 사람들을 세상 속으로 파송한다. 그러므로 교회의 사목은 결코 선교와 구별해서 말할 수 없는 것이다. 교회는 성전도, 성사도, 사역과 같은 회복과 양육을 위한 수단들이 모두 없어지고, 하느님과의 관계와 모든 인간들 사이의 관계가 완전히 회복될 그날을 향해 선교하는 공동체다.” 그렇다면 이러한 하느님 나라를 위한 선교하는 공동체의 사목은 어떠한 것이어야 하는가?

 

1) 교회 공동체는 삼위일체 하느님의 상통 안에 존재한다. 2) 삼위 하느님과 삶을 나누고, 그 안에서 함께 꿈을 꾸고, 하나의 목표를 바라보는 공동체이다. 3) 교회는 종말론적으로 성취될 하느님 나라를 이 지상에서 미리 맛보는 공동체이다. 4) 상통적인 삶의 나눔과 종말론적인 선교의 목표는 교회 필수 요소이다. 5) 그러므로 교회의 모든 직제와 사목의 방향은 이러한 교회의 기본 요소에 근거하여 이를 유지 발전시키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

 

사목의 가장 핵심은 그리스도의 몸을 바로 세우는 데 있다. 이는 코이노니아를 중심으로한 교회 구성원간의 상통의 구조를 온전히 만드는 것이다. 성부-성자-성령의 삼위일체는 이러한 교회의 상통의 구조의 표징이다. 성령은 이러한 교회의 구조에 많은 은사와 은총으로 함께 하신다. 교회는 이러한 상통의 구조 속에서 자신들의 공동체를 굳건히 세우며 세상을 향해 선교의 목표를 갖고 세상 속에서 성장해 간다.

 

이러한 관점에서 성삼위 관계의 특징을 이해하는 것이 교회 사목에서 요청된다.

“1) 삼위는 평등하다 그러나 각 삼위는 독특하다. 2) 성부는 성령의 능력 안에서 말씀으로 창조하시는 원천이다. 3) 성자는 성령의 능력에 의해서 인간이 된 영원한 말씀이며 아버지를 향해서 자신을 희생해 바친신다. 4) 성령은 그분의 생명 주시는 능력으로 하느님의 백성들을 양육함으로써, 성자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를 통해서, 그리스도와 함께 성부 하느님께 기도할 수 있게 하시는 분이다. 5) 하나와 전체의 균형, 평등함과 독특함의 균형이 항상 살아있는 역동적인 관계질서이며 운동이다. 6) 상호 역동적으로 주고 받으면서 하나로 존재하는, 이 상호성, 이 사랑의 관계, 이 친교와 상통의 관계가 창조세계로 흘러 넘친다. 그것이 바로 선교다. 그리고, 그 흘러 넘치는 관계가 창조세계를 그 존재 이유와 목표를 향해서 나아갈 수 있게 한다. ”  이에 대해 하나씩 상세하게 살펴보자.

 

 

1) 삼위는 평등하다 그러나 각 삼위는 독특하다.

 

여기에서 우리는 교회 사목의 다양한 얘기들을 이끌어낼 수 있다. 삼위가 독특하면서도 평등하고 하나라는 개념은 교회 사목의 방향을 결정한다. 다양한 사람들로 구성된 교회에서 어느 누구도 남을 지배하거나 남보다 낫다고 우쭐할 수 없다. 사목은 늘 삼위의 평등 관계에 근거하여 모든 사람들에게 차별없이 진행되어야 한다. 세례와 성찬례 및 모든 교회의 성사는 결코 차별이 없어야 하며, 교회는 누구에게나 열린 공간이며, 또한 예배에서 제외되는 사람은 없다. 지위의 고하를 막론하고 남녀노소의 성차별과 세대 차이와 빈부의 격차 등에 대한 차별이나 구별은 결코 교회 사목에서 인정될 수 없어야 한다. 이러한 평등성이 훼손될 때 교회는 세속화로 세상의 소금으로써의 맛을 잃을 것이다.

 

삼위가 평등하고 하나이지만, 또한 그 각각은 독특하다. 사목은 공평하게 차별없이 진행되어야 함과 동시에 교회 구성원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맞는 다양한 방법을 찾아야 한다. 왜냐하면 각 사람들이 처한 상황과 삶의 방식 그리고 교육과 가정형편에 따라 사람들의 경험과 반응이 각각 다를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이러한 사목의 구별이 차별로 오해되지 않도록 사목은 세심하게 준비되어야 한다. 이는 사목의 효율성을 높이기 위함이다. 예를 들어 교육 수준이 낮은 사람들을 상대하는 방식과 교육 수준이 높은 사람들을 상대하는 방식에는 분명 차이가 있을 수 밖에 없다. 사용하는 언어와 또 사용되는 예화에도 선택의 신중을 기해야 한다. 누구에게는 좋은  것이 누구에게는 전혀 관심도 끌지 못하는 것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각 교회 구성원들의 개성과 문화적 삶의 배경에 맞는 사목을 다양하게 개발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2) 성부는 성령의 능력 안에서 말씀으로 창조하시는 원천이다.

