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조와 육화(肉化)의 이미지
가시적인 세계와 불가시적인 세계의 ‘만남’[1]
채 야고보
[숨 고르는 말]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어둠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물 위에 움직이고 계셨다.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빛이 생겨라" 하시니, 빛이 생겼다.” -표준새번역 창 1장1절~3절
“영혼의 바탕은 어둡다” [2]–마이스터 에카르트
“만물의 아무것도 침묵만큼 하나님을 닮은 것은 없다”[3] –마이스터 에카르트
“창조력인 하나님의 말씀 다바르는 갇히려 하지 않는다. 오래 붙들려 있지 않는다. 우리의 영성적 과제는 그 말씀이 풀려날 길을 열어 우리가 그 말씀으로 충만해서 치유.경축.공동창조함이다. 다바르는 우리 안에 육화하기를 바라고 있다.” [4]–매튜 폭스
“나는 인과 관계에 의해서 연결된 과정 또는 사물의 총합으로서의 나 자신과 구별시켰던 이 세계를, ‘나 자신 속에서’ 나의 모든 사고 작용의 영원한 지평으로서 내가 쉼 없이 나의 자리를 자리매김하는 데 있어 관계하는 차원으로서 재발견한다. 진정한 ‘코기토’는 주관의 존재를, 그가 가지고 있는 존재한다는 사고에 의해서 규정하지 않으며, 세계의 확실성을 세계에 대한 사고의 확실성으로 바꾸지도 않고 필경 세계 자체를 의미 세계로 대체하지도 않는다. 반대로, 그것은 나의 사고 자체를 파기할 수 없는 사실로서 인식하고 나를 ‘세계-에로-존재’로 발견하면서 모든 종류의 관념론을 제거한다.” [5] –메를로 퐁티
창세기 1장은 하나님의 창조사역이 감각적 지각의 세계로 시작되었음을 말해준다. 즉, ‘빛이 있으라’는 하나님의 ‘소리’와 동시에 ‘빛’이 생김으로 말미암아 ‘시지각의 세계’가 비로서 창조된다. 이는 창세기 기자의 비유적 표현으로, 하나님을 마치 감각적 지각을 지닌 사람처럼 묘사함으로써 ‘가시적 세계’와 ‘불가시적 세계’의 경계를 허무는 적절한 표현이라 여겨진다. 불가시적 하나님이 창조의 순간에 가시적인 활동을 했다는 것은 이 창조가 ‘가시적인 세계’와 ‘비가시적인 세계’의 만남과 통합의 시작이었음을 암시해 준다. 이러한 가정은 분명 나의 상상력에 의존한 것이지만 ‘매튜 폭스’의 [원복]은 나의 생각에 많은 영감을 제공했다.
나는 시각 예술에 종사하는 사람으로서, 늘 시각적 미학의 신학적 진술들을 찾고자 노력해 왔다. 8세기의 동서방교회의 ‘성화상논쟁’과 15세기 종교개혁 이후 개신교의 ‘성화상논쟁’ 등을 거치면서 서구기독교(특히 개신교)는 시지각적 미학의 가능성을 교회에서 배제해 온 것이 사실이다. 그 결과 근.현대 미술사에서 기독교는 어떠한 영향도 미치지 못하고 여전히 미술계의 주변으로 밀려나 있는 실정이다. 나는 기독교가 미술가와 시각예술을 잃어버린 것은 교회의 책임이며 또한 신학의 책임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동방정교회에서는 기독교 미학이 중요하게 계승되어 왔으나 그것도 기독교라는 종교의 울타리를 넘어서 대중적 보편성을 갖기에는 아직 미흡한 것 같다. 이에 기독교가 시각 예술의 든든한 미학적 기반을 제공하고 있다는 것을 뒷받침할 ‘미학적 신학’의 필요가 요구되는 것이고, 나는 이 문제를 ‘창조’와 ‘육화’에서 논의해 보고자 한다.
