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4.6. 다해_사순5주일
이사 43:16-21 / 시편 126 / 필립 3:4하-14 / 요한 12:1-8
“비애의 눈물”
채야고보 신부 / 대한성공회 제주우정교회, Artist
옛날 이스라엘은 식사 전에 손님에게 물과 기름을 주든지 아니면 종을 시켜 손님의 발을 씻기고 기름을 발라주는 관습이 있었다고 합니다. 이러한 배경을 가진 “도유사화”는 복음서들이 각각 다르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전승에 의하면 도유사화는 두 가지 버전으로 전승된 것 같습니다. 하나는 마르코의 것이고, 다른 하나는 루가의 것입니다. 마르코의 전승은 예수의 수난과 이 이야기를 연결한 것이고, 루가의 전승은 회개와 죄 사함을 이 이야기와 연결한 것입니다. 혼합형은 오늘 읽은 요한복음에서 볼 수 있습니다. 가장 먼저 기록된 마르코복음은 “어떤 여자”가 예수의 “머리”에 향유를 부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마르코 복음을 참고한 마태오도 “머리”에 향유를 부었다고 기록했습니다. 그러나 루가의 전승은 완전히 다릅니다. “눈물로 발을 적시고, 예수님의 발에 입 맞추고, 향유를 발랐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학자들은 역사적으로 마르코 전승이 더 신빙성이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두 전승을 혼합한 요한복음은 향유를 바른 여인의 이름이 “마리아”였다고 기록함으로써 “어떤 여인”의 신원을 구체적으로 밝히고 있습니다. 그리고 도유사화의 의미를 가장 명확하게 드러내고 있습니다. 도유사화는 예수의 수난의 전조로 요한은 해석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자신의 장례를 준비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물론 네 가지 버전 중에 루가의 것이 가장 감동적인데, 루가는 이 이야기에서 죄 많은 여인의 회개의 모습을 부각시킴으로서 좀 더 시각적이면서 드라마틱 장면을 연출합니다.
“향유 한 리트라”는 약 330그램입니다. 나르드 향유는 인도산인데 나르드 나무뿌리에서 채취한 것으로 왕들이 사용하는 매우 귀한 향유입니다. 유다 이스가리옷이 이 값어치를 삼백 데나리온이라 한 것을 보면 그 가치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한 데나리온은 노동자 1일 품삯입니다. 노동자의 약 1년 치 품삯의 가치가 있다는 것이니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엄두도 못 낼 값진 것이었습니다. 실리를 따지고 합리적인 것을 따지는 사람들에게는 이것이 분명 사치로 보였을 겁니다. 요한은 유다가 가난한 사람을 핑계 삼아 자신의 의견을 말했다고 기록합니다. 실제로 그가 도둑이라고까지 밝히며 그를 부정적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예수의 수난과 죽음을 아직 인지하지 못한 제자들 대부분도 유다와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문맥상으로 마리아가 예수의 죽음을 먼저 인지하고 그런 행위를 했는지는 잘 알 수 없지만, 그녀의 행위를 주님께서는 자신의 수난과 죽음을 준비하는 행위로 의미를 부여하십니다. 사람들의 생각을 완전히 전복시키는 주님의 해석이었습니다. 이 이야기 이후에 요한은 라자로를 죽일 음모를 유대인들이 꾸몄다는 이야기로 예수의 수난을 암시하며, 곧바로 예루살렘 입성 이야기를 기록합니다. 편집상 적절한 위치에 도유사화를 배치한 것입니다.
