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모음/신학이야기

[독서]창조와 신체성 [위르겐 몰트만의 '창조 안에 계신 하느님' p.p.351~394]

James Chae 2012. 12. 14. 11:58

10신체성은 하느님의 모든 사역의 종점이다, [위르겐 몰트만, ‘창조 안에 계신 하느님’, 김균진 역, 한국신학연구소, 2004, 서울, p.p.351~394]


 


 


창조와 신체성




채 야고보 

 

[들어가는 말]

 

인간이 없으면 신도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가 신이 인간이 되지 않고는 완전한 신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증명했다…(중략)…즉 우리는 신을 초월적인 관념으로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있고 또 우리의 어두운 면을 밝혀주는 존재로 발견하다.” – 메를로 퐁티의 <기호> 中에서

 

 

몰트만은 이 장에서 신체성과 관련하여 다양한 유비론적인 설명을 하고 있으며 또한 신체성과 관련한 건강에 대한 단상을 이 장의 끝에서 적고 있다. 필자는 그의 아날로기아적 방법론에 입각한 구체적인 신학적 정리에 한편으로 감복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론 그의 방법론에 대한 회의적인 입장을 가지고 글을 읽었다. 먼저 그의 주장들을 정리한 후 끝으로 나의 의문점들을 나열할 것이다.

 



프리드리히 외팅거의 신체성은 하느님의 모든 사역의 종점이다라는 말에서 몰트만은 신체성에 대한 자신의 명제를 제시한다. “신체성은 하느님의 사역들에 상응하여 사람의 가장 높은 목적이요 그의 모든 사역들의 종점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그는 사람에 대한 이해를 역사,창조, 그리고 구원의 관점에서 접근한다. 이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신체성은 하느님의 창조의 사역들의 종점이다: 인간은 그의 신체성 속에서 하느님의 피조물과 형상임을 알게 된다. 결국 신체성은 인간의 목적이다.  2) 신체성은 하느님의 화해의 사역들의 종점이다: 말씀이 육신이 됨으로 착취당하고 병든 인간의 몸은 그리스도의 성육신 속에서 치유와 파괴될 수 없는 가치를 경험한다. 그리스도의 신체성은 인간과 하느님의 사귐을 가능하게 한다.  3)신체성은 영광과 평화의 나라를 향한 세계의 구원의 종점이다: ‘새 땅과 함께 새로운 변용된신체성은 구원의 최종적 성취이다. “구원은 의 은사와 함께 시작하며 의 변용과 함께 끝난다.”

 

 


1.영혼의 우위


신체성에 대한 서구 사상의 이분법적인 영과 육의 구별을 비판하며 몰트만은 이를 아날로기아적인 방법으로 초월적인 것(?)과 인간적인 것(?)의 상호 관련성 속에서 설명한다. “인간적인 것은 하느님의 역사와 그의 영의 환경으로부터 분리됨으로써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이들과의 통합과 구별을 가진 상응을 통하여 나타난다.” 전체성속에서 인간의 인식을 시도하고 있다.

 

먼저 그는 육보다는 영혼에 우위를 둔 서구 철학과 신학을 비판한다. 첫 번째가 플라톤의 몸의 죽음이고 두 번째가 데카르트의 육체기계그리고 마지막으로 칼 바르트의 다스리는 영혼의 섬기는 몸이다. 플라톤은 육신의 죽음에 대해 영혼의 불멸을 강조함으로써 육에 대한 영의 우위를 강조했다. 그에 의하면 영과 육은 서로 무관한 것이며 영은 육신이라는 감옥에 갇힌 것이다. 육신은 죽음에 이르고 영은 신적인 것으로 나아간다. 몰트만은 이러한 플라톤에 대해 다음과 같이 비판한다. “플라톤의 죽음의 명상신체성의 저질성을 말하고 있다. 그것은 몸의 삶으로부터 생동적인 관심을 빼앗으며 몸을 영혼의 무관심과 껍질로 하락시킨다.” 그러므로 여기서 몸의 차별과 하락, 탈정신화가 나오고 이는 창조신앙에 위배된다는 것이다.