 

사목은 기존의 전통과 역사 위에서 이루어짐과 동시에 끊임없이 사목의 방법과 개념들을 새롭게 창조해 나가야 한다. 시대는 급속하면서도 다양하게 변화하고, 또 사회는 다양한 요구들을 쏟아내고 있다. 생태 환경에 대한 심각한 도전 앞에 이제 교회의 사목 방향이 인간과 사회에만 촛점이 맞춰지는 시대는 지났다. 풀 한포기에도, 곤충 한 마리에게도 사목적인 접근이 요구되는 시대에 교회는 직면해 있다. 인간 중심의 사목에 한계가 드러난 것이다. 이 지구촌에 존재하는 모든 피조물에 대한 창조적인 사목의 새로운 방향과 개념이 요구된다. 이것이 가능한 것은 끊임없이 종말의 때까지 사목의 중심에서 역사하시는 성령의 능력 때문이다. 교회는 끊임없이 이 변화하는 세상과 지구 생태계의 요구에 부응하는 사목을 준비해야 한다.

 

 

3) 성자는 성령의 능력에 의해서 인간이 된 영원한 말씀이며 아버지를 향해서 자신을 희생해 바친신다.

 

사목은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내어주신 희생에 그 기반을 둔다. 교회의 사목자들과 교인들은 서로를 위해서 뿐만 아니라 세상을 향해서도 끊임없는 희생을 요청받고 있다. 교회와 사목에 하느님께서 권위를 주신 것은 바로 섬김과 희생을 위한 것이지 남과 세상 위에 군림하기 위함이 아니다. 하느님 나라에서는 지극히 작은 자가 높은 자 임을 생각한다면 스스로를 겸손히 낮추고 남을 위해 희생하는 행위는 사목의 중요한 태도를 결정한다. 자신의 이득만을 생각하고 사회의 다양한 요구에 침묵하면서, 불의에 대항하여 싸우는 대신 불의에 편승하여 자신의 안위 만을 구하는 교회와 사목의 작금의 행태는 반드시 비판 받아 마땅하다. 사목은 인간 사회 전체와 생태계의 모든 요청에 응답하며 늘 자신을 내어 놓을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교회 공동체를 지킨다는 명목하에 교회의 희생을 묵살한다면 그것은 교회를 잘못된 길로 인도하는 결과를 낳고 말 것이다. 희생이 없는 사목은 죽은 나무와 같이 더이상 열매를 맺을 수 없다. “자기 목숨을 얻으려는 사람은 잃을 것이며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사람은 얻을 것이다.” (마태10:39)

 

 

4) 성령은 그분의 생명 주시는 능력으로 하느님의 백성들을 양육함으로써, 성자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를 통해서, 그리스도와 함께 성부 하느님께 기도할 수 있게 하시는 분이다.

 

사목은 철저히 성령의 사역이다. 교회의 사목의 전통과 사목의 직제 그리고 교회 내의 모든 성사들은 성령의 역사없이는 불가능하다. 신학적 지식과 사회학적이고 철학적인 지식은 사목에 있어서 다양한 상황들에 대한 해석을 가능하게 하지만 문제의 근본을 해결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다. 사목에서 목도되는 다양한 문제들에 직면하여 성령의 능력이 없이는 결국 세속적인 해결의 한계를 넘을 수 없다. 성령께서는 늘 인간 안에서 역사하시지만 때로는 인간의 경험과 지식을 넘어 자신을 계시하시며 우리의 삶에 간섭하시기도 하신다. 인간이 도저히 할 수 없는 것도 하느님께서는 능히 해결하시기 때문이다. 

 

이는 어떤 신비주의적인 해결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인간으로 하여금 움직이고 행동하고 실천하게 하는 역동적인 활동을 성령께서 지원하신다는 의미이다. 우리가 두렵거나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일에 대해서도 성령께서는 지혜를 주시고 용기를 주셔서 그것을 감당하게 하시는 것이다. 사목이 철저히 성령의 사역으로 이해될 때 사목자는 자신을 겸손하게 낮출 수 있다. 성령이 배제된 사목에는 인간이 그 중심에 서서 그 영광을 차지하게 될 위험이 늘 도사리고 있다. 한국의 대형교회에서 벌어지는 사목자들의 행태에서 우리는 이러한 모습을 종종 보게 된다. 성령께서 베푼 은혜를 마치 자신의 능력인 것 처럼 착각하는 사목자들의 모습 말이다.