이러한 신학적 진술들을 참고는 하되, 그것에 얽매이지 않는다면 우리는 이 이야기에서 더욱 풍성한 상상력의 지평을 넓힐 수 있습니다. 저는 이 이야기를 슬픔에 빠진 한 여인의 진솔한 고백으로 묵상합니다. 성 베네딕토회 수사 사제 안셀름 그륀은 슬픔을 두 가지로 나눠 설명한 바 있습니다. “비애(πένθος, 펜토스)”와 “슬픔(λύπη, 루페)”가 그것입니다. 둘 다 슬픔과 고통을 표현하는 헬라어인데, 그 의미와 사용되는 맥락은 다릅니다. “비애, 펜토스”는 깊고 지속적인 슬픔을 의미하는 단어로, 보통 사랑하는 사람을 잃었거나 큰 상실을 경험했을 때 느끼는 감정을 표현합니다. 이는 외적인 슬픈 감정뿐만 아니라, 내적인 고통과 비애도 담고 있습니다. 이것은 그 감정의 깊이와 지속성에 초점이 맞춰 있습니다. 이에 반해 “슬픔, 루페”는 일반적으로 슬픔, 고통, 불쾌감을 의미하는 좀 더 넓은 범위의 감정을 표현하는 데 사용됩니다. 물론 슬픔을 포함하는 감정이지만, 가벼운 형태의 불쾌감이나 고통을 표현할 때도 사용되며, 감정의 깊은 곳을 드러내기보다는 현재의 불편하고 고통스러운 상태에 초점이 맞춰있습니다. 일시적인 감정인 것이지요. “비애는 눈물을 터뜨리는 것이지만, 슬픔은 그저 울먹이는 것”(폰토스의 에바그리우스)이라는 표현이 이 둘의 차이를 잘 설명해 주는 말입니다.
이런 차원에서 오늘 예수님의 발을 향유로 씻긴 여인은 “비애”로 가득 찬 여인이라 할 수 있습니다. 향유를 머리에 붓든, 아니면 발을 씻기든 이 여인의 행위에는 큰 “비애”가 느껴집니다. 그녀의 비애는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오직 주님만을 바라보게 만듭니다. 누구의 말처럼 “하늘은 벼랑 끝에서 더 잘 보이는 법”입니다. 그녀를 비애에 빠지게 한 것이 무엇인지 우리는 잘 모르지만, 유일하게 루가만 그녀를 “죄인으로 소문난 여자”라고 명시함으로써, 그녀의 신분을 짐작할 실마리를 제공합니다. “많이 용서받은 사람이 더 많이 감사하는 법”입니다. 그래서 루가는 그녀가 눈물로 발을 적시고, 자기 머리카락으로 예수님의 발을 닦고, 그 발에 입맞춤도 하고, 향유도 부었다고 기록한 것입니다. 물론 요한은 이를 절충하여 루가복음보다는 점잖게 표현했지만, “머리카락으로 발을 닦아 드렸다”라는 요한의 표현에서도 루가복음의 눈물과 비애를 느낄 수 있습니다. 머리카락을 드리우며 예수님의 발을 닦는 여인의 눈에 눈물이 없을 수가 없습니다. 그것은 가장 낮은 자세로 가장 귀한 분의 발을 씻기는 겸손의 행위이며 비애의 표현이기 때문입니다. 아무도 눈물 없이 그러한 행동을 할 수 없습니다. 슬픔이 아니라 비애에 빠진 가난하고 찢긴 마음의 소유자만이 그러한 겸손의 행위를 할 수 있는 법입니다. 그녀의 눈물에는 그녀의 비애가 담겨 있고, 그녀의 죄와 죄 사함에 대한 다양한 감정들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루가는 그녀의 비애를 표현하는 단어로 “클레오 κλαίω”라는 동사를 사용합니다. 실제로 그녀는 흐느껴 운 것입니다. 남들의 시선이나 부끄러움은 아랑곳하지 않습니다. 자신을 억누르고 억압했던 모든 슬픈 감정이 이 한순간 모두 쏟아져 나온 것입니다. 남에게 천대받고 죄인이라 손가락질을 당해도 울 수없는 “비애”의 상태에 그녀는 놓여 있었습니다. 울고 싶어도 울 수 없는 먹먹한 우울의 상태. 그녀는 예수님을 만나기 전까지 소리 내어 울어본 적이 없습니다. 자신의 처지를 받아들이고 묵묵히 고통과 슬픔을 감내하며 살아왔습니다. 