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모음/신학이야기

[독서]공간의 표상 [위르겐 몰트만의 '창조 안에 계신 하느님' p.p.212~235를 읽고]

James Chae 2012. 12. 13. 11:54

위르겐 몰트만, 창조 안에 계신 하느님, 김균진 역, 한국신학연구소,2004,서울, p.p. 212~235(6창조의 공간)을 읽고


 

 

 


공간의 표상(表象)[1]

 


채 야고보


[들어가는 말]

 

하느님을 알 만한 일이 사람에게 환히 드러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그것을 환히 드러내 주셨습니다. 이 세상 창조 때로부터, 하느님의 보이지 않는 속성, 곧 그분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은, 사람이 그 지으신 만물을 보고서 깨닫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핑계를 댈 수가 없습니다.” -표준새번역 롬 1:19~20

 

우주적 실존에 점점 깊이 잠겨 들 수록, 안과 밖의 우주라기 보다는 하나인 우주가 존재한다는 진리를 더 충만히 깨닫게 된다. , 우리는 우주 에 있고, 우주는 우리 에 있다.”[2]- 매튜 폭스

 

김기덕 감독의 영화 빈집에서 인상적이었던 장면이 기억 난다. 영화 속의 주인공 태석은 우여곡절 끝에 감옥의 독방에 수감되는 신세가 되는데, 그곳은 침대도 의자도 책상도 없는 텅 빈좁은 공간이다. 몸을 감출 수 있는 어떤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주인공은 몇 단계의 수련(?)을 거치면서 점점 간수의 눈을 피해 숨는 방법을 터득한다. 어떻게 그 좁은 공간에서 가능할까? 그 해답은 바로 인간을 둘러싼 공간이 360도라는 데 있다. 그러나 인간의 눈으로 한 번에 볼 수 있는 공간은 180도이고, 결국 주인공은 인간의 시각으로 볼 수 없는 나머지 180도의 공간 속에 몸을 숨긴 거다. 인간의 시각이 미치지 않는 이 180도의 공간이 주인공이 찾던 빈집이며 그 속에서 그는 자신 만의 삶의 방식을 찾아 평안과 사랑을 얻을 수 있었다. 빈집은 거주자들의 부재로 생긴 것이 아니라 인간 시선이 부재한 공간에 존재한다.

 

늘 인간 실존을 생각할 때 이 공간의 문제를 등한시 할 수 없는 것 같다. 인간은, ‘빈집의 태석과 같이, 자신의 생존과 관계한 공간을 늘 필요로 한다. 이는 인간은 자신을 둘러싼 환경과 분리해서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코페르니쿠스 이후 인간은 무한한 우주속에서 마치 설 자리를 잃은 것처럼 두려움에 떨어왔다. 몰트만은 이러한 현상을 자기의 근거를 상실하였다는 허무주의적 느낌[3]으로 표현했다. ‘빈집의 주인공은 자신이 발견한 빈집에서 이러한 공포를 극복하고 평안을 얻었을까? 그런 암시를 주며 영화는 끝난다.

 

 

그러나 공간의 존재를 생각할 때 나는 다음과 같은 질문들을 하게 된다. 우리를 둘러 싼 공간은 정말로 실재하는 걸까? 메를로 퐁티가 말한 바와 같이, 그러한 공간은 세계로서 우리의 원초적 지각 이전에 이미 선재한다고 말할 수 있을까? 우리가 지각하지 못하는 ‘180의 공간 뿐만 아니라 인간의 지각적 한계를 넘어서는 무한한 우주의 공간을 우리가 생각하는 것도 과연 불가능한 걸까? 무한한 공간에 대한 수수께끼를 풀면 인간은 자신의 실존과 존재의 비밀을 발견하게 되는 걸까? 과연 우리는 어디에 서 있는 걸까? 또한 우리를 둘러싼 공간은 물리적 실재일까 아니면 연장된 대상의 반대일 뿐인가?

 

이러한 복잡한 생각들 속에서도 나는 공간이란 주제에 대해 내 나름대로 정의를 하고 싶었다. 먼저 이 글에서 나는 물리학적인 공간의 표상들을 간단하게 설명한 후에 몰트만이 제시한 신학적 공간의 표상을 정리할 것이다. 신학과 과학의 상호보충적인 관계설정을 고려하면 이에 대한 이해를 무시할 수 없을 것 같기 때문이다. 그것은 공간의 표상을 잡는데 실재론적인 측면을 배제하지 않고 어느 정도 균형을 유지하면서 존재론적인 접근을 유효하게 할 것이라 믿는다. 또한 이 글의 결론 부분에서 나는 공간에 대한 나의 단상을 간단히 적을 것이다. 사실 공간이 와 무관한 관계에 있는 것이 아니기에 이 부분이 내가 가장 고민하는 부분이었다.

