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5.3.23. 다해_사순3주일
이사 55:1-9 / 시편 63:1-8 / 1고린 10:1-13 / 루가 13:1-9
“죄와 회개”
채야고보 신부 / 대한성공회 제주우정교회, Artist
성서의 처음에 나오는 창세기는 하느님의 창조이야기로 시작해서 인간의 타락에 대한 이야기로 곧바로 이어집니다. 아담과 하와의 배신으로 비롯된 “에덴을 잃은 경험”은 모든 인간 관계의 단절에 대한 메타포입니다.
모든 관계에는 상호 신뢰가 전제됩니다. 모든 인간의 관계가 성문화된 계약은 아니지만 일종의 계약처럼 구속력을 가집니다. 부모는 본능적으로 자신의 자식을 돌볼 의무를 느낍니다. 이는 누가 가르쳐준 것이 아니라 경험을 통해 또는 인간 안에 선재해 있는 본능으로 압니다. 자녀도 나면서부터 부모를 의지합니다. 때론 너무 이기적일 정도로 부모의 관심과 사랑을 자신에게 집중시킵니다. 물론 성장하면서 그 의존성이 사회적 관계성 속에서 친구나 선생님으로 변화될 뿐 여전히 신뢰를 바탕으로한 관계성은 이어집니다.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민주주의 공화제도 헌법에 대한 신뢰 위에 존립하는 것입니다. 왕정은 군주의 리더십에 대한 신뢰를 바탕으로 하지만, 민주주의는 국민의 합의에 의해 만든 법시스템에 대한 신뢰가 우선됩니다. 신뢰가 없으면 가족 간의 관계도, 친구 간의 관계도, 교사와 학생의 관계도, 이 민주주의 시스템도, 자본주의 시장도 모두 깨지게 마련입니다.
아담과 하와는 이러한 관계성에 금이 가게 만든 장본인들입니다. “죽지 않고 하느님처럼 선과 악을 분별할 수 있다”는 유혹은 가장 치명적이었습니다. 선과 악을 분별해서 과연 그들은 무엇을 하려했을까요? 그 선과 악을 분별하는 능력으로 자기 자신을 돌아보고 선한 방향으로 성장하기 위해서였을까요? 아니면 남을 판단하고 분별하여 정죄하기 위해서였을까요?
옳은 것과 그른 것을 분별하는 권한은 재판관의 고유 권한입니다. 판사는 법과 판례를 기준으로 판결을 합니다. 그러나 아담과 하와는 과연 무엇을 기준으로 선과 악을 구분하려 했을까요? 선악과를 먹으면 그런 기준과 권위와 권한이 자신들에게 자동적으로 생긴다고 생각했을까요? 그러나 그들은 그러한 권한이 오직 창조주에게만 있다는 사실을 망각했습니다.
