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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다원주의 사회에서의 복음_레슬리 뉴비긴

James Chae 2021. 8. 6. 22:55

 

레슬리 뉴비긴의 다원주의 사회에서의 복음 : 6-13장 요약정리

 

채야고보 / 2017년 6월

 

 

요약정리한 부분은 레슬리 뉴비긴의 저서 “다원주의 사회에서의 복음”의 중간 부분에 해당하는 6~13장이다. 이 부분은 저자의 선교와 신학의 핵심 사상을 담고 있다. 나는 다음과 같이 몇 가지로 그의 사상을 정리해보고자 한다.

 

1. 역사관 2. 선택의 논리  3. 선교관  4. 복음과 상황

 

이미 6장 이전에서 그는 다원주의와 합리주의 등에 대한 비판을 시도했다. 서구 합리주의와 이성주의가 이룩한 “타당성 구조”라는 것의 허구성을 드러내면서, “기독교 합리성의 전통”을 이야기한다. 개인의 자아와 이성을 극대화한 것 같은 서구 합리주의도 결국은 특정 시대와 문화, 언어 등의 전통적 패러다임에서 결코 자유할 수 없다는 점을 밝히고, 아울러 과학과 이성도 결코 객관적 실재를 드러내는 데 한계가 있다는 점을 분명히 한다. 그리고 “합리성의 전통”은 항상 사회적이고 공동체적으로 구현된다는 점도 말하고 있다. 한 개인과 공동체는 각자가 속한 사회적문화적 경계를 넘어서 합리성을 주장할 수 없다고 그는 주장한다. 그에 따르면, 데카르트의 합리주의도 결국 서구 문명의 경계 안에서 사고된 것이다.

 

1. 역사관: 땅끝까지 복음이 전파되어야...

뉴비긴은 현재의 시대가 예수 그리스도의 초림과 재림 사이의 시대임을 명확히 한다. 다분히 종말적인 사관으로 이 시대가 재림 이전에 복음의 세계화를 위한 시기임을 말한다. 후에 얘기하겠지만 그의 선교관도 이러한 역사관에 근거한다.  바로 이 시기가 선교를 위한 성령 하느님의 시대인 것이다.  그렇게 보면 그는 분명 루가복음 사가의 역사관과 마태오복음 사가의 사관을 절묘히 결합한 것 같다; 지연된 종말: 땅끝까지 복음이 전파되어야 종말이 온다(마태오) 사이에 있는 종말: 이미 종말은 시작되었고 두번째 종말이 오고 있음(루가).

 

하느님은 이 역사 안에서 자신을 계시하시지만, 인간에게 어느 정도 독립성을 부여하신 만큼 자신의 자유를 역사 안에서 제한하시기도 하신다. 그래서 “역사상 발생하는 사건 가운데는 하느님의 뜻에 상반되는 일도 있는 것이다. (ex. 홀로코스트 등) 

 

그러나 인간의 눈에 모순으로 보이는 역사라하더라도, 그는 역사에 의미가 있다는 점을 분명히 한다. 그가 보기에 계몽주의가 설파한 ‘진보에 대한 믿음’을 현대 사회가 상실한 이후 우리 인류는 역사의 의미를 찾는 것이 더 어려워졌다. 오늘날 우리는 밝은 미래를 말하기 어렵다. 환경문제, 전쟁과 테러의 위협, 실업과 빈곤의 문제 등. 이러한 암울한 시대에서 역사의 목표를 “그리스도를 머리로 한 만물의 화해”라고 주장하는 그리스도인은 얼마나 정신나간 사람들로 보이는가? 그러나 그는 기독교의 합리주의 전통은 “예수께서 말씀하신 것과 행하신 것”에 근거한 “복음의 핵심”에 자리한다고 말한다.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행적과 의도에 대해 어떠한 기록도 남기지 않은 것은 역사 속에 존재할 자신의 공동체에게 이 비밀을 위탁하셨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공동체는 이 역사가 지속되는 동안 다양한 환경과 변화 속에서 이 비밀을 세상과 역사 안에 비추는 사명을 지닌다. 그는 이러한 역사를 “섭리의 역사”로 이해했다. 그는 합리주의의 “타당성 구조”를 비판하는 이러한 기독교 역사관으로,  이제 기독교 공동체가 “이성의 심판대 앞에서 스스로를 정당화시켜야 하는 시대”에 직면했다고 말한다.