 

 

[1] 물리학적 공간의 표상

 (이 부분은 브라이언 그린[4]의 저서 공간의 구조에 의존했다)

 

물리학에서 뉴턴과 라이프니츠의 공간의 표상에 대한 논쟁은 흥미롭다. 뉴턴은 시간과 함께 공간도 절대불변의 실체로 인식했다. 이러한 시간과 공간으로 구성된 우주도 절대로 변하지 않는 견고한 세계라고 생각했다.[5] 그의 논의의 핵심은 다음과 같다.

 

만일 당신이 임의의 시간에 어떤 물체의 위치와 속도를 알고 있다면 이로부터 그 물체의 모든 과거와 모든 미래의 위치와 속도를 알아낼 수 있다.”

 

결국 그는 이 우주의 기준이 되는, 어떠한 경우에도 운동을 판단할 만한 기준계frame of reference”[6]가 존재한다고 믿었다. 이는 다른 말로 절대시간절대공간이 우주의 기준으로 존재한다는 것이다. 절대 공간은 실재하는 물리적 실체이며 우리의 오감으로는 느낄 수 없지만 진정으로 정지해 있고 또한 모든 움직이는 물체는 이 절대공간에 대하여 움직인다고 한다.[7] 더 나아가 뉴턴은 영원불변의 신적개념을 절대공간에 부여한다. “절대공간은 어떠한 기준도 필요 없이 완전하게 정지해 있다. 절대공간을 이동시키는 것은 불가능하다[8]라고 하면서 하느님의 전능에 상응할 만한 절대성을 절대불변의 실체로서 절대공간개념에 부여하고 있다. 또한 헨리 모어[9]의 영향을 받은 뉴턴은 실재하는 물리적 실체로서 공간에는 영적인 물질spritual substance”도 존재한다고 생각했으나, “영적인 물질은 물체의 운동을 전혀 방해하지 않는다고 주장함으로써 자신의 역학법칙을 유지하기 위한 이중성도 보인다.[10]

 

이와 반대로 라이프니츠는 공간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었다. 그의 주장은 다음과 같다.

 

공간은 물체들 사이의 상대적 위치를 결정하는 편리한 방법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위치를 결정할 대상(물체)이 하나도 없는 공간은 더 이상 존재의 의미가 없다[11]

 

그는 알파벳을 예를 들어 a b c 등은 각각의 상대적 위치를 의미할 뿐 그 배열에서 알파벳을 없애면 그 의미를 상실한다고 말한다. 이와 같이 공간은 그들 사이의 관계를 서술하는 용어로서 의미를 가지며, 물체가 하나도 없으면 공간의 의미도 함께 사라진다고 주장한다.[12] 그에게 공간은 측정될 수 있는 물체들의 모든 연장과 관계들의 총괄개념[13]일 뿐이다. 그에게는 절대공간의 빈 공간의 표상이 불가능하다. 라이프니츠가 정의하는 모든 운동은 다른 물체를 기준으로 이뤄지는 상대운동일 뿐이다[14]. 비교할 대상이 없다면 어떤 물체가 운동하고 있다고 말하기 어렵다. 이는 모든 운동의 기준을 절대공간에 둔 뉴턴의 이론에 완전히 상반된다.

 

뉴턴의 절대공간도 라이프니츠의 공간부재설[15]도 공간을 모든 만물의 무대로 여긴 것은 동일하다. 이에 반해 아인슈타인은 시간과 공간은 우주의 비밀이 숨어 있는 물리적 실체로 보았다.[16] 전기와 자기, 그리고 빛의 성질을 연구하던 그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발견했다. “시간과 공간은 절대적이지 않으며 서로 무관하지도 않다. 이들은 관측자의 운동상태에 따라 얼마든지 다르게 보일 수 있으며 서로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다고 말했다. 그는 계속해서 시간과 공간은 한 객체의 부분적 특성에 불과하며, 우주의 진화과정은 시간과 공간의 비틀림과 불과분의 관계를 맺고 있다고 했다.[17] 공간의 비틀림은 중력에 의한 것이고 공간의 이러한 역동성은 뉴턴의 고전물리학의 절대적 공간의 표상을 상대적인 개념으로 바꿔 놓았다. 물론 아인쉬타인의 상대성이론이 특수한 상황에서 적용되는 것이라 일반적인 경우에 우리가 경험하기 어려운 것이지만 그에 의해 우리는 공간의 또 다른 표상을 알게 된 것이다.