그런 그녀가 예수를 만나고 드디어 언덕 절벽 끝에서 하늘을 바라볼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더 이상 뒤로도 앞으로도 나아갈 수 없는 절체절명의 순간, 그녀는 자신의 슬픔을 내어놓고 목 놓아 울 곳을 찾았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따뜻한 발이었습니다. 그녀는 감히 그분을 바로 볼 자신이 없어 그저 그분의 발만 부여잡고 소리 내어 울었습니다. 그 눈물이 주님의 발을 적실 때 주님께서는 그녀의 비애를 느끼시고 가만히 그녀를 내버려두었습니다. 그 순간 그녀의 비애와 예수님의 비애가 상호 교감을 이룹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예수께서는 그녀의 비애를 통해 그동안 제자들에게 숨겨왔던 자신의 비애를 드러내십니다. 그녀의 행위가 바로 자신의 장례를 준비하는 것이라고. 그래서 도유사화는 여인의 비애를 표현하는 것뿐만 아니라, 동시에 예수님의 죽음에 대한 예고이면서 예수님의 비애의 표현입니다. 주님께서는 그녀의 비애에 자신의 비애를 투영하십니다. “악어의 눈물”이라는 말도 있지만, 그래도 눈물에는 어느 정도 진실이 포함되게 마련입니다. 단순히 눈물샘을 자극하는 신경의 반응과 화학적 작용이 눈물을 설명하는 전부가 아니라면, 눈물은 분명 어떤 감정의 진실을 내포하고 있음은 틀림없습니다.
눈물이 터져 나오는 비애는 우리가 자신을 정면으로 대면하는 순간을 맞이하게 합니다. 비애 속에서 우리를 덧씌웠던 모든 껍데기들이 벗겨집니다. 사실 자신의 가장 내밀한 속살을 있는 그대로 마주 대하는 것만큼 고통스러운 것도 없습니다. 자신을 가린 모든 껍데기들과 가면들이 벗겨지면, 하느님 앞에 단독자로 선 한 외로운 인간을 마주하게 됩니다. 그것이 우리 자신입니다. 그렇게 되면 자기 자신을 무장했던 모든 무장이 해제되고 있는 그대로의 “나”를 하느님 앞에서 보게 됩니다. 벌거벗은 있는 그대로의 자기 말입니다. 이러한 순간을 주님께서도 십자가 위에서 똑같이 경험하셨습니다. 십자가 처형 때 죄수는 모두 옷이 벌거벗겨집니다. 십자가 위에는 한 가련한 죄인의 육체가 마치 고깃덩어리처럼 걸쳐지게 마련입니다. 그래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의 내면 깊은 곳에서 자기 자신을 만나는 동시에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 또한 그 비애의 자리에서 마주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때 우리의 비애와 그분의 비애가 조우하는 순간이 옵니다. 그러나 그러한 조우는 먼저 우리의 자아가 완전히 벌거벗겨지기 전에는 절대로 찾아오지 않습니다. 오늘 마리아는 그러한 순간을 주님 앞에서 경험한 것입니다. 그런 사람에게는 눈물도, 지위도, 돈도, 소유도, 친구도 아무런 위안이 되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서는 그러한 비애감이 모든 것을 삼켜버립니다. 십자가가 세워진 그 언덕 위에서만 우리는 진정한 하늘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 주님의 가장 비애에 찬 목소리는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였습니다. 그것은 비애에 찬 한 인간의 절규였습니다. 마리아는 정말 그러한 주님의 죽음을 환상으로 본 것일까요?