오늘날 인류가 처해있는 생태계의 문제와 신자본주의 문제, 그리고 빈부의 양극화 문제가 아무리 심각하다 하더라도 이러한 미학적 문제를 등한시 할 수 없을 것이다. 존 캅의 ‘과정신학’, 떼이야르 드 샤르댕의 ‘진화신학’, 몰트만의 ‘희망신학’ 그리고 매튜 폭스의 ‘영성신학’에 이르기까지 하나의 사건을 전체적 관점에서 접근하고 있다는 점을 감안 한다면, 이제 21세기의 문제는 ‘하나이면서도 전체이고 전체이면서도 하나’인 문제가 되어 가는 것 같다. 이는 양자물리학에서 말하는 바 모든 것들은 서로 상호관계 속에 연결되어 있는 것과도 일치한다. 이점에서 매튜 폭스는 그의 저서 ‘원복’에서 창조영성과 미학을 절묘하게 결합하여 지금 인류가 당면한 문제를 변증법적인 방법으로 ‘긍정-부정-창조-변모’의 4단계의 길을 제시한다. 나는 여기서 그가 ‘부정의 길’에서 언급한 ‘어둠’에 대한 개념을 도입하고 몰트만의 공간과 ‘신체성’에 대한 이해와 메를로 퐁티의 ‘몸’의 개념을 가지고 나름대로의 생각을 적고자 한다. 여기서 ‘상상력’은 선결 요건이다. 왜냐하면 ‘창조’ 순간을 실제로 눈으로 본 사람은 없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이 글에서 많은 생각의 오류가 있을 것을 인정하고 이는 향후 다른 연구의 과제로 남긴다. 다만 바람이 있다면 나의 논의의 발전 가능성을 여기서 찾아보는 것이다.
1) 최초의 만남: 창조의 이미지
창세 전 소리와 빛이 없던 시대는 ‘제로 포인트(Zero Point)’의 시대였을 것이다. 가시적인 것과 비가시적인 것, 영과 육, 내재와 초월 등과 같은 이분법적인 것이 전혀 없던 완전히 ‘하나’ 어쩌면 ‘완전한 무(無)’의 세계였는지 모른다. 여기서 말하는 ‘무’는 ‘없음(nothing)’이 아닌 그냥 ‘비워진 무(無)’[6]이다. ‘소리’도 ‘빛’도 없는 세계, 즉 (지각적으로) ‘어둠’ 만이 가득했을 것이다. 이 ‘어둠’에 대해 새로운 접근이 필요한데, 매튜 폭스는 서구 기독교의 ‘어둠’에 대한 부정적인 견해를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는 어둠을 두려워하게 되었다. 빛이 없음, 소리가 없음, 이미지가 없음을 두려워하며 우리는 더 많은 이미지, 더 많은 빛, 더 많은 이익, 더 많은 영웅을 붙좇고 있다”[7] 그의 말은 가시적인 세계와 이미지에 사로잡혀서 그 이면을 생각치 못하는 사람들에 대한 비판이다. 그러나 매튜 폭스는 이 ‘어둠’을 영적인 깊은 묵상의 차원으로 옮겨 놓는다.
“경이롭게 작용하는 신비인 우리의 몸은 어둠으로 차 있다. 우리의 마음은 어둠 속에서 섬세하게 작용한다. 우리의 간, 우리의 장, 우리의 뇌, 축복 받은 우리의 몸의 아름답고 조화롭고 지속적으로 작용하는 모든 부분이 나날이 밤낮없이 완전히 어둠 속에서 일하고 있다. 놀랍지 아니한가? 묵상할 만한 이 어두운 신비, 우리 몸 내부의 이 아름다움을 생각하노라면 놀라운 일들이 어둠 속에서 발생시킬 수 있는 것에 대해 경이와 감사와 찬양이 우리를 채우지 않는가?”[8]