 

아울러 아인슈타인에게 있어서 시간과 공간은 서로 밀접하게 얽혀 있으며 이들을 분리하여 생각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18] 그의 이론에 의하면 물체는 공간 속에서도 이동하며 시간을 따라 이동할 수도 있다. 뉴턴이 이 둘의 운동을 상호관계가 없는 독립적인 운동으로 정의한 것에 반해 아인슈타인은 이 둘 사이의 밀접한 관계를 발견했다. 예를 들어, 너무나 미미한 차이 때문에 우리가 인식할 수는 없지만, 달리는 자동차의 시계가 길에 서 있는 당신(그리고 길에 대하여 정지해 있는 모든 것)의 시계보다 느리게 간다는 주장을 하고 있는 것이다.[19] 이러한 사실은 공상과학영화에서나 나올 법한 장면을 상상케 한다. , 광속으로 움직이는 물체는 나이를 전혀 먹지 않는다는 이론에 근거한 타임머신말이다. 빛이 나이를 먹지 않듯 우리 인간도 빛의 속도로 움직인다면 과연 그러한 현상이 발생할까? 그의 이론에 의하면 그것은 가능하다. 우리가 아직 빛의 속도로 날 수 없다는 것이 문제이지만.

 

그러나 아인슈타인에 의해 우주의 실체에 더욱 가까워진 것 같았던 물리학은 양자역학의 등장으로 새로운 전기를 맞이한다. 여기서는 확률이란 모호한 개념이 적용되는데 이는 우리가 사소한 입자 하나의 위치와 속도조차도 정확하게 결정할 수 없다는 것을 공공연하게 주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결국 실험결과의 예측만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고전 물리학에서 말하는 국소성locality의 문제’, 즉 하나의 대상이 다른 대상에게 영향을 미치기 위해서는 상호 신호나 어떠한 연락방법을 반드시 취해야 가능하다는 물리학 이론을 양자역학은 부정한다. “우리가 한 장소에서 실행한 어떤 행위가 아무런 신호전달과정 없이 멀리 떨어져 있는 다른 장소에서 이루어지는 행위에 영향을 줄 수도 있다고 양자물리학은 주장한다.[20] 양자역학적 공간은 거리와 시간에 상관 없이 공간의 두 물체 사이에는 어떤 상호관계가 분명히 있음을 말하고 있다. 확률이나 우연을 믿지 않는 아인슈타인은 공간의 국소성을 강력 주장했지만 양자역학의 실험 결과들은 늘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렸다. “당신이 여기에 있는 물체에게 무슨 짓을 하면, 저기에 있는 물체는 지대한 관심을 갖는다[21]

 

양자물리학의 비국소성이론까지 오면 광대했던 우주가 갑자기 좁아지는 느낌이 든다. “두 물체가 양자적으로 상호 연관되어 있으면 그 영향은 공간을 초월하여 즉각적으로 전달된다[22]는 것이 양자물리학적 생각이다. 두 물체 간의 양자적 고리가 어떤 신호체계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하더라도(만약 그러한 것이 있다면 빛보다 빠른 무엇이 존재한다는 것이고 이는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원리에 반하는 것이다) 그들 사이의 상호관계성 만은 부인할 수는 없다. 양자적 고리의 수수께끼는 현재 대답이 유보된 상태이다.

 

여기서 더 진도를 나갈 수 없지만, 현재 우리는 물리학적 발전을 통해 이 우주가 한 순간에 시작되었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최초에 우주의 강력한 중력은 일순간 척력으로 작용해 그 안의 모든 내용물들을 밖으로 밀어냈다고 빅뱅 이론은 말한다. 그 빅뱅의 힘은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강력한 것이었다. 이 공간은 현재에도 서로에 대해 멀어져 가고 있으며 멀리 있는 은하는 관측자의 입장에서 더욱 팽창해 가고 있다. 그러나 풍선 위에 그려진 점들이 풍선이 팽창할 때 서로에 대해 멀어지듯이 여기에는 어떠한 중심도 없이 서로에 대해 멀어지고 있는 것이다.[23] 팽창의 중심은 없고 각각의 점들이 그 중심이 되는 것이다. 혹자는 빅뱅의 이론이 기독교 신학의 무로부터의 창조를 설명하는 것이라고 흥분하지만 실제로 최초의 우주는 중력에 의해 고밀도의 상태에 있었으므로 결코 고전 신학적으로 말하는 전적인 의 상태는 아니었던 바 섣불리 창세기 1장의 말씀을 적용하려 해서는 안 될 것 같다. 이러한 부분은 신학적으로 더욱 신중을 요하는 부분이다. 왜냐하면 성서의 창세기는 우주의 창조를 밝히는 물리학 서적이 아니라, ‘해방자유그리고 상생의 관점에서 인간의 실존과 하느님과의 관계에 대해 기록한 것이기 때문이다. 창세기는 인간과 환경 그리고 생태계의 상관 관계에 대해 우리에게 많은 단상들을 제공한다.