 

데카르트는 영혼을 인간들의 육체 속에 있는 참된 주체’, 의식으로 이해했다. 그는 과거의 -영혼이분법을 주체-객체의 이분법으로 바꿔 놓은 것에 불과하다고 몰트만은 말한다. 육신에 의존한 지각은 사유를 통한 자기인식에 밀려 결국 육신의 지위는 사물의 위치에 까지 내려간다. 데카르트는 육신 없이도 인간이 존재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 나는 참으로 육체와는 다르고 육체 없이도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이다. 결국 는 사유함으로써 존재하는 것이다.” 육신은 데카르트에 있어서 하나의 시계와 같은 기계일 뿐이라고 몰트만은 말한다. 여기서 주체와 객체, 지배와 피지배의 관계가 정당화 되며 육신은 한갓 정신의 도구에 불과하다. “이렇게 사람을 정신화시키는 형식은 육체를 거짓된 비정신성 속으로 추방하는 대가로서만 얻어질 수 있다고 몰트만은 비판한다.

 

몰트만은 칼 바르트의 신체에 대한 개념을 플라톤과 데카르트의 개념을 약간 수정한 것이라고 비판한다. 다음은 몰트만이 인용한 바르트의 말이다.

 

하느님의 영을 통하여 사람은 주체이며, 물질적 유기체의 형태요 삶이며, 자기의 몸의 영혼이다. 그는 완전히 그리고 동시에 두 가지인데, 이 두 가지는 지양될 수 없는 상이성과 분리될 수 없는 통일성과 파괴될 수 없는 질서 속에 있다

 

몰트만이 비판하는 바 바르트는 영혼과 몸을 질서 잡힌 통일성속에서 이해하며 이 질서는 결국 하느님의 영을 통해 정립된다는 것이다. 이는 하느님과 세계가 지배와 피지배의 질서를 가지는 것 같이 영과 몸도 이에 상응한다는 것이다. 몸은 영이 다스려야 할영역이다. 몸은 영이 다스리고 극복하고 사용해야 할 대상이다. 몰트만에 의하면 바르트가 사용하는 하느님의 형상에 대한 상응은 다음과 같다.  “사람은 자기 자신에게 속하고 자기 자신을 지배하고 자기 자신을 사용한다는 점에서 그의 주인인 하느님의 형상이다. 그는 자기를 지배함으로써 그의 신적인 주인에게 상응한다.” 몰트만은 바르트의 이러한 개념을 신학적 주권론이라고 비판한다. 다음은 바르트의 말이다.

 

지배하는 아버지와 순종하는 아들의 내재적 삼위일체의 질서와 세계에 대한 하느님의 지배의 외적 삼위일체의 질서는 서로 상응한다.”

 

몰트만의 견해에 의하면 바르트의 이러한 상응에서 하늘과 땅”, “영혼과 몸”, “남자와 여자라는 주종의 상응관계가 형성된다고 말한다. 결국 여기서 하늘-영혼-남자라고 하는 상위 개념이 도출된다고 몰트만은 비판한다.(그러나 이 책의 이전의 장들에서 살펴본 바에 의하면 몰트만은 하늘-초월-미래-내재-현재보다 우위에 두고 있음을 나는 지적하고 싶다. 여기서 몰트만은 자신이 가한 바르트 비판의 근거로써 자신 또한 비판을 받을 수 있음을 간과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2.생기 있게 된 몸

여기서 몰트만은 플라톤과 데카르트에 반대하여 히브리적 육체 개념을 설명하며, 바르트의 주권적 몸과 영혼의 관계에 반대하여 몸과 영혼의 순환적 형태에 대하여 말한다. 그리고 다음으로 성령과 형태에 관하여 아날로기아적 관계를 설명한다. 여기까지가 몰트만이 말하는 신체성에 대한 중심 개념이고 그 다음에 이어지는 부분들은 이를 확대한 성령론으로 이어진다.

 

하나씩 정리하고 넘어간다.

