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1.26. 다해_연중3주일
느혜 8:1-3, 5-6, 8-10 / 시편 19 / 1고린 12:12-31상 / 루가 4:14-21
“그리스도의 몸: 보편 교회”
채야고보 신부 / 대한성공회 제주우정교회, Artist
오늘 읽은 2 독서의 말씀은 성령의 활동을 교회론적인 차원에서 사도 바울로가 정리한 부분입니다. 오늘 읽지 않은 앞부분에서 성령의 은사의 다양성과 단일성을 다룬 후에, 이제 “하나의 몸과 다양한 지체들”이란 개념으로 교회론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4절에서 11절까지는 성령의 다양성이 하나의 성령에서 비롯됨을 설명했지만, 여기에서는 성령의 다양성이 하나의 목적을 지닌다고 설명합니다. 그 목적은 교회의 몸을 온전히 세우는 것입니다. 사실 하나의 몸으로서의 우주와 세계라는 개념은 스토아 철학의 단골 주제였고, 고대에도 이러한 비유는 자주 있었기 때문에 사도 바울로의 창작은 아닙니다. 그러한 헬라적 개념을 그리스도론적으로 승화시켰다는 점이 사도 바울로의 위대한 점입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이 개인적 회심과 회개를 통해 하느님과의 일대일의 관계성 위에 세워진다는 점에서 매우 개인주의적인 종교로, 체험적인 종교로 흘러갈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로는 이러한 하나하나의 개인들을 교회라는 공동체 몸으로 통합했습니다. 우리 각 그리스도인은 개별적 존재가 아니라 성령으로 말미암아 교회의 몸을 이루는 각 지체라는 것이지요. 이에 대해 16세기 성공회 신부이며 영국의 위대한 시인 존 던은 다음과 같이 묘사합니다.
“교회는 보편적이고 우주적이며, 교회의 모든 행위들도 그러하니, 교회가 행하는 모든 일들은 누구에게나 귀속되기 때문이다. 교회가 아이에게 세례를 베풀 때 그 행위는 나와 연결되는 것이다. 그 아이는 세례를 통해 나의 머리이신 그분의 머리에 연결되며, 내가 지체를 이루고 있는 그분의 몸에 접목되기 때문이다.” 존 던의 [누구를 위하여 종을 울리나] 중에서
시인이 표현한 대로 교회가 보편적이라면, 교회에 소속된 우리의 모든 행위도 보편성을 띨 수 있습니다. 존 던은 교회의 종소리가 아프거나 임종한 사람을 위해 울리는 소리가 아니라, 모든 보편 사람에게, 특히 그 소리를 듣는 각 개인에게 울려 퍼지는 소리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연대감이 우리에게 있다는 것은 성령께서 우리와 함께하신다는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한 형제가 아픈 것은 모든 몸이 아픈 것이고, 한 형제가 행복한 것은 모든 교회의 기쁨이 됩니다. 이는 교회는 단지 개개인이 모인 신앙의 집합체가 아니라, 서로 긴밀하게 연결된 하나의 생명 유기체로서의 교회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즉 다양한 인격들이 모여 공동의 인격을 만드는 인격체로서의 교회 말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이는 결코 나뉠 수 없는 하나의 유기체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 교회가 이러한 연대감과 일치성을 상실하여 제각각의 소리를 내는 것을 보면 참으로 안타까운 마음뿐입니다. 신앙의 색깔과 형식이 달라도 가르침의 내용은 같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어떻게 그리스도의 가르침이 이렇게 여러 갈래로 나뉘어졌는지 모르겠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는 것도 모자라 그분을 부관참시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하나의 사안에 이렇게 다른 관점과 다른 정의를 주장한다는 것은 정의가 문제가 아니라 우리 자신들에게 문제가 있음이 분명합니다. 이는 우리의 지체들이 병이 들어 우리의 일치가,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일치가 깨진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같은 성령을 받아 마셨습니다”라는 고린토전서 12장 13절의 표현은 우리가 한 분 하느님으로부터 세례를 받았다는 뜻입니다. 우리의 세례가 다르지 않다면 왜 이런 분열이 있는 것입니까?
