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6.1.25 가해_연중3주일
이사 9:1-4 / 시편 27:1, 4-9 / 1고린 1:10-18 / 마태 4:12-23
“즉시, 곧바로: 망설임을 넘어선 순종의 영성”
채야고보 신부 / 대한성공회 진주산청교회
지난주에는 ‘일시 정지와 관조의 영성’에 대해 말씀드렸습니다. 잠시 멈춰 서서 대상을 진지하게 관찰하고 사유해야 하는 이유를 나누었는데요. 오늘은 이와는 상반되는 듯한 영성을 말씀드리려 합니다. 성서는 늘 어느 한 가지만을 강요하지 않습니다. 진리에 도달하는 길과 방법은 우리에게 무한히 열려 있기 때문입니다. 이번에는 멈춤과 느림의 영성이 아니라, 즉각적인 반응과 순종을 요구하는 영성에 관해 이야기해 보려 합니다.
여러분도 성서를 읽으며 한 번쯤 의아해하신 적이 있을 겁니다. 오늘 본문에서 베드로와 안드레아는 하던 일을 멈추고 ‘즉시’ 예수의 부르심에 응답합니다. 심지어 요한과 야고보는 생계 수단인 배마저 버려두고 길을 떠납니다. 이들의 반응은 언뜻 무모하고 즉흥적으로 보이기까지 합니다. 마치 철없는 청소년들이 앞뒤 재지 않고 일을 저지르는 듯한 인상마저 줍니다.
물론 성서에는 이들의 순종에 관한 전후 사정이 생략되어 있어 우리 상상력에 의존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이들의 즉각적인 순종에 사용된 헬라어 부사 ‘유토스(εὐθέως)’에 주목해 봅니다. 이는 ‘가능한 한 빨리, 즉시, 곧바로’라는 뜻입니다. 말 그대로 망설임 없는 즉각적인 반응을 의미합니다. 이것이 어떻게 가능했을까요? 그저 문학적인 과장일 뿐일까요? 만약 여러분이라면 생업을 뒤로하고 곧장 따라나설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가족과 동료, 경제적 여건 등 고려해야 할 현실적인 문제가 너무나 많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의 반응 속에 담긴 이 ‘유토스’를 깊이 묵상해 보면, 우리는 그 안에서 놀라운 영적 통찰을 발견하게 됩니다.
사실 ‘유토스’라는 단어는 신약성서에서 80회 이상 등장하는 빈번한 표현입니다. 특히 마르코복음에서 가장 집중적으로 사용되었는데, 이는 단순하고도 속도감 있는 마르코복음 특유의 전개 방식에 매우 적합하기 때문입니다. 마르코복음의 상징은 ‘사자’입니다. 야생의 사자가 먹이를 향해 거침없이 돌진하듯, 마르코복음은 예수의 신원과 십자가 사건을 향해 망설임 없이 질주합니다.
물론 이 단어는 신약성서 전반에 걸쳐 고르게 나타나며, 주로 결정적인 하느님의 개입과 그에 따른 인간의 반응을 묘사할 때 쓰입니다. 핵심을 요약하자면 ‘하느님의 즉각적인 개입’과 ‘제자도의 즉각적인 순종’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는 지난주에 나눈 멈춤과 관조의 영성과는 결이 다른 영성을 우리에게 요구합니다. 하느님의 개입이라는 매우 특수한 상황 속에서, 인간이 보여야 할 실존적 응답과 긴밀히 연결되어 있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네 어부를 제자로 부르신 이야기’는 마태오가 마르코복음 1장을 바탕으로 기록한 것입니다. 두 복음서 모두 ‘상황 묘사-소명-추종’이라는 전형적인 서사 구조를 따르고 있으며, 이 구조를 제외한 나머지 정황은 과감히 생략되었습니다. 이들이 이전에 예수를 만난 적이 있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지난주에 살펴본 요한복음의 기록은 결이 조금 다릅니다. 안드레아가 본래 세례자 요한의 제자였으며, 요한의 소개로 예수를 따르기 시작해 형 베드로를 전도했다고 상세히 전합니다. 반면 오늘 본문은 더 급진적입니다. 제자들은 생계 수단인 그물을 내던졌고, 특히 요한과 야고보는 배는 물론 아버지에게 하직 인사까지 고하며 길을 떠났습니다.