 

 

2-1.육체에 대한 구약성서의 견해

구약의 인간은 항상 하느님의 역사속에서 자기를 경험한다. 소명과 해방, 계약과 약속의 역사가 그것이다. 이 하느님의 역사 안에서 사람은 언제나 전체로서 나타난다. 여기서 플라톤이나 데카르트의 영혼과 몸을 구별하는 개념은 없다. 히브리 사상은 다분히 현상학적인데 다음은 몰트만의 말이다. “히브리적 사고는 어떤 일의 본질과 구성 요소를 묻지 않고 그것의 되어감과 작용을 묻는다. 그러므로 사람도 자기 자신을 성찰과 반성을 통하여 인식하지 않고 그의 하느님의 계약과 약속의 역사에 대한 경험 속에서 인식한다.” 또 계속해서 구약성서의 인간학은 정의를 내리기보다 이야기를 한다. 이 이야기들 속에서 사람은 개념들을 통하여 확정되지 않고 오히려 그의 삶의 관계들 속에서 묘사된다라고 몰트만은 정의한다. 사람은 그의 육체를 가지고 생각하며 육과 영은 많은 부분에서 서로 상응한다. 여기서 영혼의 우위는 없다. 그러므로 성서의 인간학은 육과 영이 서로 영향을 주는 파트너적인 사귐의 관계의 표상을 가진다고 그는 말한다.

 

 

2-2.몸과 영혼의 순환적 형태

몰트만은 바르트의 주권적 삼위일체에 대하여 비판하며 순환적인 사귐의 삼위일체를 말한다. “삼위일체 되신 하느님의 통일성은 그의 지배의 주체성이나 주권에 있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독특하고 완전하며 순환적인 사귐 속에 있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형상을 가진 인간은 하느님과 일방적인 지배와 피지배의 관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순환적 사귐의 삼위일체에 상응하여 서로 순환하는 사귐의 관계에 있다. 우리의 몸과 영도 이에 상응하며 하느님과 세계의 관계도 이러한 순환적인 관계라고 할 수 있다. 더 나아가 사람의 하느님의 형상을 신적인 순환의 장 안에서 파악할 수 있다. 즉 상호간의 침투와 구별을 가진 통일성의 순환적 관계로 볼 수 있다. 여기서 육체에 대한 영혼의 우위도 영에 대한 육체의 우위도 인정되지 않는다. 결국 영 안에 계신 하느님의 현존은 의식이나 영혼’, 또는 이성과 의지속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모든 유기체 속에 , 즉 사람이 환경 속에서 발전시키는 역사적 형태속에 있다는 것이다.

 

이 사람의 형태는 사람-환경의 장, 즉 생태문화적 형태 속에서 생성된다. 이는 인간이 나고 자란 자연과 사회와 문화 그리고 역사 안에서 형성되는 형태이다. 이 형태는 사람이 그 속에서 자기와 동일화 될 수 있고 또 그것과 자기를 동일화 할 수 있는 환경들과의 관계의 형식이다.” 또한 아울러 이 형태는 이러한 외적인 구조와 관계하면서 동시에 몸과 영혼, 의식적인 것과 무의식적인 것 등과 같은 내적인 구조들 속에서도 발전한다. 결국 사람은 자기 자신과의 관계에 있어서도 그의 형태를 형성해 간다. 여기서 몸은 영혼에게 영혼은 몸에게 상호 정보를 주고 받으며 일치에 이른다. 이러한 관계를 몰트만은 몸과 영혼의 계약이라는 말로 정의한다.

 

여기서 인격의 중심화 문제가 대두되는데, 인간의 지...육을 통합하는 통일체의 중심은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몰트만은 인간의 인격을 인간의 생동적 형태속에서 이해하는 유동적 중심화로 말한다. 이러한 중심화는 특수한 관심들의 근거 위에서 생성하며 이 관심들을 나타낸다. 한 특별한 관심이 사라지면 중심화도 이완된다. 그리고 이 관심을 만족시키기 위하여 이루어진 이성과 의지의 구조도 다시 해체된다.” 그는 계속해서 이 중심화들은 경직되어 있지 않다. 그들은 어디에나, 언제든지, 모든 사람들에게 있어서 동일하지 않다. 그들은 대개의 경우 형성과 해체의 리듬 속에 있다고 말한다. 이러한 유동적인 인격의 중심화로 인간과 인간의 관계는 신뢰할 수 있는 관계를 형성하기 위해 신뢰가 중요시 되고, 이 신뢰는 약속과 이를 지키는 성실함속에서 형성된다고 몰트만은 설명한다. 결국 몰트만은 인간의 형태화는 인간의 내적, 외적 신뢰성의 성실함의 과정으로 이해한다. 몰트만의 윤리관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이는 결국 성화과정과 상응한다고 하겠다.