 

그는 성경 읽기에서 가장 중요한 일은 “텍스트를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그 텍스트를 통하여 세계를 이해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즉 세계를 이해하는 것은 현재의 역사를 이해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가 그 안에(성경) 내주하면서 거기서부터 저 밖에 있는 것을 이해하고 그에 대처하려고 애쓰는 관계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달리 말하면, 성경이 우리에게 우리의 타당성 구조를 제공하는 것이다.  , 그는 성경이 말하는 “그 이야기 안에 살고 있으며, 하느님의 성품이 그 이야기에 밝히 드러나는 만큼 그분을 아는 실마리를 거기서 찾고, 그런 관점에서 현 시대에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을 이해하고 그에 대처하려고 노력하면서, 그 이야기를 앞으로 끌고 가는 삶”을 기독교 공동체에 요구된다고 말한다. 역사의 의미, 목표 그리고 소망을 그는 성경이라는 창을 통해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초림과 재림 사이에    이런 혼란스러운 시대가 있어야 하는지에 대한 물음에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그가 말하는 “역사의 의미”가 여기에서 드러난다. “예수 안에 감춰진 그 나라의 도래와 권능 가운데 임할 그 나라의 도래 사이에 이런 간격이 있는 데에는 분명한 이유와 의미가 있다. 그 의미는 열방을 대상으로 하는 교회의 선교에서 찾아야 한다. 즉 하느님의 자비로 인하여 그분의 권능이 만천하에 밝히 드러나는 날이 뒤로 연기된 것이며, 그 동안 모든 나라가 처음 갈릴리에서 복음을 들었던 자들에게 주어진 기회와 똑같은 기회를 얻어서 회개하고 회심한 결과,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 안에 하느님의 통치가 현존하고 있음을 믿고 인정하게 하려는 것이다.” 여기에 ‘새벽을 기다리는 파수꾼’의 ‘절박함’과 ‘긴박함’이 있고, 그때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역사의 미래를 열어놓고 기다리는 ‘인내심’이 공동체에게 요구된다. 그가 말하고 있는 역사의 의미는 다음 성경 구절로 요약된다. “이 하늘 나라의 복음이 온 세상에 전파되어서, 모든 민족에게 증언될 것이다. 그 때에야 끝이 올 것이다. (마태24:14)

 

여기에서 그의 “선교관”으로 넘어가야겠지만, 그전에 “선택의 논리”에 대해 정리한다. 이는 그의 신학의 저변에 깔린 중요한 개념이기 때문이다.

 

2. 선택의 논리: 십자가의 흔적을 몸에 지니다.

구약에서부터 신약에 이르기까지, 초대교회로부터 칼뱅을 거쳐, “백인의 의무”와 “명백한 운명”이란 서구 식민주의 사상을 지나 현대에 이르기까지, 서구 기독교 사상의 저변에 놓여 있는 “선택의 교리”는 많은 논란의 중심에 있다. 모든 선택에는 늘 “배제”가 전제된다. 왜냐하면 배제가 없으면 선택이란 말은 결코 성립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면 왜 기독교는 유대교로부터 이어오는 이러한 선택의 논리를 유지하는 것일까? 분명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 자신도 12명의 제자를 “선택”하셨다.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우리도 따른다는 말은 설득력이 부족하다. 그래서 뉴비긴은 이러한 부분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정리를 한다. 

 

왜 하느님은 자신이 직접하시면 될 일을 사람을 “선택”하여 하시는 것일까? 왜 하느님은 많은 민족 중에 이스라엘을 선택하셔서 자신의 백성으로 삼으신 것일까?  12명의 제자를 예수님은 선택하신 것일까? 

 

사실 불교나 힌두교 전통은 개인 영혼의 구원과 관련하여 그 주도권이 인간 각자에게 있음을 분명히 한다. 그리고 근대 서구 사상은 “자율적 인간 이성”에게 힘을 불어 넣어 기존의 모든 전통들에 대해 합리적 의심을 품으라고 격려했다. 그러나 저자는 이러한 인간 개인 이성과 주체에 대한 담론은  “합리적 담론의 전통 안에서 일어날 수 밖에 없다.”는 점을 말한다. 왜냐하면 이러한 추론 과정에 사용하는 도구도 언어와 문화적 전통의 제한을 받기 때문이다. 이런 관점에서 인간 이성이란 것도 결코 “자율적”이지 않다고 주장한다. 