성서는 이 모든 복잡한 전후 사정을 ‘즉시’라는 한마디로 응축했습니다. 이는 ‘소명 사화(Calling Narrative)’의 전형적인 문학적 틀로, 부르심에 대한 이상적인 인간의 반응을 제시하는 데 그 목적이 있습니다. 바로 여기에 소명 사화가 지닌 깊은 신학적 함의가 담겨 있습니다.
주님의 소명이 있고 그에 따른 응답이 요구될 때, 대개의 경우 우리는 고려해야 할 현실적인 문제들에 직면합니다. 우리가 무책임한 사람이 아니라면 당연한 일입니다. 성서 속 제자들처럼 즉각 따라나서는 행위는 때로 기존의 모든 사회적 관계망이 무너지는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우리는 잘못된 신념이나 사이비 종교에 빠져, 이러한 ‘즉각적인 추종’이 삶의 파멸로 이어지는 비극을 자주 목격합니다. 최근 사회적 물의를 일으킨 신천지, 통일교, JMS 같은 집단들이 바로 그 예입니다. 이는 잘못된 추종과 왜곡된 헌신이 만들어낸 참사입니다. 그렇다면 복음사가들은 왜 이런 오해를 살 법한 무모한 표현을 '소명 사화'의 핵심으로 담아낸 것일까요? 현실을 외면한 맹목적 투신을 조장하려는 의도였을까요?
성서 기자들은 이 ‘유토스, 즉시’라는 단어 하나로 모든 논란의 여지와 세속적 염려, 그리고 불신을 단숨에 불식시킵니다. 다시 말해, ‘즉시’는 하느님의 소명과 인간의 응답 사이에 존재할 수 있는 시간적 간격을 완전히 제거합니다. 그 결과 망설임이나 주저함이 없는 상태, 즉 인간의 욕망이 끼어들 틈이 없는 상태를 만들어냅니다.
물론 우리 삶에는 심사숙고가 필요한 일이 너무나 많습니다. 개인과 공동체의 운명이 걸린 중차대한 선택 앞에서 신중함은 필수적입니다. 그러나 성서는 그러한 사유의 과정이 요청되지 않는 순간이 있음을 보여줍니다. 바로 하느님의 전적인 개입이 일어날 때입니다.
엘리사가 엘리야를 따를 때도, 사도 바울로가 다마스쿠스 도상에서 하느님을 만난 뒤 누구의 조언도 구하지 않고 즉시 아라비아로 떠날 때도 그러했습니다. 구약의 선지자들부터 예수의 제자들에 이르기까지, 성서는 하느님의 소명 앞에 선 인간의 즉각적인 반응을 일관되게 기록합니다. 그리스도교는 바로 이 압도적인 하느님의 개입과 즉각적인 인간의 응답이라는 긴장 속에서 하느님의 임재가 드러난다고 고백합니다. 이것이 바로 하느님의 전권을 인정하는 인간의 가장 거룩한 신앙 고백입니다.
이러한 ‘즉각적 반응’은 비단 소명 사화에만 국한되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치유 사화 역시 복잡한 과정은 생략된 채, 치유의 효력이 즉시 나타났음을 강조합니다. 귀신은 그 즉시 떠나갔고, 요동치던 바다는 주님의 명령 한마디에 즉각 잠잠해졌습니다. 성서가 이토록 ‘즉시’를 반복하는 이유는 하느님의 개입으로 드러나는 그분의 압도적인 권능과 주권을 나타내기 위함입니다. 창세기 1장에서 ‘빛이 있으라’는 명령 뒤에 곧바로 빛이 나타난 것과 같은 맥락의 표현 기법입니다.
또한, 하느님의 즉각적인 개입은 사건의 긴급성을 드러냅니다. 오늘 복음에서 시작된 하느님 나라의 선포는 그 나라가 이미 우리 목전에 도달했음을 알리는 긴박한 신호입니다. 세례자 요한이 ‘심판의 도끼가 이미 나무뿌리에 놓였다’고 경고했듯, 종말의 때는 곧 지체할 수 없는 회개의 때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제자들의 즉각적인 추종은 하느님 나라의 종말론적 긴박감 속에서 이루어진 필연적 응답입니다. 하느님의 나라가 임박한 순간에 인간의 망설임은 어울리지 않습니다. 부르심에 대한 응답과 회개는 시간을 다투는 일입니다. 마치 멸망 직전의 소돔과 고모라를 탈출하던 롯의 가족처럼, 뒤를 돌아보거나 주저할 겨를이 없는 것입니다.