 

 

2-3.성령과 형태

여기서 몰트만은 앞 절에서 논한 인간의 내.외적인 구조에 의해 형성된 인간의 형태와 사람 속에 있는 영’, 창조적인 영과의 관계에 대해 논한다. 몰트만은 사람 안에 있는 영에 대한 현대적 개념이 자연 속에 있는 영에 대한 통찰을 상실함으로 인간을 자연과 결별하게 했으며 그 결과  왜소하고 일면적인 것이 되었다고 비판한다. 하느님은 영을 통해 피조세계를 존재하게 하고 살게 한다. 아울러 현대철학의 몸 안에 있는 영에 대한 통찰 또한, 데카르트에게서 보여지듯이, 자기 자신에 대칭하고 육체와 구분하는 일면적인 면을 벗어나지 못했다고 몰트만은 비판한다. 여기서도 몰트만은 영을 자연의 장과 신체성 안에 통합시키기 위하여 우주적 영에 대한 통합적이고 종합적인 이해를 강조한다.

 

몰트만이 정의하는 영이란 모든 개방된 물질의 체계들과 삶의 체계들의 조직의 형식들과 교통의 형식들이라고 한다. 여기서 그는 다음과 같은 사실들을 추론하는데, ‘사람의 의식은 성찰 된 영으로 사람과 자연, 사회의 유기체적 관계 속에서 필수적으로 형성된다는 것이다. 또한 사람의 신체성에 대해서는 세가지로 구분하는데, 사람은 -[1]이고, ‘-영혼[2]이며, 그리고 -형태[3]이다. 인간의 몸과 영의 형태 안에 역사하는 영은 창조적 영이며 우주적 영이다. 그러나 몰트만은 이 영이 성령과는 다르다고 설명한다.

 

신학적으로 이 영은 하느님의 영이요 피조물 속에 있는 하느님의 현존이라고 불린다. 그러나 성서의 언어 사용에 의하면 이것은 성령이 아니다. 성령은 구원과 성화의 영, 즉 구원하고 새롭게 창조하는 하느님의 현존이며 그리스도의 영이며 신자들의 사귐 속에서 형태가 되게 하는 하느님의 영이다.”

 

이 성령은 창조의 영을 배제하지 않으면서 사람의 영혼과 이성, 몸을 사로 잡고 변형시킨다. 성령은 신자들을 부활한 그리스도의 형태를 가지게 돕는다. 그리고 성령의 현존은 이성적인 소리 뿐 만 아니라 무의식적인 육체 언어 속에도 나타난다. 이러한 영 안에 현존하는 그리스도의 신체성은 다음과 같은 때 경험된다. , “그리스도와 같은 몸의 형태가 되는 일과 성령이 몸 안에 거하는 일은 사람 전체가 자기를 하느님에게 바칠 때이다.

 

 

2-4.선취로서의 성령

여기서 몰트만은 선취의 구조로서의 영, 즉 희망으로서의 성령에 대해 말한다. 모든 생물들은 미래를 향해 개방되어 있다는 것이 그의 명제이다. 몰트만에게 있어서 미래란 개방된 가능성들의 활동 영역이다. 이러한 미래는 선취의 성격을 갖는데 이는 생물들의 미래가 과거나 환경의 제약 속에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람의 영은 어떤 고정된 정체성을 의미하지 않고 신체적-영혼적인 인간의 모든 실존의 선취적 구조를 의미하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인간의 활동과 그의 의도들과 그의 희망 속에서 사람의 영은 삶의 영으로 나타난다. 그리고 자기 안에 집약되어 있는 동시에 개방되어 있는 전체로서의 사람은 그의 미래의 기획 속에서 산다.”

