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모음/신학이야기

성화상(ICON)에 대한 현상학적 이해

James Chae 2012. 12. 12. 15:33

*몇 해 전, 신학 공부할 때 작성했던 글입니다. 지금은 성화상에 대한 이해가 이보다 더 성숙하긴 했지만, 여전히 어려운 주제이네요. 처음 성화상을 접하시는 분들에게 작은 참고가 되길 희망합니다. 물론 동방정교회 신자들의 입장에서 보면 코웃음칠 내용이겠지만...신앙적인 내용을 최대한 배제하면서 신학적이고 철학적인 관점에서 성화상을 하나의 현상으로 보고 접근하려했던 글입니다.



 


성화상에 대한 현상학적 이해

-동방정교회 성화상에 대한 작은 단상(斷想)-

 


채 야고보

 


[들어가는 말]

 

인간이 없으면 신도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가 신이 인간이 되지 않고는 완전한 신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증명했다…(중략)…즉 우리는 신을 초월적인 관념으로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있고 또 우리의 어두운 면을 밝혀주는 존재로 발견하다.” 메를로 퐁티의 <기호> 中에서

 

우리는 세계에 대한 경험을 우리에게 나타나는 그대로, 우리가 우리의 에 의해 세계 속에 존재하면서 세계를 향해 나아가는 그대로, 우리가 세계를 우리의 으로써 지각하는 그대로 기술해야 한다.”

메를로 퐁티의 <지각의 현상학> 中에서

 

하나님께서 인간이 되셨다는 사실을 묵상할 때에 당신은 그분을 인간의 옷을 입은 분으로 묘사할 수 있다는 것이 명백한 사실이다. 불가시적인 존재가 육체를 입어 가시적인 존재가 될 때, 당신은 그 분의 형상을 그릴 수 있을 것이다이전에는 형태나 을 가지고 있지 않은 하나님은 결코 인간의 언어로 묘사될 수 없었다. 그러나 지금, 하나님께서 육체를 입고 인간과 대화를 나누실 때, 나는 내가 보는 하나님의 형상을 그리는 것이다. 나는 물질을 숭배하는 것이 아니다. 나는 물질의 창조주, 곧 나를 위해 물질이 되시고, 물질 속에 거하시기로 작정하시며, 물질을 통해서 나의 구원을 이루신 그 분을 경배하는 것이다.”[1]

 다마스커스의 존

 

 

뫼비우스의 띠라는 신비한 띠가 있다. 긴 직사각형의 띠를 한 번 비틀어서 양쪽 끝을 이어 붙인 것이다. 연필을 들고 안이든 밖이든 어느 곳에서 시작해도 결국 전체면을 다 돌아 처음 시작한 자리로 돌아오고 만다. 어느 쪽이 안이고 어느 쪽이 밖인가 도저히 알기 어렵다. 안과 밖의 이분법적인 구별이 이 띠 위에서는 별 의미가 없는 듯하다. 어쩌면 우리는 이 띠 위에 서서 영원히 결론이 나지 않는 논쟁들을 계속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주체 대 객체, 경험 대 지성, 유물론 대 생기론[2], 관념론 대 실재론 등과 같은 사유적 논쟁 뿐만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 대 인성, 성화상의 찬반 논쟁 등이 그러하다.


특히 성화상에 대한 동방정교회, 개신교의 입장은 너무나 극명하다. 로마 가톨릭과 동방정교회는 성()상에 긍정적인 반면 개신교는()상은 책(성서)과 같은 지위를 차지할 수 없다[3]고 한 칼빈의 말처럼 성화상에 어떠한 권위도 부여하지 않고 반대하는 입장이다. 분명히 예수 그리스도라는 공통의 출발점에서 시작했는데 결국 뫼비우스의 띠 위에서 서서 계속 안과 밖만 맴돌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이러한 논쟁은 서로의 차이점 만을 확인할 뿐 해결의 실마리를 쉽게 찾을 수 없는 듯 하다.