 

그는 성경이 제시하는 관점은 인간을 자율적 개인으로서가 아니라 “관계의 견지”에서 인간을 설명한다는 것이다. 모든 인생은 “상호 관계의 측면”에서 조망된다. 따라서 “이런 상호 관계성, 서로에 대한 의존 관계는 구원의 목표를 향한 여정의 일부일 뿐 아니라, 그 목표 자체에 내재된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사적인 구원, 곧 우리의 상호 관계가 포함되지 않은 구원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이러한 관계성 속에서 하느님의 계시는 “그분이 지명하신 메신저”를 통해 상호에게 전해진다. 그리스도가 바로 그러한 사역을 담당하셨다. 이러한 경우 그분을 영접하는 것 외에 다른 구원은 없게 된다. 

 

결국 “선택”은 하나를 통해 다수 또는 전체를 구원하기 위한 하느님의 자유에 근거한 신적권능이다. 이에 대해 우리가 불평할 이유는 없다. 로마서에서 말한 사도 바울로 처럼, 일부를 영예롭게 하고 또 일부를 파괴하실 수도 있는 것은 하느님의 고유한 권한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선택의 교리”는 이스라엘의 “선민사상”과 구분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선택이란 “하느님 앞에 특권적 지위로 선택받은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이 선택받은 것은 “모든 나라를 향한 하느님 사랑의 도구”로 사용되기 위해서 이다. 이러한 선택받은 민족이나 개인에게 요구되는 것은 “특권이 아니라, 고난, 책망, 치욕” 이 따른다. 즉 그는 “모든 민족을 대신해서 하느님의 저주를 짊어지고, 죽음의 고통을 겪도록 부름받은” 것이다.

 

그러면 그 선택받은 자는 주어진 명령을 잘 수행하면 다른 사람들과 달리 하느님께 무언가 요구할 권리를 갖게 되는 것은 아닌가?  그렇게 되면 그것은 “은혜”가 아니라 “계약”이 된다고 저자는 말한다. “하느님의 은혜는 거저 주는  것이요 무조건적인 것이다. 우리가 은혜의 언약을 하나의 계약으로 바꿀 수는 없다.  그러면 이러한 선택된 자는 불신자들에 비해 “하느님에 대한 권리를 갖는가?” 아니다. “하느님의 선택의 은혜, 곧 일부를 택하셔서 만인을 위한 구원의 전달자가 되도록 하신 것은 두려움과 놀라움과 감사의 제목이다. 그것은 결코 다른 사람들을 배제시킨 채 하느님에 대한 독점권을 주장할 수 있는 근거가 될 수 없다. 

 

그러므로 “선택받는다는 것은, 택함받은 자는 구원받고 나머지는 멸망한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택받은 것은 세상을 향한 그분의 사역에 편입되는 것이요, 온 세상을 향한 하느님의 구원의 목적을 짊어지는 자가 되는 것이며, 만인을 위한 하느님 나라의 표지가 되고 일꾼이 되고 첫 열매가 되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그것은, 신약 성경에 너무나 분명하게 천명되듯이, 우리가 그분의 고난에 동참하고 십자가의 흔적을 몸소 지니는 것을 뜻한다.” 희생과 고난을 말함으로써 저자는 분명 “백인의 의무”와 “명백한 운명”과는 거리를 두고 있지만, 이후의 장에서 전개되는 그의 논리를 살펴보면 그 또한 서구 기독교의 한계 안에 있음이 드러난다(물론 그는 아니라고 주장하겠지만). 특히, 타종교와 문화를 대상화시키면서 다원주의사상을 비판하는 부분에서 이러한 점이 두드러진다.

 

3. 선교관: 선교는 삼위일체 하느님의 사역이다.

