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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초의 말, 하느님의 말씀"

James Chae 2022. 5. 21. 12:04

 

 

2022.5.22. 부활6주일

사도 16:9-15 / 시편 67 / 묵시 21:10, 22-22:5 / 요한 14:23-2

 

태초의 , 하느님의 말씀

 

 

 

채야고보 신부 / 대한성공회 제주우정교회 담당사제, Artist

 

“온전히 운명이란, 말 이상이다.
단지 사람은 말할 수 있는 운명을 가진 것,
운명을 이야기할 있는 말을 가진 것이,
침묵한 행위자인 도야지보다 우월한 점이다.
말을 행위로,
행위를 말로,
자유로 번역할 있는 기능,
그것이 시의 최고의 원리.
(중략)
분명히 태초의 행위가 있다….”
<지상의 >, 임화의 시집현해탄중에서

 

월북 시인 임화의지상의 라는 작품의 일부분입니다. 시인의 표현이 직설적이고 거칠지만, 그래도 시인의 순수한 열정이 묻어나서 좋습니다. 시인 임화는태초에 말이 있었고, 말은 행위이다라고 말합니다. 인간은운명을 말할 타고 낳기에도야지보다는 조금 우월한 존재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인간들은 말할 운명을 갖고도행위하지 않는 하고, “말을 말하는 뿐입니다. 인간의 말에는 언제부턴가행위 사라졌고 오직 말뿐입니다. 시인에게 있어 말은 행위인데, 행위가 따르지 않는 말은 요란한 수레의 소리처럼 의미 없고 공허할 뿐입니다. 시인은말을 행위로, 행위를 말로, 자유로 번역할 있는 기능 시의 최고의 원리라고 말합니다. 시는 말과 행위를 오가며 자유롭게 노래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시인은 히브리 성서를 모티브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분명히 태초의 행위가 있다.”라고. 시인 임화는 말과 행위를 전혀 구분하지 않습니다.

 

시인의 표현처럼 태초에말씀창조 행위 있었습니다. 말씀이 하느님과 함께했다고 요한복음은 선포합니다. 그래서 요한복음은 말씀이하느님과 똑같은 ”(요한 1:1)이라고 표현합니다. “하느님께서빛이 생겨라!’ 하시자 빛이 생겨났다라고 창세기 1 3절은 말합니다. 또한입니다. ‘하느님의 말씀’. 물론 요한복음 기자는 분명 요한복음의 서문을 기록할 창세기 1장을 염두에 뒀을 겁니다. 빛이 있게 창세기의말씀 요한복음에서 표현된 태초에 하느님과 함께하신 말씀은 동일한말씀입니다. ‘하느님의 말씀 분명 오늘 읽은 임화 시인의 시처럼말과 행위 하나인 말씀입니다. 그래서빛이 생겨라하시니 즉시 빛이 생겼습니다. 말과 행위 간에는 어떠한 시간적 간격도 없습니다.  나자로야 나오너라!” 하시니 나자로가 무덤에서 나왔습니다. 이것도 말씀과 행위가 하나입니다. 이것이인간의 하느님의 말씀 다른 점입니다. 우리는행위 없는 하고, “말을 위한 합니다. 그러다 보니 말뿐입니다. 말에 따르는 책임도, 행위도 없습니다. 그러니 행위는 묘연하고 기적은 더욱더 불가능해집니다. 말은 앞서는데 행위는 따르지 않습니다. 한마디로 인간은 태초에 있던 말의 신비와 능력을 잃었습니다. 원인을 히브리 성서에 따라 유추해보면, 아마도 그것은 바벨탑 사건 이후로 그렇게 듯합니다. ‘바벨탑 이야기 역사적 진실을 얼마나 담고 있는지 모르지만, 최소한 우리 인간이말의 능력, ‘말의 신비 잃어버린 이유를 설명해줍니다. 아마 그때부터 인간의 말에는 행위가 사라지기 시작했을 겁니다. 인간 간에 상호 소통도 불가능해졌습니다. 서로의 말을 들어도 이해 하고, 이해해도 공감을 하지 못합니다. 그러니 말에 행위가 따르기는 더욱 만무합니다. 말이 공허해지고, 말에 행위가 따르지 않으니, 말에 대한 책임도 점점 희미해집니다. 그러면서 차츰 타인을 명령하는 말이 탄생했을 겁니다. 자신은 행하기 싫으니 남을 명령하는 말로 원하는 행위를 얻습니다. 상호 인격적인 말이 아니라 남을 굴복시키는 말이 점점 발달합니다. 그렇게 말과 행위가 분리되면서 결국 말하는 사람과 행동하는 사람에 구분이 생깁니다. 구분은 결국 행위와 행동을 하게 만드는 말의 계급을 만들었습니다. 행위를 잃은 말의 비극이 아닐 없습니다. 