개신교적 배경을 가지고 있는 필자로서도 처음에 성화상에 대해 너무도 분명한 긍정적 입장을 갖고 있는 동방정교회의 성화상 신학을 접했을 때 많은 혼돈에 빠졌다. 어떻게 성화상이 그리스도의 성육신 교리와 연결이 되는지, 성화상에 기도하고 입을 맞추고 절을 하면서도 어떻게 성화상을 숭배하는 것이 아니라고 하는 건지 납득하기가 어려웠다. 이보다 더 나아가 동방정교회 신자들은 성화상이 신유의 능력 또한 갖고 있다고 믿는 것 같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성화상 자체가 결코 하나의 물적 대상으로서가 아니라 유기체적인 주체적 역할을 하고 있다는 것이 아닌가?


이에 대한 공부를 진행하면서 마음으로는 그들의 성화상에 대한 입장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었지만 필자의 사유 구조에서는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 것들이 많았다. 그래서 이러한 현상을 그들의 믿음의 문제로 치부해 버리기 보다는 우회적인 방법으로 현상학적으로 그 본질에 접근하는 길을 택했다. 먼저 성화상과 이에 대한 문제들을 하나의 현상으로 보고 메를로 퐁티의 의 개념을 도입하기로 했다. 물론 해석학적으로 성화상이 놓여진 삶의 자리에서 출발을 할 수도 있지만 자료의 한계와 필자의 개인적 능력의 한계로 먼저 현재의 자리에서 동방정교회의 미학과 일치하는 현대 미학적 관점에서 출발했다. 그렇게 함으로써 미학적 관점에서 이해할 단초를 마련하기 위해서 이다.


먼저 필자는 동방정교회의 성화상에 대한 신학적, 미학적 입장을 정리하고 그 다음에 메를로 퐁티의 관점에서 상호간의 어느 일치점들을 찾아보고자 한다. 그러나 이 과제물의 성격상 개괄적인 내용의 차원에서 더 나아가지는 않을 것이다. 성화상에 대해서 비판보다는 이해하는 입장에서 서술하려고 한다. 더 깊이 있는 연구는 차후의 과제로 남겨 놓는다. 아울러 이러한 방법에 많은 오류가 있을 것으로 여겨지는데 이에 대한 많은 조언과 편달을 부탁 드린다.

 

 

성화상에 대한 동방정교회의 입장

 

동방정교회에 정통한 클렌데닌은 그의 저서 <동방정교회 개론>에서 동방정교회가 성화상의 정당성을 주장하는 이유를 설득력 있게 정리한바 있다.[4] 간단히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 성화상은 동방 기독교의 전체적인 종교 심리에 뿌리를 둔다. 정교회 신자에게 있어 성()상 없는 기독교인의 삶은 상상조차 할 수 없다.” 이는 슬라브 민족의 깊은 종교적 신앙심과 전통에 기인하는 정서적 이유이다.

2) 신학적 고려 사항(이 부분이 가장 중요한 논쟁의 핵심 부분이다): “2차 니케아 공의회(787)에 따르면, ()상은 기록된 복음과 동일한 가치를 지니며, 또한 성()상과 말씀은 상호 계시적인 관계를 가지고 있다. 869~70년 공의회[5]는 선언하기를, 복음이 말로 우리들에게 선포하는 것을 성()상은 색깔로써 선포하며 은사를 수여한다고 했으며 ()상을 거부하는 것은 성육신 하신 그리스도의 진정한 인간성에 의문을 품는 행위이다라고 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성육신의 기독론이 성화상의 근거가 되며, 또한 성화상이 성서적 권위와 동등한 위치를 차지한다는 점이다.

3) 예전적 고려 사항: “843 311, 사순절의 첫번째 주일에 성()상 논쟁에서의 최종적 승리가 경축되었다.” 여기서 성화상 사용의 합법화를 재확인하고 이를 경축한다고 한다. 이는 동방정교회의 성화상 교리가 단순히 심미적,교육적 차원을 넘어 기독교 그 자체에 대한 변호와 동일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4) 기독교 증거들의 편파적 성격 때문: 기록된 증거 자료에 예술적 증거도 포함해야 하고 또한 그 속에 담긴 내용에도 주목해야 한다는 것이다. 성화상 파괴논쟁을 통해 너무나 귀중한 기독교의 증거들이 파괴되었기 때문에 결국 기독교 교리가 너무 한쪽으로 만 치우쳐 있다는 것이다.