 

사람은 언제나 그가 바라는 것들을 현재의 삶의 형태 속에 반사하며 삶의 기다림속에서 역사를 형성해 간다. 이러한 삶의 방향은 인간의 모든 사유의 행위들선취의 형식을 가짐을 전제한다. 몰트만은 사유의 행위들을 이성이라 하며 이 이성의 본질을 생산적인 상상력에서 발견한다고 한다.

 

몰트만이 말하는 선취는 개인적 영역보다 사회적인 교통의 영역에서 강하게 나타난다고 한다. 그리고 인간이 미래의 시간적 차원 속에서 자기 앞에 있는 그 가능성의 개방된 활동영역을 인식할 수 있는 한, 사람들의 유기체와 사회적 조직들이 가진 선취의 구조를 이라고 부를 수 있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몰트만은 여기서 이러한 희망과 동일시 하는 것 같다. 그는 영이 없는상태를 개인의 죽음과 집단의 죽음이라고 정의한다. 그러므로 성령은 선취의 영이며 희망의 영이라 할 수 있다.

 

 

2-5.교통으로서의 성령

몰트만은 교통의 구조를 성령이라 한다. “선취적 구조가 미래와 관련한다면 이 교통의 구조는 다분히 현재적이다. 간단히 정리해 본다.

 

몰트만은 인간의 삶의 관계성에 대해 사람의 삶은 자연적이며 사회적인 교통에 의존하고 있으며 이 속에서만 실존한다. 삶은 관계이다. 삶은 교환이다.”라고 말한다. 계속해서 그는 사람의 삶은 사귐의 삶이라고 말하며 그것은 공동체 속에 있는 교통이다라고 한다. 이 교통은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일어난다. 영을 현대철학같이 개인적 삶에 국한 시킨다면 인간의 삶의 이 관련성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인간 개개인의 존재는 무슨 의미인가? 몰트만은 이 영은 사람들을 보다 더 높은 삶으로 함께 묶고공동적 영역 속에서 다시 특별한 개인들로 만드는 사귐의 신성이라고 함으로 공동성 속에서의 개개인을 정의한다. 이러한 개인은 결코 전체로부터 분리될 수 없으며 사랑 안에 있는 영안에서 하나이다. 여기서 몰트만은 영을 공동의 신성이라고 표현한다. 그 속에서 공동의 영역은 사람이 그 속에서 인격들이 되는 단합과 일치로 이루어진다.” 이러한 교통의 형식들은 앞에서 말한 선취의 형식들과 서로 긴밀히 관계한다. 전자가 후자를 위축시켜서는 안 된다고 말하며 몰트만은 전체 속에서도 각 개인을 존중하는 민주주의시스템에 긍정적인 견해를 밝힌다. “그러므로 영으로 충만한, 인간적인 모든 사회는 자기를 선취적 민주주의로 발전시킴은 물론 참여적 민주주의로 발전시킬 것이다.” 이것이 몰트만이 말한 선취적(현재에 있지만 아직 실현되지 않은 미래)이면서도 참여적(현재)인 민주주의의 모델이다.

 

 