“주님의 성령이 나에게 내리셨다. 주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으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셨다. 주께서 나를 보내시어 묶인 사람들에게는 해방을 알려주고 눈먼 사람들은 보게 하고, 억눌린 사람들에게는 자유를 주며 주님의 은총의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 “루가 4:18-19
이는 이사야서 61장 1~2절 말씀을 루가복음이 인용한 부분입니다. 여기에서 오늘날 우리 그리스도교가 바라보는 지향점에 커다란 차이점이 발견됩니다. 주님께서 성령을 받으시고 복음을 전파하신 궁극적 목적이 이 말씀에서 분명해집니다. 주님의 복음의 대상이 다음과 같이 특정됩니다. “가난한 이들”, “묶인 사람들”, “눈먼 사람들” 그리고 “억눌린 사람들” 말입니다. 이는 한마디로, 히브리어로 “아나윔(עֲנִיִּים)”이라 부를 수 있습니다. “아나윔”은 물질적으로 가난한 자들뿐만 아니라, 어떤 이유에서든 불행한 소외자들을 뜻하는 말입니다. 이는 권력을 가진 사람들, 부자와 권위를 가진 사람들, 엘리트 계층과는 전혀 거리가 먼 사람들입니다. 한 마디로 예수님 시대에 권력과 신분, 사회 안전망으로부터 소외된 모든 “가난한 사람들, 즉 아나윔”이 복음의 대상이라는 뜻입니다. “아나윔”은 늘 듣는 위치의 사람을 뜻합니다. 그러니 요즘 말로 하면 “갑”에 대한 “을”을 뜻합니다. 그러나 이들에게 선포된 주님의 복음은 물질적 풍요뿐만 아니라 하느님의 축복까지 포함된 복음입니다. 복음으로 말미암아 세상의 신분과 가치가 전복된다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이것이 이루어지는 때가 바로 이사야가 예언한 “주님의 은총의 해”입니다. 이는 메시아로 오신 예수의 선포로 시작해서 그분의 십자가를 거쳐 마지막에 완성될 하느님의 나라입니다. 구약의 최대 가치가 바로 “억눌린 자들의 해방”이듯이 이제 예수님의 복음은 모든 가난한 자들, 억압받는 자들의 자유와 해방을 선포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가난하고 힘없는 자들을 억압하려는 세력을 두둔하는 현재의 유사 그리스도교 목사들의 일부 주장은 전혀 터무니없는 주장이 아닐 수 없습니다. 자신의 안위를 위해 계엄을 선포하여 국민을 억압하려 했던 사람들을 옹호하는 지금의 억지 주장들은 절대로 하느님으로부터 온 것이 아닙니다. 거짓과 혐오와 폭력이 난무한 이러한 상황은 결코 하느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어떠한 상황 가운데서도 절대로 폭력은 용납될 수 없습니다. 그것은 어떤 가치를 지키는 것이 최선의 과제인 보수의 가치를 스스로 부인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도 잡히시던 날 밤에 전혀 폭력을 허락하시지 않으셨습니다. 폭력은 또 다른 폭력을 불러오게 마련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국민을 오도하고 정의를 어지럽히며 국민을 폭도가 되도록 선동하는 외침은 반드시 정죄받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런 선동에 현혹된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다시 돌아와 회개해야 합니다. 그들의 선동과 거짓 외침은 단순히 정치적인 것도 아니고 헌법이 보장한 국민의 자유로운 의사 표현도 아니며 “3.1 운동”이나 “광주 민주 항쟁”처럼 “국민의 저항 정신”도 아닙니다. 폭력이란 그릇에 담긴 어떠한 메시지도 정당화해서는 안 됩니다. 법원을 난입하여 사법 체계를 뒤흔든 행위는 12.3 계엄 내란보다 더 심각한 제2의 내란이며 절대로 용서받을 수 없는 민주주의와 법치주의에 대한 도전입니다. 이는 하느님의 가르침을 정면으로 반하는 짓이고, 자신들이 지키고자 했던 보수의 가치를 스스로 부정하는 행위입니다. 많은 그리스도인이 이런 일에 동참했고, 그리고 심지어 교회의 전도사라는 사람이 주동자라는 뉴스를 접하며 마음이 찢어질 듯 아픕니다. 반공 이데올로기에 사로잡혀 죽창을 들고 제주도민들을 살육했던 사람들 또한 바로 영락교회 청년회가 근간이 된 “서북청년단”이었다는 사실. 그러한 역사를 지닌 제주도의 도민으로서 법원 난입 사건은 결코 사사로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하느님께 기도하는 손으로 소화기를 들고 법원의 문을 부수는 한 청년의 모습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자비와 사랑이 없는 곳에는 성령이 없습니다. 폭력과 혐오와 광란이 넘치는 곳에는 성령이 없습니다. 분열과 갈등, 미움이 넘치는 곳에는 성령이 없습니다. 그러니 교회가 성령이 없는 껍데기만 남게 된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교가 대한민국의 현대사에서 가장 악한 영향을 끼쳤다는 사실에 우리는 부끄러움과 수치를 느껴야 합니다. “서북청년단”이나 이번 법원 난입 사태의 교회 청년들이나 모두 남이 아니라 우리 그리스도교의 한 지체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잘못한 것은 우리도 잘못한 것입니다. 