5) 기독교 미학의 형성: 성화상 논쟁을 거치면서 동방정교회는 전체적인 기독교적 세계관 속에서 미술의 본질과 기능을 탐구한 기독교 미학을 찾는 노력을 기울여 왔다고 주장한다.

6) 이단적 교리나 형이상학적 이해에 대한 경계 : 동방정교회는 기독교인과 이방인 양자의 세계관 속에서 물질에 대한 형이상학적 이해의 이중적 역설 혹은 아이러니를 경계 한다. 예를 들어 플라톤주의, 영지주의, 그리고 마니교 등.

 

필자는 여기서 이 문제들을 일일이 다 다룰 수는 없고 두 번째에 언급한 가장 핵심적인 그리스도론의 성육신과 성화상의 연관성에 대해 주목하고자 한다. 본인 생각에 이 둘의 끊을 수 없는 관계를 이해하는 것이 동방정교회의 성화상에 대한 입장을 가장 잘 이해하는 열쇠가 될 것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성육신과 성화상의 관계[6]

 

아무도 아버지의 말씀을 묘사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오 테오토코스여, 그가 당신으로부터 육체를 취하셨을 때

그는 자신에 대해 묘사하는 것을 허락하셨습니다.

그리고 타락된 형상을 신적 아름다움과 연합함으로써 이전의 상태로 회복시키셨습니다.

우리는 말과 성()상으로 우리의 구원을 고백하고 선포합니다.[7]

정교주일의 시기송(時期頌,Kontakion)

 

동방정교회에서 이 시대에 가장 칭송 받는 성()상 제작자요 성()상 이론 전문가인 레오니드 오우스펜스키(Leonid Ouspensky)는 그의 저서 <Theology of the Icon>에서 정교주일의 시기송의 내용으로 성화상의 의미를 설명하고 있다. 이 내용은 성육신과 타락한 형상의 신적 아름다움의 회복, 그리고 성화상을 통한 구원의 선포 등을 담고 있다. 여기서는 성화상의 기능적인 면을 설명한 세 번째는 생략하고 앞의 두 가지, 즉 성육신과 관련한 부분 만 살펴볼 것이다.

 

첫번째는 성화상 사용의 근거로써의 성육신에 관한 것이다. 아무도 하나님을 묘사할 수 없었을 때 그리스도께서 마리아로부터 육신을 취하 심으로 그 자신을 묘사하는 것을 허락하셨다는 것이다. 오우스펜스키는 성육신을 케노시스(kenosis) 즉 하나님의 자기 비하로 정의한다. 그는인간이 도저히 접근할 수 없는 분, 묘사될 수도 없고 표현될 수도 없으신 분께서 인간 육체를 취하 심으로써 묘사될 수 있고 표현될 수 있게 되셨다고 주장한다. 계속해서 교회는 <들을 귀>를 소유하고 있듯이 <보는 눈>도 소유하고 있다고 하면서 교회에서의 시각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그렇다면 그리스도를 어떻게 묘사하는가? 1세기에 살았던 가난한 목수(역사적 예수 연구가인 크로산은 예수가 농부라고 주장하기도 한다)의 모습으로 사실적으로 묘사하는가? 아니다, ‘영광스럽게묘사한다. “지극히 굴욕적인 모습까지도 평범한 인간이 아니라 영광 중에 계신 신인으로 묘사한다.” 서방의 종교예술과는 달리, 동방정교회는 그리스도를 육체적으로 고난 받는 인간으로만 표현하지 않는다. 이는 그리스도의 신성에 대한 부동의 믿음때문이다. 정교회의 성화상은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을 따로 표현하지 않고 그 분의 위격, 자신 안에서 두 본성을 혼동이나 구분이 없이 연합한 신인을 표현했다. 여기서 마리아의 중요성이 거론되는데 그녀는 하나님이 눈에 보이며 표현될 수 있는 존재가 되는 것을 허락한 유일한 인물이었다는 것이다. 결국 그리스도는 묘사될 수 있는 모친의 몸에서 나시면서 그 모친의 형상과 일치하는 형상을 소유하게 된 것이다. 결과적으로 오우스펜스키는 성부하나님은 성육하시지 않았기 때문에 눈에 볼 수도 없고 만들거나 그릴 수도 없지만 육신을 가지신 성자하나님과 마리아, 그리고 성인들은 시각적 이미지로 만들 수 있다고 정의 내린다.(참조: 12:45[8], 14:9[9], 고전 12:3[10])