자식이 처음으로 부모님께 실망했을 때는 언제일까요? 반대로 부모가 자식에게 처음으로 실망했을 때는 과연 언제일까요? 아마도 각자 기억을 더듬어 보시면 그런 순간이 있었을 겁니다. 친구간의 관계도 아주 작은 일에서 또는 소소한 약속을 어기는 데서 실망하는 일이 발생하곤 합니다. 일단 관계성에 금이 가고나면 이전으로 다시 돌아갈 수는 없습니다. 사과나 화해로 다시 관계는 유지할 수 있지만, 이미 금이간 그릇은 다시 붙여도 금은 남게 마련입니다. 부부의 관계도, 친구의 관계도 이렇게 균열이 생기면 결코 이전으로 회복되기는 불가능합니다. 관계성이란 것이 마치 와인잔처럼 너무 깨지기 쉬운 신뢰를 바탕으로 하기 때문에 다시 신뢰를 쌓는 것은 몇 배의 노력을 필요로 할 수도 있습니다. 상호 신뢰라는 것은 이렇게 관계성의 모든 근본이 됩니다. 선악과를 다시 나무에 붙이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성서는 이러한 관계성의 분열이 바로 “죄”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오늘 읽은 루가복음은 “죄인”이란 단어를 두 가지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하마르톨로스 ἁμαρτωλός”와 “오필레테스ὀφειλέτης” 입니다. 하마르톨로스는 “하마르티아 ἁμαρτία, 죄”란 명사에서 유래된 단어로, “죄인”, “죄를 범한 자”를 뜻합니다. 도덕적, 영적인 죄를 범한 모든 경우에 사용됩니다. 성서에는 “하느님의 뜻을 어긴 사람”이란 용법으로 주로 사용됩니다. “예수님께서 죄인들과 함께하셨다”라는 표현에서 주로 사용됩니다. 예수님 시대에 사회 통념상 ‘세리’나 ‘창녀’들을 이러한 죄인으로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불렀습니다. 또 다른 “죄인”이란 단어인 “오필레테스”는 “빚진 자”라는 뜻입니다. 죄를 빚의 관점에서 본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주기도문에서 사용된 “죄”라는 단어가 바로 이 “빚진 자”입니다. 이 오필레테스는 “죄로 인해 하느님께 빚진 자”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핏값으로 우리의 빚이 탕감받았다는 의미가 성립됩니다. 빚은 채무를 다 갚을 때까지 노예의 상태로 있어야 하는 것이라 죄의 속성에 묶여 있는 인간 실존을 설명하기 가장 적절한 신학적 용어인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하마르톨로스”이든 “오필레테스”이든 이 “죄인”이란 단어는 모두 상호 관계성이 파괴된 상태를 전제합니다. 하느님의 뜻을 어기든, 채무관계로 다른 사람과의 관계성이 무너지든 “죄인”이란 단어는 관계성 단절의 표징이 됩니다.
유대인들은 “율법”을 인간 관계성의 기본으로 삼은 민족입니다. 특히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율법의 준수여부로 사람을 판단했습니다. 그런 유대인들의 통념상 병이나 재난과 같은 불행은 모두 죄 때문이라는 “현세적 인과응보의 사상”을 그들은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갈릴래아에서 벌어진 빌라도의 학살 사건을 그 희생자들의 죄의 결과로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질문에는 그 희생자들의 죽음을 안타깝게 생각하기 보다 자신들은 율법을 잘 지켜 희생되지 않았다는 자기 안도의 의미도 포함됩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그 갈릴래아 사람들이 다른 모든 갈릴래아 사람보다 더 죄가 많아서 그런 변을 당한 줄 아느냐?” 루가 13:2
예수께서는 그들의 죄에 대한 통념을 전복시키십니다. 그들은 갈릴래아 희생자들의 죄에 집중했지만, 주님께서는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망한다”는 말로 이 사건의 본질을 회개로 전환하십니다. 죄의 원인과 결과보다 먼저 회개를 촉구하신 것입니다. 사람들은 남들의 불행을 보면서 자신을 돌아보는 반성을 하기보다 자신에게 불행이 닥치지 않은 것에 대해 안심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오늘 이야기의 유대인들처럼 말입니다. 저 사람의 불행은 저 사람의 죄 때문이라고 생각하면 자신들은 마치 죄에서 자유해지는 줄 착각하는 듯합니다. 그러나 성서는 늘 “죄”라는 단어를 단수와 복수를 구분해서 사용했습니다. “죄, 하마르티아 ἁμαρτία ”를 단수로 사용할 때는 인간의 본질적인 죄성을 뜻합니다. 