얼마 전 넷플릭스에서 본 영화 <하우스 오브 다이너마이트>가 떠오릅니다. 어디서 누가 쐈는지조차 알 수 없는 핵미사일이 미국을 향해 날아오는 일촉즉발의 상황을 그린 영화입니다. 탄도가 다가오는 짧은 순간, 영화는 군인과 관료, 그리고 대통령의 반응을 세 가지 관점에서 비춥니다.
누가 쐈는지 모를 공격에 대응해 매뉴얼대로 보복 공격을 감행해야 할까? 그로 인해 초래될 인류 전멸의 책임은 누가 질 것인가? ‘즉각적’ 결정이 강요되는 상황에서 판단을 내릴 정보가 전무하다는 점이 인물들이 겪는 딜레마이자 영화의 긴장감을 고조시키는 핵심입니다. 과연 그런 상황에서 결정권자는 어떤 선택을 내릴 수 있을까요?
이 영화를 보며 저는 제자들의 즉각적인 추종을 다시금 생각했습니다. 아무런 정보도 없는 상황에서, 생전 처음 만난 예수라는 청년에게 매료되어 그를 따라나서는 길은 아마도 이런 일촉즉발의 결정을 내려야 하는 순간이었을 것입니다. 두려움과 망설임이 앞서지만, 시간이 심사숙고할 여유조차 허용하지 않고 우리를 재촉할 때 우리는 과연 어떤 결정을 내리게 될까요? 이집트 군대의 추격이 등 뒤에 있고 앞은 망망대해로 가로막힌 채 완전히 포위되었던 모세는 과연 어떤 심정이었을까요?
전적인 하느님의 개입이 있는 사건 앞에서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은 즉각적인 순종 외에 과연 무엇이 더 있을지 자문해 봅니다. 그러한 추종이 가능한 것은 하느님의 권능에 대한 전적인 신뢰 없이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분이 우리의 피난처이시며 우리를 도우시는 분이라는 믿음이 있을 때, 남들은 이해할 수 없어도 오직 당사자만이 해야 할 결단이 있는 법입니다.
우리는 윤석열의 내란 범죄 수사와 법정 진술을 통해, 지난 비상계엄 선포 당시 그 자리에 있던 누구도 즉각적으로 반대하고 나서지 않았다는 사실을 목격했습니다. 누군가는 그 순간 즉각적으로 “안 됩니다”라고 말했어야 했습니다. 최소한 단 한 명이라도 말입니다. 그러나 모두가 너무나 많은 생각과 자신의 안위를 계산하느라 침묵했고, 결국 계엄에 동조했습니다. 그 망설임과 침묵이 결국 한국사에 커다란 비극을 낳았습니다. 참된 순종과 결단은 때로 우리의 안위를 내려놓는 ‘즉각적인 용기’에서 시작됨을 뼈아프게 깨닫게 됩니다.
판단할 시간이 충분한 사안이라면 큰 문제가 되지 않겠지만, 하느님의 개입과 부르심은 늘 특수한 상황을 전제로 합니다. 하느님의 개입은 모든 시간적 요소를 제거합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 우리가 묵상한 ‘유토스’라는 부사가 성서에서 쓰인 방식입니다. 이는 결정의 순간, 하느님과 당사자 외에는 그 누구도 간섭할 수 없는 고독한 결단의 시간입니다.
하느님의 개입은 항상 ‘즉각적인’ 순종을 요구합니다. 바로 여기에 우리 신앙의 딜레마가 있습니다. 사실 방대한 정보를 가지고 깊이 검토한다 해도, 결정의 순간은 늘 두렵고 어려운 법입니다. 그 두려움을 떨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하느님에 대한 전적인 신뢰뿐입니다. 그 신뢰는 우리의 경험과 지식을 넘어서는 지점까지 우리를 인도합니다.