 

 

[2] 몰트만의 공간의 표상

 

창조된 세계는 신적인 존재의 절대공간속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창조의 결의를 통하여 그를 위해 비워진 하느님의 공간속에 존재한다. 세계는 자기 자신 속에 존재하지 않고 하느님의 세계-현존의 비워진 공간속에 존재한다. ”[24] [위르겐 몰트만]

 

몰트만은 [창조 안에 계신 하느님]의 제6창조의 공간에서 공간에 대한 표상을 3가지 측면, 즉 ㄱ)절대공간 ㄴ)창조의 공간 ㄷ)생태학적 공간 등으로 나누어 설명하고 있다. 하나씩 그의 주장을 정리한다.

 

ㄱ)  절대공간[25](하느님의 본질적인 편재 공간)

몰트만은 절대공간의 표상을 설명하기 앞서 먼저 공간의 동질성에 대해 말한다. 파르메니데스의 말을 인용하여 존재하는 모든 것은 신적인 공간 속에서 실존한다고 했고, “존재자는 동질적 전체이고, 그의 확대가 곧 존재자의 공간이다라고 했다. 이는 존재자가 존재하지 않는 공간이 없다는 것을 설명하는 것이다. 파르메니데스는 구슬 형태의 공간을 이러한 공간의 표상으로 여겼다고 한다. 구슬은 공간의 균형에 대한 표상으로 가장 적절한 예로 생각했던 것 같다.

 

플라톤의 경우는 공간을 그릇과 같은 것으로 여겨 대상들을 위한 한계가 없는 빈 그릇으로 공간의 표상을 말했다고 한다. “그릇이나 용기(容器)”모성적 은유이며 모든 대상을 포용하고 받아들인다는 의미를 지닌다. 그러나 이러한 공간 자신은 어떠한 대상일 수 없다고 한다.

 

몰트만은 이어서 아리스토텔레스의 공간을 설명하는데 지형학적(기하학적)인 것존재론적인 면으로 나누어 말한다. 공간은 측량이 가능한 ()의 범주에 속하고 이러한 양은 물체들의 확대에서만 측정된다고 한다. 결국 공간은 모든 확대된 물체들의 총체인 것이다. 지형학적인 설명으로 아리스토텔레스는 공간에 장소의 개념을 도입했다고 한다. 장소와 위치는 다른 대상들과의 관계 속에서 만 결정되는 것이다. 결국 공간은 모든 물체들이 차지한 장소들의 합계이다.

 

또한 존재론적으로 아리스토텔레스는 파르메니데스의 세계구슬이란 표상을 수용한다고 한다. 이는 공간의 완전성에 대한 요구를 충족시킨다. “만유의 공간”, “만유의 중심점이란 말은 모든 것을 포괄하는 자, 모든 것을 수용하는 자를 설명하기에 가장 적합하다. 결국 아리스토텔레스의 공간의 표상은 세계의 중심점과 제한에 대한 이미지를 포함하며, 이는 기하학의 차원들이 줄 수 없는 방향 정립을 인간에게 준다고 한다.

 

위에 열거한 공간의 표상들은 절대적 신적 공간을 인정하는데, 그 기초 위에 몰트만은 헨리모어의 절대공간의 표상을 접목하여 하느님이 편재한 공간개념을 설명한다. 이는 스피노자나 지요르다노 부르너와 같은 공간과 사물들의 연장을 동일시하는 범신론을 피해가는 방법이 된다고 그는 말한다. 하느님의 편재는 다른 말로 범재신론이라고 바꿔 표현할 수도 있을 것 같다. “하느님의 편재이론은 무한한 존재인 절대공간과 유한한 존재인 사물의 관계를 구분함으로써 둘 사이의 혼동을 피하게 해준다.