즉 하느님과의 관계가 단절된 인간 실존 그 자체를 말할 때 사용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서는 모든 사람이 죄인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단순히 죄를 짓지 않는다하여 죄인이 아닌 것이 아니라 모두가 원죄와 같은 “죄성”을 가진 존재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로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한 사람이 죄를 지어 이 세상에 죄가 들어왔고 죄는 또한 죽음을 불러들인 것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어 죽음이 온 인류에게 미치게 되었습니다.” 로마 5:12
우리가 도덕적, 법률적 죄를 범하지 않았어도 이미 우리는 하느님과의 관계가 단절된 상태에 있으므로 모두가 죄인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죄들, 하마르티아이 ἁμαρτίαι” 복수형은 인간 개인이 저지르는 모든 죄의 행위에 해당되는 말입니다. 즉 죄성의 열매로 생겨난 것들이지요. 여기에는 우리가 통념상 생각하는 도덕적, 법적, 사회적 죄도 모두 포함됩니다. 이는 인간 행위의 결과로 생겨난 것입니다. “죄”가 결국 인간의 모든 행위를 주관할 때 이러한 “죄들”이 발생하게 되는 것이지요. 주님께서는 마르코복음 2장에서 중풍병자의 병을 치료해 주시면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예수께서는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하고 말씀하셨다. 마르 2:5
마태오와 루가는 마르코 복음을 옮겨쓰면서 이 “죄들”이란 말은 생략했습니다. 마르코가 언급한 “죄들”은 개인이 저지른 개별적 죄를 모두 포함하는 말입니다. 아마도 마르코복음보다 뒤에 써진 마태오와 루가는 병과 죄의 인과관계를 따지는 유대인들의 생각을 거부한 것으로 여겨집니다. 마르코는 예수께서 이렇게 개별적인 죄를 용서하신 다는 개념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지요. 가장 늦게 기록된 요한복음은 마르코 복음과 다르게 하느님께서 인간의 본질적 죄를 해결하시는 분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디테일한 신학적 진술의 중요성을 우리는 피부로 느끼기 어렵습니다. 모두가 예수를 믿고 죄로부터 해방되었다는 안도감에 요즘은 누구도 “죄”이든 “죄들”이든 죄에 대해 언급하고 싶어하지 않습니다. 그러한 이야기를 하면 모두가 부담을 느끼고 진부하게 생각합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자신이 잘못을 행한 경우 깊이 뉘우치고 반성하고 있다고 생각하면 이미 용서를 받았다고 믿어버리는 경향도 있습니다. 마음 아프게 느끼고 후회하고 반성했으면 충분하다는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그 행한 죄에 대해서 충분히 자숙하는 시간을 가지면 된다고 생각을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서는 인간이 죄를 저지르면 모든 관계성이 단절된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먼저는 하느님과의 관계, 그리고 이웃과의 관계 말입니다. 성서가 말하는 죄는 단순히 개별적인 죄의 반성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죄로 인해 하느님과의 관계성이 금이 났는데 회개하지 않고 후회와 반성이면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죄를 저지르고 감옥에서 감옥살이를 하고 나면 죄값을 다 치뤘다고 생각하는 것에 다름아닙니다. 죄에 대한 회개, “메타노이아 μετάνοια” 는 하느님과 인간의 관계성 회복을 전제한 말입니다. 단순히 개별적 죄의 후회나 반성이 아닌, 전 존재적 변화, 삶의 총제적 변화, 의식의 근본적 변화를 촉구하는 말입니다. 이것은 하느님께서 인간을 처음 창조하신 보시기에 좋았던 상태로의 회복을 뜻합니다. 이는 ‘죄들”이 아니라 “죄”로 인해 단절된 모든 관계성의 완전한 회복입니다. 개별적인 “죄들”에 대한 회개는 궁극적으로 “죄”에 대한 해방까지 나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회개는 한순간이 아니라 인간 전 인생을 통해 이루어지는 과정인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교는 여전히 “죄”에 대해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회개를 하고나면 마음의 평화가 찾아오는 것은 심리적인 차원의 문제입니다. 