눈물은 모든 억압을 풀어줍니다. 우리의 내면과 우리를 둘러싼 모든 환경, 우리를 옥죄는 모든 결박으로부터 부르짖는 비애는 우리를 하느님께로 향하게 합니다. 우리가 눈물을 쏟을 곳은 마리아의 눈물이 떨어졌던 바로 그 자리, 주님의 발입니다. 굵은 못이 박히게 될 그분의 연약한 발등 말입니다. 이것이 기도에 대한 메타포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기도는 우리가 하느님께 무언가를 청탁하는 것이 아닙니다. 슬픔 가운데 기도한다고 모든 응답이 이루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한 청탁을 생각한다면 우리의 기도는 끊임없이 좌절을 맛보게 될 것입니다. 기도는 우리를 슬픔에서 건져주지 못합니다. 그러나 기도는 그 혼란스러움과 두려움에서 우리가 판단력을 잃지 않도록 보호해 줍니다. 기도는 우리를 모든 고통에서 자유롭게 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기도는 그러한 고통 속에서 우리가 의지할 곳이 무엇인지 알려줍니다. 그것은 십자가에 달릴 그분의 발등입니다. 그래서 마리아는 하염없는 눈물을 흘렸고 그분의 발을 눈물로 적셨습니다. 그 눈물이 바로 기도임은 두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향유는 주님의 은총에 대한 그녀의 감사의 표현이었고 주님의 비애에 대한 애도와 공감이었습니다. 찢어진 가슴은 바로 이러한 비애 속에 있는 사람의 가슴입니다. 이렇게 비애 속에서 씨를 뿌리는 자는 반드시 기쁨으로 곡식을 거둬들일 날이 있을 겁니다. “곡식단을 안고서 노랫소리 흥겹게 들어오리라”는 시편의 말씀을 위안 삼으며, 이 사순절, 우리의 비애와 눈물을 그분께 올려드립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전례독서_사순5주 (다해)
본기도
주 예수 그리스도여, 값비싼 향유를 아낌없이 드리어 주님의 수난을 예비한 여인을 칭찬하셨나이다. 비오니, 우리도 모든 것을 봉헌하여 십자가의 길을 따라가게 하소서. 성자께서는 성부와 성령과 함께 영원히 사시며 다스리시나이다. 아멘.
1독서_이사 43:16-21
16 야훼께서 말씀하신다.
. 바다에 큰 길을 내시고
. 거센 물길을 뚫고 한길을 내신 이,
17 그들을 다시는 일어나지 못하게 거꾸러뜨리시고,
. 꺼진 심지처럼 사그라뜨리시려고
. 병거와 기마를 출동시키시고
. 군대와 용사를 출동시키신
. 야훼께서 말씀하신다.
18“지나간 일을 생각하지 마라.
. 흘러간 일에 마음을 묶어두지 마라.
19 보아라, 내가 이제 새 일을 시작하였다.
. 이미 싹이 돋았는데 그것이 보이지 않느냐?
. 내가 사막에 큰 길을 내리라.
. 광야에 한길들을 트리라.
20 사막에 물을 대어주고
. 광야에 물줄기를 끌어들이리니,
. 뽑아 세운 내 백성이 양껏 마시고
. 승냥이와 타조 같은 들짐승들이 나를 공경하리라.
21 내가 친히 손으로 빚은 나의 백성이
. 나를 찬양하고 기리리라.
성시_시편 126
1 주께서 시온의 포로들을 풀어 주시던 날, ◯
. 꿈이든가 생시든가!
2 그 날 우리의 입에서는 함박 같은 웃음 터지고 ◯
. 흥겨운 노랫가락 입술에 흘렀도다.
¶ 그 날 이교 백성 가운데서 들려오는 말소리, ◯
. “놀라와라, 주께서 저 사람들에게 하신 일들!”
3 주께서 우리에게 놀라운 일 하셨으니 ◯
. 우리는 얼마나 기뻤던가.