이는 양비론이 아니라 우리 그리스도인 하나하나가 곧 그리스도의 몸이기 때문입니다. 손이 발이 아니라 해서 발이 아프다고 잘라버리겠습니까? 아프고 잘못된 부분일수록 어루만지고 사랑으로 치료해야 하는 것입니다. 지금으로부터 500년 전 교회개혁의 대상은 로마가톨릭이었지만, 이제 이 시대에 개혁의 대상은 개신교가 되었습니다. 로마가톨릭은 1962년부터 1965년까지 제2차 바티칸공의회를 통해 과거 마르틴 루터가 주장했던 개혁을 대부분 수용했습니다. 로마가톨릭이 개혁되는 데 500년이 걸린 셈입니다. 형제 교회로서 그들의 노력에 감사할 뿐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한국 개신교는 루터가 봤던 로마가톨릭보다 더 나락으로 떨어지고 있습니다. 아마도 루터가 현재의 개신교를 보면 가슴을 치고 개탄할 것입니다. 자신들이 개혁할 대상이라고 전혀 생각 못 하는 안하무인의 지경에 빠져있습니다. 샤머니즘적 축복과 자본주의적 욕망이 교묘하게 결합되어 한국의 개신교는 이제 악마의 처소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자기반성이 없는 종교는 더 이상 사회적 선 기능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 “서북청년단” 사건에 대해 개신교는 아무도 우리 역사에 사죄하지 않았고, 제주 도민과 4.3 유족들에게 사과하지 않았습니다. 고립과 독선 그리고 아집으로 뭉친 사이비 집단으로 변절해 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것을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적이 없습니다. 그러한 일을 하라고 성령께서 오시지 않으셨습니다. 그러한 일을 하라고 교회를 이 땅에 세우신 것도 아닙니다. 교회의 각 지체가 병이 든 것입니다. 그러니 그리스도의 몸이 몸살을 앓고 계십니다.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교회가 보편성을 가지고 있다면 우리 교회의 모든 예식과 행위들도 보편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시대에 책임감 있는 모습으로 우리 교회의 보편성을 다시 회복해야 할 사명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아픈 지체를 감싸고 치유하는 일이 먼저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끊임없이 각 교파 간에 대화를 계속해야 하며 토론의 장에서 서로의 의견에 경청해야 합니다. 개신교의 잘못은 곧 우리의 잘못이고 함께 책임을 통감하며 기도해야 합니다. 단순한 비난이 아니라 안타까운 기도가 어느 때보다 필요한 때입니다. 개신교 몇몇 교회의 일탈로 간단히 치부하기에 사태의 심각성이 너무나 큽니다.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우리는 공동의 책임을 느끼며 함께 기도하고 작금의 사태에 대해 예의주시해야 합니다. 우리는 성공회 교회라고 모른 척할 수 없습니다. 보편 교회는 바로 주님의 몸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몸의 각 지체입니다. 우리의 보편성은 바로 여기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전례독서_연중3주일 (다해)
본기도
생명을 주시는 하느님,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크신 권능으로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하셨나이다. 비오니, 우리도 성령의 인도를 따라 어둠 속에 사는 모든 이들에게 이 은총의 복음을 전하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한 분 하느님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나이다. 아멘.
1독서_느헤 8:1-3, 5-6, 8-10
1 이스라엘 백성은 각기 저희의 성읍에서 살고 있다가 칠월이 되자, 일제히 수문 앞 광장에 모여와서 선비 에즈라에게 청하였다. “야훼께서 이스라엘에게 내려주신 모세의 법전을 가지고 오십시오.” 2 사제 에즈라는 그 법전을 가지고 회중 앞에 나타났다. 그 자리에는 남자와 여자, 아이들에 이르기까지 말귀를 알아들을 만한 사람은 모두 모여 있었다. 때는 칠월 초하루였다. 3 그는 수문 앞 광장에 나타나 해 뜰녘부터 해가 중천에 이르기까지 남녀를 가리지 않고 셈든 사람들에게 그것을 들려주었고 온 백성은 그 법전을 귀담아들었다.… 5 에즈라가 모두 쳐다볼 수 있도록 높은 자리에서 책을 펴들자 온 백성은 일어섰다. 6 에즈라가 높으신 하느님 야훼를 칭송하자 온 백성도 손을 쳐들고 “아멘.” “아멘.” 하고 응답하며 무릎을 꿇고 땅에 엎드려 야훼를 예배하였다. … 8 에즈라는 백성들이 알아듣고 깨칠 수 있도록 하느님의 법전을 읽으며 풀이하여 주었다.