 

두 번째는 성육신의 의미, 즉 타락한 형상이 신적 아름다움과 연합하여 이전 상태로 회복되는 것에 대해 설명한다. 성육신은 아담의 타락으로 말미암은 더럽혀진 신적 형상을 재창조하고 새롭게 하신다는 의미이다.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았다는 것은 하나님의 형상을 획득할가능성을 가졌다는 것이다. 세례를 통해 은혜로 말미암아 인간에게 하나님의 형상이 회복되며 그리스도를 따름에 의해서, 자신을 그리스도의 몸에 결합시킴에 의해서, 인간은 자기 안에 하나님의 모양을 다시 심을 수 있다.” 그는 계속해서 인간은 하나님의 아름다움과 연합하여 은혜에 의해 신처럼 될 수 있고, 또한 변화산상에서의 예수님의 변화는 이를 예현 한 것이다라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여기서 말하는 아름다움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는 이 아름다움이 어느 피조물의 특징적인 아름다움이 아니라 다가올 세상의 일부로서의 아름다움이라고 한다. 아름다움은 하나님께 가까이 가게 하는 통로, 혹은 수단이 될 수 있다. 결론적으로 진정한 아름다움성령의 광체, 다가올 세상의 삶의 거룩함이요 그 삶에 참여하는 것이다. 이것이 동방정교회가 추구하는 미학이다.


이러한 미적 개념이 성화상에 적용되면 그리스도의 성()상은 썩을 인간의 모양을 그린 것이 아니라썩지 않는 인간의 모양을 묘사한 것이 된다. 오우스펜스키는 우리는 그 분을 완전한 신 인간으로 보존하며 거기에 신성을 더한다고 말한다. 결국 신약의 시대에 이미지의 역할은 신적 성육신의 진리를 예술을 통해 묘사하는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개념을 그는 설명하는데 ()상은 살아 있는 원형의 형상일 뿐 아니라 신화된 원형의 형상이다라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가시적인 인성과 불가시적인 신성이 성화상에 동시에 존재한다는 뜻이다. [도판 1,2 참조]



[도판1] Virgin and Child Enthroned. c.843~67. Mosaic. Hagia Sophia, Constantinople




그러나 보통 사람들의 눈에는 이러한 성화상이 보통의 초상화와 어떻게 구별되는지 의아하다. 그래서 그는 성화상이 일반적인 초상화와 다른 점을 내용면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상은 우리의 생각에 의해 추론 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육신의 눈에 보이는 방식으로 거룩을 나타내준다. 인간의 성화의 상징인 성화상은 다볼산(변화산)에서의 변형에서 드러난 실재를 제자들이 이해할 수 있는 한도까지 표현한다.”

 

그러나 미술 표현에 있어서 그러한 것이 가능할지는 필자로서는 의문이다. 여기서 말하는 것은 결국 보여지는 것의 중요성인데 대상의 의미는 대상에 있는가 아니면 보는 관자에 의해 주어지는가라는 질문이 생겨난다. 이는 결국 미학적 문제이고 이 점에 대해서는 다음에서 다룬다.




[도판2] Madonna Enthroned. Late 13th century. Tempera on panel, 84.9x49.3 cm. The National Gallery of Art, Washington, D.C. Andrew Mellon Collection, 1937

 

 


성화상에 대한 현상학적인 이해

 

결국 동방정교회 성화상 신학의 핵심은 그리스도의 성육신이고 이를 근거로 보이는 하나님인 성육신하신 그리스도를 그릴 수 있고, 또한 이에 대한 의미부여가 인간에게만 달린 것이 아니라 축성되고 그려진 성화상에게도 주어졌다는 것이다. 동방정교회의 성화상을 믿지 않는 자는 결국 동방정교회 사람들의 표현을 빌리자면,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믿지 않는 사람임으로 그리스도인이 아니다. 그러나 반대로 성육신을 믿는데,대부분의 개신교 신자들처럼, 성화상의 의미를 부인하는 자도 있을 수 있지 않은가? 어떻게 성육신에 대한 믿음과 성화상이 의미의 주체가 될 수 있다는 믿음이 동시에 가능할까?