결국 문제는 즉각적인 반응을 보일 수 있는 우리의 결단과 용기입니다. 어린아이는 아빠에 대한 전폭적인 신뢰가 없다면 결코 목마를 탈 수 없습니다. 아빠가 자신을 든든히 지켜줄 것이라는 확신이 있을 때만, 아이는 높은 곳에 올라가는 두려움을 이겨냅니다. 아이가 아빠의 목마를 타지 못한다면, 그것은 높은 곳에 대한 두려움이 아빠에 대한 신뢰를 압도했기 때문입니다.
두려움은 늘 우리를 머뭇거리게 하고, 결정장애에 빠뜨립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소명 앞에 선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그 부르심은 우리를 낭떠러지로 떠미는 것이 아니라, 가장 안전한 하느님의 어깨 위로 우리를 초대하는 것임을 말입니다. 그 신뢰가 우리를 망설임의 늪에서 건져 올릴 것입니다.
하느님의 개입이라는 특수한 상황은 우리가 매일 경험하는 흔한 일은 아닐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러한 순간은 반드시 누구에게나 찾아옵니다. 하느님께서는 언제나 사람을 통해 일하시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치유의 은총이든, 오늘 제자들을 부르시는 소명의 순간이든 신앙생활의 여정 속에 그러한 ‘때’는 반드시 옵니다.
다만 그 순간을 인지하는 것은 우리의 일상이 늘 그분을 향해 있을 때 비로소 쉬워집니다. 부르심의 순간이 올 때 여러분은 과연 어떤 반응을 보이실지 진지하게 성찰해 보시기 바랍니다. 오늘 우리가 살펴본 제자들의 즉각적인 순종은, 언젠가 우리 앞에 마주할 하느님의 개입 앞에서 우리를 안내하는 든든한 길잡이가 되어줄 것입니다.
“전격적인 하느님의 개입”에는 늘 “즉각적인 인간의 반응”이 동반됩니다. 이것이 우리 교회가 하느님의 부르심에 응답해 온 방식입니다. 종교개혁의 구호인 “오직 은총으로(Sola Gratia)”는 인간의 응답인 “오직 믿음으로(Sola Fide)”와 언제나 짝을 이룹니다. 그것이 하느님께서 오늘날 세상을 다스리시는 섭리입니다.
예수께서 사역 초기에 제자들을 먼저 부르신 이유는, 그분의 사역이 장차 교회와 우리 그리스도인이 함께 수행해야 할 일이기 때문입니다. 부르심은 곧 그분의 거룩한 사역으로 우리를 초대하시는 것입니다. 이러한 은총의 순간이 여러분의 삶 가운데도 풍성히 함께하시길 기도합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말씀드렸습니다. 아멘.
전례독서_연중3주 (가해)
본기도
사랑의 하느님, 우리를 부르시어 제자로 삼으시고 복음을 전하라 하셨나이다. 비오니, 우리가 복음으로 하나가 되어 참으로 주님을 사랑하며 하느님 나라의 일꾼으로 살아가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한 분 하느님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나이다. 아멘.
1독서_이사 9:1-4
12 어둠 속을 헤매는 백성이 큰 빛을 볼 것입니다.
. 캄캄한 땅에 사는 사람들에게 빛이 비쳐올 것입니다.
23 당신께서 주시는 무한한 기쁨, 넘치는 즐거움이
. 곡식을 거둘 때의 즐거움 같고,
. 전리품을 나눌 때의 기쁨 같아
. 그들이 당신 앞에서 즐거워할 것입니다.
34 당신께서는 그들이 짊어진 멍에와
. 어깨에 멘 장대를 부러뜨리시고
. 혹사하는 자의 채찍을 꺾으실 것입니다.
. 미디안을 쳐부수시던 날처럼, 꺾으실 것입니다.
45 마구 짓밟던 군화, 피투성이 된 군복은
. 불에 타 사라질 것입니다.
라틴어 성서는 8:32하에서 9:1이 시작됩니다. 작은 숫자는 라틴어 성서의 구절 번호입니다.
성시_시편 27:1, 4-9
1 주께서는 나의 빛,
. 내 구원이시니, ◯
. 내가 누구를 두려워하리오.
. 주께서 내 생명의 피난처시니 ◯
. 나 누구를 무서워하리오.
4 주님께 청하는 단 하나 나의 소원은 ◯
. 한평생 주님의 성전에 사는 그것뿐.
. 아침마다 그 성전에서 눈을 뜨고 ◯
. 주님을 뵙는 그것만이 나의 낙이라.