그는 “무릇 인격의 성장은 어둠 속에서 일어난다”[9]고 하면서 영성은 실상 내면 깊은 곳에서 나타남을 강조한다. 실제로 한 인간이 생성되는 모태도 ‘어둠’으로 가득 차 있다. 생명의 탄생에는 먼저 ‘어둠’이 존재하는 것이다. “우리는 어둠 속에서 만 아홉 달 동안 분명히 만족한 삶을 살았다. 자궁은 어두웠고 두렵지 않았다. 이것이 우리의 기원이다”[10] 또한 그는 계속해서 “땅 속의 씨앗은 자궁 속의 태아 못지않게 어둠 속에서 자란다”[11]고 말한다. 아울러 창세기 1장 2절은 ‘어둠’이 창세 전에 존재했음을 또한 우리에게 말해준다. 이는 빛이 없음으로 볼 수 없는 ‘비가시적 세상’, 즉 아무것도 볼 수 없다는 차원에서 ‘무’의 세계이며 새로운 창조 이전의 완전히 ‘비워진 무’이다. 이것은 과정신학에서 말하는 ‘혼돈’이 아니라 매튜 폭스가 말하는 ‘어머니 자궁 속과 같은 어둠’이다. 새벽이 밝아 오기 직전의 밤이 가장 어둡듯이 빛에 의해 ‘가시적인 세계’가 나타나기 전 “초본질적 어둠”이 있었던 것이다. 매튜 폭스는 하나님이 “초본질적 어둠”이라고 말하기도 한다.[12]
매튜 폭스가 말한 바 ‘어둠'에 대한 두려운 이미지들을 우리 속에서 몰아낸다면 우리는 ‘어둠’에 대한 많은 긍정적이고 영적인 영감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나의 상상력을 허락한다면, ‘빛과 어둠’에 대한 이미지는 ‘가시적인 것’과 ‘비가시적인 것’의 차원에서 다음과 같이 흥미로운 대비로 나타난다.
가시적인 |
비가시적인 |
빛 |
어둠 |
소리 |
침묵 |
형상 |
무형상 |
내재 |
초월 |
유한 |
무한 |
몸 또는 육 |
영 또는 정신 |
현재 |
과거와 미래 |
축제,놀이 |
명상 |
외면 |
내면 |
땅 |
우주/하늘 |
원래 초월의 세계는 빛이 필요 없을지 모른다. ‘보는 것’에 의존하지 않고 실재하기 때문이다. 창조 때 소리가 있고 빛이 있었음은 전적으로 지각의 세계를 위한 것이다. 이 피조 세계는 지각에 의존하여 존재하기 때문이다. 나는 ‘가시적인 세계’와 ‘비가시적인 세계’의 ‘첫 만남’이 창조 때 이루어졌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은 이러한 만남을 기획하신 걸까? 하나님은 지각에 의존하지도, 빛과 어둠에 의존하지도 않으시면서? 이는 ‘관계와 사귐’ 때문이다. 매튜 폭스의 말을 빌리자면 창조는 하나님이 인간과 생태계에 베푼 ‘잔치’[13]이다. 우리는 바로 이 하나님의 ‘잔치’에 초대 받은 손님인 것이다.[14]
그렇다면 이 첫 만남은 어떤 공간에서 이루어진 것일까? 다시 말해 몰트만이 말하는 하나님의 편재한 공간 속에 어떻게 가시적인 피조세계가 들어올 수 있었는가? 몰트만은 하나님이 편재한 ‘절대공간’을 인정하면서 ‘하나님의 침춤(Zimzum)’에 의한 ‘자기 비움’의 자리, 즉 ‘빈 공간’ 속에 ‘창조의 공간’을 만들었다고 설명한다.[15] 범신론의 위험을 피해가면서 초월적인 하나님의 편재를 설명하기 위하여 ‘창조의 공간’을 절대공간과 구별하여 그 속의 빈공간에 위치 시킨 몰트만의 공간이미지도 나름대로 설득력을 가진다. 여기서 ‘창조의 공간’의 한계는 바로 하나님 자신이 된다.
이런 차원에서 상상력을 더해보면, 이 ‘빈공간’은 ,매튜 폭스가 말한바 같이, 어머니의 자궁과 같이 어두운 공간임을 상상할 수 있다. 칠흑 같은 어둠 속, 생명이 잉태되기 전의 침묵의 세계. 바로 이 공간에 빛이 비춰지며 ‘창조의 공간’이 만들어진 것이다. 이것이 가시적인 세계와 비가시적인 세계의 만남의 시작이며, 시지각적 미학의 세계의 시작이다. 여기에 창세기 기자는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라는 미학적 평가를 가미하면서 ‘가시적인 세계’와 ‘비가시적인 세계’의 만남을 경축한다.