 

ㄴ)  창조의 공간[26]

그렇다면 이러한 절대공간속에 어떻게 창조의 공간이 존재할 수 있을까? 하느님으로 가득한 공간은 하느님 스스로 갖는 창조의 결의에 의해 하느님이 물러남으로써 빈 장소를 만들 수 있다. 그러나 이 창조의 공간하느님의 편재와 결코 동일하지 않다. 몰트만은 세계를 창조하신 하느님은 그의 현존을 수축시킨다고 했다. 이것이 바로 하느님의 침춤(Zimzum)”이다. 자기가 물러남으로써 비게 만든 장소”, 이곳이 바로 하느님의 창조의 공간이며 바로 이 세계이다. 이 공간에서는 창조자 하느님이 세계의 한계가 된다. 하느님은 바로 이 창조의 공간생태학적 공간을 창조하셨다고 몰트만은 말한다.

 

ㄷ)  생태학적 공간[27]

몰트만은 창세기 1장은 환경의 영역, 생활의 영역의 관점에서 그 명확성과 일관성을 갖고 있다고 한다.[28] 데카르트의 우주관은 자연을 대상화 함으로 언제든지 파괴할 수 있는 가능성을 담고 있지만 성서의 생태학적 관점은 모든 생명체와 환경은 서로 상생의 관계에 있음을 말해준다고 한다. 생태학적 관점에서 몰트만은 모든 생물은 그것이 관계하고 있고 그에게 알맞은 그 자신의 삶의 세계를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29]  몰트만에게 있어서 공간은 삶의 공간, 즉 특수한 삶이 관계되어 있는 환경[30]이다. 창세기 1장에서 이 환경은 다양한 생활의 영역으로 나누어지는데 하늘은 초월의 영역이면서 공기와 별과 다른 피조물들의 고향이기도 하다. 그리고 땅과 바다도 각각의 생활의 공간으로 존재한다.

 

몰트만은 하느님과 세계의 거함에 대해 하느님과 세계는 서로 상대방 안에 거하고 참여하는 관계 속에 있다: 하느님은 신적인 방법으로 세계 안에 거하며 세계는 세상적인 방법으로 하느님 안에 거한다라고 설명하고 있다.[31] 그가 말하는 생태학적 공간의 표상“’세계를 언제나 특정한 환경으로만 인지한다. 그러므로 생태학적 공간은 공간을 생물들의 제한된 환경으로 규정함으로 물리학에서 다루는 것 같이 공간의 물량화는 가능하지 않다. 그렇다면 어떻게 인간은 동물과 다르게 공간을 물량화 시킬 수 있는가? 몰트만은 막스 쉘러의 개념을 도입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다. 동물은 그가 살고 있는 이 환경의 구조의 안전한 울타리들과 제한 속에 있다그러나 인간은 환경을 세계로 구별하는능력이 있다. 그러므로 인간은 정신의 성찰상상의 능력으로 고정된 환경을 벗어나 세계를 인식한다. 인간도 동물과 마찬가지로 피조물임으로 환경에 얽매어 있다.” 그러나 인간은 하느님의 형상의 힘으로 모든 환경을 넘어 세계를 향하여 개방되어있다. 그러므로 인간은 공간에 대한 사유공간에 대한 물량화가 동시에 가능하다고 그는 정의한다.

 

이와 같이 몰트만에 의해 우리는 3가지 공간에 대한 표상을 얻을 수 있다. 정리하면, 하느님이 자신의 절대공간속에 비워 둔 창조의 공간생태학적 공간을 만드신 것이다. 생태학적 공간은 우리를 둘러싼 환경을 말하기도 한다. 물론 끝없이 팽창하고 있는 우주의 한계가, 몰트만이 말한 것 처럼, 하느님 바로 자신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모든 운동의 기준으로 삼았던 절대 움직이지 않는 뉴턴의 절대공간이 몰트만에게서 하느님이 편재한 절대공간이 된다. 이는 하느님 자신이 모든 운동의 기준이며 우주의 중심이고 우주의 한계임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뉴턴이 절대공간의 실체를 밝히지 못한 것처럼 창조의 공간속에서 우리도 그분의 절대공간을 알 수가 없다고 몰트만은 우리에게 말한다. 우리가 하느님을 인식하는 것은 바로 창조의 공간생태학적 공간’, 즉 이 세계속에서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느님은 절대공간”, “창조의 공간그리고 생태학적 공간모두에도 계시다.