앞에서 인용했던 말을 다시 가져온다.  “()상은 살아 있는 원형의 형상일 뿐 아니라 신화 된 원형의 형상이다 이해하기 난해한 개념이다. 결국 뫼비우스의 띠 처럼 성화상에도 겉과 속이 따로 분리되지 못한다. 의미와 형상은 성화상에 동시에 현존하는 것이다. 아울러 성화상의 이미지는 육화 된 하나님의 이미지일 뿐 아니라 그리스도의 신화 된 상태즉 그의 신성까지도 묘사하고 있는 것이다. 어떻게 단순한 물감으로 이루어진 그림에 그러한 의미를 부여하는가? (동방정교회 신자들은 그러한 의미가 성화상으로부터 은혜로 주어진다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이해할 실마리가 미학적으로는 남아있다. 예를 들어 이러한 모든 의미들을 메를로 퐁티의 말처럼 하나의 의미의 현상으로 보는 것이다. 실재로 미술에 있어서 보여지는 것보는 것은 언제나 커다란 수수께끼이다.


메를로 퐁티가 가장 좋아했던 화가인 세잔느의 예를 보자. 퐁티는 <세잔느의 회의>라는 글에서 세잔느는 누구에게나 타당할 수 있는 예술의 형식[11]을 평생 추구했다 한다. 세잔느는 인상주의에 의해 체득한 지각의 작용에 의한 인상적 이미지와 그 이미지 너머에 있는 변하지 않는 형상의 본질적인 이미지를 한 화면에 담으려 했다. 쉽게 말해서 지각 작용에 의해 느껴지는, 그리고 빛에 의해 시시각각 변하는 인상의 이미지와 형상의 근원적인 재현을 추구하는 고전주의적 표현을 한 화면에 담으려 했다는 것이다. (물론 퐁티는 세잔느의 갈등과 회의가 이러한 이질적인 요소들을 결합시키는 데서 나오고, 결국 세잔느가 긍극적인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지만 그러한 길의 단초를 현대미술에 제공했다고 믿는 것 같다) [도판 3 참조]



[도판3] Paul Cezanne. Still Life with Basket of Apples. 1890-94. 24 3/8 x31”. Art Institute of Chicago, Helen Bartlett Memorial Collection



여기서 필자는 이러한 무모한(?) 작업을 했던 세잔느와 성화상의 가시적인 형상과 그 가시적인 것 너머의 본질적 형상을 동시에 담으려 했던 성화상 작가들 사이에서 하나의 일치점을 찾는다. 지각적 이미지와 관념적 이미지,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의 결합, 그리고 성화상에서의 보여지는 형상과 그 너머의 신화 된 형상 등의 결합은 결국 의미에 의해 우리에게 이해된다. 의미는 주체와 객체를 떠나 관자(觀者)에게나, 그림에서도 동시에 나타나는(메를로 퐁티의 표현대로) “현상의 서술에 불과한 것이다. 거기에는 지각함과 지각됨으로 경험[12]하는 것이 있다.


주체와 객체를 구별하는 이분법적인 사고로는 이 성화상의 의미를 이해하기 더욱 어렵다. 퐁티는 데카르트가 인간의 의식을 우리 밖으로 분리한 것을 다시 몸 안으로 가져왔다. 이를 육화된 의식[13]이라 부른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을 가지신 것과 의식이 을 가진 것, 결국 보이지 않는 것이 퐁티가 말하는 지각에 의해 보고, 보여지는것이 가능해진 것이다. 퐁티는 세잔느의 그림에서 앞에서 언급했던 두 요소를 결코 때어내어 말하지 않는다.[14]  그에게 있어서 의식은 몸이 없이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이고 또한 몸은 하이데거가 말한 세계 내 존재로서 세계를 필요로 한다. “의식--세계는 메를로 퐁티에게 있어서, 기독교의 성부-성자-성령이 하나이듯이, 결코 분리된 것이 아니라 하나이다.