여기서 비록 나는 ‘만남’이란 표현을 사용했지만 이것이 ‘가시적인 것’과 ‘비가시적인 것’이 원래 떨어져 있는 이원론을 의미하는 것이 아님을 밝힌다. 하나님은 ‘분열’을 좋아하시지 않았던 것 같다. 창세기 1장의 창조기사 중 유일하게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다’는 표현이 빠진 부분을 상기해 보자. 이는 빛을 만드신 후 ‘낯과 밤을 나누신 사건’과 ‘윗물과 아랫 물을 나눈 사건’에서 그렇다. 하나님은 빛은 좋다고 하시고 빛과 어둠을 나눠 낯과 밤을 만드신 것에 대해서는 아무런 평이 없으셨다. 이 빛과 어둠의 분열로 말미암아 시간이 시작되고 이튿날에는 ‘윗물’과 ‘아랫물’이 다시 갈라진다. 성서는 이 두 가지 분열의 사건에 대하여 전혀 미학적인 평을 하지 않고 있다. 이는 하나님이 이분법적인 세계를 싫어하셨음을 암시하는 것이 아닐까? 가시적인 것과 비가시적인 것은 결코 따로 분리하여 생각할 수 없는 것이다. 창조는 만남이지 분열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빛과 어둠은 서로 섞일 수 없을 뿐 동시에 존재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지구의 한편은 태양의 빛을 받아 밝고 그 빛이 미치지 못하는 곳은 어둡지만 지구에는 이 두 가지가 동시에 존재한다. 아니 우주 전체가 그렇다. 빛이 미치는 곳은 밝고 그렇지 못한 곳은 어둡다. 이것은 빛의 물리적 성질, 즉 입자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영적으로 해석한다면, ‘가시적인 것’과 ‘비가시적인 것’의 공존, 즉 결코 분리될 수 없는 결합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나는 창조를 ‘비가시적인 세계’와 ‘가시적인 세계’의 만남으로 이해한다. 이는 ‘가시적인 세계’의 시작으로 비롯되며 시지각에 의존한 ‘창조의 세계’가 미학적 바탕 위에 이루어졌음을 시사한다. ‘가시적인 세계’의 미학적 의미는 ‘비가시적인 세계’의 영적인 의미와 상통한다. 매튜 폭스가 말하는 ‘다바르(창조력)’는 이 두 가지를 하나로 묶어 우리를 하나님의 계속 창조에 초대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공동창조자로 부름을 받은 것이다. 계속해서 매튜 폭스는 그의 책 ‘원복’에서 예술과 창조의 관계를 더욱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지만 나는 여기서 창조가 시지각에서 비롯되었다는 점과 이것이 시각예술에 미학적 근거를 제공할 수 있는 가능성이 된다는 것을 확인하는 차원에서 이 논의를 마쳐야겠다.
2. 두 번째 만남: 육화의 이미지
‘가시적인 것’과 ‘비가시적인 것’의 만남이 창조의 시작이었다면 매튜 폭스가 제2의 창조라 부른 그리스도의 ‘육화’ 또한 이러한 미학적 관점에서 접근하면 비슷한 결론에 다다른다. 이는 창조의 때 보다 더욱 적극적인 초월적 하나님의 내재적 ‘개입’이다. ‘비가시적인 하나님’이 ‘가시적인 인간’의 모습으로 나타났다는 것은 다양한 신학적 해석을 가능하게 한다. 그 중에서도 중요한 것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시각적으로 표현할 가능성을 열어준 것이라 하겠다. 이는 앞에서 언급한 창조가 ‘가시적인 세계’와 ‘비가시적인 세계’의 예술적, 미학적 표현의 가능성을 연 것과 같다. 이제는 ‘비가시적인’ 하나님이 ‘몸’을 가지시므로 표현되고 묘사될 수 있는 존재가 된 것이다. ‘육화’는 가시적이며 표현하고 묘사될 수 있는 가능성으로 받아들여진다. 이러한 ‘신체성’을 가진 하나님을 묘사하는 것은 우상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몸을 입은 하나님의 형상을 그리는 것이다. 이 두 경계의 구분은 매우 복잡하지만 동방정교회에서는 그려진 대상을 통해 그 이면의 원형에 이른다는 미학적입장을 견지하면서 그려진 대상을 숭배하는 것이 아님을 강조한다.[16] 그러나 여기서 다시 말하겠거니와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의 ‘신체성’이 인간에게는 시지각적인 표현의 가능성이라는 점이다.