 

일전에 읽은 대로 사도행전 10 40절에서다비타. 일어나시오라고 외쳤던 베드로는 정확하게 이러한 말의 신비를 깨달은 사람이었습니다. 기도하고 말했을 무슨 일이 일어날지 정확히는 몰랐지만, 하느님의 말은 태초의 행위를 가져올 것이란 확신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베드로가 예수께서 말로 사람들을 치료하시고, 나자로를 살리시는 것을 보고 배웠기 때문입니다. ‘ 분명히 어떤행위’, 또는행동 따라야참말이라 있습니다. 말의 능력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내 말을 잘 지킬 것이다.(요한 14:23)

 

점은 주님께서도 오늘 읽은 복음서에서 분명히 말씀하고 계십니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대로 행한다고. 주님의 말은 행위와 말이 하나인태초의 입니다. ‘태초의 에는 반드시 행위가 따릅니다. 그래서 이사야서 55장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내 입에서 나가는 말도 그 받은 사명을 이루어 나의 뜻을 성취하지 아니하고는 그냥 나에게로 돌아오지는 않는다.”(이사 55:11)

 

하느님의 말씀은 하느님으로부터 발화되는 순간 마치 인격을 가진 실체처럼행위 불러오고, 어떤 역사를 일으킵니다. 마태오복음 24장에서도 주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하늘과 땅은 사라질지라도 내 말은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마태 24:35)

 

발화된 말은 반드시 말에 담긴 행위를 수행하기 전에는 결코 사라지지 않습니다. 이와 같이 태초에 천지를 창조하신 하느님의 말씀과 예수님의 말씀에는 말과 행위가 하나였음을 있습니다. 비록 현재 우리 인간의 말에는행위능력 부재하지만, “말이 씨가 된다 속담처럼 말에는 반드시 어떤 인과론적인 결과와 책임이 따르게 마련입니다. 결과가 종말적인 심판이든, 아니면 개인적 종말이든 말입니다. 모든 발화된 말에는 모종의 책임이 반드시 따릅니다. 그래서 우리는 말한 대로 행동하지 않는 사람을실없는 사람이라 부릅니다. 한마디로 실속이 없고 책임감이 없는 신뢰할 없는 사람이죠. 이러한 사람은 사람들 사이에서 신뢰를 잃게 마련입니다. 비록 행위를 잃어버린, 능력을 잃어버린 인간의 말일지라도 모든 말에는 말을 발화한 사람의 인격이 담겨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이러한 부분을 분명히 간파하신 듯합니다. 그래서 자신의 공생애의 모든 행동이 모두 하느님의 말씀에서 나왔음을 밝히십니다. 

 

또 내가 아무것도 내 마음대로 하지 않고 아버지께서 가르쳐주신 것만 말하고 있다. (요한 8:28)

 

 

주님께서는 아버지께 듣고 대로만 말한다고 하십니다. 그러니 그분의 말은 하느님의 말씀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말씀하신 대로 그대로 행하신 것입니다. 그분의 말은말과 행위 하나였습니다.

 

행위하지 않는 ”, “말을 말하는 ”.

넘치는 말들 속에 우리는 하루하루를 살아갑니다. 뉴스를 통해 접하는 정치인들의 , 검사들의 , 인플루언서들의 말들 어디에도 책임이나 인격이 느껴지는 말을 찾아보기 힘듭니다. 말은 그냥 말뿐이구나라는 생각이 정도로 말에 책임을 지지 않는 사람들이 넘쳐납니다. 말이 처세술의 수단이 세상. 수사법은 자신의 허물과 잘못을 감추고 자신의 행위를 정당화하는 사용되고, 말이 증오와 혐오를 담아내는 현실 속에서 우리는 매일 살아갑니다. 그래서 세상은 하느님의 태초의 말씀이 자리할 자리가 전혀 없는 보입니다. 모두가 귀를 막고 진리의 말을 경청하려 하지 않습니다. ‘행위 분리된 것이 아니라 인간의인격마저 분리된 오래입니다. 그러니 말에 양심이 없고, 말은 많은데 정말 실속이 없습니다. 이래서야 세상을 창조하신 하느님의 선한 뜻이 온전히 바로 설리 만무합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나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내 말을 지키지 않는다. (요한 14:24a)

 