우리는 늘 하느님 앞에서 우리 자신을 죄인으로 인식하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그것은 사사건건 우리의 행동을 감시하는 하느님이 아니라 우리와 온전한 사랑과 관계성을 가지고자 하시는 하느님의 의지입니다. 우리가 죄와 죄들을 제대로 인식 못할 때, 우리가 회개의 의미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할 때, 우리는 삶에서 시시각각 발생하는 모든 일들에 대해 그 원인도 모른채 무기력하게 우리 내면의 어둠을 마주해야 합니다. 우리의 공허함과 어두움, 두려움과 염려, 근심 등. 이러한 모든 심리적 상태가 우리와 하느님의 관계에 금이 간 상태를 말해 줍니다. 개별적인 죄를 저지르지 않고 착하게 산다고 해서 인간 실존의 고통적인 상황이나 현상이 우리를 비켜가지는 않습니다. 우리가 죄와 회개를 단순히 도덕적으로 또 병리학적으로, 법적으로만 생각할 때, 우리는 원인도 알 수 없는 다양한 실존의 위협들에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마는 것입니다. 미국성공회 사제 바바라 브라운 테일러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죄는 우리의 유일한 희망, 진정한 회개의 가능성으로 우리를 깨우는 첫 번째 경고음이다.” 바바라 브라운 테일러의 [읽어버린 언어를 찾아서] 중에서
그는 죄를 죄로 인식하는 것이 우리의 희망이 됨을 이야기 합니다. 그 희망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회개의 가능성을 우리에게 주기 때문입니다. 죄를 죄로 인식을 하지 못할 때, 우리가 죄인임을 인식하지 못할 때 우리는 이 험악한 현대의 실존에서 삶의 총체적 변화를 추구할 기회조차도 잃어버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죄와 회개를 잃어버리는 순간, 우리가 하느님께 다시 돌아갈 길은 완전히 차단됩니다. 하느님과 우리의 관계성의 회복. 이것이 성서가 말하는 우리의 진정한 구원이고, 그 구원은 우리의 전 삶과 전 존재의 헌신을 통해서만 가능한 것입니다. 진정한 회개는 각 개인이 하느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고, 죄 속에 빠진 이 혼란한 세상 속에서 아직도 고통 받는 우리의 이웃들에게 선한 영향력을 끼치는 데까지 관계성을 넓혀가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 우리의 회개는 개인의 차원을 넘어 공동체의 차원까지 나아가야 합니다. 우리는 혼자 구원받을 존재들이 아니라 “함께” 구원받을 존재들이기 때문입니다. 진정한 회개는 나와 우리의 삶의 본질을 바꾸는 것입니다. 하느님없이 살아왔던 모든 세속적인 욕심과 욕정, 욕망 그리고 파괴적이고 폭력적인 우리의 생활 습관을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관계로 회복시키는 것, 이것이 우리가 다다를 회개의 최종이고, 이것이 우리의 구원임은 두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물론 이러한 여정에서 성령께서 우리를 도우심은 분명합니다. 성령의 도움 없이는 우리는 한발짝도 앞으로 나아갈 수 없고, 진정한 회개도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사순절은 얼어붙은 우리의 신앙심이 봄의 새순처럼 하늘을 향해 피어오르는 기간입니다. 단단한 씨앗의 껍질을 뚫고 여린 잎과 줄기가 거친 흙을 비집고 올라오는 것은 참으로 고통스런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고통의 시간을 이겨내지 않으면 봄날 새싹이 피어날 수 없음같이, 우리의 영적인 삶도 회개의 고통없이는 새로운 믿음의 잎과 줄기를 뻗을 수 없습니다. 이러한 자명한 사실을 마음에 새기며, 이번 사순절 동안 하느님과 우리의 관계성이 회복되는 “놀라운 만남”의 시간을 주님께서 우리 모두에게 허락해 주시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전례독서_사순3주 (다해)
본기도
생명의 근원이신 하느님, 목마른 이들에게 영원한 생수를 주시나이다. 비오니, 우리가 이제 헛된 갈망에서 벗어나 주님의 말씀과 성령으로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한 분 하느님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나이다. 아멘.