어디 신학 뿐인가? 철학에서도 이러한 ‘육화’의 현상을 볼 수 있다. 형이상학적 철학 사유의 세계에 가시적인 미학적 즐거움을 선사한 메를로 퐁티의 ‘신체’에 대한 개념은 데카르트의 ‘의식’을 ‘육화’ 시키는데 성공한다. 서구 철학에서 외면되어 오고 또 객체의 자리에 머물던 신체를 ‘육화된 의식’ [17]과 ‘의식하는 신체’로 명명함으로써 신체를 ‘주체’의 지위에 올려 놓았다.[18] 퐁티에게서 몸과 주체, 즉 가시적인 몸과 비가시적인 주체는 하나로 통합된다. 이것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몸’을 가지신 것과 같이 비가시적인 의식이 ‘몸’을 가진 것은 결국 보이지 않는 것이 퐁티가 말하는 “지각”에 의해 “보고, 보여지는” 것이 가능해진 것이다. 그에게 있어서 의식은 몸이 없이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이고 또한 몸은 하이데거가 말한 “세계 내 존재”로서 세계를 필요로 한다. 또한 몸과 주체는 분리되는 것이 아니라 서로 지각의 장을 공유하면서 사회적인 의사 소통을 하는 상호 문화적인 관계이다.[19] 결국 가시적인 것과 비가시적인 것이 지각의 장에서 ‘표현’이라는 의사 소통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퐁티의 ‘신체성’에서도 ‘가시적인 것’과 ‘비가시적인 것’의 ‘만남’과 미학적 표현의 가능성을 똑 같이 발견하게 된다.
이러한 ‘만남’은 몰트만이 말한 ‘신체성’에서도 엿볼 수 있다. 몰트만은 몸과 영혼의 관계를 ‘순환적 형태’로 이해한다.[20] “상호간의 필요와 상호간의 결합으로 이루어지는 사귐의 관계”로 파악한다.[21] 몰트만에 있어서도 ‘가시적인 세계’와 ‘비가시적인 세계’는 ‘신체성’이라는 공통의 장에서 만나는 것이다. “몸이 ‘그의’ 영혼에게 정보를 주는 동시에 영혼이 ‘그의’ 몸에게 정보를 준다”.[22] 이러한 인간의 ‘신체성’은 몰트만이 말하는 바 ‘창조의 영’에 의해 다음과 같은 특징을 보인다.
사람의 ‘신체성’은 (우주적 영이며 유지와 발전케 하는)‘창조적인 영’에 의하여 침투되어 있고 생동하게 되었고 형성된 ‘신체성’이다: ‘영-몸’이다. 사람의 영혼, 그의 감정, 생각, 의도 등은 ‘창조적 영’에 의해 침투되어 있고 생동하게 되었고 형성된 ‘신체성’이다: 사람은 ‘영-혼’이다. 몸과 영혼이 그 속에서 하나가 되어 있는 사람의 형태는 창조적 영에 의하여 형성된 형태이다: 사람은 ‘영-형태’이다.[23]
이 ‘창조의 영’은 몸과 영혼과 그들의 형태가 “다른 생물들과의 자연적이고 사회적인 접촉과 교환 속에서만 생존”[24]할 수 있도록 돕는다. 몰트만의 ‘신체’의 개념은 인간의 ‘신체성’에 ‘창조의 영’의 개념을 넣어 더욱 복잡한 형식을 띠지만 영과 육의 이분법적인 분리는 지양된다. 더욱이 이 ‘신체성’을 ‘삼위일체 순환적 사귐’과 ‘생태문화적’ 차원에까지 연결시킴으로 초월적인 것과 내재적 세계와의 결합을 시도한다.