 

 

5) 삼위는 하나와 전체의 균형, 평등함과 독특함의 균형이 항상 살아있는 역동적인 관계질서이며 운동이다.

 

균형과 조화, 질서라는 단어는 아름다움을 설명할 때 자주 사용되는 용어이다. 아리스토텔레스나 칸트 등, 많은 철학자들이 아름다움을 이러한 단어로 설명해 왔다. 그것은 삼위일체 신학에서도 예외는 아니다. 우리가 갖는 삼위일체 신학은 삼위일체를 가시적으로 표현할 때 이러한 개념들을 사용한다. 그것은 많은 중세미술에서 이미 드러난 사실들이다. 왜 우리는 이러한 이미지를 삼위일체에 적용하는가? 

 

그것은 아마도 성서에 명확히 표기되어 있지 않지만, 성서의 많은 증언들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을 서로 상충되는 개념으로서가 아니라 조화와 일치 그리고 상통의 관계로 묘사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고린도후서 13 13절에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과 하느님의 사랑과 성령께서 이루어주시는 친교라는 구절을 보면 사도 바울로가 오늘날과 같은 삼위일체신학이 정립된 것은 아니라 할지라도 삼위의 독특성과 그 역할에 기대어 조화롭게 이를 표현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존재론적인 접근이 아니라 삶 속에서 경험되는 실존적 삼위에 대한 표현이라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삼위는 각각의 독특성이 조화와 균형, 질서을 유지하는 역동적 관계질서의 운동이란 표현은 정당하다. 역사와 문화 속에서 드러나는 삼위하느님은 결코 무질서와 혼돈이 아니다. 철저히 인간의 삶과 역사 속에서 벌어지는 카오스에 질서와 조화를 제공하시는 하느님이시다. 모든 혼돈 속에서 빛이 있으라하신 태초의 말씀은 삼위일체의 이러한 역동적인 관계질서를 통해 이해될 수 있다.

 

 

6) 상호 역동적으로 주고 받으면서 하나로 존재하는, 이 상호성, 이 사랑의 관계, 이 친교와 상통의 관계가 창조세계로 흘러 넘친다. 그것이 바로 선교다. 그리고, 그 흘러 넘치는 관계가 창조세계를 그 존재 이유와 목표를 향해서 나아갈 수 있게 한다. 

 

삼위 하느님 안에서 넘쳐흐르는 상호 역동성과 친교 그리고 상통의 관계가 사목 안에 충만 할 때 교회는 세상의 소금과 빛으로서의 사명을 온전히 감당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선교는 결코 강압적인 명령에 대한 순종이 아니다. 자연스러운 삼위의 관계 처럼 교회 안에서 그러한 것들이 넘쳐나면 자연스럽게 세상으로 스며들어가는 것이다. 이러한 충만은 결코 우선 순위를 따지지 않는다. 교회의 사목이 상통의 관계 속에서 풍성해지는 것과 동시에 세상을 향한 교회의 선교도 자연스럽게 함께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 선교가 교회 공동체가 속한 사회와 문화 속에서 이루어질 수도 있고, 아니면 그 문화와 지역적 경계를 넘어 타문화와 타지역 안에서 동시에 이루어질 수도 있다. 

 

그러므로 사목의 방향은 결코 교회 공동체만을 위한 것이 되어서는 안 된다. 사목은 제한된 장소와 시간에 이루어지지만 그 효과는 그 장소와 시간을 넘어 영향을 미친다는 점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왜냐하면 교회는 모이는 공동체이기도 하지만 흩어지는 공동체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상호 상통과 사랑이 충만한 사목을 경험한 신자들은 세상 속에서 그러한 은총을 다른 사람들과 나누어야 할 의무가 있다. 그것은 직장의 동료나 가족을 향한 좁은 의미의 의무이기도 하지만, 사회의 모든 모순과 불의를 향해서도 선포되어야 할 의무이기도 하다 . 한 사람의 희생이 모두를 살리는 법이다. 하나가 전체를 대변하고 전체가 하나를 소홀히 하지 않는 사목. 그것은 한마리의 잃은 양을 찾기 위해 나머지 아흔 아홉 마리의 양을 두고 잃은 양을 찾아 떠나는 목자의 심정이다. 하나가 없어서 아흔 아홉 마리가 구원받지 못할 수도 있다. 하나가 전체를 전체가 하나를 포함하는 상통의 구조가 바로 하느님의 사목의 구조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결코 개인으로 구원받을 수 없다. 하느님은 모두를 구원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6. 교회의 직제