1독서_이사 55:1-9
1 너희 목마른 자들아, 오너라.
. 여기에 물이 있다.
. 너희 먹을 것 없는 자들아, 오너라.
. 돈 없이 양식을 사서 먹어라.
. 값 없이 술과 젖을 사서 마셔라.
2 그런데 어찌하여 돈을 써가며
. 양식도 못되는 것을 얻으려 하느냐?
. 애써 번 돈을 배부르게도 못하는 데 써 버리느냐?
. 들어라, 나의 말을 들어보아라.
. 맛좋은 음식을 먹으며
. 기름진 것을 푸짐하게 먹으리라.
3 귀를 기울이고 나에게로 오너라.
. 나의 말을 들어라.
. 너희에게 생기가 솟으리라.
. 내가 너희와 영원한 계약을 맺으리라.
. 다윗에게 약속한 호의를 지키리라.
4 나는 그를 뭇 백성들 앞에 증인으로 세웠고
. 부족들의 수령과 군주로 삼았다.
5 이제 너는 네가 알지 못하던 민족을 부르리라.
. 너를 모르던 민족들이 너에게로 달려오리라.
. 너희 하느님 야훼,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께서
. 너를 영화롭게 하신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6 야훼를 찾아라.
. 만나주실 때가 되었다.
. 그를 불러라, 옆에 와 계신다.
7 불의한 자는 그 가던 길을 돌이켜라.
. 허영에 들뜬 자는 생각을 고쳐라.
. 야훼께 돌아오너라,
. 자비롭게 맞아주시리라.
. 우리의 하느님께 돌아오너라,
. 너그럽게 용서해 주시리라.
8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같지 않다.
. 나의 길은 너희 길과 같지 않다.”
. 야훼의 말씀이시다.
9 “하늘이 땅에서 아득하듯
. 나의 길은 너희 길보다 높다.
. 나의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다.
1절 “돈 없이 양식을 사서 먹어라. / 값 없이 술과 젖을 사서 마셔라.”는 “네가 먹을 양식은 돈 내고 살 것이 아니다. / 네가 받아 마실 술과 양젖은 값을 내고 얻을 것이 아니다.”라고 번역할 수도 있습니다.
성시_시편 63:1-8
1 하느님, 당신은 나의 하느님,
⋅ 물기없이 메마른 땅덩어리처럼
⋅ 내 마음 당신 찾아 목이 마르고, ◯
⋅ 이 육신 당신 그려 지쳤습니다.
2 당신을 그리면서 성소에 왔사오며 ◯
⋅ 당신의 힘, 당신의 영광을 뵈옵니다.
3 당신의 사랑, 이 목숨보다 소중하기에 ◯
⋅ 이 입술로 당신을 찬양하리이다.
4 이 목숨 다하도록 당신을 찬양하며 ◯
⋅ 두 팔 들어 당신 이름 찬양하리이다.
5 기름지고 맛있는 음식
⋅ 배불리 먹은 듯 내 입술 기쁘고, ◯
⋅ 내 입이 흥겨워 당신을 찬양합니다.
6 잠자리에 들어서도 당신 생각, ◯
⋅ 밤을 새워 가며 당신 생각뿐입니다.
7 나를 도와주신 일 생각하면서 ◯
⋅ 당신의 날개 그늘 아래에서 즐겁습니다.
8 이 몸 당신에게 포근히 안기면 ◯
⋅ 당신 오른팔로 붙들어 주시옵니다.
⦿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
. 처음과 같이 지금도 그리고 영원히, 아멘.