이와 같이 ‘가시적인 것’과 ‘비가시적인 것’은 ‘몸’이라는 장에서 이원론적 구별보다는 통합을 지향함을 알 수 있다. 이는 어느 한쪽 만을 가지고는 진정한 실체를 이해할 수 없는 가시적 사물이 빛과 그림자의 공존의 관계를 동시에 가지기 때문이다. ‘창조’ 때 보다 이 ‘육화’에 와서는 하나님과 인간의 만남의 장이 더욱 구체화 된 것이라 하겠다. 내재하시는 성령하나님, 임마누엘의 하나님과의 인간의 실재적 동거가 바로 이 ‘몸’을 통해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내쉬는 말 : 창조와 육화의 미학적 해석의 가능성]
그러므로 ‘가시적인 세계’가 빛으로 말미암아 시작됨으로 인간은 시지각에 의존한 미적 표현의 가능성을 부여 받은 것이다. 아울러 창조 속에 ‘가시적인 것’과 ‘비가시적인 것’이 동시에 공존함으로 미학적 표현은 깊은 ‘어둠’의 영역에 까지 확대될 수 있다. 이러한 ‘어둠’의 영역은, 매튜 폭스가 정의한 바, 심오한 영적인 세계이며 ‘가시적인 것’으로 묘사할 수 없는 보이지 않는 세계를 ‘느낌’으로 표현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준다. 예수 그리스도의 ‘육화’ 또한 ‘가시적인 것’과 ‘비가시적인 것’의 만남임으로 인간의 내외면에 대한 예술적 표현의 가능성을 무한히 열어준다. 우리는 피조계와 몸을 통해 ‘가시적인 세계’와 ‘비가시적인 세계’를 왕래 할 수 있게 되었다. 이 두 세계는 하나이며 단지 지각에 의해 ‘느낄’ 수 있느냐 없느냐의 차이만 이 둘 사이에 존재한다. 그러므로 이 둘을 이분법적으로 나누어 생각하는 것은 별 의미가 없다. 아울러 인간을 영과 육으로 구별해서 말하는 것 또한 무의미하다. 팔을 비틀면 영이 아프다 육이 아프다 할 사람이 있는가? 아픈 것은 육도 영도 아닌 바로 ‘나’인 것이다. 이러한 ‘나’에 대해 퐁티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나는 절대적 원천이며 나의 실존은 나의 이전의 행적에서, 나의 사회적.물리적 환경에서 나오지 않으며, 오히려 그것들을 향해 움직이고 그것들을 유지시킨다. 왜냐하면 내가 되찾기로 선택하는 그 전통 또는 나와의 거리가 무너진 그 지평을 나에 대해서 존재하게 만드는 것은 바로 나이기 때문이다.”[25]
퐁티가 말하는 이 ‘나’는 ‘세계-에로-존재’[26]로서 매우 역동적이고 운동성을 가진다. 이러한 것은 매튜 폭스가 정의하는 ‘다바르/창조력’[27]과도 어느 정도 관련성이 있는 듯하다. ‘다바르’도 계속적인 창조를 위해 움직이고 창조하며 변화시킨다. 이러한 역동적 운동성의 관점에서 ‘세계-에로-존재’에서 ‘에로’와 ‘다바르’는 일치한다. 비가시적인 것과 가시적인 것이 결합한 ‘나’는 ‘창조력’에 의하여 끊임없이 역동적으로 창조에 관여할 수 밖에 없다. 그러므로 ‘창조력’은 예술적 언어이며 예술 창조의 원동력이 되는 것이다. ‘세계-에로-존재’가 세계를 향하여 ‘초월하고 참여하며 위탁하는’[28] 운동성을 갖는 것과 같이 ‘다바르’도 세계 속에서 끊임없이 세계와 관계하며 창조의 과정을 수행한다.
그렇다면 여기서 다음과 같은 질문이 생긴다. 시각예술의 표현의 가능성은 어디까지일까? 동방정교회에서는 그리스도의 ‘육화’를 비가시적인 하나님을 가시적인 예술로 표현할 수 있는 가능성으로 이해한다.