행위가 부재한 . 그것은 결국 하느님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증거가 됩니다. 주님의 말씀은 명확합니다. 말을 지키는 자가 나를 사랑하는 자라고. 너무나 극명한 표현이라 토를 전혀 수가 없습니다. 주님의 말을 따르는 자만 주님을 사랑하는 자라고 하시니 말에 순종하지 않는 자는 모두 하느님을 사랑하지 않는 자입니다. 결국사랑 앞섭니다. 사랑은 말과 행위를 하나로 만듭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간혹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해 희생도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사람을 우리가 의인 또는 성인이라 부르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말과 행위가 일치하는 사랑을 살아낸다면의인또는성인이라는 말은 이상 의미가 없을 것입니다. 모두가 말뿐인 삶을 살기에 우리는거룩함의 담지자로서 말과 행위가 하나인 사람을 간절히 바랍니다. 이러한 사람은 분명 성령의 사람일 겁니다.

 

이제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주실 성령 곧 그 협조자는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쳐주실 뿐만 아니라 내가 너희에게 한 말을 모두 되새기게 하여 주실 것이다.” (요한 14:26)

 

성령께서는인간의 하느님의 말씀으로 바꿔주십니다. 성령께서는 우리에게 하느님의 말씀을디다케이διδάξει, 가르치시고’, 주님께서 하신 말씀을휘폼네세이ὑπομνήσει, 기억나게 하실 입니다. 모두 미래형 동사로 사용된 것은 그것이 부활 이후에 성령강림사건을 염두에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지난주에 말씀드린 대로, 성령강림사건은 부활의 연장선상에 놓입니다. 성령의 사역은 우리에게태초의 말씀하느님의 말씀 가르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루가복음은 성령과 기도를 떼려야 없는 관계로 설정합니다. 성령께서 우리에게 가르치시는 말은 기도에 담기고, 기도는 반드시행위 연결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태오복음은 이를 다음과 같이 표현합니다. 

 

"구하여라, 받을 것이다. 찾아라,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열릴 것이다.” (마태 7:7)

 

결국 기도는 말과 행위를 하나로 묵는 성령의 역사임이 드러납니다. ‘주님의 말씀’, ‘하느님의 말씀 이렇게 성령 안에서 우리에게 다시 살아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도로 말하고, 기도로 행동합니다. 기도했으면 반드시 찾고 두드려야 합니다. 우리의 말뿐이었던 말은 이렇게 기도 속에서 행위와 하나가 됩니다. 기도의 말이 사랑임은 말할 필요가 없을 겁니다. 기도하고 행하는 사람이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그래야 우리는 다른 사람을 위해 기도하고, 남을 돕고, 남을 세워줄 있습니다. 우리 힘만으로 힘들다는 것은 당연합니다. 우리는 이미 우리말에 행위를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오직 기도를 통해 이러한태초의 , 하느님의 말씀 다시 우리 가운데 회복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기도가, 우리의 말이 행위로 드러나고 드러난 행위가 모두 사랑이기를 빕니다. 우리 가운데 그러한 넘쳐나길 간절히 축원합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말씀을 나눴습니다. 아멘.

 

 


 

전례독서_ 부활6 (다해)

 

본기도

사랑의 하느님,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세상이 없는 참된 평화를 약속하셨나이다. 비오니, 우리에게 성령을 내리시어 주님의 말씀과 사랑 위에 굳게 서게 하시고, 모든 두려움과 불안을 떨쳐버리게 하소서성부와 성령과 함께 하느님이신 우리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나이다. 아멘.

 

 

1독서_ 사도 16:9-15

9 어느 바울로는 거기에서 신비로운 영상을 보았다. 마케도니아 사람 하나가 바울로 앞에 서서마케도니아로 건너와서 우리를 도와주십시오.” 하고 간청하였던 것이다. 10 바울로가 영상을 보고 뒤에 우리는 마케도니아로 떠날 채비를 서둘렀다. 마케도니아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하느님께서 우리를 부르신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11 ¶ 우리는 배를 타고 트로아스를 떠나 사모드라게로 직행하여 이튿날 네아폴리스로 갔다가 12 거기에서 다시 필립비로 갔다. 곳은 마케도니아의 지방의 도시로서 로마의 식민지였다. 우리는 며칠 동안 도시에 머물러 있었다. 13 안식일이 되어 우리는 성문 밖으로 나가 유다인의 기도처가 있으리라고 짐작되는 강가에 이르렀다. 그리고 거기에 앉아서 모여든 여자들에게 말씀을 전하였다. 14 그들 가운데는 리디아라는 여자가 있었는데 그는 티아디라 출신으로 자색 옷감 장수였고 하느님을 공경하는 여자였다. 주께서는 여자의 마음을 열어 바울로의 말을 귀담아듣게 하셨다. 15 리디아는 집안 식구와 함께 세례를 받고 나서정말 저를 주님의 충실한 신도로 여기신다면 집에 오셔서 머물러주십시오.” 하고 간청하면서 우리를 자기 집으로 데리고 갔다.