9 온 백성은 법전에 기록되어 있는 말 한 마디 한 마디를 들으면서 울었다. 그래서 총독 느헤미야와 선비요 사제인 에즈라와 백성을 가르치던 레위인들이 온 백성에게 일렀다. “이 날은 너희 하느님 야훼께 바친 거룩한 날이니 울며 애통하지 마라.” 10 그리고 그는 이렇게 일러주었다. “가서 잔치를 차려 배불리 먹고 마셔라. 미처 마련하지 못한 사람이 있거든 그런 사람도 빼놓지 말고 몫몫이 보내주도록 하여라. 이 날은 우리 주님의 날로 거룩하게 지킬 날이니 슬퍼하지 마라. 야훼 앞에서 기뻐하면, 너희를 지켜주시리라.[A]”
[A] “야훼께서 지켜주시니 너희는 기뻐하여라.”라고 번역할 수도 있습니다.
성시_시편 19
1 하늘은
⋅ 하느님의 영광을 속삭이고 ◯
. 창공은
⋅ 그 훌륭한 솜씨를 일러줍니다.
2 낮은 낮에게 그 말을 전하고 ◯
. 밤은 밤에게 그 일을 알려줍니다.
3 그 이야기도 그 말소리도 ◯
. 비록 들리지 않아도
4 그 소리 구석구석 울려 퍼지고 ◯
. 온 세상 땅 끝까지 번져 갑니다.
5 해를 위하여 하늘에 장막을 쳐주시니,
. 마치 해는 신방에서 나오는 신랑과 같이 ◯
. 신나게 치닫는 용사와 같이,
6 하늘 이 끝에서 나와
⋅ 하늘 저 끝으로 돌아가고 ◯
. 그 뜨거움을 벗어날 자 없습니다.
7 주님의 법은 완전하여,
⋅ 사람에게 생기를 돌려주고 ◯
. 주님의 법도는 변함 없어
⋅ 어리석은 자도 깨우쳐준다.
8 주님의 분부는 그릇됨이 없어
⋅ 사람의 마음을 즐겁게 하고 ◯
. 주님의 법은 맑아서
⋅ 사람의 눈을 밝혀준다.
9 주님의 말씀은 순수하여
⋅ 영원토록 흔들리지 아니하고 ◯
. 주님의 법령은 참되어
⋅ 옳지 않은 것이 없다.
10 금보다, 순금덩이보다 더 좋고 ◯
. 꿀보다, 송이 꿀보다 더욱 달다.
11 당신 종이 그 말씀으로 깨우침 받고 ◯
. 그대로 살면 후한 상을 받겠거늘,
12 뉘 있어 제 허물을 다 알리이까? ◯
. 모르고 짓는 죄일랑 말끔히 씻어주소서.
13 일부러 죄 지을세라 이 몸 막아주시고 ◯
. 죄의 손아귀에 잡힐까 날 지켜주소서.
. 그제야 이 몸은 대역죄 씻고 ◯
. 온전히 깨끗하게 되리이다.
14 내 바위요, 내 구원자이신 주여, ◯
. 내 생각과 내 말이 언제나
⋅ 당신 마음에 들게 하소서.
⦿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
. 처음과 같이 지금도 그리고 영원히, 아멘.