하나님께서 인간의 을 입으시면서 인간의 역사와 직접적인 관련을 맺은 것 같이 퐁티에게 있어서 의식과 몸이 하나로서 결국 세계 내에 존재함으로써 우리의 몸도 역사 성을 갖는다. 동방정교회 성화상은 신자들의 이에 대한 끊임없는 신앙고백으로 역사 속으로 들어온다. 이는 구원 선포의 행위이며 교회 내에서 거룩()을 획득한자들의 영원히 기억될 것을 선포하는 것이다. 또한 성화상은 자체 안에서 두 개의 실체를 연합한다. 즉 역사적이고 세상적인 실체와 성령의 은혜, 세상의 실체와 하나님의 실체를 결합시킨다.”[15] 결국 성화상의 목적은 역사 속에서 이 두 가지 실체를 가시적으로 증거하는 데 있다.”[16] 오우스펜스키는 우리 자신을 그리스도의 살아 있는 성()상으로 만들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는 내적인 성화의 외적인 표현이 가능하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현상학은 극단적인 주관주의와 극단적인 객관주의를 경계한다.[17]  우리도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성화상에 대해서도 너무나 극단적인 해석을 경계하는 것이 좋을 듯하다. 마치 짧은 이불을 덮고 누운 것 같이, 가슴을 덮으면 발이 나오고 발을 덮으면 가슴이 나와 결국 추운 것은 매 한가지다. 차라리 이럴 땐 짧은 이불 둘을 꿰매어 넓게 몸 전체를 덮는 방법이 좋지 않은가퐁티의 관점은 이러한 점에서 내게 위안을 준다. 물론 그가 을 너무 강조한 나머지 유물론적인 경향이 약간 있는 듯 하지만 전적으로 그가 몸을 물질로만 생각한 것은 아닌 것 같다. 그는 (chair)’이라는 개념으로 몸의 개념을 더욱 확장 시켰는데, 이 말을 안과 밖이 하나로 겹쳐져 있는 존재 방식을 가리키는 데 사용했다. “우리의 신체는 정신과 겹쳐 있다. 정신은 신체 깊숙이 감추어져 있는 신체의 이면(裏面)이다. 정신과 신체는 안과 밖의 관계로서, 밖인 신체는 정신에 속해 있고, 동시에 안인 정신은 신체에 속해 있다.”[18] 하나로 연결된 고리가 아니라 뫼비우스의 띠처럼 꼬여져 연결된 띠로서의 퐁티의 의 개념은 주체와 객체가 결코 분리되지 않는 그 무엇이다. 이는 세잔느의 그림이나 성화상 처럼 물질적인 그림 자체와 그 의미가 결코 구분될 수 없는 것과 같다. 누군가 했던 말이 기억 난다. “내용은 그 형식에 침전되어 있는 것이라고. 이는 형식과 내용이 결코 구별될 수 없다는 의미이다. 다음은 현상학적 세계를 하나의 느낌으로 표현한 퐁티의 말이다.

 

현상학적 세계는 순수한 존재(pure being)가 아니라 나의 여러 경험들의 통로들이 교차하고, 그리고 또한 나 자신의 경험의 통로와 타인의 경험의 통로들이 서로 교차하여 마치도 기어처럼 상호 맞물려 있는 곳에서 드러나는 느낌(sense)인 것이다.”[19]

 

현상학적인 시각으로 볼 때 성화상에서 드러나는 의미는 어쩌면 이러한 느낌인 지도 모른다. 이는 ,퐁티의 표현대로, 인식 이전에 존재하는 일차적인 원초적 지각에서 오는 것일 지도 모른다. 미술에 있어서 석양의 아름다움을 터너가 보여주기 전까지 우리 인간들은 어쩌면 이 지각에 의한 자연의 아름다운 인상을 결코 몰랐을 지도 모른다. 덧없는(?) 이 세상에도 저런 아름다움이 있다는 것을