2독서_1고린 10:1-13
1 형제 여러분, 여러분은 다음과 같은 사실을 꼭 기억해 두셔야 하겠습니다. 모세 때에 우리 조상들은 구름의 인도를 받았고 모두가 홍해를 무사히 건넜습니다. 2 말하자면 그들은 모두 구름과 바다 속에서 세례를 받아 모세의 사람들이 되었던 것입니다. 3 그들은 모두 똑같은 영적 양식을 먹었고 4 또 똑같은 영적 음료를 마셨습니다. 그들의 동반자인 영적 바위에서 나오는 물을 마셨다는 말입니다. 그 바위는 곧 그리스도였습니다. 5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그들의 대부분을 못마땅하게 생각하셨습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죽어서 그 시체가 여기저기에 흩어지게 되었습니다(민수 14:16, 23, 29-30; 시편 78:31). 6 이것은 우리가 우리 조상들처럼 악을 일삼아서는 안 된다는 것을 경고하는 본보기입니다. 7 그들의 일부는 우상을 숭배하였는데 여러분은 그들처럼 우상 숭배자가 되지 마십시오. 그들에 대해서 성서에는 “백성들이 앉아서는 먹고 마셨고 일어서서는 춤을 추었다. 출애 32:6”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8 어떤 사람들은 음행을 일삼다가 하루에 다 죽어 넘어졌는데 그 수가 이만 삼 천 명이나 됩니다. 우리는 그들처럼 음행에 빠져서는 안 되겠습니다. 9 또 어떤 사람들은 주님을 떠보다가 뱀에게 물려 죽었습니다. 우리는 그들처럼 주님을 떠보는 자가 되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10 그리고 또 어떤 사람들은 불평을 하다가 살육의 천사의 손에 멸망을 당하였습니다. 우리는 그들처럼 불평하는 자가 되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11 그들이 이런 일들을 당함으로써 다른 사람들에게는 경고가 되었으며 그것이 기록에 남아서 이제 세상의 종말을 눈앞에 둔 우리에게는 교훈이 되었습니다. 12 자기 발로 서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넘어지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13 여러분이 겪은 시련은 모두 인간이 능히 감당해 낼 수 있는 시련들이었습니다. 하느님은 신의가 있는 분이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여러분에게 힘에 겨운 시련을 겪게 하지는 않으십니다. 시련을 주시더라도 그것을 극복하고 벗어날 수 있는 길을 마련해 주실 것입니다.
복음서_루가 13:1-9
1 바로 그 때 어떤 사람들이 예수께 와서 빌라도가 희생물을 드리던 갈릴래아 사람들을 학살하여 그 흘린 피가 제물에 물들었다는 이야기를 일러드렸다. 2 예수께서 이 말을 들으시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그 갈릴래아 사람들이 다른 모든 갈릴래아 사람보다 더 죄가 많아서 그런 변을 당한 줄 아느냐? 3 아니다. 잘 들어라.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모두 그렇게 망할 것이다. 4 또 실로암 탑이 무너질 때 깔려 죽은 열여덟 사람은 예루살렘에 사는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죄가 많은 사람들인 줄 아느냐? 5 아니다. 잘 들어라.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모두 그렇게 망할 것이다.”
6 예수께서 그들에게 다음과 같은 비유를 들어 말씀하셨다. “어떤 사람이 포도원에 무화과나무 한 그루를 심어놓았다. 그 나무에 열매가 열렸나 하고 가보았지만 열매가 하나도 없었다. 7 그래서 포도원지기에게 ‘내가 이 무화과나무에서 열매를 따볼까 하고 벌써 삼 년째나 여기 왔으나 열매가 달린 것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으니 아예 잘라버려라. 쓸데없이 땅만 썩일 필요가 어디 있겠느냐?’ 하였다. 그러자 8 포도원지기는 ‘주인님, 이 나무를 금년 한 해만 더 그냥 두십시오. 그 동안에 제가 그 둘레를 파고 거름을 주겠습니다. 9 그렇게 하면 다음 철에 열매를 맺을지도 모릅니다. 만일 그 때 가서도 열매를 맺지 못하면 베어버리십시오.’ 하고 대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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