2독서_1고린 12:12-31상
12 몸은 하나이지만 많은 지체를 가지고 있고 몸에 딸린 지체는 많지만 그 모두가 한 몸을 이루는 것처럼 그리스도의 몸도 그러합니다. 13 유다인이든 그리스인이든 종이든 자유인이든 우리는 모두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같은 성령을 받아 마셨습니다. 14 몸은 한 지체로 된 것이 아니라 많은 지체로 되어 있습니다. 15 발이 “나는 손이 아니니까 몸에 딸리지 않았다.” 하고 말한다 해서 발이 몸의 한 부분이 아니겠습니까? 16 또 귀가 “나는 눈이 아니니까 몸에 딸리지 않았다.” 하고 말한다 해서 귀가 몸의 한 부분이 아니겠습니까? 17 만일 온몸이 다 눈이라면 어떻게 들을 수 있겠습니까? 또 온몸이 다 귀라면 어떻게 냄새를 맡을 수 있겠습니까? 18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뜻대로 각각 다른 기능을 가진 여러 지체를 우리의 몸에 두셨습니다. 19 모든 지체가 다 같은 것이라면 어떻게 몸을 이룰 수 있겠습니까? 20 그래서 한 몸에 많은 지체가 있는 것입니다. 21 눈이 손더러 “너는 나에게 소용이 없다.” 하고 말할 수도 없고 머리가 발더러 “너는 나에게 소용이 없다.” 하고 말할 수도 없습니다. 22 그뿐만 아니라 몸 가운데서 다른 것들보다 약하다고 여겨지는 부분이 오히려 더 요긴합니다. 23 우리는 몸 가운데서 별로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 부분을 더욱 조심스럽게 감싸고 또 보기 흉한 부분을 더 보기 좋게 꾸밉니다. 24 그러나 보기 좋은 지체들에게는 그렇게 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렇게 하느님께서도 변변치 못한 부분을 더 귀중하게 여겨주셔서 몸의 조화를 이루게 해주셨습니다. 25 이것은 몸 안에 분열이 생기지 않고 모든 지체가 서로 도와 나가도록 하시려는 것입니다. 26 한 지체가 고통을 당하면 다른 모든 지체도 함께 아파하지 않겠습니까? 또 한 지체가 영광스럽게 되면 다른 모든 지체도 함께 기뻐하지 않겠습니까?
27 여러분은 다 함께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고 있으며 한 사람 한 사람은 그 지체가 되어 있습니다. 28 하느님께서는 교회 안에 다음과 같은 직책을 두셨습 니다. 첫째는 사도요 둘째는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 전하는 사람이요 셋째는 가르치는 사람이요 다음은 기적을 행하는 사람이요 또 그 다음은 병 고치는 능력을 받은 사람, 남을 도와주는 사람, 지도하는 사람, 이상한 언어를 말하는 사람 등입니다. 29 모두가 다 사도일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모두가 다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 전하는 사람일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모두가 다 가르치는 사람일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모두가 다 기적을 행할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30 모두가 다 병 고치는 능력을 받을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모두가 다 이상한 언어를 말할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모두가 다 해석하는 사람일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31 여러분은 더 큰 은총의 선물을 간절히 구하십시오.
복음서_루가 4:14-21
14 예수께서는 성령의 능력을 가득히 받고 갈릴래아로 돌아가셨다. 예수의 소문은 그 곳 모든 지방에 두루 퍼졌다. 15 예수께서는 여러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모든 사람에게 칭찬을 받으셨다.
16 예수께서는 자기가 자라난 나자렛에 가셔서 안식일이 되자 늘 하시던 대로 회당에 들어가셨다. 그리고 성서를 읽으시려고 일어서서 17 이사야 예언서의 두루마리를 받아 들고 이러한 말씀이 적혀 있는 대목을 펴서 읽으셨다.
18“주님의 성령이 나에게 내리셨다.
. 주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으시어
.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셨다.
. 주께서 나를 보내시어
. 묶인 사람들에게는 해방을 알려주고
. 눈먼 사람들은 보게 하고,
. 억눌린 사람들에게는 자유를 주며
19 주님의 은총의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
. 칠십인역 이사 61:1-2(58:6 참조)
20 예수께서 두루마리를 말아서 시중들던 사람에게 되돌려주고 자리에 앉으시자 회당에 모였던 사람들의 눈이 모두 예수에게 쏠렸다. 21 예수께서는 “이 성서의 말씀이 오늘 너희가 들은 이 자리에서 이루어졌다.” 하고 말씀하셨다.
'글모음 > 설교문' 카테고리의 다른 글
“영적인 것들”_2025.1.19. 다해_연중2주일_설교문 (0) | 2025.01.19 |
---|---|
“두 번째 탄생, 두 번째 실존”_ 2025.1.12. 다해_주님의 세례 축일(연중1주일) (0) | 2025.01.12 |
“창발(emergance)과 에피파니”_2025.1.5. 다해_공현대축일(성탄2주일) (0) | 2025.01.05 |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_2025.1.1. 다해_거룩한 이름 예수 축일 (0) | 2025.01.02 |
“영적 성장-소년 예수”_2024.12.29. 다해_성탄1주일 (0) | 2024.12.2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