선교는 교회에 주어진 “선교명령(the missionary mandate)”인가? 이에 대한 저자의 답변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선교는 기쁨이 폭발하면서 자연스럽게 생겨난다. 이는 아마도 선교에 대한 동기가 어디에서 나오는 가에 대한 답일 것이다. 우리가 이미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저자의 역사관은 초림과 재림 사이에 놓인 이 시대에 주목한다. 이 기간은 심판을 연기하시고 모든 사람이 구원받을 때까지 기다리시는 하느님의 은총이 표현되는 시기이다. 저자는 이 시기에 교회에 주어진 “지상명령”은 단지 명령이기 때문에 교회가 따라야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계신 성령으로 말미암는 기쁨에 의한 자발적인 선교를 말한다. 그리고 선교는 믿지 않는 사람들이 던지는 다양한 질문에 응답하는 것이다. 

 

1) 선교는 삼위하느님의 사역이다.

선교는 하느님의 사역임을 저자는 분명히 한다. 왜냐하면 선교가 인간에게 주어진 명령으로 해석될 때 그 실천을 통해 인간의 의로운 행위로 오인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그는 선교를 삼위일체 하느님과 연결시킨다. “성부 하느님은 만물을 자기 손에 붙들고 계시고, 섭리로 모든 것을 지탱하시며, 자기를 인정하는 곳이든 부인하는 곳이든 그 자비로운 손길을 어디에나 드리우시고, 각 사람의 마음과 양심과 이성에 증거를 남겨 놓지 않은 적이 없으신 그런 분이다. 성자의 성육신을 통하여 자신의 본성과 목적을 완전히 알리신 분, 곧 예수 안에 “하느님의 모든 충만함을 머무르게 하시기를 기뻐하신” 분이다(1:19). 그러나 이 현존은 어디까지나 베일에 가린 현존으로서, 사람들로 하여금 회개하고 자유로이 믿게 하기 위하여 그렇게 하셨다. 교회에서도 예수의 선교는 베일에 가려진 상태에서 계속된다. 그 일을 계속하시는 분은 하느님의 통치를 미리 맛보게 하시는 성령이다.” 그렇기 때문에 선교는 우리의 활동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영이 능력으로 임재하는 데”에서 발생한다. 

 

또한 그는 “하느님의 선교(missio Dei)”라는 교리가 선교 현장에서 교회와 예수의 이름까지 회피하는 데 이용되었다고 비판한다. 그는 “복음과 상황”이란 화두에서 복음전파를 사회 참여보다 우선에 둔다. “우선적 과업은 복음 전도, 곧 말과 글로 복음을 직접 전하는 일이다. 사회적 정의와 평화를 위한 활동은 사람들이 복음에 귀를 기울이게 하는 통로가 될지는 모르나, 복음의 본질적 요소는 아니다. 죄에서 구원받고 영생을 얻으라고 복음을 전파하는 일이 교회의 일차적 과업이다.

 

2)선교 사역의 목적과 목표

뉴비긴은 ‘선교’(mission)과 ‘선교 사역’(missions)을 구분한다. “전자는 보편적 교회(the Church)가 세상으로 파송될 때 얻게 되는 과업 전체를 가리키는 말이다. 후자는 복음이 전해지지 않은 곳, 곧 기독교가 존재하지 않거나 실질적인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 장소에 복음을 전하려고 사람이 정한 구체적 활동을 일컫는 말이다. 

 

저자는 사도행전의 고넬료 가족의 회심 사건을 주목하며, 이것이 교회의 선교 사역의 모범으로 제시한다. 그러나 이것은 “교회의 업적이 아니라 성령의 사역”이었다는 점을 강조한다. 고넬료의 회심을 통해 이방인 선교의 문이 열리는 계기가 됐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고넬료의 회심이전에 베드로의 회심에 대해서는 간과한다. 만약 베드로의 변화가 없었다면 고넬료의 회심도 없었다. 

 