“하나님께서 인간이 되셨다는 사실을 묵상할 때에 당신은 그분을 인간의 옷을 입은 분으로 묘사할 수 있다는 것이 명백한 사실이다. 불가시적인 존재가 육체를 입어 가시적인 존재가 될 때, 당신은 그 분의 형상을 그릴 수 있을 것이다…이전에는 형태나 몸을 가지고 있지 않은 하나님은 결코 인간의 언어로 묘사될 수 없었다. 그러나 지금, 하나님께서 육체를 입고 인간과 대화를 나누실 때, 나는 내가 보는 하나님의 형상을 그리는 것이다. 나는 물질을 숭배하는 것이 아니다. 나는 물질의 창조주, 곧 나를 위해 물질이 되시고, 물질 속에 거하시기로 작정하시며, 물질을 통해서 나의 구원을 이루신 그 분을 경배하는 것이다.”[29]–다마스커스의 존
그들은 성화상을 통해 그 이미지 너머의 비가시적인 원형에 이른다고 믿는다. 그림은 물감으로 이뤄진 물질이지만 그 이미지 이면에는 그림자와 같은 심연의 세계가 존재한다고 믿는다. 이는 아름다운 자연 풍경을 보면서 이를 만드신 창조주를 생각하는 것과 비슷한 원리라 하겠다. 바울이 로마서 1장 19,20절에서 언급한 내용은 ‘가시적인 것’과 ‘비가시적인 것’의 만남의 또 다른 표현이다. 이미 창세 때부터 피조세계에는 하나님의 ‘신성’이 깃 들어 있었고 이는 볼 만한 눈을 가진 사람이라면 다 알 수 있는 것을 바울은 말하고 있다. 우리는 ‘가시적인 세계’를 보면서 동시에 ‘비가시적인 세계’를 생각할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이 빛에 의해 시작된 ‘가시적 세계’의 의무이며 ‘육화’에 의해 드러난 하나님의 신성을 이해하는 길이다. 우리는 ‘가시적인 것’과 ‘비가시적인 것’을 동시에 ‘보고’ ‘느낄’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예술의 미학적 표현의 가능성이며 우리는 예술작품을 통해 ‘초월적’ 세계를 공감할 수 있다. 우리 인간은 지각에 의해서만 초월적 세계를 ‘느낄’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의 지각활동이 끝나는 ‘죽음’은 또 다른 ‘만남’일 지도 모른다. 즉 몸에 의존하여 존재하던 ‘가시적인 세계’와 ‘비가시적인 세계’가 더 이상 구별이 없어지는 완전한 ‘만남’ 말이다. 어쩌면 우리는 지각적 느낌이 없이도 두 세계를 깨닫는 그러한 존재가 사후에 될 지도 모른다. 바울은 ‘본다’는 시지각적 의미를 고린도 전서 13장에서는 ‘깨달음’의 의미로 말하고 있는 것 같다.
“지금은 우리가 거울 속에서 영상을 보듯이 희미하게 보지마는, 그 때에는 우리가 얼굴과 얼굴을 마주 볼 것입니다. 지금은 내가 부분밖에 알지 못하지마는, 그 때에는 하나님께서 나를 아신 것과 같이, 내가 온전히 알게 될 것입니다.” (표준새번역 고전 13장 12절)
‘가시적인 것’과 ‘비가시적인 것’의 경계가 없어지고 진정한 ‘깨달음’의 세계가 약속된 것이다. 그것이 아마도 우리의 죽음 이후, 또는 이 세상의 끝에 이뤄질 사건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때까지 연속되는 창조의 과정 속에서 ‘창조력’에 의한 창조의 역사는 멈추지 않을 것이다. 인간의 모든 창조 활동은 세상의 모든 분야에서 ‘가시적인 것’과 ‘비가시적인 것’의 경계를 넘나들며 이 지각에 의존한 세상을 궁극적인 예술작품으로 승화시킬 것이기 때문이다.