2-6.삶의 긍정으로서의 성령

여기서 몰트만은 영은 사랑이다라고 말한다. 그는 사랑하며 사랑 속에서 받아들여지며 긍정적인 삶만이 인간적으로 영위 되는 삶이다라고 말한다. 사랑함으로 인간의 삶은 기쁨이 충만하지만 역설적으로 인간은 삶을 사랑할수록 더욱 더 강렬하게 삶의 고통도 경험한다.” 인간은 사랑을 통하여 행복을 가지는 동시에 고난의 능력도 갖는다. 이것을 몰트만은 일종의 파라독스라고 하면서 생동적인 삶을 경험하면 할수록 죽음은 더욱 치명적으로 경험된다고 말한다. 이러한 전제 위에 몰트만은 겨자씨의 비유로 논의를 확대한다. 그는 이 비유를 통해 삶 이전의 죽음을 설명한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며 혼자 남게 된다에서 이 혼자는 열매를 맺지 못한 상태 , 삶 이전의 죽음이라고 몰트만은 설명한다. “이 죽음은 자기 안에 묻혀 있고 살지 않고 자기를 개입하지 않는 삶인 것이다. 그러나 삶이 몸으로 영위 되는 한 인간은 자신의 환경과 세상으로부터 상처를 입을 수도 있고 죽을 수도 있게 된다.” 그러나 인간은 자신의 헌신을 통하여 열매를 맺는다. 이 헌신은 자기의 삶을 (의를 위해) 내어 주는 것이고 자기로부터 나와 자기를 드러내고 자기를 개입시키며 사랑하는 것이다. 몰트만은 계속해서 살지 않은 삶은 죽을 수 없다. 이에 반하여 참으로 살았고 충만한 긍정과 함께 산 삶은 죽을 수 있다고 말한다.

 

이러한 삶 이전의 죽음으로부터 몰트만은 아날로기아적으로 부활에 대하여 죽음 이전의 영원한 삶의 개념을 이끌어 낸다. “부활의 신적인 힘 속에서 사는 삶은 죽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은 죽음을 통하여 죽음 뒤에 영원한 삶으로 변한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 속에서 드러난 하느님의 영원한 삶이 전자에서는 사랑의 헌신 속에서 나타나고 후자에서는 죽은 자들의 부활 속에서 나타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죽음은 사랑의 헌신으로 이해되며 그의 부활은 영원한 삶으로 각각 이해된다. 이 둘은 그리스도 안에서 유비적인 관계 속에서 결코 분리되지 않는다고 몰트만은 생각하는 것 같다.

 

 


3. 건강과 병에 있어서의 삶


우리는 지금까지 인간의 신체성에 대한 정의를 몰트만의 관점에서 살펴 보았다. 이제 여기서 몰트만은 인간의 신체성과 관련한 건강에 대한 문제를 다양한 차원에서 접근할 것을 말하고 있다. 간단히 살펴보자.

 

몰트만은 현대 사회의 건강과 병에 대한 이해의 반성을 제기한다. 몰트만은 건강의 이해가 인류의 역사를 통해 다르게 변천해 왔다고 설명한다.(자세한 내용은 책을 참조하고 여기서는 간단한 언급만 한다.) 특히 프로이드의 건강개념은 노동의 능력과 향유의 능력이라고 정의했는데 이는 중심적 가치를 생산과 소비에 둔 산업사회의 표상이라고 몰트만은 비판한다. 아울러 세계보건협회의 건강의 개념은 육신의 고통이 없고 사회보장이 잘된 유토피아적건강 개념이라고 비판한다. 그렇다면 몰트만이 말하는 건강은 무엇인가? 그는 건강의 인격화를 말한다.

 

인간성의 구원을 위하여 사회적으로 빼앗겨 버린 건강의 인격화를 달성하고 이리하여 사람이 인간적인 의미에서 건강하다고 불리울 수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더 확대해서 설명하면 건강은 사람의 신체적, 정신적, 사회적 복지의 객관적으로 확정할 수 있는 상태로 생각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변화하는 상태들에 대한 사람의 주관적으로 확정될 수 있는 태도이다. 이는 고통과 병과 죽음을 자율적으로 극복할 수 있는 능력을 말한다. 그러므로 “’건강은 방해(고통,,죽음)의 부재이다. 건강은 이 방해들과 함께 살 수 있는 힘을 말한다.’ 그렇다면 건강은 전반적인 복지의 상태가 아니라 인간 됨에의 힘’”인 것이다. 인간 됨에의 힘은 사람의 행복과 그리고 고난에의 능력 속에서, 삶의 기쁨을 받아들이는 데에서, 그리고 죽음을 슬퍼하는 가운데에서 나타난다.” 이와 같이 몰트만은 인격과 관련된 건강의 정의를 내리고 있다. 결국 건강은 인간의 삶의 의미가 아니라 인간이 삶 속에서 만나는 많은 의미 중 하나인 것이다.