 

 

성시_ 시편 67

1    하느님,
.     우리를 어여삐 보시고, 축복을 내리소서.
.     웃는 얼굴을 우리에게 보여주소서.
2    세상이 당신의 길을 알게 하시고
.     만방이 당신의 구원을 깨닫게 하소서.
3    하느님, 백성들이 당신을 찬양하게 하소서.
.     만백성이 당신을 찬양하게 하소서.
4    당신께서 열방을 공평하게 다스리시고,
.     세상 백성들을 인도하심을,
.     만백성이 기뻐 노래하며 기리게 하소서.
5    하느님, 백성들이 당신을 찬양하게 하소서.
.     만백성이 당신을 찬양하게 하소서.
6    땅에서 오곡백과 거두었으니
.     하느님, 우리 하느님께서 내리신 축복이라.
7    하느님, 우리에게 복을 내리소서.
.     세상 끝까지, 당신을 두려워하게 하소서.
⦿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     처음과 같이 지금도 그리고 영원히, 아멘.

 

 

2독서_ 묵시 21:10, 22-22:5

10 그리고 그는 성령의 감동을 받은 나를 데리고 크고 높은 산으로 올라가 하느님께서 계시는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거룩한 도성 예루살렘을 보여주었습니다. …
22
나는 도성에서 성전을 보지 못했습니다. 전능하신 하느님과 어린 양이 바로 도성의 성전이기 때문입니다. 23 도성에는 태양이나 달이 비칠 필요가 없습니다. 하느님의 영광이 도성을 밝혀주며 어린 양이 도성의 등불이기 때문입니다. 24 만국 백성들이 속에서 걸어다닐 것이며 땅의 왕들은 그들의 보화를 가지고 도성으로 들어올 것입니다. 25 도성에는 밤이 없으므로 종일토록 대문들을 닫는 일이 없을 것입니다. 26 그리고 사람들은 여러 나라의 보화와 영예를 도성으로 가지고 들어올 것입니다. 27 그러나 더러운 것은 아무것도 도성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흉측한 짓과 거짓을 일삼는 자도 결코 들어가지 못합니다. 도성에 들어갈 있는 자는 다만 어린 양의 생명의 책에 이름이 올라 있는 사람들뿐입니다.
22:1
천사는 수정같이 빛나는 생명수의 강을 나에게 보여주었습니다. 강은 하느님과 어린 양의 옥좌로부터 나와 도성의 넓은 거리 한가운데를 흐르고 있었습니다. 양쪽에는 열두 가지 열매를 맺는 생명나무가 있어서 달마다 열매를 맺고 나뭇잎은 만국 백성을 치료하는 약이 됩니다(창세 2:9; 에제 47:12). 3 이제  도성에는 저주받을 일이 하나도 없을 것입니다. 하느님과 어린 양의 옥좌가 도성 안에 있고 그분의 종들이 그분을 섬기며 4 얼굴을 뵈올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의 이마에는 하느님의 이름이 새겨져 있을 것입니다. 5 이제 도성에는 밤이 없어서 등불이나 햇빛이 필요없습니다. 하느님께서 그들에게 빛을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영원 무궁토록 다스릴 것입니다.

 

 

복음서_ 요한 14:23-29

23 예수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셨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지킬 것이다. 그러면 나의 아버지께서도 그를 사랑하시겠고 아버지와 나는 그를 찾아가 그와 함께 것이다. 24 그러나 나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지키지 않는다. 내가 너희에게 들려주는 것은 말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아버지의 말씀이다.”
25 나는 너희와 함께 있는 동안에 여러 가지 이야기를 들려주었거니와 26 이제 아버지께서 이름으로 보내주실 성령 협조자는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쳐주실 뿐만 아니라 내가 너희에게 말을 모두 되새기게 하여주실 것이다.27나는 너희에게 평화를 주고 간다. 평화를 너희에게 주는 것이다.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는 다르다. 걱정하거나 두려워하지 마라. 28 내가 떠나 갔다가 너희에게로 다시 오겠다는 말을 너희가 듣지 않았느냐? 아버지께서는 나보다 훌륭하신 분이니 만일 너희가 나를 사랑한다면 내가 아버지께로 가는 것을 기뻐했을 것이다. 29 내가 지금 일을 미리 알려 주는 것은 일이 일어날 너희로 하여금 믿게 하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