4 주여, 저 네겝 강바닥에 물길 돌아오듯이 ◯
. 우리의 포로들을 다시 데려 오소서.
5 눈물을 흘리며 씨뿌리는 자, ◯
. 기뻐하며 거두어들이리라.
6 씨를 담아 들고 울며 나가는 자, ◯
. 곡식단을 안고서 노랫소리 흥겹게 들어오리라.
⦿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
. 처음과 같이 지금도 그리고 영원히, 아멘.
2독서_필립 3:4하-14
4 … 만일 어떤 사람이 세속적인 것을 가지고 자랑하려 든다면 나에게는 자랑할 만한 것이 더 많습니다. 5 나는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서도 베냐민 지파에서 태어났으며 난 지 여드레 만에 할례를 받았고 히브리 사람 중의 히브리 사람입니다. 나는 율법으로 말하면 바리사이파 사람이며 6 열성으로 말하면 교회를 박해하던 사람입니다. 율법을 지킴으로써 올바른 사람으로 인정을 받는다면 나는 조금도 흠이 없는 사람입니다. 7 그러나 나에게 유익했던 이런 것들을 나는 그리스도를 위해서 장해물로 여겼습니다. 8 그뿐만 아니라 나에게는 모든 것이 다 장해물로 생각됩니다. 나에게는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무엇보다도 존귀합니다. 나는 그리스도를 위해서 모든 것을 잃었고 그것들을 모두 쓰레기로 여기고 있습니다. 그것은 내가 그리스도를 얻고 9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려는 것입니다. 내가 율법을 지킴으로써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얻는 것이 아니라 내가 그리스도를 믿을 때 내 믿음을 보시고 하느님께서 나를 당신과의 올바른 관계에 놓아주시는 것입니다. 10 내가 바라는 것은 그리스도를 알고 그리스도의 부활의 능력을 깨닫고 그리스도와 고난을 같이 나누고 그리스도와 같이 죽는 것입니다.
11 그러다가 마침내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기를 바랍니다.
12 나는 이 희망을 이미 이루었다는 것도 아니고 또 이미 완전한 사람이 되었다는 것도 아닙니다. 다만 나는 그것을 붙들려고 달음질칠 뿐입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나를 붙드신 목적이 바로 이것입니다. 13 형제 여러분, 나는 그것을 이미 붙들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다만 나는 내 뒤에 있는 것을 잊고 앞에 있는 것만 바라보면서 14 목표를 향하여 달려갈 뿐입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 예수를 통하여 나를 부르셔서 높은 곳에 살게 하십니다. 그것이 나의 목표이며 내가 바라는 상입니다.
복음서_요한 12:1-8
1 예수께서는 과월절을 엿새 앞두고 베다니아로 가셨는데 그 곳은 예수께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살리신 라자로가 사는 고장이었다. 2 거기에서 예수를 영접하는 만찬회가 베풀어졌는데 라자로는 손님들 사이에 끼여 예수와 함께 식탁에 앉아 있었고 마르타는 시중을 들고 있었다. 3 그 때 마리아가 매우 값진 순 나르드 향유 한 근을 가지고 와서 예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그 발을 닦아드렸다. 그러자 온 집안에 향유 냄새가 가득 찼다. 4 예수의 제자로서 장차 예수를 배반할 가리옷 사람 유다가 5 “이 향유를 팔았더라면 삼백 데나리온은 받았을 것이고 그 돈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줄 수 있었을 터인데 이게 무슨 짓인가?” 하고 투덜거렸다. 6 유다는 가난한 사람들을 생각해서가 아니라 그가 도둑이어서 이런 말을 한 것이었다. 그는 돈주머니를 맡아가지고 거기 들어 있는 것을 늘 꺼내 쓰곤 하였다. 7 예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것은 내 장례일을 위하여 하는 일이니 이 여자 일에 참견하지 마라. 8 가난한 사람들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지만 나는 언제나 함께 있지는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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