 

 

[3] 몰트만의 공간의 표상에 대한 평가

 

하느님의 침춤에 의해 비워진 빈 공간, 창조의 공간에 대한 표상은 뉴턴과 라이프니츠의 상호절충적 개념이다. 몰트만은 뉴턴의 절대공간과 라이프니츠의 빈공간의 각각의 표상들을 창조의 공간속에 종합했다. 그러나 하느님이 팽창하는 우주의 한계라고 할 때 이것이 얼마나 과학자들에게 설득력 있게 다가갈 지 의문이다. 이런 관점에서 그의 공간의 표상도 형이상학적 범주 안에 있는 것 같다. 물리학자들이 실험에 의해 증명된 사실 이외의 것들을 믿지 않으려는 태도나 기독교인들이 물리학적 실험과 상관없이 성서의 내용을 문자 그대로 믿으려 하는 태도는 별반 차이가 없다고 생각한다. 상호 너무 반대되는 극단에 위치해 있다. 어쩌면 우리는 우리의 인식으로 이해할 수 없는 사건이나 상황에 대하여 인과론적인 결론을 찾기보다 그 보여지는 현상을 그대로 서술하는 것이 더 나을지도 모르겠다. 모세가 시내산에서 하느님을 만나 후 이집트의 왕 앞에 섰을 때 그는 과학적이고 논리적인 분석이나 인과율적인 방법을 통해 그가 만난 하느님을 증명하려 하지 않았다. 그는 그가 보고하느님께 들은그대로 말했을 뿐이다.

 

몰트만의 말처럼 하느님이 공간의 중심이며 공간의 한계라는 것이 사실이라면 우리는 어쩌면 존재론적인 불안을 상당히 덜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것이 과연 모든 문제의 끝일까? 우리는 공간을 그렇게 정의함으로써 복잡한 물리학적 문제를 피해가려는 것은 아닐까? 과연 믿음으로 온 세상의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있을까? 분명 우리가 살고 있는 공간에는 어떤 질서가 존재함을 기독교나 과학이나 모두 동의하는 바이다. 우리가 앞에서 살펴본 바 물리학을 통해 알게 된 공간의 질서는 너무나 오묘하다. 그리고 그러한 질서를 깨닫는 인간의 능력 또한 오묘하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이를 깨닫고 로마서 1장에서 하느님을 알 만한 일이 사람에게 환히 드러나 있다고 했는지 모르겠다.

 

신학과 같이 물리학도 진리에 대한 탐구를 그 동일한 목적으로 한다. 그렇다면 둘은 진리의 탐구에 상호보충적이고 통합적으로 서로의 협력을 모색할 수 있지 않을까? 여기서 브라이언 그린이 한 말이 떠오른다. “현대물리학을 고려하지 않고 존재의 근원을 추적하는 것은 어두운 방에서 알지도 못하는 적을 상대로 씨름을 벌이는 것과 다를 것이 없다.” [32] 둘 사이의 화해는 이미 시작되었고 몰트만의 공간의 표상 속에도 그 기류가 많이 감지되고 있다. 과학과 신학은 어쩌면 하나의 진리를 각각 다른 방향에서 찾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신학의 존재론적 고민과 과학의 실재론적 고민이 상호보충적으로 어떤 진리를 공통으로 발견하게 될 때 어쩌면 공간 속에서 인간의 실존적 불안은 많은 부분 위로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게 될지 모르겠다.

 

 

[나오는 말]

 

끝으로 나는 공간에 대한 나의 단상을 적으며 이 글을 마치려 한다.

 

내가 주목하는 것은 공간 속에서 을 가진 이다. 공간은 세계이고 이 세계는 나의 지각 이전에 이미 선재한다(메를로 퐁티). 그러나 가 없이 어떻게 세계인식하겠는가? 어쩌면 우리는 공간의 이미지만을 인식하는지도 모르지만 바로 그 인식의 지점공간간의 관련성의 출발점이며 공간에 대한, 즉 세계에 대한 인식의 출발점이다.

 

무한히 팽창하는 우주 공간이 오늘날 존재하는 와는 어떤 관계일까? 나는 더욱 넓어져가는 공간 속에서 결국 한 점으로 소멸되고 말 하찮은 존재일지도 모른다. ‘팽창하는 풍선위의 점들 같이 공간의 팽창은 각 대상들에 대해 서로 멀어지고 있다고 한다. 그것은 모든 팽창이 상호관련성 속에 놓여있다는 걸 뜻한다. 그러나 우주는 팽창하지만 양자물리학에 의하면 우주 내의 모든 물질들은 서로 연결되어 있는, 양자적 고리가 있다고 한다. 여기서 공간의 양적 거리와 시간은 중요하지 않다. 이곳에서 생긴 일은 우주 저편에도 동시에 영향을 줄 수 있는 그 무엇일 수 있다. 이제 신학에서 말하는 관계성만큼이나 물리학에서도 이 말은 중요하게 되었다.