 

사람됨의 힘으로 건강을 이해할 때 병든 사람을 우리는 어느 기관의 고장으로 여기지 않고 그 사람 자체를 고려하게 된다. 몰트만은 여기서 네가지 차원에서 병든 사람에 대한 이해를 설명한다.

 

1) 병든 사람은 자기 관계에 있어서 새로운 자기 자신을 경험한다. 2)’사회적 관계에 있어서 그는 사회적 관계의 방해, 인간적인 관심의 상실, 소외 등을 경험한다. 3)’생활사적으로 그는 자신의 삶의 프로젝트와 삶의 경험 사이에 갈등을 일으킨다. 즉 희망을 잃거나, 이별을 경험하거나 죽음을 미리 경험한다. 4)’초월의 영역과의 관계와 관련하여 그는 의미와 무의미의 경계에서 혼란을 겪는다. 그는 삶의 무의미를 경험한다.

 

그러므로 이러한 차원들을 고려할 때 인간의 병을 단순히 신체의 고장과 같이 일차원적으로 접근해서는 안된다는 것이 몰트만의 입장이다. 그렇다면 인간은 건강에 대하여 어떠한 입장을 취해야 하는가? “사람됨의 힘은 연약하고 죽을 수 밖에 없는 삶을 받아들이고 긍정하고 사랑하는 데에 있다라고 몰트만은 조심스러운 결론을 내리고 결국 부활의 희망은 앞을 향한 창조의 신앙이다라고 하면서 결국 희망의 신앙을 제안함으로 그의 논의를 믿음의 장으로 축소시키고 만다. (나는 여기서 그가 말한 인간 됨의 힘을 믿음의 장에서 벗어나서 보면 인간의 의지라고 정의할 수 있다는 생각이든다. “건강은 이 방해들과 함께 살 수 있는 힘이라는 그의 말 속에서 고통 속에서도 삶의 의지를 발휘하는 인간의 모습이 연상되기 때문이다.)


 

 

[나오는 말]


정리해보면 몰트만은 인간의 신체성이 영과 육의 이분법적 또는 지배와 피지배적 관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삼위일체의 순환적 사귐의 유비로서 영과 육은 순환적 사귐 속에서 하나이며 결코 분리될 수 없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이러한 인간의 형태는 삶과 자연 그리고 사회 등 외적인 관계 뿐만 아니라 인간 내면적인 관계성 속에서 영향을 받으며 형성된다고 한다. 그리고 이 형태는 성령과 밀접하게 관계하며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몸까지 나아간다. 결국 이 신체성은 하느님 사역의 종점이면서 미래를 향하여 개방되어있는 것이다. 여기서 하느님 사역의 종점이란 말은 인간의 신체성이 역사 속에서 하느님의 창조와 화해와 구원의 사역을 종합적으로 들어낸다는 말이다.

 

나는 몰트만이 말하는 신체성에 대한 그의 신학적 업적을 긍정적으로 받아 들인다. 그러나 나의 긍정은 많은 부분 이미 신학적으로 검증된 부분임으로 여기서 생략하고 내가 의문점을 갖는 부분만 기술하면서 이 글을 마친다.

 

1. 몰트만이 말하는 삼위일체의 순환적 사귐에 대한 유비로서의 인간의 영과 육의 관계지상적인 것 또는 내재적인 것에 대하여 초월적인 것을 우위에 둠으로써 성립하는 것이다. 이러한 유비관계는 철저히 서구적인 사고의 발상이며 동양적인, 특히 한국적인 사고에서는 성립할 수 없다. 왜냐하면 한국의 전통사상들은 초월적인 것내재적인 것의 구별을 중요시하지 않는다고 한다. 박재순 교수는 이러한 예로 사상을 들고 있다. “하나이면서도 전체이고 전체이면서도 하나인 이 한은 결코 객체적으로 분리하거나 아날로기아적으로 서로 상응시켜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이다.