주교와 사제와 부제로 이루어진 삼성직은 교회 사목의 중심이다.  교회 공동체에 대한 치리 뿐만 아니라 교회의 사목을 담담하는 삼성직은 이러한 삼위일체 하느님의 상통의 구조 속에서 이해될 수 있다. 주교는 교회 공동체의 중심으로서 교회의 일치와 전통의 수호, 그리고 성령의 역동적인 은총으로 주어지는 다양성 안에서의 일치의 중심이 된다. 사제와 부제는 이러한 주교의  사역에 동참하며 그와 상통의 관계 속에서 교회의 사목을 완성해 간다. 주교와 사제와 부제는 결코 세속적인 상하직제의 관계가 아니라 성부-성자-성령이 평등의 관계 이듯이 상호 평등과 존중의 관계이다. 상호 겸손과 섬김과 존경을 보여야 하며, 상호 순종과 헌신의 관계를 유지한다. 주교의 권위는 그리스도의 섬김을 실천하는 데에서 나오며 주교에 대한 교회의 존경과 순종 또한 그러한 섬기에 근거한다. 

 

주교와 사제와 부제는 결코 신자들 위에 군림하는 자리가 아니다. 삼위가 상호상통하며 상호의지하듯이 이러한 삼성직은 교회의 사목을 위해 상호상통하며 상호의지하여야 한다. 섬김과 희생에 의해 주어지는 권위가 성령으로부터 사목자들에게 주어지는 것이다. 신자들 또한 그러한 권위에 순종하는 것은 섬김의 본에 따른다. 이러한 삼성직은 교인들을 잘 양육하고 돌보고 성숙시키는 사명을 감당한다. 교회 안에서 이러한 삼성직은 다양성을 품고, 역동적인 관계성을 유지하면서도 하나의 인격을 유지하도록 해야 한다. 삼위하느님이 각각의 특성을 유지하면서도 하나임과 같은 원리이다. 

 

이러한 교회의 직제는 결코 코이노니아와 에클레시아에만 국한 될 수 없다. 교회의 태생이 선교적이라면 교회의 직제의 시작도 선교적이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제자들을 불러 세상에 파견하신 것은 하느님 나라를 위해 그들에게 복음을 위탁하신 것이다. 제자들에게 주어진 지상의 사명이 선교였듯이 교회의 사목자에게 주어진 지상의 명령 또한 선교가 아닐 수 없다. 사목의 방향이 신자들을 양육하고 성장시켜 세상의 빛과 소금의 역할을 세상 끝날까지 감당할 수 있게 만드는 것이라면, 사목과 직제와 선교는 결코 구분하여 말할 수 없는 개념이다. 그러므로 선교에 대해 무심하면서 교회 사목에 만 집중하는 사목의 태도는 바람직 하지 않다. 선교는 선교 단체나 선교형 교회의 몫인양 오해하는 사역자들이 많은 것이 사실이다. 선교와 사목 그리고 교회를 삼위일체적인 관점에서 바라보지 않는다면 이러한 불편한 오해들은 계속 될 수밖에 없다.

 

마치면서...

교회 •선교•사목은 삼위일체 하느님이 하나이듯이 하나의 개념이다. 사목이 교회 공동체만을 위해 존재하는 개념이 아니듯이  선교와 교회도 각각 분리해서 말할 수 없다. 여기에 교회의 직제 또한 이러한 상통의 관계에서 분리될 수 없다. 선교는 교회를 교회는 선교를 통해 존재한다. 사목의 방향은 이러한 종합적이고 종말론적인 방향에서 설정되어야 한다. 교회 공동체만을 위한 사목은 종교적 집단 이기주의를 생산할 위험이 크다. 사목은 철저히 선교와 교회를 그 바탕으로 삼아야 한다. 사목은 교회 현장과 선교 현장에서 동시에 스며드는 역동적인 것이 되어야 한다. 가시적인 교회의 중요성 못지 않게 비가시적인 교회의 확장 또한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선교의 장에서 펼쳐지는 사목은 교회의 사목과 유사하면서도 선교 현장에 맞게 자유롭게 자신을 변화시킬 수 있어야 한다. 이러한 모든 것이 삼위일체 하느님의 상통 관계와 상호 신뢰의 관계에 의존한다. 이제 교회와 사목이라는 좁은 관계가 아닌 교회 •선교•사목이라는 보다 넓은 프레임으로 교회론과 선교론을 재정립할 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