성화상의 의미는 우리의 인식이전에 어쩌면 우리의 지각에 의해 느껴지는지도 모르겠다. 아니면 성화상에 대한 의미가 인간의 믿음에 근거하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경우에도 그 믿음이 의지하는 것은 우리의 의식이 이해하기 이전의 전단계인 지각일 가능성이 크다(보지 않고 믿는 자가 복이 있다고? 잘 모르겠다. 만약 그렇다면 왜 하나님은 가시적인 형상을 입어 이 역사 속에 나타나신 걸까?). 나는 확정적인 것을 말할 수 없다. 어쩌면 우리 인간들은 드러나고 나타나고 보여지는 현상만을 기술하며 어떤 본질(essence)들에 대한 탐구[20] 만을 반복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뫼비우스의 띠를 계속 맴돌면서 말이다.

 

[나오는 말]

 

필자는 지금 이 글을 쓰면서 나의 사랑하는 두 살 난 딸아이의 사진을 보고있다. 문득 드는 생각이 나는 이 사진 속의 아이의 얼굴에 바늘로 구멍을 뚫을 수 있을까?’ 없다. 맨 정신으로 나는 도저히 그렇게 할 수 없다. 왜 그런가? 나의 사랑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사진과 그 대상 간에는 어떤 연관이 있다고 할 수 있지 않은가? 그러나 사진은 단지 종이 위에 올려진 인화 잉크일 뿐이지 않은가? 이 사진과 대상 간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 나에게 만 있다면 나는 그렇게 할 수도 있지 않은가? 사진은 그냥 사진일 뿐이니까. 그러나 만약 내가 미워하는 사람의 사진이라면…? 풀 수 없는 수수께끼이다. 아마 성화상 앞에 입을 맞추고 경배하는 동방정교회 신자들의 입장도 이와 비슷하지 않을까 모르겠다. 이미지와 인간 간에는 늘 이러한 긴장 관계가 존재하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화가들도 늘 작품 앞에서 이러한 점들을 고민한다. 어쩌면 우리는 이러한 고민의 결과를 화가들의 손을 통해 작품으로 보고 있는지도 모른다.


결국 퐁티의 현상학적 관점으로 성화상에 대해 충분히 이해할 수는 없지만(물로 필자의 무지에 기인하는 것이지만) 그의 관점은 어떤 것의 본질에 대한 탐구로 유용한 면이 분명히 있다. 성화상에 실제적인 은혜가 존재할 수도 있지만 우리는 단지 그 현상 만을 보고 느낄 뿐이기 때문이다. 그 이상, 실재론자들이 요구하듯, 실제적인 증거를 어떻게 보여줄 수 있을까? 성화상에서 은혜를 받은 사람은 분명히 존재하지만 어떻게 그/그녀가 받은 은혜를 눈에 보이는 증거물로 보여줄 수 있겠는가? 여기서 경험의 중요성이 나타나고 나의 경험과 타자의 경험이 각각 주체로서 세계 안에서로 만나는 것이 필요해진다. 그 만남의 지점에서 어떤 객관적인 느낌의 자리가 있고 우리는 그것을 원초적으로 지각하는 지도 모를 일이다.


이제 마쳐야 겠다. 결국 제자리로 돌아온 기분이다. 분명히 뫼비우스의 띠를 한바퀴 돌았는데부족했던 많은 것들은 다음 과제로 남긴다.


 

 

 

 

 

<참고문헌>----------------------------------------------------------------

 

동방정교회 성화상 관련>>

대니얼 B. 클린데닌, 동방 정교회 신학, 주승민 역, 은성, 1997, 서울

대니얼 B. 클린데닌, 동방 정교회 개론, 김도년 역, 은성, 1996, 서울

라경환, 성상화 파괴논쟁, 수원가톨릭대학 대학원 신학과 논문, 1994, 수원

인터넷 참조: 대한정교회(www.korthodox.org)’

 

미학 & 철학 관련>>

메를로 퐁티, 현상학과 예술, 오병남 역, 서광사, 1983, 서울

리차드 커니, 현대유럽철학의 흐름, 임헌규 외, 한울, 1992, 서울

진중권, 미학 오디세이 1,2,3’, 휴머니스트, 2003, 서울

미켈 뒤프렌, 미적 체험의 현상학 상., 김채현 역, 1991, 서울

B.러셀, 서양의 지혜, 이명숙,곽강제 역, 서광사, 1991, 서울

이진경, 철학과 굴뚝청소부, 그린비, 2004, 서울

 