5 나 어려운 일 당할 때마다
. 당신 초막에 숨겨 주시고, ◯
. 당신의 장막 그윽히 감춰 주시며
. 바위 위에 올려 높이시리라.
6 에워싼 저 원수들을 내려다보며,
. 그 장막에서 제물 바치고 환성 올리고 ◯
. 노래하며 주님께 찬양하리라.
7 주여, 나의 부르짖는 소리를 들어 주소서. ◯
. 불쌍히 여기시어 대답하소서.
8 “나를 찾으라” 말씀하셨으니
. 내 마음 그대로 아뢰옵니다. ◯
. 주여, 이제는 당신을 뵙게 하소서.
9 그동안 이 종을 도와 주셨으니, ◯
. 당신의 얼굴을 숨기지 마소서.
. 내 구원자이신 하느님,
. 진노하지 마시고 물리치지 마소서. ◯
. 이 몸을 저버리지 말아 주소서.
⦿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
. 처음과 같이 지금도 그리고 영원히, 아멘.
2독서_1고린 1:10-18
10 형제 여러분, 나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여러분에게 호소합니다. 여러분은 모두 의견을 통일시켜 갈라지지 말고 같은 생각과 같은 뜻으로 굳게 단합하십시오. 11 내 형제 여러분, 나는 클로에의 집안 사람들한테 들어서 여러분이 서로 다투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12 말하자면 여러분은 저마다 “나는 바울로파다.” “나는 아폴로파다.” “나는 베드로파다.” “나는 그리스도파다.” 하며 떠들고 다닌다는 것입니다. 13 그렇다면 그리스도가 갈라졌다는 말입니까? 여러분을 위하여 십자가에 달린 것이 바울로였습니까? 또 여러분이 바울로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단 말입니까? 14 나는 여러분 가운데서 그리스보와 가이오밖에는 아무에게도 세례를 베풀지 않은 것을 하느님께 감사 드립니다. 15 그러니 여러분이 내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다는 말은 아무도 할 수 없을 것입니 다. 16 하기는 스테파나 집안 사람들에게도 세례를 베푼 일이 있으나 그 밖에는 아무에게도 세례를 베푼 기억이 없습니다. 17 그리스도께서는 세례를 베풀라고 나를 보내신 것이 아니라 복음을 전하라고 보내셨습니다. 그것은 인간의 말재주로 하라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인간의 말재주로 복음을 전하면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그 뜻을 잃고 맙니다.
18 멸망할 사람들에게는 십자가의 이치가 한낱 어리석은 생각에 불과하지만 구원받을 우리에게는 곧 하느님의 힘입니다.
복음서_마태 4:12-23
12 요한이 잡혔다는 말을 들으시고 예수께서는 다시 갈릴래아로 가셨다. 13 그러나 나자렛에 머물지 않으시고 즈불룬과 납달리 지방 호숫가에 있는 가파르나움으로 가서 사셨다. 14 이리하여 예언자 이사야를 시켜,
15“즈불룬과 납달리, 호수로 가는 길,
. 요르단 강 건너편, 이방인의 갈릴래아.
16 어둠 속에 앉은 백성이 큰 빛을 보겠고
. 죽음의 그늘진 땅에 사는 사람들에게
. 빛이 비치리라.” 이사 8:23-9:1
하신 말씀이 이루어졌다.
17 이 때부터 예수께서는 전도를 시작하시며 “회개하여라. 하늘 나라가 다가왔다.” 하고 말씀하셨다.
18 예수께서 갈릴래아 호숫가를 걸어가시다가 베드로라는 시몬과 안드레아 형제가 그물을 던지고 있는 것을 보셨다. 그들은 어부였다. 19 예수께서 그들에게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로 만들겠다.” 하시자 20 그들은 곧 그물을 버리고 예수를 따라갔다. 21 예수께서는 거기서 조금 더 가시다가 이번에는 제베대오의 아들 야고보와 요한 형제를 보셨는데 그들은 자기 아버지 제베대오와 함께 배에서 그물을 손질하고 있었다. 예수께서 그들을 부르시자 22 그들은 곧 배를 버리고 아버지를 떠나 예수를 따라갔다.
23 예수께서 온 갈릴래아를 두루 다니시며 회당에서 가르치시고 하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시며 백성 가운데서 병자와 허약한 사람들을 모두 고쳐주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