그는 선교 사역의 연속성을 강조한다. 믿음을 받아들인 공동체가 자신의 시대 뿐만 아니라 후대에까지 “복음을 전파하는 일을 완수하기 전에는 하느님의 통치”가 온전히 드러날 수 없다. 그렇다고 선교는 “수많은 영혼이 영원한 멸망에 빠지는 것을 막는 일”은 아니다. 선교의 의미는 선교 사역을 통해 “인간 이야기의 참된 의미”를 드러내는 데 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으로 드러났으며, “이것은 진리이기에 보편적으로 나눌 필요가 있다. 이는 사적인 의견일 수 없다. 우리가 그것을 모든 사람과 나눈다는 것은 그들에게 그들 자신에 관한 진리를 알 기회를 주는 것이다.   그들의 인생이 속한 그 진정한 이야기를 앎으로써 자기가 누구인지 그 정체성을 알게 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복음이 전파되는 곳마다 다양한 의문이 제기되기 마련이다. 일단 복음을 받아들인 자들은 자신이 이전에 누렸던 삶의 상태로 돌아갈 수 없다. 그는 “그리스도의 편이될지 그 반대편이 될지” 요청받는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선교 사역은 “신앙의 시험대”가 된다.  왜냐하면 복음은 그 실천에 의해 입증될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복음에 대한 “우리의 신념이 얼마나 진지한가 하는 것은 다른 사람들과 그것을 나누고 싶은 마음이 얼마나 간절한가를 보면 알 수 있다.  또한 이러한 실천을 통해 “선교 사역은 우리의 소망”을 표현하고, 그것을 믿는 우리의 믿음을 드러낸다. 그리고 이러한 선교에 대한 동기는 “하느님에 대한 사랑”이다. “선교의 중심에는 그분과 함께하고 싶은 열망과 그분께 우리의 삶을 드리고 싶은 마음이 있을 뿐이다.” 그래서 그 중심에는 “감사와 찬양”이 있다. 결국 저자는 선교의 목적을 “하느님의 영광을 찬미”하는 데 둔다. 

 

3)선교: 선포 행위와 촉진 행위

복음이 “보편적 역사의 실마리”로 이해될 때 개인 역사의 실마리도 해결된다. 이는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답하기 때문이다. 성경은 인간과 우주의 역사에 대한 독특한 해석을 제시하고 거기에서 출발하여 각 인생의 의미들을 드러낸다. 저자는 현재가 그리스도의 승천과 재림 사이의 중간기 라는 것을 분명히 하면서 이 시기에는 “베일에 감춰진 [그분의] 통치를 가리키는 표적은 나타나지만 그 권세와 영광의 완전한 현시는 지연되고 있는데, 그것은 모든 민족-모든 인간 공동체-이 회개하고 자유로이 복음을 믿을 수 있게 하기 위함이다. 

 

기독교 선교는 역사 속에서 하느님이 무슨 일을 하시는지 선포함으로써 이를 이해할  수 있는 기회를 모든 사람들에게 준다. 이것이 교회의 “선포 행위”이다. 또한 교회는 선교를 통해 “촉진의 역할”을 수행한다. “그것은 사건들이 올바른 목표를 향해 흘러가도록 압력을 가한다.” 신약성경의 묵시적 가르침이 “긴 잠을 자고 있는 사람들을 그 잠에서 깨우는 역할”을 한다. 그래서 교회는 선포와 촉진 행위를 통해 단지 역사를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역사를 조성하는 힘(history-making force)”을 드러낸다. “선교를 통하여 하느님께서 이 역사를 그 목표 지점까지 이끌어 가신다.

 

이러한 선포는 “말”로 진술될 필요가 있고, 또한 말에 따르는 복음의 능력인 “치유의 기적”이 수반되어야 한다. “복음 전파는 기적의 맥락에서만 의미를 지닐 수  있기 때문이다.  무슨 일이 벌어져야만 사람들은 “도대체 이게 뭔가?”라는 질문을 제시하게되고, 교회는 이러한 “질문”에 답하는 것이다.

 

 

 4. 복음과 상황: 교제와 말씀과 성례 그리고 그리스도

“어떻게 복음이 아주 다양한 문화적 맥락에 “생생하게 와 닿으면서도” 그 동질성을 그대로 유지할 수 있을까?

 

먼저 저자는 앞에서 언급한 “선택의 논리”에 따라 하느님의 보편적 목적이 역사 속에서 특정한 장소, 시기, 민족에 의해 구체화된다고 말한다. 그런 구체화의 과정은 복음이 타문화의 옷을 입는 것을 전제로 하지만 그 본질이 없어질 정도로 흡수되는 것은 결코 아니다. 복음의 본질을 지키면서 그것을 타문화권에 이식시키기 위해서는 특별한 세심한 방법이 필요하다. 저자는 이에 대한 답으로 “성경과 성례와 사도적 사역”을 제시한다. 만약 선교사가 선교지에서 이러한 조건들을 갖추는 데 성공한다면 그의 선교 임무는 완수되는 것이다. 이는 “기억하고 재연”하는 성례전의 반복을 통해 가능해진다. 이러한 것들이 도덕적정치적사회적 원리들을 실천하는 것보다 앞서야 한다. 