미술사 관련>>

H.W.Janson, ‘History of Art’, Thames and Hudson, 1995, New York

H.H.Arnason, ‘A History of Modern Art’, Thames and Hudson, 1988, London

미셸 오, 세잔-사과하나로 시작된 현대 미술, 이종인 역, 시공사, 1996, 서울

 

 


 



[1] John of Damascus, Divine Images, 1.8, 16; 2.5

[2] 생명에는 무기물질을 지배하고 있는 기계론적 원리와는 다른 별개의 원리가 작용하고 있다고 보는 견해. 생명론에서 기계론과 대립하는 입장이다. 생기론과 유사한 개념으로 물활론(物活論)·유기체론·전체론이 있다. 그것들은 모두 기계론과 대립하며, 생명의 고유원리를 강조하는 점에서 공통되나, 물활론과 유기체론은 주로 무생물을 포함한 자연계 전체를 생명이 있는 것으로 파악하는 입장을 나타내는 데에 쓰인다. 원시인의 물활론적 사고라든지, 동양의 전통적인 유기체적 자연관이 그 예이다. 이에 대하여 생기론과 전체론은 근대과학의 성립 이후 무기물질에 대한 기계론적 법칙의 지배가 인정된 뒤에 나온 것으로 생물의 특이성을 강조하는 경우에 주로 쓰인다. 생기론자로서 유명한 인물은 H. 드리슈로서 그는 성게의 발생 실험을 바탕으로 하여 생명 특유의 원리인 엔텔레키(entelechy)의 존재를 주장하였다. 생기론이 생물체의 구성단위에서 독자적인 원리의 존재를 주장하는 것과는 달리 전체론은 구성단위 차원에서 독자적인 원리를 인정하지 않으나 그것들이 생물을 구성하면 개개의 요소로 환원되지 않는 특성이 생긴다고 본다.(야후백과사전: www.yahoo.co.kr)

[3] 대니얼 B. 클린데닌, 동방 정교회 개론, 김도년 역, 은성, 1996, 서울, p.129

[4] 대니얼 B. 클린데닌, 동방 정교회 개론, 김도년 역, 은성, 1996, 서울, p.p 119~159 참조

[5] 4차 콘스탄티노플 공의회

[6] 대니얼 B. 클린데닌, 동방 정교회 신학, 주승민 역, 은성, 1997, 서울, p.p.48~96 참조

 

[8]나를 보는 사람은 나를 보내신 분을 보는 것이다.”(표준새번역 요 1245)

[9]예수께서 대답하셨다.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랫동안 너희와 함께 지냈는데도, 너는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사람은 아버지를 본 사람이다. 그런데 네가 어떻게 '우리에게 아버지를 보여 주십시오' 한다는 말이냐?’ (표준새번역 요 149)

[10]그러므로 나는 여러분에게 알려드립니다.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사람은 아무도 "예수는 저주를 받아라" 하고 말할 수 없고, 또 성령으로 감동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예수는 주님이시다" 하고 말할 수 없습니다.” (표준새번역 고전 123)

[11] 메를로 퐁티, 현상학과 예술, 오병남 역, 서광사, 1983, 서울, p.188

[12] 리차드 커니, 현대유럽철학의 흐름, 임헌규 외, 한울, 1992, 서울, p.95

[13] Ibid., p.90

[14] 메를로 퐁티, 현상학과 예술, 오병남 역, 서광사, 1983, 서울, p.p.185~214 참조

[15] 대니얼 B. 클린데닌, 동방 정교회 신학, 주승민 역, 은성, 1997, 서울, p.67

[16] Ibid., p.67

[17] 메를로 퐁티, 현상학과 예술, 오병남 역, 서광사, 1983, 서울, p.51 참조

[18] 진중권, 미학 오디세이 2, 휴머니스트, 2003, 서울, p.69

[19] 메를로 퐁티, 현상학과 예술, 오병남 역, 서광사, 1983, 서울, p.51 참조

[20] Ibid., p.29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