 

여기서 잠시 물리학적인 공간에 대한 표상을 접고 공간의 관계론적인 측면에서 기독교의 성육신 교리에 대해 생각해 보자. 특히 기독교의 그리스도의 성육신 사건은 하느님의 공간과 인간의 공간이 동시에 공존하는 획기적인 사건이었다. 하느님이 성육신 하심으로 하느님은 더 이상 형이상학적인 하느님이 아님을 역사 속에서 증명하셨다. ‘보지 않고 믿는 자가 복이 있다고? 그렇다면 인간이 현존하는 공간에 우리의 지각적 인식으로 볼 수 있었던 성육신 하신 하느님은 무엇이란 말인가? 중요한 것은 하느님이 스스로 자신의 공간의 벽을 허무셔서 우리에게 가시적인 존재로 나타나셨다는 것이다. 하느님과 인간의 관계성에 공간적 제한이 없어진 거다. 나는 이 점이 기독교의 가장 난해하면서도 특별한 점이라고 생각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나는 우리가 인식할 수 있는 새로운 공간의 표상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마치 우리가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통해 하느님의 표상을 새롭게 인식한 것과 같이, 새로운 공간의 표상또한 우리가 지각에 의해 인식할 수 있는 것이어야 만 할 것이다. 그런 점에서 몰트만이 언급한 관계성 속에 있는 생태학적 공간은 나름대로 의미를 가진다.

 

우리를 둘러싼 세계 공간은 퐁티가 말한바 원초적 지각이전에 이미 선재한다. 우리를 둘러싼 공간은 너와 나 그리고 생태계와의 관계 속에 분명히 존재한다. 때론 인간 삶의 배경으로, 때론 인간 삶을 포함하는 이 공간이 우리가 지각하는 공간이다. 인간은 역사를 통해 삶의 공간의 지리적 분배 문제로 피비린내 나는 투쟁들을 해왔다. 언제나 물리적이고 양적인 설정은 공평한 것 보다는 물리적인 힘의 우의에 의해 결정되곤 했다. 공간을 지배하는 것이 어떻게 강자에게 만 가능한 걸까? 만약 각 물질들이 양자적 고리로 서로 연결되어 있는 것이 사실이라면, 우리는 이 피조세계의 생태계와 새로운 삶의 방식을 찾아야 하지 않을까? 같은 창조의 공간을 공유하는 인간과 생태계는 강자와 약자의 구별을 넘어서 서로 화해하고 조화를 이뤄야 한다. 팽창하는 공간 속에 양자적 고리를 가진 인간, 이러한 인간은 더 이상 소외를 느끼지 않고 그 연결 고리 속에서 인간과 인간, 인간과 생태계 간의 상호생존의 길을 모색하게 될 것이다. 여기서 타자와의 양적 공간의 거리는 더 이상 문제가 되지 않는다.

 

예수께서도 말씀하시길 그 날에 너희는, 내가 내 아버지 에 있고, 너희가 내 에 있고, 또 내가 너희 에 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33]라고 하셨다. 여기에서는 어떠한 공간의 설정도 문제되지 않고 라는 이 중요시 된다. 하느님의 절대공간도 인간의 생태학적 공간도 전제되지 않는다. 하느님과 인간의 상호 거함이 동시적으로 이뤄진다. 내가 중요성을 두는 것은 실존적 공간 속에서 동시성을 갖는 관계성이다. 그리고 나는 그리스도의 성육신도 인간의 이라는 공간속에 내재하신 하느님으로 인식한다. 모든 공간에 편재한 하느님 보다 나는 생태계에 내재한 하느님에 더 무게 중심을 둔다. 여기서 범신론과 범재신론의 논쟁보다는 내재하는 하느님이 더 강조되고 그리고 하느님은 모든 것들의 근원이 되신다. 그런 면에서 하느님 안내 안이 바로 내가 찾는 빈집이 아닐까 생각한다. 만약 그렇다면 그곳이 나의 실존적 공간이며 나의 공간의 표상이 될 것이다. 그리고 그 공간은 원초적 지각에 의한 어떤 느낌으로 내게 지각될 것이 분명하다.