 

2. 이러한 관점에서 인간을 영과 육으로 나누어 설명하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을지 의문이다. 몰트만 또한 영과 육의 이분법적인 구별을 극복하려 하고 있지만 그것은 서구철학의 근대성에 대한 반론의 차원을 벗어나지 못한다. 그의 전반적인 아날로기아적 방법론은 하늘-초월-미래-내재-현재보다 늘 우위에 두고 있다. 왜냐하면 그의 아날로기아적 방법이 성립하려면 이 지상의 것은 언제나 천상의 것을 거울로 삼아 이해해야 한다. 나는 이러한 유비에 반대하며, 또한 인간에 대한 이해를 육과 영으로 나누었다가 다시 합치는 것에 반대한다. 인간은 그냥 인간이다. 메를로 퐁티는 의식의 육화를 말하면서 서구 철학의 이분법을 인간의 신체 속에서 통합하려 했다. 그에게 있어서도 육과 의식의 구별은 별 의미가 없다. 인간은 그냥 인 존재이다. 이는 신체를 마음의 산물로 보는 유심론이나 신체가 활동함으로써 마음이 존재한다는 유물론과도 구별된다. 왜냐하면 인간은 육적이면서도 정신적인 을 가진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나는 몰트만이 말한 몸과 영혼의 순환적 형태라는 이분법적인 관계 설정을 반대한다. 즉 인간을 말할 때 몸과 영혼 간에 관계성이 있다는 설정 보다 인간은 그냥 이다라고 나는 말하고 싶다. 그러므로 내재하는 하느님의 영은 인간의 몸 에 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몸으로 말하고, 먹고, 마시고, 움직이셨으며 그리고 승천하셨다. 복음서는 이를 많은 제자들이 보았다고 함으로 지각에 의해 제자들이 예수님을 인식했음을 증거하고 있다.

 

3. 마지막으로 남는 의문은 역사적 예수에 대한 부분이다. 부활한 예수가 아닌 역사 속에서 인간과 같은 삶의 형태를 가진 신체적 존재로서의 예수님 말이다. 어떻게 예수님은 일반 모든 사람들이 공유한 하느님의 형상과 또한 자신 만의 성자로서의 그리스도의 형상을 자신의 신체 속에 33년 동안 동시에 가지셨는가? 이러한 그리스도의 신체성이 부활 이전에 드러난 사건은 변화산상에서 였는데 예수께서는 수제자들의 눈 앞에서 변화된 모습을 보이심으로 이를 증명했다고 복음서는 말하고 있다. 그는 철저히 인간이면서도 하느님이셨다. 어떻게 이 두 가지가 예수님 안에서 동시에 존재했던 것일까? 부활하신 후에 이 둘이 하나로 합쳐진 것일까? 앞에서 언급했듯이 그는 부활 후 신체적 활동을 하셨다. 그러나 부활 이전에 그가 가졌던 인간의 신체성과는 차원이 다르다. 부활이전의 그의 신체는 시공의 제한을 받았지만 부활 후에는 시공을 초월한 신체성을 보였다고 성서는 증거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몰트만의 관점을 빌려오면 역사적 예수의 신체성안에는 그리스도의 신체성이 가능성으로 내재해 있는 것이라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마치 씨앗 속에는 생명이 가능성으로 내재해 있는 것과 같이. 그러나 이것으로 나의 의문이 모두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결국 창조의 하느님의 형상그리스도의 형상이 동시에 공존했던 역사적 예수의 신체성에 대해서는 여전히 의문으로 남는다.


 

 

 

 

<참고서적>

한국현상학회 편, 몸의 현상학, 철학과 현실사, 2000, 서울

박재순, 한국생명신학의 모색, 한국신학연구소, 2000, 서울

메를로 퐁티, 현상학과 예술, 오병남 역, 서광사, 1983, 서울

피에르 테브나즈, 현상학이란 무엇인가, 심민화 역, ㈜문학과 지성사, 1995, 서울



[1]창조적인 영에 의하여 침투되어 있고 생동하게 되었고 형성된 신체성

[2]창조적 영이 사람의 영혼, 감정, 생각, 의도 등에 침투되어 생동하게 되고 형성된 신체성

[3]창조적 영에 의해 형성되고 그 속에서 몸과 영혼이 하나된 신체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