<참고서적>
매튜 폭스, ‘원복’ , 황종렬 역, 분도출판사, 2004, 경북 왜관
메를로 퐁티, ‘지각의 현상학’, 류의근 역, 문학과 지성사, 2002, 서울
위르겐 몰트만, ‘창조 안에 계신 하느님’, 김균진 역, 한국신학연구소, 2004, 서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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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중권, ‘미학 오디세이 1,2,3’, 휴머니스트, 2005, 서울
김승태, ‘메튜 폭스의 창조영성에 관한 연구’, 석사학위논문, 성공회대학교 신학전문대학원,2005
[1] 나는 ‘만남’을 하나의 객체가 다른 객체를 어떤 특정한 장에서 만나는 이분법적인 개념으로 정의하지 않는다. ‘만남’은 각각의 다른 특징을 설명하기 위해 임의상 정의한 표현이다. 원래 하나인 존재의 양면적인 특징이 동시에 공존하는 현상을 나는 ‘만남’이라 부른다. 그러므로 이 ‘만남’은 ‘가시적인 세계’와 ‘비가시적인 세계’가 원초적으로 하나임을 전제하는 것이다. 다만 이 ‘만남’이 지각적인 ‘느낌’에 의존하며 인과적인 방법보다는 ‘서술’될 수 있는 한에서 만 이 ‘만남’은 의미가 있다. 그러나 이 ‘만남’이란 말은 추후 더욱 적합한 표현이 있다면 얼마든지 대체될 수 있다. 현재로서는 나의 개념을 설명하기에 ‘만남’이란 표현을 임시적으로 사용하는 것이다. 나의 개념이 더욱 구체화되면 더욱 적절한 표현을 찾을 수 있으리라.
[2] 매튜 폭스, ‘원복’ , 황종렬 역, 분도출판사, 2004, 경북 왜관, p.142
[3] Ibid., p.142
[4] Ibid., p.39
[5] 메를로 퐁티, ‘지각의 현상학’, 류의근 역, 문학과 지성사, 2002, 서울, p.5
[6] 나는 여기서 매튜 폭스가 말한 ‘무’의 개념을 받아들인다. 이는 ‘비움’, ‘비워짐’, ‘떨쳐버림’과 연관되는 무이다. 폭스는 이러한 ‘무’없이는 ‘창조’나 ‘새창조’는 없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무’는 없음의 무가 아니라 ‘비워짐’의 무이다.(이하 매튜 폭스, ‘원복’ , 황종렬 역, 분도출판사, 2004, 경북 왜관, p.158~167 참조할 것)
[7] 매튜 폭스, ‘원복’ , 황종렬 역, 분도출판사, 2004, 경북 왜관, p.143
[8] Ibid., p.p.,143~144
[9] Ibid., p.143
[10] Ibid., p.144
[11] Ibid., p.145
[12] Ibid., p.146
[13] Ibid., p.120
[14] Ibid., pp.115~125
[15] 위르겐 몰트만, ‘창조 안에 계신 하느님’, 김균진 역, 한국신학연구소, 2004, 서울, p.p233~235
[16] 대니얼 B. 클린데닌, ‘동방 정교회 신학’, 주승민 역, 은성, 1997, 서울, p.p.48~96 참조
[17] 리차드 커니, ‘현대유럽철학의 흐름’, 임헌규 외, 한울, 1992, 서울, p.90
[18] 메를로 퐁티, ‘지각의 현상학’, 류의근 역, 문학과 지성사, 2002, 서울, p.p.13~33, 696~708 참조
[19] 한국현상학회 편, ‘몸의 현상학’, 철학과 현실사, 2000, 서울, p.134
[20] 위르겐 몰트만, ‘창조 안에 계신 하느님’, 김균진 역, 한국신학연구소, 2004, 서울, p.p370~371
[21] Ibid., p.371
[22] Ibid., p.373
[23] Ibid., p.377~378
[24] Ibid., p.378
[25] 메를로 퐁티, ‘지각의 현상학’, 류의근 역, 문학과 지성사, 2002, 서울, p.p.15~16
[26] 세계-에로-존재는 세계에 속해 있으면서 그러나 세계에 매몰되지 않고 세계를 소유하고자 세계로 향해 나아가는 인간의 실존적 초월 운동을 가리키는 메를로 퐁티 특유의 전문용어이다.(이하, 메를로 퐁티의 ‘지각의 현상학’, 류의근 역, 문학과 지성사, 2002, 서울, p.p.691~692 참조할 것)
[27] 매튜 폭스, ‘원복’ , 황종렬 역, 분도출판사, 2004, 경북 왜관, p.p,34~41
[28] 메를로 퐁티의 ‘지각의 현상학’, 류의근 역, 문학과 지성사, 2002, 서울, p.p.691
[29] John of Damascus, Divine Images, 1.8, 16;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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