 

 

[참고서적]

 

위르겐 몰트만, 창조 안에 계신 하느님, 김균진 역, 한국신학연구소,2004,서울

브라이언 그린, 우주의 구조, 박병철 역, 승산,2005,서울

이진경, 근대적 시.공간의 탄생, 도서출판 푸른숲, 1997, 서울

메를로 퐁티, 현상학과 예술, 오병남 역, 서광사, 1983, 서울

리차드 커니, 현대유럽철학의 흐름, 임헌규 외, 한울, 1992, 서울

매튜 폭스, 창조영성길라잡이[원복], 황종렬 역, 분도출판사,2001,경북 왜관



[1] 내가 여기에서 공간의 개념이라는 말 대신에 공간의 표상을 사용하는 것은 개념이란 말 보다는 표상이란 말이 더 지각적인 느낌을 주기 때문이다. 즉 겉으로 드러난 이미지이다이는 어떤 가변적인 이미지를 뜻하며 개념보다는 더 실재적인 느낌을 준다. 사실 물리적 공간의 표상이나 신학적 공간의 표상도 나름대로의 어떤 변하지 않는 실체보다는 인식적 표상에 근거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전자는 방정식과 실험에 의존하고 후자는 믿음에 의존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한 것들은 새로운 개념에 의해 끊임없이 변화될 가변성을 지닌 하나의 관념적 표상일 뿐이라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그러므로 나는 이 글에서 공간과 관련해서는 개념이란 말 보다 표상이란 말을 더 사용할 것이다.

[2] 매튜 폭스, 창조영성길라잡이[원복],황종렬 역, 분도출판사,2001,경북 왜관,P.72

[3] 위르겐 몰트만, ‘창조 안에 계신 하느님, 김균진 역, 한국신학연구소,2004,서울, p.213

[4] 브라이언 그린(Brian Greene) - 하버드대학교를 졸업하고 옥스퍼드에서 로즈장학생(Rhodes Scholar)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1990년에 코넬대학 교수로 부임하여 1995년에 정교수가 되었고, 1996년에 콜롬비아대학의 수학과 및 물리학과 교수로 자리름 옮겨 지금에 이르고 있다. 그는 25개 국가를 넘나들면서 기초물리학 및 고급물리학을 강의해 왔으며 초끈이론의 선두를 이끄는 물리학자로 명성을 날리고 있다. 그의 전작인 「엘러건트 유니버스」는 세계적인 베스트셀러로서 퓰리처상 최종후보에 오르기도 했다. 현재 그는 안데스와 뉴욕, 그리고 뉴욕시를 오가며 살고 있다.

[5] 브라이언 그린, ‘우주의 구조, 박병철 역, 승산,2005,서울, p.34 참조

[6] Ibid., p.60

[7] Ibid., p.60

[8] Ibid., p.62

[9] Henry More(1614~1687) 영국의 철학자. 링컨셔의 그랜섬 출생. 1631년 케임브리지의 크라이스트칼리지에 들어갔고, 그곳에서 플라톤·플로티노스의 저작을 통하여 결정적인 영향을 받았다. 또한 데카르트의 저작도 알게 되어 데카르트의 신비적인 체험을 엮은 여러 기록을 열심히 연구하였고, 당시 번성하기 시작한 근대과학적인 여러 연구에도 깊은 관심을 가졌다. 당시의 정치적 대변동도 그에게는 그다지 큰 영향을 주지 못하였으며, 죽을 때까지 크라이스트칼리지의 교수로 재직하였다. 신의 존재를 존재론적으로 다룬 그의 생득관념(生得觀念)의 설은 유명하다. 그는 그와 같은 관념의 실례로서 기하학적인 원()·인과(因果), 전체와 부분, 상사(相似) 등의 여러 관념을 들고 있다. 그러나 만년에는 이러한 이론적인 측면을 모두 버리고 신()에 대한 깊은 명상(冥想)을 하는 가운데에서 저작 생활을 했다. 저서로 《영혼의 불멸(1659)》 등이 있다.[출처:인터넷야후백과사전]

[10]  Ibid., p.63

[11] Ibid., p.64

[12] Ibid., p.64

[13] 위르겐 몰트만, ‘창조 안에 계신 하느님, 김균진 역, 한국신학연구소,2004,서울, p.233

[14] 브라이언 그린, ‘우주의 구조, 박병철 역, 승산,2005,서울, p.65

[15] Ibid., p.75

[16] Ibid., p.31

[17] Ibid., p.36

[18] Ibid., p.78

[19] Ibid., p.p. 90~91

[20] Ibid., p.136

[21] Ibid., p.181

[22] Ibid., p.182

[23] Ibid., p.p.331~332

[24] 위르겐 몰트만, ‘창조 안에 계신 하느님, 김균진 역, 한국신학연구소,2004,서울, p.235

[25] Ibid., p.p.228~235 참조

[26] Ibid., p.p.222~228 참조

[27] Ibid., p.p.215~218, 222~228 참조

[28] Ibid., p.224

[29] Ibid., p.222

[30] Ibid., p.223

[31] Ibid., p.226

[32] 브라이언 그린, ‘우주의 구조, 박병철 역, 승산,2005,서울, p.30

[33] 표준새번역 요 14 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