 

그는 해방신학에 대해 비판적인데, 아래로 부터의 신학이 아니라 위로 부터의 신학을 강조한다. 특히 억눌린 자의 인식론적 특권을 주장하는 해방신학이 그들의 신념을 성경의 권위보다 앞선 것으로 뒀다고 비판을 한다. 그리고 모든 사람은 누군가에게 억눌림을 받는 동시에 누군가를 억누르는 사람이 될 수 있는 이중적 입장에 서기 때문에 결코 억눌린 자가 복음의 대의가 될 수 없다고 한다. 이는 악순환의 연속이 아닐 수 없다.

 

저자는 올바른 상황화의 출발을 다음과 같이 진술한다.  진정한 기독교적 사고와 행동이란 사람들의 열망에 부응하거나, 그들이 제기하는 질문에 응답하거나, 세상이 문제시하는 것에 해결책을 제시하는 것을 출발점으로 삼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 대신 하느님이 이스라엘의 이야기에서 행하신 것과, 무엇보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야기를 통해 이루신 것에 주목함으로써 시작해야 하고, 또 그것에 의거하여 계속되어야 한다. 한마디로 우리의 시선을 아래에 먼저 두는 것이 아니라 에 둬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철저히 성경이 제시하는 을 통해 세상을 봐야 한다는 점을 분명히 하고 있다.

 

그러나 정말 뉴비긴의 말처럼 위를 쳐다보고 성경적 세계관에 빠져있으면 온전하게 현시대의 상황을 제대로 볼 수 있게되는 걸까? 상황화 또는 토착화되지 않는 복음이 과연 존재할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헬라세계에 전파되면서 그 언어와 문화에 토착화된 사실, 또한 헬라화된 복음이 라틴문화와 유럽문화의 상황에 적응했던 사실을 간과하는 듯한 그의 진술에 많은 거부감이 느껴진다. 사실 해방신학은 복음이 남미 문화와 사회에 상황화토착화되면서 나타난 결과가 아닌가? 현재 진행되는 제3세계 선교의 특징을 보면 이미 서구화된 기독교를 전파받은 제3세계 교회의해 선교가 주도되고 있다는 점이다. 한국 교회가 이러한 경우에 해당한다. 한국 교회는 다분히 서구 기독교적이면서 그것을 제3세계 선교지에 그대로 이식시키려 한다. 내가 인도에 있을 때 인도 사람들로부터 자주 들었던 질문은 왜 당신들의 찬양곡들은 모두 서양 사람들의 곡입니까? 이다.  당시에 나는 부끄러워 아무런 대답도 할 수 없었다.

 

뉴비긴은 그리스도인이 교제와 말씀과 성례를 통하여 교회의 삶과 예배에 동참함으로써 그 이야기 안에 몸담게 되고, 그 이야기에 입각하여 우리의 시대와 장소를 향해 예수의 목소리와 손길이 되려고 노력하는 것이 올바른(?) 상황화라고 말한다. 즉 올바른 상황화는 먼저 하느님께 주목하는 것이다. 복음의 알맹이는 곧 예수 그리스도로서, 그분의 사역과 죽음과 부활이 그 속을 꽉 채우고 있다. 예수를 보는 우리의 눈은 우리가 처한 상황에 따라, 또 우리 문화에서 얻은 정신적 틀에 따라 좌우되긴 하지만, 그래도 그분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 필요하다. 이런 이유로 우리는 모든 시대와 장소를 망라하는 보편 교회의 증언을 귀담아 들어야 한다.그러나 과연 모든 시대와 장소를 망라하는 보편 교회의 증언이 가능할까? 그러한 증언을 하는 주체는 과연 누구일까? 예수를 바라보는 우리의 눈도 천차만별인데, 그 속에서 하나의 보편성을 찾는 것이 어떻게 가능할 것인가? 다원주의사회 속에서 그리스도의 유일성을 주장하는 뉴비긴의 견해들은 이 이후의 장에서 더욱 구체화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